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있는 시녀님-51화 (52/54)

외전

Chapter 1

마리와 라엘이 결혼한 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 라엘은 황궁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중 마리가 보내온 편지를 읽고 있었다.

클로얀은 겨울이 지나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답니다. 황궁은 어떤지요? 어제는 강가에 핀 꽃을 보니 폐하 생각이 많이 났답니다. 아직 밤에는 많이 쌀쌀한데 혹시 감기에는 걸리지 않으셨는지요? 보고 싶어요, 정말 많이.

편지에는 라엘을 향한 사랑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얼핏 봐도 절로 흐뭇한 미소가 떠오르는 사랑스러운 편지였다. 그런데 그 편지를 읽는 라엘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그녀가 직접 쓴 사랑의 편지를 읽고 있건만,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편지만 읽어야 하는 거냐.”

그녀를 못 본 지 벌써 4개월이 넘었으니까! 라엘이 잔뜩 뿔이 난 얼굴로 중얼거렸다.

“……편지 좋아. 그런데 우린 부부가 아니냐. 그런데 왜 이렇게 편지만 주고받아야 하는 거지?”

라엘은 마리가 보고 싶어서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때, 옆에서 오른이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야 두 분이 너무 바쁘신 탓 아닙니까. 두 분의 신분상 어쩔 수가 없지요.”

라엘은 오른을 얄미운 듯 쏘아보았다.

‘젠장, 황제를 때려치울 수도 없고.’

라엘과 마리가 못 만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이 황제와 왕이었기 때문이다. 서로를 보려면 보름이 넘는 거리를 가야 하는데, 황제와 왕의 신분에서 그게 쉬울 리가 없었다. 그래서 둘은 결혼 후 1년이 지났건만, 실질적으로 같이 보낸 기간은 채 3개월도 되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니 라엘은 마리를 보고 싶은 그리움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부부냔 말이다.’

라엘은 분통이 터져 생각했다. 이제는 이런 편지 말고 그녀가 보고 싶었다.

“오른, 클로얀 왕국으로 사절을 보낼 일 없느냐?”

“없습니다.”

“그러면 클로얀 왕국에서 우리 제국으로 사람을 보낼 일은?”

“그것도 없습니다.”

“왜 없느냐? 우리 제국과 클로얀 왕국이 협력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라엘은 얼른 찾아내 보라며 오른을 닦달했다. 속이 훤히 비치는 라엘의 닦달에 오른은 측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폐하와 모리나 전하께서 워낙 완벽히 다 일을 처리해 놓으셔서요.”

라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젠장. 다음번 만날 때는 일부러 일을 하나 구멍을 내놔야겠어. 그래야 그 핑계로 한 번이라도 더 만나지.’

그렇게 그가 속으로 구시렁거리고 있을 때, 오른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려고 하지?”

“오후 6시 아닙니까? 이제 슬슬 퇴근하려고 합니다.”

대충 눈치를 보니 또 파티에 참석하려는 것 같았다. 평화가 찾아온 후 오른은 마음껏 사교계를 즐기고 있었다. 얼핏 듣기로는 미혼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다고. 자신은 독수공방하는 처지인데, 오른은 저렇듯 놀러 나가려는 모습을 보자 라엘은 배알이 꼴렸다.

“안 돼, 오늘은 야근이다.”

“폐하?”

오른은 말도 안 된다는 듯 펄떡 뛰었다.

“오늘 파티장에서 엘리샷 영애와 약속이……!”

“엘리샷? 지난번에는 유리 백작 영애 아니었나? 아니, 버크셔 자작 영애었나? 하여튼 누구든 다 안 돼. 국정이 더 중요하다.”

오른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재상직에서 안 물러나는 대신 퇴근 시간을 보장해 주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나? 잘 기억이 안 나는군. 그대가 클로얀 왕국과 회담이 필요할 만한 일을 생각해 내면 어쩌면 기억이 날지도.”

오른은 라엘의 말에 입술을 씰룩거렸다.

‘결국 그거였구먼.’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두 분이 만나실 수 있는 이유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오른은 자신의 칼퇴근을 위해 저 독수공방하는 황제를 구제하기로 결심하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한편 그때, 클로얀 왕국에서는.

“자, 거기 얼른 짐 나르라고!”

“거기 좀 쉬었다가 해! 너무 무리하지 말고.”

이전 어둡던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왕국은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왕국 전체에 가득하던 전란의 상처는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왕국민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다만 왕국에서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인이 한 명 있었는데, 바로 마리였다. 그녀는 왕궁의 집무실에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하아.”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새롭게 재건한 왕실 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바르한 백작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니에요. 아무런 일도 없어요.”

그녀는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계속 표정이 좋지 않았다. 바르한이 더더욱 염려되는 시선을 보내자, 마리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아무런 일 없어요. 괜히 신경 쓰게 해서 죄송해요.”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바로 라엘 때문이었다. 그가 보고 싶었다.

‘이렇게 편지만 맨날 쓰면 뭐 해.’

마리는 한가득 작성한 편지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 보내려는 편지였다. 그를 너무나 보고 싶은 마음에 편지를 썼지만, 허전한 마음은 전혀 달래지지 않았다.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었다.

‘언제 또 볼 수 있는 거지. 벌써 못 뵌 지 4개월째인데. 이러다 반년 동안 못 보겠어.’

그녀는 펜을 내려놓았다. 울적해서 편지를 쓰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국왕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하아.”

그렇게 그녀가 다시 한숨을 내쉬자, 무언가 오해한 바르한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 혹시나 무슨 일이 있으신 거면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무슨 일이든 제가 다 해결하겠습니다!”

바르한은 누구보다도 열렬한 충신으로 그녀를 섬기고 있었다. 마리는 고맙다는 듯 미소를 짓다가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물었다.

“혹시 우리 왕국에서 제국에 사절단을 보낼 일은 없겠죠?”

“제가 알기에는 없습니다.”

“그렇군요…….”

마리는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제국으로 향할 사절단이 있다면 어떻게든 핑계를 대어 같이 갈까 했던 거다.

‘어떻게 시간을 낼 방법이 없을까?’

마리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바르한이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황제를 뵙고자 하려는 것입니까?”

“……네. 뵙고 싶어서요.”

마리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짧지만 강한 갈망이 담긴 음성이었다. 바르한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솔직히 그는 그녀가 황제를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한때 라엘을 적으로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그냥 단순히 자신이 목숨보다 아끼는 주군이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주는 게 싫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래도 그는 충성스러운 신하. 자신의 마음보다는 그녀의 행복이 훨씬 중요했다.

