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부드러이 녹아드는
이안과 루이스는 숨소리마저 죽이며, 소파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티 룸의 직원이 친절하게 라센 교수님을 맞이했고, 자리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바짝 얼어붙었다.
다른 교수님은 몰라도 줄리아나 라센은 이안과 루이스의 얼굴을 잘 안다.
두 사람이 친밀하다는 사실까지 알지도 모른다. 같은 학생회니까.
루이스는 눈을 감고 기도했다.
제발 이 테이블 근처를 지나가지 않게 해주세요. 지나가더라도 못 알아보게 해주세요.
또각또각.
교수님과 직원의 구두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루이스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안을 올려다보기에, 그는 일단 루이스를 제 로브 안쪽으로 끌어왔다.
구두 소리는 두 사람의 바로 뒤까지 다가왔다.
이안은 만약을 대비해서 적당히 써먹을 수 있는 변명을 생각하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쪽에 앉으시겠어요?”
“그러죠. 곧 일행이 도착할 겁니다.”
“예. 줄리아나 라센 교수님을 찾는 분이 계시면,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고맙군요.”
교수님은 그들과 이웃한 테이블에 자리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소파의 등받이가 막혀있어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물론 방심하면 얼마든지 들킬 수 있는 거리라는 점에서 불안은 남아있었다.
루이스는 곤란한 얼굴을 하며 조심스레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녀는 곧 이안의 손바닥을 끌어다가 작게 글씨를 썼다.
‘어쩌죠?’
손바닥 필담이라니!
열 살 아이도 아니고, 귀여워 죽겠네.
이안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루이스의 손바닥을 끌어왔다.
‘대기 해야지. 입구로 가려면 교수님의 테이블을 지나쳐야 하니까.’
‘일행이 더 온다고 하시던데. 아카데미 사람일까요?’
‘가문 사람이겠지.’
루이스는 손을 놓고, 걱정스레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저녁 식사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몰래 빠져나온 것을 들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루이스는 이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각종 최악의 상황들을 생각했다.
그 생각이 ‘최저학점 취득’까지 도달했을 때.
“괜찮아.”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으. 어떻게 하면 좋담.
이 사람이 괜찮다고 말해주니까, 정말로 괜찮을 것 같다.
그건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다.
아무리 아카데미가 초 신분적 장소라고 하더라도, 이안 오드모니얼이 가진 영향력은 절대로 적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루이스는 이안이 신분을 이용하여 자신을 보호해 주는 것은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그가 남자 주인공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냥 오랜 친구로서 말이다.
물론, 그의 ‘괜찮다’는 말에 안심해 버린 처지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이다.
조금 마음이 복잡해진 루이스는 괜스레 제 검지를 입가로 가져갔다.
‘입을 다물어야 해요.’
라는 몸짓이었지만, 이안은 동의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 정도는 괜찮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귓가가 간지러울 정도로 호흡이 가득 섞인 작은 목소리로.
루이스가 어째서 괜찮냐는 얼굴을 할 때, 뒤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루이스는 홍보 종이에서 보았던 작은 문구를 떠올렸다.
이 가게는 저녁 즈음부터 사장님의 연주가 시작된다고 했었다.
피아노는 소리가 풍부한 악기다.
두 개의 손이, 아니 열 개의 손가락이 모두 제 목소리를 갖고 노래하니까.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는 예쁜 소리는 파도처럼 작은 티 룸을 꼼꼼하게 메워갔다.
이안이 괜찮다고 말했던 이유를 이제는 이해했다.
소리의 파도는 무척 깊고 짙어서, 루이스의 가느다란 목소리는 아마 이안 외의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 것이다.
“연주를 듣는 건 좋네요…….”
“음, 교수님은 그다지 오래 계시진 않으실걸.”
루이스는 ‘어떻게 알아요?’ 라는 얼굴로 이안을 쳐다보았다.
“그냥.”
물론 그는 딱히 근거가 없었으니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그러길 바라는 것뿐이지. 우리가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을 수는 없는 거잖아?”
이렇게?
루이스는 이제야 두 사람이 한 소파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게다가 교수님이 오셨을 때는 끌어안고 있었던가.
