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무언가 심상치 않은 고난(?)이 닥칠 것을 예감한 마리는 불안한 눈빛을 하였다.
“날 이틀이나 기다리게 했으니, 각오는 되어 있겠지?”
“뭐, 뭘요?”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라엘은 더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어, 어떻게 해?’
물론 그와의 잠자리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녀도 당연히 좋았다. 그와 나누는 사랑이 싫을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너무 녹초가 되는 게 문제였다. 평소에도 밤을 보내고 나면 손 하나 까닥하기 힘들 지경인데, 오늘은 정말 각오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저택에 돌아온 라엘은 정말 밤새도록 그녀를 탐닉하고 괴롭혔다.
“……너무하신 것 아니에요? 미워할 거예요.”
마리는 멍하니 침대에 늘어져 그를 흘겨보았다. 지금이 몇 시인지,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눈 것인지 모르겠다. 라엘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그녀의 입술을 다시금 훔치며 말했다.
“아직 멀었는데? 벌써 미워하면 안 되지.”
마리는 하얗게 질려 고개를 저었다.
“아, 안 돼요. 이제는 정말 못 해요.”
“내가 이야기했지? 이번엔 정말로 각오하라고.”
“지, 짐승!”
“나쁘지 않은 단어군. 나도 그대에게만은 짐승이고 싶으니까.”
라엘은 마치 정말로 맹수가 먹이를 바라보듯 마리를 바라보았다. 마리는 그의 타오르는 눈빛을 마주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오늘 밤은 곱게 넘어가긴 그른 것 같았다. 그가 사랑을 담아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고, 서로의 입술이 다시 한번 겹쳐졌다. 그렇게 둘은 밤새도록 사랑을 나누었고, 다음 날 마리는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멍하니 눈을 떴다.
‘아…….’
얼마나 격렬히 사랑을 나눈 건지, 눈을 뜨는 순간 전신이 욱신욱신했다. 마치 물을 잔뜩 먹은 솜처럼 추욱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일어났나?”
그때, 옆에서 라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한참 전에 일어났는지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폐하는 안 힘드세요?”
“왜 힘들지?”
라엘은 의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자신과 다르게 너무 멀쩡한 모습. 아니, 오히려 사랑을 나누기 전보다 훨씬 기운이 나는 듯한 얼굴이었다.
“차나 한잔하겠는가?”
라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직접 차를 끓일 듯한 모습인지라 마리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직접 하지 마시고 그냥 시종을…….”
“됐다. 내가 그대에게 해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
라엘은 그녀에게 다가와 아직도 멍한 눈가에 살짝 입술을 맞추었다.
“내 즐거움이니, 그냥 편히 누워 있도록.”
그는 그녀를 다시 침대에 눕히며 이불을 덮어줬다. 그 다정한 태도에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밤새 시달려서 살짝 미웠지만, 달콤한 말 한마디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버렸다.
“잘해 줘도, 그래도 미워요.”
마리는 이불에서 눈만 내놓은 채 뿌루퉁하게 이야기했다. 라엘은 쿡쿡 웃음을 짓고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렇게 귀여운 모습 보이면, 또 미움받는 짓을 해버릴 것만 같은데.”
마리는 하얗게 질려 고개를 도리도리했다.
“오늘은 절대 안 돼요!”
라엘은 침대 옆에 은근슬쩍 앉으며 짙게 웃음을 지었다.
“음?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란!”
이대로 가다가는 또다시 시달릴 것 같다는 불안함에 마리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라엘은 아쉽다는 듯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춘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차를 끓여 오도록 하지. 쉬고 있도록.”
곧 라엘이 차를 가져왔고 둘은 침대 옆 소파에 앉아 모닝 티를 즐겼다.
‘좋다.’
마리는 차를 마시며 나른하게 생각했다. 따뜻한 차향이 방 안에 퍼졌고, 창문 밖으로 맑은 바닷가가 보였다.
‘이렇게 여유 있었던 적이 도대체 얼마 만인지.’
물론 그와 함께이기에 가치 있는 여유였다. 마리는 가만히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란, 사랑해요.”
