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주인공의 여자사람친구입니다-47화 (47/92)

?47. 열기 어린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제 아들입니다. 기억하십니까?」

힐라드 공작은 칠흑 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홉 살 소년을 데려와 이안 앞에 선보였다.

「물론 기억합니다, 숙부님. 시몬 힐라드, 제 유일한 사촌을 잊을리 있을까요.」

이안의 대답에 힐라드 공작은 빙긋 웃었다.

시몬이 잠시 놀란 얼굴로 제 아버지를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공작령에 있었으나, 오늘부터 황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숙부님께서 기쁘시겠군요.」

이안의 말에 힐라드 대공은 다른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음, 앞으로 전하께서 들으실 모든 교육과정에 시몬이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공작은 엄격한 얼굴로 제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시몬이 황급히 이안의 앞으로 나아가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시몬 힐라드입니다.」

이안은 다소 과장 된 그의 인사가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힐라드 공자, 제게 그리 과하게 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안의 말에는 공작이 바로 반발해 왔다.

어찌 그러겠냐는 것이다.

「전하께서 타고나신 성스러움이 이 아이에게는 조금도 흐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전하. 마땅한 존경을 누리세요.」

고작 아홉 살 소년이 누릴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안은 딱히 반발할 말을 떠올리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 이후로 시몬은 매일 궁에 드나들었다.

그렇다고 하여 이안과 시몬이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시몬은 교육이 시작되기 직전에 도착하여, 끝나면 곧바로 돌아갔다.

몇 번인가 이안이 산책이나 승마를 권하기도 했지만, 침묵으로 시작하여 침묵으로 끝난 뒤에는 그런 일도 사라졌다.

두 소년은 다양한 것을 배웠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법을 배우는 것보다 우선시 되지 않았다.

물론 소년들에게는 승마나 검술 수업에 비하면 따분하기 짝이 없는 수업이었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정당한 후계자를 가리기 위한 왕위계승법을 제정하게 되었습니다. 계승법에는 가장 큰 전제가 있는데, 두 분께서는 이에 대해 들어 보셨습니까?」

교수의 질문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고, 시몬은 저었다.

이안은 시몬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호기심도, 열망도.

이안은 감각적으로 한 가지를 깨달았는데, 시몬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고도 고개를 저었다는 사실이다.

어째서일까.

「그럼 전하께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교수님께서 답을 바라시기에, 이안은 일단 차분하게 대답했다.

「오직 크론드의 혈통임을 증명해낸 자만이 계승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절대 조건입니다.」

「혈통을 증명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고 계십니까?」

이번에도 시몬이 고개를 젓기에, 이안이 계속해서 대답했다.

「마탑의 보물을 통합니다. 보물은 적합한 자가 손을 얹을 때만 빛을 발합니다.」

「훌륭합니다. 전하.」

교수가 칭찬했고, 시몬은 ‘증명’이라는 단어에 밑줄을 그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교수가 한 마디 덧붙였다.

「물론 공자님께서도 정당한 혈통을 지니고 계시니, 얼마든지 증명하실 수 있을 겁니다.」

교수는 늙은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그건 무척 가벼운 말이었다. 어떤 정치적 의도도 없었다.

하지만 시몬은 놀라는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고는 얼른 대답했다.

「저, 저는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소년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야……물론 그렇습니다만.」

교수는 어린 공작가의 소년이 ‘제 혈통을 증명하게 되는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점에 조금 놀랐다.

그건 이안의 죽음을 말했다.

물론 교수는 그것까지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증명’이라는 말에 소중하게 밑줄을 긋는 시몬에게, 한마디 이야기를 걸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어쨌든 분위기가 어색해졌기에, 교수는 서둘러서 다음으로 넘어갔다.

「또한, 후계자는 적합한 배우자를 맞이할 의무를 갖습니다.」

그리고 ‘적합한’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신의 존재와 그곳에서부터 시작된 황권의 위엄을 부정하지 않으며, 마땅한 교양을 지녀야 합니다. 외람되나, 이러한 이유로 힐라드 공작님의 계승권은 소멸했습니다. 종교가 다른 외국의 귀족과 혼인하셨으니.」

이안은 신, 황권, 교양에 밑줄을 친 후에, 작은 메모지에 옮겨 적었다.

반면 시몬은 어떤 것에도 밑줄을 긋지 않았다.

교수는 이어서 황권 계승에 관한 여러 법률과 재정 배경을 설명해 주었다.

지루한 수업은 한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겨우 끝났고, 교수는 내일까지 오늘 배운 내용을 다시 읽으라는 숙제를 남겼다.

