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주인공의 여자사람친구입니다-57화 (57/92)

?57. 역사적인 키스

루이스의 머릿속에 주둔하는 커다란 고민 목록은 다음과 같았다.

이안과 사관들.

딘과 클레어.

그리고 시몬.

루이스는 ‘다음 학기의 성적’이 고민 목록에 들어가지 못한 것에 잠시 놀랐다.

하지만 성적은 본격적으로 수업이 진행된 후에 고민해도 늦지 않을 거다.

그러니 그녀는 제게 주어진 걱정들에 문제없이 집중할 수 있을……리 없었다.

물론 그 원인은 언제나 그렇듯 학생회였다.

수석 입학생을 봉사시킨다는 끔찍한 전통이 있는 학생자치단체 말이다.

“갑작스러운 호출에도 모여주어서 고마워.”

오늘은 특별히 클레어의 방에서 회의가 있었다.

학생회 구성원들은 그녀의 침대와 책상 그리고 바닥에 빼곡하게 둘러앉았다.

“어째서 회의실이 아니라 여기에요?”

루이스가 묻자 클레어는 창문에 드리운 커튼을 완벽하게 닫으며 대답했다.

“긴급 비밀회의거든.”

햇살을 차단한 방은 비교적 어두워졌고, 분위기도 한결 차분해졌다.

“저어……. 회장님은?”

한 남학생이 이안의 부재를 알아차리고 조심스레 질문했다.

“보안 문제로 제외했어.”

모두가 ‘아.’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의 이안은 보안에 취약한 면이 있었다.

그가 듣고 보는 모든 것은 기록으로 남아, 착실하게 세금과 마법의 보호를 받게 되니까 말이다.

“게다가 오늘 모인 건, 회장님 문제이기도 하고.”

클레어는 팔짱을 끼우며 피곤한 듯 이리저리 목을 움직였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지금은 사관들의 요청으로, 회장님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있어. 아카데미가 이 일을 수락한 것은, 회장님의 생활을 공개하는 것뿐 아니라.”

“……아카데미의 현재를 자랑하고 싶었던 거겠지.”

딘 크리시스가 드물게 회의에서 입을 열었다.

게다가 맞는 말이어서 모두 잠시 놀라는 시간을 가졌다.

“그래, 맞아.”

클레어는 목을 가다듬은 후에 설명을 계속했다.

“지금 아카데미는 황금기라고 해도 좋을 만큼 훌륭한 수업이 많이 있고, 도서 목록도 황궁 도서관에 지지 않는다고 해. 물론 학생들의 수준도 준수하고.”

그러니 아카데미는 이안의 눈을 빌려 이 우수함을 길이길이 역사에 남겨두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어제저녁에 강의동 부근 산책로에서 ‘달빛 산책을 즐기는 로맨틱한 황태자 전하’의 모습을 연출하던 회장님께서 그만.”

클레어가 잠시 이마를 짚었다. 골치가 아파서 그러는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귀가 빨갛게 된 걸 보아 뭔가 부끄러워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회장님께서 그만……?”

루이스가 조심스레 이어지는 말을 재촉했다.

클레어가 저렇게 부끄러워할 정도면 얼마나 대단한 일이 있었던 건가 싶어서 말이다.

“……입.”

클레어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싼 채 겨우 입술 끝만 움직였다. 소리가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

“입?”

학생 몇 명이 입을 모아 의문을 표했고, 그제야 클레어가 조금 더 명료하게 말해주었다.

“……회장님께서 산책 도중에 한참 입맞춤 중인 학생 커플과 마주치고 말았어.”

“여, 역사적인 키스가 되었겠네요. 그건.”

루이스의 이야기에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되었다더라. 다행히 가문과 이름은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지만.”

그렇다면 괜찮지 않나? 아카데미는 딱히 연애를 규율로 금지하고 있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학장님께서 몹시 불편해하셨어. 학술적인 내용으로 채워져도 부족한 자리에, 남의 눈을 피해서 입을 맞추는 장면이 들어가고 말았다고.”