라엘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나도 사랑한다.”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둘의 가슴에는 벅찬 행복이 차올랐다. 이렇게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마치 꿈만 같았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그렇게 영원히 시간이 멈추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방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휴식 중 죄송합니다.”
알몬드의 목소리였다. 어지간한 일로는 절대 둘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에 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일까요?”
“글쎄? 들어오도록.”
곧 문이 열리고 알몬드가 들어왔는데, 마리는 덜컥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알몬드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거다.
“오른 각하가 급한 전보를 보내왔습니다.”
“무슨 일로?”
“교황청에서 사절단이 왔다고 합니다.”
“교황청에서 사절단? 아무런 예고도 없이?”
“네, 폐하와 급하게 논의할 사안이 있다고 해서…….”
라엘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사절단을 보내기 전에 상대국에 통보를 해주는 것이 관례였지만, 급하게 논의할 사안이 있을 때는 생략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사절단이 폐하를 직접 뵙기를 청하고 있다고…….”
라엘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난 지금 중요한 용무 중이다.”
지금 그는 세상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한 용무를 보는 중이었다. 그에게 그녀와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소중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오른 각하께서…….”
알몬드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
라엘은 입을 굳게 다물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쾌함과 짜증이 그의 얼굴에서 느껴졌다. 결국, 마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란, 전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다른 곳도 아니라 교황청에서 온 사절단이잖아요. 폐하께서 가 보셔야 해요.”
“……내가 괜찮지 않아.”
“네?”
“내가 괜찮지 않다고.”
라엘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도 자신이 가 봐야 하는 상황인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만난 그녀인데? 고작 며칠 밖에 함께 있지 못했는데 또다시 헤어져야 한다고? 화도 나고, 무엇보다 속상했다.
‘망할 교황청 놈들. 무슨 용건인지 모르겠지만, 순순히 협조해 줄 거라 생각하지 마라.’
라엘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마리가 그의 어깨를 살포시 껴안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너무 속상해하지 마요. 다시 만나면 되잖아요.”
“다시 언제?”
라엘은 기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한번 헤어지면 다시 만나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음 만남은 언제가 될지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음…… 두 달 뒤?”
마리는 고민하다가 답했다. 밤잠을 줄이며 일하면 그때쯤 시간이 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라엘은 불퉁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두 달은 너무 길어. 한 달 뒤로 하지.”
“네, 하지만?”
“이번에도 이렇게 허무하게 헤어지는데, 더 기다렸다가는 내가 상사병으로 죽을 지경이다. 내가 클로얀 왕국으로 갈 테니 그렇게 해.”
라엘은 재차 말했다.
“마침 그때가 그대 생일쯤이니 함께 생일을 보내면 되겠군. 최고의 생일을 보내도록 해줄 테니 기다리도록.”
마리는 배시시 웃었다. 지난 생일은 그가 바빠 그녀 혼자 보냈었다.
‘아마 이번에도 함께 보내는 건 무리일 것 같긴 하지만.’
그녀의 생일은 앞으로 40일 남았다. 그때까지 그가 정무를 마무리하고 클로얀 왕국에 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잠도 안 자고 서류에만 매달리면 어쩌면 가까울지도. 그래도 자신과 함께하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고맙고 기뻤기에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렇게 라엘은 먼저 배를 타고 제국의 수도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마리는 그가 떠난 저택을 바라보았다.
‘쓸쓸하네.’
방금까지 따뜻한 행복이 머물던 곳이라곤 상상도 되지 않게 저택은 휑해 보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떨어져서 지내야 하는 거지.’
방금 헤어졌건만 또 보고 싶었다. 이렇게 떨어지는 일 없이 영원히 그의 곁에 머물고 싶었다.
‘하아. 나도 얼른 돌아가야겠구나. 혼자서 여기서 뭐 해.’
마리는 준비되는 대로 내일 바로 왕국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침대에 누웠다. 그가 없는 침대에 혼자 누워 있으니 쓸쓸한 마음이 들어, 그녀는 얼른 눈을 감았다.
