소설리스트

남자주인공의 여자사람친구입니다-77화 (77/92)

?77. 도망갈 수 있을 줄 알았어?

“실례지만.”

클레어는 가게 안쪽에서 드레스 착용을 도와주는 직원들에게 조심스레 중요한 사항을 전달했다.

“최근에 몸이 좋지 않아서, 지난번에 치수를 쟀을 때보다 살이 많이 빠졌을 거예요.”

클레어는 몹시 미안한 투였다. 드레스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 주었을 이들의 노고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편찮으셨군요. 큰 예식을 앞두고는 그런 일이 자주 있답니다. 긴장되시죠?”

클레어는 고개를 저었다. 특별히 예식에 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싫을 뿐이지.

“갑자기 기온이 떨어진 탓이에요. 조금 더 따듯하게 입어야 했는데.”

“지금은요? 지금은 괜찮으세요?”

“보다시피 건강해요. 대신 드레스가 조금 헐거울 수 있어서요.”

“지금 체형이 좋으시면, 아직 크기를 조절해 볼 수 있어요.”

직원의 말에 클레어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비쩍 마른 모습을 하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게다가 앞으로 시험과 오답리포트 그리고 졸업이라는 커다란 산을 넘어야 한다.

산을 넘는 데 필요한 것은 체력이고, 좋은 체력을 위해서는 건강한 몸이 필요했다.

게다가 결혼 후에는 본격적으로 뮐러 가문의 사업을 배워야 하고.

“체형은 예전으로 돌려놓을 거예요. 오늘은 다소 드레스가 헐거울지도 모른다고 말해두고 싶었어요.”

게다가 딘 크리시스가 말하길 ‘이제부터 하루에 네 끼를 먹을 각오를 하는 게 좋을걸.’이라고 했었다.

그렇게 말하는 딘 역시도 감기 때문에 조금 눈가가 퀭했다.

돌아가면 두 사람 모두 관리부인의 영양식을 남김없이 먹을 것이다.

딘이 말한 것처럼 정말로 네 끼를 먹으면 푸둥푸둥 살이 찌려나.

그녀는 동글동글해진 딘과 클레어의 얼굴을 상상했다.

“쿡쿡.”

어린 시절을 연상시켜서 아주 좋았다. 참을 수 없이 귀여웠다.

“좋은 일이 있으신가 봐요.”

직원이 묻기에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맞춰볼까요? 사실 웨딩드레스를 입으러 온 신부님들께서 하실 생각이란 단 하나뿐이거든요.”

직원은 클레어의 코르셋을 적당히 조이며 작게 웃는 소리를 냈다.

“신랑님께서 뭔가 멋진 말씀을 해 주신 게 틀림없어요. 그렇죠?”

“어, 음…….”

클레어는 잠시 고민했다. 어지간하면 정답이라고 말하며 넘어가고 싶었는데, 너무나도 오답이었다.

일단 생각의 대상이 ‘신랑님’이 아니었다.

게다가 ‘멋진 말씀’도 아니었다. 딘 크리시스와는 그저 ‘함께 많이 먹자’는 이야기를 한 것뿐이니까.

“설마 틀렸나요?!”

“잘 모르겠어요. 그게 멋진 말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요.”

직원분이 다시 웃었다. 뭔가 클레어의 대답이 귀엽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빤히 보였다.

“분명히 멋진 말이었을걸요.”

이제 다른 이가 드레스를 가져와 하얀 벽에 걸어 두었다.

클레어가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기에, 잠시 모두가 침묵을 소중하게 지켜주었다.

아마 클레어가 깊은 감동을 안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사실은 달랐다.

그저 실감이 짙어져서 서글퍼진 것뿐이다.

저 새하얀 드레스는 결혼이란 단어에서 태어난 구체적인 형태이니까.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직원들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아주 행복한 얼굴을 하고 계셨으니까요.”

갑작스레 들려주는 이야기에 클레어는 고개를 돌려 직원을 바라보았다.

“……네?”

“조금 전에 웃으셨을 때 말이에요.”

그 직원은 관리 부인과 비슷한 연령대로 보였는데, 무척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그렇게 행복한 얼굴을 하는 건 멋진 순간을 떠올릴 때뿐이죠.”

그녀는 클레어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드레스 자락을 넓게 펼쳐 주었다.

“그 순간은 우리들의 생각과는 달리 꽤 단순하거나 사소해서, 막상 겪을 때는 그다지 대단치 않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그녀는 이제 옷자락에 달린 장식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떠올릴 때의 표정을 보면 알죠. 누구라도 알 걸요.”

