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거의 고백에 가까운
툭.
루이스는 도서관에서 빌릴 책을 내려놓았다.
탐스러운 붉은 머리를 가진 소녀가 루이스의 대여 목록에 제목과 기간을 적은 후, 루이스 앞으로 슥 책을 밀었다.
“……난, 네게 사과 안 해.”
그리고 스텔라는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루이스가 불명예를 벗은 지 하루가 지났다.
루이스는 거짓말쟁이 스텔라에 대해 한가지 원칙을 세워두고 있었는데.
그녀가 먼저 다가와 사과를 건넨다면, 웃으며 그것을 받아 줄 생각이었다.
그 안에 진심이 섞이든 아니든 관계없었다.
적대하는 인간을 굳이 늘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스텔라는 찾아오지 않았고, 이렇게 루이스가 책을 빌리는 순간이 되어서야 마주치게 되었다.
그리고 대뜸 돌아온 말은.
‘사과하지 않는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고도 주인공이니? 따지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루이스는 일단 침착하게 굴었다.
“스텔라의 거짓말에 제가 피해를 보았다고 해도요?”
“어쨌든 넌 아무것도 잃지 않았잖아?”
“그건 모르죠. 아직 성적이 발표되지 않았으니까요.”
루이스는 스텔라가 건넨 책을 안아 들며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수석이 되길 빌어주세요. 저는 스텔라에게도 다정한 사람으로 남고 싶거든요.”
두꺼운 지도책을 끌어안은 루이스가 몸을 돌렸다.
“루이스 스위니.”
하지만 스텔라가 부르는 소리에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네가…….”
그 순간 스텔라의 표정은 의심으로 채워져 있었다.
“가진 그 모든 것들.”
‘모든’이라고 말할 때,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루이스는 감각적으로 그녀가 말하는 그 ‘모든’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스텔라가 가져야 했을 것들을 뜻하는 것이리라.
교수의 관심, 성적 그리고 남자관계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이안과 시몬은 놀라울 정도로 스텔라에게 무관심했다. 좋다거나 싫다는 감정마저 없었다.
그냥 같은 아카데미에 존재하는 붉은 머리 여학생 이상의 인식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건……. 정말로 네 것이야?”
그녀의 말은 거의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루이스도 그 소리를 반쯤은 듣지 못했다.
다만 입술의 모양새와 어렴풋이 들려오는 몇 음절로 그 문장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스텔라는 루이스가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그녀는 몸을 돌려 대출목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딘가 허둥거리는 뒷모습에서 깊은 당혹이 느껴졌다.
루이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방에 지도책을 넣어서 도서관을 나섰다.
루이스의 가방은 여전히 망가진 채였다.
너덜너덜한 손잡이를 쥘 수는 없어서, 그녀는 가방을 품에 안고 다녀야 했다.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어느새 금방 적응해서 이제는 괜찮았다.
게다가 지금 당장 루이스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스텔라나 가방 같은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한 학기 동안 열심히 정리해 둔 일부 노트에 잉크가 번져 못 쓰게 되었다는 끔찍한 사실 앞에서는 그 어떤 문제도 사소해졌다.
오답 리포트를 작성하려면, 노트의 도움이 꼭 필요한데.
‘어쨌든 답안을 돌려받은 것부터 하나씩 리포트를 작성해야지.’
루이스는 리포트에 대해 조금 음흉한 계획을 세웠는데.
오답은 물론이고, 정답이지만, 조금 부족함이 느껴지는 답안에 대해서도 오답 리포트를 작성할 예정이었다.
루이스의 훌륭한 리포트를 본 교수님들은 분명히 깊이 감동하여, 루이스에게 해롱해롱한 상태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훗날 루이스가 최고 학생의 배지를 받는데 그 누구도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완벽하고 아름다운 계획을 세우며 만족스럽게 웃고 있을 때, 복도 맞은편에 서 있던 남학생 한 명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루이스의 표정에 잠시 놀란 것 같은 얼굴을 짓더니, 이내 재미있다는 듯 씨익 웃어 보였다.
