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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의 여자사람친구입니다-43화 (43/92)

?43. 평화로운 여름방학……?

장례식 이후로는 평화로운 여름방학이 이어졌다.

그 평화의 증거로 루이스는 매일 낮잠을 잤다.

낮잠을 마치면 애매한 오후와 저녁의 가운데에서 목욕했다.

말이 목욕이지, 사실은 물을 받아놓고 멍하니 앉아서 천장을 멀뚱히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어쨌든 루이스는 그런 시간을 아주 좋아했다.

그리고 해가 지면, 본격적인 하루가 시작되었다.

본격적이라고 말은 해도 그다지 바쁜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 어려운 책을 읽거나, 부모님과 차를 마시거나, 온실을 산책하는 것 정도다.

“죄송해요. 요즘은 이상할 정도로 게으름을 피웠네요.”

그러니 루이스는 부모님과 차를 마시며, 조금 얼굴을 붉혔다.

제 방학을 새삼 돌이켜보니 한량도 이런 한량이 없었다.

바쁜 부모님을 도와드리지도 않고 잔뜩 늘어지다니.

“그건 상관없단다. 그렇죠, 여보?”

어머니께서 너그럽게 대답해 주셨고,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여주셨다.

“무엇보다 여름이잖니. 루이스는 더위에 아주 약하지.”

“그야……. 그렇지만요.”

“게다가 지금은 방학이고.”

어머니는 찻잔을 내려놓고는 몹시 엄중한 표정을 지었다.

“방학에는 방학만의 일이 있는 법이란다.”

“어떤 일이요?”

“일단 머리를 비워야지. 그래야 머리에 빈자리가 생겨서, 다음 학기에도 수업을 들을 수 있지 않겠니?”

그런가?

루이스는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다. 사람의 머리라는 것이 정말 저런 구조인가 싶어서 말이다.

“그것뿐이 아니란다.”

어머니의 말씀은 계속되었다.

“지금 게으름을 피워두지 않으면, 다음 기회는 겨울에나 온다는 점에 주목해야 해.”

“무슨 기회가 오는데요?”

“게으름을 피울 기회 말이야.”

아. 겨울 방학을 말씀하시는 거구나.

“아카데미는 끔찍한 곳이니까. 돌아가면 분명히 머리가 뜨거워질 때까지 공부를 시키겠지. 지금 쉬지 않으면 다음 휴식은 겨울 방학이야!”

어머니께서 양쪽 어깨를 부르르 떠시기에 루이스는 조금 웃어버렸다.

“웃기는.”

“하지만 어머니께서 질색하는 얼굴을 하시는 건 오랜만에 본단 말이에요.”

스위니 부인은 긍정적이며, 많은 것을 사랑한다.

하지만 아카데미의 수업과 시험은 그 거대한 목록에 들어가지 못한 모양이다.

“아카데미는 너무 무서운 곳이란 말이야.”

어머니는 오랜 기억을 깨우며 짧게 한숨을 쉬셨다.

“시험 결과에 따라서 오답 리포트 분량도 결정되고, 방학에 본가로 돌아갔을 때의 대접도 결정되잖니.”

물론 그다지 훌륭한 대접은 받지 못했단다. 라며 어머니는 울상지었다.

아무래도 가문에서 기대한 정도의 점수는 나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나중에 내 아이에게 절대로 성적을 기준으로 태도를 바꾸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요?”

“그랬는데…….”

부인은 잠시 고민하며 말을 골랐다.

실은 루이스가 수석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도, 그녀는 제 딸을 너무 많이 칭찬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혹여 루이스가 수석을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 따위로 착각하는 것이 무서워서 말이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딸의 손을 잡았을 때. 펜이 닿는 모든 곳에 단단한 굳은살이 잡힌다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에 스위니 부인은 깨달았다.

이런 아이를 마음껏 칭찬하지 않는 것은 부모의 직무유기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네 성적이 내 사랑을 결정할 수는 없지만, 네 몸에 남은 노력의 흔적은 나를 감동하게 했단다.”

정말로 고맙구나.

어머니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치 가족끼리의 비밀인 것처럼 말이다.

소중하게 건네주는 말이 부끄럽고 좋아서 루이스는 괜스레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저, 전 지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뿐이에요.”

“하지만 전하는 상급생이시잖니. 너와 성적을 겨룰 일은 없을 텐데……?”

“네?”

