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있는 시녀님-50화 (51/54)

Chapter 5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왕국군 일부가 일으킨 거사는 막을 내렸다. 사실 상대 황제 암습을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협정이 무산되고도 남을 사건이었지만, 라엘의 뜻으로 사건은 크게 번지지 않았다. 다만 거사에 참여한 인원들을 처벌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하메른 남작을 비롯한 이들은 중벌을 받기로 하고 옥에 갇혔다. 그리고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일의 전모가 밝혀졌다.

“스토른 백작이 꾸민 일이었다고?”

하메른 남작은 이 모든 일이 스토른 백작의 음모였음을 고했다. 마리와 라엘은 질린 얼굴을 하였다. 그렇게나 그들을 괴롭히더니 마지막 순간까지 발목을 잡으려 한 것이다. 라엘은 엄한 목소리로 명했다.

“불에 태워 버려라!”

마치 마녀를 화형에 처하듯 병사들은 라키의 시신을 불에 태워 버렸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을 보며 라엘은 마리에게 말했다.

“정말로 다 끝났군.”

마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치료를 받은 덕에 그녀의 몸은 대부분 나은 상태였다. 라엘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제 다시는 그대를 놔주지 않을 거다.”

“네.”

그녀는 라엘의 품에 어깨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저도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영원히.”

그 뒤 제국과 클로얀은 종전 협정 및 동맹을 체결하였다. 당연히 라엘과 마리의 국혼을 전제로 한 동맹이었다.

“황제 폐하 만세!”

“황후마마 만세!”

이전부터 둘의 하나 됨을 바라고 있었던 제국민들은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전쟁이 끝났구먼.”

“전하께서 다 잘하시겠지.”

왕국민도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모리나가 라엘과 국혼을 맺는 게 반갑지만은 않았으나, 평화가 찾아온 것만큼은 기뻤다. 무엇보다 그들은 모리나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들을 최고의 길로 이끌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모든 세부 사항에 대한 조율이 끝나고 조약 문서에 직인을 찍기 전, 라엘은 감회가 서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로써 우리 제국과 클로얀 왕국이 종전을 맺음과 동시에 동맹이 되었음을 선언한다.”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선포되는 소리였다.

* * *

이후 시간이 흘렀다. 겨울이 완전히 지나갔고, 따뜻한 봄이 왔다. 활짝 핀 꽃을 감상하는 것도 잠시, 열정적인 여름이 왔고 생동감에 활짝 웃는 사이 1년의 수확을 기다리는 가을이 다가왔다.

그사이 많은 것이 변했다. 클로얀 왕국은 완전히 국가의 기틀을 잡았다. 피폐해진 농지의 재건, 법제의 정비, 상업의 진흥, 귀족들의 체계 정비. 모리나는 모든 분야에 걸쳐 필요한 조치를 취하였다. 불과 반년 정도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클로얀 왕국은 눈에 띄게 안정되었고 왕국민들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이번 수확이 기대되는구먼.”

“그러게 말이야. 풍년이야.”

“이런 풍년이 얼마 만인지.”

“모두 국왕 전하 덕분일세.”

사람들은 구슬땀을 흘리며 그녀의 이름을 높였다. 최근 몇 년 동안 홍수와 가뭄 등으로 흉작이었는데, 올해는 기후도 굉장히 좋아 풍작이 될 것 같았다. 마치 하늘이 그녀와 왕국을 축복하는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괜찮으실까?”

“무얼 말인가?”

“전하 말일세.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닌가 걱정되어서 말이야.”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왕국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감사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워낙 사랑받는 그녀이다 보니 다들 걱정을 하였다.

“너무 무리하다 건강이라도 상하실까 걱정이네. 전혀 쉬지도 않으시는 것 같은데.”

“그러게 말이야. 조금 쉬는 것도 필요할 텐데.”

“다른 귀족 나으리들은 무엇하는 거야? 전하의 일 좀 덜어주시지.”

