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주인공의 여자사람친구입니다-35화 (35/92)

?35. 같으나, 다른

루이스는 앞머리를 시원하게 올려 묶은 뒤에, 질겅질겅 젤리를 씹었다.

이건 웨인 힐 교수님의 오답 리포트를 작성하고 받은 젤리다.

루이스는 그분의 애제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가득 담아, 식사, 수면 시간마저 줄이며 훌륭한 오답 리포트를 완성했다.

「괴, 굉장히 열심히 했군요.」

조교 선생님은 물론이고 힐 교수님까지 놀라워하셨기 때문에 루이스는 조금 우쭐해졌다.

젤리 한 통을 깔끔하게 비운 후에는 또 다른 젤리를 꺼냈다.

이건 휴이트 교수님의 조교 선생님께서 주신 거다.

물론 이 젤리를 받을 때도 루이스는 칭찬을 받았다.

「올해 수강생 중,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리포트를 쓴 학생이군요.」

아무래도 루이스의 마음에는 칭찬을 먹고 사는 기관이 따로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까지 칭찬에 몰두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젤리를 통째로 입속에 털어 넣은 후, 루이스는 또 다른 젤리를 꺼냈다.

이건 라센 교수님의 조교 선생님이 준 거다.

「엄청난 양이군요.」

「네, 시험을 끝까지 치르지 못한 아쉬움을 좀 담아 봤어요.」

이런 말을 할 때는 빙긋 웃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으득.

조교 선생님과 루이스의 대화를 듣던 라센 교수님이 펜촉을 꾹 눌러 망가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열 받으신 모양이다.

이럴 때는 악역의 재능이 있는 자신이 조금은 좋아진다.

이렇게 오답 리포트 기간은 무사히 종료되고 있었다.

시험부터 이어지는 긴 학술 레이스에 지친 학생들은 대부분 나가떨어졌다.

아카데미의 분위기는 온기에 녹아내리는 젤리처럼 말랑말랑해졌다.

강의도 대부분 느슨해졌고, (물론 휴이트 교수님의 수업은 그렇지 않았다) 도서관은 점점 썰렁해졌다.

기숙사에서는 코를 고는 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루이스의 펜대가 멈추는 일은 없었다.

오늘도 그녀는 학생회실의 커다란 테이블에서 맹렬한 기세로 리포트를 완성하고 있었다.

“……너 오답 리포트 아직도 안 끝냈냐?”

맞은편에 앉은 딘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쉼 없이 펜촉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싫었던 모양이다.

“거의 끝났어요.”

“오늘까지가 기한인 건 알고 있어?”

“알죠. 그러니까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거잖아요.”

루이스는 마지막으로 남은 젤리를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젯밤부터 식사하지 않아서 머릿속이 멍했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애초에 그럴 여유가 있다면 지금은 잠이 더 우선이고.

“오답 리포트 기한을 왜 그렇게 꽉 채워서 내는 거야?”

“그야…….”

루이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 오늘 오후에 시험 결과가 발표되니까요.”

“그래서?”

“그때까지 가능하면 무언가에 집중하고 싶었거든요.”

딘은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수석이 아닐까 봐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리라.

“넌 수석을 못하면 혹시 이마에서 뿔이라도 솟아 나오냐?”

꽤 진지하게 물어본 건데, 루이스는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었다.

“정말 그런 이유라면 필사적으로 수석을 차지할 필요가 있긴 하겠네요.”

몇 번 더 쿡쿡거리던 루이스는 펜을 고쳐 쥐었다.

“하지만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 아카데미에 올 때, 저 자신과 약속한 것이 있거든요.”

그녀의 이야기에 관심이 생겼는지, 딘은 턱을 괴며 ‘뭔데?’라고 물어왔다.

“이번에는 좀, 멋있는 사람이 되기로 했어요. 항상 동경했거든요.”

그리고 루이스의 기준에서 멋있는 사람이란, 공부도 잘하고 모두에게 상냥한 사람이다.

“멋있다는 단어와 네가 공존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알아요, 알아요. 그러니까 노력하는 거잖아요? 클레어처럼 멋있는 사람이 되려고요.”

루이스는 똑 부러지는 클레어를 떠올렸다.

그녀는 정말로 대단했다.

평소의 실력으로도 차석을 차지할 수 있는 우수한 머리.

누구에게나 상냥한 태도.

하지만 불의 앞에서는 책상을 집어 던질 수 있는 그 과격함.

