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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의 여자사람친구입니다-37화 (37/92)

?37. 그날 밤과 같이

방학에도 아카데미에 남은 네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은 세 가지다.

매일 아침 일찍 도착하는 공사 업체 사람들을 옥상으로 안내할 것.

공사 업체 사람들에게 휴게실로 내어준 장소를 관리할 것.

마지막으로 그들이 돌아가면, 기숙사의 문단속을 철저히 할 것.

물론 때때로 힐 교수가 그들의 상태를 돌봐주러 오긴 했다.

하지만 교수님은 누군가의 공부를 돌봐줄 수는 있어도, 생활을 돌보는 일은 하지 못했다.

대신 교수님과 함께 차를 마시는 시간은 좋았다. 특히 루이스가 좋아했다.

선물도 도착했다.

본가로 돌아가신 관리 부인께서 감자를 가득 보내주셨다.

돌봐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씀과 함께.

눈이 돌아가도록 비싼 우편 서비스를 이런 데 이용하다니.

대체 관리 부인의 봉급은 얼마나 높은 걸까.

네 사람은 관리 부인의 두툼한 월급봉투와 자산운용 방법을 멋대로 상상하며, 감자를 쪘다.

그 후에는 테이블에 둘러앉아 얇은 감자 껍질을 벗겨냈다.

무엇이든 능숙한 클레어는 금방 요령을 배워서, 뜨거운 감자의 껍질을 능숙하게 벗겼다딘은 반은 먹고, 반은 까고 있었다.

단순히 맛있어서 먹는 게 아니라, 껍질을 까기 귀찮아서 껍질째 먹어 버리는 것 같았다.

루이스는 감자 껍질을 평범하게 벗기며, 이안에게 물었다.

“혹시 생존 수업에 감자 껍질 벗기기라는 과목도 있나요?”

“도구 없이 다양한 껍질 벗기기라는 과목은 있었지.”

그래서 얇은 감자 껍질도 저렇게 후루룩 잘까는 건가.

어쨌든 감자는 샐러드가 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네 사람은 험난한 회의를 시작했다.

감자의 씹히는 맛을 남길 것인가.

절인 오이를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

후추를 넣는가, 마는가. 넣는다면 어떤 후추를 넣을 것인가.

취향의 전쟁이 끝난 뒤에는 각자 맡은 일을 했다.

딘과 루이스는 감자를 으깼고, 클레어와 이안은 오이를 얇게 썰었다.

루이스는 감자를 꾹꾹 짓누르며, 나란히 선 이안과 클레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 두 사람.

뭔가 잘 통하는 것 같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이안이 칼질 요령을 조금만 가르쳐 주니까, 클레어는 곧잘 따라 했다.

“역시 습득이 빠르군.”

이안이 곧바로 칭찬했고 클레어는 어깨를 으쓱였다.

“흉내만 내는 건 쉽지. 진짜가 아니니까.”

그리고 둘은 맹렬하게 오이를 써는 데 집중했다.

클레어 쪽이 조금 느린가 싶었던 도마 소리는 곧 비슷해졌다.

두 사람 사이에 가득 쌓여있던 오이는 순조롭게 사라져 갔다.

저 둘이 함께 있는 뒷모습을 보면, 왠지 무엇이든 잘 될 것 같다.

실제로도 오이가 잘 썰리고 있기도 하고. 학생회의 일도 그랬고.

으음, 뭐에요. 회장님.

「내 삶에 친구라고는 둘밖에 없는데,」

클레어라는 훌륭한 친구도 있었던 거잖아요.

“……질투는 그만하고 감자 좀 으깨지?”

문득 곁에서 들리는 작은 목소리에 루이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딘을 돌아보았다.

“무, 무슨 소리여요.”

“일하란 소리지.”

“일하고 있어요. 게다가 질투는 딘이 할 일이죠.”

루이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히죽 지어 보였다.

다 알고 있다고. 이 열렬한 짝사랑쟁이야!

본인의 질투를 타인에게 뒤집어씌울 정도로 질투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어쨌든 그 느려터진 손을 빨리 움직이란 말이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딘에게서 느리다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아요!”

“아, 그래? 그렇다면 그 빠른 손놀림을 선보이는 게 어때?”