사람들은 투덜거렸다. 물론 다른 귀족들이라고 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뿐 아니라 모든 이가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 밤잠을 아껴 가며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한창 추수를 준비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다그닥 마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략 10대 정도로 보이는 짐마차 떼였다.

“제국 남부 지방에서 온 상단이군.”

왕국 사람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동제국의 상단이라니. 전쟁을 벌이던 얼마 전만 해도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종종 제국의 상단이 왕국에 출몰했다. 반대로 왕국 상인들도 제국으로 가서 거래했고.

“캐시엔시로 가는 거겠지?”

“그렇지 않겠나?”

캐시엔시는 왕국 동부에 위치한 도시이다. 모리나는 동제국과의 화친을 기념하며 동제국과 가까운 캐시엔시를 교역 도시로 육성하기로 결정하였다. 동제국 상인들은 캐시엔시에 가서 아무런 제약 없이 자신들의 물품을 거래했고, 그들과 거래하기 위해 왕국은 물론 서제국, 한자동맹의 상인들까지 캐시엔시로 모여들고 있었다. 덕분에 캐시엔시는 화친의 상징을 넘어 대륙을 아우르는 교역 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다.

“난 동제국 놈들이 싫네.”

누군가 툭 하고 내뱉었다. 모리나가 아무리 노력하고 있다고 해도 아직 앙금이 풀리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말을 뱉었던 이가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받아들이려 노력 중이네. 전하께서 저렇게나 노력하고 계시니까.”

그 말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가 아닌 그녀가 노력하고 있는 일이기에 그들은 따르기로 했다. 아직 감정을 풀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그때, 한 남자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긴 하는데…… 그 장갑은 제국산 아닌가?”

“앗.”

지적당한 이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 시장에서 싸게 팔길래. 품질이 좋더라고. 트, 특별한 의도는 없네.”

사람들은 쿡쿡 웃음을 지었다. 누군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을이 다가오는 하늘은 맑고도 맑았다.

“날이 좋군.”

다가올 날도 오늘만 같았으면 하는 날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행복했다. 물론 그들은 앞으로도 행복하리라 믿었다. 그녀와 함께라면 말이다.

* * *

한편, 왕국민 모두가 아끼는 마리는 지금 멍한 얼굴로 서류를 보고 있었다.

‘……졸려.’

서류를 보는 그녀의 눈가는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조금만 쉬는 게 어떻겠습니까?”

한 젊은 남자가 걱정스레 말했다. 그녀의 보좌관으로 새롭게 임명된 사무엘 남작이었다.

“아니에요. 미룰 수는 없죠. 오늘 안에 다 해결하고 자겠어요.”

마리는 아직도 경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주변 이들이 몇 번이나 말을 놓기를 강권했으나 아직 평대가 익숙하지 않은 그녀였다.

‘나도 자고 싶지만…….’

마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도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한창 왕국이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어서 그럴까, 그녀가 직접 살펴야 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폐하가 매번 그렇게 잠을 잘 못 주무셨던 거구나.’

마리는 과거 라엘이 늦은 밤까지 일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를 걱정했었는데 이제는 자신이 똑같이 그러고 있었다.

종장

‘잘 지내고 계실까?’

그를 떠올린 그녀는 시큰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반년.’

종전 이후, 각자의 나라로 돌아온 둘은 아직도 재회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후로 처리할 일이 너무나 많았기도 했고, 군주인 그들이 움직이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보고 싶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일이 잘 해결되었는데도 그를 여전히 그리워하고만 있어야 할 줄은 몰랐다. 마리는 주섬주섬 서랍에서 봉투를 꺼내었다. 봉투 안에는 몇 번이나 반복해 본 듯한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가 보낸 편지였다.

도대체 언제 볼 수 있는 거지?

그녀는 그가 편지에 쓴 말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그리워하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그도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저도 보고 싶어요.’

마리는 이미 몇 번이나 본 내용을 다시 꼼꼼하게 읽었다. 이렇게라도 그를 느끼고 싶었다.

‘자, 충전했으니 다시 일하자.’

마리는 크게 기지개를 켜고 다시 서류에 시선을 돌렸다. 그때, 보조관 사무엘 남작이 물었다.

