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손을 넣어도 되나요?
“무슨 소리야.”
클레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라니, 그런 것은 하나도 흘리지 않았다.
“……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딘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런 표정 지으면 꼭 나중에 혼자 울잖아.”
“재미있는 착각이네, 그건.”
클레어는 몸을 돌려 먼저 걷기 시작했다. 다소 걸음이 빨라지고 만 것은 아마 당황했기 때문일 것이다.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그럴 때마다 능숙하게 참고, 숨겨왔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그녀의 표정을 지적한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얼굴 어딘가에서 그 심경이 비친 것이다. 딘은 그것을 섬세하게 알아차려 주었고.
그것은 단순히 함께 지낸 기간이 길다고 하여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시간에 관심이 더해지고서야 그리될 수 있을 것이다.
클레어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어린 D는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추어 선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 와.”
클레어는 손을 내밀었다.
어쩔 수 없는 미소도 흘러나왔다. 아주 혼란스러운 미소였지만, 지금은 이렇게나마 웃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다시 겨울바람이 다가온다.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그것이 얽혀들었다. 끊임없이 제 계절을 주장하는 것처럼.
그러나 여름같이 뜨거운 손이 모든 겨울을 녹여주었다.
이제 다시 앞서 걷는 것은 딘이었다.
“……그러지 마.”
그가 옅게 흘려보낸 말은 아마 조금 전에 클레어가 보여 주었던 혼란스러운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행동하는지 빤히 보이니까, 그런 짓은 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클레어는 예쁘게 이어진 두 사람의 손을 바라보며,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 마. 상처받잖아.”
“안 할게.”
그러나 상처라는 말에는 무어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하지 않겠노라는 말이 나왔다.
“나 말고, 너 말이야. 이 답답아.”
“……나?”
클레어는 딘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머플러로 살짝 가려진 그의 뺨이 조금 붉었다.
추워서 그런가 싶었는데, 표정을 보면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다.
……아. 설마 손을 잡아서 그렇게 된 건가? 하지만 지금까지 손은 몇 번이나 잡았는데.
“진짜, 본인 일에는 둔해 빠져서.”
그는 약간 씩씩거리는 투로 타박하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조금 전보다 조금 속도가 느려져서 자연스레 두 사람은 나란히 걷게 되었다.
“나 약 먹을 테니까, 그 대신 이번 주말에.”
“아직도 그 소리야? 그러니까, 난 그 날에는 수도에…….”
“수도에서 돌아오면 나랑 만나.”
“…….”
“그냥, 그렇게 해.”
“딘.”
“무슨 소리든 전부 들어줄 테니까.”
“전부 듣겠다고?”
그는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수도에서 돌아온 클레어가 어떤 말을 하게 될지 생각했다.
“그래. 드레스 장식이 거지 같다는 불평이나.”
“……뭐?”
“구두가 아파서 발을 씹혀 먹히는 줄 알았다는 이야기나.”
“내가 평소에 드레스를 고르면 그런 식으로 말했었어?”
“마담 에밀리의 가게에서 또 되먹지 못한 모자를 써봤다거나. 뭐 그런 것들.”
농담 같은 이야기지만, 그는 아주 진지한 얼굴을 하고는 클레어를 돌아보았다.
“내가 다 들어 줄 테니까.”
“…….”
“전부 말해 줘.”
“그런 말을 어떻게 네게…….”
“나는 듣고 싶은데.”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는 의료동의 입구를 지났다. 썰렁한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감기의 유행이 끝난 덕분이다.
두 사람은 마법사 선생님께서 계시는 의료실 앞에 나란히 섰다.
“……알았어.”
클레어는 이제야 한숨 섞인 대답을 건넸다.
“너와 만날게. 내가 수도에서 돌아오면 말이야.”
두 사람이 의료실의 문을 열자, 마법사 선생님께서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증상을 이야기하자, 딘에게도 그 고약한 약이 어김없이 주어졌다.
그는 호기롭게 뚜껑을 열었으나 곧 오만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 얼굴이 어째 ‘너 만나려고 마시는 거야. 약속 깨면 가만 안 둔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클레어는 쿡쿡 웃고 말았다.
* * *
주말은 금방 찾아왔다. 루이스는 미지근해진 물주머니를 끌어안은 채 눈을 떴다.
두꺼운 이불에 따듯한 물주머니를 추가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의료실에 다녀온 클레어가 ‘마법사 선생님께서, 주말은 더 추워질 거라고 말씀하셨어.’라고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분의 날씨예보는 결코 틀리는 일이 없었고, 오늘도 그랬다.
