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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의 여자사람친구입니다-48화 (48/92)

?48. 아주 느릿하고, 정성스럽게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루이스.”

루이스의 아버지는 조금 부끄러운 듯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예술원의 계약 파기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네 분노는 정당해.”

“……아니에요.”

루이스는 억지로 치솟는 감정을 누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야말로 멋대로 화를 내서 죄송해요, 전…….”

“부정에 화를 내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인맥을 동원하여 누군가의 사업을 방해하는 일에 대해서는 더더욱.”

“하지만 아버지처럼 냉철하게 바라보는 게 옳은 거죠?”

스위니씨는 몸을 돌려 제 딸을 바라보았다.

최근 들어 그의 딸은 훌쩍 자라나고 있었다. 그건 단순히 키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양한 지식과 경험이 그녀의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 성숙한 눈빛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는 이 일을 냉철하게 바라보지 않는단다.”

“네?”

냉철하지 않다고? 그렇다면 사건 개요를 들려줄 때 느꼈던 그 차분한 목소리는 무엇이었을까?

“익숙해진 것뿐이지.”

“…….”

“몇 번이나, 아마 앞으로 몇 번이나 이런 일이 생길 거다.”

“역시……이건 부당해요.”

루이스가 다시 울상을 지었다.

“별수 없지. 우리는 공식적으로 뒤를 돌봐주는 귀족 가문이 없으니. 눈엣가시로 여기며 얄미워하는 귀족은 많아도.”

가령, 이번 일을 교묘하게 꾸면 라센 백작가라든가.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아카데미를 졸업하신 분들도 모두 귀족분들이잖아요. 온실에 우호적이시고요.”

“비공식적인 관계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단다. 그건 그 가문에 폐를 끼치는 일이지.”

“으…….”

루이스도 이제 공식적인 혹은 비공식적인 관계라는 말은 이해한다.

결혼 등을 이용하여 서류로 남은 관계를 말하는 거다.

대부분의 귀족 가문들은 그러한 형태로 오랜 동맹관계를 맺는다고 들었다.

하지만 스위니 온실에서 앞으로 혼인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루이스뿐이다.

달리 형제가 있는 것이 아니니까.

“……제가 온실에 도움될만한 가문과 공식적인 관계를 만들어야 할까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스위니 씨는 그만 툭 하고 책을 떨어뜨렸다.

“루이스.”

“네?”

스위니씨는 제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분명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빠와 결혼할래요.’라고 말했던 딸이었다.

정확히는 11년 3개월 7일 전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나, 나는 거리를 쏘다니며 작은 꽃다발을 팔게 되어도 관계없다. 그러니까, 그…….”

결혼 같은 걸 하면 안 된다.

애초에 스위니씨는 제 딸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을 정도로, 제대로 된 남자를 본 기억이 없었다.

물론 황태자 전하와 공자님의 경우에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남들보다 아주 조금 나을 뿐이었다. 개미의 발자국 정도의 차이로 말이다.

“아버지?”

“아니, 내가 열심히 일할 테니까.”

“아빠?”

“어디서 뭘 하는 녀석이든 관계없어. 루이스 스위니를 여왕으로 떠받드는 녀석이 아니면 안 돼. 아니, 마흔 가지의 엄격한 심사 과정을 거쳐서…….”

“애초에 저도 그 마흔 가지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하지는 못할 것 같은데요.”

“걱정할 것 없다.”

스위니 씨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씨익 웃었다.

“내 딸은 마흔 개가 아니라 일흔 개의 엄격한 심사 과정이 있다 해도 모두 통과할 테니.”

루이스는 의심스러운 얼굴로 아버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감히 상상하건대, 루이스를 향한 엄격한 심사란, ‘나의 딸’이라는 명목으로 부당하게 통과시킬 것임이 틀림 없었다.

* * *

비는 계속 내렸다.

루이스는 옷을 갈아입으며, 잠시 원작에 대해 생각했다.

최근 들어 그녀는 원작이 지켜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엄격하게 나누고 있었다.

혹여 원작이 깨어진 곳에 어떤 규칙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물론 가장 큰 가설은 ‘루이스의 영향권에 속한 것은 변한다.’ 였다.

