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지켜준다고
루이스는 시선을 돌렸다. 바깥에서 이쪽으로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는 죄책감이 이제야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들켜버릴 상황이 되어서야 뒤늦게.
그녀의 불안이 전해진 걸까.
그녀를 당겼던 손은 이제 루이스의 머리를 감싸며 따뜻한 품으로 끌어왔다.
곧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요.”
“헤셰 경…….”
루이스는 그를 불렀다.
입가에 그의 옷깃이 닿아서 속삭이는 소리밖에 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정말로요. 맹세했잖아요. 기억하죠?”
그는 루이스를 안심시키려는 듯, 언젠가 그녀에게 했던 이야기를 상기시켰다.
지켜준다고 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안이 그녀를 귀하게 여기는 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들이 기댄 문 앞에서 멈추었다.
헤셰는 마지막으로 루이스를 꾹 누르듯 강하게 안아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제 팔을 풀어내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오늘의 헤셰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어쩐 일로 잠복할 때 입는 새카만 옷도, 기사단의 옷도 아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조금 굳어있던가 싶었던 그의 표정에 얼른 미소가 그려졌다.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말이다.
헤셰는 제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살짝 문을 열었다.
얼굴만 겨우 보일 정도로 살짝 말이다.
“아 진짜. 원장님!”
“……헤셰 경?”
“사람이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요? 아 진짜.”
“경이야말로 제발 예술원의 박스석을 멋대로 이용하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벌써 이게 몇 번째입니까?!”
“흐음, 네 번째?!”
“여섯 번째입니다! 모두 여성분과 함께 계셨고요!”
예술원장이 처절하게 소리쳤고, 문에 기댄 루이스는 조용히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이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헤셰는 여자를 엄청 좋아한다고 했었지…….
“하지만 미래의 백작이자, 기사단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제가, 태양 아래서 데이트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건 무슨 소리입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이 일을 아시면, 전 죽은 목숨이란 뜻이죠.”
“헛소리는 그만하시고, 어쨌든 빨리 나가세요. 안에 계시는 아가씨는 어떤 분입니까? 제가 얼굴을 꼭 뵈어야겠습니다.”
예술원장이 문고리를 붙잡아 밀었고, 헤셰는 방긋 웃으며 문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싫은데요.”
“경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체 어느 가문의 여식인지 제가 단단히 주의를……!”
“있잖아요. 원장님.”
예술원장이 낑낑거리며 문을 여는 동안에도 헤셰는 여유로운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며 넌지시 말을 걸었다.
“가끔은 저도 분장실에 초대해 주세요.”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저도 박스석은 조금 질렸다는 소리죠. 그러니 마침 원장님이 애용하시는 분장실을 제게도 내어주시면, 다음 밀회는 분장실에서 할게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이 일은 공식적으로 문제 삼겠소!”
“그거 좋네요. 은밀한 만남의 장소로서 박스석과 분장실 중 어느 쪽이 더 인기 있는지 확인해 보신다는 말씀이시죠?”
“헤셰 경!”
“그럼 저는 분장실에 한 표. 물론 오늘의 아가씨와 함께라면 어디라도 기쁘겠지만.”
헤셰는 잠시 문 뒤에 몸을 숨긴 루이스를 바라보며 헤벌쭉 웃었다.
예술원장을 놀리려는 의도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원장님은 어디에 투표하시겠어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는 꽤 열이 오른 채 헤셰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 저런.”
헤셰도 만연했던 미소를 흘려보냈다.
“대답하지 않으셔도 관계없습니다. 대신.”
담백해진 그의 얼굴에는 본연의 날카로운 시선만이 남았다.
“가족분들께 여쭤보죠.”
“지금……, 날 협박하는 거요?”
“네, 저도 좋아하는 방법은 아닌데 어쩔 수 없네요. 지금은 유일한 사람이랑 함께 있거든요.”
예술원장은 굴욕을 삼키는 얼굴로 잠시 헤셰를 노려보았다.
“……전하와 사절단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반드시 비워주어야 합니다. 여긴 사절단을 이끄는 재상께서 이용하실 자리란 말입니다.”