“전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네?”

“요즘 들어서 더 무리하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래 보여요?”

“네. 그리고…….”

사무엘 남작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평소보다 기분도 조금 더 좋아 보이시고요.”

그 말에 마리는 미소를 지었다.

“네, 사실 일이 있긴 있어요. 그것도 아주 좋은. 그래서 무리하는 거예요.”

“어떤?”

사무엘 남작은 눈을 크게 떴다. 아주 좋은 일이 있다니? 마리는 대답 없이 다시 편지지에 시선을 돌렸다. 편지지 말미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금번 탄신연회에 그대를 초청하니, 반드시 참석해 주도록.

곧 다가올 제국 탄신연회에 참석하기로 한 것이다. 즉, 드디어 다시 그와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탄신연회가 다가오기 전 모든 일을 끝내 놓기 위해 평소보다 무리하는 중이었다.

‘란.’

마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어딘가 있을 그를 생각하며.

‘빨리 보고 싶어요.’

그렇게 다시 며칠이 흘렀고, 탄신연회에 참석할 날이 다가왔다.

한편, 그때 동제국의 황궁에서는 라엘이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볼 수 있는 거냐, 마리.’

그는 이제 철가면을 쓰지 않았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찬연하게 드러나 시중을 들던 시녀는 남몰래 그의 얼굴을 훔쳐보며 얼굴을 붉혔다. 마리를 향한 사랑 때문일까, 그의 분위기는 이전과 다르게 많이 부드러워졌다. 아름다운 얼굴에 강렬한 카리스마, 동시에 한결 부드러운 분위기까지. 과거의 그가 공포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은 모든 사람이 우러르고 따르는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특히 한결 더 매혹적이게 변한 황제를 보며 가슴앓이하는 시녀들이 생겨난 것은 비밀. 어차피 마리 외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그이기 때문에 라엘이 그 마음을 눈치채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여튼 온 제국에서 존경받는 황제인 라엘은 지금 그녀에 대한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었다.

‘지금도 보기 힘든데. 설마 결혼 뒤에도 이런 것은 아니겠지?’

라엘은 순간 떠오른 불안감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신혼 생활은 어디서 해야 하는 거지? 아니, 신혼 생활 자체가 가능하긴 한 건가?’

근거 없는 걱정이 아니었다. 둘은 황제와 왕이다. 자신의 나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지내며 결혼 생활을 해야 한단 말인가?

‘제기랄. 결혼하면 한순간도 옆에서 놔주지 않으려 했건만 왜 전쟁이 끝나기 전보다 더 만나기 힘든 것 같지?’

그는 불안감에 생각했다.

‘지금도 이렇게 보고 싶어 괴로운데, 결혼해서도 못 보면? 못 견뎌. 절대 안 돼.’

라엘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든 그녀와 함께하는 결혼 생활을 이루고 말 것이다. 그때, 집무실 밖에서 기척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한 인물이 들어왔다. 쾌활한 인상의 미남, 오른이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좋은 하루입니다. 어젯밤은 평안히 주무셨습니까?”

오른은 밝은 목소리로 라엘에게 인사를 올렸다. 이런저런 우환이 사라진 덕인지, 항상 인상을 찌푸리고 다니던 오른은 많이 밝아진 얼굴이었다.

“좋아 보이는군.”

“네?”

“그대 얼굴 말이야. 어제는 또 어떤 영애를 꼬시고 다닌 거지?”

오른은 억울하단 표정을 지었다.

“꼬시다니요. 전 항상 진실 된 사랑만 합니다.”

“진실 된 사랑이 참 자주도 바뀌는 것 같군. 한 달에 한 번은 바뀌는 것 같아.”

원래부터 오른은 사교계의 쾌남이었다. 마리가 있을 당시엔 이런저런 사건 사고가 잦아 그런 모습이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원 없이 자신의 끼를 발산하며 지내고 있었다.

“결제할 서류나 내놓게.”

“여기 있습니다.”

