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내가……들어갈 테니까
관리 부인의 푸딩은 굉장한 호평이었다. 부디 이런 은혜로운 간식을 한 달에 두 번은 제공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탄원서가 쇄도했다.
관리 부인은 이 사태를 기회로 삼아서, ‘식단 검열 거절권’을 주장했다.
물론 그녀의 주장 이후, 탄원서 사태는 전면 중지되었다.
식단이 검열되지 않으면, 초콜릿을 입힌 가지를 저지할 수 없게 될 테니까.
그리하여 결론적으로는 현재 남은 푸딩의 가치가 급상승했다.
루이스는 푸딩에 열광하는 학생들의 틈에서 사수해 낸 하나의 푸딩을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물론 그녀는 하루 먼저 푸딩을 몇 개나 맛보았으니, 특별히 욕심을 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이 푸딩 하나를 열렬하게 사수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야, 클레어가 먹지 못했으니까요!”
루이스가 푸딩을 학생회의 테이블 위로 탕, 소리가 나도록 올려 두었다.
“왜 화를 내면서 말하는 건데?”
이안이 묻자 루이스는 절망적인 얼굴로 대답했다.
“오늘 오전부터 클레어의 모습을 한 번도 못 봤어요.”
“그게 화를 낼 일인가?”
“그야, 클레어는 예쁘고, 저는 예쁜 모든 것을 사랑하죠. 사랑하면 늘 보고 싶은 법이고요.”
루이스는 두 손을 모으며 꿈이라도 꾸는 것 같은 얼굴로 황홀하게 말했다.
“클레어는 아마 에클레어의 클레어일 거예요, 부드럽고 달콤하고 말랑말랑하고, 어쨌든 안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단 말이에요!”
“실제로 에클레어를 끌어안는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기분이 좋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이참, 그거야 비유의 이야기죠. 어쨌든 에클레어를 입에 가득 밀어 넣으면 행복해지니까요.”
루이스가 에클레어를 우물거리는 상상을 하기에, 이안은 노트 귀퉁이에 ‘에클레어’라고 적어두었다.
루이스는 그의 가지런한 글씨를 바라보다가 헤실 웃었다.
이렇게 적어둔다는 건, 만들어 준다는 뜻이 틀림없었다. 참 좋은 남자다.
루이스는 자랑스러운 연인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제 취향을 분명하게 말해두기로 했다.
“저요, 초콜릿이 들어간 크림이 좋아요.”
“알아. 그리고 윗부분은 초콜릿과 피스타치오로 마무리하면 되지?”
“어떻게 알았어요?”
“설마 내가 그대의 취향을 모를까.”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고, 학생회의 다른 구성원들이 두 사람을 지긋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 실수했다. 이렇게까지 다정하게 대화를 했으니, 누구라도 두 사람의 사이를 의심할 거다.
그건 좋지 않은데. 스위니 가문을 위해라도 말이다. 루이스는 조금 불안해졌다.
“회장님.”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딘 크리시스였다. 그는 오늘도 테이블에 반쯤 엎드린 채였다.
“음?”
“나는 바닐라 커스터드가 좋겠어.”
그가 그리 말하는 순간에는 학생회실 여기저기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안과 루이스를 바라봤던 건 모두가 바닐라 파였기 때문이었구나.
‘의심받지 않는 것은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결백한 취급을 받아도 좋은 건가?
루이스가 그런 의문을 품고 이안을 바라보니, 그는 딘에게도 다정히 웃으며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알아. 설마, 내가 그대의 취향을 모를까.”
“모르는 것 같던데. 지난번에 내 오믈렛에는 치즈 안 넣어 줬어.”
“그건 사과했잖아. 그리고 그대가 치즈를 좋아한다고 먼저 말을 했어야지.”
두 사람이 투덕거리기 시작했고, 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이 미묘해졌다.
그래 바로 저 눈빛이다! 두 사람이 어떤 특별한 관계로 보이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눈빛!
‘왜 딘이 의심을 받는 거야!’
물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루이스는 딱히 의심받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딘에게 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왜냐하면, 딘은 소중한 클레어의 허락도 없이 키스해 버린 아주, 몹시 나쁜 남자니까 말이다.
……물론 나쁜 것으로 치면 클레어의 약혼자가 더 나빠 보였지만.
“그보다 딘 크리시스, 오늘 수업이 더 없다면 클레어에게 이걸 전해 줬으면 좋겠는데.”
이안은 가방에서 갈색 봉투를 하나 꺼내 들었다.
“내가 가야 해?”