가령 가장 더운 날에 열리는 물 축제에 대한 것인데.

여기에서 술을 잔뜩 마신 용병들이 광장 동상의 목을 베어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여기까지는 원작과 같았다.

하지만 원작에서는 이 사건을 해결한 것이 이안과 스텔라였고, 현실에는 황실에 속한 기사단이었다.

물론 그 이후로 이야기의 줄기는 다시 원작을 따라갔다.

용병들은 축제 기간 내내 광장에서 ‘토마토를 맞는 역할’로 봉사하게 되었다는 결론 말이다.

가는 길은 달라졌지만, 결국 도착지는 같아졌다.

이것을 과연 원작 보존의 힘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그저 ‘루이스의 영향권’ 밖이라 바뀌지 않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생각이 복잡해지는 건, 아마.

“아가씨, 황태자 전하의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그래. 원작을 깔끔하게 즈려 밟아주신 남자 주인공 덕분이다.

얼마나 강하게 짓밟으셨는지, 원작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다른 측면이 툭툭 터져 나올 정도다.

누가 알았겠나.

상냥하고 부드러운 줄 알았던 라센 교수는 사실 스텔라를 이용할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생각대로 되지 않자, 그녀를 대하는 방식은 점점 거칠어져갔다.

뺨을 때릴 정도니까.

스텔라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이제는 빠져나올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

루이스는 ‘환경’의 중요함을 안다. 그것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과 성격을 바꾸는지도.

스텔라가 보여 준 거짓말과 표독스러운 표정은 그 환경이 가져다준 것이리라.

물론 루이스는 그 환경을 조성하는데 대단한 공을 세웠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딘가 좀 씁쓸해진다.

스텔라가 무너지도록 밀어붙인 사람이 루이스인 것 같지 않은가.

‘고의는 아니었어요.’

굳이 구분하자면, 이건 사고다.

사고의 가해자가 루이스인지 이안인지는 조금 고민해 볼 필요는 있지만 말이다.

루이스는 스텔라에게 닿지 않을 사과를 중얼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활짝 열린 현관 너머로, 새카맣게 내리는 비가 보였고 마차 한 대가 접근하고 있었다.

* * *

“내가 불만을 품어도 괜찮은가?”

이안은 맞은편에 앉은 루이스와의 거리를 바라보며 가볍게 얼굴을 찌푸렸다.

거리가 멀다.

아주 멀어서, 팔을 뻗어도 닿을 수 없을 거리였다.

“품지 마세요.”

루이스가 헤실 웃으며 대답했고, 곧 사용인이 두 사람에게 차를 내어주었다.

이안이 선물로 들고 왔다는 케이크도 함께.

“초콜릿 케이크네요.”

루이스가 케이크 접시를 들어 올리며 감탄했다.

“그래, 찐득찐득한 초콜릿 케이크지.”

“생일케이크가 아직도 남아 있었어요?”

“그럴 리가 있나? 새로 만들었어.”

“누가요?”

루이스가 뭔가 기대하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기에 이안은 가벼이 손을 휘저었다.

“기대에 응하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이런 케이크는 생존용 식품이 아니라서 배우지 못했어.”

“아…….”

“알았어. 배워둘게. 그럼 되는 거지?”

“네?”

“케이크를 만드는 법에 대해서 제대로 배워두겠다고.”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루이스는 황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얼른 포크를 움직여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흐으, 찐득찐득. 너무 좋다.

“이렇게 맛있으니까요.”

“그야 그렇겠지.”

그는 제 앞에 놓인 케이크를 루이스 쪽으로 슥 밀어주었다.

루이스는 케이크와 이안을 번갈아가면서 바라보았다.

어째 웃음이 났다. 그와의 관계가 조금이나마 변했다는 것이 이런 사소한 점에서 느껴졌다.

“이런 거로 너무 좋아하지 마. 별것도 아니니까.”

그는 괜스레 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비가 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좋아한단 말이에요. 게다가 요즘은 어쩐지 계속 배가 고파요.”

“그대가 성장기의 막차에 탑승한 모양이지. 드디어 키가 쑥쑥 자라나겠군. 이럴 때 잘 자고, 고기를 많이 먹어야 해.”