오른은 행정부에서 가져온 서류를 내밀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근데 폐하, 제 사표는 언제 수리해 주실 건지요?”

라엘은 그 말에 눈썹을 꿈틀했다.

전후 처리가 마무리되자, 오른은 재상직을 사퇴할 뜻을 내비쳤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하였고, 이제는 더 능력 좋은 새 재상이 새로운 제국을 만들어 가는 데 힘써야 한다는 이유였다.

‘……결국, 놀고 싶다는 이야기겠지.’

라엘은 단번에 그 사표를 불에 태워 버렸다.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한 절대 오른이 노는 꼴은 볼 수 없었다. 자신이 이렇게 고생하는데 말이다.

“사표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남부 지방에서 보내온 서신이나 내놓도록.”

얄미운 것과 별개로 오른의 능력은 제국에 필요했다. 오른은 서제국의 요하네프 3세나 스토른 백작처럼 번뜩이는 기지와 뛰어남은 없었다. 그의 진정한 장기는 바로 내치(內治). 민정을 살피며 안정적으로 나라를 운영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른은 사표를 수리해 달라고 거듭 요청했지만, 라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라엘은 한숨을 푹 내쉬며 생각했다.

‘사표를 내고 싶은 건 바로 나란 말이다.’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표를 내면 그녀와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가 보고 싶고 그리웠다.

“탄신연회 준비는 잘되고 있나?”

“네, 차질 없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모리나 국왕은 출발했나?”

오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막 출발했다는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라엘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오고 있을 클로얀 방향 쪽이었다. 빨리 그녀가 보고 싶었다. 이제 곧 만날 것이지만, 그 기다림조차도 아득했다.

그렇게 라엘은 그녀가 도착할 날만을 기다렸다. 하루, 이틀. 며칠 지나지도 않아 그리움과 초조함이 극에 달한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안 되겠다. 내가 미리 마중을 나가야겠어.”

“네? 아직 국경도 안 넘었을 것입니다.”

근위 기사단장 알몬드 자작이 말했다.

“국경에서 만나겠다. 지금쯤 출발하면 얼추 비슷하게 국경에 도착하겠지.”

알몬드는 아연한 얼굴로 만류했다.

“국경은 너무 멉니다. 며칠만 더 기다리시면 만날 수 있을 테니, 조금만 기다리시는 게…….”

“그렇게 기다린 게 벌써 반년이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이러다가는 내가 죽겠다.”

라엘은 강한 목소리로 결정했다. 어쨌든 황제의 결정을 누가 만류하겠는가? 둘이 서로를 간절히 그리워했음은 알몬드가 가장 잘 알고 있기에 더 반대하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준비가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폐하.”

알몬드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분이 과거 피의 황태자라 불리던 그분이 맞나 싶었다.

“출발한다!”

그렇게 라엘과 그를 호위하는 기사들이 국경 지대를 향해 출발했다. 바로 그녀를 마중하기 위해.

‘마리, 마리.’

라엘은 말을 달리며 계속해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드디어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칠 듯이 뛰었다. 그런데 국경 지대에 도착하기 직전, 그는 믿기지 않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 뭐라고?”

라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모리나 국왕이 납치되었다고?”

전령으로 나갔던 기사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네, 폐하. 그리고 범인이 서신을 남기고 갔습니다.”

서신의 내용을 본 라엘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며칠만 빌려가겠습니다. 그녀만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글자에서도 느껴지는 능글능글함. 라엘은 단번에 범인이 누구인지 눈치챘다. 그는 범인의 이름을 씹어 먹을 듯 외쳤다.

“요하네프 3세, 이놈을……!”

* * *

라엘의 짐작대로 범인은 요하네프 3세였다. 마리는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그녀는 국경을 넘기 전, 미리 준비한 숙소에서 잠을 청했었다. 한시라도 빨리 라엘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강행군을 했던지라 세상모르게 잠이 들었었고, 푹 자고 일어났더니 전혀 모르는 곳에 와 있었다.

“푹 주무셨습니까? 보고 싶었습니다, 마이 레이디.”

“…….”