‘누구더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제대로 인사한 적은 없는 것 같지만 말이다.
남학생은 그대로 루이스에게 다가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해왔다.
“반가워, 내 이웃의 여동생이지?”
“어, 음. 잘못 보신 것 같아요. 전 오라버니가 없거든요.”
“그럴 리가 있어? 그 녀석이 루이스 스위니를 가리켜서 ‘무서운 여동생’이라고 말하던걸.”
무서운 여동생?
루이스를 가리켜 그렇게 표현할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뿐이다. 이안 말이다.
“제가 그분의 동생이라는 사실은 이제 알았네요.”
“귀한 공주님께서 이제라도 아셨다니 다행이지.”
남학생은 재미있다는 듯 잠시 킬킬 웃었다.
그가 공주님이란 단어를 굳이 사용한 이유는 뻔했다.
이안이 위대한 분의 아드님 되시니, 그에게 여동생은 이 나라의 하나뿐인 공주님이 되는 거다.
어쨌든 루이스가 되고 싶은 것은 공주님도, 악마 같은 황태자의 여동생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큰일을 겪었다며? 괜찮아?”
문득 그가 장난기를 지우고 진지하게 걱정해 오기에, 루이스는 방긋 웃었다.
“네, 괜찮아요.”
“잘난 오라버니도 그다지 쓸모는 없었던 모양이야? 그런 일이 터지는 걸 보면.”
이안에게 ‘쓸모없다.’는 야박한 평가가 붙는 일은 좀처럼 없었기에 루이스는 조금 즐거워졌다.
“회장님께서는 악마 같을 때가 더 많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좋은 조언을 해 주시긴 했어요.”
루이스가 입학시험 감독관이었던 휴이트 교수님께 도움을 부탁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해냈을 때.
이안은 입학시험에서 교수들이 ‘부정이나 이상이 없었음’을 증명하는 서류를 남겨둔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건 다행이네.”
“네. 노트가 엉망이 되어서 곤란하게 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요.”
“그건 꽤 커다란 불행인데. 악마 같은 오라버니께서 노트는 안 빌려주신대?”
“그 악마와 함께 듣는 수업 노트는 모두 멀쩡하거든요.”
악마의 가호가 있었군, 이라며 두 사람은 잠시 웃었다.
“그럼, 지리학은 어때?”
“엉망이 됐죠.”
“잘됐네. 마침 나도 그 수업을 듣거든.”
루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학생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낯이 익다고 생각했던 것은 함께 듣는 수업이 있었기 때문이었나 보다.
물론 여럿이 듣는 수업인 만큼, 제대로 말을 섞을 기회는 없었지만 말이다.
“노트가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이야기해. 이안의 옆방이니까, 찾아오는 건 어렵지 않을 테고.”
“친절하시네요…….”
루이스는 작게 감탄하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 오늘 그렇지 않아도 오답 리포트를 하나 제출해서, 젤리를 하나 받았는데.”
젤리?
갑자기 들려오는 달콤한 단어에 루이스는 잠시 고개를 기울였지만, 곧 한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건 아카데미의 전통 중 하나였다.
오답 리포트는 고통스러운 과제다.
많은 양의 내용을 꽉꽉 채워 적어야 하므로 그 수고도 적지 않았다.
그러니 리포트를 제출하면, 조교 선생님들께서 고생했다면서 젤리를 하나씩 내어주셨다.
이런 전통은 좋다. 리포트를 내면 단 걸 주다니!
물론 젤리를 먹은 학생은 당분을 충전한 뒤, 그다음 오답 리포트에 매진해야 한다.
그 오답 리포트를 내고 나면 또 젤리를 받아서 당을 충전하고, 다음 리포트에…….
이 지옥 레이스 같은 일정에도 유일하게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 귀한 젤리를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일이다.
루이스는 제게 젤리 상자를 내미는 남학생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젤리를 건네는 행위에는 의미가 붙는다.
방학이 되기 전에 가까운 관계를 쌓고 싶다는 의미 말이다.
