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있는 시녀님-53화 (54/54)

Chapter 3

라엘과 파르고섬에서 헤어진 지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다.

“한 달 뒤, 그대의 생일 때 보도록 하지. 최고의 생일을 보내게 해줄 테니 기대하도록.”

당시 라엘은 헤어지며 한 달 안에 모든 급한 국정을 해결한 후 클로얀 왕성에 방문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약속했던 그녀의 생일이었다. 하지만 라엘은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어쩔 수 없지. 사실 무리한 약속이었어.’

마리는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편지를 바라보았다. 라엘이 보낸 편지에는 새롭게 제국에 급한 문제가 생겨 도저히 몸을 뺄 수 없음이 적혀 있었다.

미안하다, 정말로.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그대에게 가도록 하겠다.

서신에는 함께 하지 못하는 미안함과 속상함이 가득 적혀 있었다.

“하아.”

마리는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서신을 곱게 접어 서랍에 집어넣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당연히 함께하기 힘들 것이라 예상하긴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와 함께 생일을 보낼 수 있기를 살짝 기대했었나 보다. 괜히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괜찮아. 다음에 따로 기념하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말자.”

마리는 고개를 저으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었다. 그때, 그녀의 일정을 관리하는 비서관이 노크 후 집무실로 들어왔다.

“전하, 축하 연회 준비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아, 네. 저도 채비하도록 할게요.”

오늘은 그녀의 생일인지라 연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사실 마리는 조용히 생일을 넘길 생각이었지만, 대신들은 물론 백성들도 그럴 수 없다고 펄쩍 뛰었다. 왕국에서 누구보다도 존경받고 사랑받는 국왕의 생일이니 다들 크게 축하하고 기뻐하고 싶어 했다. 아직 한참 왕국을 재건하는 중이라 호화로운 연회가 열리지 않는 평소와 다르게 오늘은 큰 연회와 축제가 예정되어 있었다. 마리는 시녀들의 시중을 받아 단장하고는 연회장으로 향했다.

“에스코트해 드리겠습니다.”

마침 키에르한은 갑자기 영지에 문제가 생겨 자신의 영지로 떠난 상태였다. 그래서 바르한 백작이 그녀의 에스코트를 담당했다.

“오, 오늘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바르한은 곱게 차려입은 마리를 보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빈말이라도 고마워요.”

마리는 웃고는 바르한과 함께 연회장에 나섰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연회장에 모인 귀족들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클로얀 왕국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그녀의 덕이었다. 그녀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이런 부흥은커녕 재건의 꿈도 꾸지 못했을 거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녀의 헌신을 알기에 진심으로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고 기뻐하였다.

“전하께 영광을!”

“신께서 전하를 축복하기를 바랍니다.”

연회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모두 형식적이 아니라, 정말 가족의 생일을 맞은 것처럼 기뻐하였다. 그녀의 생일을 기뻐하는 건 귀족과 대신들만이 아니었다. 일반 백성들도 거리에서 축제를 열어 마리의 생일을 기념했다. 커먼성 여기저기서 기쁨의 함성이 터져 나왔고, 백성들은 왕성 앞에 모여들어 그녀를 축하하는 함성을 외쳤다.

“모리나 국왕 전하 만세!”

“생신 축하합니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마리는 왕성 성벽에 올라가 손을 흔들어 백성들의 외침에 화답했다.

“와아!”

“국왕 전하 만세!”

그녀가 모습을 보이자 백성들은 더욱 커다란 함성을 질렀다. 백성들이 평소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역사상 이렇게나 백성들의 사랑을 받은 왕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지켜보던 귀족 중 한 명이 감탄하며 말했다.

바르한이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역사상 전하 같은 국왕도 한 명도 없겠죠.”

“하긴. 그 말이 맞습니다.”

바르한의 말에 모두가 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축제는 기분 좋게 막을 내렸고, 마리는 너무 시간이 늦어지기 전 침소로 돌아왔다.

