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위기에 처한 걸 깨달았죠
‘내 약혼녀’라는 말, 안 하기로 하셨잖아요.
루이스가 이렇게 항의하기도 전에 그는 씩 웃으며 제 말을 정정했다.
“실수였어. 마음에 담아두지 마.”
절대로 실수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굳이 지적하고 싶지 않아서, 루이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 * *
상점가 거리로 나오게 된 루이스는 불안한 듯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두 걸음 뒤에는 어두운 로브를 꾹 눌러쓴 이안이 서 있었다.
“회장님.”
루이스가 걸음을 멈추고 작은 목소리로 부르자, 로브 사이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쏟아졌다.
“……세상에 어느 가문 아가씨가 제 마법사에게 회장님이라고 부릅니까?”
“맙소사, 말투도 그렇게 하실 거예요?”
“당연합니다.”
“여기에 정말로 아카데미 관계자들이 있기는 해요?”
“당연합니다.”
“사실은 그냥 이런 놀이를 즐기시는 거죠?”
루이스의 질문에 그는 다시 평소처럼 웃었다.
“설마. 정말로 주의하려는 것뿐이야. 나는 아카데미에서 쫓겨나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
“하지만 회장님이 두 걸음이나 떨어져서 걷는 건 묘하게 이상해요.”
지고하신 분을 하인으로 부리는 것 같은 기분이라 조금 찜찜했다.
“즐겨.”
“불가능해요.”
“그렇다고 이제와서 설정을 바꿀 수는 없잖아. 사랑의 도피를 한 마법사와 아가씨라거나, 천재 마법사와 멍청한 심부름꾼 소녀라거나.”
“소재가 너무 극단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으세요?”
“그러니 평범하게 ‘성질 나쁜 아가씨와 충성심 가득한 마법사’ 정도로 정했지. 잠깐, 아가씨, 멈춰 봐.”
느닷없이 걸음을 멈추게 한 이안은 손가락으로 한 가게를 가리켰다.
도구 점이었다.
“살 것이 있으니, 저쪽으로 가시죠. 아가씨.”
대체 누가 주인 역할이람.
루이스는 작게 툴툴거리며 도구 점의 나무문을 밀어 열었다.
도구 점은 보편적으로 각종 실험 도구나 작업용 부품들을 파는 곳이다.
가게 내부는 몹시 혼잡했다.
사람이 많은 것이 아니라, 순서 없이 여기저기 쌓인 상자가 많다는 의미로 말이다.
가게의 주인 할아버지는 상자 사이를 요령 있게 오가며 손님들이 주문한 물건을 찾아주고 있었다.
딱히 무엇이 어디에 있다고 적어두신 것도 아니었는데, 한 번에 찾아내는 것이 신기했다.
“아가씨도 뭔가 살 거요?”
루이스는 살살 고개를 젓고는 이안을 돌아보았다.
“장갑이요. 밭일할 때 쓸 거. 세 켤레.”
“마법사 양반이 이런 걸 잔뜩 사서 무에 쓸라고?”
할아버지는 장갑을 꺼내주며 무심하게 물었다.
하지만 이안의 로브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을 보면, 꽤 호기심이 동한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능력이 부족해서, 몸을 써야 우리 아가씨께 버림받지 않거든.”
저 인간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루이스가 놀란 얼굴로 바라보자, 이안이 루이스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제대로 대답하라는 뜻이다. 악랄한 주인 아가씨로서 말이다.
윽! 악역 흉내 같은 건 못 낸다고요!
하지만 생각과 달리 루이스의 입은 마법처럼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가벼운 입에서는 마법 주문이 아니라 불평밖에 나오지 않는 모양이지?”
“……죄송합니다. 아가씨.”
“더 필요한 건?”
“없습니다.”
“그럼 꾸물대지 말고 서둘러. 내 귀한 시간을 이런 곳에서 낭비하게 할 셈이야?”