“영광이네요.”
헤셰는 어깨를 으쓱였고, 예술원장은 비로소 몸을 돌려 사라졌다.
헤셰는 문을 닫고는 루이스를 향해 웃었다.
‘봐요. 괜찮죠?’라는 얼굴로 말이다.
루이스는 어떤 것부터 말하면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다양한 말이 입가에서 아른거렸다.
하지만 일단 가장 중요한 말부터 전했다.
“고마워요.”
“전하께 꼭 전해주세요. 제가 온실의 루이스를 지켰다고요.”
“전해야……해요?”
루이스가 조금 울상을 지었고, 헤셰는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제가 돈값을 하고 있다는 걸 전하께서도 아셔야 하니까요.”
그는 턱을 들어 올린 채 잠시 으스대는 표정을 지었다.
“아 참.”
그리고 무언가를 깜빡했다는 듯 얼른 덧붙였다.
“오늘 예뻐요.”
“네?”
“예쁘다고요. 그러니까 이렇게 예쁜 온실의 루이스를 제가 끌어안았다는 건 빼고 이야기해요. 알았죠?”
그는 몇 마디 변명을 더 덧붙였다.
복도에 선 루이스를 끌어오려면 어쩔 수 없었다던가.
안심시켜주고 싶었다던가 하는 이야기 말이다.
“알았어요. 말 안 할게요.”
“정말이죠?”
헤셰는 어째 의심스러운 듯 재차 물었다. 물론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도 제가 루이스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전하께 홀랑 일러바치셨잖아요!”
“그, 그거야 헤셰 경이 전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그랬죠.”
“물론 저는 황태자 전하를 아주 좋아해요. 하지만, 루이스와 함께 있는 전하를 조금 더 좋아한다는 건, 저만의 소중한 비밀이었는데!”
“전부터 궁금했는데……. 헤셰 경은 왜 저와 있는 전하를 좋아하는 거예요?”
그는 대답 대신 일단 히죽 웃었다.
그리곤 능글맞게 대답했다.
“편해서요.”
“누가요?”
“제가요.”
루이스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자,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온실의 루이스. 전하를 죽이고 싶어요?”
무서운 말에 루이스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헤셰는 하얀 장갑을 끼운 손으로 루이스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어쩐지 그녀의 대답을 그의 손바닥에 새겨두려는 것처럼 말이다.
“루이스는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유일한……사람?”
“지금의 이 대답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유일한 사람.”
루이스는 헤셰를 바라보며, 그의 얼굴과 목덜미에 새겨진 흉터의 의미를 떠올렸다.
황태자의 안전을 책임지기 시작한 이후로, 그는 언제나 죽음과 가까웠다.
아마 다양한 경우를 겪었을 거다.
부드러운 모습으로 다가와 등을 찌르려는 이도 있었을 테고.
그러니 헤셰는 이안의 주변을 이루는 이들을 믿기 어려워졌을 거다.
“그러니 온실의 루이스는 제게 있어서.”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단 하나뿐인 인간.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는 타인.
소중히 지켜야 할 사람을 잠시나마 내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이.
“……헤셰 경?”
“아…….”
그는 잠시 말을 잃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는 손에 쥔 루이스의 뺨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괜히 다른 이야기로 말을 돌렸다.
“오늘 진짜 지나치게 예쁘네요. 혹시 전하가 루이스를 보고 이성을 잃으면 힘껏 걷어차 줘요. 알았죠?”
루이스는 그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전하께서 그럴 리 없잖아요.”
“그럴 수도 있죠. 여기엔 토끼 인형 엘리스가 없으니까요.”
그는 의미심장하게 키득거렸다.
“그나저나 헤셰 경은 여기에서 뭘 하고 계셨어요?”
루이스는 새삼 그가 입은 옷을 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대로 된 신사의 정장이었다.
“게다가 근사하게 입으시고요.”
“헤에, 근사한가요?”
그는 조금 뽐내는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네. 멋있어요. 진짜 미래의 백작님 같아요.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나요? 회의?”