딘은 친절하게도 루이스의 볼에 아직 으깨지지 않은 통감자를 더 추가해 주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딘이야말로 조금 더 제대로 일하세요. 으깨는 것보다 흘리는 게 더 많잖아요?”

“다 주워 먹었어!”

“자랑인가요?! 그게?!”

루이스는 딘의 볼에도 공평하게 감자를 추가해 주었다.

뾰족한 눈길로 서로를 노려본 두 사람은 경쟁적으로 감자를 으깨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사이가 좋네.”

오이를 다 썬 클레어가 소금을 뿌리며 감탄했다.

딘과 루이스는 동시에 썩은 감자를 삼킨 것 같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물론 오래가지는 않았다.

맹렬한 감자 으깨기에 혹사당한 근육이 아프도록 당겨 왔기에, 두 사람은 동시에 테이블에 털썩 머리를 기댔다.

“정말 사이가 좋다니까.”

클레어가 쐐기를 박는 말을 건넸지만 반박할 힘도 없었다.

* * *

“너무 사이가 좋은 거 아닌가? 딘 크리시스랑.”

딘과 클레어가 옥상으로 샐러드와 빵을 배달 간 사이, 이안과 루이스는 주방에 남아있었다.

“정말 회장님까지 그러실 거에요?”

루이스는 볼에 조금 남은 샐러드를 푹 퍼먹으면서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걱정되어서 그래.”

“걱정이요?”

“그대의 가장 친한 친구 자리에서 우리가 쫓겨나면 슬퍼지잖아.”

그가 말하는 ‘우리’란 시몬과 이안을 함께 이르는 것이리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회장님도.”

“음?”

“……아니에요.”

루이스는 으적으적 오이를 씹었다.

“내가 뭘?”

“아니라니까요.”

루이스는 다시 샐러드를 푹 퍼 올렸다.

그리고 재차 캐물으려는 이안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그는 군말 없이 루이스가 주는 샐러드를 얌전하게 받아먹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스스로 만들고도 감탄하는 모양이다.

그러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샐러드만 먹었다.

몇 번인가, 루이스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슬슬 두 사람이 돌아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늦네요.”

루이스는 기숙사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며 걱정스레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게.”

“데이트라도 하는 걸까요.”

“설마.”

이안이 가볍게 얼굴을 찌푸렸다.

마치 두 사람의 데이트에 문제라도 있다는 듯.

“딘 크리시스는 그런 성격은 못되지.”

“어떤 성격인데요?”

루이스가 샐러드를 한가득 입에 밀어 넣으며 물었다.

“약혼자가 있는 여성에게 데이트를 청할 만한 남자는 아니라는 뜻이야.”

“……?!”

루이스는 샐러드를 강제로 꿀꺽 삼켰다.

하지만 심장 부근이 뻑뻑해 져서, 손으로 가슴께를 몇 번이나 치고 난 다음에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약혼자요!?”

“모르고 있었나? 사교계에선 꽤 유명……. 하긴, 소문에 달린 발이 그대에게 갈 때는.”

“느린 게 아니라, 아예 오지 않는 모양이네요. 전혀 몰랐어요.”

“어쨌든 약혼했어. 공식적으로. 겨울에 결혼식도 앞두고 있고.”

“상상이 되지 않네요.”

루이스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클레어를 상상했다.

물론 아주 예뻤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늘 함께 지내는 친구가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니.

“그래서 클레어가 남겠다고 했을 때, 회장님께서 재차 괜찮은지 확인했던 거에요?”

루이스는 방학 전에 있었던 회의를 떠올리며 물었다.

“뭐, 그런 거지.”

“뭔가 이상해요.”

“그래? 나는 클레어와 그 약혼자를 몇 번인가 봐서 아무 생각 없었지만.”

“클레어의 약혼자는 어떤 사람인데요?”

루이스는 샐러드 볼을 꽉 끌어안은 채 물었다.

그리고 이안은 루이스의 얼굴에 가득한 걱정을 읽어 냈다.

“그대가 그렇게까지 딘 크리시스를 생각할 줄은 몰랐는데.”

“따,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아니긴, 얼굴에 잔뜩 쓰여 있는 걸. ‘딘, 어떻게 해요.’ ‘딘, 도와주고 싶어요.’ 라고 말이야.”

“제 목소리 흉내 내지 마세요! 그리고, 그런 일에 제가 도움을 줄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전 그냥…….”