괜찮은 것 같은데. 루이스는 턱을 괴며 그리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따분하기 짝이 없는 ‘모범생 황태자 전하’의 기록을 읽는 학자들에게도 한 번쯤은 재미있는 부분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게다가 학생 본인을 위해서도 좋은 일은 아니야. 이번에는 회장님이 그들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아서 기록에 남지 않았지만. 혹시 실수로라도 이름이 불리면…….”

모두가 끔찍하다는 듯 잠시 몸서리를 쳤다.

“역사에 ‘황태자 전하 앞에서 키스한 사람’으로 영원히 남겠지.”

그게 무슨 흉측하기 짝이 없는 업적이란 말인가.

루이스는 ‘기록에 남아도 괜찮을 것 같은데.’라고 가볍게 생각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그런 기록이 남으면 안 된다.

앞으로 어떤 훌륭한 일을 해도 그 충격적인 업적을 가릴 수는 없을 테니까.

“그래서 학장님께서 내게 이 문제를 긴밀히 상의하셨고, 학생들에게 이런 문제를 공유해 달라고 하셨어.”

“……공유하라고요?”

루이스가 울상을 지었다. 무척 곤란한 듯 말이다.

“대체 어떻게요? 사관들 몰래 전달하는 내용이니 평소처럼 공지를 적어 붙일 수도 없잖아요.”

게다가 아카데미에 ‘키스를 금지합니다’라는 공지가 붙는다면, 사관들이 이 자리에 없어도 역사에 남을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클레어는 몹시 미안한 얼굴로 학생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혹시 주변에 열애 중이거나, 예정이 있는 친구가 있다면 조용히 경고를 부탁할게.”

방 안이 조용해졌다.

아무도 알았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 * *

다행히 회의는 우호적으로 끝났다.

클레어는 ‘알 권리’라는 마법의 말을 꺼냈고, 그 말은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물론 이번에도 그랬다.

「학생들도 그런 좋지 못한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 권리’가 있지.」

클레어의 설명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한 곳에 이름을 남겼다가는 가문에 폐가 될 수도 있으니, 미리 경고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니 학생회는 학생들의 ‘알 권리’를 위하여 힘쓰기로 했다.

‘사관들이 돌아다니는 동안에는 키스하지 말래.’라는 굴욕적인 경고 문구를 앞세우고서 말이다.

경고를 들은 학생들은 어떤 기분일까?

일단 당황스럽다는 건 당연할 거고, 어쩌면 키스가 더 간절해질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무언가를 금지당했을 때 그것을 더욱 갈망하는 법이니까.

부디 역효과가 일어나지 말아야 할 텐데.

‘음, 그러고 보니.’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루이스는 잠시 다른 생각에 빠졌다.

‘나, 키스……언제 했었더라.’

계속해서 키스라는 단어가 주변을 맴돈 탓일까. 괜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난번의 이마 키스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건 진심 어린 축복이니까 말이다.

‘여름쯤이었나? 라피스 영지로 떠나시기 전에 응접실에서…….’

그는 루이스가 앉은 소파를 짚으며, 깊이 허리를 숙여 다가왔었다.

「그야, 좀처럼……기회가 안 오니까.」

기회가 적다며 불평까지 했었지, 그리고 그는 ‘아카데미에서는 더 많은 기회’가 있다고도 말했었다. 루이스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카데미에서도 기회가……. 전혀 없잖아요. 이 거짓말쟁이 악마 같으니!’

잠시 불평을 한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변명 같은 생각을 덧붙였다.

‘물론, 아쉽다는 건 아니지만요. 절대로. 절대로요! 그냥 회장님의 말이 틀렸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거예요!’