“실은 여성분을 만나러 왔어요.”
그는 조금 쑥스러운 듯 제 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데, 데이트인가요?!”
“좀 달라요. 제 의지가 아니거든요. 저도 일단은 귀족이고, 황태자 전하의 측근이니까 여기저기에서 혼담이 들어온단 말이에요.”
헤셰가 그 혼담들을 무척 싫어한다는 것은 그의 얼굴만 봐도 알 것 같았다.
“말이 혼담이지, 그건 ‘몇 번 만나봐라’는 윗선의 명령이에요.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만나기도 하고, 공식적으로 차이는 역할도 해야 했죠.”
“차이셨군요?”
“네, 다섯 번 연속으로 차였죠. 다들 훌륭한 아가씨인데, 제가 즐겁게 해드리지 못했거든요. 재주가 없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오늘이 여섯 번째 혼담이고요?”
“맞아요.”
“상대 아가씨는요?”
“좋아하는 남성분을 배신할 수 없다면서 양해를 구하곤 바로 돌아가셨어요.”
“또 차이셨네요.”
“윽……. 너무 강조하지 말아요. 나중에 주선자 앞에서 한 번 더 차여야 하니까요. 어쨌든 사람이 없는 곳으로 와서 이제부터 뭘 할까 고민하고 있었죠. 휴가니까요.”
“그런데 제가 나타난 건가요?”
“그렇죠. 운명처럼. 그럼 이제 루이스도 말해줘요.”
“저요?”
헤셰가 고개를 끄덕였고, 루이스는 잠시 고민했다.
사업에 관한 일을 멋대로 이야기해도 좋을지 쉬이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헤셰에게는 신세를 졌고, 이미 몇 개나 되는 비밀을 공유하고 있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헤셰는 루이스를 믿어주는 사람이니까.
루이스도 헤셰를 믿어야 마땅했다.
“실은, 부모님과 관련된 일로 왔어요.”
그녀는 예술원과의 오랜 계약과 갑작스러운 파기에 관해서 설명했다.
헤셰는 고개를 끄덕이며 루이스의 이야기에 충실하게 귀를 기울여 주었다.
“그건 원장님이 나빴네요.”
게다가 루이스의 편을 들어주기까지 했다. 말뿐이라도 정말 고마웠다.
“원한다면 해치워줄까요? 내일 아침이면 감쪽같이 호흡을 멎게 할 방법을 몇 개나 알아요.”
……아, 아니. 말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루이스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아요! 저는 헤셰 경이 무서운 일을 조금이라도 덜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아흐, 진짜, 귀여워 죽겠네! 백작가로 데려오고 싶을 정도로요! 백작 영애 자리에 관심 없어요? 아니, 제가 스위니 가문으로 갈까요? 스위니 사장님께도 망나니 아들이 하나 필요하겠죠?”
루이스가 대답도 없이 웃기만 하기에, 헤셰는 울먹이는 소리로 ‘진심이란 말이에요!’라고 외쳤다.
“그보다 계속 여기에 있는 건 곤란하지 않을까요?”
“괜찮아요. 사절단 사람들은 어차피 막이 열리기 직전에 도착하니까요.”
헤셰는 문제 될 것 없다는 듯 여유로운 걸음으로 박스석을 꾸며놓은 꽃을 조심스레 만지작거렸다.
가련한 향기가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기분 좋게 공연을 볼 수 있도록 신경을 써 둔 것이 틀림없었다.
‘……기분 좋게?’
루이스는 잠시 제가 선택한 말을 되짚었다.
그야 물론 꽃과 함께 머물면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다.
예쁘고 향기도 좋으니까.
하지만 그건 보편적인 시선일 뿐, 사실은 꽃과 함께하는 것을 괴로워하는 사람도 존재했다.
“헤셰 경.”
루이스는 확인하듯 물었다.
“여기. 재상님께서 사용하실 예정이라고 했던가요?”
“네. 그렇다고 하네요. 마침 여기에서는 무대가 잘 보이거든요. 평소에는 큰 금액을 기부하는 라센 백작 가문에서 사용하지만요.”