“편히 쉬십시오, 전하.”

“네, 백작도 수고하셨어요.”

방에 돌아온 마리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창밖에 보이는 거리에는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귀족들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역사상 이렇게나 진심 어린 축하를 받은 왕이 어디 있었을까? 국왕으로서 최고의 생일 축하 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마리도 그들의 진심 어린 축하가 기뻤다. 하지만 기쁜 와중에도 마음이 허전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수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아도 그가 곁에 없는 사실이 더 쓸쓸했으니까.

‘그가 일부러 안 온 것도 아니잖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괜히 마음 쓰지 말자.’

시녀의 시중을 받아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침실에 들어갔다. 애써 괜찮다고 마음을 달랬지만, 커다란 침대를 보니 또다시 라엘 생각이 났다.

‘그의 품에 안겨 잘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생일이라 그런지 자꾸만 라엘 생각이 났다. 그런데 침대에 누우려는 찰나였다. 등 뒤에서 믿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일 축하한다, 마리.”

“……!”

마리는 침대에 손을 짚은 자세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토록 바라던, 하지만 이 순간 절대 들을 수 없는 목소리였던 거다. 마리는 그를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자신이 헛소리를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더 선명하게 가까운 거리, 그녀의 바로 뒤에서.

“생일 축하한다. 늦어서 미안하다.”

마리의 눈이 커다래지는 순간, 부드러운 팔이 그녀를 등 뒤에서 감싸 안았다.

“내 소중한 마리. 사랑한다.”

“……란!”

믿을 수 없게도 정말 라엘이었다! 마리는 화들짝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천상의 화가가 그린 듯 아름다운 얼굴의 라엘이 따뜻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여기에 오신 거예요?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죠?”

마리는 제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가 않아 얼떨떨하게 말을 더듬었다. 동제국에 있어야 할 어떻게 여기에 와 있단 말인가?

“꿈이 아니다.”

라엘이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라엘의 손은 과거와 다르게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마리는 그제야 정말로 눈앞에 있는 이가 라엘인 것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분명 서신에서 못 오신다고…….”

거기까지 이야기한 마리는 전말을 눈치챘다.

“설마? 절 놀라게 하려고?”

라엘은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에게 깜짝 선물을 주고 싶었다.”

마리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오늘 그를 얼마나 보고 싶었는가? 정말로 최고의 선물이었다. 이렇게 그와 마주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너무나 행복해 그녀는 눈가가 화끈해졌다.

“하, 하지만 너무 무리해서 오신 것 아니에요? 일이 많으실 텐데…….”

그녀가 알기에는 도저히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해결할 수 있는 업무량이 아니었다. 라엘은 순간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어떻게 다 했다.”

“정말요?”

“사실 오른에게 조금 떠넘겼다. 많이는 말고, 조금.”

“……정말 조금 맞아요?”

“그래, 맞다. 그리고 그놈은 조금 더 일해도 돼.”

마리는 쿡쿡 웃음을 지었다. 왠지 조금만 떠넘기고 온 것 같지는 않지만 뭐 아무렴 어떠랴. 라엘은 잔잔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마주 그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서로 말없이 마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찰 정도로 행복이 차올랐다.

“마리.”

서로의 얼굴이 천천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부드러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입맞춤이 끝난 후 마리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늘 가슴이 떨리고 아찔한 감각이 들었다. 라엘은 여전히 뜨거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리는 괜히 민망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식사는 하셨어요? 음식을 내오라고 할게요.”

“괜찮다. 식사보다 가 봐야 할 곳이 있다.”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가 봐야 할 곳이라니? 라엘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오늘은 그대의 생일 아닌가? 그러니 그대의 생일을 축하해야지.”

“아니, 괜찮은데요?”

마리는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이미 그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다른 선물은 필요 없었다.

“내가 괜찮지 않아. 그대를 위해 몇 가지를 준비했으니 나갔다 오지.”

그러며 라엘은 말을 덧붙였다.