“정말 반할 것 같아요. 안 그래요?”

“그야.”

딘은 조금 얼굴을 붉힌 채, 시선을 돌리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

“그러고 보니 두 분, 오랫동안 교류하셨다고 했죠?”

“뭐, 조금.”

“조금요? 클레어는 줄곧 무척 친했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야, 친하기는 했지.

서로의 머리글자가 C와 D니까, 이름마저 영원히 나란히 함께할 관계라고 이야기 나누기도 했다.

어쨌든 그건 어린 시절의 일이다.

머리글자가 이웃한 정도로 좋아할 나이도 지나 버렸고.

뭐, 나이가 들어서도 소꿉친구들에게 공주님 취급을 받는 루이스 스위니는 죽어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딘은 가볍게 한숨을 뱉으며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리포트나 빨리해라. 슬슬 제출 제한 시간이니까.”

“윽.”

루이스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얼른 책장을 넘겼다.

그의 말대로였다. 서둘러야 했다.

* * *

루이스는 아슬아슬한 시간에 오답 리포트를 제출했다.

“이건 마지막 학생의 특권이지.”

조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젤리를 다섯 통이나 건네주셨다.

아무래도 남은 걸 모두 탈탈 털어주시는 모양이다.

실은 어제저녁부터 식사 대신 젤리를 먹은 탓에, 이 젤리가 반갑지는 않았다.

하지만 루이스는 웃으며 받았다.

“감사합니다. 특권을 누리다니 행운이네요.”

물론 예의 바른말도 잊지 않았다.

젤리란 보관이 쉬운 간식이니까, 아마 사흘쯤 지나면 기쁘게 먹을 수 있을 거다.

아니면 방학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마차에서 먹어도 좋을 테고.

달콤한 젤리를 먹으면 불쾌한 마차 멀미를 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집이라.

그러고 보니 집에 갈 수 있겠다.

루이스는 봄부터 줄곧 만나지 못했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온실의 식구들을 생각했다.

분명히 루이스가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계실 거다.

맛있는 음식을 가득 준비해 놓고서.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릴 수 있다면 좋겠는데.

루이스는 슬슬 시험 결과가 발표될 강의동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러 가지로 원작이 꼬여버리긴 했지만, 여전히 루이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자신의 꽃길을 사수하는 것이다.

아카데미 생활을 성공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그중에서 몹시 중요한 부분이고.

다소 유난스럽기는 해도, 최고 학생의 명예는 작위가 없는 스위니 가문에 큰 힘이 되어 줄 거다.

루이스의 신용 평가도 올라갈 테고.

실질적인 이득이 있는 일이니, 이렇게 열렬히 탐하는 것은 당연했다.

강의동 1층은 몇 명의 학생들로 붐볐다.

루이스처럼 성적에 지대한 관심을 둔 인물들일 것이다.

모두의 얼굴이 꽤 결연하다.

‘동지, 같은 사람들이구나.’

아마 루이스와 비슷한 생각으로 성적에 미래를 걸고 있는 학생들일 거다.

어쨌든 결연한 마음으로는 루이스도 지지 않으니까, 주먹을 꽉 쥐고 인파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깨알 같은 글씨가 적힌 커다란 종이가 보였다.

루이스는 종이를 따라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성적이 높은 순서대로 위에서부터 적혀 있으니, 수석 학생은 가장 위에 이름이 있을 것이다.

‘이안 오드모니얼.’

……이건 원작이랑 똑같네.

얼떨결에 상급생의 결과표를 보게 된 루이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정말이지. 어디까지가 원작이랑 같고, 어디까지가 다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어쨌든 이안은 원작대로 수석을 차지했다.

그렇다면 시몬은?

원작의 시몬은 언제나 중간 정도의 실력을 유지했다.

가끔은 아는 문제에 오답을 적어가면서까지 말이다.

시선을 내리자, 가운데 즈음에서 시몬의 이름을 발견했다.

역시 원작대로다.

으음, 불길한데.

만약 신입생 쪽도 원작의 힘이 그대로 작용하였다면, 수석은 다름 아닌 스텔라다.

‘망해라! 원작!’

루이스는 처음으로 원작의 파멸을 기도하며, 신입생의 순위표로 시선을 돌렸다.

작은 글씨를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익숙한 이름들이 몇 개씩 지나갈 때마다 불안으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

조금 전에 원작대로 성적이 나오고 말았던 상급생의 순위표를 본 탓이다.