이안은 얼른 품속에서 동전을 꺼내어 주인에게 건네주었고, 부랴부랴 서둘러 가게의 문을 열어주었다.
턱을 높이 든 루이스가 가게 밖으로 나갔고, 이안이 다시 문을 닫으려는 찰나.
작은 응원의 한 마디가 들려왔다.
“……고생하쇼, 마법사 양반.”
이안은 꾸벅 고개 숙여 답례했다.
가게 바깥으로 나온 루이스는 잠시 가로수에 이마를 기댔다.
루이스 스위니! 무서운 아이……!
과연 악역이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별생각 없이 입을 놀렸더니, 그야말로 ‘원작에 충실한’ 루이스의 대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역시 이 몸이 가진 본능을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될 것 같다.
“눈빛이 오싹오싹하던데. 꽤 좋았다고.”
이안이 칭찬했지만, 루이스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런 걸 좋다고 하지 말아주세요오…….”
루이스는 나무에서 흘러나오는 싱그러운 향기에 집중하며, 악랄함에 물든 입술과 머릿속을 정화했다.
나는 악역이 아니야.
나는 정말로 악역이 아니야.
여자 주인공을 괴롭히지도 않을 것이고, 두 사람의 사랑이 싹트는 걸 방해하지 않을 거야!
오랜만에 삶의 지표를 되새기고 나자 마음이 진정되었다.
“이제 괜찮아요. 그보다 장갑은 왜 사신 거예요?”
“그야, 그대가. 아니, 아가씨께서 아카데미에서도 흙과 식물을 가까이하시니까.”
“저요?”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얼마 전에 루이스가 딸기를 딴 일을 두고 하는 말인 듯했다.
“그런데 왜 세 켤레나 사신 거예요?”
“우리 아가씨가 계신 곳에 충실한 마법사가 따라가기 때문이지.”
“그럼 나머지 하나는 시몬의 것이네요.”
“네, 시몬 힐라드. 아가씨의 충실한 미용사죠.”
“공작가의 아드님을 제 미용사로 고용할 수는 없어요.”
“뭐 어때, 황태자도 변변찮은 마법사로 취급하는 아가씨인데.”
“아, 그러고 보니.”
루이스는 무언가가 떠오른 듯 손뼉을 쳤다.
“답례품을 하나 사야겠네요.”
“장갑에 대한?”
“아뇨.”
루이스는 별생각 없이 단칼에 고개를 저었다.
“시몬이 머리 리본을 선물해 줬잖아요.”
루이스는 마땅한 것이 있을까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 녀석은 아가씨의 머리카락을 멋대로 만지게 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할걸.”
이안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였지만, 식료품점으로 가는 루이스의 뒤를 착실하게 따랐다.
루이스는 홍차와 함께 먹을 수 있는 쿠키를 샀다.
물론 식료품점에서도 루이스의 악인 소환은 계속되었다.
이안 때문이었다.
루이스의 뒤에 선 그가.
“그건 너무 뻑뻑합니다, 아니 그건 과일 말린 게 이에 걸려서 질겅질겅 하죠.”
이렇게 사사건건 걸고넘어졌기 때문이다.
다소 짜증이 치밀어 오른 루이스는 그만 빽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조용히 하지 않으면, 내일은 온종일 내 구두를 닦게 할 거야!”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날이 선 목소리에 식료품 가게 전체가 얼어붙었다.
루이스는 절망했다.
이 미친 악역적 재능 좀 봐.
* * *
식료품점 다음에는 바로 옆에 있는 리본 가게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안은 멋대로 보라색 리본을 사서 루이스의 손에 쥐여 주었다.
작은 목소리로 ‘그럼 나도 그거 같이 먹는 거다?’라고 당부하면서 말이다.
루이스는 손에 들고 있던 쿠키를 멀뚱히 내려다보았다.
설마 이 쿠키가 먹고 싶어서 리본을 사서 준걸까.
