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부끄러운 상황
이안과 루이스는 준비된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어떻게 구하셨어요?”
루이스가 묻기에 그가 삐딱하게 웃었다.
“이 땅에 내가 구하지 못할 것이 있던가?”
그야, 그렇지만.
이안은 절대 권력자의 하나뿐인 아들이며, 그 후계자다.
그가 하려는 일에는 언제나 전 국가적인 협조가 뒷받침될 거다.
비록 그것이, 아카데미의 규칙을 어기며 담을 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마차는 상점가를 향하여 느릿하게 출발했다.
그리고 루이스는 잠시 헤셰에 대해 생각했다.
물론 그의 목은 여전히 붙어있었다.
감히 황태자 전하를 ‘여자에게 차인 불쌍한 놈’으로 지적하고도 말이다.
“전하께서는 헤셰 경을 아끼시는 것 같아요.”
루이스는 두 손을 모으며 빙긋 웃었다.
맞은편에 앉은 이안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저런 품위 없는 기사를?”
“마침 어울리잖아요. 품위 없이 담을 넘는 주인과.”
“게다가 그대에게 이리도 악영향을 끼치고.”
“사실인걸요.”
루이스의 말에 동조하는 소리가 마차 지붕에서 들려왔다.
“맞아요! 사실이죠!”
이안은 긴 팔을 뻗었고, 마차 지붕을 쿵쿵 두 번 두드렸다.
조용히 하라는 신호겠지만, 이안의 무서운 표정을 보면, ‘닥쳐라.’라는 의미에 더 가까워 보였다.
참 품위 없는 말이다.
“헤셰 경은 지붕에서 괜찮을까요?”
루이스는 다소 울퉁불퉁한 바깥 길을 바라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그런 놈이 걱정되나?”
“그럼요. 헤셰 경은 친절한걸요. 담 넘는 걸 도와주기도 했고요.”
“……그대는 참 이중적이야.”
이중적?
이안이 한숨처럼 내뱉는 말에, 루이스는 제 행동이 정말 그랬던가를 떠올렸다.
“생각해봐, 루이스 스위니. 조금 전의 그 담에서 내가 그대를 그리 안아 도와줬다면.”
“불가능하시잖아요.”
“가능해! 대체 날 뭐로 보는 건가!”
“절 안고 담을 넘는 것이 불가능한 황태자 전하요.”
“어쨌든, 중요한 건. 내가 그대를 도와줬다면 뭐라고 대답할 거지?”
루이스는 잠시 턱을 괴고 상황을 떠올렸다.
이안이 루이스를 공주님처럼 소중히 안고 담을 넘겨준다면?
지난번 도서관에서 다쳤을 때의 수송과는 다를 거다. 왜냐하면, 지금의 루이스는 건강하니까.
“저 혼자서 넘을 수 있다고 대답할 것 같네요…….”
“그렇지. 분명 그렇게 대답했을 거야. 하지만 헤셰에게는 뭐라고 했지?”
“담 넘는 것을 도와주다니, 헤셰 경은 참 친절하다고요.”
이건 이중적이다.
루이스는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제 불공정함에 놀랐다.
“어때?”
“전하의 하늘 같은 너그러움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네요.”
“옳지, 그리고.”
이안의 지적은 끝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타는 마차는 괜찮은가?”
아니, 지적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루이스에 대한 걱정이었다.
예전부터 루이스는 마차라는 끔찍한 탈것에서 몹시 고생해 왔으니까.
“전 괜찮아요.”
루이스는 슬그머니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한 가지를 깨달았다.
오늘따라 마차의 속도가 느린 것은, 아마 그 나름대로 루이스를 배려해서 지시해 둔 것이라고.
가능한 한 흔들리지 않도록 말이다.
“혹시 기분이 좋지 않으면 이야기해. 상점가는 먼 것도 아니고, 잠시 쉬어가는 건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상냥하시네요.”
“난 늘 상냥해. 그대의 이중잣대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한 것뿐이지.”
그랬던가?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예전에는 마차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루이스가 저질렀던 부끄러운 일을 놀려대는 소릴 꼭 했었으니까.
물론 루이스는 새삼 그 점을 지적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만이라도 좋으니까, 가끔은 좀 솔직하게 받아들여.”
“솔직하게요?”
“그래. 내가 친절을 베풀면 그대는 고맙다고 말해주는 거지.”
“그럼, 제가 친절을 베풀면요?”
“내가 고맙다고 말하겠지.”
