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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의 여자사람친구입니다-55화 (55/92)

?55. 닿는 느낌이 너무 좋아요

“정말 가을이 오는 것 같은 날씨로군. 그렇지 않나, 루이스 스위니?”

황태자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시자, 그의 뒤에 선 두 명의 사관들이 그 것을 받아 적었다.

정말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다.

이안은 물론이고 저 사관들도. 벌써 사흘째인데, 펜을 놀리는 속도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네. 가을이 오는 것 같은 날씨네요. 회장님.”

루이스는 저 가식적인 말을 받아주는 것도 슬슬 지쳐가고 있었기 때문에, 커다란 삽으로 흙을 다지며 적당히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그대는 뭘 하는 거지?”

“관리 부인께서 도와달라고 하셔서요.”

“삽질을?”

“네. 정확히는 비의 계절 동안 흙이 팬 곳을 보수하는 중이에요.”

“나무뿌리가 드러난 것도 잘 덮어주고 말이지?”

그가 으스대며 말했고, 그 잘난 척도 역사에 기록되었다.

‘도와줄 것이 아니라면 좀 사라져 주시면 안 될까요.’

그리 생각한 루이스의 표정이 결국에는 불경해지고 말았다.

이안이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채 낮게 웃는다. 그러고 보니 저 남자, 이 표정을 보면 오싹오싹해서 기분이 좋아지는 변태라고 했었다.

“그럼 열심히 하도록.”

그는 그리 말하며 빙글 몸을 돌렸다. 이제 둘의 대화가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사관들도 잠시 펜을 놓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 짧은 순간에 스치듯.

이안이 루이스의 뺨을 쓸어내렸다.

“너무 무리하지 마.”

그는 가볍게 얼굴을 찌푸렸다.

“회장님이야 말로…….”

루이스가 무어라 대답하려는 순간.

화단 한편에서 우당 탕탕하며 삽이 내동댕이쳐지는 소리가 들렸다.

루이스는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소리쳤다.

“웨인 힐 교수님!”

소리 난 쪽을 바라보니 그녀의 말대로 웨인 힐 교수가 나무뿌리에 걸려 시원하게 넘어져 있었다.

“그럼 나중에 만나요, 회장님!”

다급하게 인사한 루이스는 얼른 교수에게 달려갔다.

“괘, 괜찮습니다. 스위니 양! 넘어져요! 뛰지 마세요!”

여전히 바닥에 엎어진 교수님이 손을 휘저으며 루이스를 말렸지만, 그녀는 바로 달려가서 힐 교수를 일으켜 주었다.

축축한 흙이 달라붙은 옷을 터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정말이지, 힐 교수님. 밤에 제대로 주무시는 거예요?”

“그, 그게 습관을 바꾸는 건 어려운 일이란 말입니다. 저도 다소 노력은 했지만…….”

이안은 유달리 친근하게 보이는 두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사제관계가 저렇게…….’

루이스가 웨인 힐 교수를 동경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수면 시간까지 확인하는 개인적인 사이일 줄은 몰랐다.

물론 학생과 교수가 가까운 건 좋은 일이다.

……그 좋은 일이 이안의 눈에는 안 좋아 보이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힐 교수님께서 혹시 손이라도 다치시면 학계 모두가 슬퍼할 거라고요.”

이제 루이스는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까지 건넸다.

아니, 왜 귀엽게 발을 굴러! 왜! 그냥 평범하게 걱정하라고!

“그, 그럴 리는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주의는 하겠습니다. 스, 스위니 양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요.”

그는 삐뚤어진 안경을 고쳐 쓰며, 헤실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안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얼굴을 했다.

‘스위니양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요……. 라고?’

하, 만약에 같은 대사를 다른 학생이 들었다면 대단한 오해의 소지가 되었을 거다.

물론 루이스의 굳건한 정신세계는 그 정도의 공격으로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건 누구보다도 이안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상대는 방심할 수 없는 웨인 힐 교수다.

루이스는 그 이름만으로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그를 찬양한다.

‘좀 치사한 것 같은데.’

그런 능력을 갖추고도 아직 25살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이나, 루이스의 걱정을 사기 좋은 성정이라는 점도. 그리고 안경 너머의 얼굴이 그럭저럭 괜찮다는 것도.

‘치사한 게 아니라, 그쯤 되면 사기 아닌가.’

“많이 다치셨죠? 치료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아, 괘, 괜찮습니다. 익숙하니까요.”

힐 교수는 손바닥을 하얀 가운 위로 슥슥 문질렀다. 그의 손이 지나는 길을 따라서 하얀 옷은 붉은색 피로 물들어갔다.

