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알았으니까, 이제 이리 와.
그녀의 눈가를 스친 손가락은 무척 느리게 멀어졌다.
완전히 구름을 빠져나온 달이 어두운 실내로 하얀빛을 내리고 있었다.
루이스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성실하리 만치 올곧게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색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의 눈길은 무겁고 진지했다.
복잡한 감정이 그 안에 속해있기 때문이리라.
루이스는 그 복잡한 감정이 무엇이든, 그것을 깨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안과 루이스.
둘 사이에 존재해도 되는 것은 오직 ‘오랜 친구의 의리’뿐이니까 말이다.
루이스는 헤실 웃었다.
살짝 어깨를 늘어뜨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둘 사이의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법은 간단했다.
“걱정하셨어요?”
이렇게 그가 조금 부끄러워할 만한 질문을 던지는 거다.
그러면 괜스레 화를 내며 놀리는 말을 던지곤 하니까.
‘루이스 스위니에게는 곤충 같은 생명력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겠나.’ 라는 말 따위를.
하지만 그는 금방 입을 열지 않았다.
살짝 찌푸려질 줄 알았던 얼굴에도 변화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진중하고 무거운 얼굴로.
변하지 않는 시선과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그래.”
그리고 덧붙였다.
“걱정했지. 루이스 스위니를.”
“…….”
루이스는 억지로 그렸던 미소를 지웠다.
“울지 않을까 생각했었고.”
“그럴 일은 아니었어요. 아슬아슬하게요.”
“너그럽기도 하시지. 내 약혼녀께서는.”
루이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안이 지금 저 호칭을 사용한 건, 실수가 아니다.
아마 복수이리라.
낮에 루이스가 약혼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한 것에 대한.
“나는 잘 모르겠어.”
“……무엇을요?”
“어린 시절의 나는, 그대를 이용했지.”
이안은 어머니를 잃었던 시절을 오랜만에 입에 담았다.
“그대는 어릴 때 오히려 어른스러웠어. 어머니를 잃고 사나워진 소년에게 평범하게 대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
“귀찮았던 것뿐이에요.”
루이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조금씩 그대가 이용할만한 인간이 되었어.”
“…….”
“그리고 스위니 가문은 가능한 것은 모두 알뜰하게 활용하지.”
“저는.”
“들어봐, 루이스. 나는 그대가 제안한 일에 대해 번복하려는 것이 아니야. 그냥…….”
그는 길게 호흡을 뱉었다.
긴 숨의 끝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화가 났을 뿐이야.”
“……제게 활용되지 못해서요?”
“그래.”
“그런 걸 아쉬워하실 줄은 몰랐어요.”
루이스가 의아한 듯 대답하자, 처음으로 그의 눈꼬리가 가볍게 휘었다.
“아쉽지. 그대가 날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나도 그대를 마음 놓고 활용하지 못하거든.”
“그건 기쁜 일이네요.”
루이스는 배시시 웃었다.
“이제 절 알뜰하게 이용하진 못하실 테니까요.”
“맹세컨대.”
이안은 어떤 선서라도 하는 것처럼 한쪽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루이스 스위니를 내가 원하는 만큼 이용한 적은 없어.”
“……여기에서 뭘 얼마나 더 이용하실 계획이셨던 거에요?”
“아직 한참 많이 남았지.”
“제 노동력을 아끼기 위해서라도, 역시 회장님을 이용하는 건 그만둘래요.”
“그리고 전부터 지적하고 싶었는데. 대체 그 호칭은 어떻게 된 거지?”
“회장님이요?”
“그래, 그 끔찍한 말. 전하가 회장님으로 둔갑한 것뿐이지 않나?”
“실제로 그렇게 둔갑하고 계시잖아요.”
그걸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다만.
이안은 조금 한숨을 쉬었다.
대체 사람에게 이름이 왜 붙어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누군가에게 불리기 위해서다.