“제가 한번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정말요?”

놀란 마리의 물음에 바르한은 우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양국의 핵심 수뇌부인 오른과 왕실 기사단장 바르한은 마리와 라엘이 만날 만한 일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없는 일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결국, 그들은 마리와 라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냥 휴가나 다녀오십시오! 어차피 지금 중요한 일도 없으니 제가 대충 다 처리하고 있겠습니다!”

오른이 라엘에게 이렇게 말했고,

“잠시 다녀오십시오. 중요한 일은 각료들과 제가 다 처리하고 있겠습니다.”

바르한이 마리에게 말했다. 마리와 라엘은 당연히 사양하지 않았다. 마침 왕국과 제국 모두 지극히 안정적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둘이 만난단 말인가? 오른은 그간 고생한 황제를 위하여 아예 휴가 일정까지 잡아주었다. 클로얀의 왕성이나 제국의 황궁에 머물면 또 정무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아예 둘을 위해 휴양지를 마련해 준 거다.

“파르고섬?”

라엘은 지도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클로얀과 동제국 정중앙 아래쪽에 위치한 섬이었다.

“네, 제가 어릴 적 가 본 적이 있는 곳인데, 풍광이 굉장히 뛰어납니다. 섬사람들도 유순하고 착하고요. 편히 쉬다 오실 만할 것입니다.”

라엘이야 사실 그녀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장소야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래, 고맙군.”

“참, 휴가차 가시는 거긴 하지만, 이번에 폐하께서 꼭 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오른은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후사를 만들어 오십시오.”

“…….”

“농담 아닙니다. 이럴 때 후사를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친우이자 충신인 오른의 충언에 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최대한 노력해 보도록 하지.”

그렇게 라엘은 파르고섬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다. 아마 지금쯤 그녀도 출발했을 거다.

‘빨리 보고 싶군. 어서. 왜 이렇게 바람이 약한 거야.’

라엘은 선상에 서서 돛대를 바라보았다. 화창한 봄 햇살을 받은 바다가 아름답게 빛났지만, 그의 눈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4개월이나 못 본 마리의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이번에 만나면 정말 품에서 놔주지 않을 거다.’

라엘은 강하게 생각했다. 지금껏 만나면 항상 국정이다 뭐다 해서 둘만 함께하는 시간은 굉장히 짧았다. 이번엔 일부러 외딴섬으로 가는 거니, 정말로 그녀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낼 거다. 그런데 라엘은 순간 떠오른 생각에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외딴섬까지 갔는데 또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겠지?’

이해할 수 없게도 마리와 함께 있으면 사건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간신히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해도 그 사건을 해결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설마. 아니겠지. 이번엔 그럴 리가 없어.’

라엘은 강하게 고개를 젓고는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얼른 배가 섬에 도착하기를 바라며. 하지만 아무런 사건 사고와 마주치질 않길 바라는 라엘의 간절한 바람과 다르게 그 순간 마리는 꿈을 꾸고 있었다.

마리는 꿈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나요?」

밝은 햇살이 비치는 방이었다. 한 미남자가 미소를 지은 채 화폭에 붓을 움직이고 있었다. 들판의 풍경을 담은 그림이었는데, 화폭 안의 사람들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풍경화인가요?」

「아, 기분 전환 삼아 가볍게 그려 보고 있었소.」

미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잘생긴 얼굴만큼이나 부드럽고 호감 가는 미소였다. 남자의 그림을 살핀 여인은 감탄을 터뜨렸다. 가볍게 그렸다는 이야기와 다르게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안해지는 듯한 걸작이었다.

「이번 그림도 멋져요.」

그러며 여인은 말을 이었다.

「당신의 그림을 보면 항상 마음이 행복해지는 기분이에요.」

마리는 눈을 깜빡거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갑자기 웬 화가의 꿈이지?’

그녀는 라엘을 만나기 위해 한창 배를 타고 항해 중이었다. 그러다 객실에서 잠이 들었는데 능력을 주는 꿈을 꾸게 된 것이다.

‘최근 이런 꿈을 꾼 적이 없었는데?’

마리는 손을 펼쳐 보았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번엔 화가의 능력을 얻은 것 같았다. 그것도 평범한 화가가 아닌 굉장히 뛰어난 대가의 솜씨가 몸에 깃든 느낌이었다.

‘설마 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

마리는 불안한 얼굴로 생각했다. 능력을 받으면 꼭 그것과 관련된 사건 사고가 생긴다. 이제는 거의 법칙과도 같이 정해진 일이다.

‘별일 있으면 안 되는데.’

얼마나 고대하던 만남인가? 라엘이 그녀를 갈망했던 것처럼 그녀 역시 라엘을 간절히 그리워했었다. 이번에야말로 아무런 방해 없이 단둘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려 했건만, 이런 꿈을 꾸다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거창한 꿈도 아니고, 화가의 꿈이니 큰일은 아니겠지?’

휴가지에서 일이 일어나 봤자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기껏해야 그림이나 그리는 일이겠지. 마리는 애써 불안을 달래고는 객실에 난 창가로 파르고섬 쪽을 바라보았다.

‘얼른 보고 싶어요, 란.’

* * *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라엘이 탄 배가 파르고섬에 도착했다.

“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란 님.”

파르고섬의 군주인 노비엔 남작이 라엘을 맞았다. 파르고섬은 어느 나라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독립적인 소국으로 노비엔 남작가가 섬을 다스리고 있었다. 어차피 남몰래 잠시 쉬다가 돌아갈 예정인데, 정체를 밝히면 괜히 번거로워질까 봐 라엘과 마리는 대충 제국과 클로얀의 귀족 정도로 소개해 둔 상태였다.

“그러면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파르고섬으로 휴양 오는 동제국의 귀족이 적지 않았기에 노비엔 남작은 별다른 의문 없이 라엘을 정해진 숙소로 안내해 주었다.

“풍광이 좋은 별장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안내인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라엘과 호위를 맡은 기사들은 안내인의 인도를 받아 별장으로 향했다. 작은 섬이라 별장은 멀지 않았다. 해변을 따라 걷는데 옥빛 바닷물이 아름답게 찰랑거렸다. 물론 라엘의 눈에는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는 곧 만날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그의 가슴이 뛰었다.

“그녀는 언제쯤 도착하는 거지?”

“아마 오후쯤 도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알몬드의 대답이 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까지 시간이 얼른 지나갔으면 좋겠다.

“일단 먼저 별장에 가서 기다려야겠군.”

“네, 폐하.”