“교수님!”

루이스가 깜짝 놀라며 그의 팔을 붙잡을 때는, 이제 이안도 슬슬 한계에 봉착했다.

대체 저 맹한 녀석은 예전부터 그랬지만, 경계심이라는 게 절대적으로 없다.

아카데미에서도 이안의 방에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들지 않나.

수도에서도 늦은 밤에 그가 머물기를 기꺼이 허락해 주고, 침대까지 내어주지 않나.

그러고 정작 본인은 잠들지 않나.

잠든 후에는 그의 손을 붙잡고…….

거기까지.

이안은 일단 사고 회로를 급제동시켰다. 행복의 개미지옥을 생각하기에는 아직 너무나도 낮이고, 바깥이다.

그는 일단 화단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그리고 그려낸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웨인 힐 앞에 다가섰다.

“오드모니얼 회장……. 아, 안녕하세요.”

“제가 의료 동까지 모시고 싶습니다만.”

“저는 괘……괜찮습니다. 정말로요.”

물론 그의 너덜너덜한 손바닥을 보며. 그 의견에 동의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게 걱정이 많은 루이스 스위니라면 더할 나위 없었고.

“나무를 짚으면서 가시도 박힌 것 같은데요. 제가……잠시.”

루이스가 그의 손목을 쥐려는 듯 팔을 내밀었다.

이안은 눈을 번뜩였다. 동시에 국경의 수호자라 불렸던, 늙은 프레야 백작에게서 배운 모든 신체적인 능력을 폭발시켰다.

덕분에 그는 루이스보다도 먼저 교수의 손목을 쥐는 데 성공했다.

백작님, 당신의 제자를 자랑스러워 하세요.

이안은 제 무술 스승에게 잠시 감사의 인사를 마친 후, 백전노장이 가르쳐 준 묵직한 시선으로 교수님을 응시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의료 동까지.”

물론 음절 하나하나에 힘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회장님께서 가주신다면, 저도 안심할 수 있겠네요.”

다행히 루이스도 이안의 말에 열렬하게 찬성했기 때문에, 그는 문제없이 교수님과 루이스를 떨어뜨려 놓을 수 있었다.

가느다란 교수님의 손목을 붙잡고 의료동으로 가는 길에 이안은 잠시 자괴감에 빠졌다.

‘……내가 대체 뭘 하는 거람.’

엊그제 루이스와 제대로 된 관계를 맺게 되었을 때만 해도, 사관들의 눈을 피해서 틈틈이 달콤한 시간을 갖게 될 줄 알았다.

남들 몰래 그 말랑말랑한 손이라도 좀 잡아 보거나,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런데 25세 젊은 남성의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손목이나 붙들어야 한다니!

“너, 너무 빠릅니다. 오드모니얼 회장…….”

이안은 자리에 멈추어 서서 제게 질질 끌려오는 교수님을 돌아보았다.

“너무 꽉 붙잡아서 아프기도 합니다. 부디 사, 살살 부탁드립니다.”

왜 그런 말을 얼굴을 붉히면서 하는 겁니까. 교수님.

정말이지 오해의 소지가 넘쳐나는 교수다.

어느새 이안의 뒤를 따르는 사관들은 서둘러서 ‘교수를 경애하는 황태자 전하.’에 대해 적기 시작했다.

* * *

관리 부인은 일을 도와준 루이스에게 초록색 포도를 바구니 가득 담아주었다.

포도를 하나 따서 깨물어보니, 달콤함이 혀끝에서부터 입천장까지 사르르 퍼져나갔다.

게다가 이 상큼한 향기.

아주 좋은 포도가 틀림없었다.

루이스는 포도를 하나씩 야금야금 떼어먹으며 기숙사로 향했다.

아직 정식으로 학기가 시작되지 않아서, 학생들 대부분은 기숙사 방에서 게으름을 피우거나, 옥상 혹은 주변에서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 도서관 앞을 지나가는데, 키가 큰 여학생이 회랑에서 크게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누구더라?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얼굴인데.

어쨌든 모른 척할 수는 없어서, 루이스는 함께 손을 흔들고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자, 그 여학생이 팔랑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며 기쁘게 환호성을 질렀다.

“초록색 포도!”

“머, 먹을래요?”

루이스는 더듬거리며 권했다. 상대가 누구인지 차마 떠오르지 않았다.

예쁘게 웃은 그녀는 다홍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루이스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해가 드는 자리로 가요.”

그리 말한 그녀는 정말 따스한 빛이 드는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곤 몹시 능숙하게 넓은 난간 위로 훌쩍 올라앉았다.