어째서 자기 자신에게 필사적으로 설명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키스하지 않은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

생각해보면, ‘우등생 황태자 전하’를 연출 중인 분께서 남들 눈을 피해 그런 일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지난번에 빈 강의실에서 몰래 만났을 때도 그런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을 보면 확실했다.

……왜 안 하지?

‘아쉬워하는 게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그냥 이건.’

잠시 발을 동동 구르던 루이스는 조금 전에 제가 했던 생각을 떠올렸다.

인간이란 무언가를 금지당했을 때 그것을 더욱 갈망한다고 했었다.

그러니, 루이스가 키스에 대해 괴이한 생각을 품게 된 것은 그것을 금지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냥 반항하고 싶은 것뿐이다!

“괜한 반항심으로 키스하고 싶어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곁에서 들려오는 클레어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루이스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대답했다.

“안 그래요!”

“응?”

“……그, 그러니까 다들 안 그럴 거라고요.”

루이스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얼른 말을 바꾸었다. 클레어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놀랐잖아. 루이스가 사관들이 있는 동안 키스를 참아야 하는 줄…….”

“아니에요!”

즉각적으로 부정하고 나서, 루이스는 조금 후회했다.

누가 봐도 지독한 긍정으로 들렸을 거다.

클레어는 제 방에 남은 학생들을 얼른 내보내고, 서둘러서 문을 닫아걸었다.

방 안에 두 사람만 남게 된 후, 클레어는 ‘호기심’이라고 적힌 것 같은 얼굴로 루이스의 옆에 앉았다.

“내가 루이스를 어디서부터 놓친 거지?”

“노, 놓치다뇨.”

루이스가 살짝 뒤로 물러나 앉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클레어는 더욱 밀착해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흐으, 클레어 그렇게 바라보지 말아요…….”

“왜?”

양심이 아프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얼마 전에 그녀의 비밀을 엿들었으니, 응당 루이스의 비밀도 그녀에게 말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클레어는 여러 가지 일로 골치 아픈 시기를 지내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에게 루이스의 사정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조금 꺼려졌다.

‘글쎄, 회장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대요. 그런데……키스를 안 해요.’

어딘가 몹쓸 소리인 것은 물론이고, 상냥한 클레어는 자신의 아픈 사정도 내려놓고, 이런 쓸데없는 고민을 함께 고민해 줄 것이 틀림없었다.

“말해줘. 물론 네가 말하고 싶은 기분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말이지.”

클레어는 루이스의 뺨을 쓰다듬으면서 다정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 그야 저도 말은 하고 싶지만요…….”

“싶지만?”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아서요.”

“연애 문제가?”

“네, 연애 문제죠.”

“실은 나도 그래.”

클레어는 웃으며 말했다. 최대한 가벼운 투로 말하려는 것이 느껴졌다.

“클레어는 약혼했다고 했었죠?”

“맞아. 가문에서 정한 상대가 있어.”

그리 대답하는 그녀는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물론 실제로도 행복하지 않은 모양이지만.

“괜찮은 사람이야. 여러모로 나와……맞는 부분이 있거든.”

아마 평소였다면, ‘클레어는 그 사람을 좋아해요?’라고 물어봐야 할 시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이스는 차마 그리 물을 수가 없었다.

다른 여자와 멋대로 키스하는 남자 따위를 클레어가 좋아할 리는 없을 테니까.

“내 표정이 좀 안 좋았나?”

루이스가 다른 말을 꺼내지 않자, 클레어는 괜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안색이 좋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 루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랬어요. 그래서 대답을 골라야 했어요.”

“신중하게 생각해 줘서 고마워. 하지만 괜찮아. 딱히 그 사람 문제로 정리가 되지 않는 건 아니거든.”

“……그럼요?”

루이스는 답을 빤히 아는 문제를 가만히 물어보았다.

꼭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어떤 식으로든 그녀가 제 마음의 복잡함을 정리해 볼 수 있기를 바랐다.