딘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아직도 두 사람 사이에 세워진 견고한 벽은 건재한 모양이다.
루이스가 얼른 손을 들었다.
“제가 갈게요. 회장님. 저도 수업이 없고, 어차피 푸딩을 전해주러 갈 참이었거든요.”
게다가 딘이 들이닥치면 클레어도 놀랄 것이다. 최근 두 사람은 좀처럼 대화하지 않는 것 같으니 말이다.
“그건 안 돼. 루이스 스위니는 나와 함께 여기에서 탄원서 목록을 정리해야 하니까.”
그는 한 뼘 높이나 되는 탄원서의 산을 루이스의 앞에 툭 내려놓았다.
“꼭 지금 해야 해요?”
루이스가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꼭 지금 해야 해.”
그는 엄격하게 대답하며,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푸딩을 딘에게 밀어주었다. 서류와 함께 가져가라는 뜻이었다.
딘은 잠시 한숨을 쉬더니 결국에는 서류와 푸딩을 챙겨 들고 학생회실을 나섰다.
“……회장님은 악마예요.”
루이스는 탄원서를 제 앞으로 주욱 끌어오며 투덜거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녀에게 동정의 눈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루이스는 이제야 그녀가 왜 이안과의 관계를 의심받지 못하는지 이해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보아도 먹이를 주는 악마와 불쌍한 일꾼 정도로밖에 안 보일 거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남자.
루이스에게 일을 시키고 나면, 언제나 자랑스러운 얼굴로 이렇게 말하곤 하니까.
“그대의 노동력은 전부 다 내 거야. 모든 관절이 평생 나를 위해서 움직이게 되겠지.”
“아니라고요!”
* * *
앞머리를 쓸어올리는 차가운 손길에 클레어는 겨우 눈을 떴다.
자고 일어났기 때문일까 눈앞이 흐렸다. 어렴풋이 저를 내려다보는 파란 눈동자가 보였다.
상대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녀의 눈을 전부 막아 둔다고 해도 알 것이다. 손길이 익숙하니까.
“……나, 괜찮아.”
클레어가 선뜻 그리 말했다. 물론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모든 설득력을 소멸시켰다.
“아직 아무것도 안 물어봤는데.”
툴툴거리는 대답이 들려올 때는 시야가 한결 밝아졌다.
“어차피 물어볼 생각이었잖아?”
딘은 ‘그야 그렇지만.’이라고 중얼거리고는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단순한 감기야.”
“이마……뜨거워.”
“단순한 감기의 증상이지.”
“많이 뜨거운데.”
그는 그리 대답하며, 열이 옮은 손바닥을 뒤집었다.
차가운 손등이 닿는 기분이 좋아서 클레어는 잠시 눈을 감았다.
“다른 증상은?”
그가 차분하게 묻는 것을 보니 약을 가져다줄 모양이다.
많이 컸네, 진짜.
클레어는 새삼 그의 성장을 생각하며 웃었다.
“기침이랑 열이 나는 것뿐이야.”
“식사는?”
“목이 불편해서 그다지.”
“알았어. 그리고…….”
딘은 턱 끝까지 끌어당긴 클레어의 담요를 바라보며 잠시 한숨을 쉬었다.
얇았다. 이런 걸 덮고 자면 건강 외엔 자랑할 것이 없는 강철 인간 루이스 스위니도 감기에 걸릴 것이다.
“춥지 않았어?”
“그렇긴 한데, 아직은 괜찮을 줄 알았거든.”
클레어가 담요를 만지작거릴 때, 그녀의 팔이 그대로 드러났다.
딘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클레어의 팔을 주욱 잡아당겼다.
소매가 짧은 여름 잠옷이 보였다.
“이건?”
“……아직은 괜찮을 줄 알았거든.”
“진짜 가지가지 한다, 너!”
클레어는 뭐라 반발할 수가 없었다.
아니, 실은 ‘너 때문이잖아!’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녀가 가을 준비를 허술하게 했던 것은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이니까.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 것이 바로, 눈앞의 딘 크리시스였다.
그는 클레어의 팔을 다시 담요 속으로 넣어 주었다. 그 후에는 별 감흥 없는 얼굴로 클레어의 옷장을 열었다.
서로의 방을 뒤지는 일이야 어렸을 때부터 빈번했으니, 클레어는 딱히 그를 타박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실은 몸이 무거워서 도무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서랍 깊은 곳에서 털이 달린 겨울 잠옷을 찾아냈다.
한겨울에만 신는 클레어의 비밀 털 양말도 함께 꺼냈다.
“약 가지러 다녀올 테니까 갈아입어.”