뻑뻑해서 별로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실은 좋아하는 거였던 모양이다.
빨리 말해주었다면 처음부터 두 개를 샀을 텐데 말이다.
“더 사야 하는 게 있나요?”
리본 가게를 나서니, 그 앞에는 사탕 장수가 형형색색의 막대 사탕을 팔고 있었다.
루이스는 이안을, 이안은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쌍방 합의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쇼핑은 피곤한 일이고, 모든 피로에는 단 것이 약이다.
두 사람은 불법 색소가 들어간 것이 분명한 레몬 사탕을 하나씩 입에 물었다.
물론 입에 넣을 수 있는 가장 큰 것을 샀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양쪽 볼이 동그랗게 튀어나왔다.
시간이 점점 늦은 오후로 바뀌면서 상점가는 조금씩 더 붐벼가기 시작했다.
가게들의 홍보경쟁도 더욱 치열해 져서, 루이스는 카페나 식당의 홍보 종이를 일곱 장이나 받았다.
사탕을 입에 문 이안은 루이스의 손에 들린 홍보 종이들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그런 걸 뭐하러 전부 받아주는 거야?’
이에, 사탕을 입에 문 루이스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피식 웃어 주었다.
그 의미는 이렇다.
‘그러니 회장님께서 응용력이 없다는 소릴 듣는 거죠.’
루이스는 빳빳한 홍보지로 느긋하게 부채질을 시작했다.
아직 여름은 아니지만, 햇살이 이렇게 강렬한 시간에는 더위가 느껴진다.
이안이 짧게 감탄하고, 허리를 숙여 제 얼굴을 내밀었다.
‘나도 더운데.’
라는 의미로 말이다.
평소의 루이스라면 기꺼이 친구를 위해 부채질을 해주었을 거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악랄한 아가씨인 루이스다.
그러니 그녀는 홍보지 두 장을 그에게 나누어 주었다.
‘알아서 하세요.’
라는 뜻의 눈빛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안이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기에, 루이스는 입안에 든 막대 사탕을 조금 굴리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팔랑팔랑 부채질을 열 번 정도 더 하자, 멀리 펜촉 모양의 나무 간판이 보였다.
루이스는 조금 걸음을 서두르게 되었다.
하지만 평소보다 조금 더 높은 굽과 울퉁불퉁한 바닥 때문에 빨리 걷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새 구두는 그녀의 발을 잘근잘근 씹는 것 같았고. 물론 무척 예뻐서 벗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그녀 앞에 커다란 손이 척 내밀어 졌다.
루이스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제 곁을 돌아보았다.
줄곧 두 걸음 정도 떨어져 따라오던 그녀의 마법사, 아니 이안이 이번에는 바로 곁에서 손을 내밀고 있었다.
깊이 눌러 쓰고 있던 후드도 잠시 벗어 둔 채로 말이다.
‘잡아줄게.’
상냥한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루이스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얼른 발끝을 들어 후드를 깊이 눌러 씌워주었다.
‘눈에 띄잖아요!’
루이스가 경고를 담은 눈짓을 했지만, 그는 웃으며 재차 손을 내밀 뿐이다.
‘기대서 가, 도와줄 테니까.’
물론 고마운 제안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설정이 바뀌어버리잖아요?”
루이스는 사탕을 입에서 빼고 곤란한 듯 물었다.
“상관없잖아. 설정 같은 건.”
“……그게 저한테 악랄한 대사를 시킨 사람의 대답인가요.”
“알았어, 그럼. 사랑의 도피를 위해 마법사로 변장한 약혼자와 악역을 자처하는 약혼녀라고 하지.”
문장 전체가 끔찍한 말로 도배되어 있었다.
어깨를 부르르 떤 루이스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사탕을 입에 물었다.
‘그 설정은 좋지 않아요.’
라는 의미로 말이다.
하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고 루이스의 손을 꽉 쥐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강하게 말이다.
그러니까, 그 의미는…….