어쩌면 루이스가 나쁜 일을 겪은 것은 ‘원작 보존의 법칙’이 작용한 것일지도 모른다.

스텔라를 수석으로 만들기 위해서.

생각해보면 그녀는 주인공이니까, 다소 그런 이득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

소설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은가, 주인공에게는 유달리 행운과 친절이 넘쳐나니까.

종이의 상단에 시선이 닿았다. 루이스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꾹 감았던 눈을 반짝 떴다.

한 번, 두 번 눈을 깜빡이자 시야가 선명해졌고 가장 위에 적힌 이름이 보였다.

“……아.”

벌어진 입술에서는 그 정도의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루이스 스위니’

제 이름을 발견하면 분명히 기뻐서 날뛰게 될 줄 알았는데.

‘맙소사, 진짜로 원작을 이겼어.’

물론 입학시험 때도 이기긴 했지만, 이건 뭔가 달랐다.

그 방해를 뚫고서도 결국에는 이겨낸 거니까.

스텔라는?

그녀의 이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루이스의 바로 밑에 있었으니까.

문득, 루이스의 앞으로 지나가는 이가 있었다.

스텔라였다.

서로를 스치는 순간에, 그녀의 새카만 눈동자가 루이스에 머물렀다.

노려보는 것인가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굉장히 복잡한 감정이 그 안에 얽혀있었다.

루이스는 스텔라가 어떤 감정의 사슬에 묶여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얼핏 보였던 그녀의 하얀 뺨은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 뺨을 거칠게 내려친 것처럼.

루이스는 손버릇이 나쁜 교수를 한 명 알고 있었으니, 누가 스텔라를 이렇게 때렸는지 알아차렸다.

지독한 일이 아닌가.

아카데미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요정 대모가, ‘어째서 수석을 차지하지 못했지? 내가 이렇게 도와줬는데!’라며, 가여운 신데렐라를 후려갈긴 것이나 다름없는 거다.

애초에 그런 사람은 요정 대모도 무엇도 아니다.

그냥 스텔라를 이용하지 못해 안달이 난 진짜 못된 악역일 뿐이다.

어째서 원작을 읽을 때는 알아차리지 못한 거지?

생각해보면, 스텔라와 이안이 이어지는 달콤한 이야기의 끝에서, 여러모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라센 백작가였다.

그러니 어쩌면 스텔라를 향한 교수님의 호의는 순수한 선의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카데미의 비밀 연인은 그런 정치적 관계가 제대로 다루어지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아카데미 구석구석의 공간을 알뜰하게 활용해서, 맹렬하게 연애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이니까.

“스텔…….”

루이스가 작게 그녀를 불렀지만, 스텔라는 다급하게 지나가 버렸다.

깊이 고개를 숙인 건, 붉게 부어오른 뺨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거다.

“그다지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네. 그렇게 긴장하더니.”

어느새 다가온 이안이 이야기를 걸어왔다.

“그, 그야, 기쁘죠. 당연히.”

“시험 하나를 거의 날려버리다시피 했는데도 수석이라니. 대체 다른 시험을 얼마나 잘 본 거야?”

이안이 다소 툴툴거리는 말투로 불만을 뱉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 역시 상급생 중에서 가장 시험을 잘 봤으면서 말이다.

“운이 좋았어요. 미리 생각해 둔 부분에서 문제가 나왔거든요.”

“거기에 내 노트도 도움이 되었고?”

그는 은근히 제 공을 언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요. 회장님의 노트가 절 살렸죠.”

“다행이군. 그렇다면, 그대의 시간을 내가 다소 사용해도 문제는 없겠어. 그렇지?”

“제 시간을 사용하신다고요?”

루이스는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되물었다.

대체 이 악마는 얼마나 루이스를 부려먹어야 속이 시원한 걸까.

차마 말하지는 못했지만, 최근에도 소소한 부려먹음이 있었다.

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심부름이나, 맛없는 젤리를 제공한 조교 선생님에 대한 항의서 전달 같은 것 말이다.

루이스는 오답 리포트를 작성하는 일정 중간중간에도 이안이 지시하는 일을 하느라, 거의 잠도 잘 수 없었다.

그런데 또 그녀의 시간을 가져가겠다니.

이러다가 인생을 통째로 달라고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디에 써먹으실지는 몰라도.