“오늘 그대가 최고의 생일을 보낼 수 있도록 해보지.”

“란?”

마리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따라 나섰다. 그대로 나가면 백성들이 알아볼 게 뻔하니, 변복한 상태였다.

밖에는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출발하도록.”

“네, 폐하.”

아무런 문양도 없는 마차였지만 마부가 무려 동제국 근위 기사였다. 마리는 자신의 생일을 위해 라엘이 무언가를 치밀히 준비했음을 눈치챘다.

‘급하게 오셨다면서 언제 이런 준비를…….’

“어디를 가는 거예요?”

“가 보면 안다. 멀지 않으니 곧 도착할 거다.”

마치 비밀 선물을 숨기듯 입을 다물어 마리는 더욱더 알쏭달쏭한 마음이 들었다. 마차는 축제가 한창인 거리를 지나 커먼성의 구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을 본 마리는 눈을 크게 떴다.

“공연장?”

건물 앞에는 ‘빈센 공연장’이란 팻말이 걸려 있었다.

“내려오지.”

라엘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마리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이곳에 오신 거예요?”

“그야 공연을 보여 주려고 온 거지.”

“하지만…….”

그녀가 알기로 이 빈센 공연장에서 열리는 중요 공연은 없다. 아니, 애초에 이름조차 처음 들을 정도로 유명하지 않은 곳인데, 이곳에서 무슨 공연을 한다고?

“들어가 보면 알 것이다.”

고개를 갸웃하며 공연장에 들어간 마리는 깜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들이 건물 안에 있었던 거다!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동제국 황실의 악장, 바한이었다. 저 온화한 인상의 젊은 음악가는 그녀의 시녀 시절 인연이 깊었던 이였다. 바한뿐이 아니었다. 동제국 황실 악단의 중요 멤버들이 모두 모여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리는 놀란 얼굴로 라엘을 바라보았다.

“황후의 생일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라엘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그가 공연장에 준비한 선물은 고작 황실 악단의 공연뿐이 아니었다. 더 커다란 선물이 있었다.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의젓한 어린 목소리. 마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인형처럼 귀엽게 생긴 꼬마, 오스카 황자였다.

“오스카 전하! 어떻게 여기에?”

마리는 반가운 얼굴로 오스카의 손을 잡았다.

“설마 저 축하해 주러 온 거예요?”

“아,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주변에 볼일이 있어서…….”

“볼일요?”

오스카는 민망한지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라엘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대의 생일을 축하하러 간다고 했더니 자신도 따라가게 해달라고 부득부득 우기더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데려왔다.”

“혀, 형님.”

오스카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라엘을 바라보았다.

“그, 그게 아니라……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오스카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민망한지 허겁지겁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순간, 마리가 와락 오스카를 껴안았다.

“마, 마리? 아니, 황후 전하?”

“감사해요, 전하.”

생각지도 않은 포옹에 오스카의 몸이 뻣뻣이 굳어버렸다. 그의 얼굴이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먼 길 오기 굉장히 힘들었을 텐데, 나 때문에 이렇게 와 주고. 너무 고마워요.”

“괘, 괜찮…….”

그때, 라엘이 불퉁한 목소리로 둘 사이를 끼어들었다.

“오랜만에 봐서 기쁜 것은 알겠지만, 너무 반가워하는 것 아닌가?”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마리는 쿡쿡 웃음을 지었다.

“설마 오스카 전하한테 질투하는 거예요, 란?”

이전부터 이어진 인연 때문인지 마리는 오스카카 친동생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라엘의 동생이기도 했고. 하지만 라엘은 아무리 피를 나눈 동생이라도 그녀와 포옹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듯했다.

“당연히 질투하지. 그대는 오로지 내 것이니까.”

“그, 그게 뭐예요. 오스카 전하도 듣고 있잖아요.”

마리는 민망한 얼굴로 오스카와 떨어졌다.

“어쨌든 대충 준비된 것 같으니 앉지.”