루이스는 비스듬하게 고개를 돌려 이안의 표정을 살폈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음, 정확한 의미는 모르겠지만, 엄청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겠다.
‘저런 이상한 설정을 좋아하시다니. 취향이 나쁘시다는 건 예전부터 알았지만…….’
얼마 걷지 않아 둘은 문구 상점에 도착했다.
이안은 능숙하게 넉넉한 양의 잉크와 종이를 부탁했다.
그 양은 커다란 상자로 3개나 될 정도였다.
인심 좋은 가게 아저씨께서 상자 2개는 마차까지 무료로 가져다주신다고 하셨다.
참 상냥한 분이다.
물론, 나머지 상자 하나를 들게 된 이안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럼 슬슬 돌아갈까.”
그는 상자가 몹시 무거운지 다소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거추장스러운 로브만으로도 더울 텐데, 무거운 것까지 들고 가려면 아주 고통스러울 거다.
루이스는 그의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로 했다.
일단 학생회의 예산이 든 돈주머니를 대신 들었고, 때때로 부채질도 해 주었다.
얼굴을 덮은 로브 때문에 효과는 거의 없었겠지만 말이다.
“결국, 짐꾼과 아가씨가 되었군.”
그가 툴툴거리기에 루이스는 조금 남은 사탕을 빙글빙글 돌리며 웃었다.
툭.
그때, 누군가가 루이스의 왼쪽 어깨를 가볍게 스치며 지나갔다.
짧게 균형이 흔들렸지만. 곧 다른 발로 바닥을 딛고 바로 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손가락에 걸어 둔 돈주머니가 스르르 그녀의 손을 빠져나갔다.
무척 자연스럽게. 그리고 빠르게.
“……어?”
상황을 알아차린 루이스가 깜짝 놀라며 멍청히 입을 벌렸다.
입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사탕이 떨어졌고, 주머니는 완전히 빼앗겼다.
상대는 주머니를 품에 넣고 달리기 시작했다.
사내였다. 젊고, 키가 크고, 달리기는 무진장 빠른.
루이스가 굳은 얼굴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헤셰!”
이안이 소리쳤고,
“네?”
놀랍게도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분명히 근처에서 헤셰는 보이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온실의 루이스께서 잃어버릴 뻔한 물건을 구조 했습니다.”
그리 말하며, 헤셰는 조금 전에 루이스가 떨어뜨린 막대 사탕을 흔들어 보였다.
사탕에 흙이 묻지 않은 것으로 보아, 떨어지기 전에 빠르게 낚아챈 듯했다.
이안이 무어라 더 말하기 전에, 헤셰는 얼른 제 변명을 덧붙였다.
“저는 전하의 소중한 것만을 보호하죠.”
“……젠장.”
이안은 별수 없이 상자를 잠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제대로 지키고 있어.”
짧게 경고한 이안은 인파 사이로 사라진 남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 어쩌죠? 괜찮을까요?”
“문제없어요. 전하의 달리기는 일품이거든요.”
“아니, 그게, 그 사람이 갑자기 다가와서 너무 자연스럽게…….”
루이스가 어쩔 줄 몰라 하자, 헤셰는 루이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진정하라는 듯 말이다.
“알아요. 봤으니까. 그래서 내가 왔던 거고요. 하지만, 돈보다 중요한 게 위기에 처한 걸 깨달았죠.”
“제 사탕보다는 돈이 더 중요한걸요!”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헤셰는 잠시 제 머리를 긁적이고는, 이안이 내려놓은 상자 위에 걸터앉았다.
“하지만 우리 전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거든요.”
“네?”
루이스가 되묻자, 헤셰는 모처럼 구해낸 사탕을 제 입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뭐, 저도 상관의 가치관을 따라야 하는 별 볼 일 없는 월급쟁이라는 거죠. 와, 이거 맛있네요. 제게 답례품을 사줄 때는 꼭 사탕으로 사줘요. 알았죠?”