“오늘 하루의 규칙인가요?”
“그래. 그리고 규칙을 추가하자면.”
이안은 다소 심각한 얼굴로 루이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전하라는 끔찍한 호칭을 넣어 둘 수는 없나?”
“여긴 아카데미가 아니잖아요.”
그러니 회장님도 이안도 아닌 전하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이 점을 알려주지. 상점가는 광산으로 가는 길목이고, 자연스레 여행 중인 마법사들이 많이 있어. 그리고 마법사들은 수다쟁이야.”
“아…….”
“루이스 스위니가 그 발랄한 목소리로 ‘전하! 전하!’라고 외치면 모두가 내 존재를 알아차릴 테고.”
마법사들은 황태자를 목격했다며 신이 나서 전 마탑에 자랑하고 다닐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이 발명한 마법적 장치들을 아낌없이 사용하면, ‘황태자 전하께서 평일 오후에 상점가에 나타나셨다.’는 소문이 대륙 단위로 번질 것이다.
“조심해야겠네요.”
“그래.”
“하지만 전하, 아니 회장님의 얼굴은 어떻게 숨기실 생각이세요?”
이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는 이 세계의 남자주인공이고 매우 잘생겼다.
아마 이대로 길을 걷는다면, 루이스가 전하라고 부르지 않아도 그가 이안임을 모두가 알 거다.
특유의 은빛 머리카락이 반짝반짝 빛나는 한.
“간단한 방법이 있어.”
그는 의자 밑에서 가방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 안에는 마법사들의 얇은 로브가 들어 있었다.
“마법사가 많은 곳에서는 마법사인 척하는 편이 좋겠지.”
게다가 마법사의 로브는 얼굴과 머리를 덮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후드가 달려 있다.
이안이 입은 아카데미의 제복도 완벽하게 가려줄 거다.
“제 것도 있어요?”
“없어.”
“저, 이렇게 제복을 입고 와버려서 어쩌죠?”
이대로라면 누가 봐도 몰래 도망쳐 나온 학생임을 알 것이다.
“루이스 스위니.”
하지만 이안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빙긋 웃었다.
“이 땅에 내가 구하지 못할 것이 있던가?”
* * *
물론 이안이 구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는 지고하신 분의 아드님 되시니까. 하지만, 하지만.
“계획 없이 이렇게 비싼 옷을 살 수는 없단 말이에요!”
루이스는 이안이 구해다 준 옷을 끌어안은 채, 울상을 지었다.
그들이 가장 먼저 들린 곳은 상점가의 중심인 상가 조합이었다.
상가 조합은 교역 상인들이 간단하게 숙식을 해결하는 곳으로, 운이 좋으면 수입 드레스나 원단 혹은 보석까지 구할 수 있었다.
물론, 상당한 값을 치러야 하지만 말이다.
“값은 이미 치렀어.”
“네?”
“신경쓸 것 없어. 어차피 입학 선물로 뭔가 해 주고 싶었으니까.”
“아, 아뇨. 그보다.”
“정말 고생했다고. 여기에서 팔아치우면 주문하신 수도 아가씨께 화를 당한다나? 그래서 나도 이 드레스를 사지 못하면 성격 나쁜 주인 아가씨께 목이 잘릴 거라고 사정했지.”
“그 성격 나쁜 주인 아가씨가 설마 저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죠?”
“왜 아니겠어. 필요하지도 않은 마법사를 자랑하듯 데리고 다니는 아가씨의 성정이 좋을 것 같은가?”
그는 정말 그녀의 사용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정중히 몸을 숙였다.
“그러니까, 주인 아가씨. 어서 갈아입어 주시죠?”
그는 친절하게도 문을 열어주기도 했다.
상가 조합에 이야기하고 잠시 빈 회의실을 빌린 모양이다.
‘할 수 없지.’
루이스는 한숨을 쉬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마에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 낸 후에는 이안이 건네준 옷을 높이 들어보았다.
무척 얇고 하늘하늘한 여름 원피스다. 입기도 편해 보였고.
아마 이안은 더위를 잘 느끼는 루이스의 체질까지 고려해서 골라 주었을 거다.
하지만 문제는 색상이다.
‘검은색……. 악역의 색……!’
의도적으로 피하던 색상을 이렇게 만나다니.
루이스가 잠시 머뭇거리던 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문 너머에서 이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몰라서 다른 것도 더 구해왔는데.”
그녀는 검은 드레스를 내려놓고 잠시 문을 열었다.