곧 그와 그녀가 휴가를 보낼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 동화 속에 나오듯 아늑한 느낌을 주는 하얀색의 저택이었다.

‘이곳이 그녀와 시간을 보낼 곳…….’

라엘은 살짝 설레는 기분으로 저택에 들어섰다. 그리고 저택에 들어가는 순간, 그는 뻣뻣이 굳어버렸다. 저택 안에 생각지도 못 한 남자가 있었던 거다. 흑발, 흑안을 가진 지적인 인상의 대단한 미남이었는데, 남자도 라엘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혹시 이곳으로 휴가를 오신 겁니까? 이거 정말 운명처럼 기쁜 우연이군요. 반갑습니다, 란.”

라엘은 남자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 자리에서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넌?”

“이런, 벌써 저를 잊어버리신 겁니까? 이거 서운하군요. 그래도 우리 나름 깊은 인연이지 않습니까?”

라엘은 지금 자신이 헛것을 보는 것이길 바랐다. 하지만 아니었다. 부드럽지만 왠지 약 올리는 듯한 느낌의 미소. 친절한 듯하지만 어쩐지 거슬리는 음성. 요하네프 3세였다. 요한은 정말로 반갑다는 듯 과장된 손짓을 하였다.

“어떻게 이런 반가운 ‘우연’이 있을 수가. 저도 마침 이곳으로 휴가를 온 참이었습니다. 파르고섬이 풍광이 좋다고 유명해서 말이지요. 다시 한번 정말 반갑습니다.”

요한은 ‘우연’이란 말에 강조를 넣었다. 라엘은 가만히 알몬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웬 쓰레기가 있구나. 바다에 갖다 버리고 오너라.”

“……네, 알겠습니다, 폐하.”

알몬드가 싸늘한 기색으로 요한에게 다가갔다.

“아니! 정말 우연이라니까요? 이번엔 아무런 꿍꿍이도 없습니다. 그냥 쉬러 온 것일 뿐입니다.”

“갖다 버려.”

“이렇게 우리의 일정이 겹치게 된 거는 분명 하늘이 내려 준 운명으로……!”

요한이 떠들거나 말거나 알몬드와 근위 기사는 정중하고 강압적인 태도로 그를 저택에서 끌어 내렸다.

“으악! 정말로 당신과 그녀 사이를 방해하러 온 게 아니라, 그냥 내 휴가를 즐기러……!”

끌려 나가는 순간에도 시끄러웠지만, 곧 시간이 지나자 조용해졌다.

“버리고 왔습니다.”

“그래, 잘했다.”

라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기껏 그녀와 시간을 보내러 왔는데 요하네프 3세라니. 새집에 들어갔는데 곧바로 바퀴벌레를 본 것만큼이나 불쾌했다.

‘젠장, 어떻게 이런 일이. 기껏 휴가를 왔는데 요하네프 3세를 만나다니.’

요하네프 3세가 이곳으로 휴가를 온 것이 우연인지 의도된 계획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우연이든 의도된 계획이든, 외딴섬에서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그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전 불륜도 얼마든지 환영이니까 말이지요. 짜릿하지 않습니까?”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미친놈이니,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마리 사이를 훼방하려고 들 게 분명했다.

“알몬드. 요하네프 3세가 허튼수작 부리지 못하도록 잘 감시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폐하.”

알몬드가 강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라엘은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치질 못했다. 이번 휴가, 왠지 시작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윽고 드디어 라엘과 마리가 고대하고 고대하던 순간이 다가왔다. 라엘은 마리를 태운 왕국의 배가 섬에 다가오는 것을 벅찬 얼굴로 바라보았다. 곧 저 배에서 그녀가 내릴 것이다. 이제 몇 분이면 만날 수 있겠건만, 그 몇 분이 억겁처럼 느껴지기만 하는 라엘이었다. 그런데 그런 라엘의 벅찬 감정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와, 이곳 해변가 정말 예쁘네요. 역시 이곳으로 휴가 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

“그런데 혹시 저 배에 모리나 국왕이 타고 있는 건가요?”

싱글싱글,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얄미운 미소. 요하네프 3세였다. 그는 라엘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휘파람을 불었다.

“그렇게 노려보지 마십시오. 정말 다 우연이라니까요?”

“……정말로 우연이라면 왜 지금 내 옆에 서서 그녀와의 만남을 훼방하려고 하는 거지?”

요하네프 3세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눈을 크게 떴다.

“전 그냥 해변가를 구경 나왔을 뿐인데요? 마침 지금 그녀가 탄 배가 해안가에 다가오고 있는 건 하늘이 내려 준 기막힌 우연일 뿐, 아무런 의도도 없답니다.”

라엘은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저 망할 놈과 더 대화를 나누었다가는 마리와 만나기 전에 화병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

“알몬드, 저 망할 놈을 당장 저 멀리 갖다 버려라.”

“명에 따르겠습니다.”

요하네프 3세는 다시 펄쩍 뛰었다.

“가시지요.”

“아니, 나는 그냥 해변가를 관광하고 있을 뿐인데 이게 무슨 짓입니까?”

요하네프 3세가 항변하였지만, 알몬드는 꿈쩍도 하지 않고 다시 정중하면서도 강압적인 태도로 그를 저 멀리 끌고 갔다.

‘망할, 묶어서 가둬 놓을 수도 없고.’

라엘은 끌려가는 요한을 보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녀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방해하려고 하다니. 마음만 같아서는 밧줄에 꽁꽁 묶어 감옥에라도 가둬 놓고 싶었지만, 휴양지인 이곳에서 요하네프 3세가 어딜 가든 그건 본인의 자유니 그렇게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왕국의 배가 접안을 마쳤다. 배와 섬 사이에 다리가 놓였고, 이윽고 그녀의 모습이 라엘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의 떨리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라엘은 시간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방금까지 골머리 썩게 했던 요한의 문제도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의 세상 안에 오로지 그녀의 모습만 가득 들어찼다.

“……마리.”

라엘은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마리도 떨리는 발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란.”

둘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많은 이가 있었지만, 그들의 눈에는 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리!”

라엘은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두근!

드디어 만나게 된 그녀의 모습에 라엘의 심장이 진동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품에 안긴 이가 그녀라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 심정은 마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라엘의 뺨을 어루만졌다.

“보고 싶었어요, 란. 정말로. 정말로…….”

라엘은 이마를 가린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을 다루듯 조심히 입을 맞추었다.

“나도…… 보고 싶었다.”

그렇게 둘은 깊은 그리움 끝에 사랑이 가득한 재회를 하였다.