칠흑 같은 흑발에 차분한 인상의 미남. 그녀는 난데없이 요하네프 3세가 보이자 몽롱한 얼굴로 생각했다.

‘왜 요하네프 3세가? 아직 꿈인가? 그런데 란의 꿈이 아니라 왜 하필 요하네프 3세의 꿈을?’

마리는 멍하니 생각했다. 꿈에서도 만나기 싫은 인물이 요하네프 3세이거늘. 이게 꿈이면 참으로 지독한 악몽이었다.

“많이 피곤하신 것 같군요. 조금 더 눈을 붙이십시오. 아직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있으니.”

“……!”

그 선명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마리는 잠이 번뜩 달아났다. 이게 꿈이 아닌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당신이 왜 여기에?”

“여기는 제 마차입니다. 그러니 제가 이 마차에 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아니, 그러니까 왜 제가 당신의 마차에……!”

요하네프 3세는 씨익 웃었다. 이전처럼 능글맞으면서 왠지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미소였다.

“그야 제가 납치했으니까요. 모리나 국왕, 당신은 지금 제게 납치당하는 중입니다.”

“…….”

오늘 점심이나 한 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는 말투여서 그녀는 순간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 납치라니. 지금 이게 무슨 짓이죠?!”

서제국과 클로얀은 이미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런데 왕인 그녀를 납치하다니?

“빨리 내려 주세요!”

요하네프 3세는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애석하지만 안 됩니다. 물론 이게 큰 잘못임은 알지만, 저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요하네프 3세는 말했다.

“죽도록 보고 싶었거든요.”

“…….”

마리는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지금 뭐라고?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요하네프 3세는 원망스러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전쟁이 끝난 후 연락도 한번 없으시다니.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심장의 병이 다시 도질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납치한 것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점점 점입가경인지라 마리는 그의 말을 끊었다.

“듣고 싶지 않아요. 그나저나 도대체 절 어떻게 납치한 거죠?”

“원래 제 장기가 납치, 협박, 사기, 도박 등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을 위해서라면 당신을 납치하는 일 따위야 간단하죠.”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됐고, 내려 주세요.”

“못 내려 주는데요?”

요하네프 3세는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당신을 보내 주면 제가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니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참다못한 그녀가 결국 화를 내려는 순간이었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요하네프 3세의 음성은 이전과 다르게 장난기 없이 진중한 빛을 띠고 있었다.

“사실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한 후, 놓아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 *

“갈림길입니다, 폐하.”

한창 요하네프 3세를 추격하던 라엘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갈림길이라고?”

“네, 폐하. 양쪽 모두 지나간 흔적이 있어서 어디로 향했는지 파악이 어렵습니다.”

요하네프 3세는 마치 일부러 따라오라는 듯 여기저기 흔적을 남겨 놓았었다. 그래서 별 무리 없이 추격을 하고 있었는데, 난관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양 갈래 길 모두에 흔적이 있었다. 분명 추격대를 교란하기 위해서가 틀림없었다.

‘빌어먹을 놈. 잡기만 하면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겠다.’

라엘은 이를 바득 갈았다. 편지의 내용이나 일부러 남긴 듯한 흔적을 고려할 때, 그녀에게 해를 끼치려 납치한 것은 아닐 거다. 하지만 어떤 의도든 용서할 수 없었다.

‘반년. 반년 만에 만나는 거란 말이다. 그걸 방해하다니.’

라엘은 요하네프 3세의 뺀질뺀질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왠지 요한이 일부러 그와 그녀의 재회를 방해하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폐하?”

알몬드 자작의 말에 라엘은 고민에 빠졌다.

정석대로라면 추격대를 나누어야 한다. 하지만 추격대를 나누기에는 인원이 넉넉하지 않아 고민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니, 은발의 미남자가 일단의 인원과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키에르한 후작!”

놀랍게도 그는 마리에게 기사의 맹세를 한 키에르한이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키에르한은 말에서 내려 황제에게 예를 표했다.

“어떻게 여기에 온 거지?”