이안은 정말로 다른 옷을 들고 이리저리 살피며 고민하고 있었다.
“왜요?”
“생각해 보니 그대는 예전부터 어두운 계열의 옷은 잘 입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거든.”
그는 루이스의 앞에 물색이나 하얀색의 옷을 내어 보였다.
악역의 색이 아닌 옷이다.
하지만 루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지금 새로운 옷을 넙죽 받아들이면, 이안은 다시 신나게 달려나가 새로운 옷을 사 올지도 모른다, 원단이나 장식 등의 이유를 가져다 붙이며 말이다.
“처음에 주신 옷이 마음에 들어요.”
“그런가?”
그는 뭔가 굉장히 실망한 얼굴이었다. 어째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루이스는 문을 닫고, 옷과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서둘러서 검은색 원피스를 걸쳤다.
허리를 심각히 조이지 않아도 입을 수 있는 편안한 옷이라 다행이다.
이렇게 등에 달린 작은 단추만 채우면 누구나 간단하게 옷을 입을 수 있는 혁명적인…….
“어……?”
잠깐.
단추가 왜 등에 달린 거지?
아하, 그래.
이런 옷을 입을 정도의 아가씨라면 당연히 사용인이 있으니까.
스위니 가문에도 언제나 착복을 도와주는 하녀가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없다.
편지를 써서 와달라고 할 수도 없다. 여기에서 며칠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루이스는 작은 희망을 품고, 양쪽 팔을 등 뒤로 돌려 보았다.
단추도 단춧구멍도 손끝에 닿는다.
하지만 끼울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옷을 가져다주었을 때 얼른 바꾸면 좋았을 것을.
아니, 어쩌면 바꾸었어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이 세계의 옷이란 죄다 이렇게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것들뿐이니까.
스위니 가문의 작업복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녀가 절망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이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루이스?”
“……네.”
“목소리가 왜 그 모양이야? 옷에 문제 있어?”
“오, 옷에는 문제없어요.”
문제가 있다면 등으로 휘어지지 않는 루이스의 관절이다.
“다행이군. 다 입었으면 잠시 열어 줬으면 좋겠어. 일단 구두를 모양과 색별로 몇 개 구해왔는데 말이야.”
맙소사!
저 인간이 타오르다 남은 쇼핑의 열정을 결국 구두에 지르고 말았다.
루이스는 한 손으로 드레스의 앞섶을 단단히 붙잡고 살짝 문을 열어보았다.
화려한 구두 상자가 천장에 닿을 듯 쌓여 있었다.
“마침 그대와 발 크기가 비슷한 아가씨가 외국에 구두를 주문한 모양이더라고.”
“이제 그 아가씨는 맨발로 다녀야겠네요.”
“괜찮아. 이건 일부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리고 일단 신어봐야 해. 발 크기가 비슷하다고 해서 완전히 꼭 맞는다는 뜻은 아니거든.”
“그 보다.”
루이스는 곤란한 얼굴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웃긴 얼굴을 하고 선.”
“……다, 단추가 있어요.”
“잘 되었군. 단춧구멍에 잘 넣으면 돼.”
“그게, 드……등에요.”
루이스는 굴욕을 토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겨우 말할 수 있었다.
다행히 이안은 놀리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대신 조금 놀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일단 사과하지. 일부로 곤란하게 할 옷을 고른 건 아니었어.”
이안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조금만 뒤로 물러나 주었으면 좋겠어. 내가 들어갈 수 있도록 말이야.”
“들어오신다고요?!”
“여기엔 달리 부탁할 사람도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걱정하지 마. 우린 어렸을 때부터 서로의 옷에 붙은 흙먼지를 털어주며 자랐다고. 그런 것과 비슷한 거로 생각하면 돼.”
그런가?
“앞뒤 상하로 팡팡 털어주던 과거에 비하면, 등만 내어주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루이스는 몇 걸음 정도 뒤로 물러섰다.
그녀를 따라 들어온 이안이 덜컹 문을 닫았다.
“단추만 채우시는 거예요!”
루이스는 재차 당부했고, 이안은 엄숙하게 선언했다.
“맹세하지. 영원히 함구하겠다는 것까지 포함해서.”
그는 소매가 긴 로브를 벗어서 테이블 위에 적당히 올려두었다.
그리고 서로의 발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손가락 끝을 빙글빙글 돌렸다.
어서 돌아서라는 뜻이리라.