“올려줄까요?”

여학생이 팔을 내밀며 웃었고, 루이스는 그제야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헤, 헤셰 경?!”

“로즈랍니다.”

“……로즈?”

“네, 로즈 우드라고 해요.”

션 우드 선생님, 언제 이런 딸을 낳으신 건가요…….

루이스는 한참이나 자신을 로즈라고 주장하는 헤셰를 바라보았다.

그는 평소에는 적당히 묶어 두는 머리카락을 예쁘게 풀어헤치고, 여학생용 제복까지 입고 있었다.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를 떠나서 너무나도 위화감이 없었다.

평생을 이 옷만 입고 산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이건…….”

그는 히죽 웃으며, 루이스를 번쩍 들어 난간 위로 앉혀주었다.

루이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 올리는 걸 보면 헤셰가 확실하긴 한데.

“잠입 임무 중이에요.”

그는 포도를 다섯 개나 입속에 밀어 넣으며 대답했다.

“잠입이요? 왜요?”

“그러게요. 왜일까요? 온실의 루이스와 여자친구 놀이가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죠.”

그는 포도를 꿀꺽 삼키고는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기뻐했다.

맛있는 모양이다.

다시 허겁지겁 포도를 입안에 밀어 넣기 시작한 걸 보면.

그 모습을 지켜보며, 루이스는 그의 업무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곧 어렵지 않게 그가 잠입 임무를 맡게 된 원인을 깨달았다.

사관들이 24시간 동안 이안에게 밀착해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아무도 믿지 않네요. 헤셰 경은.”

“헤셰가 아니라, 로즈라니까요. 그리고 저도 나름대로 믿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다고요.”

그는 포도알을 하나 떼어 루이스의 입속에 쏙 넣어주었다.

“……저, 라는 거죠?”

루이스가 포도를 삼키며 물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나중에 졸업하면 부업으로 사관이 될 생각 없어요? 온실의 루이스가 24시간 동안 기록하면 저도 푹 쉴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 이런 말을 할 때도 그의 손과 입은 쉼 없이 움직이며 포도를 먹고 있었다.

“저는 그렇게 빠르게 글씨를 쓸 수가 없는 걸요.”

루이스는 사관의 빠른 손놀림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우등생 같은 회장님 모습을 보는 것도 완전 별로예요.”

“어라, 꽤 멋있지 않아요? 정중하잖아요.”

“헤셰 경은 그게 멋있다고 생각해요?”

“그럼요! 내 주인은 늘 멋있죠……. 아, 하지만 루이스가 24시간 붙어 있으면, 전하가 불쌍해지니까 그만두어야 할까요.”

“불쌍해져요? 왜요?”

“음, 그야 사랑하는 루이스가 계속 바라보면, 전하는 부끄러워서 아무것도 못 하실 테니까요.”

우물우물.

그는 포도 열 개를 단숨에 털어 넣고는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설마요…….”

“진짜라니까요? 나중에 한번 말없이 지긋하게 쳐다봐요. 엄청 당황할걸요?”

“왜 쳐다보느냐고 타박할 것 같지만, 일단 헤셰 경이 하는 말이니 해보기는 할게요.”

“아이참, 로즈 라고 해줘요!”

“알았어요. 로즈. 그런데 평범하게 남학생 제복을 입을 생각은 안 해봤어요?”

“남학생 제복은 예전에 입어봐서 흥미가 없거든요.”

“예전에요?”

“여기에 잠시 다녔었어요. 물론 중간에 그만뒀지만요.”

그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남학생 제복도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헤에, 보고 싶어요?”

“조금은요.”

“그렇다면 입어야죠. 다음에는 꼭 남학생이 될게요.”

“기대할게요.”

“물론 전하와 공자님께 익숙한 루이스의 눈에는 별로 멋있지 않을지도 모르지만요.”

그는 자세가 조금 불편했던지, 한쪽 다리를 당겨 앉았다.

잘빠진 허벅지와 긴 양말을 고정하는 가터벨트가 훤하게 드러나기에, 루이스는 다소 얼굴을 찌푸렸다.

“야하잖아요!”

“괜찮아요.”

헤셰는 아예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당당하게 외쳤다.

“안에 바지를 입었거든요!”

“…….”

“아. 이 가터 이번에 새로 나온 건데요. 피부에 닿는 느낌이 너무 좋아요. 그리고 여기 달린 레이스 귀엽죠?”

“와, 진짜 깜찍하네요. 그거 어디서 샀……아으, 진짜 여자친구랑 있는 것 같잖아요!”

“진짜 여자친구라니까요.”