루이스는 물주머니에 든 물을 버리고, 두꺼운 옷과 머플러로 단단히 무장했다.
다만 여전히 장갑은 없었다. 대신 수도에 간 클레어가 스위니 온실에 들러서 루이스의 털장갑을 가져다주기로 했으니, 주말이 지나면 루이스도 따듯한 장갑을 낄 수 있게 될 거다.
‘클레어. 새벽에 일찍 출발한다고 했었지.’
결혼식에 입을 드레스를 확인할 거라고, 무척 밝은 얼굴로 말했었다.
오후에는 아카데미로 돌아와서 루이스에게 장갑을 전해주겠다고도 했고.
‘그나저나 정말로 결혼하는구나.’
그런 남자랑 말이다.
루이스는 조금 우울한 얼굴로 기숙사를 나섰다.
하지만 깜짝 놀랄 만큼 차가운 바깥 공기 때문에 그 우울함까지 전부 얼어붙고 말았다.
춥다. 공기가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런 날에는 이불 속에서 나가지 말아야 하는데.
루이스는 울상을 지으며 종종걸음을 쳤다. 도서관으로 향하는 걸음이 점점 급해졌다.
지난번 회의에서 이안이 ‘이번 주말에는 도서관을 도와야 한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스텔라에게 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학장님이 중고 도서를 잔뜩 매입하셔서, 그걸 검수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기껏 사들인 책을 어째서 검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도서관 근처에 도착하니, 멀리 이안이 보였다.
루이스는 잠시 그대로 멈추어섰다. 추운 건 추운 거고 이건 잠시 놀라야 할 것 같다.
저 바보 같은 남자가 오늘도 코트 하나만 달랑 입고, 저 추운 곳에 서 있었다.
루이스를 빤히 바라보는 것을 보면 언제 오는지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옷이 얇으면 좀 따듯한 데서 기다리던가. 아니면 머플러라도 좀 두르던가.
정말이지 저러다가 심한 감기라도 훅 걸리면 어쩌려고 저렇게 다닌담.
루이스가 울상을 지은 채 서 있기만 하자, 그가 긴 코트를 펄럭이며 다가왔다.
“왜 갑자기 멈춰서는 거지? 뭘 잊기라도 했나?”
그리 말하는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왔다. 저건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는 증거다.
“뭘 잊은 건 제가 아니라 회장님이에요. 춥지도 않으세요?”
“물론 추워. 겨울이니까.”
“그렇다면 조금 더 따뜻하게 입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루이스는 오늘도 단추조차 여미지 않은 그의 잔혹한 차림을 지적했다.
“따뜻하게 입었어.”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입은 코트를 보라는 듯이.
설마 저 옷에는 정말로 마법 기능이 숨어 있는 걸까?
“머플러나 털장갑은 없으세요?”
“음……, 굳이 그런걸?”
“하지만 춥잖아요.”
“이런 날씨라면 머플러를 두르든 장갑을 끼든 춥겠지. 그렇지?”
그는 단단하게 무장한 루이스를 바라보며 확인하듯 물었다.
“그야 그렇지만요.”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간편하게 입는 쪽이 효율적이지.”
“그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효율이 떨어진다고요.”
“괜찮아. 나는 감기에 걸리지 않으니까. 영원히.”
“질병은 신분을 차별하지 않아요.”
“실제로 지방 귀족들만 걸리는 정서적 질병도 있어. 수도에 대한 열망과 실망으로 인한 것이라고 하더군.”
“……진짜예요?”
“도서관에서 180번대 서가에 가봐. 정리된 책이 있을 거야. 그보다 그대.”
그는 조금 흘러내린 루이스의 머플러를 바로 해주었다.
“어쨌든 그대는 단단히 여며야지. 감기에 걸리면 안 되니까.”
코끝까지 포근한 머플러로 완벽하게 무장시켜 준 후에, 그는 새삼 겨울의 루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루이스가 이렇게 둘둘 싸맨 모습을 좋아했다.
언뜻 드러난 얼굴이나,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작은 귀가 빨갛게 변한 것도 귀엽고, 겨울바람의 시림에 살짝 찌푸려진 눈매도 좋았다.
“그대는 정말 계절에 충실한 사람이야.”
“저요?”
“그래. 더위에도 추위에도 언제나 민감하지.”
“민감……한 정도는 아니에요.”
그는 웃으면서 다가와 루이스의 양쪽 귀를 손으로 감싸며 조심스레 만지작거렸다.
“귀가 이렇게 뻣뻣하게 얼었는데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회장님의 손도 뻣뻣하게 얼었어요.”
“음, 그런가.”