“그래. 어차피 오늘부터는 그다지 할 일도 없잖아.”

“그렇지 않아요. 이 기간이 끝나면 읽고 싶었던 책도 보고, 또 관리 부인의 밭에 잡초를 뽑기로 했었거든요. 힐 교수님이랑 온실 병충해 예방도 하기로 했고요.”

루이스가 손가락을 꼽아가며 약속된 일을 이야기하자, 이안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그대는 언제부터 모두의 일꾼이 된 거지? 그대는 내 것이라고 그 넓은 이마에 써 붙여 놓아야 할 것 같은데, 이거.”

“전 제거예요. 회장님께는 못 드려요!”

“그대의 노동력은 전부 내 거야. 사소한 근육의 움직임 하나도 다른 인간들에게 내어 줄 것은 단 하나도 없어.”

이런 악마 같은 폭군이 다 있나.

루이스는 잔뜩 불만은 품은 얼굴로 이안을 삐쭉이 노려보았다.

“그 불경한 표정은 참 오랜만이로군.”

그는 잠시 입가를 가리며 즐거이 웃었다.

어쩐지 루이스의 불경한 표정을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어쩐지 회장님은 점점 시몬을 닮아가는 것 같아요.”

“내가 그렇게 다정다감하고 달콤하게 굴었던가?”

“그게 아니라, 가끔 속을 알 수 없다는 뜻이었어요.”

루이스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고, 이안은 그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겨 주었다.

“어쨌든 따라와. 지금 그대의 시간과 근육을 차지할 사람은 나거든.”

그가 먼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하기에, 루이스는 ‘그 괴상망측한 소유욕은 대체 뭐에요?’ 라고 중얼거리며 그를 따라갔다.

이안은 루이스를 아무도 없는 학생회실로 데려갔다.

물론 그러리라 생각했다.

거긴 그의 성이나 다름없는 곳이고, 언제나 처리해야 할 일이 쌓인 곳이니까.

대체 무슨 일일까.

설문 조사지의 정리? 아니면 방학 시작 행사에 대한 준비?

몇 가지 일을 미리 생각하고 있는데, 그는 서류가 쌓인 테이블을 그대로 지나갔다.

그리고 안쪽 휴게실의 문을 열었다.

이름이야 휴게실이지만, 실제로는 여러모로 사용되는 다용도실에 가까웠다.

딘은 이곳에서 낮잠을 늘어지게 자곤 했다.

클레어는 활동복으로 갈아입을 때 이 장소를 이용했다. 기숙사까지 가는 것이 귀찮다면서.

이안은 학생회에서 보관해야 하는 물건이 있을 때마다 이곳에 적당히 쑤셔 넣곤 했다.

하지만 루이스는 이 공간을 그다지 이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들어와 본 일도 많지 않았다.

“뭔가 정리할 거라도 있나요?”

“많지. 일단 앉아봐.”

이안이 낡은 소파 위로 자리를 권했다.

“앉았어요.”

“어때?”

이안은 작은 스툴 하나를 가까이 끌어와서는 루이스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그야……. 편하네요. 낡아서 딱딱할 줄 알았거든요.”

“그렇지? 그러면 이번에는 누워볼까?”

그가 담요를 건네며 자연스럽게 권했다.

“누워요?”

“그래. 눕는다는 말이 뭔지는 알지?”

“……뭔가 실험하시는 건가요?”

“비슷해.”

그는 그리 대답하고는 장난스레 히죽 웃는다. 꼭 어린 시절의 그처럼.

요구사항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루이스는 얌전히 소파 위로 길게 누웠다.

얇은 담요가 그녀의 몸 위로 가볍게 늘어졌다.

“어때?”

“편안하네요. 따듯한 기분이 들고요.”

“역시 그렇군.”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뭔가 대단한 결론이라도 내린 것처럼.

설마 정말로 실험인가?

낡은 소파의 탄력을 알아본다거나 하는 그런 것 말이다.

“그래서요?”

루이스는 담요를 조금 끌어 내리면서 물었다.

“그래서라니.”

“제게 시킬 일이 있으시다면서요.”

“시키고 있잖아?”

루이스는 이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게, 뭘 시키고 계신 거죠?’라는 얼굴로.

“그대가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봤다면, 내가 시키고 있는 일이 아주 합당하다는 걸 알 거야.”

“제 얼굴이요?”

“그래, 그 노동에 찌든 얼굴 말이야.”