클레어는 담요 위에 놓인 두꺼운 옷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딘이 돌아온 건 클레어가 옷을 다 갈아입고, 다시 자리에 누웠을 때였다.
그는 급히 달려서 다녀온 듯, 다소 숨을 헐떡이고 였다.
게다가 뭘 그리 다양하게 챙겨 왔는지 두 팔 가득 다양한 것을 들고 있었다.
일단 가장 눈에 띈 것은 두툼한 가을 이불이었다.
그는 여름 담요를 걷어내고, 그것을 끔찍한 괴물이라도 되는 양 바라보다가 바닥에 훅 던져 버렸다.
그리고 클레어의 몸 위로 무게감이 느껴지는 포근한 담요를 덮어주었다.
“네 거지?”
그녀의 물음에 그의 귀 끝이 조금 붉어졌다.
“그래! 그러니까 더러워도 참아.”
딱히 더럽다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어쨌든 그는 제 이불을 건네준 것이 부끄러운지 서둘러 다른 것을 내밀었다.
물주머니였다. 낡은 천으로 둘러싸인 것으로 관리 부인께서 겨울에 가끔 사용하셨다.
그는 뜨끈뜨끈한 물이 담긴 주머니를 두꺼운 이불 속으로 넣었다.
“이거 뜨거우니까 이불 속에서 덤벙대지 마.”
“빌려왔어?”
“알 필요 없잖아.”
클레어는 손끝으로 뜨거운 물주머니를 조심스레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이거.”
이번에 딘이 내민 것은 식사였다. 환자가 많은 것을 대비해서 아카데미 차원에서 만들어 둔 채소 스튜 말이다.
분명히 맛있겠지만, 클레어는 내키지 않았다.
이불 속이 따끈따끈하고 기분이 좋아서 가능하면 그냥 이대로 더 자고 싶었다.
“안……먹고 싶은데.”
솔직하게 말하자, 기가 차다는 시선이 돌아왔다.
알고 있다. 만약 반대 상황이었어도, 클레어는 딘을 저런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조금 어지러워서……. 기운도 없고. 자고 일어나서 먹을게.”
“회장님이.”
“응?”
“가끔 왜 강제로 루이스 스위니 입에 음식을 쑤셔 넣는지 알겠다.”
“그야, 루이스는 뭐든 잘 먹으니까. 먹이면 먹이는 만큼 열심히 움직이기도 하고.”
루이스에 관해 이야기하는 클레어의 얼굴에 엷은 생기가 돌았다.
“너 진짜 걔를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짜증이 날 정도로 말이다.
“좋아하지. 귀엽잖아.”
그 대답에는 그다지 할 말이 없었다. 딘은 클레어에게 ‘나이와 함께 귀염성을 잃음’을 지적당한 상태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귀여움을 조금이라도 간직해 볼 것을 그랬다.
“……빨리 먹기나 해.”
클레어는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지 않아도 흰 얼굴이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린 것처럼 보였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거야?”
그는 이불 위로 식사가 놓인 쟁반을 놓아주며 물었다.
“어제저녁부터 갑자기 으슬으슬 추웠어. 아, 따듯하다……. 이거.”
클레어는 스튜를 아주 조금 머금고는 감격한 얼굴을 했다.
어지럽고 기운이 없어서 많이 먹지 못할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한 그릇을 금방 비웠다.
딘은 별다른 소리 없이 쟁반을 치워 준 후에 약을 내밀었다.
작은 유리병에는 끔찍하게 생긴 갈색 약이 들어있었다.
저 약에 대한 소문은 클레어도 들었다. 엄청 쓰고 끈적끈적하다고 했다.
“저 약을 졸업할 때까지 먹지 않는 게 목표였는데.”
“이상한 목표 좀 새우지 마.”
하지만 그 역시 약병을 열어 본 후에는 클레어와 같은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
“절대로 졸업할 때까지 먹지 말아야겠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한 약이니, 클레어는 호쾌하게 약을 입안에 부어 넣었다.
가능하면 혀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며 먹었는데도 입안에 끔찍한 쓴 내가 감돌았다.
잔뜩 얼굴을 구긴 클레어에게 딘은 마지막으로 푸딩을 내밀었다.
“이건 루이스가.”
“전해달라고 했어?”
“뭐, 그렇지.”
그는 몹시 내키지 않는 얼굴로 푸딩을 내밀었다.
클레어는 약으로 엉망이 된 입속에 얼른 단 것을 넣었다.
“맛있다.”
“덕분에 난리가 났지만.”
