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잊지 않았어
시몬 힐라드는 제게 다가올 모든 불행을 예습하는 것 같은 소년이었다.
루이스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에 대해 그렇게 정의 내렸다.
그는 매사에 제 마음이 담기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었다.
그런 행동을 보인 나이가 고작 열 살 정도임을 생각해 보면 꽤 잔인한 일이다.
하지만 그가 처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생존을 위해서 말이다.
시몬은 이안의 사촌이며, 황제의 아우인 힐라드 대공의 하나뿐인 아들이다.
그러니 그에게는 신성하고 정당한 왕위 계승권이 있었다.
황태자와 같은 나이인 왕위 계승권자라니. 그는 존재 자체가 분쟁의 씨앗이었다.
그러니 그는 항상 신중하게 제 자리를 찾아냈다.
어떤 일에서도 이안보다 훌륭함을 선보이지 않도록 조절했다.
물론 황가의 일원으로서 덜떨어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도 중요했다.
그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는 꽤 힘겨운 것이지만, 명석한 그는 어느 정도 그런 상황과 타협하며 해내고 있었다.
사실상 해내지 못하면 목숨을 위협받을지도 모르니, 선택권이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시몬 힐라드는.
‘아카데미의 가짜연인’에서 ‘스텔라 라피스’에게 지독한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사람이기도 했다.
한때 독자였던 루이스가 흔히 하는 말을 빌리자면, ‘비운의 서브 남주’라고 해야 할까.
그런 그와 루이스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그녀의 나이 아홉 살의 일이었다.
「루이스 스위니입니다. 만나 뵐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 힐라드 공자님.」
「…….」
그는 어딘가 불안한 듯한 모양새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바깥 공기를 쐬라’며 스위니 온실까지 끌고 온 것이지만, 당시의 시몬에게는 괴롭힘밖에 되지 않았을 거다.
「대답 정도는 해주지그래? 내 약혼녀께서 당황하시는데.」
이안은 무언가 탐탁지 않다는 듯 시몬을 타박했다.
「당황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내 약혼녀라는 호칭은 제발 그만두세요.」
「그런 자질구레한 호칭 하나하나에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자질구레하다뇨! 어쩜 그리 무신경한……!」
아웅다웅하는 두 사람 사이로 조용한 목소리가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시몬 힐라드.」
이안과 루이스는 이야기를 멈추고 동시에 시몬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게 루이스의 인사에 대한 그의 대답인 모양이다.
느리기도 하거니와 부실하고 어색하기까지 한 자기소개.
묘하게 귀여운 느낌이 들어서, 루이스는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실례인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시몬과 루이스는 그럭저럭 친구라고 부를 법한 관계가 될 수 있었다.
물론 루이스가 일방적으로 이야기하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은 대답을 들려주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있잖아요. 공자님.」
그래도 루이스는 시몬과 대화를 하는 시간이 좋았다.
그에게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주인공인 이안과는 달리 시몬과 루이스는 원작의 마지막에서 불행을 끌어안는 사람들이다.
즉, 불행을 극복해야 하는 동지라는 뜻이다.
「이거, 드릴게요.」
루이스는 그에게 은방울꽃을 선물하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꽃 선물에 시몬은 몹시 놀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쉽게 그것을 받아 들지도 못했다.
「……?」
「빨리요.」
루이스는 그의 손에 강제로 꽃을 들려주었다.
그에게 은방울꽃을 선물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루이스의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이 꽃에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신기한 힘이 있다고 했다.
「전하께는 비밀이어요. 알았죠? 분명히 심술을 부리실 테니까요.」
게다가 이안은 행복해질 것이 분명한 남자 주인공이다. 이런 꽃의 힘은 조금도 필요하지 않을 거다.
「……고맙다.」
시몬은 꽃을 내려다보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쁘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루이스는, 미래의 시몬이 스텔라를 너무 많이 사랑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물론 그건 말도 안 되고, 몹시 실례되는 바람이다. 타인의 사랑이 크지 않기를 기도하다니.
하지만 루이스는 원작에서 그가 스텔라에게 얼마나 깊은 마음을 품었는지 기억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큰 상처로 끝났는지도.