“국경에 모리나 전하를 마중 나왔다가 변고를 듣고 달려왔습니다.”

그러며 키에르한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추격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전 전하의 기사이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요하네프 3세의 손에서 전하를 구해 오겠습니다.”

라엘은 키에르한을 보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기사란 단어가 대단히 귀에 거슬렸다. 전쟁 당시 모리나 국왕을 도왔던 키에르한의 처분에 대해 논란이 많았었다. 제국의 대귀족으로 클로얀 왕국을 도운 것을 많은 이가 규탄했다.

하지만 키에르한이 도움을 주었던 것은 서제국과의 전쟁 당시였고, 결론적으로 키에르한이 모리나와 함께 서제국의 수도를 함락함으로써 동제국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공으로 키에르한은 처벌받지 않았고, 지금은 제국 내 친 클로얀 왕국파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의 기사라니. 마음에 안 들어.’

제국의 대귀족이 타국의 왕을 기사로 섬기다니. 이것도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일이지만, 결국 모리나 국왕은 제국의 황후가 될 것이므로 그것도 대충 받아들여졌다. 라엘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그가 그녀의 기사라고 하니 왠지 더 각별한 사이처럼 느껴져서이다. 물론 마리의 마음속에는 자신만이 있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배알이 꼴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갈림길이군요. 제가 한쪽 방향을 맡겠습니다.”

상황을 파악한 키에르한이 말했다. 라엘은 못마땅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민했다.

‘누가 어느 쪽 길을 맡아야 하지?’

분명 저 두 갈래 길 중 하나에 요하네프 3세와 그녀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어느 방향에 그녀가 있을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물론 두 방향을 다 추격할 테니 놓치는 일이야 없겠지만, 키에르한보다는 자신이 그녀를 구하고 싶었다.

‘더구나 완전히 반대 방향의 길이야. 길을 잘못 선택하면 그녀를 만나는 게 또 며칠이나 밀릴 거야.’

지금도 그녀를 만나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데, 엇갈리기까지 하면 정말 참기 힘들 것이다.

‘잡히기만 하면 각오해라, 요하네프 3세!’

라엘은 이 사달을 만든 요하네프 3세를 향해 다시 한번 이를 갈며 말했다.

“북쪽 길로 가겠다.”

“북쪽 말씀이십니까? 그 방향은 제가 가겠습니다.”

“아니, 내가 가겠다.”

두 남자는 자신이 북쪽 방향으로 가겠다고 주장했다. 북쪽으로 난 길은 서제국으로 이어져 있다. 그 외에도 몸을 숨길 만한 곳이 많고. 반면 남쪽 길은 평야만 쭈욱 이어지다가 넓은 호수가 종착지였다. 북쪽으로 향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으니 서로 가겠다고 다투는 것이다.

“황명이다. 그대는 남쪽 길로 향하도록.”

라엘은 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명까지 언급할 사안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는 그만큼 마음이 달아 있었다. 키에르한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남쪽 길로 자신이 이끌고 온 기사들을 데리고 떠났다.

“우리는 북쪽으로 간다. 바로 출발하자.”

“네, 폐하.”

키에르한과 라엘의 다툼을 마치 애들 다툼 보듯 바라보던 알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금방 가겠다.’

라엘은 주먹을 움켜쥐며 말을 박찼다.

* * *

한편, 요하네프 3세가 그녀를 데려간 곳은 왕국 남부, 국경 인근에 위치한 넓은 호수였다.

“여기는 왜?”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요하네프 3세는 호수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말했다.

“네, 그야…….”

마리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호수의 이름은 히아론 호수로 마치 요정이 나올 것 같이 아름답다 하여 붙은 이름이었다. 왕국 내에서도 이름난 절경으로 왕국 귀족이라면 죽기 전 꼭 한번쯤 가 봐야 하는 명소로 꼽혔다.

“사실 이 호수에 꼭 한 번 와보고 싶었습니다. 서제국에도 호수는 많지만, 다 을씨년스러워서 이렇게 보석처럼 반짝이는 물결은 보기 힘들거든요.”