가벼운 뜻이 아니라, 조금 더 뭐랄까.
거의 고백에 가까운……?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보면 그런 기색은 하나도 없었다.
그냥, ‘옆방 친구 여동생’에게 ‘옜다. 간식 먹어라.’라며 젤리를 툭 던져주는 것 같았다.
다정한 친절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는 거지?
게다가 딱히 여길 보는 사람도 없으니 이상한 소문이 날 리도 없고.
루이스는 한 손으로 가방을 안은 채, 다른 손을 뻗었다.
“안녕, 루이스.”
손끝이 젤리 상자에 닿기 직전, 바로 옆 창가에서 시몬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몬?”
그는 루이스와 젤리 상자를 번갈아가며 바라보고는,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방해되었나.”
“그럴 리가요! 그냥 젤리를 받고 있었을 뿐이에요.”
“……그냥, 젤리?”
시몬이 그냥이라는 말에 유달리 힘을 주며, 남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젤리 상자를 슬금슬금 넣으며 곤란한 듯 미소 지었다.
“루이스 스위니에게 무서운 오라버니가 둘이나 있는 줄은 몰랐는데.”
“시몬은 오라버니가 아닌걸요.”
루이스가 얼른 대답했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노트를 빌려주겠다는 말은 진심이니까. 언제든지 찾아와.”
“고마워요.”
그는 다소 서두르는 것 같은 모습으로 도서관 복도를 지나갔다.
“오해였어요. 시몬.”
“……내가 방해된 거군.”
“그, 그건 아니지만요.”
“난 혹시나 네가.”
그는 조금 주저하며 어렵게 말을 이어갔다.
“아카데미의 전통을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했어. 가끔은 젤리에 큰 의미를 두는 학생도 적지 않으니.”
그런 젤리는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시몬이 걱정했다는 말이 듣기 좋아서, 루이스는 그냥 웃어주기로 했다.
“고마워요.”
“괜한 걱정이었던 모양이지만.”
“아니에요!”
괜한 걱정이란 없다.
특히 시몬의 경우에는 좋은 마음으로 루이스를 걱정한다는 것을 빤히 알고 있으니까.
“저는 시몬이 걱정해 주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건 몰랐는데.”
“물론 걱정시키지 않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어떻게 해도 시몬은 걱정스러운 부분을 찾아낼 거고, 결국엔 루이스를 걱정할 거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젤리에 대한 걱정이 끝난 그는, 루이스의 가방을 또 걱정스레 바라보기 시작했으니까.
정말이지, 이쯤 되면 시몬을 루이스의 걱정 인형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고쳐줄까?”
그가 손을 내밀었고, 루이스는 그에게 순순히 가방을 내어주었다.
“금속 고리가 완전히 벌어졌어요.”
그는 루이스의 가방을 이리저리 뜯어보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한 시간만 내게 맡겨 준다면 좋겠어.”
“그 정도라면…….”
“고치고 나면 가져다줄 테니까.”
거기까지 이야기한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시몬. 저도 같이 가요!”
루이스가 창틀에 매달려 크게 소리를 질렀다.
시몬은 커다란 키만큼이나 보폭도 넓어서, 이대로 그를 놓치면 아마 따라잡을 수 없을 거다.
루이스는 잠시 주변을 둘러 보았다.
주변에 교직원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과감하게도 창틀 위로 뛰어올랐다.
비로소 루이스를 돌아본 시몬의 눈가가 가볍게 찌푸려졌다.
아무래도 걱정 인형께 새로운 걱정을 끼쳐드린 모양이다.
하지만 여기는 1층이고, 창틀 밖으로 뛰어내리는 일은 저택에서부터 늘 해 왔던 일이다.
“이제는 열네 살이 아니잖아. 루이스.”
시몬은 근처 벤치에 가방을 잠시 내려 두었다.
“창문을 넘는데 연령 제한은 없잖아요.”
안 그래요? 라며, 루이스는 창틀 너머로 훌쩍 뛰었다.
