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좋아한다.
새벽에 일어난 루이스가 창문을 열어보니, 어스름한 너머로 습기가 느껴졌다.
새벽 사이에 비가 조금 내렸나 보다.
오랜만이네, 이런 공기.
루이스는 깊이 호흡했다. 물과 흙이 섞인 냄새가 좋았다.
어쩐지 비가 많이 오는 계절이 가까워졌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아서.
‘비……?’
멍하니 창가에 몸을 걸치고 있던 루이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비라니, 그건 안된다.
관리부인의 딸기밭은 노지에 있고, 노지의 딸기는 비를 맞으면 맛이 떨어진다.
즉 선물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뜻이다.
루이스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딸기를 따고 싶었다.
그래야 둔한 이안의 혀에도 새로운 깨달음을 줄 수 있다.
예쁜 딸기를 맛보지 못한 스텔라에게 특별한 경험을 시켜줄 수 있을 거고.
그러니 비가 오는 계절이 오기 전에 딸기 수확을 서둘러야 했다.
루이스는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옷부터 갈아입었다.
작업복이 있다면 좋겠지만, 여기는 아카데미다.
허가받은 행사 외에는 모두 똑같은 옷을 입어야 하는 규칙이 있는 곳.
루이스는 세탁실에서 깔끔하게 다려 보내준 제복을 입었다.
그리고 잠시 제 새하얀 소매를 바라보았다.
아득한 과거가 떠오른다.
하얗게 손질된 옷을 부러워하던 그때 말이다.
아니 옷뿐이 아니었지.
부유한 가족, 여유로운 환경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자연스러운 여유.
모든 것이 부러웠다.
가난한 자신에게 값비싼 카페에 함께 가자며 권해오는 그 순수한 선의와 무신경함마저도.
「아이참, 스텔라도. 밭에서 바로 딴 건 그렇지 않아요. 빨갛고, 반짝반짝하거든요.」
그리고 어제는 루이스가 그 순수한 선의와 무신경함을 선보였다.
환경이란 사람을 이렇게까지 바꿔놓는 모양이다.
루이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미안, 스텔라.’
마음속으로 사과한 뒤에는 서둘러서 기숙사를 나섰다.
시간은 아직 새벽.
목적지는 새벽의 빗소리를 듣고 같은 생각을 하셨을, 관리부인의 사무실이다.
* * *
계절에 예민한 관리부인은 새벽 비가 그치자마자 딸기밭에 나와 계셨다.
“마법사 선생이 그러는데, 오후에는 다시 비가 온다더라. 그 선생. 일하는 건 시원치 않아도 날씨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맞히거든.”
관리부인은 시커먼 새벽하늘을 올려다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녀가 말하는 마법사 선생이란, 아마 의료동의 치료사를 말하는 듯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요.”
루이스는 창고에서 커다란 장화를 빌려 신었다.
가능하면 작업복도 입어보고 싶었는데, 크기가 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루이스와 관리부인은 딸기밭의 고랑에 쪼그려 앉아 열심히 딸기를 땄다.
큰 요령이 필요하지 않은 간단한 일이라서 그다지 힘들 것은 없었다.
열매의 바로 윗 줄기를 잡고 톡 따는 것뿐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거다.
낮은 고랑 사이에서 쉼 없이 쪼그리고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
무릎이 아프다. 쑤신다.
호기롭게 도움이 되겠다고 호언장담했으면서, 아프다고 징징대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다.
루이스는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태양이 뜨긴 했는지, 약간 더 밝아지긴 했다. 하지만 회색 구름이 훨씬 더 짙었다.
어쩐지 협박하는 것 같다.
빨리 딸기를 따지 않으면, 당장 비를 내려버리겠다고.
루이스는 잠시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크지 않은 딸기밭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쪼그려 앉아서 둘러보니 충분히 커 보였다.
어쩌면 지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위니 양?”
그때, 커다란 바구니의 탑이 다가와서 루이스에게 말을 걸어왔다.
……말하는 바구니?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일이 있을 리 없었다. 여긴 동화책의 세계가 아니니까 말이다.