마리는 공연장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관객은 오로지 그녀 혼자. 오직 그녀만을 위한 공연이었다. 라엘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의 첫 번째 선물이다. 생일 축하한다, 마리.”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악기를 잡고 연주를 시작할 준비를 하였다. 연주 시작 직전 무대가 침묵에 잠겼고, 객석에 앉은 마리는 묘한 긴장감이 차올랐다.

“존경하옵는 황후마마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첫 번째 연주 시작하겠습니다. 오로지 황후마마께 바치는 헌정곡입니다.”

악장 바한의 신호와 함께 연주가 시작되었다.

‘무슨 곡이지?’

처음 듣는 곡이었는데, 대단히 훌륭한 곡이었다. 기교적으로 복잡하다기보다는 굉장히 서정적인 감성을 담고 있는 느낌이랄까? 생일에 걸맞게 밝으면서도 따뜻한 느낌의 멜로디가 공연장 안을 흘렀다. 차오르듯 고조되는 선율이 마치 천사의 축복처럼 그녀의 가슴을 감싸 안았다. 마리는 아름다운 선율에 취해 음악을 감상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라엘을 바라보았다.

“혹시 이 곡 폐하께서?”

라엘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를 생각하며 틈틈이 작곡해 봤다. 들을 만했으면 좋겠군.”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렇게 그녀만을 위한 공연을 열어준 것도 모자라 직접 곡까지 작곡하다니.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 가슴속에서 차올랐다.

“……힘드셨을 텐데, 왜 그러셨어요.”

라엘이 따뜻한 눈으로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대를 위하는 일이니까. 전혀 힘들지 않았다.”

그때 곡의 단락이 끝났고, 무대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오스카가 바이올린을 들더니 무대 위로 올라간 것이다.

“오스카 전하?”

“그대를 위한 공연을 한다니 자신도 꼭 끼워 달라더군. 뭐, 한참 부족하긴 하지만 들을 만은 할 거다.”

오스카는 푸른 눈동자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더니 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이 떨리며 부드러운 음색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

훌륭한 솜씨였다. 나이가 어린 만큼 기교적으로 부족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굉장히 아름다운 음색이 바이올린에서 흘러나왔다. 과연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라엘의 동생답다고 할까? 오스카도 음악에 뛰어난 소질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했지.’

오스카가 연주하는 선율에 맞춰 오케스트라단의 음이 보조하듯 따라갔고, 음악은 점차적으로 클라이맥스로 향해갔다.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떨렸다. 오로지 그녀만을 위한, 그녀를 축복하는 멜로디로, 감동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란.”

마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음악의 단락이 끝나는 그 순간, 또다시 생각지도 못 한 일이 일어났다. 곁에 앉아 있던 라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던 거다.

“란?”

그는 대답 대신 부드럽게 그녀를 향해 미소 짓더니 무대를 향해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설마?’

라엘의 의도를 깨달은 마리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무대 가운데에 자리한 피아노 앞에 앉은 것이다!

“마지막 곡으로, 세레나데입니다. 이번 곡은 폐하께서 직접 연주해 주시겠습니다.”

라엘은 잠시 마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입을 열지 않았지만 눈빛만으로도 그녀는 그가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한다고.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하고 아낀다고.

그 마음은 피아노 선율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사랑을 고백하는 세레나데. 그 부드럽고 감미로운 선율이 그녀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결국, 벅차오르는 감동에 마리는 눈시울을 붉혔다.

‘이건, 너무 반칙이잖아.’

마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지금껏 들은 공연 중 최고의 공연이었고, 또한 최고의 생일 선물이었다.

라엘의 선물은 공연이 끝이 아니었다. 또 다른 선물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란, 이번에는 어딜 가는 거예요?”

“금방 도착한다. 거의 다 왔다.”

마차가 멈춘 곳은 커먼성 교외의 한 저택이었다. 처음 와 보는 곳인지라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는 어째서?”

“제대로 된 생일 연회를 열어야지.”

“네?”