루이스는 부모님께서 정리해 놓으셨던 서류를 떠올렸다.
다양한 내용이 들어 있었는데.
일단은 이 공연이 외교적으로 몹시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는 것이었다.
사절단이 속한 나라의 극작가가 쓴 작품을 올리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러니 처음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어떤 무례나 불편을 끼치는 없어야 했다.
그 때문에 부모님은.
“……션 우드 선생님을 불렀던 거고.”
“루이스?”
헤셰가 부르는 소리에 루이스는 다급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꽃을 교체해야 해요.”
“네?”
“그러니까, 여기에 핀 꽃 전부요! 꼼꼼하게 청소도 할 필요도 있겠네요. 가능하면 이 털 달린 의자도 새것으로 바꾸고요!”
“의자는 이미 새것인데요?”
“아, 정말이지. 그게 아니라!”
루이스는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생각과 말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그러니까, 헤셰 경!”
루이스는 제 두 손을 맞잡았다. 조금이라도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말이다.
“재상님은 체질적으로 꽃에 거부 반응을 가지신 분이라고요!”
헤셰도 그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꽃가루 따위에 눈물이나 콧물이 흘러나오는 힘겨운 체질 아닌가.
“……아.”
그는 잠시 꽃으로 가득한 주변을 둘러보고는 조금 큰 소리로 외쳤다.
거의 선언하는 것에 가까웠다.
“이번 외교는 깔끔하게 망했네요!”
* * *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비록 재상님의 체질과 박스석의 꾸밈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마구잡이로 꽃을 헤집어 뜯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미래의 백작님이잖아요!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요!”
루이스는 예술원장의 사무실까지 헤셰의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어째 잘난척하는 것 같은 일은 저와 맞지 않는다고요오.”
“정말이지, 헤셰 경이 가장 좋아하는 황태자 전하의 일을 돕고 싶지 않아요?!”
“그야. 업무 중에는 전하를 좋아하지만, 오늘은 휴가 중인 걸요.”
“휴가 중에는 좋아하는 마음도 함께 휴가를 가는 건가요?”
“보통 그렇지 않나요? 학생인 루이스가 방학 중엔 공부를 휴가 보내는 것처럼요.”
뭔가 이해되는 것도 같은 이 헛소리는 뭐람.
“물론 온실의 루이스가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일이라면, 들어 줄 수도 있지만요.”
“그럼 부탁드려요!”
루이스는 지체하지 않고 두 손을 모아 간절하게 외쳤다.
“음, 솔직히 말하면, 스위니 가문은 이대로 실패를 기다리는 편이 좋지 않아요?”
그가 가벼움을 내려놓은 채 진지하게 물었다.
“헤셰 경. 이건 사업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루이스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꽃에 대한 거부 반응은 절대 가벼운 일이 아니에요. 당하는 사람에겐 정말 엄청난 문제라고요. 실제로 증상도 심각하고요. 때로는 목숨을 위협받을 정도로요.”
게다가 재상쯤 되는 인물이라면, 공연 내내 그 괴로움을 손수건에 감춘 채 숨기려고 할 것이다.
끊임없이 콜록대고 눈물 콧물을 쏟으며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일부는 사업적인 문제기도 하네요.”
“네?”
“손님을 대접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답고, 완성도 높은 조화를 지금 바로 대량으로 조달할 수 있는 곳은……. 수도에서 한 군데밖에 없을 테니까요. 아마도요.”
“제가 거기까지 교섭해야 한다고요?!”
“괜찮아요. 그건 헤셰 경의 역할이 아니니까요.”
루이스는 웃으며 그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그냥, 그렇다는 정보를 흘려주세요. 그러면 교섭을 진행 시키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루이스는 예술원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공연까지 남은 시간은 사십 분 남짓.
다른 화원에서 조화의 재고 여부를 알아볼 시간은 없을 거다.
“시간이죠.”
* * *
예술원장은 당황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헤셰의 무례와 그가 전한 내용에 대해서 말이다.