“그럼 회장님만큼 커질까요?”

“그거 아주 좋은데.”

루이스는 키가 커도 멋질 거다. 언제나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할 수 있다는 점도 좋다.

같은 시야를 갖게 된다는 것도 매력적이고.

“그러니까, 기분이 좋아지는 마법의 문장을 매일 세 번씩 말하며, 고기를 챙겨 먹도록 해.”

물론 루이스는 그가 가르쳐준 마법의 문장을 잊지 않았다.

내일은 먹는다. 좋은 고기를.

다시 되새겨도 훌륭한 문장이다. 하루를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내일의 희망까지 안겨주지 않는가.

“내가 없는 동안에도 말이지.”

“없는……동안에요?”

“잠시 수도 밖 일정이 생겼거든.”

그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무언가를 걱정하듯 말이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시기에요?”

루이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비가 오는 날의 마차 이동은 그다지 안전하지 않았다.

젖어들어 연약해진 지면으로 마차의 바퀴가 박히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하니까.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기 때문에 일정이 잡혔지.”

“아…….”

루이스는 무언가를 이해한 것처럼 탄식했다.

이안은 몇 년째 수해가 반복되는 지역으로 직접 가려는 것이다.

원작에도 나왔던 사건이니 아마 확실할 거다.

“몇 년째 수해 대비를 위해 지원금을 넉넉히 보내주었는데도 피해 규모가 줄어드는 법이 없어서 말이야. 직접 가서 확인하고 오라는 아버님의 명령이 떨어졌어.”

루이스는 진실을 안다.

황실에서 매해 보낸 수해 관련 지원금은 영주가 도박과 경마를 즐기는데 알뜰하게 쓰였다.

서류를 교묘하게 꾸며, 지금까지 책임을 피해올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이안이 모든 것을 밝히고, 그 영지는 물론 작위에 이르기까지 잠시 동안 황실에서 회수할 테니까.

안타까운 에피소드지만, 루이스는 독자 시절 야광봉을 흔들며 읽었던 부분이다.

그도 그럴 것이.

“라피스 백작가는 대체 어떻게 되먹은 곳이지?”

이안이 앞으로 가야 할 곳이 스텔라의 본가니까 말이다.

낮에는 스텔라를 싫어하는 가족들을 응징하고, 밤에는 찐하게 연애하는 에피소드다.

서로 호흡이 닳을 때까지 키스하는 은혜로운 삽화도 있었다. 루이스는 그 삽화에서 약 30분간 눈을 떼지 못했었다.

‘굉장했지……. 이 남자 주인공께서 스텔라의 허리를 확!’

루이스는 시선을 내려 이안의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저 팔 말이다.

물론 삽화에서는 팔을 걷어주신 덕분에 훌륭한 근육도 핏줄도 보여서 더욱 좋았지만.

잠깐.

그렇다는 건, 앞으로, 언젠가는 그 허리를 확! 하는 부분에 루이스가 들어갈 수도 있다는 뜻인데.

‘흐으…….’

루이스는 소파의 팔걸이를 손으로 꽉 쥐었다.

“그대, 얼굴이 빨간데. 괜찮은가?”

“괘, 괜찮아요! 잠시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요.”

“떠오르는 것?”

차마 열정적인 키스 장면을 떠올렸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루이스는 황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라피스의 여식은 그대에게 폐를 끼치고, 그 본가는 이리도 의심스럽다니. 여러모로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야.”

“그래도 공정하게 일하실 거잖아요.”

“물론 그럴 셈이야. 개인적인 불만은 잠시 넣어두고.”

“스텔라도 만나게 되시겠네요.”

“……달갑지는 않지만 그리되겠군.”

이번에는 어떻게 되려나.

원작 속 이안과 스텔라의 관계는 수해 사건으로 인해 더욱 깊어졌다.

서로 더 서로를 탐하게 될 정도로. 그것이 이 에피소드의 결론이었다.

루이스는 축제와 용병들의 사건을 떠올렸다.

비록 사건이 진행되는 방향은 달랐으나, 그 결론 만큼은 원작과 같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정말이지.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이 싫어서 이 사람을 사랑하고 싶지 않았던 건데.