마리는 아리송한 표정을 하였다.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요하네프 3세는 호수를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마치 호수의 바람을 느끼는 듯한 행동. 음모와 귀계의 대명사인 요하네프 3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더더욱 얼떨떨한 마음이 들 때, 요하네프 3세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네?”

마리는 순간 잘못 들었나 했다. 요하네프 3세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한번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게 제가 당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마리는 그가 무슨 의도인가 싶었지만, 요하네프 3세는 평소와 다르게 진실 된 빛을 하고 있었다. 진심임을 깨달은 그녀가 물었다.

“……어째서요?”

“제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었으니까요. 당신 덕분에 전 또 한번의 삶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전쟁 때 그녀는 그의 병을 치료해 주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렇게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이전부터 감사의 말을 직접 하고 싶었는데, 이제야 하게 되는군요.”

“왕국을 위해 한 일일 뿐이에요.”

그녀는 천하의 요하네프 3세에게 감사 인사를 들으니 겸연쩍은 마음이 들었다. 요하네프 3세는 잔잔하게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당신 덕분에 작게는 저 개인이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크게는 서제국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한 요하네프 3세는 미소를 지었다.

“어울리지 않게 진중하게 이야기하려니 어색하군요. 어쨌든 정말 감사합니다. 이 요하네프 3세가 서제국을 위해 조금 더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을.”

“……야욕을 펼칠 기회가 생긴 것 아니고요?”

마리의 말에 요하네프 3세는 상처 입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절 어떻게 보시고. 이래 봬도 서제국에선 절 더없는 성군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요하네프 3세와 성군이라. 지극히 안 어울리는 단어이지만 사실이긴 했다.

‘애초에 전쟁을 일으켰던 것도 서제국을 부강하게 하려는 목적이었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 근본에는 서제국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다.

‘어쨌든 요하네프 3세와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날이 오다니.’

마리는 묘한 마음이 들었다. 늘 독사처럼 그녀를 곤경에 빠뜨리던 그와 이런 대화를 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때, 요하네프 3세가 빙긋 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준 생명, 최대한 값지게 살기 위해 노력할 생각입니다.”

“어떤 식으로요?”

마리는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노력하면 왠지 위험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흐음. 글쎄요. 예를 들면…….”

요하네프 3세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

“……!”

마리는 소름 끼친단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전 이미 결혼이 예정되어 있어요.”

“아직 안 하지 않으셨습니까?”

“할 거예요, 곧!”

단호히 거절했지만 요하네프 3세는 오히려 더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상관없습니다. 전 불륜도 얼마든지 환영하니까요. 더 짜릿하고 불타오르는 맛이 있지요.”

“됐어요! 일 없으니 다른 데 가서 알아보세요!”

“흐흠. 고고한 모습을 보니, 제 마음이 더욱 타오르는군요.”

마리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할 말만 하고 돌려보내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제가 그랬나요? 잘 기억이…….”

“그랬어요! 빨리 돌려보내 주세요.”

“흐음. 원래는 그럴 생각이긴 했습니다만……. 제가 또 한 집착하는지라 곤란하군요.”

요하네프 3세는 턱을 쓰다듬었다.

“어쩌죠? 생명의 은인이니 웬만하면 약속을 지켜드리고 싶지만, 이대로 보내드리기에는 제 가슴이 너무 찢어지는군요.”

요하네프 3세는 싱긋 웃었다.

“이왕 제 생명을 구해 주신 것, 마음까지 치료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듣다 못한 마리가 버럭 소리를 높이려 할 때였다. 생각지도 못 한 음성이 들려왔다.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하십시오.”

“……!”

마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키에르한 후작이었다. 일단의 기사를 이끌고 호숫가에 나타난 그는 마리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다.

“당신의 기사, 키에르한 드 세이튼이 예를 올립니다. 늦게 도착하여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사실 클로얀의 왕인 그녀와 제국의 대귀족인 그는 누가 높다고 평하기 어려운 관계였다. 그럼에도 키에르한은 그녀를 주인 대하듯 깍듯이 대했다. 잠시 따뜻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키에르한은 요한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전하를 납치하다니. 지금 무엇 하시는 것입니까?”