이렇게 이름을 불리지 못할 줄 알았다면, 회장 자리를 조금은 고민해 보았을 거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이리 와.”
이안은 루이스의 바로 앞에 선 채, 한쪽 손을 내밀었다.
루이스는 그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가면서 바라보았다.
이리 오라니, 왜?
“내가 그대에게 훌륭한 사교댄스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지.”
“그럼 설마, 그 ‘이리와’라는 말이 춤을 청하는 말이었어요?”
“그래.”
“세상에, 그런 식으로 청하는 사람이……!”
“뭐 어때서? 적어도 머리는 안 긁었잖아.”
그는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냐는 얼굴로 한쪽 손을 재차 내밀었다.
정말이지, 쓸데없는 기억력만 좋아서는!
루이스는 그의 소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한 가지를 떠올렸다.
“부탁이 있는데요.”
“드디어 나를 이용할 생각이군. 좋아, 말해 봐.”
“나중에 방학 때 우리 어머니를 만나면요. 제가 아카데미에서 아주 멋지게 춤을 췄다고 말해 줄 수 있어요?”
“그거야 그대가 멋지게 춤을 추었을 때의 이야기지.”
어쨌든 이야기는 해 준다는 뜻이다.
루이스는 제 손을 내밀었다.
조금 머뭇거리면서 말이다.
손끝이 살짝 닿았다.
그러자 미끄러지듯 완벽하게 서로의 손바닥이 맞닿게 되었다.
곧 강한 힘이 루이스를 당겨왔다.
덕분에 그녀는 벤치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짧은 휘청거림이 있었다.
그러나 허리를 붙잡아 준 손이 있어서 금방 바로 설 수 있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으.”
왜 이렇게 어색하지.
루이스는 차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눈앞에 보이는 그의 정장에 시선을 두었다.
“음악이……없는데요.”
그녀는 이 어색함을 타파하기 위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래서 음악이 없어도 식물이 있으면 괜찮은 루이스 스위니가 여기에 있지.”
그야 그랬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대가 음악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불러드릴 수도 있는데.”
그는 루이스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느릿한 춤곡을 조금 흥얼거렸다.
두 사람의 주된 연습곡이기도 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겹게 듣고 또 들었던.
그가 도입부만 짧게 흥얼거렸음에도 루이스의 귓가에는 그 음악의 전체가 천천히 울리는 것 같았다.
아마 그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의 오른발이 뒤로 물러난다.
그 간격만큼 루이스의 왼발이 나아갔다.
무게의 중심과 손끝의 긴장감을 공유한 이후로는 서로가 자연스러워졌다.
루이스는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눈이 바로 마주쳤기에 샐쭉 웃었더니 도리어 기가 차다는 시선이 돌아온다.
평소의 이안이다.
“있죠.”
루이스는 한 걸음 물러서며 이야기를 걸었다. 물론 그녀가 물러서는 만큼 그가 가까이 다가온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는 곧바로 ‘무엇을?’이라고 되묻지 않았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한 후에 천천히 대답해 주었다.
“후보가 두 군데 있었는데.”
그는 루이스의 질문을 아주 제대로 이해한 모양이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는 것을 보면.
“도서관이 아니면 기숙사에 있으리라 생각했지.”
“하지만 여기는 온실인걸요?”
루이스의 시선이 먼 곳의 식물을 향했다.
이안은 짧게나마 다른 곳을 향하는 눈동자와 작은 몸을 제게로 당겨온다.
간격은 잠시 가까워진다.
그러나 다시 튕겨 나가듯 벌어졌다.
그가 당겨오자 둘의 거리는 처음과 같아졌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그 어느 사이로.
“내 사촌을 마주쳤지. 기숙사에서.”
“시몬이요?”
루이스의 입에서 시몬의 이름이 나오자 이안은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누군 회장님이고 누군 시몬인가.
똑같은 친구인데 말이다.
“그래, 시몬 힐라드.”
그제야 루이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안이 어떻게 루이스를 찾았는지 이해한 모양이다.