사실 끌어안는다기보다는 서로 빨리 숨으라며 당겨 준 우정의 결론이긴 했다.
어쨌든 티 룸에서 이렇게 달라붙어 있는 건 좋지 않았다.
그들의 사정이 어떻든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예절도 모르는 멍청한 연인으로 보일 테니까.
“……너무 싫네요.”
루이스는 이마를 짚고 솔직한 감상을 토로했다.
“그렇지?”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바짝 붙어 있던 몸을 조금씩 떨어뜨렸다.
가게의 문이 다시 열린 것은 그때였다.
“어서 오세요.”
직원의 상냥한 인사가 끝날 때 즈음, 그들과 바로 이웃하여 앉아있던 줄리아나 라센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이스는 황급하게 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교수님이 이대로 뒤를 돌아본다면, 루이스를 발견할 것이 틀림없었다.
불안 속에 눈을 꼭 감고 있을 때, 그녀를 더욱 절망에 빠트리게 할 이야기가 들려왔다.
“벌써 약속한 시각에서 5분이나 지났습니다. 웨인 힐 교수님.”
그 엄격한 목소리와 함께 헐레벌떡 이쪽으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망했다.
루이스는 지옥문 앞에 선 것 같은 얼굴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라센 교수가 만날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힐 교수라니!
힐 교수는 루이스가 이 아카데미에서 가장 믿고 따르는 사람이고, 친밀하게 지내기도 했다.
강의실 외의 공간에서 좀처럼 마주치지 않는 라센 교수와는 달리, 그와는 사적으로 몇 번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리 와.”
이안이 다급하게 루이스의 어깨를 제게로 당겨왔다.
달리 숨을 곳이 없다면, 최대한 가진 것을 활용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로브의 안쪽으로 루이스가 머리를 기대어 왔다.
넉넉한 로브 자락이 루이스의 머리카락을 덮어 주었다.
완벽하게 숨어든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얼굴은 드러나지 않을 거다.
이안은 힐 교수가 체형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 아니길 빌었다.
지척으로 다가온 발소리.
이안은 루이스가 제 옷자락을 꾸욱 말아 쥐기 시작했음을 알았다.
역시 불안한 거다.
꽤 친밀한 관계였던 만큼 들킬 위험도, 그리고 들켰을 때의 창피함도 더욱 커지는 법이니까.
그는 손끝에 닿은 작은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그들 사이로 흐르는 피아노의 박자를 빌려서.
“죄, 죄송합니다. 교수님. 마차 준비가 오래 걸려서……그게.”
힐 교수의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블 근처에 서 있을 테니, 아마 이안과 루이스의 모습도 보이긴 할 거다.
로브 때문에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겠지만 말이다.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시간 엄수는 교수의 가장 큰 덕목입니다. 힐 교수님. 언제까지나 학생 기분으로 아카데미에 계시는 건 좋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앉으세요. 드릴 말씀이 있으니.”
그리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힐 교수님이 자리에 앉은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라센 교수와 두 사람은 등을 맞대고 앉았다.
그러니 힐 교수가 앉은 곳에서는 정면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이 보일 가능성이 있었다.
“곤란하네…….”
이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 휴이트 교수가 오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루이스가 여전히 그에게 기댄 채 빼꼼히 고개를 들었다.
“설마 그분도 오시는 건 아니겠죠?”
“그러다간 학장님도 오시겠군.”
루이스가 못생겨 보일 정도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기에, 이안은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웃었다.
이 못난이 같으니.
이렇게 못생긴 얼굴은 아카데미에 하나뿐이니, 조심하지 않으면 금방 들킬 거다.
그는 루이스의 머리를 다시 제게로 꾹 눌렀다.
“가만히 있어. 다른 사람은 오지 않는 모양이니까.”
그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두 교수는 차를 주문했다.
그들이 찻잎을 고르는 소리를 들으며 이안은 루이스의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었다.
손가락 사이로 달빛 같은 머리카락이 걸리고 풀어지는 것이 재미있었다.
뭐라고 할까.
묘하게 탄력이 있으면서, 부드러운 것이 손안에 착 감긴다고 해야 하나.
시몬이 루이스의 머리카락에 무서울 정도로 집착하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엉켜요.”