“문제는 다른 남자 쪽이지. 남자라고 말하니까 좀 이상하네…….”

“별로 의식하지 않았던 상대인가 봐요?”

“음,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왠지 그런 거 있잖아. 남성이나 여성 같은 분별없이 오롯이 그 사람으로만 생각되는 것. 아마, 너무 가까워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가까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건가요?”

“보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아마도. 어쨌든 이제와 뭘 어쩌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결혼식도 반년밖에 남지 않은 이제서야 말이다.

“……그냥 좀, 그랬어.”

“원망하나요?”

그리 묻는 루이스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클레어는 그녀의 걱정에 딘에 대한 것 역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딱히 딘을 원망하는 건 아니야.”

클레어가 딱 짚어서 그를 지목하기에, 루이스는 몹시 당황한 듯 보였다.

아마 계속 모른 척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괜찮아. 어차피 나에게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가까운 남자는 딘밖에 없다는 걸 너도 알고 있으니까.”

“으…….”

“어쨌든 원망하는 게 있다면, 그때의 나……일까.”

클레어는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딘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제게 이리 구는 것도 당연했다.

어쩌니저쩌니 잘난 척을 실컷 한 주제에.

사실은.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되는 진심 어느 구석에서는.

“기뻐하고 있었던 것 같아.”

“클레어.”

“……하지만 그건 아주 작은 마음이고.”

클레어는 제 소맷자락을 쥐며 미소를 지었다. 허탈하게 말이다.

“내게는 충분할 만큼 커다랗고 무거운 사정들이 가득하거든.”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그 작고 여린 것은 아마 그 무게에 짓눌려 사그라들 것이다.

“있지, 루이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나 좀 안아줄래?”

그 문장이 채 맺어지기도 전에 루이스는 이미 클레어를 끌어안고 있었다.

* * *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비록 많은 일이 원작에서 어긋나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여기는 ‘오직 연애만을 위해’ 작가님이 지은 세계다.

‘남주 얼굴과 키스신이 개연성입니다.’라는 댓글에 ‘좋아요’가 천 개나 찍힐 정도로 말이다.

이런 달콤한 세계에서,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 있는 딘과 클레어가 연애할 수 없다는 건 이상하다.

아니지.

딱히 이런 세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건 몹시 이상하다.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은 평범하게 연애를 하고, 사랑의 단맛도 쓴맛도 모두 경험하는 것이 순리다.

루이스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관리 부인께서 조금 더 나누어 주신 초록색 포도를 들고 온실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

온실 안에 시몬이나 힐 교수님이 계시지 않을까 기대하며 들여다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헤셰 경?”

허공에 대고 헤셰를 찾아보기도 했다. 그는 이 포도를 더 먹고 싶다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근처에 있지 않은지 헤셰가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일은 없었다.

“……왜요?”

아니, 대신 머리 위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루이스가 고개를 들자, 남학생 제복을 입은 헤셰가 손을 흔들어 주었다.

“헤셰 경! 엄청 멋있어요!”

“정말요? 진짜요?”

“정말로요. 게다가 어려 보이고요.”

“윽, 그건 싫은데요. 성숙한 어른 남자라는 게 저의 유일한 장점인걸요.”

“그건 헤셰 경의 장점이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아주, 아주 근사해요.”

“으, 온실의 루이스가 칭찬해 주니까 왠지 심장이 간질간질한 것 같아요.”

히죽 웃은 그는 시선을 돌려 루이스가 든 포도 바구니를 바라보았다.

“제 거예요?”

“맞아요. 헤셰 경이 좋아하는 초록색 포도죠.”

루이스는 나무 위로 바구니를 들어 올렸다.

헤셰는 어디선가에서 긴 나무 막대기를 꺼내더니, 능숙하게 바구니를 건네받았다.

“그런데 어떻게 마침 여기에 계셨어요?”

루이스의 질문에 헤셰는 곤란한 듯 제 콧날을 만지작거렸다.