「마음에 들어 하셔서 다행이에요. 저도 좋아하는 꽃이거든요.」
「……할 테니까…….」
「예?」
「아, 아니…….」
무슨 말이었느냐고 루이스가 몇 번 더 되물었지만, 그는 흐릿했던 속삭임을 다시 들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조심스레 꽃을 쥔 그가 조금 즐거워 보였던 것은 아마 착각이 아니었을 거다.
* * *
잠에서 깨어난 루이스는 조금 흐릿한 눈을 천천히 깜빡거려 보았다.
꿈을 꿨다. 거의 과거의 단편을 훑는 것 같은 꿈이었지만.
“시몬 힐라드…….”
루이스는 오랜만에 떠오른 그리운 이름을 작게 중얼거려 보았다.
그는 이안과 동갑이었고, 그 학습능력까지 제법 비슷했다. (물론 이안이 조금 더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러니 둘이 같은 해에 아카데미에 진학하는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네.’
여기에 오면 어디서든 시몬과 만나게 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마주치지 않기를 바란 이안과는 수도 없이 부딪히는데, 반가운 동지와는 단 한 번도 얼굴을 마주치지 못하다니!
하지만 이 아카데미에는 개별적인 연락 수단이 없었다. 누군가를 만나려면 전적으로 우연에 의지해야 했다.
‘같은 수업을 신청했기를 바랄 수밖에 없겠네.’
그렇지 않으면 은둔을 즐기는 시몬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루이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양쪽 팔을 시원하게 쭉 뻗어 올렸다.
어제 치료받은 등을 충분히 의식하면서.
‘마법은 참 신기하단 말이야.’
선생님의 치료를 받은 뒤에는 따갑고 뜨거운 모든 통각이 사라졌다.
물론 이렇게 기지개를 켜도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역시 마법은 최고다.
맨발로 침대에서 내려온 루이스는 여전히 잠옷을 입은 채로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창문 근처에 머물러 있던 바람이 그녀의 방 깊은 곳까지 한 번에 밀려 들어온다.
맑은 공기다.
루이스는 잠시 눈을 감고 바람이 제 얼굴 곁을 흐르는 감각을 느꼈다.
짧은 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 * *
루이스는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긴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빗어 내렸다.
오랜만에 머리를 묶어 올릴지 잠시 고민했지만 그만두었다. 루이스는 그런 쪽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시몬은 머리 손질을 무척 잘했었지.’
어린 시절. 머리카락이 엉켜버린 루이스의 머리를 풀어 준 것도, 엉망이 된 머리를 깔끔하게 묶어 올려 준 것도 시몬이었다.
그 무뚝뚝한 성정을 생각하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만 말이다.
‘손끝이 꼼꼼하고 재주가 좋은 편이었지. 신기할 정도로.’
물론 그런 재능 따위는 이 나라의 왕위 계승권을 지닌 공자님께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그러니 그의 손재주가 발현되는 곳이라고는 루이스의 머리를 묶어 줄 때가 유일했다.
머리빗과의 사투를 마친 루이스는 가방을 챙겨 들고, 발랄하게 문을 열었다.
수업이 시작되고 2일 차. 오늘은 수강한 과목이 많지 않아서 비교적 여유로운 날이다.
“어머.”
그리고 루이스는 문 앞에 서 있었던 클레어와 바로 마주쳤다.
서로 놀란 얼굴로 바라본 다음에는 괜스레 웃게 되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노크하려는 순간에 루이스가 벌컥 문을 열어젖힌 모양이다.
“굉장한 타이밍이었어.”
나란히 복도를 걷게 된 후에도 클레어는 키득거리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실은 네가 어제 도서관에서 몸을 던져서 공주님을 구했다고 들었거든. 괜찮나 싶어서 찾아왔던 거야.”
그리고 웃음이 멎은 뒤에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루이스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저는 괜찮아요. 마법으로 치료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공주님을 구했다고요? 정말 그렇게 소문이 났어요?”
“그래. 신입생인 스텔라 라피스 말이야. 굉장한 미인이라던데?”
클레어는 한쪽 눈을 가볍게 찡긋하며 장난스레 웃었다.
“굉장한 미인이긴 했어요. 그 주변이 반짝반짝해질 정도로요……. 무, 물론 클레어도 예뻐요!”
“그건 예의상 하는 말이겠지만, 어쨌든 고마워. 어쨌든 공주님의 미모에 반한 루이스 왕자님께서 몸을 던져 구하셨다는 거지?”
