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훌륭한 악역적 본능
두꺼운 책의 모서리가 스텔라의 손등을 제대로 찍어 눌렀다.
스텔라가 얼굴을 찌푸린 채 여학생을 올려다보았고, 그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심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던 루이스의 머릿속으로 원작이 스쳤다.
‘어머, 미안해 스텔라. 책이 너무 무거워서 놓쳤나 봐.’
‘괜찮아? 어머, 피부가 찢어졌잖아! 빨리 치료실로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책 속의 루이스는 이렇게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루이스의 못된 말과 행동을 답습하는 저 여학생도 스텔라의 손등을 들여다보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괜찮아? 어머, 피부가 찢어졌잖아! 빨리 치료실로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무서울 만큼 원작대로다.
마치 저 두 사람이 선 주변으로 원작의 소용돌이라도 부는 것처럼 보였다.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무서웠다. 왠지 모를 바람 속으로 끌려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에.
그리고 한 걸음 더 멀어졌다.
다시 말하지만, 루이스는 스텔라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더불어 그녀가 괴롭힘을 당한다고 하여 도울 의리도 없었다.
도서관에서 나오는 길에는 어쩐지 발걸음을 서두르게 되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달리고 있었고, 곧 심장이 쿵쿵 뛰었다.
* * *
“이번 학기에는 부디 그대를 증명하세요. 스텔라 라피스.”
줄리아나 라센 교수님의 말씀에 스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교수님.”
교수님은 ‘증명하세요.’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셨다.
처음에는 그 말씀을 좋아했다. 스텔라에게 기대를 해주시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나저나, 그 손등은 어떻게 된 겁니까?”
스텔라는 얼른 제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시, 실수를 해서 그만…….”
쯧. 혀끝을 차는 소리에 스텔라는 얼른 어깨를 움찔거렸다.
“죄송합니다.”
자연스레 사죄의 말을 나왔다. 사실 그녀가 잘못한 것은 없었는데 말이다.
라피스 가문이 부정을 저지른 것도.
라피스 가문의 사건으로 인해 대대적인 세무조사가 시작된 것도.
그 때문에 많은 가문의 어둠이 적발된 것도.
그래서 일부 학생들의 부모가 꽤 어려움을 겪게 된 것도.
스텔라의 탓은 아니었다.
물론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세요.”
교수님은 스텔라의 턱을 쥐어 올렸다. 뱀보다도 차가운 시선이 스텔라를 응시했다.
“조금 전에 그대가 내게 뭐라고 했지요?”
스텔라는 바짝 얼어붙었다. 교수님의 두꺼운 안경에 그녀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비굴한 표정을 짓게 되었던 걸까.
“대답하세요!”
엄격한 호통에 비로소 비틀어진 입술이 열렸다.
“라피스 가문을……살려주세요.”
이제 그녀의 간청에는 간절함이 섞였다.
예전보다도 더 가문의 상황이 좋지 않아졌으니까.
황실에 빼앗긴 이름을 되찾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황실이든 귀족이든 누구든, 스텔라의 뒤에 있어 주어야 했다.
물론 그녀가 의지할 곳은 라센 교수뿐이었다.
“저는 오래전부터 그대에게 방법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건 아주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비록 그대는 해내지 못했지만.”
그건 최고로 우수한 학생으로서 장학생의 명예를 드높이는 일이었다.
라센 가문의 장학생들은 누구나 쉽게 해낸 일이라고 했다.
스텔라를 제외하면.
그리고 황실의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 두라고도 하셨다.
“선황비께서는 아둔한 이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죄송합니다. 스텔라는 그 말을 작게 되뇌었다.
“하지만 나는 그대의 우수함을 믿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니 스텔라 라피스, 언제나 말하지만.”
증명하세요.
스텔라는 교수님의 말씀을 미리 넘겨짚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마음에는 이제 그 증명이라는 말이 쌓여서 탑을 이룰 지경이다.
스텔라는 제 몸이 그 탑에 짓눌려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한 일이다.
그건 고작 ‘말’이다. 호흡과 구강기관이 만드는 진동일 뿐이다. 거기에는 무게도, 물리적인 영향도 없다.
그런데도 스텔라는 언제부턴가 제 몸의 통제권을 그 말의 무게에 넘겨 주었다.
아니, 몸뿐이 아니었다. 그녀의 생각과 가치관마저도 거기에 절실하게 매달렸다.
그건 그녀가.
단 한 번도 ‘증명해 내지 못했기’ 때문일까. 한심하게도.
결론 없는 노력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니, 스텔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교수실을 나서며 스텔라는 가까운 벽에 몸을 기대었다.