라엘은 미리 준비해 둔 마차에 마리와 함께 올라탔다. 마리는 그와 함께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듯 헤실 웃음을 지었다.

“왜 웃지?”

“좋아서요.”

라엘은 잔잔히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도 지금 이 순간 너무 행복해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마리는 마차에서 이동하는 내내 라엘에게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품을 그녀 또한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단 한순간이라도 그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한참 이동하는 중, 마리는 이상한 점을 눈치채고 라엘에게 물었다.

“경계가 엄중하네요? 혹시 무슨 일이 있나요?”

제국 근위 기사들이 마차를 둘러싸 호위하고 있었는데, 기습에 대비하기라도 하듯 경계가 삼엄했다.

“…….”

그녀의 물음에 라엘은 불쾌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근위 기사들이 삼엄히 경계를 서는 이유는 바로 요하네프 3세 때문이었다. 둘의 행복한 순간을 방해받기 싫은 라엘이 철통같은 경계를 명했기 때문이다. 듣기로 요하네프 3세는 그들의 별장 바로 옆에 숙소를 얻었다고 했다. 라엘은 휴가 기간 중 요하네프 3세가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몰라 노심초사하였다.

“혹시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란?”

라엘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일도 아니다.”

“……?”

“정말 아무런 일도 아니야.”

마리의 눈동자가 의문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라엘은 마리에게 요하네프 3세가 이 섬에 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곧 알게 될 사실이기는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요하네프 3세의 생각이 떠오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혹시나 해서 경계를 서게 한 것이니, 걱정하지 말도록.”

라엘은 부드럽게 그녀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혀가 천천히 그녀의 혀를 감쌌다. 조심스럽게 시작한 입맞춤은 곧 격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녀를 덮쳤다. 마리가 갈망하듯 그의 목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더욱더 깊게 입맞춤을 이어 가며 라엘은 생각했다.

‘……정말로 밧줄로 묶어서 감금이라도 해놓을까.’

이렇게 행복한 순간을 방해받을 생각을 하니, 피가 거꾸로 솟아오를 것만 같았다. 라엘은 만약 요한이 그와 그녀의 사이를 계속해서 훼방하려 든다면 정말로 밧줄로 꽁꽁 묶어 휴가가 끝날 때까지 감금해 놓으리라 다짐했다.

그날 밤, 라엘과 마리는 재회의 기쁨을 마음껏 풀었다.

“정말 꿈만 같아요.”

마리는 그에게 기대어 누운 채 중얼거렸다.

“이렇게 란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니.”

라엘은 그녀의 말에 작게 투덜거렸다.

“원래는 늘 이렇게 지내야 정상이다. 우리 둘이 너무 못 만나고 있는 거야. 결혼했는데도 이렇게나 얼굴을 보기가 힘드니.”

그 말에 마리는 어두운 얼굴을 하였다.

“죄송해요. 항상 같이 있고 싶은데.”

라엘은 반 농담, 반 진담으로 말했다.

“이러다가 그대를 향한 그리움을 못 견디고 황제를 때려치울지도 모르겠어.”

마리는 그 말에 쿡쿡 웃었다. 마음이야 당장에라도 모든 걸 내려놓고 서로에게 달려가고 싶지만 둘 모두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때, 라엘이 마리의 턱을 들어 그녀의 얼굴이 자신을 향하게 하였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이미 한차례 그녀와 잠자리를 가졌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라엘은 지금 이 순간만큼이라도 그녀를 놓지 않겠다는 듯 강렬히 마리를 갈망하고 탐닉했다. 그렇게 애틋한 밤이 깊어 갔다.

다음 날 기분 좋은 파도 소리와 함께 마리는 침대에서 눈을 떴다. 밤늦게까지 시달린 탓일까, 늦잠을 자 버렸다.

“란?”

침대 옆을 보니 라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함께 밤을 보내면 라엘은 늘 먼저 일어나 침대에서 사라져 있었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이제 마리는 그가 아침에 일어나 무얼 하러 가는지 알고 있었다.

‘괜찮은데, 매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마리는 침대에서 일어나 라엘이 지금 있을 만한 곳으로 향했다. 라엘이 있는 곳은 뜻밖에도 저택 1층 구석에 있는 주방이었다. 그는 요리를 하고 있었다. 라엘은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낼 때마다 종종 그녀를 위해 직접 간단한 요리를 만들어주곤 했던 거다. 마리가 괜찮다고, 그러지 말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자신의 즐거움이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할 뿐이었다.

‘란.’

그의 뒷모습을 보는 마리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때, 인기척을 느낀 라엘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는가? 피곤할 텐데 조금 더 누워 있지?”

마리는 고개를 젓고는 등 뒤에서 그를 살며시 끌어안고는 단단한 등에 얼굴을 묻었다.

“사랑해요, 란.”

그녀는 속삭이듯 다시 말했다.

“정말 너무 사랑해요.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당신을 사랑해요.”

“……!”

라엘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는 등을 돌려 그녀의 작은 어깨를 으스러지듯 껴안았다. 그러고 갈망하듯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아, 란.”

거침없이 밀려들어 오는 그의 혀에 마리는 신음을 흘렸다. 주방이 순식간에 열기로 후욱 달아올랐다. 그의 혀가 마리의 혀를 희롱했다. 짜릿한 감각에 그녀가 움찔 밀려나자, 라엘은 그 틈을 파고들어 그녀의 깊은 곳을 침범했다.

“그, 그만요.”

빨갛게 달아오른 마리의 얼굴을 보며 라엘은 중얼거렸다.

“안 되겠군.”

“네, 네? 뭐가요?”

“아무래도 황제의 책무를 수행해야겠어.”

“그게 갑자기 무슨 말……?”

라엘은 그녀의 귓불을 살짝 혀로 훑으며 속삭였다.

“후사를 만들어야 할 것 아닌가?”

“……!”

마리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하, 하지만 아침인데?”

“책무를 다하는 데 아침과 저녁이 어디 있는가?”

라엘은 조그만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 들어 올렸다. 졸지에 공주님처럼 안겨 버린 마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으, 음식 만드시던 거는요?”

“지금 요리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지. 주방장에게 대충 마무리하라고 해놓겠다.”

“하, 하지만 어젯밤에 이미……!”

마리가 허겁지겁 고개를 젓는 이유는 간단했다. 어젯밤에도 실컷 시달림당한 이후이기 때문이다. 오래간만에 만난 라엘은 그간 쌓였던 갈망을 터뜨리기라도 하듯 그녀를 탐하고 또 탐했다. 그래서 새벽에나 간신히 잠들 수 있었는데 또 괴롭히겠다고? 라엘은 조용하라는 듯 그녀의 목을 지그시 깨물었다. 전기가 흐르는 듯한 감각에 마리는 흡, 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젯밤 정도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지.”

