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주인공의 여자사람친구입니다-38화 (38/92)

?38. 키스할 때 생각했던 말

입술이 떨어질 때, 짧게 시선이 마주쳤다.

늘 여유가 묻어나던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이 스쳤다.

평소의 루이스라면, 그에게 저런 표정을 짓게 한 것만으로도 몹시 웃었을 거다.

하지만 어쩐지 굳어버린 입꼬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가 반걸음 정도 그에게서 떨어지자, 이번에는 그가 루이스를 당겨왔다.

푹,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그의 가슴께에 머리가 깊이 닿았다.

그의 팔이 강하게 루이스의 허리와 목덜미를 당겨온다.

마치 이 세상과 그녀를 따로 떼어 그에게 가져다 놓으려는 것처럼.

그 이후로는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풀벌레의 소리도.

달이나 별이 한 발짝씩 나아가는 소리도.

밤으로 밀려난 차가운 바람이 스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루이스는 천천히 호흡을 뱉었다. 그러고 보니 입술이 닿았던 순간에는 숨을 참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아예 숨을 쉬지 않았다.

숨이 차오르기에 깊이 호흡했다. 양쪽 어깨가 살짝 들썩일 정도로.

그 작은 움직임에 루이스를 죄는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어쩌면 오해한 걸지도 모른다.

루이스가 그에게서 빠져나가려고 한다고 말이다.

조금 자세가 바뀌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루이스가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기 때문인지.

고요한 그의 세계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듯 낯선.

언젠가 티 룸에서도 들었던 그의 심장 소리였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가 소설 속의 사람이 아니라, 실로 살아있는 사람이라 느껴진다고 생각했었던 그 소리 말이다.

그의 심장은 아프도록 빠른 소리로 울리고 있었다.

루이스는 눈을 감은 채 그 소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였다.

심장의 속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참 기쁘다.

동시에 이런 소리를 알아버렸다는 사실이 슬퍼진다.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거짓을 모르는 그의 심장이, 언젠가는 루이스의 앞에서 조금씩 조금씩 그 박자를 늦출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렇다면 루이스는 오늘의 소리를 마음으로 헤아리며 그리워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바보 같은 걱정.

안 하고 싶은데. 정말로.

이미 엉망으로 섞여버린 머릿속은 쉽게 제어가 되지 않았다.

이성이 미쳤냐며 발악을 해대기 시작했고, 감성은 좋아서 또 발악을 해대기 시작했다.

양쪽의 발악 사이에서 책 한 권이 뿅 하고 튀어나왔다.

원작이었다.

사락사락 페이지를 넘기자, 루이스 스위니가 이안에게 제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이 나왔다.

물론 그다지 아름다운 고백은 아니었다.

원래 예쁘고 아름다운 연출은 주인공 커플에게나 쓰이는 거다.

작가님이 불공평하게 분배해준 연출 탓인지, 뭔지는 몰라도 루이스는 그 자리에서 차이고 만다.

조금 더 페이지를 넘기자, 제가 차였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루이스가 보였다.

아니, 생각해보면.

차였다는 것을 인식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던 거다.

좋아하는 마음이란 그리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루이스는 멋대로 자라 버린 마음을 끌어안은 채, 그가 다른 사람과 순조롭게 사랑에 빠지는 모든 순간을 목격하게 된다.

……와.

작가님. 당신은 인간도 아니에요.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해 놓고, 차이게 하는 건 반칙이잖아요.

루이스가 스텔라를 괴롭힌 마음도 이제는 절절하게 이해가 간다. 얼마나 얄미웠을까.

‘무, 물론 그렇다고 해서 루이스의 심술궂은 일들을 두둔하는 건 아니지만요…….’

루이스는 이안의 양쪽 어깨를 밀어내며, 천천히 몸을 떼어냈다.

살며시 고개를 들자, 조금 귀 끝이 붉어진 것 같은 그가 루이스를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째서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걸까……. 하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가 선뜻 그녀의 마음을 넘겨짚고 대답해 주었다.

“……그대가 이토록 억울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거든.”

“어, 억울하다는 표정은 아니었어요.”

루이스는 얼른 제 표정을 바꾸었다.

“이제 덜 억울한 표정이 되었군.”

그가 지적하자, 루이스는 다시 억울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요. 억울해요.”

루이스는 괜히 삐딱하게 대답했다. 사실은 그냥 조금 무서워졌던 것뿐인데.

“미안해.”

하지만 그가 곧바로 사과해 오기에, 루이스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뭐, 뭐가요?”

“그냥, 그대가 억울해하는 것에 대해서 말이야. 그게 뭐든지 간에.”

그는 조금 흘러내린 루이스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 넘겨주며 속삭였다.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으…….”

어째, ‘원작에서 널 차버려서 미안하다.’라고 들린다.