클레어는 커다란 거울 너머로 보이는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누구라도 알 거라는 그녀의 말과 달리 클레어의 얼굴에는 어떤 해답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아가씨는 그분을 아주 좋아하시는 게 틀림없어요.”

“……설마요.”

그야 물론 좋아하기는 한다. 하지만, ‘아주 많이’라는 고집스러운 말이 붙을 정도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두고 보세요. 시간이 지나면 제 말이 옳다는 걸 깨닫게 될 테니까요.”

그런 건 깨닫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뭘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그러니 클레어는 그냥 웃고 말았다.

다른 직원이 다가와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간단하게 틀어 올려 주었다.

가짜 보석으로 만든 임시 장식으로 머리카락을 고정한 후, 클레어는 다시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예상한 대로 드레스는 조금 헐거웠다.

꼭 그녀의 옷이 아닌 것만 같아 보였고, 그래서 조금은……기뻤다.

“혹시 예식까지 체형이 돌아오지 못할 것 같으면 꼭 미리 말씀해 주세요.”

클레어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체형은 곧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조금 기이하지만, 딘 크리시스가 그렇게 만들어 줄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되면. 이 겨울의 어느 날.

클레어는 완벽하게 몸에 맞는 드레스를 입게 될 것이다.

“아주 예쁘네요. 지금도 예쁘시지만, 당일에는 더욱 멋질 거예요.”

클레어는 조금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생각해 보면 딱히 다른 말을 할 것도 없었는데, 무얼 그리 고민했는지 모르겠다.

그때, 다른 이가 다가와 직원의 귓가에 무어라고 작게 속삭였다.

“마침 딱 맞추어 오셨네요.”

그녀는 친절한 미소와 함께 클레어를 돌아보았다.

“신랑님께서 도착하셨대요.”

“……여, 여기에요?”

“예. 가끔 오시는 분들이 계세요. 특히 요즘 젊으신 분들은 거의 그렇죠.”

클레어가 어째서냐 묻자, 그 자리에 있던 직원들이 모두 웃었다.

“그야 당연히 신부님이 보고 싶으시니까 오시는 거죠.”

“기대가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말이죠.”

저들끼리는 아주 신이 난 모양이다. 하지만 클레어는 그 반응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저어, 웨딩드레스는 주변 사람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는 줄 알았는데요…….”

그건 이 나라의 신성한 전통 중 하나였다. 예식 전까지 완벽하게 드레스를 숨기는 것 말이다.

“아이참, 그런 건 모두 구시대의 유물이라고요. 최근에는 미리 드레스를 보여 주고, 어울리는 선물을 받는 분들도 아주 많은걸요.”

“구, 구시대의 유물…….”

그녀의 친구인 루이스 스위니가 들었다면 아마 기절했을 말이다.

어쨌든, 그녀의 결혼할 사람도 이곳에 온 모양이다. 선물을 사 주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신랑님을 들어오게 해도 좋을까요?”

“그렇게 하세요.”

클레어에게는 선택권이 없는 질문이니,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한심한 남자는 제 뜻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으면, 시끄럽게 난동을 피울 것이 분명했다.

클레어는 친절한 직원들이 진상 손님을 응대하느라 좋지 못한 기억을 갖게 하고 싶지 않았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 짧은 순간에 클레어는 잠시 망상이 들었다.

지금 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그녀의 약혼자가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가 아니라.

“…….”

그녀는 장갑을 끼운 손끝으로 잠시 제 입술을 덧그렸다. 언젠가의 키스를 그리는 것처럼.

현실도피는 다행히 길어지지 않았다. 길어질 틈도 갖지 못했다.

열린 문 사이로 반갑지 못한 얼굴이 보였으니까.

클레어가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그녀의 약혼자는 잠시 팔짱을 끼우고는 클레어를 관찰했다.

“옷이 맞지 않는데.”

그는 바로 헐거워진 옷을 지적했다.

클레어도 딱히 칭찬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라서, 차분하게 설명을 해주려고 했다.

당신은 몰랐겠지만, 꽤 아팠다고. 그래서 이제 다시 살을 찌워서 평소 체형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체형은 지금이 딱 좋아 보이는데. 마침 잘되었네. 드레스 크기를 줄일 건가?”

“제게는 딱 좋은 체형이 아니라서 살을 찌울 생각이었는데요. 건강한 모습으로요.”

“지금도 건강해 보여. 줄여.”