마리는 그 말에 울상을 지었다. 왠지 아침부터 순탄치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 불길한 예감대로 라엘은 녹초가 될 때까지 그녀를 탐했다. 물먹은 솜처럼 늘어진 마리는 침대에서 멍하니 중얼거렸다.

“……너무해요.”

“뭘 말인가?”

“……알잖아요.”

라엘은 쿡쿡 웃더니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잘 모르겠는데? 아니면.”

라엘은 다시금 사랑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더 사랑해 달라는 반어적 표현인가? 나는 얼마든지 더 사랑해 줄 수 있긴 한데.”

마리는 하얗게 질려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더 사랑을 나누었다가는 자신은 쓰러질 것이다.

“그런 뜻 절대 아니거든요?”

“그래?”

그녀의 말을 듣는 척, 마는 척 라엘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어쩐지 아슬아슬하게 간지러운 느낌으로. 마리는 멍하니 그 손길을 느끼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러다가 다시 괴롭힘(?)당할 것 같은 위기감에 그녀는 허겁지겁 외쳤다.

“저, 저 배고파요!”

“……그래?”

“네, 배고파 쓰러질 것 같아요. 우리 맛있는 것 먹어요.”

라엘은 그녀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거두었다.

“그래, 음식을 내오도록 하지.”

라엘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해 마리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라엘이 저렇게나 지치지 않는 열망을 지니고 있었을 줄은. 과거 피의 황태자라 불리며 금욕적인 생활을 하던 그에게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모습이었다.

“저를 속이셨어요.”

“응? 무슨 말이지?”

“전 당신이 이런 것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분인 줄 알았단 말이에요.”

마리는 라엘의 눈을 피하며 우물쭈물 중얼거렸다. 라엘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눈가에 살짝 키스했다.

“거짓말한 적 없다. 그대가 너무 사랑스러우니 내가 이렇게 변한 것일 뿐이야.”

그는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그대뿐이다. 그대이니까 원하는 거야.”

달콤한 말에 마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간질간질한 느낌이 가슴 속에 들어찼다.

“어쨌든 식사를 내오도록 하지.”

곧 주방장이 요리한 음식이 방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막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데, 알몬드가 라엘에게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마리가 듣지 못하도록.

“폐하, 초청장이 왔습니다.”

“초청장?”

라엘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휴양지에서 무슨 초청장이란 말인가?

“설마?”

“네, 맞습니다. ‘그’입니다.”

라엘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그’라면 바로 요하네프 3세였다. 어쩐지 조용하다 싶더니 그와 그녀를 방해하려는 수작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볼 것도 없다. 그냥 갖다 태워 버려라.”

“네, 알겠습니다.”

알몬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대화에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란?”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짜증 나는 쥐새끼 한 마리가 주변을 돌아다닌다고 해서.”

“……쥐새끼요?”

마리는 얼떨떨한 얼굴을 하였다. 라엘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고기를 한 점 집어 그녀의 입에 직접 넣어주었다.

“그래, 쥐새끼. 신경 쓰지 말고 밥이나 먹도록 하지.”

라엘은 요하네프 3세의 존재를 마리에게 최대한 숨기려 하였다. 요하네프 3세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면 마리도 당연히 신경 쓸 수밖에 없고, 라엘은 그녀가 자신 외에 따른 존재를 신경 쓰길 바라지 않았다. 이곳에서만큼은 그녀가 자신만 바라보고 있어주었으면 좋겠다, 는 욕심이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상대는 무려 천하의 요하네프 3세였으니까. 하지만 라엘은 가급적 저택을 나가지 않고, 나가더라도 미리 동선에 근위 기사들을 배치해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방식으로 요한의 방해를 막았다. 결국, 요하네프 3세는 라엘에게 서신을 보냈다.

훗, 대단하군요. 하지만 방심하지 마십시오. 그녀를 향한 마음은 당신보다 저도 결단코 못 하지 않으니까요.

라엘은 그 서신을 받자마자 백 등분하여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읽어 볼 가치도 없었다.

“란, 무슨 서신이길래?”

“서신은 무슨. 누가 낙서를 보내왔다.”

“……낙서요?”

“그래, 이 섬에 정신이 이상한 놈이 한 명 사는 것 같군.”

마리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라엘은 속으로 의지를 불태웠다.

‘요하네프, 네놈 따위에게 절대로 방해받지 않겠다. 얼른 포기하고 네놈 나라로 돌아가거라.’

하지만 그런 라엘의 뜻과 다른 일이 일어났다. 그날 밤, 초청장 하나가 저택에 날아온 거다. 라엘은 당연히 요하네프 3세가 보낸 걸로 알고 불에 태워 버리려 했지만, 발신인을 보고 순간 멈칫했다. 요하네프 3세가 아니었다.

“노비엔 남작이 보낸 초청장이라고?”

노비엔 남작은 바로 이 섬을 다스리는 영주였다.

“네, 섬에 방문한 귀빈들을 초청해 만찬을 대접하고 싶다고 합니다.”

라엘은 곤란한 얼굴을 하였다. 다른 이유도 아닌, 호의로 초청하는 것인데 거절하기 곤란했다.

“요하네프 3세가 참석 못 하게 밧줄로 묶어 지하 밀실에라도 가둬 놓을까요? 영원히 말입니다.”

알몬드가 진지하게 물었다. 라엘은 정말로 그렇게 할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그만큼 요하네프 3세에게 방해받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겠지.”

라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초청을 받아들이고 마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요하네프 3세가 이 섬에 와 있다고요?”

“그래, 자기도 휴양차 왔다고 하는데, 알 수 없는 일이지.”

마리는 뜻밖의 사실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마 노비엔 남작의 만찬회에 요하네프 3세도 참석할 거다. 만약 꺼림칙하다면 참석하지 않도록 하지.”

“그래도 우릴 생각해서 초청한 건데, 불참하면 실례가 아닐까요?”

“실례긴 하지. 그래도 뭐, 상관없다.”

솔직히 라엘은 실례고 뭐고 만찬회 따위 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 시간을 보내기도 부족한데 무슨 얼어 죽을 만찬회란 말인가. 마리는 잠시 말없이 있더니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내키진 않지만, 그래도 참석해야지요.”

“요하네프 3세도 올 텐데 괜찮겠는가?”