수업이 끝나자, 소년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바깥으로 나갔다.

이제부터 두 사람은 활쏘기를 연습해야 했다.

오늘은 가을이라 날씨가 좋았고, 바람도 거의 불지 않았다.

시몬은 제 손에 잡힌 굳은살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웃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희미하게 말이다.

그리고 활이나 창, 검술을 가르치는 늙은 프레야 경의 말을 떠올렸다.

‘제 수업이 없는 날에도 매일 조금씩 활쏘기를 연습해 두십시오. 마침 연습하기 좋은 계절이 아닙니까.’

오늘은 프레야 경이 연습에 참관하지 않는 날이다.

그러니 시몬의 심장이 남몰래 두근거리는 것은 당연했다.

자유롭게, 그가 원하는 대로 연습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는 활쏘기가 좋았다.

그 행위의 순간순간을 전부 사랑했다.

시위를 당겼을 때 느껴지는 긴장감과 예민해진 감각.

제 손을 떠난 활이 어디에 도달하는지 바라보는 것.

활이 과녁에 박히는 시원한 소리.

곧 두 사람은 연습장에 도착했다.

텅 빈 그곳에는 두 사람과 몇 명의 시종뿐이었다.

소년들은 별말 없이 장갑을 끼우고, 작은 활을 쥐었다.

능숙하게 시위를 당기는 시몬의 얼굴에는 점점 생기가 돌았다.

과녁 근처를 맴돌던 화살은 어느새 조금씩 중앙을 노려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시몬은 처음으로 제게 ‘재능’이라는 말을 허락하고도, 놀라지 않았다.

즐거움에 빠져, 평소의 감각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푹!

그리고 한순간.

놀랍게도 그의 화살이 정확하게 가운데를 향했다.

시몬은 그대로 선 채, 작은 화살과 과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이다.

처음이었다.

제가 무언가를 이렇게 노력해본 것도, 결과로 보답을 받는 것도 말이다.

심장이 아프도록 쿵쿵 뛰었다. 아마 이게 성취감이라는 걸 거다.

몇 번인가 책으로만 읽었던 감각이 그의 몸을 꽈악 비틀어 쥐었다.

「대단하잖아!」

바로 곁에서 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뼉을 쳐 주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이안의 얼굴에 시몬은 제 어깨가 으쓱이는 것을 느꼈다.

「벼, 별것 아닙니다.」

습관적으로 겸양의 말이 나왔지만, 실은 진심이 아니었다.

시몬 힐라드는 제가 아주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믿고 있었다.

「어떻게 별것이 아닐 수가 있지? 나는 과녁에 도달하는 것 마저 어려워.」

이안은 시종을 시켜, 방금 제대로 명중한 화살을 가져오도록 했다.

「내 사촌이 좋아하는 것을 이제야 알았어. 늘 궁금했었지.」

이안은 시종이 가져온 화살을 시몬에게 건네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갖고 싶지만, 그대에게 더욱 의미 있겠지.」

「전하는 전하께서 원하는 것을 취하실 수 있습니다. 제게 양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양보가 아니야. 이 영광은 그대의 것이니까.」

시몬은 이안이 건네는 화살을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가느다란 화살 안에 들어있는 ‘영광’이란 아마, 그의 노력이나 기쁨 같은 것들 이리라.

「그리고 나는 그대의 영광에 살짝 기대어 프레야 경을 조금 놀라게 해 주고 싶은데.」

이안이 제 활을 집어 들며 이야기했고, 시몬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소년은 서로의 자세를 봐주며 함께 연습했다.

물론 이안의 실력이 좋아지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이안이 쏜 화살이 엉뚱한 곳에 떨어질 때마다 시몬은 웃었고, 이안은 그런 제 사촌의 얼굴이 신기하여 함께 웃었다.

시종들이 간식을 가져와 잠시 그늘에서 휴식하는 순간에도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다른 날에도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이안이 마지막으로 남은 사과를 먹으며 아쉬운 듯 중얼거렸고, 시몬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시 공손해진 태도에 이안은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야.」

그때 즈음에 시몬을 데리러 온 공작가의 마차가 도착했다.

시몬이 돌아간 후로 이안은 몇 번인가 더 활을 쏘는 연습을 했다.

그 후에는 간단히 씻고, 외출을 준비했다. 오늘은 잠시 스위니 가문의 온실에 들러야 했다.

마침 루이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세 가지 있었다.

신의 존재를 믿는지.

황권의 위엄을 부정하지 않는지.

그리고 마땅한 교양은 잘 쌓고 있는지 말이다.