며칠이 지난 후 그녀는 커먼성에 도착했다.
“오셨습니까, 전하?”
바르한이 항구로 그녀를 마중 나왔다.
“백작, 혹시 별일은 없었죠?”
“네?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때, 바르한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키에르한 후작이 조만간 방문하겠다고 서신을 보냈습니다.”
마리는 반가운 이름에 기쁜 얼굴을 하였다. 키에르한. 그녀의 소중한 친우이자, 그녀에게 기사의 맹세를 한 그는 본인 영지와 클로얀 왕국을 왔다 갔다 하며 지냈다. 제국 변경백으로서의 업무와 그녀의 기사로서의 소임을 번갈아 수행하고 있는 거다. 미안한 마음에 이제 왕국으로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해도 그는 이렇게 답할 뿐이었다.
“전하께 충성을 바치는 게 제 삶의 이유입니다.”
그때, 바르한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굳이 안 와도 된다고 해도 꼭 오려고 하는군요. 전하 곁에는 우리 왕실 기사단만으로도 충분한데 말입니다.”
마리는 웃음을 지었다. 이전부터 바르한은 키에르한에게 경쟁심을 느껴 오곤 했었다. 사실 라엘도 키에르한이 그녀의 기사직을 수행하는 걸 못마땅해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질투심 때문이었다.
“언제쯤 도착한다나요?”
“서신이 도착한 지 시간이 꽤 흘렀으니, 아마 며칠 후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키에르한이 도착하는 걸 기다렸다. 주군과 기사 관계를 떠나 그는 그녀의 소중한 친우였다. 오랜만에 보는 거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며칠이 흘렀는데도 키에르한은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있나? 혹시 저항군이 문제를 일으킨 건 아니겠지?’
저항군. 대부분 왕국민은 그녀를 따르고 추종했으나,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는 법. 극히 일부의 사람들은 동제국과 가까워지려는 그녀의 정책에 불만을 가졌다. 저항군은 바로 그런 이들이 모여 만든 비밀 결사였다. 아직은 큰 이상 동향을 보이고 있지는 않으나, 언제 문제가 생길지 모르는 불안 요소여서 그녀는 면밀히 그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바르한 백작이 다급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전하, 큰일입니다!”
“네?”
“키에르한 후작이 커먼성에 오던 중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마리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 뭐라고? 그가 실종돼?
“그게 무슨 말이죠? 키에르한 후작이 실종되다니?”
“커먼성 인근의 노팅엔 산맥에 접어든 후 소식이 없다고 합니다. 지금 당장 수색대를…….”
거기까지 들은 마리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노팅엔산에 가보겠어요. 지금 당장 떠날 테니 최대한 빨리 준비해 주세요.”
마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키에르한은 그녀의 가장 소중한 친우였다.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떻게든 그를 찾아내야 했다.
그녀는 한달음에 키에르한이 실종된 장소로 향했다.
‘갑자기 그에게 무슨 일이? 맹수의 습격이라도 받은 걸까?’
마리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말을 달렸다. 노팅엔산은 왕국의 수도인 커먼성 바로 북쪽에 자리한 산으로 제법 산세가 깊고 험해 맹수가 자주 출몰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동제국, 클로얀 왕국을 통틀어 최강의 기사라 불리는 키에르한이었다. 고작 맹수에게 당할 리가 없었다.
‘그러면 도대체 무슨 일이?’
초조한 마음으로 키에르한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마을에 도착한 마리는 자초지종을 물었다.
“허억, 국왕 전화를 뵙습니다!”
“이곳에서 후작의 연락이 끊겼다고요?”
“네, 전하. 그렇습니다.”
그녀의 방문에 마을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선망과 존경의 시선으로 마리를 바라보았다. 왕국민들에게 모리나 여왕은 단순한 경외의 대상 이상이었다.
“후작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마리는 부드러운 평소 말투와 다르게 다급히 물었다. 키에르한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했다.
“그게…….”
마을 촌장은 키에르한이 사라졌을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마을 아이 한 명이 산속에 들어갔다가 실종되었고, 후작이 그 아이를 찾으러 간 후 연락이 끊겼다고요?”