마리는 웃으며 그의 팔에 기대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제 옆에는 란이 있으니까요. 당신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의 말에 라엘의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래, 생각해 보니 그녀에게는 자신밖에 없는데 요하네프 3세가 훼방을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랴. 라엘은 옅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러면 얼굴만 보이고 돌아오지.”

그렇게 둘은 섬의 영주인 노비엔 남작의 만찬회에 참석했다.

“두 귀빈을 환영합니다! 노비엔 남작입니다.”

인상 좋은 중년의 남자가 활짝 웃으며 그들을 맞았다.

“동제국의 윈터 백작이오. 반갑소. 이쪽은 내 부인이오.”

진짜 신분을 밝혔다가는 제대로 된 휴가를 보낼 수 있을 리 없었으므로 둘은 신분을 위장한 상태였다. 노비엔 남작은 살짝 요란스러운 목소리로 둘을 성 안쪽으로 안내했다.

“들어오십시오. 진즉 만나 뵈었어야 했는데, 이제야 초청한 것 죄송합니다.”

“아니오. 이렇게 신경 써 주니 고마울 따름이오.”

서로 예법에 맞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그들은 남작의 뒤를 따랐다.

“이곳이 응접실입니다. 부족하지만 나름 성의껏 만찬을 준비했으니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마리가 라엘의 손을 남몰래 꼬옥 잡았다. 아마 저 안에 요하네프 3세가 앉아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괜찮다고 이야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그녀도 꺼림칙한 듯했다. 라엘은 괜찮다는 듯 그녀의 손을 마주 꼬옥 잡아주었다.

‘요하네프 3세, 만약 허튼수작을 부리기만 해봐라.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

라엘은 결의를 다지며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안의 정경을 본 그들은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요하네프 3세가 없었던 거다. 응접실에는 시중을 들 하녀와 시종들만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오.”

라엘은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 착석했다. 이 자리는 섬에 방문한 귀빈들을 대접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런데 왜 안 보이는 거지?

‘늦는 건가? 요하네프 3세답지 않군.’

라엘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부족하지만 즐거운 식사 되셨으면 합니다, 하하.”

그들은 노비엔 남작과 함께 만찬회를 즐기기 시작했다.

“이 해산물은 섬의 앞바다에서 잡힌 것들입니다. 맛이 그래도 괜찮을 것입니다.”

“정말 신선하군.”

만찬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노비엔 남작은 유쾌한 목소리로 대화를 리드했고, 라엘과 마리도 예법에 맞춰 식사를 이어 갔다. 나쁘지 않은 만찬회였다. 언제 출몰할지 모르는 요하네프 3세가 신경 쓰이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만찬이 중반을 지나고 메인 디시가 나오고 있을 때, 참다못한 라엘이 물었다.

“혹시 우리 말고 또 초청한 이는 없소?”

“네? 없습니다. 지금 섬에 초청할 만한 귀빈은 두 분밖에 안 계십니다.”

요하네프 3세가 버젓이 이 섬에 머물고 있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 답변이었다.

‘뭐지?’

어쨌든 요하네프 3세가 만찬회에 올 일이 없다는 것에 안도한 그들은 편한 마음으로 식사를 즐겼다. 어쩐지 음식이 더 맛있게 느껴졌다.

“하하, 그래서 제가 이전에 동제국을 방문했을 때……!”

노비엔 남작이 즐거운 얼굴로 목소리를 높일 때였다.

시종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남작에게 귓속말하였다.

“남작님…….”

“그래? 알겠다. 그래, 그래.”

시종의 말을 들은 남작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유쾌함과 다르게 불쾌하기 그지없는 얼굴인지라 그들은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무슨 문제가 있소?”

“아, 그게…….”

남작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섬에 방화 사건이 일어나서요.”

“방화 사건 말이오?”

“네, 마을에서 귀중하게 보관하던 그림이 한 점 있는데, 간밤에 불에 그슬려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범인은 찾은 것이오?”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실하진 않지만, 의심 가는 용의자는 잡아 두었습니다. 조사를 해보니 정체불명의 남자가 몰래 섬에 들어와 있었더군요. 그 남자가 벌인 일로 보여 심문 중입니다.”

“……정체불명의 남자?”

라엘은 얼떨떨한 얼굴로 반문했다. 남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네, 자신을 서제국의 황제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정신이 조금 이상한 자 같습니다.”

라엘과 마리는 화들짝 놀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설마?’

“혹시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 아니오?”

“네, 맞습니다! 생긴 건 멀쩡하니 잘생겼던데 본인이 서제국의 황제라니. 쯧. 어쩌다 그런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섬에 몰래 들어오게 되었는지.”

라엘과 마리는 황당한 얼굴로 남작을 바라보았다. 분명 요하네프 3세다. 그런데 요하네프 3세가 웬 방화 사건? 라엘은 내키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한번 죄인을 만나 봐도 되겠소?”

요하네프 3세는 성의 지하 감옥에 감금되어 있었다. 라엘과 마리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요하네프 3세를 바라보았다. 나름 대제국의 황제가 방화 사건 용의자로 지목되어 감옥에 갇히다니. 어이가 없어도 이렇게나 없을 수가 없었다. 그때, 요하네프 3세가 마리를 보고 활짝 웃음을 지었다.

“오, 이게 누굽니까? 제가 꿈에서 그리워하던 모리나 국왕 아니십니까?”

“…….”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운명이 당신을 제게 이끌었나 봅니다. 간절히 그리워한 보람이 있군요.”

마리는 여전한 요하네프의 모습에 질린 얼굴을 하였다. 감옥에 갇혔지만 역시나 전혀 기죽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냥 돌아가도 되겠군.”

“네, 혹시나 도움이 필요할까 해서 왔는데, 그럴 필요 없을 것 같네요.”

라엘은 얼른 마리의 손을 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그들이 정말로 나가려 하자 요하네프 3세가 화급히 외쳤다.

“자, 잠깐! 그대로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저 도와주셔야지요. 저 이대로라면 방화범으로 몰려 처형당할 지경입니다!”

“우리가 왜 널?”

라엘이 뚱하게 물었다.

“우리는 소중한 친구 아닙니까!”

“……가자, 마리.”

“으아아! 전 란, 당신을 진정한 친구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 번만 도와주세요!”

라엘은 코웃음 쳤다. 요하네프 3세와 자신은 친구는커녕 불공대천의 원수에 가깝다. 지금이야 평화 협정을 맺은 상태지만, 동제국과 서제국은 언제 다시 싸울지 모르는 잠재적 적국이었으니까.

‘그냥 이대로 모른 척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군.’

라엘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마리는 조금 생각이 다른지 머뭇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나 잠깐 들어 볼까요?”

