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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의 여자사람친구입니다-49화 (49/92)

?49. 사랑하게 될 것 같아서

이안이 루이스에게 ‘내 약혼녀’라는 말을 더욱 자주 사용하게 된 것은, 어쩌면 시몬 때문이다.

「루이스 스위니입니다. 만나 뵐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 힐라드 공자님.」

시몬 힐라드.

세상은 그와 시몬을 경쟁자로 여기는 모양이지만, 사실 둘은 서로에게 유일한 이해자였다.

서로가 어떤 아픔을 안고 있는지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하고, 걱정해 주는 상대 말이다.

그러니 이안은 자연스레 그의 온기에 시몬을 초대했다.

「대답 정도는 해주지그래? 내 약혼녀께서 당황하시는데.」

내심 불안한 마음에 유치한 경고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으며.

치사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을까.

그래 치사한 일이다.

하지만 시몬은 처음 들어보는 ‘내 약혼녀’라는 호칭에 단 한 번도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여 그것을 받아들여 주었다.

그건 시몬이 이안의 응석을 받아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세 사람은 무사히 관계를 쌓았다.

이안은 시몬과 루이스를 공평하게 소중히 여겼다. 아마 시몬이나 루이스도 그러리라.

그러니 한 번 정도는 윤리를 버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셋이.

완벽하게 믿을 수 있는 세 사람이 함께 애정을 공유하는 일은 안될까…….

그 누구도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시몬은 참 다정하다니까요.」

……하지만 안될 것 같았다.

이안이 시몬을 아무리 사랑하고 좋아해도 그것은 루이스에 대한 것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루이스가 시몬 만큼은 편히 이름을 부르는 것도.

그를 가리켜 다정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안 몰래 어떤 선물 같은 것을 건네는 것도.

사실은 싫어하고 있었다.

질투……하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말이다.

* * *

“그…….”

이안은 가까스로 입을 떼었으나 곧 다물었다.

당황했다. 몹시도.

이 상태에서 뱉는 말이 제대로 된 것일 리 없었다.

대신 생각했다.

혼담이란, 일정 나이가 지난 사람에게는 흔하게 들어오는 것이다.

혼담이 들어온 남녀는 세 번 정도 얼굴을 보고 친교를 쌓는다.

서로 마음의 결론을 내릴 때는 주선자와 함께 만나 이 혼담을 마무리 짓는 것이 관례다.

물론 그대로 혼인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보통은 친교만 쌓고 끝내는 일이 많았다.

정치적으로 꼭 필요한 결혼이 아니라면 말이다.

시몬이 혼담을 수락한 이상, 스위니 가문에는 거절권이 없을 것이다.

불합리하기는 해도 그것이 신분의 차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루이스가 반드시 시몬과 혼인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복잡한 얼굴을 하는 이안과 달리 시몬은 덤덤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수락……할 수밖에 없었어. 어른들께서 주목하시는 건 스위니 쪽이니까.”

“스위니……쪽?”

“그래.”

다소 이성을 찾은 이안은 어째서 어른들이 스위니 가문을 신경 쓰는 것인지 고민했다.

“……다른 귀족 가문으로 자금이 흐르는 건 보고 싶지 않다는 건가?”

“그래. 그리고 마침 황가에는 써먹을 곳 없는 내가 있었고.”

시몬은 마차의 외벽에 가만히 등을 기대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물론 이안은 그에 동의하지 않았다.

“내 사촌께서는 유능해. 그나저나, 이제야 알겠군.”

이안은 시몬에게 다가서며 제 턱을 만지작거렸다.

시몬이 이 혼담을 수락하지 않았다면 일은 더욱 복잡해졌을 거다.

“그대가 응하지 않았다면, 입안의 혀처럼 구는 가문에서 마땅한 이를 수소문했겠지.”

이안은 몇 명의 후보들을 꼽아 보다가 그만두었다.

훌륭히도 제 이웃도 그 안에 속했다. 마침 연령대도 비슷하고 말이다.

“아마 그랬을 거다.”