가빠진 호흡을 겨우 내뱉었을 때, 아슬아슬하게 쌓아 올린 증명의 탑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아카데미에 오기 전까지, 그녀의 삶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그녀가 마음먹은 것은 무엇이든 해냈고, 누구라도 그녀를 좋아해 주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스텔라가 타고난 운이고, 매력이라고 했다.
고개를 들자 멀리 시끄럽게 떠드는 학생회의 무리가 보였다.
아카데미에서 가장 영향력을 갖는 집단으로, 그들을 동경하는 학생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루이스 스위니는 그 안에서도 언제나 돋보였다.
황태자는 물론 황제의 조카 되는 힐라드 공자에 이르기까지, 그녀를 특별한 친구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제 누구라도 알았다.
그녀에게 제대로 된 신분은 없었지만, 아무도 감히 그녀를 무시하거나 짓누를 수 없었다.
그녀는 성적으로 제 우수함을 증명했고, 황금빛 인맥으로 제 자리를 공고하게 했다.
그 두 가지는 라센 교수님께서 스텔라에게 요구하셨던 모든 것이었다.
아마 예전의 스텔라라면.
그 두 가지는 모두 그녀의 차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스텔라는 수업 노트를 고쳐 안았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데, 한 무리의 학생들과 스치듯 지나가게 되었다.
툭.
한 남학생이 강하게 몸을 부딪쳐 왔다. 아마 고의였을 것이다. 일부로 그녀의 어깨로 몸을 기울였으니.
스텔라는 손쉽게 바닥으로 무너져내렸다.
아프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부끄러웠다. 많은 학생의 시선이 느껴져서…….
“어, 미안. 네가 거기 있는 줄 몰랐어. 라피스.”
남학생이 적당히 둘러대는 투로 말했다.
스텔라는 그가 어느 가문의 영식인지 생각했다. 귀족 사회에 어두운 탓에 기억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세무조사로 인해 손해를 입은 것이 틀림없었다. 시선에 담긴 적의를 보면 확실했다.
“…….”
스텔라는 말없이 일어섰다.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멀리 있는 소녀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루이스 스위니였다.
그녀는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무리 속에서 홀로 스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놀란 눈을 하고서는.
‘……봤구나.’
아마 무척 고소하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도 그럴 것이, 스텔라는 그녀에게 지독하게 굴었다.
그녀도 그 사실은 알고 있었다. 교수의 말에 짓눌려 있었다고는 하나, 그걸 모를 만큼 양심이 소멸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스텔라가 아무리 악독하게 굴어도 루이스 스위니는 조금도 상처받지 못할 것이다.
아주 높은 곳에서 고고하게 앉아계시는 분이니까 말이다.
그리 생각하니 그녀가 다시 얄미워졌다. 어쩔 수 없이 말이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은 계속 이어졌다.
다만, 이안이 루이스의 뒤에서 다정하게 손을 뻗는 순간에, 스텔라는 저도 모르게 얼른 근처의 기둥으로 몸을 숨기게 되었다.
마음속으로 몇 초를 센 뒤에 흘긋 고개만 돌려 다시 그들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이안이 무어라고 루이스를 놀린 모양인지, 루이스는 작은 주먹으로 그의 팔을 툭툭 때리고 있었다.
장난스러운 말을 주고받는 그들의 입술이 자연스레 즐거운 모양으로 휘었다.
멀리서 관리 부인이 학생회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무언가 시킬 일이 있으신 모양이었다.
모두가 같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고, 곧 이안의 팔이 자연스레 루이스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둘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방긋 웃었고, 또 금방 투덕거렸다.
언뜻 보면 꼭 연인처럼 보였지만, 주변을 보면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루이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스텔라가 서 있던 곳을 스치듯 바라보기 시작했다.
뭔가 복잡한 얼굴을 한 채.
* * *
학생회가 열심히 만든 레몬청은 사흘 만에 모든 설탕이 진득하게 녹았다.
꿀물을 입은 레몬을 컵에 덜어 뜨거운 물을 부어주니 아주 맛이 좋은 레몬티가 되었다.
루이스는 시식용으로 받은 레몬티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그리고 학생회 외에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식당 구석에 앉았다.
온기가 부족한 나무 의자가 차갑다.
‘이런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가을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눈이 내릴 때 즈음에는 아마, 스텔라에 대한 괴롭힘이 전부 끝나있을 테니까.
물론 어떻게 해야 그런 못된 일이 끝날지 모르겠다.
‘내가 나쁜 말을 흘리지 않으면 시작조차 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모두가 루이스의 일을 대신하여, 스텔라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악의가 이렇게 대단한 생명력이 있을 줄은 몰랐다.