“시몬이 알려주었죠?”
“그래, 그대에게 여길 소개해 주었다고 하더군.”
“상냥하게도 말이죠.”
“그대에게 사교댄스를 알려준 선생님에 대해서도 그런 평가를 해 주면 좋겠는데.”
“음…….”
루이스는 잠시 고민하는 척했다.
이안은 제 상냥함을 선보이려는 것인지, 오늘따라 무척 부드럽게 리드해 온다.
심술이 잔뜩 묻어서 루이스를 마구잡이로 흔들어 대던 어린 시절과는 다르게 말이다.
“그때도 이렇게 해주셨다면, 그런 평가를 했을 텐데요.”
“그건 루이스 스위니가 이해해야 해. 소년들은 부끄러우면 심술을 부리거든.”
“그게 부끄러워하셨던 거였어요?”
“그래. 그 애매한 나이에 여자친구의 허리를 붙드는 일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나?”
하긴 남자도 소년도 아닌 애매한 나이에 그런 걸 하기는 쉽지 않았을 거다.
사춘기라도 지나는 중이라면 더욱더.
그렇게 생각하니, 그의 불친절했던 리드도 조금은 이해가 된다. 귀엽게 느껴지기도 하고.
잠시 쿡쿡 웃은 루이스는 장난치듯 물었다.
“지금은 부끄럽지 않으시고요?”
“……글쎄.”
흐릿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가늘게 뜬 두 눈은 부끄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도리어 뭐라고 해야 할까.
이 상황을 충분히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어른이 되셨네요.”
“그걸 항상 바랐지. 지금도 그렇고.”
그리고 다시 대화는 중단되었다.
조용해진 이후에는 자그락거리는 소리가 있었다.
굽이 낮은 루이스의 구두가 흙과 자갈을 밟는 소리였다.
신기할 정도로 이안의 구두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같은 땅을 밟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건 그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제대로 신경을 쓰고 있다는 증거일까.
아무래도 그가 제대로 된 춤 선생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툭.
루이스의 구두가 또 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발끝에 닿은 자갈이 구르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치 그 소리가 어떤 신호였던 것처럼, 두 사람의 춤도 거기서 멈췄다.
하지만 침묵은 깨어지지 않았다.
서로를 쥔 손가락도, 그녀를 붙잡아둔 그의 팔도 모두 그대로였다.
잠시 제 구두 끝을 내려다보던 루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에 달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잔상만 남긴 채 사라진 빛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루이스 스위니.”
그제야 그는 입을 열었다.
마치 그녀의 감각이 텅 비워질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건 무척 효과적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꽤 오랫동안 루이스의 귓가에 진동했다.
루이스는 그 소리에, 그리고 진동하는 감각에 제 몸이 삼켜지는 것 같은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불쾌한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다만 두려웠다.
한 번 먹혀버리면, 다시는 돌아 나올 수 없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에.
루이스는 본능적으로 몸서리쳤다.
그에게서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에 반응하듯 이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놓지 않겠다는 듯 말이다.
“조금 더…….”
그리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곧 그의 손에서는 힘이 풀렸고, 그는 벌어지는 간격을 억지로 좁히지도 않았다.
마지막까지 연결되었던 손끝이 툭 하고 떨어졌다.
루이스는 어둠 속에서 제 손끝을 쥐었다.
여름은 아직 오지 않았을 텐데, 그곳에 더위가 머문 것처럼 뜨거웠다.
얄궂은 달이 다시 구름을 치워낸다.
서로의 사이에 빛이 떨어지고 나서야 깨닫는다.
아주 잠시.
평소와는 다른 어떤 것이 둘 사이를 지나갔다고.
그리고 그건 루이스가 절대적으로 경계 하는 것이다.
그녀가 이 세계에서 멀쩡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말이다.
그러니 루이스는 웃었다.
다소 멍청해 보인다고 해도 좋았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어둠 속에서 들었던 그의 애원 같은 목소리는 어떤 의미도 되지 않았다는 듯.