“누가 될진 몰라도 꽤 열렬하게 구애할 테고.”

“황가의 혼담을 거역하기는 쉽지 않으니까. 게다가 루이스는 꽤…….”

시몬이 말끝을 흐리기에 이안이 삐딱하게 웃으며 정확히 짚어 주었다.

“매력적이지.”

“그래, 매력적이지. 누구에게나.”

“구애가 길어지고, 거기에 황가의 명령까지 붙으면, 루이스 스위니도 어쩔 수 없는 흐름에 발을 딛게 될 테고.”

“혼인이라는 선택지만 남을지도 모르지.”

자연스레 그려지는 미래에 두 사람은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좋지 않은데.”

이안이 걱정하며 중얼거렸다. 물론 언젠가는 스위니 가문에 대한 처우를 논하리라 예상했다.

이대로 두기에는 지나치게 자금이 많으니까 말이다.

세금으로 압력을 가하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그들을 적당한 방식으로 귀족 사회에 편입시키는 방법을 논의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몇 년이나 더 지난 후에 벌어질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점에서 나는 완벽하지.”

시몬은 드물게 자신을 치켜세웠다.

“루이스의 거절에 질척대지 않을 테니.”

“……그건.”

“한 번쯤 정식으로 혼담이 끝나고 나면, 얼마간은 다시 혼담을 제안하지 않으실 테고.”

자신있게 이야기 하는 시몬과 달리 이안의 표정은 밝기만 하지 않았다.

복잡했다. 여러모로.

“시몬. 이 일이 혹여 그대에게.”

“괜찮아.”

시몬은 이안이 어떤 걱정을 할지 빤히 안 다는 듯, 먼저 대답했다.

“상처받지 않으니까.”

그리 말할 때, 시몬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이안을 외면했다.

이안은 손을 뻗어 조금 긴 듯한 그의 새카만 머리카락을 쓸었다.

시몬은 잠시 눈을 감았다.

솔직히 말하면, 이안이 시몬에게 화를 내리라 생각했다.

그는 분노함이 옳다.

시몬이 아무런 상의도 거치지 않고 혼자 일을 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물론 상의를 할 기회 따위는 없었다.

선황비의 말씀에 생각해 볼 시간을 따로 청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시몬은 제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 이 제안을 반기는 어떤 욕심을 발견하고 만다.

그 욕심이 이리도 건재한 것은 아마, 상냥한 이안이 차마 짓밟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 어쩌면 시몬 그 자신이 소중하게 지켜왔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시몬은 죄책감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머리카락에 닿은 이안의 손길에서 진심 어린 걱정이 느껴졌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그리고 이제, 두 사람이 유일하게 닮은 새파란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했다.

둘을 옭아매는 다양한 감정이 말 대신 시선으로 전해졌다.

그중에는 부정적인 감정이 섞여 있기도 했다.

질투라거나 부러움 같은 것들.

하지만 그런 감정에도 달콤한 전제가 붙고 만다.

이안과 시몬은 서로를 대신 할 수 없는 이를 찾을 수 없으니,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

“지난번에, 내게 두려워하느냐고 물었던가?”

이안은 활을 쏘며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시켰다. 시몬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 옳아.”

그리고 이안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시몬 힐라드를 늘 두려워해. 물론 이렇게 말하는 건 규칙 위반이지.”

이안은 절대적인 사람이 되어주기로 약속했었다. 절대자는 두려움이 없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은 말하게 해 줬으면 좋겠어. 진심이니까.”

“…….”

“나는 그대가 두려워.”

그리고 오랫동안 마음속을 죄었던 단순한 말을 뱉었다.

“루이스 스위니가 그대를 사랑하게 될 것 같아서 두려워.”

이안의 얼굴이 단단히 굳었다.

차마 거짓으로도 웃을 수 없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그의 마음을 아프도록 눌러온 말이다.

“그것만큼은 내 노력으로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내 두려움을 이해해 주길 바라.”

“나는.”

시몬이 곧장 대답했다.