원작의 많은 것이 어그러지고 소멸했는데, 저 악의라는 것이 끝끝내 살아남은 것을 보면.
‘사실, 스텔라의 탓은 아닌데.’
그녀는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다. 당연히 가문의 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부끄럼을 모르는 귀족’이라거나, ‘고귀한 수치’라고 조롱하는 것은 정말 너무한 일이다.
조롱만 하면 다행이게? 루이스는 원작에서 스텔라가 당한 괴롭힘을 떠올려 보았다.
노트가 망가지고, 잘못된 수업 정보에 곤란을 겪고, 옷이 찢어지고 계단에서 구르기까지 했다.
물론 옷이 찢어지거나 계단에서 구르게 된 것은 사고였을 뿐이다. 하지만 원작에서는 모두가 루이스의 짓이라고 생각했다.
하긴 그녀가 해온 짓을 생각하면, 그런 오해를 받는 것도 당연하긴 했다.
‘원작의 스텔라에게는 이안이 있어서, 나중에는 그가 루이스를 혼내 주었지만…….’
지금의 스텔라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라센 교수님이 그녀를 위해 화를 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즉 그녀는 이런 괴롭힘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거다.
‘으, 왜 내가 죄책감이 드는 거야!’
사실은 답을 알고 있었다.
진실로 곤란해 보이는 사람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원작이든 뭐든 상관없이 그건 나쁜 일이다. 도덕과 도리를 배운 인간으로서 말이다.
‘어떻게 하지…….’
컵에 입술을 댄 채, 고민하고 있으니 어느새 다가온 이안이 루이스에게 유리병을 하나 내밀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로, 그 안에는 반짝이는 레몬 청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대가 가져다주면 기뻐할 거야. 내가 레몬을 하나하나 썰었다는 말도 잊지 말고.”
이안은 가까운 의자를 끌어와 곁에 앉으며 그리 말했다.
루이스는 이안과 유리병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누구에게 가져다주라는 것인지는 이안의 표정에 적혀 있었다.
“그야, 시몬은 상냥하니까 누가 가져다주어도 기뻐할 거에요.”
“꽤 다를걸.”
그는 유리병을 테이블 위로 올려 두었다.
“시몬은 단 것을 즐기지 않아. 그대가 가져다준 것이 아니면, 좀처럼 마시려 들지 않겠지. 레몬티를 멀리한 시몬이 감기에 걸리는 것은 시간문제고.”
그건 대단한 억지다.
“물론 그대가 바쁘지 않다면 말이야.”
이안이 그리 덧붙이는 것은 아마, 루이스가 거절할 구실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일 거다.
어쩌지. 이 악마 같은 남자가 조금은 상냥해 보인다.
“……제가 갈게요.”
“옳지.”
어째서 칭찬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머릿결 사이로 들어온 그의 손가락이 상냥하게 부드러운 결을 따라 움직였다.
“시몬의 생일에 어떤 파티를 하고 싶은지도 물어봐 주고.”
“그러고 보니, 가을이죠.”
루이스는 잠시 ‘가을이 빨리 가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자신을 반성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 가을에는 시몬의 생일이 있으니 말이다.
“그래, 여름은 나, 가을은 시몬 그리고 겨울은 그대의 것이지.”
그건 생일에 따른 계절의 소유권 문제로, 어릴 적에 종종 하던 이야기였다.
“올해는 아카데미에서 셋이 파티를 해야겠네요. 물론, 시몬이 그러자고 하면요.”
“그렇게 될 거야. 견과류 따위가 들어간 뻑뻑한 케이크에 초를 붙이면서 말이야.”
이안은 그런 뻑뻑한 질감이 진절머리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시몬이 어떤 케이크를 원하는지도 물어볼게요.”
“묻지 마. 보나 마나 그대가 좋아하는 찐득찐득한 초콜릿 케이크라고 대답하겠지.”
“그럼 제 생일에는 견과류가 들어간 뻑뻑한 케이크를 먹게 되겠네요.”
“어째서 다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제 생일에 먹지 않는 거지?”
이안이 다소 불만스럽게 중얼거리기에 루이스는 웃고 말았다.
그렇게 말하는 이안 역시 그의 생일에 아주 커다랗고 시커먼 초콜릿 케이크를 준비했었으니까.
물론 루이스는 먹지 못했지만 말이다.
세 사람이 이렇게 서로의 취향을 챙기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야……. 정말로 좋아하니까요.”
루이스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여지없는 정답이었으니, 이안은 다시 루이스를 칭찬해 줄 수밖에 없었다.
* * *
그날 오후 수업에서 스텔라의 노트가 찢어졌다. 어째 원작에서 루이스가 찢었던 것보다 더 엉망으로 찢어놨다.