루이스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질투는 딘이 할 일이죠.」라고 말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엄청 미안해졌단 말이에요.”

“그 녀석에게 너무 마음 쓰지 마. 지금으로써는 그게 가장 큰 도움이지.”

“알아요…….”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일이라는 것 정도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딘이 언제나 클레어의 뒤를 따르면서도, 묘한 거리를 두고 있었던 이유.

아마 그는 클레어의 명예와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선을 그어 두었던 것이리라.

언제나 행동이 느렸던 건, 그 선에 닿지 않을까 조심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고.

“루이스, 정말로 알고 있는 건가?”

“일단 이성적으로는 알았어요. 완전히 받아들였고요.”

“이성과 감성이 싸우는 거군?”

“어쩔 수 없잖아요.”

루이스는 살짝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딘은 다소 짜증 나는 점도 있지만, 어쨌든 저는 딘을 꽤 좋게 생각한단 말이에요.”

“알아.”

“이런 상황에서는 그냥 모른 척하고, 얌전히 있는 게 최고의 우정이라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우리는 감성의 지배를 받으니까, 쉽지 않지.”

“맞아요. 감성이 늘 사람을 이렇게 망친다니까요.”

“그대가 우울해졌군.”

이안이 루이스의 시무룩한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맞아요. 우울해요.”

“기분 좋게 해줄까?”

“회장님이요?”

미심쩍은 얼굴로 바라보니 그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요?”

“간단해. 따라서 말해 봐. ‘내일은’.”

그의 말을 따라 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진다고?

“내일은.”

루이스가 군말 없이 따라 하자, 이안은 이어지는 말을 계속했다.

“먹는다.”

그리고 갑자기 동사가 등장했다.

“먹는다……?”

이안은 기분이 좋아지는 마법의 문장을 마무리 지었다.

“좋은 고기를.”

“좋은 고기를……! 내일은 좋은 고기를 먹는 거군요! 그렇죠?”

“그래.”

“칼로 썰어 내릴 때 맑은 육즙이 흐르고, 씹을 것도 없이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좋은 고기요!”

“그래.”

“어디에서 그런 고기가 오나요?”

“궁에서. 내가 부탁했지.”

“물론 회장님은 고기도 완벽하게 굽겠죠?”

“생존용이지만.”

“맙소사, 너무 행복하잖아요. 이 마법의 문장을 딘과 클레어에게 알려 주어도 되나요?”

“그대가 바란다면 얼마든지.”

「내일은 먹는다. 좋은 고기를.」

이 완벽한 문장의 힘은 어마어마해서, 더운 옥상에서 돌아온 클레어와 딘도 기쁘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실제로 다음 날, 이안은 ‘생존을 위해 배웠을 뿐인’ 솜씨로 훌륭하게 고기를 구워 주었다.

게다가 디저트로 ‘생존을 위해 배운’ 오렌지 셔벗까지 나왔다.

이 완벽한 만찬의 후기로서, 루이스는 ‘이런 아카데미라면 평생도 살 수 있겠다.’는 찬사를 남겼다.

네 사람의 생활은 하루가 지날수록 더욱 즐거워졌다.

항상 사람이 북적이던 곳에 네 사람만 남았다는 동지 의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온종일 넷이 붙어 다녔다.

가끔은 돌아가며 요리를 만들었고, 딘의 형편없는 샌드위치는 영원히 회자 될 추억이 되었다.

각자 좋아하는 책을 가지고 와서 억지로 상대에게 읽히기도 했다.

기숙사의 문을 모두 걸어 잠근 늦은 밤에는, 한 사람의 방에 틀어박혀 늦게까지 카드 게임을 했다.

분명한 교칙 위반이라는 점에서 더욱 짜릿했다.

때로 팀을 짜서 침묵 체스를 하기도 했다.

게임 중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파트너의 수와 상대의 수를 함께 읽어야 하는 방식이었는데.

루이스와 딘이 굉장한 팀워크를 보여주었다.

기숙사에 머무는 마지막 날까지 단 한 번의 승리도 이안과 클레어에게 내어주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말이다.

루이스와 딘은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서로 어깨를 붙잡고 한참이나 웃었다.

“이렇게 재미있는데, 마지막 밤이라니 아쉬워요.”

