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런데 왜, 도망가지?
바람이 불어왔다. 이안의 은빛 머리카락이 봄날의 바람에 자유로이 노닐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얼굴을 살짝 덮은 머리칼을 쓸어냈다.
얼핏 보인 푸른 눈동자가 어렴풋이 웃고 있었다.
루이스는 문고리를 쥔 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저것이 바로 그 유명한.
‘주인공에게만 허락된다는 바로 그 바람 연출인가.’
바람이 불면 긴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꼬여버리는 루이스와는 연이 먼 아름다운 연출이다.
어쨌든 지금은 그의 주인공다운 면모에 감탄할 때가 아니다.
루이스는 조금 어색한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일단 곤란할 때는 웃는 얼굴이 최고다. 상대방도 얼떨결에 따라 웃게 될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미소를 마주한 이안의 입 끝도 함께 호선을 그린다.
뭔가 미묘하긴 했지만, 어쨌든 서로 마주 보며 웃는 것만은 틀림없다.
자, 이제 자연스럽게 퇴장하자.
전하. 왜 여기에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쪼록 즐거운 남주 생활을 영위하시길 바라요.
그럼 조연은 이만 갈게요.
루이스는 이안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뒷걸음을 쳤다.
무사히 복도까지 물러난 루이스는 곧 완전하게 문을 닫았다.
철컥.
루이스는 문고리를 쥔 채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얼굴에 새겼던 억지 미소는 금방 지워졌다.
그리고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문패를 확인했다. 혹여 잘못된 장소로 찾아간 건가 싶어서 말이다.
‘학생회’
맞게 찾아왔잖아?!
‘원작에서 이안이 학생회에 있었던가?’
단언컨대 아니다.
그녀가 책을 읽은 지 수십 년이 되었다지만,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일단 그의 캐릭터 성에 어긋나지 않는가.
이안 오드모니얼 크론드.
그의 본질은 아무도 신뢰하지 못하는 고독한 황태자다.
얼굴에 그리는 미소도 진심이 아니며, 이득 없는 농담을 건네는 일도 없다.
그에게 접근하는 이들은 모두 그의 마음을 떠보고, 이용하려는 자들뿐.
그건 그를 사랑했던 원작의 루이스도 다르지 않아서, 그와 혼인함으로써 귀족 사회에 가장 화려한 방식으로 편입되고 싶어 했다.
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이라고는 여자 주인공인 스텔라 라피스가 유일했다.
그러니 그는 이곳 아카데미에서, 그녀와 광폭할 정도로 어울렸다.
여기에 ‘광폭’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결코 과장이나 허풍이 아니다.
‘아카데미의 가짜연인’은 #집착남 #순정남 #후진_불가 #고개_돌리지_마 라는 키워드로 가득 채워질 정도였으니까.
그러니 그가 ‘많은 학생과 교류하고 관계하는’ 학생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조금 기묘했다.
‘뭐,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나쁜 일도 아니다.
이안이 학생회에서 일하면,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스텔라와 조금 더 개연성 있게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어쨌든 여기엔 얼씬도 하지 말자.’
이 문 너머에 있는 것은 지옥 길의 입구다.
아니, 지옥의 최종 보스가 ‘어서 배드엔딩을 맞이하러 오렴’이라며 깔아 준 루이스 전용 고속도로다.
그런 곳에 발을 들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잠시 제 금빛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어쩐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바람의 협찬을 받아서 반짝반짝했던 이안의 미소 말이다.
물론 새삼스럽게 그에게 반했다거나 멋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절대로!
다만 오랫동안 친구로 지낸 경험 덕분에 알아차린 것이 하나 있었을 뿐이다.
루이스는 다시 문고리를 쥐었다. 잠시 고민했지만,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다.
이안은 여전히 창가에 서 있었다.
다만 조금 전과는 달리, 등을 돌린 채 말없이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그게 뭔지는 몰라도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었을 거고.
루이스를 만났을 때 보여준 그 상큼한 미소는…….
‘드물긴 하지만, 도움이 필요할 때나 짓는 표정이니까.’
다시 학생회실로 들어선 그녀는 조용히 이야기를 걸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그는 바로 돌아보지 않았다.
루이스는 빛과 그림자로 채색된 그의 등을 바라보며 조금 더 기다렸다.
몇 초 더 지나자, 비로소 그가 돌아보았다.