저택 안으로 들어간 마리는 라엘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응접실에 온갖 음식이 차려져 있었던 거다. 마치 연회가 열리려는 것처럼.

“란, 이 음식은?”

마리는 음식을 훑어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성스럽게 차려진 요리들은 모두 그녀가 좋아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미 연회를 하고 온 것은 알지만, 그래도 단둘이 다시 한번 축하해 주고 싶었다.”

“……란.”

라엘이 자신의 품 안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마리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심정이 들었다. 아까 공연부터 이 정성스러운 음식까지.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기쁘고 고마웠다.

“그리고 여기 선물을 준비했다.”

“선물이요?”

곧 시종이 고풍스럽게 장식된 상자를 들고 왔다. 의아한 얼굴로 상자를 열어 본 마리는 깜짝 놀란 얼굴을 하였다.

“란, 이거는……?”

수많은 보석으로 장식된 목걸이였다. 목걸이 정중앙에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매달려 있었는데, 난생처음 보는 크기의 커다란 다이아몬드였다. 마리는 도대체 얼마일지 짐작도 되지 않는 보석의 모습에 말을 더듬었다.

“란, 이건 너무 귀한 선물인데요?”

자신을 위해서는 조금의 사치도 허락하지 않는 라엘이었다. 그런데 저런 진귀한 선물이라니.

“괜찮다.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니, 그냥 받도록.”

“하지만…….”

마리는 목걸이를 받아들기 꺼려졌다. 물론 황제인 그가 이런 지출을 한다고 돈이 모자랄 리는 없겠지만, 비싸도 너무 비싼 선물이라 선뜻 받을 수가 없었다.

“그대는 내가 목숨보다 아끼는 황후이다. 그러니 이 정도는 받아도 돼.”

그래도 여전히 목걸이를 받지 못하는 마리를 보며 라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황제와 왕이었다. 어찌 보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이들. 하지만 서로 검약이 몸에 배어 저런 선물을 쉽게 받지 못하는 거다. 결국, 라엘은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이렇게 말하였다.

“클로얀 왕국을 통해 새롭게 교역로를 만들면서 이득이 많이 남았어. 그 이득으로 구한 것이니 부담 갖지 말도록.”

그제야 마리는 주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엘은 직접 목걸이를 걸어 그녀의 목에 걸어주었다.

“어때요? 어색하지 않아요?”

마리는 어색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국왕이지만 워낙 왕국의 상황이 빈궁하다 보니 이렇게 비싼 목걸이는 할 기회가 없었다. 라엘은 잠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부끄러운 듯 목걸이를 어루만지는 모습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아주 예뻐. 잘 어울린다.”

“정말로요?”

“그래,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답다.”

마리는 그의 말에 피, 하고 웃었다. 하지만 라엘은 진심이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목걸이를 한 마리는 그가 지금껏 봐 온 그 어떤 여인보다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그러면 춤이나 한 곡 추겠나? 그대의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로.”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역시 오로지 그녀만을 위하는 단둘의 연회였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음악이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그들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행복해.’

마리는 그의 품에 안겨 춤을 추며 중얼거렸다.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하는 그의 마음이 너무 기쁘고 행복했다.

그렇게 그들은 둘만의 행복한 연회를 마치고 마차에 올라탔다.

“란? 또 어디로 가는 거예요?”

마리는 마차가 왕성으로 향하지 않자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선물.”

“선물이 또 있다고요?”

마리는 놀란 얼굴을 하였다. 이미 넘칠 만큼 받았는데, 무슨 선물을 또?

“오늘의 마지막 선물이다.”

마차는 왕성이 아니라, 교외 방향으로 조금 더 달려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추어 서자 마리는 탄성을 뱉었다.

“란, 설마? 마지막 선물이라는 게?”

“그래, 맞다.”

마리는 마차 밖을 바라보았다. 환하게 떠오른 달빛 아래 잔잔한 호수가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잔잔한 물결과 밤하늘을 배경으로 떠 있는 수없이 많은 별빛.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정경을 보며 마리가 말했다.