“어……. 그게요. 사실은.”

“설마 제가 포도를 받아오는 걸 보고 따라오신 건 아니죠?”

장난스러운 농담에도 헤셰는 어쩐지 대답이 없었다.

평소라면 ‘멀리서 포도 냄새가 나서 얼른 달려왔죠!’라는 말을 했을 텐데 말이다.

“그야, 날 호위 중이었지. 이제 물러나도 좋아, 헤셰.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테니, 지금 자두도록 해.”

대신 루이스의 등 뒤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회장님?”

“그래.”

루이스는 그를 돌아보며 장난스레 대답했다.

“회장님이 표정이 삐딱하고, 헤셰 경의 수면이 허락되는 걸 보니, 사관들이 근처에 없는 모양이네요.”

“고맙게도 학장님께서 두 사람을 호출하셨거든.”

“아……키스 사건 때문이죠?”

그리 말하며 나무 위를 올려다보니, 어느새 헤셰는 사라지고 없었다. 포도가 든 바구니도.

“그 사건이 그대의 귀까지 들어가게 될 줄은 몰랐는데.”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한 걸음 먼저 걷기 시작했다. 곧 이안이 나란히 따라왔다.

“학생들에게 전달되는 새로운 지침이 내려왔거든요.”

“설마 내 앞에서 키스하지 말라고?”

“비슷해요. 사실은 아예 하지 말라는 지침이었죠.”

“그거야말로 역사에 남을 대단한 지침인데.”

“그렇죠?”

루이스가 깔깔거리며 회의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는 그녀가 짓는 표정이나 어투들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살피며 모두 들어 주었다.

때때로 적당한 추임새를 넣어서,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잊지 않았다.

“즉, 나 없이도 학생회는 훌륭하게 굴러간다는 거로군?”

“안심되시죠?”

“고마운 일이지.”

그는 학생회의 소중한 축이 되는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대에게도, 그리고 다른 구성원들에게도 항상 감사하고 있어. 이번 일이 끝나면 제대로 보답해야겠지.”

“좋은 생각이에요. 다들 ‘키스하면 안 돼’라는 남 부끄러운 경고를 하고 있으니까요.”

“흐음,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할 녀석들은 아니지만 말이야.”

“다들 잘 숨어서 해야 할 텐데.”

루이스가 걱정스레 중얼거렸고, 이안도 동의했다.

“그래, 마침 적당한 곳이 몇 군데 있지. 눈치껏 피해 다녀줘야겠는걸.”

“그게 어딘데요?”

루이스의 물음에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뭔가 오한이 든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그러자 곧바로 이안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루이스는 얼른 뒤로 세 걸음 정도 물러났다. 어느새 서늘한 건물 벽면이 등에 닿아서 이 이상 물러날 수도 없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혹시…….”

그리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건물이 그려낸 어두운 그림자가 그의 얼굴로 드리워서,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당했네요.”

“아직 아무것도 안 했다만?”

“그, 그건 그렇지만요.”

루이스는 조금 곤란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회장님 앞에서는 이런저런 행위들이 금지되어 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전 지금 회장님 앞에 있고요.”

루이스는 차마 키스라고 말할 수 없어서 에두르는 말을 사용했다.

“이런저런 행위?”

물론 그는 악마이므로, 그 점을 정확히 지적해 왔다.

“이것에서 저것까지 하나하나 금지하지 않아도 나는 그대에게 충분히 인내심을 들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거, 거짓말하지 마세요. 얼마 전에도.”

“얼마 전에도?”

“제게 추, 축복을 시키셨잖아요!”

“그건 아름다우며 성스러운 일이지.”

“흐, 그보다도 금방 사관들이 올거라고요…….”

그는 그녀의 양쪽 손을 소중히 쥐며 낮게 속삭였다.

“안 와.”

작은 손은 고맙게도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꼼지락거리며, 그를 꾹 붙들어 주었다.