“꽃을……고민하고 있었지.”
“꽃이요?”
“그래.”
그는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한 듯 제 턱을 조금 만지작거렸다.
“새 학기에는 새 학기의 파티가 필요하지. 그리고 파티에는.”
“꽃이 필요하죠.”
“잘 아는군.”
이안이 흡족하다는 듯 미소 지었기에, 루이스는 조금 안심했다.
아무래도 조금 전에 루이스의 열렬한 뒷걸음질은 그다지 마음에 담아두지 않은 모양이다.
“파티에 사용할 꽃을 찾으신다면, 장소나 분위기를 고려해야죠. 일단 이 근처의 화원에서.”
루이스가 찬찬히 설명하는 동안 이안은 느린 걸음으로 루이스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바로 앞.
서로의 발끝이 닿을 듯 가까이 말이다.
“취급하는 목록을 확보하고……? 전하?”
“……그 호칭은 오늘도 붙어 있군.”
“아.”
루이스는 잠시 제 입가를 가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습관이란 쉽게 고쳐지지 않는 모양이에요.”
루이스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그와 적절한 간격을 유지했다.
“정말 그런 모양이야. 이거, 정말 주의해야겠는걸.”
물론 이안은 긴 다리로 단번에 두 사람의 거리를 좁혀왔다.
루이스가 소심하게 뒷걸음질 쳤으나 곧 문에 막혀 더는 물러날 수 없었다.
막다른 길이라니.
루이스는 체념하고 고개를 슬며시 들어 올렸다.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운 시선이 그녀의 얼굴로 지독하게 내리꽂히고 있었다.
“그대가 나를 보자마자 뒷걸음질 치는 새로운 습관이 들지 않도록 말이야.”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말의 숨은 뜻은 즉 이거일 터다. (아마도)
「감히 이 몸의 곤란한 얼굴을 보고 뒷걸음질 치다니. 네 삶을 지옥으로 끌어내려 주겠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인간이란 말인가.
이 남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루이스 스위니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건 그다지 큰일도 아니다.
루이스는 제 삶을 지옥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비굴한 미소를 끌어 올렸다.
“고, 곤란한 사람을 두고 도망치다니, 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렇지?”
이안은 비교적 친절하게 웃고는 한쪽 팔을 루이스의 머리 위로 기대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루이스는 조금 겁을 먹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그의 그림자에 갇혀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쳤지, 루이스 스위니.
저 사람의 곤란함 따위 무시하고 지나가는 게 옳았어. 옳았다고!
“실은 조금 전에 말이야. 꽃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으니, 마침 좋은 조언자가 왔다고 생각했었거든.”
‘마침 좋은 조언자’란 루이스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녀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사업을 돕기 위해, 온실에서 여러 꽃과 나무를 공부하곤 했으니까.
“물론 저는 언제라도 협조할…….”
“그런데 눈이 마주치자마자 뒷걸음질을 치더니, 곧 문이 닫히더군.”
“…….”
“쿵! 하고 말이야.”
그는 단순히 ‘문이 닫힌다.’는 표현에 만족하지 못한 듯, 굳이 그 소리까지 덧붙였다.
“그, 그렇게까지 세게 닫지는 않았어요. 달칵, 하며 살살 닫았죠. 아마도요…….”
물론 소심한 항의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그래. 달칵하고 문을 닫았지. 하지만 무시당할 정도로 그대에게 실수한 기억은 없는데.”
그건 무시가 아니라 도망이었습니다. 생존을 위한 초식동물의 행동강령이었다고요!
“낮은 난간으로 돌진하는 걸 온몸으로 막아 준 기억은 있지만 말이야.”
“그건 감사해요.”
“우리의 관계를 비밀로 하자는 제안에도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그것도 감사했죠.”
“그런데 왜.”
이안이 허리를 깊이 숙여 루이스의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했다. 간격은 더욱 좁아졌다.
서로의 여린 숨이 얼굴에 닿을 정도로,
“도망가지?”
공포감으로 루이스의 눈가가 부르르 떨렸다.
일단 너무 가까웠다. 게다가 당장 잡아먹어버릴 것만 같은 이 눈빛이라니.
루이스는 어둡게 그늘진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도망이 아니라…….”
말끝이 미묘하게 떨렸다.
“제가 제대로 찾아왔는지 확인한 것뿐이에요.”