찌, 찌들었다니!

그게 일을 시키는 사람이 할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성실한 내 일꾼께서는 제 몸 상태도 모르고, 온 동네의 일에 참견하고 돌아다니시니.”

그의 손이 눈가 위로 올라와 그림자를 만들어 주었다.

눈을 따갑게 했던 햇살이 차단되어서, 루이스는 전보다 더 편안해졌다.

“식사도 제대로 먹지 않고 말이지.”

보이지 않는 시선 너머에서 그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체할 것 같았단 말이에요.”

루이스는 작은 목소리로 변명했다.

식사할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였던 건, 오늘의 결과가 너무나도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내려놔도 되잖아.”

그의 목소리에 조심스러움이 담겼다.

아마 루이스의 노력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릴까 봐 걱정하는 것이리라.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하는 건, 회장님도 마찬가지잖아요.”

“그야, 나는 응당 그래야 하는 사람이고.”

“그럼 저도 그래야 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할게요.”

“고집하고는…….”

툭.

아슬아슬한 간격을 두고 있던 그의 손이 루이스의 눈가를 완전하게 덮었다.

“……고마워요.”

“그대를 걱정하는 건 스위니 부인께서 나와 시몬에게만 허락해 주신 특권이지.”

“어머니께 전해 드릴게요. 두 분께서 제 오라버니 역할을 아주 잘 해주셨다고요.”

“오라버니?”

그가 묻기에, 루이스는 얼마 전에 만난 이안의 이웃과 나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 자식이 그렇게 기억력이 좋을 줄 몰랐는데. 그 말을 아직도 기억하다니.”

그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고, 루이스는 조금 웃었다.

“웃지 마. 전 약혼녀의 오라버니 역할을 성실하게 할 정도로 속 좋은 남자는 못되니까.”

“…….”

대화가 멈추어졌다.

루이스는 ‘전 약혼녀’라는 말을 뱉은 그의 표정이 보고 싶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루이스는 두 손으로 그의 손을 조심스레 끌어내렸다.

밝은 햇살이 다시 루이스의 눈동자 위로 쏟아졌다.

잠시 눈을 찌푸렸고, 흐릿한 시야 너머로 이안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조금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심술이 난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선이 바로 마주치는 순간에,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익숙한 말을 중얼거렸다.

어쩌면 부끄러웠던 걸지도 모른다.

“어, 어차피 진짜 약혼도 아니었잖아요.”

그건. 그와 옥상에서 파혼을 이야기할 때 루이스가 했었던 말이기도 했다.

그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바로 반박해 왔던 지난번과는 다르게 말이다.

대신 그는 루이스의 손을 끌어갔다.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자, 그녀의 손등과 그의 입술이 아슬아슬한 거리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닿지 않았다.

그는 루이스가 정한 두 사람의 거리를 존중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고 해서,”

손등 위로 흐르는 느릿한 대답은 그날과 같았다.

“……가짜도 아니었잖아?”

그러나 달랐다.

무언가가.

* * *

루이스는 다섯 시간을 내리 잤다.

잠시 의미심장하게 굴던 그도, 이후로는 다시 평소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비교적 편안하게 잘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비교적.

잠에서 깨어난 뒤로는 이안과 함께 식사하러 갔다.

그는 어쩐 일로 ‘그대는 토마토를 좋아하니까.’라며 토마토 두 조각을 선뜻 내어주었다.

루이스는 의심의 눈초리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 남자. 토마토 두 조각으로 루이스를 꼬시려는 건가.

문제는 성공할 것 같다는 거다.

저 얼굴로는 토마토 두 조각이 아니라, 반 조각만 나누어 주어도 성공할 거다.

부러울 정도로 효율적인 얼굴 같으니.

“왜 그렇게 쳐다봐? 토마토가 싫어졌어?”

“회장님께서 너무 친절하시니까 불안해져서요.”

“왜지?”

“그야, 회장님은 언제나 단것과 쓴 걸 같이 주시니까요! 또 제시간과 근육을 멋대로 사용하고 싶어지신 거죠?!”

“들켰나?”

“당연히 들키죠! 빨리 말해주세요. 그래서 뭔데요?”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일단 루이스 앞에 토마토를 하나 더 놓아주었다.

늘어가는 토마토 조각의 개수만큼 루이스의 불안도 함께 늘었다.

“사실, 그대에게 반갑지 못한 소식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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