마리는 당황해 반문했다.
“네, 전하. 그 뒤로 며칠이 지났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어 급하게 왕성으로 연락을 드렸던 겁니다.”
큰 사건, 사고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 마리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야, 그래도 위험한 상황이긴 해.’
산속에는 어떤 맹수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물론 키에르한이 고작 맹수에게 쉽게 당할 리는 없지만, 혹시라도 산속 깊은 곳에서 맹수 떼를 만나면 아무리 그라도 위험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게 이상해요. 혹시라도 안 좋은 일이 생겼을 수도 있으니, 바로 수색을 시작하세요.”
“네, 전하!”
마리는 동행한 왕실 기사들과 함께 키에르한의 발자취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깊은 곳까지 가셨군요.”
주변을 둘러본 바르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수풀이 우거지며 사위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저 멀리서 늑대의 울음소리까지 들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가중시켰다.
“혹시 맹수의 습격을 받은 걸까요? 아니면 불한당들의 습격이라도?”
바르한의 물음에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산속에는 맹수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륙 어디를 가나 산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불한당들이 있었다. 물론 키에르한이 맹수나 불한당 따위에게 당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조금 더 빨리 움직여야겠어요.”
“네, 전하!”
마리와 왕실 기사들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한 뒤일까? 그녀는 산속 깊은 곳 갈림길에서 섬뜩한 흔적을 발견했다.
‘피!’
마리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길 여기저기에 피가 떨어져 굳어 있었다. 부러진 칼과 창이 널브러져 있는 걸로 봤을 때 분명 사람의 피였다.
“전하, 설마 이건…….”
바르한도 하얗게 질려 땅에 굳은 피를 바라보았다. 정황을 봤을 때 키에르한과 정체 모를 누군가가 싸움을 벌인 게 분명했다.
“키에르한 후작의 피가 아니에요.”
마리는 딱딱한 얼굴로 설명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무기들 모두 낡았고, 제대로 관리된 무기들이 아니에요. 불한당이 후작을 공격했고, 후작이 그들을 격퇴한 것이 분명해요.”
마리는 그렇게 말하며 애써 불안한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래도 불한당을 상대하던 중 혹시나 다쳤을 수도 있으니 서둘러야겠습니다.”
그들은 더욱더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혹시나 키에르한이 부상을 입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초조함이 차올랐다. 그렇게 한참이나 흔적을 더듬어 올라간 결과, 마리는 드디어 키에르한을 발견할 수 있었다.
“키엘 님!”
산속을 헤맸지만 멀리서도 눈에 띄는 찬란한 은발, 조각 같은 얼굴. 키에르한이 눈을 크게 뜨며 마리를 불렀다.
“전하? 아니, 어떻게 이곳에?”
“실종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어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마리는 다급히 달려가 혹시나 다친 곳은 없는지 그를 살폈다. 다행히 그는 털끝 하나 다친 곳 없어 보였다. 키에르한은 그녀의 걱정이 무색하게 평소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괜히 걱정하게 만들었군요.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게…….”
키에르한은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불한당을 소탕하고 있었습니다.”
“네?”
“원래는 실종된 아이만 찾고 복귀하려고 했는데, 못 보던 불한당이 산에 정착했더군요.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오가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것 같아 적당히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마리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지금까지 소식이 끊겼던 게…….”
“네, 불한당을 쫓느라 그랬습니다. 다행히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아 대부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위험할 수도 있는데, 병사를 이끌고 오시지…….”
키에르한이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실종된 아이가 불한당에게 잡혀 있는 상태라 너무 시간을 끌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마리는 그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 나선 일이니, 뭐라고 탓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이런 일에 나서기 전에는 꼭 미리 알려 주세요. 알았죠?”
그 목소리에 담긴 걱정에 키에르한은 잔잔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아련함이 순간적으로 일렁였다. 하지만 그녀가 눈치챌까 봐 염려되기라도 하는 듯 그 아련함은 금세 사라졌다.