“네, 그런데…….”
그러자 다시 바구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역시 스위니 양이군요! 오늘 비가 온다기에 저도 걱정되어서 나왔……으, 으악!”
우르르.
바구니가 질척한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바구니를 들고 있던 사람의 모습이 비로소 드러났다.
“웨인 힐 교수님!”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치자, 그는 부끄러워하며 잠시 제 머리를 긁적였다.
“예, 웨인 힐입니다. 오늘도 뭔가 떨어뜨리는 모습을 보여드리게 되었네요.”
“네?”
“그러니까, 전에는 식물도감을 그리고 지금은 바구니를…….”
어째서 루이스 스위니 앞에서는 이렇게 자꾸 물건을 떨어뜨리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수업 중에는 아무것도 떨어뜨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저도 휴이트 교수님처럼 근엄하게 되고 싶은데 말이죠.”
웨인은 주섬주섬 바구니를 주워들었고, 루이스는 그를 향해 열렬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휴이트 교수님보다 힐 교수님이 훨씬 더 좋아요.”
루이스의 열렬한 대답에 그는 바구니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건 나도 동감해.”
그러자 말하는 바구니의 탑이 하나 더 등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구니 위로 얼굴이 빼꼼히 보였다.
“시몬?”
“안녕, 루이스.”
그는 바구니를 커다란 나무 밑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말없이 루이스의 맞은편에서 딸기를 따기 시작했다.
멀뚱멀뚱 서 있던 웨인 힐 교수도 ‘어서 딸기를 따주세요!’라는 관리부인의 잔소리에 헐레벌떡 고랑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소란스러웠던 딸기밭은 조용해졌고, 모두가 툭툭 딸기를 따는 소리만 남았다.
“놀랐잖아요.”
루이스는 맞은편에서 말없이 노동하는 시몬에게 이야기를 걸었다.
“그런가?”
“네.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새벽에 도서관에서 나오는데, 웨인 힐 교수님이 아슬아슬하게 높은 바구니를 안고 가시더군.”
“그래서요?”
“도와드린다고 했지.”
“상냥하네요. 시몬.”
“신세를 지고 있으니까.”
“온실 말이죠?”
그는 작은 목소리로 ‘응’이라고 대답하고는 어깨를 조금 으쓱였다.
“루이스가 있을 줄은 몰랐지만.”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루이스는 금방 작은 바구니를 가득 채웠고, 얼른 새로운 바구니로 교체해왔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기숙사에 올 때 드레스가 아니라 작업복을 챙겨올 것을 그랬어요.”
그녀의 말에 시몬은 스위니 온실의 끔찍한 풀색 작업복을 떠올렸다.
“등에 ‘스위니 온실’이라고 적혀있던 그 옷 말이지?”
“네. 흙이 묻어도 잘 털리고, 쉽게 찢어지지 않아요. 노동의 친구죠.”
“네게 잘 어울렸지.”
작업복을 입고 온실을 뛰어다니던 루이스의 모습은 여전히 그의 기억에 선명했다.
촌스러운 작업복도 그녀가 입으면 제법 사랑스럽게 보였다.
아마 특유의 발랄함 때문일 거다.
“방학 때 가서 가져올까 봐요.”
“좋은 생각이군.”
“시몬 것도 가져다줄까요?”
“나보다는 이안을 챙겨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시몬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는 이안과 루이스의 약혼관계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딱히 근거는 없었다.
오랜 친구의 감이었을 뿐이다.
아니면 소망이거나.
“회장님이요?”
“그래.”
“회장님은요…….”
잠시 말을 길게 끌며 고민하던 루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런 옷이 필요 없으실 거예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그야.”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오지 않기에, 시몬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
딸기 덩굴 너머로 보이는 루이스는 그저 애매한 얼굴로 웃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저건.
시몬에게는 대답을 들려줄 수 없다는 뜻이리라.
“난, 너희들이…….”
시몬은 조금 용기를 냈다.
“잘 지냈으면 좋겠다.”