“구했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에요.”
“아니긴!”
자리에서 멈추어 선 클레어는 몸을 빙글 돌려 루이스의 앞에 마주 섰다.
장난스러운 얼굴을 하던 조금 전과는 달리 아주 엄격한 표정이었다.
“떨어지는 몸을 그대로 받아 줬다면서! 루이스 스위니가 납작하게 뭉개질 정도로.”
“납작해지진 않았어요. 보시다시피.”
“그만큼 아프도록 깔렸다는 뜻이야. 그 일을 이야기하는 회장님의 얼굴이 새파래서, 나도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루이스는 잠시 제 귀를 의심했다. 이안의 얼굴이 새파래졌다고? 그 뻔뻔한 사람이?
“학생회는 학생을 지키는 모임이긴 하지만, 너 역시 소중한 학생 중 한 명이야. 그걸 잊으면 안 돼.”
클레어는 루이스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분명하게 말했다.
말투는 무척 엄격한데, 그 내용이 너무나도 다정하여 루이스는 조금 감동했다.
학생회는 서로를 알뜰살뜰 챙겨준다더니, 이런 건가 싶어서 말이다.
“어쨌든. 아파 보이지 않아서 안심했어.”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클레어.”
“당연한 일이지, 난 널 학생회로 끌어들인 책임이 있는 걸.”
“제가 선택한걸요.”
클레어는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다시 미소를 그렸다.
“어쩐지 회장님이 너를 귀엽게 여기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네?”
그게 귀여워하는 거였어?
두 번 귀여워했다가는 사형대에서 목이 잘려나갈 것 같은데. 덜컹, 하고 말이다.
“어쨌든 회장님께는 내가 널 귀여워하더라고 말하지 마. 분명히 날 경계하실 테니까.”
클레어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럼 나는 이제 사무실에 잠시 들를 건데, 넌?”
“저는 강의동에 가야 해요. 휴이트 교수님께서 과제로 읽어야 할 책 리스트를 오늘 공지하신다고 했어요.”
“휴이트 교수님이라면 아마 새벽에 공지를 달아 두셨을 것 같으니, 서두르는 게 좋겠다.”
“새벽에요?!”
“시간을 초 단위로 분절해서 사용하실 정도로 부지런한 분이시거든.”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런 인상이기는 했다.
“그럼 나중에 또 만나자, 몸조심하고 혹시 아프면 다시 의료동에 가서 진찰받는 것 잊지 말고.”
“네, 고마워요. 클레어도 오늘 하루 잘 보내요.”
손을 흔들며 헤어진 후, 루이스는 다소 발걸음을 서둘렀다.
강의동으로 가 보니, 클레어의 말 대로 교수님의 공지가 붙어있었다.
「역사가의 서재, 페터 클락 지음기록의 시간, 오라 윌리 지음」
다행이다.
둘 다 모르는 책이면 어쩌나 했는데, 페터 클락이 쓴 역사가의 서재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읽었다.
‘도서관에 가서 빨리 빌려야겠네.’
루이스는 바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렇게 필독서가 생기는 날에는 으레 대여 전쟁이 펼쳐진다.
물론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었다.
학생들끼리 협조하여 서로 빌려주곤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건 무척 성가신 일이니까 이왕이면 깔끔하게 도서관에서 대출하는 편이 안심이다.
도서관에 들어선 루이스는 곧바로 ‘역사서’ 서가로 향했다.
어제 책을 한 권씩 눈에 익혀두었기 때문에 교수님께서 지정하신 책이 어디에 있는지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루이스는 곧바로 ‘역사가의 서재’을 꺼내 들었다. 다행히 마지막으로 남은 한 권이 남아있었다.
이제 ‘기록의 시간’를 찾았다. 흐린 기억에 의하면 어제 그 책을 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찬찬히 살펴도 그 책은 보이지 않았다.
루이스는 평소와는 달리 혼자서 책을 찾는 즐거움을 포기했다.
이렇게 느긋하게 있다가 책을 빌리지 못하면 곤란하니까 말이다.
그녀는 조금 서두르는 걸음으로 사서 선생님이 계신 곳으로 이동했다.
“어머.”
그리고 그곳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스텔라 말이다.