하지만 이미 생겨버린 감정은 어쩔 수 없으니, 루이스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렇게.

“후음.”

한숨을 뱉는 것뿐이다.

“……가지 말라는 말은 안 하는군.”

“그야, 공무로 가시는 거잖아요?”

“그렇지만, 그대가 어쩐지 싫어하는 것 같아서.”

“표정으로 드러났나요?”

“훤히.”

“죄송해요.”

“괜찮아. 나로서는 그대가 그런 표정을 지어주는 쪽이 기쁘니까.”

“정말 못됐네요.”

“알고 있던 거잖아. 그건.”

“그야, 그렇지만요.”

“그나저나, 루이스.”

이안은 잠시 주변을 둘러 보았다. 충실한 스위니 가문의 사용인이 루이스의 곁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루이스를 돌보아준 이라 이안도 얼굴은 익혀두었다.

얼마 전 이안이 숨어들었을 때 루이스의 옷을 갈아입혀 준 사람이기도 했고.

그나저나 참 융통성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지키고 있지 않으면, 이안이 루이스를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걸까.

물론 잡아먹었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재미있는 책이 있다면 빌려주었으면 좋겠는데. 마차에서는 심심할 테니까.”

“재미있는 책이요?”

“그래. 이왕이면 훌륭한 기사가 주인공인 책이 좋겠군. 다소 고난을 겪더라도 결론적으로는 행복해지는 이야기였으면 좋겠고.”

“아, 그거라면 마침 적당한 책이 서재에 있어요.”

루이스는 손뼉을 치고는 곁에 있는 사용인에게 무어라고 귓속말을 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사용인은 조금 기다려 달라는 이야기와 함께, 드디어 응접실을 나섰다.

“정말이지, 아카데미에 있는 기간을 소중히 해야 하는 이유를 이제야 실감하는군.”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소 불만스럽게 툴툴거렸다.

“어째서요?”

“그야, 좀처럼.”

그는 루이스가 앉은 소파를 양손으로 짚으며 허리를 숙였다.

창문을 등진 그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들었다.

“기회가 안 오니까.”

한순간에 얼굴이 가까워졌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앞으로 몇 주는 내 약혼녀를 못 볼 텐데 말이야.”

“아쉬우……세요?”

“아쉽기만 할까.”

그리 말한 후에는 루이스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계획이 있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대가 좋아하는 그 말을 가장 완벽하게 전할 계획 말이지.”

“그, 그렇게까지…….”

“그렇게까지 신경 쓰고 싶었어.”

“왜요?”

“그것만큼은 동화책의 음흉한 왕자들에게 지고 싶지 않았거든.”

“동화책의 왕자님은 조금도 음흉하지 않아요.”

“그대가 그들을 동경한다는 점에서 내겐 충분히 음흉한 놈들이야.”

그가 열 받는다는 얼굴을 했고, 루이스는 키득키득 웃었다.

“루이스.”

루이스의 웃음이 잦아들기도 전에 그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여전히 가까운 거리에서.

“아마, 꽤 오래 걸릴지도 몰라.”

“그야, 그럴 것 같네요.”

수해의 원인 파악부터, 처벌을 결정하는 과정은 꽤 길어질 테니까.

게다가 실제로 수해 복구도 해야 하고.

“그대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저는 괜찮아요.”

“그대가 그리 말하면, 나 혼자 안달 내는 것 같아서 심장이 아픈데.”

“물론 저도 안달이 나 있기는……흣.”

남은 말은 맞닿은 입술 끝에서 호흡과 함께 사그라들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라서 다행이다. 루이스는 두 눈을 감은 채,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고요한 실내에 아마 무척 창피한 소리만이 남을 테니까 말이다.

서로가 조금 더 깊이 닿는 질척한 소리나, 얼떨결에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음성 같은 것들.

어쩌면 평소와는 다른 열기까지.

전부 짙은 빗물이 끌어안아 주었다.

“그러니, 루이스.”

입술 끝이 여전히 닿은 상태에서 그가 속삭였다. 깊은 호흡이 담긴 목소리는 어딘가 거칠었다.