클레어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어쨌든 지금은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이 체형을 유지하려면 하루에 식사를 한 번만 하고, 채소뿐인 간식을 한 번 먹으며 살아야 해서요.”

“거기서 뭘 더 먹겠다는 거지?”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관리부인의 영양식은 훌륭하거든요.”

클레어는 슬슬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어떤 체형으로 살지는 제가 정할 문제니까요.”

“그걸 안는 건 나잖아?”

멍청한 말에는 대답할 말도 없었다.

클레어는 제가 최근에 너무나도 이성적인 사람들과 교류해 왔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그러니까 줄여. 또 나를 멍청하게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그의 눈빛이 다소 어둡고 흉흉해졌다.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던 직원들이 결국에는 자리를 비켜 주었다.

클레어는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는데, 저 남자가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것은 그 날의 복수를 하기 위함이라는 거다.

약혼자 앞에서 다른 남자와 그것도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고 이야기했던 딘 크리시스와 키스한 것 말이다.

신경 쓰긴 했던 모양이네.

본인이 저지른 일은 생각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어쨌든 그를 열 받게 했다는 것은 좋았다. 이 남자의 마음이 흉하게 일그러지고 망가질수록 클레어는 기쁠 터다.

“웃어?”

“그야, 우습죠.”

클레어는 제 허리에 팔을 올리고는 삐딱하게 섰다.

“그 정도 일로 멍청한 취급을 받았다고 생각할 줄은 몰랐거든요. 생각보다 섬세한 면이 있었네요. 당신.”

비웃는 소리에 남자는 단숨에 거리를 좁혀왔다. 체격의 차이에도 클레어는 당당한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이 남자는 무섭지 않았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시간. 그 거대함에 비하면 이 사소한 인간은 그저 자그맣기만 했다.

“어디까지 했지?”

클레어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 저 질문의 내용을 그녀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가 싶어서 말이다. 아주 값싼 말로 들렸는데.

“어디까지 했냐고!”

맙소사, 이 말투를 보니 클레어가 제대로 이해한 모양이다.

그녀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잠시 제 이마를 짚었다.

“그러는 당신은요? 아……. 미안해요. 몇 명이라고 물어봐야 하나요?”

“말 돌리지 마. 그 어린 새끼랑 무슨 짓을 했는지 묻고 있는 거니까.”

미친 새끼.

클레어는 저도 모르게 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그만하죠.”

그리고 대화를 끊었다. 어차피 드레스는 확인했으니, 이제 루이스의 장갑을 찾아서 서둘러 아카데미로 가고 싶었다.

홍차에 우유도 설탕도 듬뿍 넣어서 한 번에 들이키고, 단 크림까지 입안에 통째로 밀어 넣으면 이 더러운 기분이 사그라들 거다.

테이블 너머에는 딘 크리시스가 또 귀여운 소릴 하면서 웃고 있을 테고.

“아카데미로 돌아갈게요.”

“묻는 말에 대답해!”

남자가 클레어의 턱을 붙잡아 올렸다.

“나가주시겠어요? 드레스를 갈아입어야 하거든요.”

“클레어 이리스.”

“…….”

“네 오라비들이 널 내게 팔았다는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좋아.”

남자의 손이 클레어의 얼굴과 귓가를 지나며, 길고 가느다란 목선에 이르렀다.

소름이 돋을 만큼 기분 나쁜 감각이 그녀를 휘어 감았다.

“그들은 네 모든 걸 판 거야. 가치관, 능력 그리고……네 몸에 이르기까지.”

그 손이 둥근 어깨에 닿았다. 타인의 살갗이 닿는 느낌이 이리도 불쾌했던가.

참을 수 없었던 클레어는 결국 한 걸음 뒤로 물러서 그의 손길을 피했다.

지고 싶지 않았으니, 억지로 미소를 쥐어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가 내어 드리기로 한 것은 모두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죠.”

남자가 다시 팔을 뻗어 왔지만, 그녀는 몸을 비켜 피하며 소리 질렀다.

“우리가 서로에게 가진 권리는 그게 다라고요!”

그러나 결국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순간적인 고통에 클레어가 헉 소리를 질렀으나,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흡족한 듯 웃고는 그녀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당장 놔요! 대체 당신……지금!”

“이상한 소문이 나는 게 싫으면 조용히 따라오는 편이 좋을 거야. 계약서에 적혀 있잖아. ‘결혼식 전까지 클레어 이리스의 사회적 가치를 손상하지 않는다.’ 라는 조항 말이야.”

미치겠네. 손상하고 있는 건 당신이잖아!