루이스는 눈을 질끈 감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차마 눈을 뜨지 못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일단 창피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예민해진 감각 탓에 그의 손가락이 단추에 닿는 세세한 것까지 전부 느껴졌다.
어쩐지 조금 간지럽다.
부끄러울 만큼 드러난 등에 그의 시선이 닿았다는 생각 때문일까.
그때,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꿀꺽.
굉장히 깊은 욕망이나 갈증과 함께, 목울대가 울렁이는 소리.
“……침 삼키지 마세요.”
루이스의 지적에 그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미안, 나도 모르게.”
그 역시 당황한 것이 틀림없었다.
단추를 잠그는 손길이 다소 분주해진 것을 보면 말이다.
“흙먼지를 털 때는 그렇게 침을 삼키지 않으셨잖아요.”
“그때는 그대의 등이 이 정도로 예쁜 줄 몰랐거든.”
그가 그리 이야기하는 순간에 단추는 전부 채워졌다.
“그리고 나는 예쁜 것에 무척 약한 평범한 남자고.”
“거짓말하지 마세요.”
루이스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웅얼거리자, 이안이 그녀의 앞으로 빙글 자리를 옮겼다.
“어느 쪽이? 그러니까, 내가 평범하다는 거? 아니면 그대의…….”
“당황하셔서 장난치듯 말씀하시는 거 다 알아요. 그러니까 억지로 칭찬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루이스가 울상을 지었고, 이안은 숨을 깊이 내 쉬었다.
“……그래.”
그리고 간단히 인정했다.
“당황했어. 지금도 당황하는 중이고. 창피해서 죽어버릴 것 같다는 게 어떤 건지 절절하게 실감하는 중이지.”
“등을 내보인 사람보다 더 창피할까요?”
“그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심결에 침을 삼킨 멍청이가 되느니, 차라리 등을 내놓겠어.”
그는 제 손바닥에 얼굴을 기댄 채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부끄러운 상황이 된 거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위장이 필요했고, 옷을 바꿔 입는 것은 위장의 기본이다.
그랬었는데.
한순간에. 그녀에게 시선이 닿은 짧은 그 순간에.
모든 전후 사정을 잊고 말았다.
가느다란 목덜미 아래로 보이는 새하얀 선 때문이었다.
마치 하얀 눈이 사르르 내려앉은 듯 보드라워 보였던 살결이나, 얕은 굴곡 같은 것들.
그의 시선은 그 아름다움에 굴복했다.
사로잡혔다는 뜻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이성까지 붙잡히고 말았다. 아니, 붙잡힌 건 이성이 아니라 다른 쪽이었던가?
어쨌든 붙잡혔다. 완벽하게.
루이스가 주의를 시키지 않았다면, 아마 다른 것도 붙잡히지 않았을까.
그는 한참 만에 다시 루이스를 바라볼 수 있었다.
“미안하다.”
미심쩍은 시선이 돌아온다.
“하지만, 예쁘다는 말은 사실이었어. 그대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그런 생각을 한 것에 대해선 다시 사과하지.”
“……대체 오늘 제게 몇 번을 사과하시는 거예요?”
비로소 루이스가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로 웃었다.
아마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었던 것이 마음 쓰였던 것이리라.
마음이 약한 아이니까.
“그러게. 모처럼 서로 솔직하게 대하기로 했는데. 이래서야 고맙다는 말 대신에 용서한다는 말을 잔뜩 듣겠군.”
“물론, 고마워요.”
“네게 끌린 남자에게 함부로 고맙다고 하면 안 돼. 더 멍청해지거든.”
“……끌리셨어요?”
“음, 한 5초 정도일까.?”
뭐에요. 그게 라며 루이스는 이안의 팔을 찰싹 때렸다.
“그럼, 이제 완벽한 구두를 골라볼까.”
이안은 루이스의 허리를 번쩍 들어 회의실 책상 위로 앉혀 주었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발이 허공에 달랑 들렸고, 이안은 그 앞에 꿇어앉았다.
“제, 제가 신을 수 있어요!”
“오늘은 내 친절에 다른 대답을 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조금 전에는 고맙다는 말을 하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멍청해진다면서요.”
“뭐…….”
이안은 쓰게 웃으며 근처에 둔 상자에서 구두를 하나 꺼내 들었다.
날렵하고 아름다운 굽이 달린 것이었다.
“가끔은 내 약혼녀께 멍청하게 굴 필요도 있겠지.”
구두는 놀라울 정도로 루이스의 발에 꼭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