여기에서 왜 전하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루이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 아니었구나. 어쩐지 네가 ‘지고 싶지 않다.’라고 하니, 왠지 전하가 떠올랐지 뭐니.”

“물론……. 전하께도 지고 싶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요.”

“어디든 경쟁자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소중하게 하렴.”

소중하게 하라고?

부모님의 말씀을 보석처럼 여기는 루이스지만, 이건 조금 생각해보아야 할 여지가 있다.

스텔라 라피스를 소중히 하라니.

역시 그건 어려운 일이다.

물론 부모님께서는 ‘시험 부정의혹’ 사건에 대해 듣지 못하셨으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니 루이스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부모님께 그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느니, 작은 거짓말을 하는 편이 나았다.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네 방학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잊지 말고.”

“하지만 이대로라면 침대와 한몸이 될 것 같으니까, 내일부터는 조금 움직여 볼까 봐요.”

“침대와 한몸이 되는 게 어때서 그러니? 게으름의 기회란 그다지 자주 오는 게 아니란다. 누리지 않으면 아깝잖니.”

어머니의 권유에 루이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항상 부지런하고, 매사에 성실하신 아버지는 게으른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언젠가 루이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로.

‘게으름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달라붙을 때는 가벼워도, 떨어질 때는 무척 무거운 것이란다.’

그러니 매일매일 침대와 욕조에서 벗어나지 않는 루이스의 생활을 반대하실 것은 분명했다.

“루이스.”

시선을 눈치챈 아버지께서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셨다.

잘 보세요.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제 게으름을 잔뜩 비판해주실 테니까요.

“네 어머니의 말씀이 항상 옳단다.”

“……네?”

“난 네 어머니를 처음 안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늘 그렇게 생각했지.”

자, 잠깐만요, 아버지! 게으름을 경계하라고 조언하셨었잖아요!

“어떤 순간에도 네 어머니의 말은 항상 옳았고, 나를 구원했지. 그러니 항상 어머니의 말씀을 잘 따르도록 하렴. 루이스.”

루이스는 잔뜩 울상을 지은 채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예전에는 제게 다른 신념을 말씀하신 거로 기억하는데요. 그러니까, 게으름에 대해서요.”

“다른 신념이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그리고 아버지는 근엄한 목소리로 선언하셨다.

“네 어머니가 내게는 유일한 신념인데.”

그러고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살짝 웃으셨다.

정말이지 아버지!

두 분이 서로 사랑하시는 건, 단둘이 계실 때만 표현해 달란 말이에요!

루이스는 괜스레 빨개진 얼굴을 제 손바닥 사이로 묻었다.

* * *

‘이 이상 게을러지고 싶지 않아요.’라는 루이스의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다행히도 말이다.

“며칠 뒤에 황립 예술원에서 공연이 있단다.”

“알고 있어요. 외국의 사절단을 위한 공연이죠?”

아버지와 함께 일하시는 분들이 일러 주셨다.

부모님께서 최근에 무척 바쁘셨던 것은 그 일 때문이라고.

공연장에서 꽃은 꽤 할 일이 많았다.

배우에게 공연의 성공을 축하하는 것은 물론, 홀과 박스석을 아름답게 꾸며놓는 것 역시 꽃의 역할이니까.

특히 박스석은 예술원의 후원자가 소유한 만큼, 철저하게 개인의 취향에 맞추어 주는 것이 중요했다.

그간 루이스의 부모님은 외국 사절단의 목록을 확보하고, 그들의 성향을 파악하려고 애를 쓰셨을 것이다.

“잘 알고 있구나. 하지만 공연 당일에 나는 항구에 가 있을 거야.”

“그렇다면 현장에는 어머니께서 가시겠네요. 제가 어머니를 보필해도 좋을까요?”

“내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거란다.”

아버지는 루이스의 금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셨다.

시원하고 커다란 손이 기분 좋게 머릿속을 간질이는 기분에, 루이스는 살짝 웃었다.

“내 우수한 직원들이 일하는 모습에서, 네가 많은 것을 배웠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어머니의 우아함도 배울게요.”

“그런 건 이미 충분하도록 갖추고 있단다.”

“그렇지 못해요. 실은 저.”

루이스는 두 손을 꼭 모아 쥐며 솔직하게 말했다.

“얼마 전에도 창문을 뛰어넘었거든요. 그러니까 아마 우아하다는 단어와 제가 나란히 설 수는 없을 거예요.”

루이스의 솔직한 고백에. 아버지는 어째선지 웃으셨다.