“……이전에 제가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하셨군요.”

이 호수의 이름은 블레스틴 호수였다. 달이 환하게 뜬 보름날, 사랑하는 이와 오면 행복한 평생을 보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곳으로, 이전에 그녀가 라엘에게 함께 오고 싶다고 지나가듯 말했던 곳이었다. 라엘은 그 스치듯 한 이야기를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가, 오늘 이렇게 생일을 맞아 그녀를 데려온 것이다. 라엘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별장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한잔 괜찮겠나?”

“네.”

그는 미리 준비해 둔 와인을 꺼내었다. 동제국에서 특별히 가져온 최고급 와인이었다.

“다시 한번 그대의 생일을 축하하며.”

둘은 가볍게 건배하고 와인을 마셨다. 마리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깊고 고요한 밤 호수가에서 그와 술잔을 기울이다니.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렇게 둘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별장에서 밤을 지새웠다. 마리는 별장 침대에서 그의 어깨에 기댄 채 호수를 바라보았고, 달빛에 고요하게 빛나는 물결을 바라보며 잠이 들었다.

“좋은 꿈 꾸도록.”

“……네, 란. 너무 고마워요. 오늘 생일 평생 못 잊을 거예요.”

마리는 잠에 취해 몽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엘은 얼른 자라는 듯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앞으로도 늘 행복하게 해줄 테니, 편히 잠들도록.”

마리는 배시시 웃고는 잠이 들었다. 라엘은 자신의 품에서 새근새근 잠든 그녀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벅찬 감정이 차올랐다. 그녀야말로 그의 모든 것이자 행복이었다. 라엘은 한참이나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꼭 붙어 잠이 들었다.

* * *

행복한 하루를 보냈는데 어째서일까? 기묘하게도 둘은 모두 비슷한 꿈을 꾸었다. 서로를 만나기 전, 과거의 꿈을 꾼 것이다.

「이 못난 아이가 내 동생이라고?」

「뭐야, 엄청 볼품없잖아? 천한 핏줄이라 그런가?」

클로얀 왕성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꿈이었다. 당시 그녀는 불행했다. 모든 이가 그녀를 외면했고, 통원의 궁에 강제로 유폐당한 채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쓸쓸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오로지 책을 읽는 것만이 그녀의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그때 읽었던 풍부한 독서량은 훗날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마리는 하루하루를 괴롭고 쓸쓸하게 보내야만 했다.

괴로운 시간은 동제국의 황실로 끌려가서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급 시녀로 위장한 그녀는 모진 구박을 받으며 일해야 했다.

‘아, 저때 정말로 힘들었지. 하루도 안 혼났던 적이 없는데.’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꿈속에서 중얼거렸다. 그렇게 그녀가 지금껏 겪어 왔던 일들이 꿈속에서 마치 영상이 스쳐 지나가듯 떠올랐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의 삶이 뒤바뀌는 장면이 꿈속 영상으로 떠올랐다. 바로 죄수를 만나는 장면. 죄수의 기도를 받은 후 그녀는 신비한 능력을 받게 되었고, 이후로 그녀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그리고 죄수와의 만남만큼이나 그녀의 삶을 극적으로 바꾸었던 또 다른 만남. 그 장면도 꿈속에서 떠올랐다.

‘아…….’

마리는 나직이 탄성을 뱉었다. 바로 라엘과의 만남이었다. 죄수와의 만남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더 그녀의 삶을 뒤바꾼 만남이었다. 그렇게 마리가 꿈을 꾸고 있을 때 라엘도 과거의 일을 꿈꾸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이 아이만큼은……! 제발……!」

가녀린 인상의 여인이 냉철한 중년 남자에게 엎드린 채 부르짖었다. 라엘은 꿈속에서 그 장면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여인은 그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아직 어렸던 라엘을 품 안에 안은 채 남자에게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아들의 목숨만은 살려 주길. 하지만 냉철한 느낌의 중년 남자는 냉소를 흘릴 뿐이었다.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 남자는 라엘의 아버지인 토른 2세였다. 라엘은 토른 2세로 인해 지옥과도 같은 유년기를 보내야만 했다.