“네,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걱정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길을 조금 더 가 보니 불한당이 꽁꽁 묶여 있었고, 키에르한과 동행한 쉴트 기사단의 몇몇 기사가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다행히 아이도 무사히 구할 수 있었습니다.”
왕실 기사단의 기사들이 불한당을 넘겨받았다. 불한당은 커먼성으로 끌려가 적법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어쨌든 저 정말 많이 놀랐다고요. 잔뜩 걱정했으니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세요.”
키에르한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리가 그의 시선에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쯤, 그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왜 웃으세요?”
“전하께서 걱정해 주니 기뻐서 말입니다.”
마리는 그 말에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키엘 님 일인데 당연히 걱정되죠. 다음부터는 꼭 조심해 주세요.”
“네, 네. 알겠습니다.”
별로 알아듣지 않는 눈치라 마리는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사실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역시나 기사 중의 기사랄까? 키에르한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지 못해 이전에도 몇 번이나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는 했었다.
“그나저나 전하의 기사로서 제대로 모시지는 못할망정 폐를 끼쳤군요.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그건 상관없는데 저야 혹시나 키엘 님이 다치기라도 할까 염려되어서 그렇죠.”
키에르한의 사죄에 마리는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녀는 지금도 키에르한이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이 어색했다. 그녀에게 그는 소중한 친우였지 수하가 아니었다. 전쟁도 끝났으니 이제는 더 자신의 기사직을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도 그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키엘 님.’
마리는 키에르한을 보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보면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항상 그녀를 위하는 그에게 감사하면서, 동시에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어떤 보답도 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답받을 수 없는 마음이건만, 그는 한결같이 그녀를 대했다. 마치 기사로서 그녀를 섬기는 게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큰 기쁨이라는 듯이.
이후 그들은 특별한 일 없이 커먼성으로 돌아왔다. 마리는 국왕으로서 정무를 보았고, 키에르한은 기사로서 그녀를 지켰다. 그는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기사였지만, 왕실 기사단의 업무나 왕국의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키에르한은 오로지 마리를 그림자처럼 따르며 혹시나 모를 위험을 방비하는 데만 신경 썼다.
“저…… 그렇게 서 있지 않으셔도 되는데. 편히 앉아 계세요.”
미동도 없이 서 있는 키에르한을 보며 마리가 염려된다는 듯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이게 제가 할 일입니다.”
키에르한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말했다.
“이전 토른 폐하를 지킬 때는 이것보다 훨씬 더 고되었습니다. 제가 튼튼해 이 정도야 거뜬하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토른. 동제국의 선황이자 라엘의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키에르한은 과거 동제국 황실친위대의 단장으로 오랜 기간 황제의 곁을 지켰었다.
“그래도…….”
계속해서 그녀가 자신을 신경 쓰자 키에르한이 진중한 얼굴로 물었다.
“제가 전하를 모시는 것이 혹시 불편하십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미안해서요.”
마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는 그녀의 소중한 이였다. 그런데 이렇게 극진한 호위를 받고 있으니 미안한 마음이 안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키에르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지금 당신을 제 친우가 아니라, 제가 충성을 바친 주군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키에르한은 한쪽 무릎을 굽히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 장갑을 낀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전하 말고 그 누가 제 충성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 외에는 이 키에르한의 충성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리의 얼굴이 민망함에 살짝 붉어졌다.
“그, 그거 폐하께 실례되는 말씀 아닌가요?”
키에르한은 빙긋 웃었다.
“전혀요. 전하를 모시는 게 황제 폐하를 높이는 일 아니겠습니까?”
마리는 헛기침하였다. 왠지 라엘도 그렇고 키에르한도 그렇고 날이 갈수록 조금씩 능글맞아지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대로는 안 돼요.”
“뭘 말입니까?”
“절 온종일 지키고 계시잖아요. 미안해서 더는 안 되겠어요.”
“그거야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
“안 돼요. 저 더는 못 보겠어요.”
마리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루에 8시간. 그 이상은 근무하지 마세요.”
“네? 하지만 그건?”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왕실 기사들이 번갈아 가며 절 지키면 돼요.”