그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사탕을 오독오독 깨물어 먹기 시작했다.
돈주머니를 회수한 이안이 파리한 안색으로 돌아온 것도 그때였다.
“봐요, 제가 문제없을 거라고 했잖아요.”
헤셰가 손가락을 튕기며 웃었고, 이안은 돌아오자마자 헤셰의 멱살부터 잡았다.
“왜 네놈의 입속에 그 사탕이 들어 있지?!”
“묵비합니다. 차인 남자에게 들려줄 만한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헤셰가 ‘그렇죠?’라며 돌아보기에,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의 멱살을 놓아준 이안은 잠시 바닥에 걸터앉아 가쁜 숨을 뱉었다.
커다란 등이 몇 번이나 바쁘게 오르내린다. 꽤 격렬하게 달렸던 모양이다.
“저 때문에, 죄송해요…….”
루이스가 그 앞에 쪼그려 앉으며 사과했다.
그는 별다른 대답 없이 거친 호흡을 겨우 이어갈 뿐이었다.
대신 땀에 젖은 얼굴로 개운하게 웃으며 루이스의 머리를 박박 쓰다듬었다.
“돌아오실 때 만이라도 걸어오지 그러셨어요. 헤셰 경과 얌전히 상자를 지키고 있었을 텐데요.”
그 말에 대해서는, 상자를 번쩍 든 헤셰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불안하셔서 그랬을걸요?”
“불안하다뇨?”
“그야, 저는 여자라면 전부 좋아하는 쓰레기 같은 남자니까요.”
으득, 이안이 한 가지를 확신하며 이를 갈았다.
역시 헤셰가 돈주머니 대신 루이스의 사탕을 붙들었던 것은, 저 이야기에 대한 복수였으리라.
“어, 음.”
이안의 무서운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던 헤셰는 슬금슬금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럼 저는 상자를 마차에 가져다 놓겠습니다. 아주 안전하게요! 안전에 심혈을 기울이죠!”
헤셰는 상자를 들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루이스는 들고 있던 홍보 전단에서 시원한 음료를 파는 티 룸을 찾아냈다.
완전히 지친 이안을 끌고 바로 마차로 가느니, 뭔가 시원한 거라도 대접해 주고 싶었다.
분명히 무척 지쳤을 테니까 말이다.
다행히 그는 ‘뭔가 마시고 돌아가요.’라는 루이스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 지쳐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걸지도 몰랐다.
티 룸은 작은 규모였고, 직원들은 친절했다.
루이스는 차갑게 만든 과일 티를 주문했다. 쿠키를 곁들여 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안이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말이다.
이후로는 조용히 앉아서 각자 휴식했다.
이안이 도둑을 잡을 때의 무용담을 듣고 싶었으나, 전력 질주의 여운이 꽤 오랫동안 그를 괴롭히는 듯했다.
음료는 금방 바닥이 났다.
양이 많지 않은 데다가, 둘 다 교양 없이 벌컥벌컥 들이킨 탓도 있었다.
“늦기 전에 돌아가야겠네요.”
“그래야지. 멋대로 외출한 것이 발각되면 곤란하니.”
“네. 정말로요. 시험공부를 할 시간도 부족한데 처벌에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게다가 교수님들께 좋지 못한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티 룸으로 들어서는 새로운 손님이 있었다.
이안과 루이스는 혼비백산한 얼굴로 얼른 티 룸의 소파 위로 몸을 던졌다.
서로를 잡아당기고 야단법석을 떠느라, 결론적으로는 서로 끌어안은 것 같은 형국이 되고 말았지만.
어쨌든 그런 건 지금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마가 거의 맞닿을 거리에서 두 사람은 똑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라센 교수가 대체 여기에는 왜 온 거야!’
줄리아나 라센.
그러니까 신분을 이유로 하여, 루이스를 파티에 참석하지 못하게 했던.
바로 그 교수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