“…….”

“무, 물론 저도 요하네프 3세를 도와주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예 모른 척하기도 그래서…….”

라엘이야 눈엣가시인 요하네프 3세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지만, 천성이 선한 마리는 모른 척 넘어가기가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괜히 정말로 요하네프 3세가 이곳에서 잘못되었다가 또 서제국과 큰 분란이 일어날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요.”

결국, 라엘은 못마땅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러면 이야기나 들어 보지.”

둘은 요하네프 3세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일단 이 섬에 왜 왔는지부터 묻지. 정말 우리가 오는 것을 노리고 일부러 방문한 게 아니라 휴양차 온 거라고?”

“네, 우연의 일치입니다. 아니,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 저를 그녀에게 이끌었다고 할까요?”

“……역시 들을 가치 없는 이야기였군. 그냥 돌아가지, 마리.”

라엘은 싸늘하게 답했다. 운명은 무슨 얼어 죽을 운명? 역시나 요하네프 3세는 우는소리를 하며 진실을 실토했다.

“으아아! 그래요, 사실 두 분이 알콩달콩 휴가를 보내러 간다길래 저도 끼고 싶어서 몰래 따라왔습니다. 특별히 나쁜 의도가 있어서 따라온 건 아닙니다.”

“……그게 충분히 나쁜 의도다.”

“어쨌든 절 버리지 말아주세요. 두 분이 그냥 가 버리시면 전 정말로 이 섬에서 무슨 꼴을 당할지 몰라요. 저 무식한 남작, 제 정체를 전혀 믿지 않고 있단 말입니다.”

사실 노비엔 남작이 그를 안 믿는 건 당연했다. 요하네프 3세는 그들 사이를 훼방하겠다는 목표로 정체도 숨기고 몰래 이 섬에 밀입국했으니까. 이런 수상한 남자를 누가 서제국의 황제라고 믿어주겠는가?

“물론 며칠 후면 제 기사들이 배를 타고 저를 데리러 오기로 했지만, 그때까지 절 가만히 둘 것 같지가 않습니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섬에 화재 사건이 일어났는데, 웬 수상한 인간이 보이니 범인으로 몰아붙인 것 같았다.

“우릴 훼방하려더니 자업자득이군.”

“네, 자업자득이네요.”

라엘과 마리는 얄미운 눈초리로 요하네프 3세를 바라보았다. 하는 일이 어찌 이렇게 하나같이 얄미운지 모르겠다.

“네가 화재를 일으킨 범인인 것은 아니고? 화재가 일어났을 당시 벽화 주변에서 너를 목격했다는 사람이 있던데?”

“아닙니다!”

“……정말로?”

“진짜입니다.”

라엘은 미심쩍은 눈으로 요하네프 3세를 바라보았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인간이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워낙 얄미워서일까? 순순히 도와주고 싶지가 않았다. 이 기회를 통해 뭐라도 대가를 받아 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라엘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사실 요하네프 3세를 구해 주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신원을 보증해 주기만 하면 되니까. 그때, 고민하던 라엘의 머리에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좋다. 도와주지.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뭡니까?”

“구해 주는 즉시, 이 섬을 떠나라. 그리고 앞으로도 다시는 나와 그녀 사이를 훼방할 생각하지 말도록.”

그 말에 요하네프 3세는 인상을 찌푸렸다. 요하네프 3세는 수술받은 심장이 아프다느니, 서제국과 왕국의 협약을 다시 조정해야 한다느니 등으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마리의 근처를 맴돌았다. 그게 눈엣가시처럼 싫었던 라엘은 이번 기회로 영원히 그를 그녀에게서 쫓아낼 작정이었던 거다.

“그건 좀…….”

“그러면 이번 일은 그대가 알아서 해결하면 되겠군. 노비엔 남작은 즉결 처형을 준비 중인 것 같던데 알아서 잘 해보도록.”

라엘은 입꼬리를 비틀고는 마리의 손을 잡고 등을 돌렸다.

“자, 잠깐! 그러면 1년! 1년으로 합시다. 1년 동안은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겠습니다.”

라엘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요한을 보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나 보군. 어서 가자, 마리.”

“네, 란.”

마리도 라엘의 의도를 눈치채고 보조를 맞춰 주었다.

“알았습니다! 그러면 2년! 2년 어떻습니까?”

“그래, 그냥 여기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노비엔 남작에겐 잘 말해주지. 이왕이면 처형 방식으로는 고통이 없는 교수형이 좋겠다고.”

결국, 요하네프 3세가 백기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란, 당신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다시는 당신과 그녀 사이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라엘은 못 믿겠다는 듯 물었다.

“네 말을 어떻게 믿지? 네 주특기가 거짓말과 배신이잖아.”

요한은 그 말에 상처 입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가 지금껏 보여 온 모습은 믿음과는 하늘과 땅만큼 거리가 멀었기에 라엘은 냉랭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그녀를 향한 제 사랑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뭘 건다고?”

“저 하늘의 별처럼 지고지순한 제 사랑을 걸겠습니다. 그러니 믿어주십시오.”

순간 라엘은 그냥 이대로 요한이 처형당하도록 놔둘까 고민이 들었다. 훗날 외교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그냥 이 자리에서 요한을 제거하는 게 마리와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나을 것 같다는 유혹이 강렬히 들었다. 결국, 라엘은 차가운 눈빛으로 요한을 노려보았다.

“한마디만 경고하지. 이번에는 널 구해 주지만, 이후에도 만약 나와 마리를 방해하려 든다면.”

라엘은 무거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때는 서제국이라는 이름도 너의 목숨을 지켜 주지 못할 거다. 더 이상 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지 말도록.”

라엘의 말이 진심임을 깨달은 요한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무서우니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마십시오.”

이후 라엘과 마리는 노비엔 남작을 만나러 간 후 요하네프 3세의 정체를 밝혀 주었다.

“허억? 정말로 그 이상한 남자가 요하네프 3세 폐하가 맞는다는 말씀입니까?”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맞소.”

라엘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수가! 제가 서제국의 황제 폐하에게 그런 무례를 범하다니.”

노비엔 남작은 서제국의 황제를 감금해 고초를 겪게 한 뒷감당을 걱정하며 노심초사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별문제 없이 해결되도록 잘 말할 테니까.”

이번 일이 괜스레 커지길 바라지 않았던 마리가 말하였다. 요한의 정체를 밝히며 그들은 본인의 진짜 신분을 밝힌 상태였다. 클로얀의 국왕이 직접 하는 보증이니 노비엔 남작은 크게 안도하며 감사를 표했다.