결국, 아들을 지키고자 했던 어머니는 토른 2세의 손에 누명을 쓰고 죽음을 맞았다. 그와 같은 배에서 난 소중한 누이는 토른 2세의 방관 속에서 형제들에게 독살당했다. 라엘도 죽음의 위협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무도 그가 살아있길 바라지 않았다. 형제들은 토른 2세의 방관 혹은 은밀한 지원 속에 라엘을 수도 없이 죽이려 시도했다.

그렇게 지내온 세월이 십수 년. 하늘이 도운 걸까?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순하기만 했던 어린아이는 수도 없는 죽음의 위기를 거치며 조금씩 변해 갔다. 살아남기 위해 조금 더 차가워졌고, 냉혹해졌다. 이윽고 그의 모든 불행의 원흉이었던 토른 2세가 갑작스러운 급환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당시의 황태자였던 1황자는 토른 2세가 쓰러지자마자 바로 군사를 일으켜 라엘을 죽이려 했다. 라엘은 친우였던 오른과 키에르한의 은밀한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변방으로 도망가 세력을 규합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황자들의 내전이었다. 그 치열한 내전에서 라엘이 승리할 거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엘은 모든 황자를 통틀어 가장 보잘것없는 세력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승리했다. 모든 황자의 목을 쳤고 자신을 거스르던 귀족들을 모두 무릎 꿇렸다. 그 과정에서 무수히도 많은 피가 흘렀다. 시체가 끝없이 줄을 이었고, 피가 강을 이루어 흘러내렸다. 그는 살아남았고 승리했으나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려 버렸다. 모두가 그를 괴물을 보듯 두려워했다. 철가면을 쓰고 다녔던 것도 그래서였다. 얼굴을 가리는 철가면을 쓰지 않으면 도저히 피의 무게를 견딜 수가 없었다.

스스로 지고지순한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는 오로지 내전 때 흘린 피를 갚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갔다. 무리인 것을 알면서도 쉬지 않고 일하고 또 일했다. 마치 자신을 혹사하듯. 그것만이 자신이 흘린 피를 속죄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가 흘린 피의 무게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밤마다 지독한 악몽에 시달렸고, 그의 영혼은 하루하루 말라 갔다.

‘생각해 보니 단 하루도 행복했던 적이 없군.’

라엘은 꿈속의 내용을 보며 씁쓸히 생각했다. 그래, 태어나서 단 하루라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꿈속 어느 장면을 봐도 즐거웠던 기억이 없다. 모두 지옥과도 같았던 나날.

얼마나 시간이 지난 후일까? 꿈속에서 그의 삶이 바뀌는 장면이 나타났다.

「너는……?」

「마리라고 합니다.」

바로 마리와 만나는 장면이었다. 그의 삶은 그 날을 기점으로 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꿈속 흑색 장면이 환하게 밝아졌다.

라엘은 햇살을 받으며 눈을 떴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늦잠을 잔 것인지 해가 높이 떠 있었다. 라엘은 침대 옆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마리?’

간밤에 꾼 꿈 때문일까? 갑자기 가슴이 비어버린 듯 덜컥 허전한 마음이 들어 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가니 1층에서 고소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아, 란? 일어나셨어요? 조금 더 주무셔도 되는데.”

마리는 주방에서 요리하고 있었다. 라엘은 그녀의 모습을 보자 괜히 안도감이 들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야말로 조금 더 자지, 왜 요리를 하고 있나?”

“늘 저한테 아침마다 요리해 주셨잖아요. 오늘은 제가 맛있는 것 해드릴게요.”

이리저리 손을 움직이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라엘은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

“라, 란? 잠시만요. 요리 중이잖아요.”

“괜찮다.”

“뭐가 괜찮…….”