클레어가 뭐라고 반발할 새도 없이 그녀는 남자가 이끄는 대로 끌려 나오게 되었다.

직원들은 그의 흉흉한 눈빛이 두려워 감히 나서서 그를 말리지도 못했다.

나중에 ‘꼭 돌려 보내주세요. 아직 마무리되지 못한 부분이…….’라고 누군가 작게 말했지만, 아마 거의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클레어는 반쯤 던져지는 것 같은 모습으로 그의 마차에 오르게 되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녀가 소리를 질렀고, 남자는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무슨 짓이긴. 우리 관계를 공식적으로 마무리해 보자고. 좋아하잖아? 서류 작업 하는 거.”

“미쳤어요? 결혼 서류에 사인 하는 건 예식 후에요!”

그녀가 윽박지르자, 그가 클레어의 손목을 붙잡아 마차 벽에 처박았다. 쿵, 소리가 좁은 마차 안을 울렸다.

“어쩔 수 없잖아.”

그는 코끝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불쾌한 숨을 뱉었다.

“네가 주제도 모르고 짜증 나게 굴고 있으니.”

“…….”

“종이 짝에 그 인생을 묶어두면 얌전해지겠지.”

클레어는 입술을 깨물었다.

종이에 인생이 묶였다는 말……. 반발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도망갈 수 있을 줄 알았어?”

그가 음산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 말에 새삼스레 절망하게 되는 것은 아마, 그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일 거다.

그녀의 마음 어딘가에서는, 어느 구석에서는.

희망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도 꽤 굳건하게.

어쩌면 도망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행복해 질지도 모른다고.

“나……도망, 안 가요.”

클레어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리 말했다.

“나는 당신하고 결혼해요. 뮐러 백작가의 사람이 될 테니까.”

길 없는 희망이 고이면 마음이 썩어들어갈 거다. 그러니 그녀는 제 희망을 부지런히 덜어냈다.

“날 보내줘요.”

그리고 간절한 시선으로 약혼자를 바라보았다.

비로소 그가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싫은데?”

* * *

클레어는 아무도 없는 방에 앉아있었다. 어느새 시간은 점점 밤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어쩌지, 미리 연락을 받으신 스위니 가문에서 기다릴 텐데.

게다가 아카데미에서는 딘도 걱정하고 있을 테고.

클레어는 양쪽 팔로 제 무릎을 감쌌다.

“윽…….”

검붉게 부어오른 팔이 아팠다. 남자가 강제로 붙잡아 끌며 이렇게 된 것이다.

“미친 새끼…….”

그녀는 몇 번이나 생각했던 말을 이제야 입으로 옮겼다.

아카데미에서 배운 말인데, 입으로 담아 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진짜 미친 새끼.”

하지만 지금은 이 단어 이상으로 그를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으니, 그녀는 기꺼이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그는 강제로 끌고 온 클레어에게 결혼 서류를 내밀었다.

당장 사인하라는 말과 함께.

클레어가 거기에 사인하고, 그가 그것을 황실에 제출하면 그녀의 결혼은 황제의 허락 아래 완벽히 성립하게 된다.

그런 끔찍한 일을 몇 달이나 당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제게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겨울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했으니까.

클레어가 완강하게 버티자, 그는 그녀를 이렇게 가두어 둔 것이다.

나, 참 나약하네.

클레어는 자신이 무척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카데미에서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하고, 여러 행사를 이끌어가기도 했다.

물론 때때로 어려운 일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웃었다.

그 멋있는 클레어 이리스는……아카데미 안에서만 존재하는 걸까.

이렇게 밖으로 나오니 그냥 종이 짝에 매인 힘 없는 인간일 뿐이었다.

……정말 그의 말대로다.

그러고 보니 어째서 반항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사인을 하던 몇 달 뒤에 하든, 수십 년이 흐른 뒤에 보면 차이도 없을 텐데. 아니 같을 텐데.

그냥 사인 해 주고, 아카데미로 돌아갔다면 좋았을걸.

차라리 그랬다면 지금쯤.

……지금쯤 뭐?

딘 크리시스와 사이좋게 차를 마시고 있었을 거라고?

‘있지, 오늘 결혼 서류에 사인하고 왔어. 글쎄, 강제로 끌고 가서 시키지 뭐야?’

이렇게 말하면서? 미쳤니, 클레어 이리스?

그녀는 이미 엉망이 된 드레스를 꾸욱 쥐었다.

클레어 이리스는 나약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버티지 않았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락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린 것은 그때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