루이스는 바닥에 구르는 체스 말을 주워서 정리하며 섭섭한 듯 말했다.

다행히 모두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에, 오늘은 조금 더 오랫동안 놀기로 했다.

이안이 다시 카드를 꺼냈고, 클레어는 가문 사람들끼리 즐긴다는 새로운 게임을 소개해 주었다.

달이 잔뜩 기울어지는 시간이 되도록 놀이는 멈추지 않았다.

* * *

“……루이스?”

그리고 한순간. 루이스는 귓가에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에 눈을 떴다.

사방은 어두웠다.

언제부터 잔 거지? 분명히 침대 위에 앉아서 내려놓을 카드를 고르고 있었는데 말이다.

역시 밤을 지새우는 건 무리였던 모양이다.

루이스는 뻐근한 눈을 비볐다.

시야가 확실해지자, 그녀를 내려다보는 이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저…….”

루이스에 작은 소리에 이안은 ‘쉿.’하는 소리를 내며 제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조용히 하라고? 왜지?

부스스 일어나니 그 의문은 쉽게 풀렸다.

루이스의 바로 곁에 클레어가 잠들어 있었다.

멀리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잠이 든 딘의 모습도 보였다.

다들 놀다가 그대로 쓰러진 모양이네.

루이스는 상황을 이해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손을 내밀어 왔다. 어서 잡으라는 듯 말이다.

이 새벽에요? 왜요?

의아한 듯 바라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냥 미소뿐이었다.

녹아내릴 것 같은 부드러운 미소 말이다.

루이스는 별수 없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거의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닫았다.

어느새 숨마저 참고 있었던 걸까.

완벽하게 문이 닫히는 순간에는 두 사람 모두 깊은숨을 뱉었다.

이제 방을 나왔으니, 한 마디 설명해 주어도 될 것 같은데.

이안은 말없이 어두운 복도를 가로 질렀고, 루이스는 조금 느린 걸음으로 그를 따라갔다.

오늘따라 그의 걸음이 조금 빨랐다.

잡은 손을 중심으로, 서로의 팔이 길게 늘어지고 만다.

‘대체 어디 가시는 거람.’

말도 해 주지 않고.

물론 루이스가 먼저 물어봐도 될 일이지만, 어쩐지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왠지 그랬다.

그는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갔다.

속도를 늦추는 법도 없이, 꾸준하고 성실하게 말이다.

루이스는 비로소 그가 어디로 가려는지 깨달았다.

옥상이다.

오늘 낮에 모든 공사가 끝난 기숙사의 옥상 말이다.

하지만 이 시간에 왜?

의아해하는 사이에 둘은 가장 높은 층에 도달했다.

이안이 철문을 밀었다.

눈앞에 보이는 높은 창살이 예전과는 달리 시야를 막아서고 있었다.

어떤 점에서는 좋지 않아진 거다.

루이스는 이안의 손을 놓고 긴 창살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차가웠다. 그건 여름마다 밤으로 도망치는 차가운 바람이 남기고 간 것이다.

루이스는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 그렇듯, 하늘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루이스의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인간이 사라진 땅 위에는 언제나 특별한 하늘이 존재한다고.

어둠을 밝히는 인위적인 불빛이나.

적막을 가르는 다양한 소리 같은 것이 전부 사라질 때면.

아무것도 닿지 않은 순수한 하늘이 나타나기 마련이라고.

루이스는 이런 이야기를 아버지의 따스한 품에서 전해 들었다.

진득한 어둠에 꾸벅꾸벅 졸기도 하면서.

오늘의 하늘은 마침 그 날과 아주 닮아있었다.

미약한 별 하나도 제 색으로 빛을 내리는, 그런 하늘 말이다.

“운이 좋았어.”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루이스는 제 옆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철창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며 고개를 높이 들어 올리고 있었다.

“늘 구름이 끼어서, 이런 날이 오지 않을 줄 알았거든.”

“매일……, 여기에 오신 거예요? 이렇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빛과 사람이 적은 곳에 서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니…….”

그는 언제나 빛과 함께였다.

그건 은유나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발길이 닿는 곳이면 시종들은 환한 낮과 같은 빛을 비춰주었다.

“그럼, 이런 하늘과는 처음 만나시는 거겠네요.”

“그래. 밝은 수도에서는 볼 수 없으니. 그대는?”