그의 품에서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새어 올라온다.
“뭐 어때.”
이렇게 기분 좋은데 말이다.
툴툴거리는 소리가 무어라 더 들려오기에, 그는 머리카락 사이로 작게 속삭였다.
“내가 빗겨주면 되잖아. 나중에.”
“……할 줄 모르시잖아요.”
“시몬이 하는 걸 몇 년이나 지켜봤고, 나는 요령이 좋아서 뭐든 금방 배우거든.”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믿지 못하는 모양이다.
어쨌든 요령이 좋다는 말도, 머리를 빗겨주겠다는 말도 허언은 아니었으므로, 그는 마음 놓고 제 손끝에 닿는 머리카락을 탐했다.
“간지럽단 말이에요.”
“조금만 참아. 꽤 재미있단 말이지.”
놀라울 정도로 이기적인 말에 루이스가 상황도 잊고 잠시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것도 잠시.
“그래서, 저……. 오늘은 무슨 일로……?”
곧 들려오는 힐 교수의 목소리에 얼른 다시 그의 품으로 얼굴을 푹 파묻었다.
큰일 날 뻔했다.
루이스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안은 여전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재미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지, 사락사락하는 소리가 루이스의 귓가로 끊임없이 흘러들어왔다.
그 느린듯한 소리와 아득한 피아노의 연주가 함께 들리니까, 기묘하게도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도 말이다.
루이스는 잔뜩 긴장되어 있던 어깨의 힘을 풀었다.
부드러워진 몸은 그에게 녹아 들어가듯 조금 더 깊이 기대어졌다.
오랫동안 서로의 무게를 받아주었던 사이라서 그런 걸까.
아주 안락해졌다.
어쩌면 로브가 만들어주는 작은 어둠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루이스는 눈을 감은 채 제게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매끄러운 아르페지오와 그의 손가락이 머리카락에 마찰하는 소리.
그리고.
쿵, 쿵. 하고 울리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아마 루이스가 기댄 곳이 그의 심장과 무척 가까웠기 때문일 거다.
그의 심장은 놀라울 정도로 성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이 어째서 놀라운가 하면.
‘사람……이라는 걸 실감하게 되니까.’
그녀가 이 세계에 속하기 전.
그는 주요 등장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을 표방하고 있으나, 결국 허구였을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곁에서 제대로 된 생명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
‘소설 속 등장인물……. 이라는 걸 잊게 되는 것 같아.’
자기만의 감정과 생각을 지닌 온전한 사람으로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은 남자 주인공이 아니라, 그냥.
‘내 오랜 친구.’
서로 툴툴대지만, 끔찍하도록 죽이 잘 맞아서 결국에는 웃게 되는 사이.
어쩌면 평생 서로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관계.
……물론, 나중에 이안이 얼마나 제 연인에 푹 빠지냐에 따라 약간의 변화는 올 수 있지만 말이다.
“네?”
그러다 문득, 힐 교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이스는 잠시 옆 테이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하, 하지만 학장님께서는 생각이 다르시던데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물론 저도 시험 문제를 만만하게 내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하지만 그, 저기……연구비 문제도 있고, 또 다음 학기에 폐강되면…….”
“걱정하실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단호한 대답에도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자, 잘 모르겠습니다.”
“라센 백작가는 언제나 아카데미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교수님들의 연구비로 포함되며, 심사에 따라 개별적 연구비도 지급합니다. 지난 학기에는 심리학의 키델리 교수가 그 대상자였죠.”
“……그렇다는 건.”
힐 교수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교수님은 라센 백작가의 이름으로 제게 청탁을 하시는 거군요……. 제, 제가 시험을 어렵게 내면 그, 연구비 심사에…….”
“청탁이라뇨?”
불쾌감이 섞인 목소리였다.
루이스는 라센 교수님이 그 예리한 안경을 슬쩍 고쳐 썼으리라고 쉽게 짐작했다.
“저는 교수님께 자신의 신념을 따르라고 조언 드리는 것뿐입니다. 아카데미의 지원만이 전부가 아니니까요.”
“…….”
“선배 교수이자, 동료 그리고 한때 당신을 가르쳤던 교수로서 말이죠.”