“파티로 다시 돌아가지 않으세요?”
“돌아가야지. 마무리 행사를 해야 하거든.”
“마무리 행사요?”
이안도 루이스의 분위기를 따라서 가벼운 투로 대답했다.
“실내에 장식된 꽃을 원하는 학생들이 꽤 많이 있어서 말이야.”
“꽃이라면…….”
“그래. 그대가 장식한 것 말이야. 다들 삭막한 기숙사를 밝게 만들고 싶은 거겠지.”
“학교 예산으로 산 걸 학생들에게 마구 나누어 주어도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경매를 하기로 했어. 헐값으로 제한되지만.”
“허가받았나요?”
“힘들게. 어쨌든 라센 교수님이 허가해 주셨지.”
“그 교섭은 회장님께서 하셨을 테고요?”
“달리 누가 있겠나.”
그는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루이스는 그 높은 콧대가 더욱 높아지도록 기꺼이 손뼉을 쳐 주었다.
돈이 드는 일도 아니니까, 아낌없이.
“그러니 내일부터는 그대가 꽤 바빠질 거야.”
“어째서요?”
“어째서냐니.”
그는 팔짱을 끼우고는 오만한 얼굴로 루이스를 내려다보았다.
“꽃을 낙찰받은 학생들은 제 손으로 화병 한 번 갈아보지 못했지.”
“아…….”
루이스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파티는 제대로 된 귀족들만이 참석한다고 했으니까.
“그대로 두었다가는 며칠 가지 않아서 금방 꽃이 시들어버리겠네요.”
“그래. 아까운 일이지.”
“꽃을 가져간 학생 명단을 만들어 주시면, 제가 한 명씩 찾아가서 관리하는 방법을 알려줄게요.”
“그렇게 해준다면, 많은 학생이 루이스 스위니에 대해 알게 될 거야.”
그렇구나.
이안이 학생들에게 꽃을 가져가도록 한 것은, 루이스를 위해서였다.
그녀가 파티에 참석하지 못한 대신에, 다른 방식으로 그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말이다.
그것도 ‘스위니’다운 모습으로.
어쩐담.
학생들을 ‘귀족’이나 ‘미래의 결정권자’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는데.
이런 기회가 주어지니 어쩔 수 없이 계산적인 마음이 슬쩍 고개를 들고 만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내 약……소꿉친구를 위한 일인데.”
“최고의 소꿉친구네요.”
“춤 선생으로는?”
그가 한쪽 손을 내밀며 고집스레 물었고, 루이스는 가볍게 그의 손을 밀어냈다.
“물론, 그저 그래요.”
“그건 슬픈 대답이로군.”
그가 한숨을 쉬었고, 루이스는 헤실 웃었다.
그 얄미운 웃음에 약이 오른 이안이 루이스의 얼굴을 조금 아프게 꼬집었다.
루이스가 아프다며 끙끙거리는 소리는 꽤 시끄러웠다. 온실에서 자고 있던 식물들을 깨울 만큼 말이다.
어쨌든 마지막에는 이렇게 어린 시절을 그대로 간직한 두 사람만 남아버리고 말았다.
잠시나마 흘렀던 진득한, 어떤 감정의 빛은 구름 사이로 숨어버린 모양이다.
* * *
하지만 사라지지 않은 그 감각과 기억은 예기치 않게 흘러나왔다.
가령, 홀로 잠을 청하려고 하는 침대 안에서 말이다.
루이스는 피곤한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더…….」
귓가를 스쳤던 낮은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 순간 그녀를 강하게 쥐었던 손끝도.
다시 손이 뜨거워지고 만다.
아니 어쩌면 손목과 어깨 그리고 어깨와 머릿속까지.
조금 더, 뭐?
통속적인 소설이었다면, 아마 그 뒤에 ‘이대로 있고 싶다.’는 말 따위가 붙었을 거다.
그리고 그 순간의 공기는 꽤.