그는 두 손을 떼어 잠시 바라보다가, 결국에는 루이스의 머리를 양쪽 팔로 푹 끌어안았다.
“이렇게 하는 편이 좋다는 거로군.”
“그. 그렇게 말 한 적 없어요!”
루이스는 그의 옷에 바짝 붙어 있던 얼굴을 가까스로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얼굴이 너무 가깝다. 물론 지금은 바짝 붙어버린 몸이 더 신경 쓰였지만.
“누, 누가 이상하게 보면 어떻게 해요.”
“걱정하지 마. 늘 말하지만, 학생회는 아카데미의 소문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으니까.”
그는 되려 루이스를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고 보니.’
루이스는 얼마 전에 클레어가 해 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 하지만 루이스는 검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회장님과 꽤 친하잖아? 옷 속에 손을 넣을 수 있을 정도는 되지?」
일단 품속은 따뜻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안이 안아주면 늘 따뜻했으니, 이걸로 검증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역시 코트 안쪽으로 손을 넣어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작은 의문이 들었다.
‘이런 자세에서 옷 속에 손을……넣어도 되나요?’
물론 코트 안쪽으로 슬쩍 넣어보는 것뿐이지만. 묘하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루이스는 괜스레 주먹을 꽈악 쥐었다. 꽝꽝 얼어있던 손이 어쩐지 조금 녹아 있었다.
“손도 시린가?”
“아, 아니에요!”
루이스는 얼른 제 손을 뒤로 감추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목덜미를 감싸주던 팔이 그녀를 쉬이 놓아주었다.
“……이. 이젠 따뜻해졌어요.”
루이스는 그리 말하면서 웃었다. 그리고 이안과 온실에 관해 이야기 나누며 도서관으로 나란히 향했다.
도서관은 외투를 입지 않아도 될 정도로 훈훈했기 때문에, 루이스는 제가 연애에 빠져 아주 멍청한 짓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바깥이 추우면 서둘러서 실내로 들어오면 될 일이었다. 차가운 바람과 맞서서 서로 끌어안을 것이 아니라.
‘그래도 사람의 온기 쪽이 더 기분은 좋은 법이지.’
비록 차가운 날씨가 괴롭히더라도 말이다. 아니, 그 차가움 덕분에 사람의 온기가 더 좋아진다고 해야겠지.
역시 겨울은 최고다.
* * *
도서관 안쪽의 사서 회의실에는 학장님께서 새로 구매한 책이 산 같이 쌓여 있었다.
아카데미가 책을 구매하는 일이야 늘 있는 일이지만, 올해는 유난히도 많은 책이 들어왔다.
물론 그건 학장님이 새로이 도서관을 채우는 취미에 물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책은 귀한 물건이다. 돈이 있다고 하여 좋은 책을 자유롭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라피스 백작가 때문이야.”
스텔라가 도와주러 온 학생회의 사람들에게 차를 한 잔씩 내어주며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다소 자조적인 목소리로.
“라피스 백작가의 사건 이후로 각 가문에 대해 여러 조사가 있었잖아?”
그 조사에서는 몇몇 가문의 부정이 발견되기도 했다.
세금을 피하려는 꼼수는 귀여운 편에 속했다. 필요하지도 않은 지원금을 받을 수 있도록 서류를 꾸며댄 정황이 발견된 곳도 있었다.
“돈을 위해 저지른 일은 돈으로 책임을 져야 하니까, 각 가문에서는 급전이 필요해졌어.”
“그래서 아카데미에 책을 파는 거예요?”
루이스는 테이블 위에 놓인 책을 당겨와 펼쳐보았다.
가장 마지막 페이지는 어느 귀족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맞아. 아카데미는 절대로 책값을 깎지 않으니까.”
하긴 지식의 요람이 책값을 흥정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사 온 책을 왜 한 권씩 검수해야 하는 거죠?”
“그건 말이야.”
스텔라는 예시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둔 책을 꺼내 들었다.
“책을 사들일 때, 희귀도서를 제외하고는 섬세하게 확인하지 않거든.”
그녀가 내민 책은 일부가 북북 찢어져 있었다.
아마 가문의 어린 도련님이나 아가씨가 책을 장난감 삼아 놀았던 모양이다.
“혹은 이렇게 된 것도 있고.”
이번에는 잉크가 쏟아져서 종이끼리 전부 달라붙은 책이었다.
“또는 이런 보물이 담겨 있을 때도 있어. 전부 제거해야지.”
책을 흔들자, 그 사이에서 말린 낙엽 하나가 툭 떨어졌다.
“그리고 가끔은 좀 찝찝하게도 이런 것이 있기도 해.”