“우, 웃지 마세요. 어쩔 수 없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네가 다치진 않았고?”

“다행히도요. 시몬 공자님께서 안아주셨거든요.”

그 순간. 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싹 사라졌다.

그리고 다소 음험한 얼굴로 루이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셨다.

“안아……주셨다고?”

“네. 무사히 착지시켜주셨죠.”

“즉, 붙잡아 주셨다는 뜻이군. 그렇지?”

“네.”

아버지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대체 ‘안았다.’와 ‘붙잡았다.’ 사이에 얼마나 커다란 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카데미에서도 여전히 친하게 지내는 듯하니 다행이구나.”

“그야, 시몬 공자님은 상냥하신걸요. 있죠, 제가 입학할 것을 기다려서 머리 리본도 선물로 주셨어요. 노트도 빌려주셨고, 망가진 것이 있으면 늘 고쳐 주세요.”

“답례는 했고?”

“쿠키를 한 번 사다 드렸어요. 음, 하지만 그 외에는 해드린 게 없네요. 뭔가 답례를 더 하는 편이 좋겠어요.”

스위니씨는 시몬에게 줄 답례를 고민하는 루이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옅게 한숨을 쉬었다.

다 자란 딸을 묵묵하게 바라보는 일은 꽤 힘들었다.

* * *

어머니와 루이스에게 일을 맡긴 채, 아버지는 항구 도시로 떠나셨다.

루이스는 아버지께서 계시지 않으면 저택이 조용하고 쓸쓸해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죄송하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저택에 머물러 준 손님 덕분이었다.

“선생님의 조화는 정말 최고예요.”

루이스는 틈이 날 때마다 손님 방으로 찾아가, ‘션 우드’의 작업을 구경했다.

그는 가짜 꽃, 즉 조화를 만드는 장인으로, 의뢰가 있을 때마다 스위니 저택에 머물면서 조화를 만들어 주었다.

“최고라는 말을 저희 아버지께서 들으셨다면, 아마 무척 화를 내실 걸요.”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방금 만든 꽃 하나를 루이스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칭찬은 기쁘니 답례로 이걸 드리죠.”

루이스는 하얗게 갈라진 그의 손가락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게 내미는 조화를 받았다.

하얀 듯 투명한 꽃잎이 겨울처럼 반짝였다.

“이건……?”

“제멋대로 상상한 꽃입니다. 동굴 같은 곳에 피어있을 것 같죠?”

“네. 예뻐요. 정말로요.”

“그렇게 말해 주시니 기쁘네요. 아버지께는 혼이 났습니다. 근본도 없는 꽃을 만든다고요.”

“실존하지 않는 꽃이니까요?”

“예. 하지만 제 머릿속에는 생생하게 실존하는데 말이죠.”

그는 손끝으로 제 머리를 톡톡 치고는 다시 다른 재료를 집어 들었다.

“저는 선생님이 상상한 꽃도 아주 좋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거래할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도 마음이 놓이네요.”

그는 작은 이파리 모양을 이리저리 잡으며 피식 웃었다.

“정말로요. 어떤 향이 날까, 어떤 감촉일까……. 어쩌면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이 들어요.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에는 누구라도 행복할 거예요.”

루이스는 투명한 꽃을 강한 햇살에 비추며 이리저리 들여다보았다.

“아가씨 말을 듣고 있으니, 제 조화가 진짜 꽃 같은 면이 있는 것 같네요.”

“진짜 꽃인걸요!”

루이스는 다소 큰 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스위니에요. 선생님의 꽃이 진짜가 아니었다면, 사랑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아가씨는 정말.”

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션 우드는 방금 완성한 이파리 줄기를 루이스에게 건네주었다.

“사람을 기분 좋게 부려먹는 재주가 있네요. 자, 이거도 받아요. 그 꽃이랑 함께 장식하면 꽤 예쁠 테니까.”

“아, 아뇨 부려먹다뇨! 전 그냥…….”

“얼른 받아요.”

그가 재차 줄기를 건네기에 루이스는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아가씨는 뇌물을 받으셨으니. 이제 다른 조화 장인과 거래하지 않는 겁니다? 아셨죠?”

“……뇌물이었어요?!”

“뇌물이 아니라면 뭐겠습니까. 이 아저씨가 어린 사장님께 꽃을 드릴 일이.”

그는 히죽히죽 웃었다. 아저씨라고는 해도 그는 이제 서른을 겨우 넘겼을 뿐이다.