그녀는 푸딩을 금방 바닥까지 싹싹 비워내고는 잠시 침대 헤드에 등을 깊이 기대었다.
“좀, 괜찮아?”
딘은 물컵을 건네며 침대맡에 조심스레 걸터앉았다. 아주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인 후에 그가 건네는 물컵을 받았다.
마침 마시기 좋을 정도로 따듯했다. 좋아하는 온도였다.
어떻게 알았을까, 이 정도가 아니라면 마시기 어려워할 거라는 걸.
“……따듯하다.”
클레어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게 물의 온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오직 그녀만이 알 것이다.
“찬 걸 줄 수는 없잖아.”
“그야…….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이 다정함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프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니, 생각해보면 집에서 아팠다고 하더라도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었던가.
작위도 사업도 물려받지 않는 클레어가 아픈 일은 대단한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이라고는 이 어린 친구뿐이었다.
「누나, 괜찮아? 많이 아파?」
동글동글한 얼굴에 세련된 금발을 늘어뜨린 소년은 그야말로 인형같이 예뻤다.
“너……진짜 귀여웠는데.”
가끔 클레어의 드레스를 입히면 여자아이로 보일 정도로 말이다.
이번에는 딘도 지지 않고 불만을 털어냈다.
“너도 진짜 예뻤거든?”
“어쩐지 그거, 지금은 못생겼다는 말로 들리는데?”
“잘 알아듣네.”
“뭐…….”
클레어는 허탈하게 웃으며 따듯한 컵을 꼭 쥐었다.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사실, 어렸을 때는 그럭저럭 예쁜 줄 알았었는데 말이다.
막상 어른이 되고 나서 모임이며, 파티에 가보니, 어쩜 그리 미인들이 많은지.
“머리 색도 칙칙하고 어두워서, 드레스를 고르는 것도 너무 어려워. 얼마 전에는 마담 에밀리의 가게에 갔는데 말이야.”
클레어는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길게 하품했다.
몸속이 따듯해지니까 잠이 왔다. 어쩌면 약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머릿속이 커튼이라도 친 것처럼 머리가 흐려졌으니 말이다.
“졸리다…….”
클레어는 컵을 내려놓으며 다시 하품했다.
따듯한 물주머니 덕분에 이불 속은 녹을 듯이 기분이 좋았다.
“자.”
딘이 짧게 대답했고, 클레어는 고개를 저었다.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겠다는 것이다.
“일단 누워. 들을 테니까.”
그의 권유에 클레어는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포근한 느낌에 절로 배시시 웃음이 났다.
“그래서, 에밀리의 가게에 갔는데 요즘 유행하는 모자라며 이것저것 보여주시는 거야. 그런데 뭘 써도 머리가 커 보이기만 하고 이상했어.”
“왜 그런 이상한 가게랑 거래하는 거야? 수도에 널린 게 가게인데.”
“이상한 가게라니. 버제스 후작가도 이용하는 곳이란 말이야.”
클레어가 항의했지만, 딘은 무어라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짙은 머리카락은 그에게 있어 무척 자랑스러운 것 중 하나였다.
어린 시절에는 클레어를 따라서 이런 짙고 어두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그의 부모님은 아주 곤란해 하셨지만 말이다.
정말 좋아했다.
바람이 불면 그 머리카락이 흩어지는 모습이나, 그 사이로 남몰래 바라보았던 새하얀 목덜미.
그런 눈길마저 모른 채 순수하게 그를 바라보는 시선. 어떤 어리광도 용납해 주었던 그 상냥한 목소리.
그녀와 공유한 기억은 어떤 색채로 남았는데, 대부분 비슷한 색이었다.
하지만 오직 그녀만이 남길 수 있는 색이었으므로, 그는 그녀가 제게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알았다.
아마 그 누구도.
설령 클레어 이리스가 이대로 제 약혼자와 혼인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녀와 같은 색채를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
영원히…….
이제 깊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약을 먹으면 졸릴 것이라던 마법사 선생님의 말씀 그대로였다.
딘은 호흡에 따라서 미세하게 움직이는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한없이 바라만 보다가 저도 모르게 늦은 대답을 하고 말았다.
“……예뻐, 멍청아.”
왜 그걸 모르는지 모르겠다. 모를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아카데미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학생인데.
“못생긴 건 네 약혼자고.”
괜히 얄미운 마음에 솔직한 소리도 해 보았다. 물론 그녀의 약혼자는 얼굴만은 번드르르한 미남이다.
하지만 못생겼다. 성격은 쓰레기고, 하여튼 짜증이 나는 자식이다.
“너 정말 남자 보는 눈이 하나도 없어.”