키에르한은 반발하려 했다. 그가 보기에 왕실 기사단은 동제국의 근위 기사단이나 친위대에 비해 수준이 부족했다. 혹시라도 불의의 일에 그녀를 지키지 못할까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마리는 양보하지 않고 강경하게 말했다.
“지금처럼 계속 과로하시다가는 키엘 님 언젠가는 쓰러질 거예요. 전 키엘 님이 쓰러지는 모습 보고 싶지 않으니 제 말 따르세요.”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키에르한은 생각했다. 지금껏 자신의 신분을 고려해 왕실 기사단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바르한에게 양해를 구해 검술 지도라도 해야겠다고. 그녀를 지킬 때 한 치의 부족함도 없도록 말이다. 마리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또 특별한 일 없을 때는 앉아서 대기하도록 하세요.”
“전하?”
키에르한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경호 업무를 하는데 앉아서 곁을 지키라니.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정무를 보거나 할 때 굳이 서서 계실 필요 없잖아요. 체력 낭비예요.”
과거 동제국에서 시녀의 삶을 살아서일까? 마리는 기사든 하녀든 목석처럼 서서 말없이 대기하는 걸 보는 게 마음에 좋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있어도 온종일 서서 대기하는 게 굉장히 괴롭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는 라엘의 전담 시녀로 있을 때 그가 앉아서 대기하라고 할 때 굉장히 고마웠었다. 하지만 키에르한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그는 따를 수 없다는 듯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됩니다. 따를 수 없습니다.”
“예법 때문에 그런 거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아닙니다. 예법의 문제뿐 아니라, 앉아 있다가는 갑작스러운 문제가 닥쳤을 때 민첩하게 반응할 수 없습니다.”
마리는 거의 일어나지도 않을 일 때문에 키에르한이 온종일 서 있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키에르한은 완강히 거부했다. 그녀가 자신을 배려해 주려는 마음은 알지만, 따를 수 없는 일이다.
“전 고작 그 정도에 체력이 떨어질 정도로 나약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번 명만큼은 물러 주십시오.”
마리는 어쩔 수 없이 한걸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다시 한번 이 문제를 짚기로 하고 그녀는 다른 사안을 꺼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이건 꼭 따라 주세요.”
“들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안 돼요. 이것만큼은 꼭 따라 주셔야 해요. 무조건이에요.”
워낙 강경한 말투라 키에르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여가 생활을 해주세요.”
“……네?”
그는 잘못 들었다는 듯 반문했다. 지금 뭐라고? 하지만 잘못들은 게 아니었다. 마리는 또박또박한 어조로 강조하며 말했다.
“네, ‘여. 가.’ 생활이요. 이곳에서든 영지에서든 일밖에 안 하시잖아요.”
키에르한은 잠시 침묵했다. 여가 생활을 하라니. 이게 갑자기 무슨 뜻이란 말인가? 아니, 그것보다 여가 생활은 자신보다는 그녀에게 필요할 것 같은데? 왕국과 제국을 통틀어 최고의 일벌레를 꼽으면 바로 그녀와 라엘이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키엘 님이 행복해지길 바라서예요.”
뜻밖의 대답이었다.
“제가 행복하길 바라서라고요? 저는 이미 충분히 행복합니다.”
마리는 입을 연 채 머뭇거렸다. 지금 그녀가 하려는 말은 어쩌면 조금은 주제넘은 참견일지도 몰랐다.
“그냥 저는…… 키엘 님이 더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지금보다 더, 훨씬요.”
마리는 키에르한의 눈치를 살폈다. 그를 생각해서 한 말이지만,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되었던 거다.
‘나 키엘 님이 정말로 행복했으면 좋겠어.’
물론 키에르한은 지금도 행복하다고 한다. 그녀 곁을 지킬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설사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그녀는 그가 더욱더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키에르한은 굳게 입을 다물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마리가 조마조마하게 답을 기다린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혹시 기분 나쁘신 것은 아니죠?”
키에르한은 빙긋 웃었다.
“왜 기분 나쁘겠습니까? 더 일하라는 것도 아니고, 절 생각해서 쉬라는 건데요.”