모호한 말밖에 뱉지 못했지만.
어째서 ‘서로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걸 제대로 인식했으면 좋겠다.’라는 쉬운 말을 택하지 않은 걸까.
“물론, 회장님과 전 잘 지낼 수 있어요.”
시몬을 안심시키려는 듯 루이스가 자신 있게 대답해왔다. 대신 조건이 붙었다.
“시몬이 함께 있어 준다면요. 우리는 셋일 때 가장 즐겁죠.”
“내가 없다고 해도 말이야.”
루이스는 가볍게 울상 지었다.
“그건, 달갑지 않은 가정이네요.”
“그래도 잘 지낼 수 있는지 생각해 봐. 날 제외하고도.”
“어째서요?”
그는 잠시 고민했고,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야 대답을 들려주었다.
“……난 두 사람의 관계가 무척 견고하길 바라거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새 작은 바구니를 다 채운 것이다.
시몬의 그림자가 루이스의 머리 위로 길게 드리웠다.
그는 제 어둠에 속하게 된 루이스에게 시선을 두었다.
평소보다 짙어진 눈동자.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드는, 검고 검은 그림자.
빛을 잃은 뺨과 목덜미.
그의 그림자는 이리도 짙고 진득하여, 멋대로 그녀가 가진 빛을 빼앗고 만다.
그리고 그의 이면에는 이런 모습에 흡족해하는 잔혹한 어둠이 산다.
“시몬?”
작은 입술이 부르기에,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없이 몸을 돌렸다.
비로소 죄책감이 고개를 든다.
그리고 때때로 어두운 자신에게 반복해온 말을 되뇐다.
그녀는 태양의 것이다.
그 한마디로, 그의 안에 자리했던 검은 그림자가 마법처럼 사그라진다.
마치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 * *
붉어진 딸기를 다 딴 후에는 정말로 비가 왔다.
비를 피해 학생 식당으로 간 루이스는 관리부인이 내어 주는 따듯한 레몬티를 마셨다.
‘다행이야.’
비가 오기 전에 선물용 딸기를 딸 수 있어서 말이야.
관리부인은 딸기를 몇 번이나 깨끗하게 씻은 뒤. 작은 바구니에 루이스의 몫을 담아주었다.
루이스는 노동으로 텅 비어버린 뱃속에 세 가지 채소와 고기가 끼워진 샌드위치를 맹렬하게 집어넣었다.
사실 천천히 먹을 시간이 없었다.
깐깐하고 무서운 휴이트 교수님의 수업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우산을 가져오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준비성이 좋은 시몬에게 우산이 있었다.
물론 언제나 상냥한 그는 루이스를 강의동까지 무사히 데려다주었다.
키 차이 때문에 시몬의 어깨가 흠뻑 젖게 된 것은 몹시 미안했지만 말이다.
“미안해요.”
강의동의 복도로 들어서며 루이스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괜찮아, 익숙하니까.”
그리고 루이스가 수업을 들을 강의실 앞에 도착했다.
“열심히 해.”
물론 그는 다정한 격려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몬도요. 오늘 정말로 고마웠어요.”
“고맙긴.”
그는 무뚝뚝한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루이스는 뻐근한 몸을 재촉하여 강의실로 들어갔다.
새벽부터 정직한 노동을 하고, 뱃속에 따듯하고 배부른 것을 집어넣었더니 조금 피곤했다.
아니 실은 졸렸다.
루이스는 강의실 창가에 앉아 작게 하품했다.
아무래도 잠시나마 쉬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잠시 책상 위에 엎드렸다.
차가운 책상은 금방 온기를 머금었다.
잠시 눈을 감았더니, 금방 잠이 몰려왔다.
“루이스?”
잠결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흔드는 것이 느껴졌다.
얼핏 한쪽 눈만 뜨고 올려다보니까, 얄미운 회장님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하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지금 피곤하단 말이에요.
건드리지 마세요.
라고 말하고 싶은데, 잠이 무거운 탓인지 입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앉았다.
* * *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람.