마지막으로 꺼내 든 책에서는 편지와 작은 초상이 끼워져 있었다.
“물론 도서관에 들여놓기 전에 전부 제거해야지. 오늘 하루 동안 모두 잘 부탁해.”
스텔라가 자리에 앉았고, 학생회는 각자 가까이에 놓인 책부터 하나씩 검수를 시작했다.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닌데, 문제는 양이었다.
테이블에 쌓인 책만 백 권이 넘어 보이는데, 그 몇 배나 되는 책이 그들 주변으로 가득 쌓여 있었다.
“꽤 여러 가문에서 책을 팔아 치웠네요.”
그리고 이런 건 고급 정보다. 귀족들은 자금이 부족한데도 허세를 부리느라 비싼 꽃을 주문하기도 하니까.
루이스는 책 뒤편에 적혀있는 가문의 이름을 외워 두었다.
이런 것을 정리하여 아버지께 편지로 보내드리면 사업에 큰 도움이 될 거다.
시간은 차곡차곡 흘렀다. 때때로 휴식을 취하기도 했고, 식사하러 다녀오기도 했다.
해가 가운데를 넘어간 이후로, 루이스는 때때로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슬슬 클레어가 돌아왔을 텐데.’
그녀의 마음이 괜찮을지 걱정되었기 때문에, 루이스는 줄곧 그녀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기다렸다.
한편 지루할 줄 알았던 검수 작업은 생각 외로 즐거웠다. 책 사이에서 다양한 물건이 나와준 덕이었다.
“영수증이 왜 책 사이에 들어가 있는 거지.”
이안이 지저분한 영수증을 쭈욱 빼며 의문을 표했다. 루이스가 책장을 넘기며 얼른 해답을 알려주었다.
“책갈피 대신 넣어 둔 걸 거에요.”
“영수증은 책이 아니라, 장부에 들어가야지.”
“그렇게 철저하게 하는 가문이었다면 이렇게 책을 팔 일도 없었겠죠.”
루이스의 대답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과연 그러해.’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루이스가 책 사이에서 편지를 발견했다.
호기심이 많은 그녀는 편지를 열어서 읽어보고 싶었지만, 스텔라와 이안이 양쪽에서 말리는 통에 실패했다. 연애편지 같았는데.
루이스는 어쩔 수 없이 책은 ‘검수 완료’ 쪽에 두고, 편지는 ‘태울 것’ 상자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새로운 책을 가져와 이번에도 가장 마지막 페이지부터 확인했다.
벌써 몇 번째 같은 가문의 문장을 보았다.
“이 가문의 서재는 텅 비어있겠네요.”
“완전히 비어있지는 않을 거야. 우리 가문도 내가 어릴 때 책을 팔았는데, 대대로 내려오는 일지는 남겨두거든.”
덕분에 라피스 가문의 아이들은 가문의 일지 외엔 읽을 것이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그래서 스텔라는 아카데미의 도서관을 좋아하는 거죠?”
“응. 가끔 우리 가문이 표시된 책을 발견하면 기분이 묘해지지만.”
“뮐러 백작가에 아이들이 있다면, 나중에 아카데미에 와서 비슷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책 사이에서 또 다른 영수증을 발견한 이안이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그 가문에 어린아이는……. 가만, 어디라고?”
이안은 그리 물으면서도 결국엔 제 손으로 가장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 확인했다.
이안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고, 루이스가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물어보려는 찰나.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딘 크리시스였다. 그는 얼마 전까지 몹시 아팠기 때문에, 오늘의 노동에서 제외되었다.
그는 제대로 된 외투조차 챙겨입지 않은 채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회장!”
진정되지 않은 숨을 어떻게 하지도 못한 그가 불안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레어가 아직도 수도에서 돌아오지 않았어.”
루이스는 곧바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완전하게 기울어진 태양이 어느새 하늘을 붉은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것은 곧 아카데미가 정한 통금시간이 다가온다는 것을 뜻했다.
때때로 어떤 학생들은 노는 일에 정신이 팔려 통금을 어기곤 했다.
그러나 클레어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즐거운 일로 나간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아마 어느 때보다도 더 아카데미로 돌아오고 싶어 할 것이다.
이안은 책상에 펼쳐진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뮐러 백작가.
루이스가 이 가문을 말할 때, 그가 놀란 이유는 단순했다.
이곳은 클레어 이리스가 결혼 계약을 맺은 가문이기 때문이다.
이안은 그녀의 결혼 계약에 대해 알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거대한 자금적인 원조와 사업권 일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안의 손에는.
급전을 위해 팔아버린 뮐러 백작가의 도서가 들려 있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