“그녀의 선택지에 드는 것조차 불가능해.”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혼담이 시작된 이상, 그대는 루이스에게 혼인을 청하는 말을 해야 하지.”

혼담의 마지막은 언제나 그런 식이다.

어느 한쪽이 혼인을 청하는 말을 하고, 다른 쪽이 정식으로 거절해야 한다.

“그건 전통이 만든 형식일 뿐이지.”

“하지만 루이스는 찾아낼걸.”

이안은 확신했다.

“그대의 말과 행동에 섞인……어떤 것.”

“…….”

마침 시종이 준비가 완료되었다며 다가왔기에, 이안은 시몬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는 마차에 올랐다.

그건 격려였을까.

아니면 부탁이었을까.

이안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 * *

루이스에게 시몬의 편지가 도착한 것은 그 날 저녁이었다.

그녀는 얇은 천으로 덮어 둔 창틀에 앉아 하얀 봉투를 열었다.

습기를 머금은 종이는 시몬 만큼이나 조용했다.

‘루이스에게.’

익숙한 글씨가 보였고, 루이스는 안도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낮에 전해 들은 ‘혼담’이야기로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일단 사과부터 전한다. 몹시 놀랐을 테지.’

“공자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잖아요…….”

루이스는 옅게 중얼거리며 계속 읽어내려갔다.

‘네가 혹여 걱정하며, 잠이 들지 못할까 봐 이 편지를 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열기를 가져갔지만, 계절은 여전히 여름이니까.’

여름이라는 글자 앞에 무언가를 적으려다 지운 흔적이 있었다.

루이스는 아마 ‘끔찍이도 더운’이라는 말이 지워졌으리라 생각했다.

왜 지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네가 잠들지 못하면 스위니 부부와 이안이 걱정하겠지.’

“시몬이 가장 걱정하는 것 같은데요.”

루이스는 언젠가 시몬을 ‘걱정 인형’이라 생각했던 일을 떠올리며 쿡쿡 웃었다.

‘그러니, 사실대로 말해줄게. 이 혼담은 형식상 이루어지는 것뿐. 네게 어떤 식으로든 압박이나 의무가 생기는 것이 아니야.’

하지만 황실에서 주선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말로 괜찮은 걸까.

‘물론 할 일은 있지.’

일이라는 말에 루이스는 침을 꿀꺽 삼키고, 이어지는 문장에 집중했다.

‘나와 세 번 정도는 만나야 한다는 것과.’

그런 일이라면 환영이다.

시몬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아주 즐거우니까.

‘황실의 돈을 마음껏 사용하는 것.’

“네?”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물론 과묵한 편지가 소리내어 대답하는 일은 없었다.

‘혼담의 주선자 쪽에서 모든 비용을 감당하는 것이 오랜 전통이거든.’

‘물론 요즘에는 거의 사라졌지만, 황실은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아무리 그것이.’

“구시대의 유물이라도 말이죠?”

루이스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시몬의 편지에는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말이 확실히 적혀 있었다.

‘그러니, 우리는 스위니 가문이 내 온 많은 세금으로 식사하거나 공연을 보는 셈이지. 네겐 세금환급이나 다름없는 일이야.’

그리고 그는 잠시 고민을 한 모양이다.

다음 문장의 첫머리에 다소 잉크가 번져있었다.

‘정말로 그것뿐이니까, 안심해. 나는 평소의 시몬 힐라드로 있을 테니.’

루이스도 평소와 같이 행동하면 된다는 거다.

‘그럼, 이름만 거창한 우리의 평범한 놀이가 네 휴식에 방해되지 않기를 빌며.’

그리고 시몬의 사인이 있었다.

편지를 다 적고도 안심하지 못한 그는, 사인 밑에 한 마디 더 걱정을 남겨 두었다.

‘잘 자.’

루이스는 포근한 편지를 가지런히 접어서 한동안 조심스레 쥐고 있었다.

* * *

시몬은 거짓말쟁이였다.

이름만 거창한 게 아니었다. 실제로도 이건 아주 거창했다.