일단 시간을 확인하고, 화원 책임자를 불렀다.
‘왜 생화로 꾸민 거냐.’라는 어이없는 추궁에 ‘거부 반응에 대한 정보는 주신 적이 없다.’ 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야 그렇겠지.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다면, 경험 미숙이다.
예술원은 스위니 가문에 일을 전담시켜왔다. 꽤 오랫동안 말이다.
황실과 관련된 행사일 경우, 스위니 가문은 자연스레 예술원과 협약한 계약서를 이용하여 항상 수행팀에 정보를 의뢰하곤 했다.
새로 계약을 한 화원에서는 이런 절차를 알 리 없으니, 평범하게 일을 진행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정보가 오는 시간을 기다렸다가는 시간을 맞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국가 행사를 앞둔 수행팀의 일 처리는 항상 늦기만 했으니까.
어쨌든 쓸데없는 말싸움 속에서 헤셰가 툴툴거렸다.
“그래서 어쩔 건지 말을 해줘야 나도 도울 거 아니에요. 스위니 가문에 당장 달려가서 조화를 가져와도 늦을 판국에!”
예술원장은 달리 방법이 없지 않냐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스위니 가문의 조화를 이쪽 화원으로 납품하여, 장식하는 쪽으로 마무리 짓죠.”
헤셰가 루이스를 돌아보았다.
어떠냐는 뜻이었고, 루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희로서는 예술원과 직접계약이 아니면 곤란해요.”
“고작 박스석 하나란 말이오. 고작!”
“네, 고작 하나라도 계약해드리겠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루이스가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원장님께서 저희와 계약하지 못할 다른 이유가 있지 않으시다면 말이죠.”
원장이 잠시 고민하는 듯 끙끙거렸다.
“스위니 가문의 후계자.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의 수석 신입생이라고 했던가.”
작은 목소리로 루이스에 대해 중얼거린 그는 곧 오만상을 찌푸렸다.
“성년이 되지 못한 자네에게는 아직 계약 교섭권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네만?”
“……그, 그야.”
그렇긴 하지만, 조화를 가져오면서 어머니의 도움을……. 아 참, 편찮으시지.
“더욱 골치 아프게 되었군. 스위니 가문이 안 된다면, 차라리 이제라도 장식을 전부 뜯어내고…….”
장식을 전부 뜯어낸다고?
끔찍한 말에 루이스는 물론 화원의 책임자도 얼굴이 구겨졌다.
식물들이 모두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는 소리 아닌가.
“그건 안 돼요!”
“그건 안 됩니다!”
루이스와 화원 책임자가 동시에 소리쳤고, 예술원장은 짜증이 극에 달한 얼굴로 호통쳤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저 꽃은 안되고, 스위니 가문에는 계약을 진행할 사람이 없는데!”
“그건…….”
루이스가 곤란하게 중얼거리는 순간에 원장실의 문이 노크도 없이 열렸다.
쿵, 하고 다소 무례한 소리까지 울렸다.
루이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일단 몹시 당황한 션 우드 선생님이 있었다. 어떻게 알고 오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의 표정을 보니, 제대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이곳으로 떠밀려 온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를 데리고 온 사람은.
“……전하?”
루이스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평소와는 달리 다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루이스는 물론 방에 있던 모두가 다급하게 예를 갖추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루이스와 예술원장 사이로 조금 구겨진 서류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그것은 스위니 부인의 필적으로 적힌 것으로, 이안에게 루이스 스위니의 보호자 자격을 위임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제 됐나?”
그는 원장을 향해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루이스가 악마 같은 미소로 분류해 둔 바 있었던 그 미소 말이다.
“이제 무엇이든 마음껏 진행해 볼 수 있을 거야. 안 그런가, 나의 피보호자 씨?”
그의 말에 가장 먼저 대답한 것은 벽에 걸린 시계였다.
째깍.
그 소리를 의식한 예술원장의 행동이 몹시 급해졌다.
루이스가 조금 전에 말한 것과 같이, 역시 교섭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진행하는 것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