루이스는 어색하게 웃는 낯으로 ‘아시잖아요. 아직 교내에 낯설어서요.’라는 변명을 덧붙였다.
“무엇보다 제가 곤란해 하는 친구를 내버려둘 리 없잖아요.”
그 증거로 이렇게 착실하게 지옥의 고속도로 위에 올라서, 절찬 행진 중이기도 하고 말이다.
“친구?”
“……친구라는 말은 좀 이상한가요?”
“아니, 딱히 나쁘진 않아. 틀린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대와 나 같은 관계를 세간에서는 소꿉친구라고 부르는 모양이니까.”
아뇨, 소꿉친구와는 몹시 다릅니다.
하지만 전하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오늘부터 그런 거로 생각하겠습니다.
루이스는 제 내면에 자리한 소꿉친구의 정의를 기꺼이 정정했다.
‘소꿉친구 [명사] 한쪽이 다른 쪽의 인생을 언제라도 파탄 낼 수 있는 위험한 관계.’
이렇게 단어 하나의 의미를 내어주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그녀의 인생에서 꽃길 사수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그대의 입으로 친구라고 말해주니 한결 안심되는군. 난 또 ‘전 약혼자’의 얼굴이 보기 불편해서 도망가는 ‘전 약혼녀’인 줄 알았거든.”
그냥 당신을 불편하게 여기는 조연A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셨군요.
어쨌든 루이스는 그가 친구라는 관계에 동의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니저쩌니해도 이안은 정이 깊어서 제 친구에게 잔혹한 짓은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설마요. 조금 전에는 전하, 아니 이안이 학생회에 계시다고 말씀해 주시지 않아서, 놀란 것뿐이에요.”
“내가 말 안 했던가?”
“안 하셨죠.”
만약 알았다면, 학생회 권유를 받았을 때 바로 폭풍 후진을 했을 거다.
“그건 미안하게 되었군.”
이안은 비로소 그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가볍게 팔짱을 끼우고 한결 친절해진 얼굴로 루이스를 내려다보았다.
“모든 학생이 다 아는 사실을 소중한 내 친구께서 모르고 계실 줄은 몰랐거든.”
“소문에 달린 발이 제게 올 때는 게으름을 피우거든요.”
“그렇겠지.”
귀족도 평범한 평민도 아닌 그녀에게 이런 사소한 소문이 들어갈 리 없었다.
“어쨌든 설명하자면, 부족하나마 학생회장을 맡게 되었어.”
“부족할 리 없잖아요.”
학생회장이란 곧 학생 중 최고 권력과 의무를 지녔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건 그의 실제 지위와 꽤 비슷한 것이 아니던가.
“부족하지. 그러니 학생회라는 명목으로 늘 도움과 구원을 받는 거고.”
“든든한 사람들과 함께하시니 좋으시겠어요.”
루이스는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 이야기했다. 어쨌든 아직 도망칠 구석은 만들어 두고 싶었다.
“그렇지?”
이안이 빙긋 웃으며 묻기에 루이스는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든든한 내 소꿉친구께서도 이제 그 일원이 되실 테고.”
윽. 단번에 도망칠 구석이 사라지고 말았다.
“참 좋은 전통이란 말이야. 수석을 차지한 사람이 학생회에서 봉사한다는 규칙은.”
구시대의 유물 같은 규칙이죠.
“설마 구시대의 유물 같은 규칙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루이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대답했다.
“그, 그럴 리가요!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구시대의 유물은 존중받아 마땅한걸요!”
“잘 알고 있다니 다행이야.”
결국, 이렇게 붙잡히고 마는 건가.
“그대에게 나쁜 경험은 아닐 거야. 루이스 스위니의 가치를 다른 가문에게 증명할 기회가 되겠지.”
“제…… 가치요?”
“그래. 이 아카데미에는 귀족 가문의 후계자라면 질릴 정도로 많이 있으니까.”
루이스는 이안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회장을 맡으신 건가요?”
“……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나, 말인가?”
이안은 가늘게 웃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루이스 스위니는 참 별난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잘 던진다.
감히 황태자께 ‘가치 증명’을 운운하다니 말이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뭔가 달라지셨네.’
그러니까 원작과는 말이다.
이렇게까지 향상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 * *
루이스는 결국 학생회의 새로운 일원으로서 인사를 해야 했다.