“옳지.”

그는 꼭 칭찬하는 것 같은 말을 하고는, 하얀 손등을 제게로 끌어 가볍게 키스했다.

간지러운 느낌에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꼭 감았다.

시야가 까맣게 되자, 청각이 몇 배로 예민해졌다. 간지러운 느낌에 반응하는 심장이 시끄럽도록 쿵쿵거렸다.

“고개 들어봐. 루이스 스위니.”

바로 앞에서 그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제발. 응?”

달래는 건지, 아니면 간청하는 건지 모를 목소리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느다랗게 눈을 뜨자, 눈앞에 그의 얼굴이 바로 보였다.

조금 낯설기도 한 표정이었다.

“잠시라도 좋으니까.”

“……그,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루이스는 조금 시선을 피하며 겨우 입을 열었다.

“꼭 제가 회장님을 애태우는 사람이 된 것 같잖아요…….”

“그걸 이제 알았다는 점이 더 놀라운데.”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게 왜 그럴 리가 없지?”

“그야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같이 지냈고요.”

“또?”

“……회장님은 제게 하고 싶은 건 전부 다 하시는 분인 것 같아서요.”

루이스의 대답에 그는 잠시 소리 내어 웃었다.

“우, 웃지 마세요! 당하는 사람의 입장도 어여삐 여겨달란 말이에요.”

이제야 겨우 고개를 든 루이스가 항의했지만,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누가 당하는 사람이라는 건가? 솔직히 말하면, ‘당하는’ 쪽은 늘 나였는데.”

“저, 아무 짓도 안 했어요.”

“했어.”

그는 단언했다. 아주 자신 있게.

“지금도 하고 있고. 나를 애태워서 죽일 생각이라면, 그대가 아주 제대로 해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을 정도로.”

그리 말하는 순간에는 얼굴 간격이 조금 더 줄어들었다.

“고, 고의는 아니었어요. 그 저기 너무 창피해서.”

“알아. 그런 점이 귀여우시지……, 내 약혼녀께서는.”

그가 ‘내 약혼녀’라고 말할 때는 입술 끝이 거의 닿아있었다.

“으…….”

그리고 작은 소리와 호흡은 물론 입술에 이르기까지 전부 그의 영역에 들었다.

예전과 같이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다소 서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아마.

서로가 열망을 끌어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루이스가 그의 손을 꾹 쥐었고, 그 순간에 서로의 고개가 움직여 조금 더 완벽히 닿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입술 사이에서 가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심장이 아프도록 뛰는 탓일까. 아니면 그가 그녀의 호흡을 저어 놓은 탓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한순간 제 입술을 떨어뜨렸다.

아마 루이스의 불안정한 호흡 소리를 신경 쓴 것이리라.

다만 여전히 이마가 닿은 채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대가.”

이제 그녀를 쥔 그의 손에도 조금 힘이 들어갔다.

“날 조금만 덜 무서워하면 좋겠는데…….”

“무, 무서워하지 않아요.”

“그런 것치고는 조금 전……. 아니.”

그는 말을 흐리며 고개를 저었다. 어째 루이스를 탓하는 것처럼 들릴까 두려웠다.

그는 말을 바꾸었다.

“그대를 무섭게 하지 않을 테니까.”

“무섭지 않아요. 정말로요.”

“씩씩하셔라.”

그 이야기의 끝에서는 다시 자연스레 입술이 맞닿았다.

루이스는 가늘게 눈을 뜬 채,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완전하게 눈을 감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처음 보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음을 다해서, 그녀에게 열중하고 있는 듯한. 무척 달콤한 표정 말이다.

‘……얼굴 보고 있었다는 걸 들키면, 화내려나.’

바스락.

이 전보다 조금 침착해진 덕인지, 그의 어깨너머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가 신경이 쓰였다.

루이스는 이안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몹시 놀란 얼굴을 한 젊은 사관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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