“아, 전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만 돌아가 보겠소. 단단히 주의시켰으니, 요하네프 3세는 물의를 일으키는 일은 없을 거요.”

대충 일이 마무리된 것 같자, 라엘은 마리의 손을 잡고 저택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이렇게 흘리는 시간이 아까웠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돌아가 그녀와 단둘이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편히 쉬시오.”

그런데 그때, 노비엔 남작이 주저하는 얼굴로 그들을 붙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마리를.

“저…… 국왕 전하.”

“……?”

“소, 송구스럽기 그지없지만, 저희 파르고섬을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이번에 그슬린 벽화는 우리 파르고섬의 뿌리와도 같은 그림이라 많은 백성이 실의에 빠져 있습니다. 혹시 그 벽화를 복원하는 데 도움을 주실 수는 없으시겠습니까?!”

노비엔 남작은 절하듯 넙죽 고개를 숙였다.

“전하께서는 무수히 많은 재능을 지니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제발 도움을 주십시오.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만약 그녀가 도움을 준다면 노비엔 남작은 섬에서 채취되는 진주들을 감사의 사례로 바치기로 약조하였다.

“하지만…….”

마리는 곧바로 승낙하지 못하고 주저하였다. 도와줄 능력이 없지는 않았다. 마침 배에서 화가에 관한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라엘의 눈치였다.

‘도와주고 싶기야 하지만…….’

마리는 힐끗 라엘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그는 불뚝 입술을 내밀고 있는 게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섬사람들을 도와주면, 그만큼 그녀와 함께할 시간이 줄어드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쩌지?’

마리가 이러지도 못 하고 저러지도 못 하며 라엘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라엘은 굳게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또 도와주겠다고?’

물론 그도 그녀가 남들을 도와주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게 한두 번이 아니란 게 문제였다. 둘이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려고만 하면, 꼭 주위에 사건, 사고가 터지며 그녀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곤 했다.

‘이번만큼은 아무런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았는데.’

마음이 꼬여서인지 쉽게 승낙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래도 저들을 도와주지 않으면 마리의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억지로 라엘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마리가 그에게 당근을 던졌다.

“대신 저 휴가 연장할게요.”

“……뭐라고?”

마리가 애교를 부리듯 두 손을 모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와주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 아니, 그것보다 더 휴가 연장할게요. 그래도…… 안 될까요?”

라엘이 그녀를 잠시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쏘아보듯 강렬한 눈빛에 마리가 곤란한 표정을 짓는 찰나, 라엘이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

“라, 란?”

“일주일.”

“……네?”

“최소 일주일은 연장해야 한다. 안 그러면 허락 못 해.”

마리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답했다.

“일주일은 조금 일정이…….”

“그러면 나도 허락 못 한다.”

마치 어린애처럼 조르는 모습에 마리는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손을 뻗어 마주 그의 등을 껴안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미뤄 볼게요.”

둘은 손상된 벽화를 찾아갔다. 벽화는 대륙에서 섬으로 사람들이 이주할 때를 묘사한 역사적인 그림으로 굉장히 고풍스럽고 중후한 느낌을 주었다. 비단 아름다울 뿐 아니라 처음 섬에 이주할 당시의 절박함과 생생함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어서, 섬사람들이 어째서 이 벽화를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동제국의 황제 폐하와 클로얀 왕국의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미리 연락을 받은 파르고섬의 기사가 뻣뻣이 예를 표했다. 벽화 주변에는 기사와 경비병들이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범인은 찾았나요?”

“찾지 못했습니다. 사건 발생 당시 성에 구금된 수상한 흑발의 남자…… 아, 아니, 그러니까 서제국의 황제 폐하 말고는 이 근처에 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마리와 라엘은 재빨리 사건 현장을 훑어보았다.

“벽화 주변을 밝히던 등이 엎어지며 우발적으로 화재가 발생한 것 같기는 한데…….”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봐도 요하네프 3세가 일으킨 화재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아무래도 그놈 짓인 것 같지?”

“네, 란도 그렇게 생각하죠?”

마리는 아까 감옥에서 그의 상의 뒤편에 묻어 있던 그을림을 떠올렸다. 왠지 그가 일으킨 화재가 맞아 보였다. 본인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말이다.

“어쩌다 화재까지 일으킨 건지 모르겠군. 하여튼 누가 그놈 아니랄까 봐 민폐의 끝을 보여주는군.”

“그러게요. 진짜 민폐예요.”

마리도 인상을 찌푸렸다. 첫 만남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요하네프 3세는 정말 지긋지긋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어쨌든 바로 시작하지. 나도 최대한 도와주겠다.”

“아…… 괜찮아요. 제가 혼자 해도.”

다행히 벽화가 손상된 정도는 심하지 않았다. 부지런히 하면 이틀 정도면 다 복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이래 봬도 그림에도 재능이 있다.”

“정말요?”

마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라엘은 군사, 정치뿐 아니라 예술 분야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알고 보면 진정한 천재는 그녀가 아니라 라엘이었다.

“그래도 제가 혼자 해도 될 것 같은데…….”

라엘은 고개를 젓고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끝나야 그대와 보낼 시간이 늘어나지 않겠는가?”

그러며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추가로 생긴 일주일 동안 한시도 놓아주지 않을 테니, 각오하고 있도록.”

마리의 볼이 빨개졌다. 왠지 벽화 복구가 끝나면 잔뜩 괴롭힘당할 것 같은 불안함이 치밀어 올랐다.

그렇게 둘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벽화를 복구했다. 마리가 꿈속의 능력을 발휘해 붓을 움직였고 라엘이 보조했다. 그녀의 붓이 지나갈 때마다 그슬림에 손상된 부분이 감쪽같이 이전처럼 돌아왔다. 아니, 오히려 더 진정한 혼이 느껴지는 듯한 벽화로 탈바꿈하였다. 그렇게 꼬박 이틀이 지나고, 벽화 복구가 완료되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노비엔 남작이 넙죽 허리를 숙였다. 남작뿐 아니라, 섬사람들 모두가 그녀와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어서 성으로 가시지요. 만찬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필요 없다.”

라엘은 남작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만 들어가서 쉬고 싶군.”

“아, 그래도…….”

“됐다. 마음만 받지. 괜찮다.”

라엘은 강렬한 목소리로 남작의 말을 끊었다. 그림 그리느라 지금까지 시간을 보낸 것도 아까운데, 무슨 만찬회겠는가? 이제부터 그는 그녀와 저택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가지.”

라엘은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를 저택으로 이끌었다.

“라, 라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