“……그건 감사합니다.”
그때, 달그락하며 찻잔이 엎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루이스는 힐 교수님의 실수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는 뭔가를 손에서 잘 놓치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럼, 먼저 일어서죠.”
라센 교수가 가볍게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 차를 엎은 힐 교수가 창피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자리에서 일어난 라센 교수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직원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스치는 시선에서, 찰싹 달라붙은 남녀를 발견하고는 가볍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요즘 젊은것들은, 정말이지…….”
루이스가 살짝 어깨를 움찔거렸다.
저 말은 분명 두 사람을 향해서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좀 부끄러울 만한 자세니까 말이다.
하지만 덕분에 교수님의 시선도 쉽게 떨어져 나갔다. 천박하다며 얼른 고개를 돌리셨으니 말이다.
점점 멀어지는 교수님의 구두 소리가 들렸고, 곧 직원에게 몇 번이나 사과하는 힐 교수님의 목소리도 들렸다.
루이스는 이안에게 기댄 채로 조금 더 기다렸다.
보아하니 힐 교수님도 옷이 젖은 모양이라, 머지않아 자리에서 일어날 듯 했다.
“괜찮습니다. 손님, 그보다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저, 저야말로 찻잔을 깨지 않아서 다행……아! 혹시 작은 흠집이라도 발견된다면 꼭 이쪽으로 연락을 주세요! 그, 꼭 변상할 테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루이스는 교수님이 엉거주춤 명함을 내려놓는 모습을 상상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학술적으로는 참 완벽하신 분인데, 행동거지는 어쩜 저리 귀여우신지 모르겠다.
마침내 힐 교수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놀랍게도 같은 순간에 피아노의 연주도 멎었다.
실내에 남은 몇 명의 손님들이 작게 손뼉을 쳤고, 그 이후로는 다시 고요해졌다.
티포트가 소중히 머금었던 홍차를 흘려보내는 소리, 따듯한 차에 설탕이 사르르 떨어져 부드러이 녹아드는 소리.
가느다랗고 미약하여 평소에는 좀처럼 듣기 힘든 따듯한 소리가 이 공간을 채울 뿐이었다.
그러자 다시 심장 소리가 들렸다.
루이스는 조금 감격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살아계시네요.”
아마 들리지는 않았을 거다.
잠시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멈추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제, 괜찮겠죠?”
루이스는 고개만 빼꼼히 들어서 물었다.
방심하고 있다가 혹여 교수님들이 잊은 물건이 있다면서 돌아온다면 큰일이다.
“괜찮겠지. 근처에 계실 테니까 잠시만 더 대기하다가 나가면 별일 없을 거야.”
“……들키는 줄 알았어요.”
“나야말로 들킨 줄 알았어. 웨인 힐 교수가 이쪽을 흘긋 보고는 차를 쏟아서.”
이안은 머리를 흔들어서 답답한 후드를 머리 너머로 떨어뜨렸다.
“힐 교수님은 늘 뭔가를 떨어뜨리는 분이거든요.”
루이스는 그에게 얼굴을 기댄 채 몇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교수님이 책을 떨어뜨리거나, 바구니를 흘린 이야기 말이다.
밝은 미소가 가득했던 얼굴은 또 금방 어두워진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일까요……. 두 분 말씀은.”
“글쎄.”
이안은 적당히 대답했다.
사실은 루이스의 표정이 끊임없이 바뀌는 것을 관찰하고 있었다.
재미있었다.
콧날을 찡긋거리거나, 미간에 주름이 생기는 모습.
기분에 따라 동그랗게 모으거나 깨무는 입술.
그리고 그를 빤히 올려다보는 눈동자 같은 것들 말이다.
“어쨌든 로브가 있어서 다행이었죠?”
얼굴은 다시 밝아졌다.
눈매가 휘어졌고, 그 안에 갇힌 보랏빛 눈동자가 조금 더 짙어졌다.
“숨겨주어서 고마웠어요.”
어째서 몰랐을까.
이 작은 얼굴에 이렇게 많은 움직임과 색채가 있었음을.
그리고, 그것이 이토록…….
“……별말씀을.”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보드라운 곡선을 그리는 그녀의 눈가에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