“저희 아버지는 이런 풍경을 절대로 놓치지 않으시는 분이죠.”

“하긴.”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위니 씨는 루이스에게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어디든 데리고 갔을 것이다.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하시니까.

“역사적인 첫 만남에 저를 초대해 주어서 고마워요. 실은 저도 이런 하늘을 만난지 꽤 오래 되었거든요.”

루이스가 기쁘게 웃었다.

하지만 얼굴을 바라보던 이안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음, 계속 생각하고 있었는데.”

“네?”

“아무리 생각해도, 그대와 딘 크리시스는 너무 가까워.”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해서 제 가장 친한 친구 자리가 흔들리는 건 아니니까요.”

“그 자리를 걱정하고 있는 게 아닌데. 난.”

가벼운 말에 퍽 진지한 대답이 돌아왔다.

루이스는 ‘그게 무슨 소리세요?’라는 말을 삼켰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여러 가지 생각이 또 머릿속을 어지른다.

정리되지 못한 많은 것들 말이다.

원작이라거나, 약속이라거나. 정의 내리지 않은 입맞춤 같은 것.

다시 바라본 그는 조금 화가 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세상에, 회장님.

지금 질투하세요?

“……물론 나는 일 년 동안 그대를 자유로이 두겠지만.”

그가 변명 같은 말을 덧붙였다.

“내 영역은 꽤 넓으니까. 내 아가씨가 일 년 정도 산책을 하기에는 마침 좋을 정도고…….”

그는 머리를 식히려는 듯 잠시 차가운 창살에 이마를 기대었다.

“……이성과 감성이 싸우고 있네요.”

“어쩔 수 없잖아. 약속했으니까.”

그가 살짝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대답했다. 몹시 억울하다는 얼굴로.

루이스는 조금 웃어 버렸다.

이쯤 되면 노력한 세월이 억울하기는 해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이스 스위니가, 그에게 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말해 버릴까.

아으, 그건 안된다.

하지만 이렇게 애매한 관계로 지내는 것도…….

“그대도 이상과 감성이 싸우는 모양인데?”

어느새 그의 얼굴이 가까워져 있었다.

이제 웃는 쪽은 이안이었다.

“어, 어쩔 수 없잖아요…….”

“그대가 어쩔 수 없을 건 뭐야. 내 손과 발을 묶은 건 그대인데.”

묶은 것치고는 너무 최선을 다해서 꼬시는 말씀을 하셨다고요. 정말이지.

“저도 사정이 있단 말이에요.”

“이성적인?”

“네, 아주 이성적인.”

“그건 다행이네.”

다행?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니, 그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해 주었다.

“루이스 스위니의 감성은 무엇보다도 강하거든.”

“그건…….”

루이스는 첫마디만 겨우 내뱉은 채 무어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루이스의 어깨너머로 창살을 쥔 그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이 거리의 의미를 루이스는 알고 있다.

닿으려는 거다.

그날 밤과 같이.

그리고 그건, 순식간에 모든 것을 정리해 버릴 거다.

그날 밤의 입맞춤이 두 사람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두 사람의 관계가 무엇인지.

루이스는 자신의 고지식한 성격을 잘 안다.

이렇게 마음의 방향이 정해지고 나면, 아마 쉽게 바꾸지 못할 거다.

훗날, 그의 마음이 원작을 따라 변하고 다른 사람을 택하는 순간이 온다고 하더라도.

루이스만은 변하지 않으리라. 원작의 루이스가 그리했듯.

‘……어떻게 하지.’

원작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움츠러들고 만다.

“루이스 스위니.”

낮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이스는 제가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그가 있었고, 그 너머론 하늘이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은 어둠을 입어도 아주 근사했다. 푸른 눈동자에 루이스가 비쳤다. 거짓 하나 없는 곧은 이 시선은 무척 귀한 것이다.

새삼 깨닫고 만다.

조금 분하지만, 이안 오드모니얼이 옳다고.

루이스의 감성은 무엇보다 강하다.

아름답게 심장을 채우는 것이 생기면, 어떤 거짓이나 변명도 사그라든다. 그것을 지지하는 이성마저.

루이스는 발끝을 조금 들었다.

비로소 남은 거리가 채워졌다.

입술 끝이 닿는 순간에 새삼 실감하고 말았다.

정말로, 정말로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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