예상보다 조금 높은가 싶었지만, 딱히 걱정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 앞은 부드러운 흙이라서, 혹여 넘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난다고 해도 옷이 조금 더러워질 뿐이니까.
그렇게 생각할 때, 시몬의 양쪽 팔이 루이스의 몸을 받아주었다.
어째 그녀가 뛰어내릴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듯 완벽히 말이다.
양쪽 허리를 잡아 준 시몬은 그녀를 안전하게 착지시켜 주었다.
“……?!”
갑작스러운 친절에 루이스가 놀라는 것과 달리, 시몬은 평소와 같이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돌렸다.
“가자.”
그는 다시 루이스의 가방을 집어 들었다.
루이스는 자연스럽게 시몬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게 되었다.
“윽, 무겁네요.”
루이스가 조금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는 엄격하게 대답했다.
“……벌칙.”
창문에서 뛰어내린 것에 대한 벌이라는 걸까.
“대체 가방에 뭐가 든 거예요?”
그녀가 가방을 고쳐 안으며 물었다.
물론 시몬의 대답이 바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다섯 걸음을 더 걷는 시간적 간격을 두고 대답했다.
“젤리.”
“벌써 오답 리포트를 하나 제출하신 거예요?”
“두 개.”
“부럽네요. 전 하나도 못했는데.”
루이스는 또 가방을 고쳐 안았다.
“꺼내서 먹어도 괜찮아.”
그의 허락에 루이스는 사양하는 법도 없이 그의 가방을 열었다.
루이스는 다양한 과일 맛이 나는 젤리를 하나씩 입안으로 밀어 넣으며 시몬을 졸졸 따라갔다.
몇 번인가 시몬이 맛있느냐고 물었고, 루이스는 젤리를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몬은 어쩐 일로 잘했다고 칭찬까지 해주었다.
젤리를 맛있게 먹는 일 정도로 칭찬하는 심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무뚝뚝한 시몬의 드문 미소가 좋아서, 루이스는 그를 따라서 웃었다.
젤리는 금방 동났다.
그리고 가방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 많은 젤리를 다 먹었는데도 말이다.
“그럼 벌칙은 여기까지로 할까.”
시몬이 다시 그의 가방을 가져갔기에 루이스는 잠시 고민했다.
설마 벌칙은 가방을 드는 것이 아니라, 젤리를 먹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벌이 아니라, 상인데.
‘가끔 시몬의 속은 알 수 없다니까…….’
* * *
루이스는 도구실의 작업용 책상에 살짝 엎드려서, 맞은 편에 앉은 시몬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길게 늘어져 있던 루이스의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묶여 있었다.
도구 실에 들어오자마자, 시몬이 ‘여긴 조금 더우니까.’라며 얼른 묶어 준 덕분이다.
“이렇게 묶는 건 저도 혼자 할 수 있어요.”
“음, 내게는 취미생활 같은 거라서.”
“하긴, 손으로 하는 건 뭐든지 좋아하셨죠.”
“……뭐든지는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그는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가방 수리도 완벽하게 해내는 중이었다.
작은 금속 망치를 무척 능숙하게 사용하면서 말이다.
“저, 들었어요.”
잠시 아무런 말 없이 엎드려 있던 루이스는 짧은 고민 끝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툭. 대답 대신 망치 소리가 들려왔다.
“시몬이 황궁의 파티에 갔다는 거요.”
툭툭. 이번에는 두 번, 망치가 금속을 울렸다.
“……그리고 회장님께 제 이야기를 전하느라, 결국.”
루이스는 시몬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파티에 머무르셔야 했다는 것도요.”
“그건.”
시몬이 드물게 바로 대답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
루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어렵지 않다니 그럴 리가 없다.
시몬은 귀족들 사이에 나서는 것을 무척 꺼렸다.
사람들이 그의 왕위 계승권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는 것과 달리 말이다.
쉽게 말하면 이안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 그 자리를 차지할 사람은 시몬이다.
그러니 시몬은 언제나 자신을 낮추었다.
그에게는 어떤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이안과 시몬, 두 사람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도 저는 걱정했어요.”