“잠시 그대에게 맡겨 두고 갈 테니까.”

무엇을?

이라고 묻고 싶었지만, 입술이 닿은 터라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하지만 곧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입술이 소리 없이 어떤 말을 속삭여 왔다.

아주 느릿하고, 정성스럽게.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입술 끝에 닿는 감촉과 온기만으로도 알았다.

그가 루이스에게 맡겨 놓은 말이 무엇인지.

“……소중하게.”

서로가 떨어지는 순간이 되어서야, 루이스는 겨우 입을 열었다.

“맡아둘게요.”

“고맙다.”

그는 저를 향해 웃는 눈가에 가볍게 키스했다.

“내게는 하나밖에 없는 말이니까, 그대가 잃어버리거나 돌려주지 않으면 꽤 곤란할 거야.”

“돌려드리기 싫을지도 몰라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 말을 아주, 아주 좋아하거든요.”

루이스가 웃으며 대답했고, 그는 오랜만에 그녀의 뺨을 얄밉도록 꼬집었다.

“정말이지 이 불경한 얼굴은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는군.”

물론 이 불경한 얼굴이 참을 수 없이 좋은 거지만.

대체 이 깜찍한 걸 두고 어떻게 멀리 간담.

“……미치겠네, 진짜.”

참을성이 부족해진 것인지, 아니면 원래 없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앞으로 몇 주는 못 볼 텐데, 키스를 한 번밖에 못 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리다가 구멍이 나는 한이 있어도 오늘은…….

똑똑.

그때,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안은 깊이 한숨을 뱉고는 순순히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괜히 쓸데없는 의심을 샀다가는 앞으로 루이스와 만날 때마다, 스위니 씨가 따라붙는 무시무시한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이 분명했다.

딸을 사랑하기로는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남자니까.

문이 열렸고, 사용인은 몇 권이나 되는 책을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다.

“깔끔하게 읽고 돌려주시는 거 잊지 마세요.”

“알고 있어. 책을 펼쳐서 엎어 놓아도 안 되고, 쿠키를 먹으면서 읽어도 안 되는 거지.”

이안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책이 아니라 다른 걸 부탁할 것을 그랬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릴만한 것으로.

“달력에 동그라미 치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

“그러니까……오늘은.”

루이스는 배시시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아마 몹시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진한 파란색으로 색칠하시겠네요. 그렇죠?”

진한 파란색으로 다섯 개쯤은 그리고 싶었다고, 이 아가씨야.

……보라색으로도 두 개쯤 더 그렸으면 좋겠고.

* * *

라피스 백작령으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다행히도 비가 내리지 않아서, 시종들의 고생이 줄었다.

“꽤 먼 길이 될 텐데.”

이안은 저를 배웅해 주기 위해 찾아온 시몬과 가볍게 악수했다.

“괜찮아. 책을 빌려왔으니까.”

이안은 마차의 문을 열어서, 가지런히 쌓아놓은 이야기책을 보여주었다.

루이스가 빌려준 것이었다.

“조심히 다녀왔으면 좋겠다.”

“그래야지.”

“그리고…….”

시몬이 무언가를 고민하며 머뭇거렸다.

이안은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제 친구의 낯선 행동을 바라보았다.

그의 망설임은 길어졌다.

결국, 참지 못한 이안이 그를 격려하는 말을 건넸다.

“괜찮아, 편하게 이야기해.”

“……선황비께서.”

시몬은 겨우 입을 열었다. 어딘가 거북한 듯 말이다.

“할머님께서?”

“내게 혼담을 제안하셨는데.”

이안은 가볍게 얼굴을 찌푸렸다.

어른들이 건네는 혼담이란 보통 가문의 이익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말에 휘둘리지 않아도 괜찮아 시몬. 상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넌 네가 원하는 사람을 만날 권리가…….”

“루이스.”

흐릿한 목소리가 무척 익숙한 이름을 흘려보냈다.

어쩐지 거기에 달콤함이 섞였다고 느끼는 건, 이안의 착각일까.

“상대는 스위니의 루이스야. 그리고 나는…….”

시몬은 이안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분명하게 말을 맺었다.

머뭇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하던 순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말이다.

“그 제안을 수락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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