걱정이 든 이안은 일단 루이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책상에 엎드린 그녀를 면밀하게 관찰했다.
머리는 젖어서 축축하고, 습기를 머금어 처진 옷에는 진흙이 여기저기 묻어있었다.
어디서 넘어진 건가? 다쳤나?
놀라서 그녀의 손이나 다리를 얼른 훑었지만 별다른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뭘까.
그의 고민이 깊어지고, 그녀의 숨소리는 점점 안정되어 갔다.
이젠 아예 그 작은 등이 편안하게 오르내리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다.
어쩐다.
이건 완전히 깊이 잠들었다는 뜻 같은데.
그것도 그렇게 반쯤 말리다 만 것 같은 모습으로.
“……이러니, 여름마다 감기에 안 걸리겠나.”
그는 한숨을 쉬면서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젖은 머리카락을 조금씩 쥐어 말려주었다.
물론 작고 얇은 손수건은 금방 축축해졌다.
“루이스.”
그는 다시 조심스럽게 불러 보았다.
“……루이스?”
이제 슬슬 일어나지 않으면 위험하다.
휴이트 교수님은 수업시간에 늦는 법이 없으니까.
하지만 깊은 잠에 빠진 루이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혹시 어딘가 아픈가.
이안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하얀 뺨을 살살 쓸어보았다.
열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차다.
이렇게 체온이 내려가는 건 좋지 않은데, 어쩐담.
그는 여전히 차가운 뺨 위로 가볍게 손을 올려 두었다.
루이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왜 멋대로 만지시는 거예요.’라며 울상을 지으려나.
하지만 그의 손은 따듯한 편이니까. 도움은 되겠지.
다소 시간이 흐르자, 얼음같이 차가웠던 피부가 천천히 제 온도를 찾아가는 것이 느껴진다.
슬슬 손을 뗄까.
루이스가 잠에서 깨어나서 이런 모습을 보는 것도 곤란하니까그리 생각하는 순간에.
잠이 든 루이스의 입술이 사르르 웃는 모양을 그렸다.
……그러니까. 그런 무방비한 표정이 반칙이라고, 어제 말해 준 것 같은데.
그는 턱을 괸 채, 여전히 축축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 * *
루이스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사방이 조용했다.
‘응, 조용해?’
그럴 리가 있나. 수업을 들으러 왔는데, 주변이 조용할 리 없잖아?!
루이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눈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교수님도 다른 학생들도.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아주 잠깐, 진짜 10초 정도의 시간만 눈을 감은 것 같은데.
“끝났어.”
바로 곁에서 절망적인 대답이 들렸다.
루이스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혹시, 제가 안 일어났나요?”
“잘 알고 있군.”
“교, 교수님은 뭐라고 하셨어요?”
“최저 학점을 각오하라고.”
“네?!”
“농담이야. 별말씀 없으셨어. 아마 교수님도 당황하셨겠지.”
다른 사람도 아닌 천하의 휴이트 교수다.
그의 수업에서 당당하게 숙면을 취하는 학생은 처음 봤을 거다.
“나중에 가서 사죄드려야겠네요.”
“좋은 생각이야.”
“수업은 어땠어요?”
“어려웠지. 시험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하셨고.”
“아…….”
그러고 보니 곧 시험이지. 중요한 때를 앞두고 수업시간에 자 버리다니.
“회장님은요?”
“나?”
“네. 여기에서 뭐 하세요?”
“그야, 기다렸지. 루이스 스위니가 깨어나기를.”
“죄송해요.”
아무래도 걱정을 끼친 모양이다. 더구나. 꼴도 좋지 않았으니.
“상관없어. 오랜 친구를 걱정하는 것은 내게도 좋은 일이지.”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기쁘네요.”
“그래서.”
이안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루이스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지?”
이 질문을 하고 싶어서 수업이 끝난 후에도 줄곧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게 말이죠.”
그의 질문이 끝나자, 루이스가 한층 밝은 얼굴을 했다.
그 엉망인 꼴과 대비되어 더욱 발랄해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걸 드리려고 했어요!”