물론 그런 의도는 조금도 없다는 걸 알지만 말이다.

“회, 회장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에요.”

“그럼 그대가 사과해야겠군.”

“그게 왜 그렇게 되는 건데요.”

“상처받았다고. 그대가 꼭 나쁜 일을 한 아이 같은 표정을 지어서. 내가 그대에게 나쁜 일인가 싶었지.”

나쁜 일…….

루이스는 그의 정확한 표현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보니 입을 맞춘 상대가 그런 표정을 하고 있으면 누구라도 상처받았을 거다.

루이스가 나빴다.

“……미안해요.”

루이스는 곧바로 사과했고, 이안은 조금 더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루이스는 ‘나쁜 일’이라는 표현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

“어려워졌군.”

그는 곤란한 듯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뭐가요?”

“아무것도 아니야. 어쨌든 그대가 도도해지는 것은 나도 시몬도 환영할 일이지.”

“제가 도도하게 굴었나요?”

“미약하게나마. 조금 더 도도하면 딱 좋겠다 싶을 정도로.”

“어렵네요…….”

“어려워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좀 그렇게 굴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그대는 너무 말랑말랑하니까.”

그랬던가?

그냥 적을 만들고 싶지 않은 것뿐인데 말이다.

덤으로 착하게 굴면 복이 쌓여서 나중에 보상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음흉한 마음도 있었고.

“시몬도 걱정하고 있어. 그대가 너무 물러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시몬, 제게는 한 번도 그런 말…….”

“못하겠지. 그러니 종종 그대 주변에서 기다렸다가 늘 도와주는 거고.”

“꼭 왕자님 같네요.”

“……진짜 왕자님을 눈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하는 건 좀 가혹하지 않나? 뭔가 직업적 편견이 느껴지는데.”

“아, 동화책에 나오는 왕자님이요.”

“미안하군, 현실 왕자라서.”

걱정하지 마세요.

전하도 착실하게 책에 나오는 왕자님이긴 해요.

장르가 상큼한 듯 끈적끈적한 19금 개정판 로맨스 판타지라서 그렇지.

루이스가 쿡쿡 웃자, 이안이 손을 내밀었다. 옥상으로 올라가자고 처음 권했을 때처럼.

“이리 와. 내게 흔치 않은 하늘을 산책해야지.”

그녀는 조금 고민하다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약속된 모양으로 손이 이어진 후에는 옥상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까.”

루이스는 먼 옛날에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세계에 들어오기 전에 알고 있었던 지식 말이다.

“우리가 보는 별빛은 과거에서 온 거래요.”

“그건 무슨 소리지?”

“그냥 어디서 들은 말이라 자세한 건 저도 몰라요. 별에서 시작된 빛이 우리 하늘 위에 도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그럼 오늘의 별빛은 언제 볼 수 있는 거지?”

“모, 모르죠. 아마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재미있군.”

이안은 잠시 웃었다.

물론 루이스는 이 우주 과학적 이야기의 어디에 재미가 숨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안은 기꺼이 제가 느낀 재미를 설명해 주었다.

“하늘과 땅의 시제가 다르다는 점이 말이야.”

“이제는 자연의 문법까지 지적하시네요.”

“딱히 지적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사람들은 시제 일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잖아?

“그야, 시험에 나오니까요.”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시제가 일치되지 않는 땅과 하늘 속에 있다는 게 재미있었을 뿐이야.”

그런가? 그게 그렇게 말하면 그런 것 같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고.”

“자연의 문법이 틀린 것이요?”

“그래. 대 자연의 문법마저 저렇게 엉망인데, 사람인 나의 문법이 다소 서투른 건 괜찮지 않나 싶어서.”

하지만 그는 다양한 외국어의 억양과 문법을 완벽하게 습득했다.

아마 완벽하게 시제 일치도 시킬 테고.

“뭐, 문법도 그렇고. 규범이나 행동 양식……같은 것들도 말이지.”

그는 자신을 옥죄는 몇 가지를 떠올렸다.

하늘과 땅의 불합리에 기대어 몇 가지를 내려놓고 싶은 유혹이 들었다.

“물론 그런 걸 잊어버리면 몹쓸 황태자가 될 테지만.”

그러니 그는 다시 제게 주어진 많은 굴레를 소중히 걸쳤다.

“제가 괜한 소릴 했나 봐요.”

“아냐, 아주 좋았어. 훗날 이 순간을 떠올리면, 아마 자연스레 웃고 말겠지.”

그리고 그는 아젠틴 어로 어떤 말을 중얼거렸다. 미래의 그가 웃고 있을 거라는 말일까.

어쨌든 외국어를 능숙하게 말하는 그는 아주 근사하다.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나, 억양 때문일지도 모른다.

둘은 조금 더 걸었다.