물론 루이스는 신도 잘 믿을 테고, 교양도 잘 쌓고 있을 거다. 똑똑하고 성실한 아이니까.

하지만 황권의 위엄은 아주 손쉽게 부정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걱정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아이는 감히 황태자 앞에서 단단하게 두 주먹을 쥐고, 별소릴 다 해대니까 말이다.

「전하. 온실에 너무 자주 온다고 생각하진 않으세요?」

「숙제를 여기까지 가져오지 마세요!」

「윽, 내 약혼녀라니, 누가 들을까 봐 무서워요!」

불경하기 짝이 없는 아이다.

감히 황비 전하께서 남기신 소중한 약속을 언급하며, 인상을 찌푸리다니.

물론 그는 루이스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걸 아주 좋아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제부터는 황권의 위엄을 믿는 척이라도 해달라고 부탁할 셈이었다,

‘척’만으로도 충분했다.

정말로 믿고, 이안을 공경하는 자세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아니, 루이스가 그렇게 되어도 곤란했다.

이안이 장갑을 끼우며 루이스를 생각하고 있을 때, 그의 뒤를 따르는 시종 하나가 다가왔다.

시종은 상자에 담긴 화살 하나를 내밀었다. 평범한 것이었지만, 이안은 그것이 무엇인지 쉽게 알아차렸다.

「시몬이 잊고 간 건가?」

그리 묻자, 시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사촌께서 그리 다급하게 돌아가시더니, 결국 제 명예까지 두고 가셨군.」

이안은 키득키득 웃으며 화살이 담긴 상자를 받아 들었다.

「아마 서둘러 공작께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

아마 시몬은 꽤 칭찬을 받을 거다.

먼 미래에는 사냥 대회에서 우승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받게 될 테고.

어쩌면 훌륭한 저녁 식사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스위니 부부도 루이스가 무언가를 해낼 때마다 그런 식으로 그녀를 격려해 주었으니까.

「공작가에 잠시 들르겠다 전해라. 내 사촌이 두고 간 영광을 내가 직접 가져다줄 것이라고.」

발이 빠른 전령 하나가 서둘러서 궁을 빠져나갔고, 이안은 느긋하게 마차에 올라 화살이 든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시몬이 온 이후로 공작 저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왠지 재미있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부터 두 사람은 무척 가까워졌으니까 말이다.

물론 마지막에 시몬이 남긴 ‘죄송하다’는 말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말이다.

* * *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공작가의 집사가 안절부절못하며 건넨 말에 이안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레 찾아온 객은 기다림을 마땅히 여기는 것이 옳으니까.

「무료하시다면, 그림을 감상하시겠습니까?」

기다림이 길어지려는 모양인지, 집사가 부드러이 권유했고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령의 아름다움을 담은 그림은 일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이안은 별다른 장식이 없는 검소한 복도를 거닐었다.

몇 걸음마다 만나게 되는 그림 앞에서는 잠시 멈추어 섰다.

뒤따르는 집사가 무어라 설명을 해 주었는데, 그는 이야기를 전하는데 좋은 재주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안은 몹시 즐겁게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리고 ‘언젠가 시몬과 함께 공작령에 가 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 즈음.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네가 정녕 미친 것이 틀림없구나!」

공작의 목소리였다.

집사가 황급하게 이안에게 다른 길을 권했다.

주인의 치부를 손님께 보일까 전전긍긍하는 모양이다.

물론 이안도 예의를 아는 사람이다. 집주인의 개인적인 대화를 엿듣는 것은 몹시 흉한 일이니, 기꺼이 돌아가려고 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고통스럽게 쥐어짜는 시몬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공자님이라 떠받들어 주니, 네가 정녕 대단해 보였느냐?」

「아, 아닙니다. 그저…….」

「감히 황태자 전하를 이기려 들다니!」

「……이기려던 것이 아닙니다.」

「시몬 힐라드!」

공작이 고함친 이후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소리가 들려오는 방으로 다가가게 되었다.

몇 번인가 집사가 간곡하게 비는 소리를 냈으나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흉측한 소리가 들려왔다.

짜악!

그건 아마 시몬의 뺨을 때리는 소리였을 거다.

가혹한 소리는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저항하는 소리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시몬 힐라드.」

그리고 공작이 지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살아남고 싶으냐?」

「…….」

「살아남고 싶으냐고 물었다.」

「……예.」

「그렇다면, 그 누구도 네게서 희망을 찾게 하지 마라.」

공작의 말은 짧았지만, 이안은 거기에서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 어떤 이도 네게서 헛된 희망을 품어서는 안 된다.」

이안은 화살이 든 상자를 꽉 쥐었다.