루이스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바구니를 책상 위로 올려 두었다.
몇 겹으로 덮어 놓은 천을 끌어 내리자, 그 안에는 반짝반짝한 딸기가 들어 있었다.
이안은 어이가 없어서 딸기와 루이스를 번갈아가면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딸기를 땄다는 건가. 이 비가 오는 날씨에?
“아, 딸기는 비 오기 전에 딴 거예요.”
그의 표정을 읽은 듯, 루이스가 손사래를 치며 덧붙였다.
“회장님이 좋아하는 사람이랑 먹어주면 기쁠 거예요. 오이와는 맛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주면 더 기쁘고요.”
이건……그러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이안은 조금 고민했다. 물론 선물을 받으면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이렇게.
옷과 머리가 다 망가진 얼굴로 해사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할 말은 해야지.
“고맙다.”
그의 솔직한 대답에 루이스가 웃었다.
“그리고 네 말대로 좋아하는 사람이랑 먹을게.”
“다행이에요.”
이렇게 스텔라가 제대로 된 딸기를 먹게 되었다.
“그럼 슬슬 가야겠군.”
그는 딸기 바구니를 챙겨서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수업 있으세요?”
“아니, 좋아하는 사람에게 딸기를 주러.”
“아…….”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어서 일어나. 서둘러야지.”
“네? 저요?”
“그럼 여기에 달리 누가 있지.”
“저도 가야 해요?”
“당연한 걸 묻는 군, 빨리 따라와.”
깜찍한 딸기 바구니를 든 이안이 복도로 나가기에, 루이스도 그 뒤를 조르르 따랐다.
물론 사양하기 위해서 말이다.
“저기, 제가 굳이 따라갈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기숙사로 가서…….”
“괜찮아 오래 안 걸려. 마침 저기 있으니까.”
스텔라가?
루이스는 이안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지만, 스텔라의 아름다운 붉은 머리카락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익숙한 두 사람이 보였다.
클레어와 딘이었다.
이안은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바구니에서 딸기를 하나 꺼내어 딘의 입속으로 쑥 집어넣었다.
“좋아한다. 딘.”
“……회장님, 미쳤어?”
“어쩔 수 없어, 이건 그런 딸기니까. 루이스가 시킨 일이지.”
이안은 다른 딸기를 꺼내어 클레어의 입속에도 어김없이 넣어 주었다.
“좋아한다. 클레어.”
“가문의 영광이네요. 제가 이안 오드모니얼에게 고백을 받다니.”
“어쩔 수 없어, 이건 그런 딸기니까. 루이스가 시킨 일이지.”
이안은 같은 변명을 덧붙였다.
“가문에 영광을 준 딸기와 루이스에게 감사해야겠네요.”
“충분히 음미하며 먹도록.”
“……회장님?”
루이스가 그의 뒤에서 옷깃을 잡아당겼다.
“왜? 좋아하는 사람이랑 딸기를 먹고 있는데.”
그는 제 입속에도 딸기를 세 개 정도 밀어 넣으며 우물거렸다.
게다가 지나가는 학생들에게도 딸기를 하나씩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좋아한다는 말과.
“어쩔 수 없어, 이건 그런 딸기니까. 루이스가 시킨 일이지.”
라는 말을 굳이 덧붙여가며 말이다.
루이스는 이안의 뒤에 서서, 그가 학생들과 인사하고 웃고, 또 딸기의 달콤함에 대해 칭찬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깨닫게 되었다.
이안이 그들을 가리켜 좋아한다고 하는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을 거다.
그는 정말로 딘과 클레어를 그리고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꽤 좋아하고 있었다.
으, 하지만 루이스가 말한 건 이런 좋아함이 아닌데 말이다.
얼마 되지 않는 딸기는 하나만 남기고 금방 바닥이 났다.
“하나만 남았네요.”
루이스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여럿이 즐겁게 먹을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얻어 올 것을 그랬다.
“그러네.”
이안이 마지막 딸기를 든 채, 루이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