그들의 첫 번째 데이트 일정만 보더라도 명백했다.

오랜만에 혼담을 주도하신 선황비 전하께서는 몹시 신이 나신 모양이다.

두 사람이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기까지 쉴 새 없이 이동해야 하는 일정을 몸소 지정해주셨다.

“미안, 할머님께서 이렇게 신이 나신 줄 몰랐거든.”

“저는 괜찮아요.”

시몬이 문을 열어주며 사과했고, 루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제게 어울리지 않는 대접을 해 주시는 것 같아서 부끄럽지만요.”

시몬이 팔을 내밀었고, 루이스는 얼른 그를 붙잡으며, 작게 속삭였다.

“사실 여기는 제가 드레스를 주문할 수 없는 곳이잖아요.”

“그야……그렇지.”

돈보다도 신분을 먼저 보는 콧대가 높은 가게 중 하나니까 말이다.

선황비 전하께서 직접 ‘루이스에게 옷을 선물할 것’이라고 연락을 넣지 않았다면, 루이스는 문전박대를 당했을 것이다.

“간단하게 생각해.”

“간단하게요?”

“세금환급.”

그야, 그렇게 생각하면 열 벌도 넘게 주문할 수 있는데.

루이스의 신분으로는 올 수 없는 곳이다 보니, 괜히 신세를 지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디자인화를 보면서 대화하는 것은 아주 재미있었다.

루이스와 시몬은 각자 예쁘다고 생각한 그림을 꼽았고, 서로의 취향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간도 가졌다.

“공자님이 여성의 목선에 집착하는 남자인 줄 몰랐어요.”

“목선이 부각 되는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뿐인데.”

그게 그거 아닐까.

“회장님도 공자님의 취향을 알아요?”

“아마도.”

“돌아오면 꼭 말해줘야겠어요.”

루이스가 주먹을 꽉 쥐며 결심하기에 시몬은 조금 웃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이안은 아마 몇 달은 시몬을 놀려먹을 것이다. 꼭 어린 소년 같은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어쨌든 결론적으로는 시몬이 추천한 디자인을 주문하게 되었다.

가게의 모든 이가 그가 고른 쪽을 추천했으니 말이다.

드레스를 고른 뒤에는 비교적 평범한 일정이 이어졌다.

호화로운 가게에서 식사하는 것 말이다.

루이스는 이안과 약속한대로 좋은 고기를 먹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식사가 끝났을 때는 달콤한 디저트가 나왔다.

시몬은 단 것을 즐기지 않았으니, 디저트는 모두 루이스의 몫이 되었다.

“분명히 지배인이 놀랐을 거예요.”

루이스가 푸딩을 바닥까지 긁어먹으며 웃었다.

“모든 접시를 너무 깔끔하게 비워 보내서?”

시몬이 바로 대답했고,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루이스는 성장기의 막차에 탑승했으니.”

“어, 어떻게 알아요?”

“이안이 그러던데.”

“두 분은 그런 것까지 말씀하신단 말이에요?!”

“루이스가 내 취향에 대해 이안에게 말하는 것처럼.”

윽, 그렇게 지적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세 사람은 꽤 오랫동안 어느 한 명이 부재중일 경우,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해주곤 했다.

언제라도 함께 대화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럼 다음 일정은 뭐예요?”

시몬은 내키지는 않지만, 선황비께서 전해주신 일정을 떠올렸다.

“비가 오고 있으니, 미술관이로군.”

“비가 오지 않았다면 어디인데요?”

“산책.”

루이스는 잠시 커다란 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루이스는 미술관을 좋아한다.

하지만 비가 오는 날의 미술관에는 사람이 붐비기 마련이고, 시몬은 그런 장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그 날의 편지에, ‘평소의’ 시몬으로 루이스를 만날 것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루이스 역시 ‘평소의’ 루이스가 되어 그를 걱정할 권리가 있었다.

“산책해요, 우리.”

다행히 시몬은 루이스의 호의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각자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빗줄기는 오전보다 가늘어졌다.