그는 헤실 웃으며 제 무릎을 만지작거렸다.

그 아래로 보이는 아름다운 다리는 정말 여성의 것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흉터……때문에 긴 양말을 신으신 거예요?”

루이스는 항상 그의 몸에 가득했던 아픈 자국을 생각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맞아요. 부끄러운 건 아니지만, 너무 눈에 띄는 것도 곤란하잖아요.”

“그러고 보니 헤셰 경, 얼굴에도?”

그의 얼굴에 남아있던 흉터 자국도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루이스는 헤셰의 얼굴로 조심스레 손끝을 가져갔다.

그는 루이스에게 얼굴을 맡긴 채 두 눈을 살짝 감았다.

예쁘게 휘어진 가지런한 속눈썹이나, 핑크빛 혈기가 도는 뺨이 무척 자연스러웠다.

물론 유심히 보면, 그 너머의 흉터가 얼핏 보이기는 했다.

그건 아마 지금 햇살이 강하기 때문에 가까스로 보이는 걸 거다.

평범한 장소에는 아마 보통 여학생으로 보일 것이다.

“신기해요…….”

“그래요? 온실의 루이스가 재미있어하니까 좋네요.”

그는 가느다랗게 눈을 뜨며 웃었다.

“그래도 제 얼굴을 만지는 건 이제 그만해 줄 수 있어요? 너무 기분이 좋아서, 여학생이 된 게 조금 후회되려고 하거든요.”

“네?”

“루이스에게 남학생처럼 굴고 싶어진다는 뜻이었어요.”

“아, 안 만질게요!”

루이스가 황급히 손을 거두자, 그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렇게 놀라지 말아요. 어쨌든 손, 다시 내밀어 볼래요? 조금 건조한 것 같던데. 좋은 크림이 있거든요.”

그는 잠시 가방을 뒤적였다.

“이것도 새로 나온 건데 보습력은 어마어마한데 끈적임은 하나도 없고, 순식간에 흡수된다니까요!”

작은 크림 통을 찾아낸 그는 얼른 뚜껑을 열었다.

“향 맡아봐요.”

“코코넛 향이네요.”

“좋아하죠?”

“누구라도 좋아하죠.”

그는 크림을 담뿍 떠서 루이스의 손등에 올려주었다.

루이스가 손을 비비며 크림을 흡수시키는 동안 헤셰는 다시 포도를 야금야금 따먹었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그의 다홍빛 머리카락이 흐트러진다. 측면 일부를 가느다랗게 땋아 내린 것이 꽤 귀여웠다.

“머리도 직접 하셨어요?”

“평소에는 그렇게 하는데, 이번에는 다른 분께 부탁했어요.”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바람이 헤집은 제 머리를 가다듬었다.

“다른 분이요?”

“힐라드 공자님이요.”

“……뭐라고요?”

루이스는 잠시 제 귀를 의심했다.

“실은 늘 그 솜씨를 누려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시, 시몬이 당황하지 않던가요?”

“아뇨? 그냥 ‘그렇군요. 협조하겠습니다.’ 라고 하시던데요.”

그려지는 것 같다. 덤덤하게 대답하는 시몬의 얼굴이.

“아, 맛있었다.”

그가 제 배를 통통 두드리며 그리 말하기에, 바구니를 내려다보니 어느새 모든 포도가 사라져 있었다.

그렇게 많았는데 말이다.

“정말 맛있었나 봐요?”

“최고였어요!”

“또 구하게 되면, 헤셰 경에게 줄게요.”

“으, 정말이지. 루이스는 저를 달콤하게 녹여버리려는 게 틀림없어요. 그렇죠?”

“헤셰가 제게 너무 무른 거예요.”

그는 작은 친절 하나에도 깊이 감동해 버리니 말이다.

루이스는 곤란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다시 바라본 헤셰의 얼굴은 몹시 굳어있었다.

“……온실의 루이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불안한 마음에 루이스는 함부로 입을 여는 대신,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잠시, 실례할게요.”

난간에서 일어선 헤셰는 루이스의 허리를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난간 바깥쪽으로 뛰어내렸다.

제법 높은 편이었으나, 그는 작은 흔들림 하나 없이 착지했다.

사락.

풀에 발이 닿은 뒤에는 두 사람 모두 벽에 몸을 바짝 붙였다.

그러자, 조금 전에 두 사람이 있던 곳으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누구길래…….’

루이스는 의문을 가득 품은 얼굴로 헤셰를 바라보았다.

그는 검지를 입가에 댄 채, 가볍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제 그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잖아!”

들려온 목소리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클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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