그녀는 루이스를 바로 알아보고는 서둘러 달려 나왔다.
“괜찮아? 크게 다쳤다고 들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잔뜩 울상을 짓고 있는 것을 보니, 착한 스텔라에게 걱정을 안겨준 모양이다.
“저는 괜찮아요.”
“정말로? 어제는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했잖아!”
“치료받았으니까요.”
루이스는 한쪽 팔을 크게 휘둘러 보였다.
정말로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말이다.
“걱정했어. 정말로.”
그녀가 두 손을 모으며 간절히 말하기에, 루이스는 조금 감격했다.
뭐랄까.
정말로 자신이 ‘악녀 루이스’가 아니라는 사실에 뼈저리게 안심했다고 해야 할까.
“그러고 보니 제대로 인사도 못 했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스텔라 라피스야.”
그녀가 붉은 머리카락을 매혹적으로 쓸어내리며 인사했고, 루이스는 그 미모에 홀린 듯 배시시 웃었다.
역시 주인공은 존재만으로도 반짝반짝하다. 아마 스텔라의 좋은 성품 덕분이겠지만.
“루이스 스위니에요.”
“음, 원하면 편하게 말해도 괜찮은데.”
“괜찮아요.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 안심되거든요.”
“안심?”
“네, 여러모로.”
루이스가 주변 사람들을 상태로 (특히 스텔라를 상대로) 굳이 존댓말을 고집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의 내부에 잠들어 있을지도 모를 ‘악녀 루이스’가 깨어나지 않도록 경계하려는 것이다.
“그보다 스텔라.”
루이스는 조금 전에 꺼낸 ‘역사가의 서재’를 끌어안고는 곤란한 듯 미소를 지었다.
“혹시 ‘기록의 시간’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오라 윌리가 지은?”
“네 맞아요. 바로 그거죠.”
“혹시 수업 지정도서야?”
“네, 허먼 휴이트 교수님의 지정도서에요. 다음 주까지 읽어야 해요.”
“오전부터 연달아 빌려 가길래 그런 걸까 싶었는데 정말이네. ‘역사서’에 없다면 아마 전부 대출되었을 거야.”
전부 대출되었다고?
루이스는 곧바로 울상을 지었다.
스텔라는 그런 루이스가 가여웠는지 잠시 보유 도서 파일을 확인해 주었다.
“총 다섯 권이 있는데 네 권이 오늘 오전에 나갔어.”
그렇다는 건 아마 루이스를 제외한 다른 수강생들은 모두 책을 빌려 갔다는 뜻이다.
“먼저 대출된 나머지 한 권은 언제 반납될지 알 수 있나요?”
“글쎄. 다음 주 중에는 들어오지 않을까.”
스텔라가 모호하게 대답하기에, 루이스는 더욱 암담해졌다.
하필이면 읽어보지 못한 책이 없을 것은 뭐람.
“그렇다면, 혹시 먼저 책을 빌린 분이 누구신지 알 수 있나요?”
“미안, 루이스. 그건 날 구해준 너라도 말해 줄 수가 없네. 개인 도서 대출 목록은 비밀사항이라서.”
“그야……그렇겠네요.”
루이스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대출에 성공한 이안에게 빌려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럼 오늘은 이것만 빌릴게요.”
루이스가 책을 내밀자 스텔라는 능숙하게 대출 카드를 꺼내어 작성을 시작했다.
가지런한 글씨가 적히는 것을 보면서 루이스는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록의 시간이 쉽게 읽히는 책이었으면 좋겠네요. 수업 전까지 느긋하게 읽을 기회가 없을 것 같으니까요.”
“……기록의 시간?”
문득 루이스의 뒤에서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낮고 차분한 목소리는 무척이나 그리운 것이었기 때문에, 루이스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한 사람과 그대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그 특유의 무던한 시선이 보였다. 감정을 담는 일이 그다지 없는 잔잔한 눈동자.
눈가 주변으로 흘러내린 까만 머리카락은 여전히 밤하늘만큼이나 어두웠다.
루이스는 그대로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이네요.”
평소라면 ‘공자님’이라고 불렀겠지만, 아카데미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으므로 루이스는 과감히 호칭을 생략했다.
“루이스 스위니.”
그는 천천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글자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발음하면서 말이다.
마치 ‘잊지 않았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