물론 루이스에게 까마득하게 어른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지만 말이다.

“알았어요. 선생님의 예쁜 공주님을 계속 보기 위해서라도 거래는 계속하도록 해요.”

루이스는 그가 책상 위에 올려놓은 자그마한 초상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션 우드의 부인과 딸로, 그는 출장을 올 때마다 이렇게 제 가족의 초상과 함께였다.

그 출장이 며칠이든 말이다.

“출장을 가시는 분들은 다들 이렇게 가족의 초상을 챙겨다니시나요?”

“글쎄요.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션 우드는 루이스를 바라보며, 친절하게 웃었다.

그녀가 바라는 대답이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스위니 사장님은 언제나 아가씨의 초상을 보물같이 품고 다니죠. 출장이 없는 날에도 말이에요.”

루이스는 순수하게 기뻐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션 우드는 잠시 고민했다.

한마디 더 덧붙여도 좋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니까, 스위니 씨는.

모든 딸 바보의 표본 같은 그 남자는.

제 딸의 초상을 연령대와 계절별로 엄격하게 구분하여, 휴대 가능한 작은 화첩까지 만들어 지니고 다닌다고.

“아버지들은 참 멋진 것 같아요.”

하지만 반짝이는 루이스의 얼굴을 보면…….

역시 화첩은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왠지 말이다.

* * *

저택의 발랄한 분위기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그것은 한 통의 편지로부터 시작했다.

예술원 공연의 진행을 책임지는 예술원장의 편지 말이다.

“곤란한데…….”

루이스는 어머니께서 건네주신 편지를 읽었다.

간단히 말해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마땅한 이유도 없었다.

다만 약속된 위약금은 즉시 지급되었다.

“공연이 취소된 게 아니라면, 거래처가 바뀌었다는 이야기네요.”

“그래. 어디일까…….”

위약금을 넉넉하게 받았으니, 당장 스위니 가문이 손해를 보는 것이 없을 터다.

하지만, 문제는.

오랫동안 거의 전담하다시피 해온 커다란 계약 하나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예술원장님을 다시 만나 뵙긴 하겠지만……. 이건 좀 갑작스럽구나.”

공연이 며칠 남지도 않은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하다니.

“항의……할 수는 없는 거죠?”

루이스는 희망이 없는 목소리로 여쭤보았다.

“아깝잖아요. 정말 열심히 준비하셨는데.”

장례식 이후로는 거의 잠도 주무시지 못하셨을 정도로 말이다.

외국 사절단이 참석하는 공연인 만큼 심혈을 기울였고.

“괜찮아.”

어머니는 호전적으로 미소를 지으셨다.

이런 부당한 일로, 우울함에 빠지고 싶지 않다는 듯 말이다.

“네 아버지와 나는 이런 일을 몇 번이나 겪어왔는걸.”

“……하지만.”

“물론 앞으로 너도 겪을 테고. 특별한 건 아니란다. 아마 누구라도 겪는 일이겠지.”

루이스는 어머니를 따라 웃어보려고 했지만,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일은 언제나 좋은 일과 함께 오는 법이란다.”

어머니는 봉투에서 붉은색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건 공연의 초대장이었다. 물론 구하기 힘든 귀한 것이긴 했다.

“마침 잘되지 않았니?”

“……자, 잘된 건가요?”

“물론이지. 국가적 행사이니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도 오실 테고.”

음, 그건 좀 좋은 것 같다.

그 날 이후 이안과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으니까. 아주 조금은 보고 싶기도 했다.

물론 공식적인 자리에서 대화할 기회는 거의 없겠지만.

“네 아카데미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것도 좋은 것 같다.

“게다가 가장 좋은 건.”

그리고 어머니는 그 아름다운 얼굴을 한껏 구기며, 날카로운 눈빛을 반짝 빛냈다.

“누가 감히 우리 계약을 넘보는지 직접 염탐할 수 있다는 점이지.”

그리고 이어지는 소름이 끼치는 웃음소리와 새카만 오오라.

……어머니, 있잖아요.

루이스 스위니의 악역적 재능이 어디에서 유전되었는지 이제야 확실하게 알 것 같아요.

* * *

나쁜 일은 나쁜 일을 업고 오는 것이 틀림없다.

루이스는 입구에서 예술원의 초대장을 내밀고는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혼자……. 오셨습니까?”