학생회의 분위기는 꽤 단란한 느낌으로, 작은 취미 모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어렵지는 않을 거야. 다른 학생들이 학교생활을 충실하게 할 수 있도록 돕는 것뿐이니까.”
어제 만났던 클레어 이리스가 가벼운 말로 루이스를 독려했다.
“주로 어떤 일을 하죠?”
“다양하지. 행사를 주관하기도 하고, 주기적인 봉사활동도 해. 억울한 일을 당한 학생이 있을 때는 함께 싸워주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일은.”
클레어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무척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학생 식당에서 끔찍한 메뉴가 나오지 않도록 늘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지.”
“…….”
“생각해 봐. 여기는 외딴 섬 같은 장소잖아? 학기 중에는 멋대로 외출할 수도 없는 환경에서, 초콜릿을 발라 구운 가지와 당나귀 꼬리털 요리 같은 것이 나온다고 생각해 봐.”
루이스는 흙수저부터 소설 빙의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산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 요리에 비하면 그녀의 삶은 지극히 평범하다.
“만나고 싶지 않은 메뉴네요.”
“그렇지? 관리 부인께서는 가끔 그런 메뉴를 고안해 내신단 말이야. 초콜릿을 바른 가지 구이는 실제로 작년 식단표에 올라왔었고.”
루이스가 그 맛을 상상하며 얼굴을 찌푸리자, 클레어는 손사래를 치면서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식단표는 일주일씩 먼저 제공되고, 우리는 언제나 불의의 메뉴에 저항해오고 있으니까. 예를 들어.”
“그리고 또 무슨 일을 하죠?!”
클레어가 또 다른 기이한 메뉴를 소개할 기세였기 때문에 루이스는 얼른 다른 쪽으로 이야기를 돌렸다.
“마침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저……요?”
“응. 나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네게 맡겨야겠네. 괜찮겠지, 회장님?”
클레어는 잠시 시선을 돌려 이안을 바라보았다.
가장 상석에 앉아있던 그는 천천히 한쪽 다리를 꼬며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뭐, 괜찮지 않겠어? 루이스 스위니의 가치를 증명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테니.”
그의 허락에 클레어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학생회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제 가치를 증명할 필요가 있으니까.”
대체 무슨 일일까?
어쩌면 학교 전체의 화단을 새롭게 가꾸는 일 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교내에서 자라는 식물에 대한 도감을 만드는 일이나.
“네가 맡을 일은.”
루이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쓸데없이 긴장이 들었다.
“폐강 위기에 놓인 수업을 구하는 일이야.”
척 들어서 이해가 가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루이스는 가만히 되물었다.
“……네?”
“아카데미에는 인기 있는 수업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수업도 있거든.”
그야 그렇겠지.
루이스는 아직도 대한민국에서 들었던 물리 수업에 대해 저항감을 가지고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인기 없는 수업을 진실로 원하는 학생도 있는 법이야. 그 학생들은 수업이 폐강되면 무척 슬퍼할 테고.”
“즉.”
루이스는 침착하게 클레어의 말을 정리해 보았다.
“폐강을 막기 위해 머릿수를 채우란 말인가요?”
“그렇지.”
대체 그 어디에 루이스의 가치가 증명되는 일이 있단 말인가!
아무라도 숫자만 채우면 그만 아닌가. 그건 딱히 루이스가 아니더라도!
“이게 어떻게 네 가치가 증명되는 것과 관계가 있냐는 얼굴이군.”
이안이 턱을 괴며 삐딱하게 웃었다.
“전……!”
“인기가 없는 수업은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간단하지 않은가?”
인기가 없는 이유? 그런 거야 뻔하다.
“지독히도 어려운 수업이겠죠. 설명은 지루하고, 게다가 성적은…….”
더럽게 짜게 주는 거겠지.
물론 그 지독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훌륭한 성적을 일궈 내는 것은 그녀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 되긴 할 것이다.
루이스는 울상을 지었다.
그녀가 이 아카데미에서 바라는 건 딱 두 가지뿐이었는데.
하나는 이안과 조금 더 멀어지는 것.
다른 하나는 이대로 수석을 유지하고 최고의 학생이라는 명예를 누리며 졸업하는 것.
아무래도 학생회는 배드엔딩까지 향하는 고속도로가 아니라, 그냥 배드엔딩이었던 모양이다.
역시 이번 생도 망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