이미 옥상을 몇 바퀴나 빙글빙글 돌았지만,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즐거워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수도로 돌아가면, 가끔 이렇게 만날까?”

“어차피 온실에 멋대로 놀러 오실 거죠?”

“그야 그렇긴 하지. 스위니 부인께서 꼭 얼굴을 비쳐달라고 하셨거든.”

“게다가 시몬도 놀러 오기로 했고요. 두 분은 함께 오실 테죠.”

“물론, 그것도 그렇지만 내 말은.”

거기까지 이야기한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루이스를 향해 몸을 돌렸고,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온실에서 만나는 날이 기대되는군.”

그 순간에 스르륵 하고 손이 풀려나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마치 서로가 각자의 벽을 쌓는 것처럼 그리되었다.

루이스는 그 이유를 안다.

그녀를 돌아보는 순간에, 이안은 이 옥상에서 나누었던 약속을 떠올리고 만 것이리라.

‘미안해요…….’

루이스는 마음속으로 작게 사과했다.

조금 전에 그가 말한 것처럼, 루이스의 요구는 그의 손과 발을 전부 묶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들어갈까?”

짧은 권유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어색해진 분위기를 서로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루이스가 먼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고, 그가 그 뒤를 따랐다.

계단을 내려가고, 복도를 지나는 동안 둘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루이스는 제 방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겨우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모습은 그림자에 가까울 만큼 어두웠다.

“그럼.”

루이스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대도.”

담백한 대답이 돌아왔다. 루이스는 몸을 돌려 문고리를 쥐었다.

그때, 귓가로 그의 손이 스쳤다.

열기를 머금은 손가락이 긴 머리카락 사이로 깊이 파고들었다.

그의 살갗과 그녀의 머리카락이 스치고, 어루만지는 엷은 소리가 울렸다.

루이스는 양손으로 문고리를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차마 뒤를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머리카락을 만지는 일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님에도.

이 순간이 주는 낯선 기대감에 몸이 전부 얼어붙고 말았다.

그의 손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길을 따라서 느릿하게 움직였다.

귓가에서 목덜미로. 그리고 어깨를 넘어 허리 근처까지 흘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끝에 도달했을 때, 그는 꽤 가뿐하게 제 손을 떨어뜨렸다.

언뜻 피부로 느껴졌던 뜨거움과는 무척 다르게 말이다.

그리고 평소와 같은 어조로 인사해 주었다.

“잘 자.”

루이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도망치듯 제 방으로 들어왔다.

잠옷으로 갈아입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침대로 몸을 던졌다.

그가 머리카락에 닿았을 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조금 더, 닿게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가뿐하게 손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에는 분명히 아쉬워하기도 했었다.

그와의 거리를 지정한 건 다름 아닌 루이스였는데도 말이다.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졌고, 곧 심장 소리가 고막을 쿵쿵 울려왔다.

오늘 그가 보여준 미묘한 거리감은 모두 루이스와의 약속 때문이다.

그리 생각하자 아프게만 뛰던 심장이 미어지기까지 한다.

어째서 이 사람은.

그렇게까지 루이스의 말을 소중히 들어주는 걸까. 하고.

얼마든지 멋대로 굴 수 있는 사람이면서.

루이스는 베개를 꽉 끌어안았다. 무어라도 심장에 가까이 붙여 놓아야 살 것 같아서.

그리고 그에게 키스할 때 생각했던 말을 떠올렸다.

“돌이킬 수 없다…….”

그 말 그대로다.

한 번 마음을 깨달아 버렸으니, 앞으로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의식하게 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물통과도 같아서, 이렇게 한 번 기울어져 쏟아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겨우 균형을 잡아 둔다고 하더라도 이미 흘러내린 물을 도로 담을 수도 없다.

물론 루이스가 세워놓은 벽이 흐르는 물을 잠시 가두고, 막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물줄기가 쌓이고, 수심이 깊어지는 순간이 될 때.

벽은 처참히 깨어질 거다.

그 벽의 파편은 모두를 상처입히고, 깊은 멍 자국을 남길 테지.

이후에 남는 것은, 비틀리고 꼬여버린 악독한 관계뿐이리라.

루이스는 이안과 그리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가 세워둔 인위적인 장벽은 모두 제거돼야 옳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뒤틀려 엉망이 되기 전에 말이다.

벽이 사라지고 나면 아마 한동안은 즐거울지도 모르겠다.

이안은 심술궂은 면도 있지만, 사실은 루이스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때때로 세심하게 돌봐준다.

이야기를 나누면 즐겁고, 서로 책을 바꾸어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취향이 비슷하다.

하지만 그의 다정함이 영원히 그녀를 향하리라는 기대는 할 수 없었다.

심술궂은 원작이 멋대로 힘을 발휘하는 날에는 그의 마음도 변할지도 모르니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비록, 그날의 루이스가 눈물을 토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마음을, 생각을.