예술원의 직원이 무척 신기하다는 얼굴로 묻기에, 루이스는 괜히 턱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래요.”

괜한 마음에 밉살스러운 말이 나왔다. 혼자가 뭐 어때서!

루이스는 괜스레 장갑 끝을 만지작거리며 예술원의 복도를 지났다.

홀에 들어서자 직원이 음료를 권해 왔고, 마침 더웠기 때문에 주스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공연까지 시간이 넉넉하게 남은 탓에 사람은 거의 없었다.

루이스는 주스를 홀짝이며, 저택에 두고 온 어머니를 생각했다.

그녀가 공연에 혼자 오게 된 것에는 좋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어머니의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벼운 몸살 기운도 있었고.

오랫동안 축적된 피로가 한 번에 폭발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한사코 함께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는 것을 겨우 떼어놓고 왔다.

‘나를 혼자 보내는 게 불안하다고 하셨지만.’

루이스도 이제 어리기만 한 나이가 아니다.

혼자 예술원으로 온 루이스가 해야 하는 것은 두 가지.

하나는 공연을 관람하고 그 후기를 어머니께 들려드리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누가 감히 우리 계약을 넘보는지 직접 염탐할 수 있다는 점이지.」

어머니의 궁금증을 풀어드리는 일이다. 그걸 위해서 이렇게 일찍 오기도 했고.

“그럼. 다 끝난 거죠?”

언뜻 들리는 사무적인 목소리에 루이스는 반짝 고개를 들었다.

예술원 직원이 꽃을 든 사람에게 진행 상황에 관해 묻고 있었다.

“3층은 다 되었지만, 2층은 청소를 마무리해야 해요. 유리 장식 같은 것이 떨어져서…….”

“손님들이 오시기 시작하셨단 말입니다. 아무쪼록 빨리 좀 부탁드립니다. 예?”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약속된 시간에는 마칠 테니까요.”

그리 말한 이는 조금 서둘러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허리춤에 원예 가위 등이 보이는 것을 보면, 어느 화원에 속한 자임은 틀림없어 보였다.

주스를 내려놓은 루이스는 구두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천천히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다행히도 이상하게 바라보는 이는 없었다.

루이스는 제대로 된 표를 가진 손님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조심스레 도달한 2층 플로어에는 붉은색 카펫이 깔려있었다.

벽면을 따라 어느 화가가 그려낸 신화 속 장면이 있었고, 천장에는 빛을 머금은 샹들리에가 있었다.

맞은편에는 박스석으로 통하는 문이 나란히 있었는데, 몇 개는 반쯤 열려 있었다.

“꽃장식이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예술원장님.”

그러다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루이스는 깜짝 놀라며,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가장 안쪽에 있는 박스석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예술원장님이 여기에 계신다니.

아무래도 여기에 계속 머무는 것은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루이스가 조용히 몸을 돌리려는 찰나.

“아휴, 아닙니다. 그야 물론 갑작스레 화원에 요청을 주셔서 놀랐지만요.”

어렴풋이 들려오는 이야기에 걸음이 멈춰지고 말았다.

아니, 아예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몸을 돌리게 되었다.

지금 ‘예술원에서 먼저 요청했다.’ 고 했던가?

그렇다면 예술원 쪽에서 업체를 일방적으로 변경했다는 의미다.

도대체 왜?

국가적인 행사에 이런 불합리한 일을? 굳이 위약금까지 내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자칫 준비가 부족해질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예술원장님이 무어라 대답하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루이스가 있는 곳에서는 속삭이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루이스는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잊고, 자신도 모르게 점점 다가서게 되었다.

소리가 선명해진다.

동시에 루이스의 심장도 뛰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대화를 엿듣는 죄책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호기심이 루이스의 등을 밀어주었다.

그때였다.

으직.

그녀의 구두에서 작은 유리 장식이 짓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며, 살짝 뒷걸음질 치는 순간에는 그만 조용한 복도에 구두 소리가 울리고 말았다.

박스석에서 들려오던 대화도 멈추었다.

느닷없는 소리에 두 사람도 놀란 것이 틀림없었다.

“흠……?”

예술원장이 반쯤 열린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누군가가 루이스의 허리를 감싸며 다급히 뒤로 당겨왔다.

“……?!”

루이스가 가까스로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을 때는, 이미 다른 박스석으로 이끌려 들어온 후였다.

루이스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여기에……?”

당혹 어린 말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상대는 빙긋 웃을 뿐이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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