스텔라는 형체도 없이 너덜너덜해진 종이 뭉치를 들고 한숨을 쉬었고, 루이스는 그런 그녀를 몰래 지켜보았다.
그녀의 옷자락 아래로 시퍼런 멍 자국이 보였다. 얼마 전에 넘어졌을 때 생긴 모양이다.
전해 듣기로는 누군가 스텔라에게 수업 공지를 이상하게 전달하여, 혼자만 다른 책을 들고 오기도 했단다.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다!
……물론 이 유치한 짓을 루이스가 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런 괴롭힘에 스텔라는 답답해 보일 정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들키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라센 교수님께 말이다.
그분의 수업에서, 필사적으로 제 멍 자국이나 상처를 가리려는 모습을 보면 확실했다.
아마 라센 교수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은 걸 거다. 그녀에게는 유일한 연줄이니 말이다.
‘원작에서는 남자 주인공 앞에서 이런 행동을 했었지.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다면서.’
하지만 섬세하고 걱정이 많으신 남자 주인공께서 그런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에게 모든 일이 발각된 후로는 독자 모두가 개운하게 사이다를 들이켜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즉, 루이스 스위니가 순조롭게 척살되었다는 소리다.
‘이번에도 누군가 그녀를 위해 화를 내야 끝이 난다는 걸까.’
과연 누가 스텔라를 위해 분노해 줄까? 루이스는 골똘히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거 참 어쩌면 좋지.
‘……어쨌든 괜히 끼어들지 말자.’
루이스는 애써 생각을 떨쳐냈다.
‘지금은 미묘하게 원작대로 일이 흘러가고 있으니까.’
이런 것에 자극받아서 루이스가 스텔라에게 작은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정말로 끝이다.
루이스가 얼마나 훌륭한 악역적 본능을 가졌는지는, 예전에 이안과 ‘성질 나쁜 아가씨와 충성심 가득한 마법사’ 설정으로 외출했을 때 절실하게 깨달았다.
표정은 오싹오싹하고, 말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자칫 이성을 놓았다가는 원작의 소용돌이로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악역의 낙인이 찍히고, 불행의 씨앗이 싹틀 거다.
루이스는 가방을 챙겼다. 한 손에는 시몬에게 가져다줄 유리병을 챙겨 들었다.
앞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스텔라가 찢어진 노트를 가방 안에 쑤셔 넣는 모양이다.
키득거리는 소리가 강의실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스텔라가 강의실을 나섰고, 루이스도 몇 명의 학생들과 인사를 한 후 곧바로 계단으로 향했다.
몇 명의 학생들이 계단 근처에서 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에는 예전에 스텔라를 괴롭혔던 학생들도 있었다.
어째 저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니, 조금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루이스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는지, 한 여학생이 조용히 스텔라의 뒤로 따라붙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스텔라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 손끝에 날카로운 것이 있었다.
루이스는 직감적으로 그녀의 의도를 깨달았다. 스텔라의 옷자락을 살짝 찢어놓으려는 거다.
원작과 똑같이.
하지만 원작에서 스텔라의 옷이 찢어진 건 어디까지나 우연한 사고였다. 물론 원작의 인물들은 루이스의 짓이라고 단정을 지었지만 말이다.
‘정말이지, 그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녔다고! 이 망할 원작아!’
루이스는 뭔가 억울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빠른 속도로 달려갈 만큼 말이다.
그리고 여러 생각할 것도 없이 그녀의 손목을 꽉 비틀어 쥐었다. 조금 아프도록 말이다.
“무슨 짓이야!”
그리고 시선이 마주치자,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시선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정말이지 참견하고 싶지 않았는데!
깜짝 놀란 여학생은 자신도 모르게 손끝에 닿은 스텔라의 옷자락을 꽉 잡아당겼다.
부욱하고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 후에는 누군가의 짧은 비명이 들렸다.
“앗?!”
루이스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심을 잃은 스텔라가 계단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스텔……!”
루이스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 손에 들려있던 유리병이 떨어지며 깨어진 것이 더 먼저였다.
잔인한 파열음이 끝난 후에, 루이스는 가까스로 계단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스텔라가 계단 아래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몸으로 튀어 오른 유리 파편이 하얀 뺨에 붉은 자국을 그려놓았다.
그제야 루이스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제가 팔을 쥐고 있던 여학생이 어느새 도망을 쳤다는 사실이었다.
뒤늦게 몰려온 학생들과 교수들의 시선이 루이스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옷이 찢어지거나 계단에서 구르게 된 것은 사고였을 뿐이다. 하지만 원작에서는 모두가 루이스의 짓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원작이 슬슬 루이스에게 시비를 걸고 싶어진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