그리고 서로의 시선에서 찾은 것을 없던 것으로 둘 수는 없었다.

“……바보 같아.”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뜨거울 것을 알면서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사람이 된 것 같다.

“무섭기도 하고…….”

루이스가 막아 둔 견고한 벽이 사라지면, 이안은 어떻게 행동하려나 싶어서 말이다.

그가 건네는 다정함에 루이스의 머릿속이 가루가 되고, 혼이 빠져나가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그만큼 차일 때 아플 것 같은데.

그렇게 되는 날엔 루이스의 악역적 본능이 깨어나서 못된 짓을 잔뜩 하게 될까?

그것만은 안 된다!

루이스는 제 창창한 앞날이 소중했다.

그러니까. 혹시 미래의 루이스에게 힘든 날이 오게 되더라도 조금이나마 웃을 수 있도록.

‘그래도 꽤 즐거웠잖아?’라며 긍정적으로 회상할 수 있도록.

지금의 루이스가 좋은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적어도 ‘솔직한 마음에서 도망치느라, 아무것도 못 했어.’라는 미련은 남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내일이 되면.

말해야지.

루이스가 그에게 부탁했던 모든 약속을 거두겠다고.

고집을 들어주고, 받아주어서 늘 고마웠다고.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벽에도 숨지 않고 그를 제대로 마주하겠다고.

“으음……역시 불안하지만.”

방어구나 무기 하나 없이 최종 보스를 향해서 돌진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어쩐지 웃음이 났다.

내일 루이스의 이야기를 들은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그런 내용은 원작에 없었으니까, 그의 대답은 루이스의 것이다.

온전히 말이다.

* * *

아침이 오는 시간은 아주 느렸다. 어쩌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안은 아침이면 땀으로 범벅이 된 루이스에게 차가운 음료를 주기 위해 찾아온다.

아마 오늘도 과일이 들어간 음료를 들고 찾아 올 것이다.

똑똑.

익숙해진 노크 소리가 들렸고, 문이 열렸다.

“……그대로 잔 건가?”

“어찌하다 보니까요.”

그는 잠옷을 입지 않은 루이스의 차림새를 가장 먼저 지적했다.

그리고는 루이스의 정수리 위로 차가운 음료수를 툭 올려 주었다.

“오늘로 마지막이네요.”

루이스는 두 손으로 차가운 잔을 받았다.

오늘은 자몽이 들어있었다. 물론 얼음도 가득했고.

“아쉽다는 듯 말하는군.”

“실제로 아쉬우니까요.”

“나는 꽤 힘들었는데 말이야.”

그는 빙긋 웃으며 ‘알지? 나 아침에 약한 거.’라고 덧붙였다.

“그래도 매일매일 해주셨어요.”

“그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대가 식사하지 않을 테니까.”

으, 진짜.

루이스는 괜히 유리컵을 입가에 댄 채, 계속 마시는 시늉을 했다.

“……고마워요.”

“옳지.”

“진짜로요.”

“알고 있어. 그대 얼굴을 보면 전부 알아.”

그리고 그는 몇 가지 더 알아차린 사실을 짚어냈다.

“그대가 뭔가를 깊이 고민했고, 내게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도 말이야.”

“으…….”

“설마 틀렸나?”

그는 조금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제발 그런 것을 걱정스레 묻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마, 맞아요.”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이번에는 좋다며 웃는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이 꽤 귀여워 보이는 걸 보면, 루이스는 저 남자에게 홀려도 단단히 홀린 게 틀림없다.

“그래서 뭔데?”

“그…….”

루이스는 모처럼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얼른 마땅한 말을 골랐다.

“있잖아요. 제가…….”

어렵게 입을 떼려는 찰나에 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루이스가 시선을 돌리자, 이안이 그녀의 턱을 쥐어 강제로 저를 보게 했다.

“무시해.”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하던 말을 계속하라는 거다.

“제가, 예전에.”

겨우 한마디 더 했을 뿐인데 또 노크 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무시해.”

그러자 이제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연속적인 노크가 시작되었다.

거의 문을 두드리는 것에 가까웠다.

결국, 이안이 문밖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적당히 해. 헤셰!”

그의 고함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이안의 말 대로 노크를 하던 이는 헤셰였다.

다만, 늘 장난기 가득했던 그의 얼굴이 평소와는 달리 잔뜩 굳어 있었다.

루이스는 뭔가 좋지 못한 예감이 들었다.

“전하.”

헤셰는 이안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건 정식으로 고할 것이 있다는 의미였다.

짧게 한숨을 쉰 이안은 루이스의 얼굴에서 제 손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헤셰를 향해 가볍게 몸을 돌리는 순간에는, 완벽한 황태자의 얼굴을 했다.

“……허락한다.”

비로소 헤셰가 입을 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