루이스는 여전히 젤리의 달콤함이 남은 입으로 조용히 말했다.
“시몬이 저 때문에 곤란한 일을 당했다면 어쩌지, 하고요.”
“나는 그런 걸 좋아하거든.”
“저 때문에 곤란해지는 게 좋으시다고요?”
“루이스뿐만 아니라, 이안까지 포함해서 말이야. 두 사람은 내게 소중하지.”
이안이 그랬던 것처럼, 시몬도 우정의 맹세에 결코 이안을 빼먹지 않았다.
“물론 제게도 시몬이 아주 소중해요.”
루이스는 얼른 제 마음을 건넸다.
시몬이 잠시 고개를 들어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다정함이 깊이 깃든 눈동자로.
“시모온, 제 말 한마디에 ‘네게 도움이 되어서 기뻐.’ 라는 표정을 지으면 어떻게 해요! 시몬은 제게 조금 더 못되게 굴어도 괜찮다고요.”
“그건 이안의 역할이지.”
“그야, 그렇지만!”
“말 한마디에 즐거워하는 건 루이스의 역할이고.”
“그럼 시몬은요?”
“그런 너희들을 좋아하는 역할……일까.”
그가 다시 가방으로 시선을 돌리기에, 루이스도 그의 꼼꼼한 손끝을 바라보았다.
툭툭. 망치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시몬.”
루이스는 여전히 엎드린 채로 작게 속삭였다.
“정말로 파티에서 별일은……없었던 거죠?”
“……아마.”
그는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적당히 대답하고는 다시 가방을 고치는 데 집중했다.
가방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미묘한 부분에서 완벽주의 경향이 있는 시몬은 ‘금속이 조금 비틀어져서 보기 흉해졌네.’ 라며 아쉬워했다.
하지만 루이스의 눈에는 비틀어진 부분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날 밤에 시몬은 루이스가 공부하는 학생회실까지 찾아와 금속 위로 리본과 레이스 장식을 달아 주었다.
금속의 비틀어짐이 신경 쓰여서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공방 장인도 울고 갈 것 같은 굉장한 깐깐함인데.”
이안이 놀리듯 이야기했지만, 시몬은 그다지 신경 쓰는 투가 아니었다.
“이거 받아, 루이스.”
시몬은 루이스에게 지리학 노트를 건네주었다. 이번에는 분명하게 시몬의 글씨가 적힌 노트였다.
“지난 학기에 들었던 거지만. 교수님은 수업 내용을 바꾸시는 분이 아니니 도움은 되겠지.”
“어? 고마워요.”
시몬은 가방에 달아 준 양쪽 리본이 완벽하게 대칭을 이룬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편히 잠을 잘 수 있겠다며, 기숙사로 돌아갔다.
“다행이네요.”
루이스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뭐가?”
오답 리포트를 작성하던 이안이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회장님의 이웃분께 지리학 노트를 빌리러 가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그 자식한테?”
이안은 비로소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네. 수업을 같이 들으니까 노트를 빌려주시겠다고 먼저 권해주셨어요.”
“그래서 시몬이 잠도 못 자고, 오래된 노트를 힘들게 찾아다 준거군.”
그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아마 시몬이 불만과 불안을 품은 대상은 가방의 금속이 아니었을 거다.
방탕한 소문이 있는 놈과 루이스가 인연이 닿는 것이 싫었던 거겠지.
시몬은 예전부터 루이스를 소중한 유리알 다루듯 했으니까.
“시몬은 참 다정하다니까요.”
루이스가 노트를 끌어안으며 그리 말하기에, 이안은 기꺼이 웃으며 동조해 주었다.
그건 두말할 것 없는 진실이니.
“좋은 놈이지.”
하지만 그리 말하는 말끝이 조금 씁쓸하게 느껴지는 건, 아마.
이안이 시몬 만큼이나 좋은 사람은 아니기 때문일까.
모르겠다.
어쨌든 루이스가 이상한 놈에게 노트를 빌리지 않은 것은 좋았다.
일단 오늘은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