다행히 나쁘지 않게 받아들인 것 같아서 마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평소에 하시고 싶었던 일은 없으세요?”
키에르한도 그녀 못지않은 일벌레였다. 그녀는 그가 왠지 여가 시간을 주어도 일을 할 것 같아 염려되었다.
‘이게 제 여가 활동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키에르한의 뜻밖의 답을 하였다.
“해보고 싶었던 일이라.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있긴 하군요.”
“뭔데요?”
“그건…….”
키에르한은 입을 열려다 다시 굳게 다물었다. 그의 푸른 눈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머물렀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그의 눈동자에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빠르게.
“비밀입니다.”
“네? 그게 뭐예요.”
마리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으나, 그는 대답해 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키에르한은 강제 여가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뒤 왕실 기사와 근무 교대를 한 후 왕성 밖으로 나온 그는,
“…….”
멍하니 거리를 바라보았다.
‘뭘 해야 하지?’
그는 지금껏 여유 시간을 가져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어릴 적에는 세이튼가의 차기 당주로서, 장성한 후에는 친위대의 기사로서, 변경백으로서 일만 하며 살아왔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갑자기 시간이 주어지니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해보고 싶었던 일이 있나요?”
그녀의 물음이 떠올라 그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노는 것에는 관심 없었지만, 딱 하나 해보고 싶은 일이 있긴 했다. 그녀와 정처 없이 거리를 돌아다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결단코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될 바람이었다. 그는 그녀를 여전히 마음에 품고 있었지만, 절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지금도 자신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는 그녀인데, 불편함을 느낄까 봐서였다. 그래서 그는 오로지 그녀를 충성을 맹세한 주군으로만 대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아닌 척한다고 해도 가슴에 새겨진 감정 자체를 지울 수는 없군요.’
키에르한은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 순간, 자신의 곁에 그녀가 있으면 얼마나 기쁠까. 속으로만 간직하고 있어야 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그녀가 날 생각해서 준 여가 시간이니, 즐겁게 지내도록 노력해야겠군.’
사실 키에르한은 이런 여가 따위는 필요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배려이니 최대한 즐겁게 보내도록 노력했다. 먼저 커먼성의 시가지를 둘러보았다. 왕성에만 머무느라, 커먼성의 곳곳을 살피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다스리는 커먼성은 어느 곳보다 활기차고 생동감이 넘쳤다. 시가지를 다 둘러본 후, 키에르한은 우뚝 멈추어 섰다.
‘이제는…… 뭘 해야 하는 거지?’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의외의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아니, 후작님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아, 바르한 백작.”
강직한 인상의 미남, 마리의 최측근인 왕실 기사단의 단장 바르한 백작이었다.
“그냥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산책이요? 아니, 왜 이런 곳에서 산책을?”
이곳은 그냥 사람들이 오가는 번잡한 거리였다. 산책을 즐길 만한 곳이 아니었다.
바르한은 얼떨떨한 눈으로 키에르한을 바라보았다.
‘설마 지금 할 일이 없어서 방황하고 있는 거야?’
사실 그는 키에르한을 경쟁자로 여기고 경계하고 있었다. 모리나 국왕의 최측근 자리에 대한 경쟁자 말이다. 하지만 천하의 키에르한이 저렇게 멀뚱히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뭔가 웃음이 나왔다.
“뭘 이런 곳에서 산책입니까? 할 일 없으시면 우리 집에 오시지 않겠습니까?”
“……백작의 집에 말입니까?”
바르한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도 그렇지 않아도 심심하던 차입니다. 그냥 간단히 맥주나 한잔합시다. 아, 혹시 제국 최강 기사님께서 술 못 마시는 것은 아니죠?”
키에르한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뜻밖의 초대였지만, 그와 한잔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술을 못하지는 않습니다.”
바르한은 피식 웃고는 등을 돌렸다.
“이쪽입니다. 검으로는 졌지만 술로는 안 질 테니, 각오하십시오.”
그렇게 키에르한은 첫 여가를 바르한과 술을 마시며 보내었다. 그래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첫 여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