그리 중얼거리다 보니 조금 웃음이 났다.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이람.
“……미안.”
딘은 괜스레 제 머리를 긁적이고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대로 계속 여기에 있는 것도 이상하니 슬슬 돌아갈까 싶었다.
“……괜찮아.”
나직한 대답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는 놀란 얼굴을 하고는 다시 클레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느릿하게 입술만을 움직이고 있었다.
“나도 그 사람 얼굴은……그다지 취향이 아니긴 했어.”
잠에 취한 눈동자가 흐릿하게 드러났다. 가까스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 한심하지?”
딘은 고개를 저었다.
그 모든 일은 클레어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나마 안 좋은 상황에서도 그녀는 제게 필요한 조건들을 끌어냈다.
“한심하지 않아.”
그는 괜스레 클레어의 이마를 짚었다.
그 뜨거운 감각에 그의 손이 녹아들어 달라붙는 것 같았다. 게다가 부드러웠다.
그러고 보니 그 얄미운 루이스 스위니가 말하길, 클레어는 에클레어의 클레어가 틀림없다고 했었나?
“왜 웃어?”
“그냥. 루이스 스위니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
그는 이마를 가린 클레어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 말괄량이 계집아이의 말에 동의해야 한다니. 조금 짜증도 밀려왔다.
“루이스가? 뭐라고 했는데?”
“별거 아냐. 그냥 네가 말랑말랑하고 부드럽고 달콤하다는 소리를 하더라.”
그는 손끝으로 클레어의 뺨을 살살 쓸어내며 대답했다.
어째, 한 번 만지기 시작했더니 손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게다가 클레어도 딱히 제지하지 않고 있고.
“……있지.”
그의 손이 입술 근처로 닿을듯한 거리로 다가왔을 때, 클레어가 작게 입을 열었다.
“안 할거지?”
걱정스러운 물음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뿐일 것이다.
한 번 친구의 선을 넘었으니, 두 번은 더욱 쉬울 터다. 아니, 실은 이미 선 같은 건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네가 싫어하면 안 해.”
“그게 아니라…….”
“그럼?”
클레어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마 평소라면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몸이 아프니까 애써 쌓아온 벽마저 녹아내린 것 같았다.
아니면 단순히 어리광이 피우고 싶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지쳤으니까. 정말로.
“그런 걸 너랑 하는 게 좀 어색하고…….”
“그건 뭐, 그리고?”
“……창피하고.”
“그렇긴 하지. 또?”
대답을 바라는 목소리가 조금 다급했다. 어느새 침대 위로 숙인 고개도 가까워졌다.
“감기……옮을지도 모르고.”
“상관없어. 다른 건?”
어떻게 상관이 없담. 이렇게 사람이 한순간에 무너질 정도로 아픈 감기인데 말이다.
“……나. 약혼도 했고.”
“그건 알고 있던 거니까. 다른 이유는?”
“내가 네게…….”
클레어는 두 눈을 감았다. 자신에게 모멸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픈 것을 무기로 그의 마음을 멋대로 휘두르다니. 그의 관심이 제게 있는 것에 솔직하게 기뻐하지도 못하면서.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괴로워.”
“…….”
“나의 D는 내 마음속에서 유일하게 예쁘고 아름다운 기억인데…….”
‘나의 D'는 오직 클레어만이 사용하는 그의 호칭이었다.
서로의 첫 글자가 C와 D로 나란히 붙어있다고 순수하게 좋아하던 시절에 말이다.
“나 스스로 그걸 진창으로 빠트리는 것 같아서…….”
딘의 눈에는 클레어야말로 진창의 깊은 곳에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녀는 이제야 겨우 어른이 되었을 뿐이다.
강제로 하게 된 결혼이나, 그에 따른 제반 계약들은 그녀를 어두운 진창의 끝으로 한없이 끌어내렸다.
씩씩한 클레어 이리스는 호흡조차 불가능한 그곳에서 저 스스로 겨우 숨 쉴 곳을 마련하려고 애쓰는 모양이지만.
그곳이 더러운 진창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내가……들어갈 테니까.”
어느새 서로의 입김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그가 속삭였다.
“어디든 빠져줄 테니까. 아주 엉망이 돼도 상관없으니까.”
“…….”
“나를 딛고 올라가. 클레어 이리스.”
그리고 호흡과 입술이 닿았다.
슬픔이 깊이 느껴지는 것은, 아마 이 마음의 끝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거다.
그러니 둘은 잠시나마, 서로를 제외한 모든 감각을 닫았다.
이제야 두 사람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