그 말과 어울렸고.
그대로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루이스는 제가 선택하지 않았던 다른 길을 멋대로 상상했다.
어쩌면…….
망상은 깊어진다.
착착 순리대로 진도가 나아가던 중, 루이스는 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미쳤어!
미쳤어. 루이스 스위니!
그녀는 망측하기 짝이 없는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회장님을 상대로 그런 생각을 해서 어쩌자는 거람.
그는 이 세계에서 그녀에게 ‘가장 의미가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루이스의 미래가 무사할 거다.
* * *
루이스는 미래를 지킨 대가로 하룻밤을 희생했다.
제 머릿속을 제어하느라 제대로 잘 수 없었다는 뜻이다.
루이스는 길게 하품하며, 어젯밤에 클레어가 가져다준 ‘꽃을 가져간 학생 목록’을 펼쳤다.
즉 루이스의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의 목록 말이다.
흐린 눈을 깜빡거리며 적당히 훑어 내려가던 루이스는 문득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그리고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이 사람 이름이 여기에 왜 있는 거람.’
그녀는 학생 목록을 조금 거칠게 집어 들고, 문을 나섰다.
기숙사 복도는 조용했다.
아마 어제가 쉬는 날이었고, 학생 대부분이 파티에서 몸을 혹사한 탓일 거다.
어느 방 앞에 도착한 루이스는 시끄럽게 노크했다.
물론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아침에 약한 사람이니, 빨리 깨어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루이스는 조심스럽게 문을 밀어 열었다.
다행히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방 안에서 편안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루이스의 노크는 그 단잠에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못한 모양이다.
하얀 이불 위로 살짝 헝클어진 은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 옆에는 뱀 허물처럼 벗어 놓은 정장도 있었다. 아마 옷만 대충 벗고 뻗은 모양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어제 낙찰받은 꽃만큼은 완벽한 자태로 유리 화병에 담겨 있었다.
루이스는 잠시 창가로 다가갔다.
조금 시든 잎을 떼어주고, 물을 잘 먹을 수 있게 줄기를 제대로 잘라놓았다.
‘이렇게 잘해 놓고서.’
하긴, 이안은 루이스의 아버지에게 꽃을 관리하는 법을 배웠다. 잘할 수밖에.
그런데 왜 루이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적어 놨을까.
설마 루이스를 불러놓고 ‘이 몸은 이런 것도 완벽하게 할 수 있지.’라며 잘난 척을 하고 싶었던 걸까.
듣고 싶지 않은데, 그건.
루이스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몇 걸음을 떼었다.
하지만 그 순간.
휙, 하고 무언가가 그녀의 허리를 휘어 감아왔다.
소리도 지르지 못할 만큼 갑작스레.
“……?!”
뒤로 당겨진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침대 위로 털썩 앉게 되었다.
그나마 푹신한 곳에 떨어진 건 다행이었다.
루이스는 제 허리를 내려다보았다.
적당한 근육이 붙은 팔이 여전히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그 팔을 따라 시선을 올리니, 반쯤 몸을 일으킨 이안이 있었다.
조금 흐트러진 이불 사이로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체가 보였다.
루이스는 그제야 침대 근처에 떨어져 있던 그의 옷을 떠올렸다.
‘……어디까지 벗으셨더라?’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람.
루이스는 내적 변태를 억누르며, 이안의 얼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애써 덤덤한 척하는 표정을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하지만 입술에 그려진 장난스러운 미소만큼은 선명했다.
“내 파트너가 새벽같이 도망가는 모습을 보면 슬퍼지는데.”
“……파, 파트너라니 그게 무슨 망측한 말씀이세요!”
“파트너지, 함께 춤을 춘. 이의 있나?”
“도망치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럼, 말을 바꿀까.”
“부디 바꿔주세요.”
툭.
그가 루이스의 어깨 위로 이마를 기대왔다.
무척 피곤한 듯. 그리고 무척.
“가지 마.”
간절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