하지만 마리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라엘의 입술이 뒤에서 그녀의 입술을 덮은 것이다.

“아, 란.”

막 깊은 입맞춤을 이어 가려 할 때, 갑자기 마리가 요리하던 음식에서 탄내가 피어올랐다.

“그, 그만!”

마리는 화들짝 정신을 차려 그의 품에서 벗어났고, 라엘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요리는 안 해줘도 괜찮은데…….”

“안 돼요. 잠시만 참으세요.”

그녀가 완강히 고개를 젓자 라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나 주방 앞의 탁자에 앉았다. 그러고 요리에 열중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세요?”

“그냥 좋아서.”

마리는 괜히 민망한 마음이 들어 얼굴을 붉혔다.

“올라가서 더 쉬고 계세요. 다 되면 부를게요.”

하지만 라엘은 일어나지 않고 계속 그녀만 바라보았다. 보고만 있어도 행복하다는 시선이라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못 말리는 남편이었다. 곧 음식이 완성되었고, 둘은 호수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하였다.

“음식은 먹을 만하세요?”

“당연히. 최고다.”

“빈말 말고요.”

“정말이야. 그대가 한 요리인데, 맛없을 리가 있겠는가?”

그녀는 요리에도 발군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최상급의 쉐프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솜씨였다. 물론 설사 그런 솜씨가 없다고 해도 라엘은 그녀가 해준 요리라면 세상 어떤 음식보다 맛있게 먹을 것이다.

“저, 라엘? 혹시 어제 안 좋은 꿈 꾸셨어요?”

“왜 그러지?”

“그냥…… 안색이 조금 안 좋은 것 같아서요.”

마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라엘은 치즈를 바른 빵을 씹으며 생각했다.

‘꿈이라. 안 좋은 꿈을 꾸긴 했지.’

과거의 꿈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꿈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별것 아니다. 괜찮다.”

마리는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라엘은 입꼬리를 들어 올리더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침 다 먹고, 왕성으로 출발하기 전에 잠시 근처 산책이나 할까?”

“네, 좋아요.”

아침 햇살을 받은 호수는 고요한 밤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둘은 나란히 손을 잡고 햇빛에 찬란하게 빛나는 물결을 바라보며 호수 주변을 걸었다. 특별한 대화 없이도 함께 걸음을 걷는 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즐거웠다.

“저 어제 사실 안 좋은 꿈을 꿨어요.”

“무슨 꿈?”

“이전 왕성에 유폐되었을 때의 꿈이요.”

라엘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의 기억이다. 라엘은 그녀의 상처를 감싸 주듯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괜찮은가?”

“네, 괜찮아요.”

마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당신이 제 곁에 있으니까요. 그런 과거쯤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라엘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리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떠올랐다.

“사실 나도 어제 안 좋은 꿈을 꿨었다.”

“정말요?”

라엘은 간밤에 꾼 꿈을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마리의 눈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그런…… 괜찮으세요?”

“괜찮다.”

라엘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이전이라면 힘들어했겠지만 이제는 그대가 내 곁에 있으니까. 그러니 아무렇지도 않다.”

“……란.”

라엘은 잔잔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 시선을 돌려 호수를 바라보았다.

“난 지금 굉장히 행복하다. 그러고 그대와 함께하는 한 영원히 행복하겠지.”

마리도 고개를 돌려 호수를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연인과 방문하면 평생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이야기가 깃든 호수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네, 저도요. 저도 앞으로 영원히 행복할 거예요. 당신과 함께이니까.”

둘은 그렇게 손을 잡고 호수를 바라보았다. 찬란한 햇빛과 선선한 바람이 그들을 감싸 안았다. 마치 그들의 앞날을 축복하듯.

마리와 라엘. 이 자리에 올 때까지 가슴에 수많은 상처를 안고 있었지만, 그런 상처들은 이제는 상관없었다. 함께이니까. 앞으로도 둘은 영원히 행복할 것이다.

<외전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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