신발이 조금 젖는 것을 제외하면 걷기에 나쁜 날은 아니었다.

게다가 거리는 한산했다. 저녁에는 다시 끔찍하도록 비가 올 것이라고 신문에 적혀 있었기 때문일까.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은 거의 대화하지 않았다.

서로의 우산이 만들어 주는 거리감 때문이었다.

시몬은 가깝지 않은 애매한 간격이 흡족했다. 그에게 어울리는 것이니까.

그러다 어느 순간, 루이스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세 걸음 정도 그녀가 앞서게 되었을 때, 시몬은 그녀가 서두르는 이유를 깨달았다.

멀리 소년이 보였다.

낡은 우산을 든 어린 소년은 꽃바구니를 들고 몹시 애가 타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루이스가 소년에게 동전을 내밀자, 소년은 ‘감사합니다.’라고 속삭이며 루이스에게 작은 마타리 꽃을 건넸다.

루이스도 사르르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마타리꽃을 보면 더운 시간이 거의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어 기뻤다.

“비가…….”

그리고 루이스는 소년이 끌어안은 바구니로 비가 뚝뚝 새는 것을 알아차렸다.

낡은 우산은 작은 소년과 여린 꽃바구니도 지키지 못할 만큼 지쳐 있었던 모양이다.

루이스는 제 우산을 내밀었다.

당황한 소년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바라보기에, 그녀는 재차 자기 우산을 내밀었다.

“열심히 만들었잖아.”

루이스는 꽃을 엮느라 거슬거슬해진 소년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소년이 들고 있던 우산을 가져오고, 그의 손에 루이스의 우산을 쥐여주었다.

소년은 비가 들지 않는 제 바구니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고, 루이스는 그 모습이 좋았다.

두 사람의 곁으로 다른 행인이 지나가기에, 루이스는 얼른 그쪽으로 눈짓했다.

어서 가보라는 뜻이었다.

소년은 고개를 꾸벅이고는 달려갔다.

“루이스.”

어느새 따라온 시몬이 루이스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 주었다.

“공자님.”

루이스의 머리카락이 가벼이 젖어있었다. 그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는 동안 그녀는 시몬을 향해 빙글 몸을 돌렸다.

“이거 봐요. 마타리꽃이에요.”

그리곤 두 손으로 작은 꽃을 내밀었다. 여리고 자그마한 노란 꽃이 점점이 피어있었다.

“예쁘죠?”

그는 대답 대신에, 그녀의 머릿결이 머금은 물기를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고마워요.”

“천천히 가도 되었을 텐데.”

“미안해요. 말도 없이 서둘러서. 하지만…….”

루이스는 노란 꽃 사이로 잠시 제 얼굴을 묻었다.

“그거 알아요? 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이렇게 거리에서 꽃을 파는 소년이었대요.”

예전에 들은 적이 있었기에, 시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제게 언제나 그분을 존경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러니 그분과 같은 일을 하는 소년을 보았을 때는 마음이 급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다.

“게다가 제가 좋아하는 꽃이 있었고요.”

루이스는 다시 시몬에게 꽃을 내밀었다.

“그러니, 받아줄래요?”

시몬은 다시 건네는 작은 꽃을 받았다.

“고맙…….”

평범한 답례의 말은 차마 맺어지지 못했다.

언뜻 바라보가 된 그녀가 그와 같은 그늘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새카만 우산이 금빛 머리카락의 생기를 지우고, 보라색 눈동자에 어둠을 더하고 말았다.

그리고 시몬은 그런 루이스를…….

그는 제 생각을 지우며, 애써 그녀가 건네준 꽃을 고쳐 쥐었다.

꽃잎에 방울져 있던 작은 빗물이 후드득 그의 장갑으로 떨어져 내렸다.

물방울은 면직물의 좁은 틈새로 자연스레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무척 미약한 것이나, 시몬은 그것을 막아 낼 방도조차 없었다.

향기를 머금은 물방울은 곧 그의 살결에 닿아서.

심장을 간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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