「멍청한 귀족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희망을 찾는다. 그 무엇이라도 네가 황태자 전하보다 낫다는 소문이 들린다면 말이다!」

공작이 이안과 시몬을 함께 교육하며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시몬이 이안보다 못하다는 것을 모두에게 증명하는 것.

어느 부모가 제 자식이 덜떨어지길 바랄까.

하지만 공작은 꽤 진지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희망이 구체화 되는 순간부터, 넌 목숨을 위협받을 거다.」

그 어떤 것도 삶보다 중요하지 않을 테니까.

「……내게는 그렇게 된 너를 구할 힘조차 없다.」

그러니 공작은 제 자식에게 오직 단 하나의 가르침만을 강조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전하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 전하의 것을 바라서도 안 된다.」

그리고 공작은 침묵했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무언가가 제 어깨를 강하게 짓누르는데,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결국, 그는 화살이 든 상자를 집사에게 맡기고, 도망치듯 공작가를 떠났다.

온실에 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는 제 방에 처박혔다.

그리고 제 어깨를 짓누르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시몬의 삶에 손해를 끼쳤다는 미안함일까? 아니다. 그런 것과는 달랐다.

이안은 옅은 목소리로 공작의 말을 되뇌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전하를 넘어서는 안 된다. 전하의 것을 바라서도 안 된다…….」

며칠 뒤 이안은 나름대로 어떤 결론을 내렸다.

그 날은 지독히도 많은 비가 내렸기에 몹시 추웠다. 여름이 지나고 처음으로 난로에 불을 피워야 했을 만큼.

수업을 마친 소년들은 난롯가에서 냉기가 도는 손을 녹였다.

그러다 문득 이안이 어렵게 입을 떼었다.

「나……. 뭐든 잘하게 될 테니까.」

차마 공작과의 대화를 엿들었다고 말할 수가 없었으니, 이안의 말은 어딘가 허공을 짚는 것 같았다.

「전하는 무엇이든 잘하십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이안은 괜스레 근처에 놓인 부지깽이로 툭툭 불을 건드렸다.

붉고 노란 불 가루가 허공에 떠오르고 곧 사라졌다.

「아무도……. 날 넘어설 수 없도록 할 테니까.」

「…….」

「열심히 잘할 테니……. 뭐든지.」

이안이 든 장작 끝을 바라보던 시몬이 이윽고 대답했다.

「제 존재를 짓밟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그냥, 최선을 다하고 기뻐하던 그 날의 시몬이 좋았다.

그가 계속 그런 기쁨을 누리며 살게 하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의 방법밖에 없었다.

이안이 절대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시몬이 아무리 애써도 넘어설 수 없는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

물론 어떻게 하면 그리될 수 있는지 아홉 살의 소년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그 날의 시몬을 되찾아 주고 싶었다.

「갑자기 이상한 소리 해서……, 미안.」

「괜찮습니다. 전하.」

시몬은 한결 상냥해진 얼굴로 다가왔다.

「부디 절 완벽하게 짓밟는 호의를 베풀어 주세요.」

「…….」

「제가 몸부림치도록.」

시몬은 단 한 번 느꼈던 어떤 전율을 떠올렸다.

제 노력이 만족에 도달했던 그 순간의 감각 말이다.

「그러고도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되어 주세요. 그리해 주신다면, 저는 전하께 무엇이라도 바칠 겁니다.」

「무엇이라도?」

「예, 무엇이라도.」

「그럼…….」

이안이 바란 것은 두 사람의 관계였다.

시몬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친구’라는 영역을 제 마음속에 만들어야 했다.

물론 무뚝뚝한 시몬과 친구로 지내기는 쉽지 않았다.

혼자 떠들고 묻는 것에 지친 이안은 훗날, 커다란 결심을 하고 한 가지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루이스 스위니입니다. 만나 뵐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 힐라드 공자님.」

루이스는 사람의 마음을 밝히는 재주가 있으니, 이안의 결정은 영 틀렸다고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너희의 사이가 무척 견고하길 바라. 감히, 그 누구도 끼어들 생각을 할 수 없도록…….」

그 누구도.

그 모호한 말에 가장 먼저 포함되는 것은…….

이번에도, 시몬 일까.

과거를 헤아리던 이안은 이제 두 눈을 감았다.

열기 어린 목소리가 떠올랐다.

「잔인하도록 짓밟아 주지 않으시면, 주제도 모르고 감히 주인의 것을 바라고 맙니다.」

가을과는 다른 여름의 빗소리가 귓가를 아프도록 채웠다.

질척한 비의 계절이 시작되려는 모양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