“납치라니. 억울하군요. 난 그저 그녀를 사모하는 마음에 시간을 같이 보낸 것일 뿐이랍니다.”

요하네프 3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쩔 수 없군요. 이대로 더 남아 있다가는 저 무서운 기사님이 제 목을 가만히 놔둘 것 같지 않으니,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마리는 빨리 사라져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요하네프 3세는 그 눈빛에 상처 입은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그래도 제 사랑은 영원할 테니, 어떤 장벽이 가로막아도 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내 사랑이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하길!”

마지막 떠날 때까지 저 난리인 요하네프 3세를 보며 마리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요하네프 3세의 끈질김을 알기 때문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저대로 놔주어도 되겠습니까?”

키에르한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장에라도 칼을 빼 들 듯한 모양새라, 마리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제 평화의 시기가 찾아왔는데 다시 전쟁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만류에 키에르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혹시 저자가 무례한 행동을 하지는……?”

“네, 다친 곳은 전혀 없어요. 무례한 행동도 안 했고요.”

키에르한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옆에서 지켰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아니에요. 이렇게 와 주셔서 저를 구해 주셨잖아요. 너무나 감사해요.”

“최소한 제가 곁에 있을 때만이라도, 빈틈없이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굳은 결의가 담긴 목소리를 들으니, 키에르한과 오랜만에 재회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실감이 나 마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정말 반가워요. 잘 지내셨죠?”

그녀의 말에 키에르한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

마리가 고개를 갸웃하자 키에르한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아릿함이 느껴지는 미소였지만,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잘…… 지냈습니다. 저도 이렇게 다시 뵈어 너무나 반갑습니다.”

그렇게 마리는 키에르한이 마련한 마차를 타고 다시 동제국의 수도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제 곧 란을 볼 수 있겠구나.’

그녀도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그도 날 기다리고 있을까?

‘지금쯤 황궁에 계시겠지?’

라엘은 그녀를 놀라게 해줄 생각으로 일부러 연락을 안 한 채 황궁을 출발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자신과 엇갈린 채 남쪽을 헤매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잘 지내고 계시겠죠?”

그녀의 물음에 키에르한은 순간 움찔하였다.

“……?”

그 반응에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키에르한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잘…… 지내고 계십니다.”

“그래요?”

“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편하게 있으십시오.”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그가 자신을 속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기에 그냥 넘어갔다. 키에르한은 죄책감을 느꼈다.

‘원래는 폐하를 기다렸다가 출발하는 게 맞겠지만.’

그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 욕심은 괜찮겠지.’

그가 사랑하는 그녀는 이제 라엘의 여인이 된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그녀를 독점하고 싶었다.

‘이번만은 용서해 주십시오, 폐하.’

그렇게 그는 욕심을 부렸다.

한편, 그때 라엘은 엇갈린 길의 끝에서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이쪽이 아니라고?”

“……네, 폐하. 방금 전서구가 왔습니다. 키에르한 후작이 모리나 국왕을 무사히 모셨다고. 모리나 국왕을 호위하여 먼저 수도로 출발하겠다고 합니다.”

라엘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자신이 향하는 길이 맞는다고 확신하고,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구해내기 위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그 때문에 반대 방향으로 한참이나 오게 된 것이다. 지금부터 돌아간다 해도 그녀가 수도에 도착하기 전 따라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폐하.”

알몬드는 측은한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한때 피의 황태자라 불리며 공포의 대상이었던 그인데, 지금은 그냥 불쌍해 보였다.

“기사들도 많이 지친 상태이지?”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사실 기사들보다도 말이 문제였다. 전력으로 달린 탓에 말들의 전신은 땀에 젖었고 지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다시 출발하려면 충분히 푹 쉰 뒤여야 했다.

‘요하네프, 이놈.’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요하네프 3세를 떠올리며 황제는 다시 이를 갈았다. 이전부터 정말 지긋지긋한 악연이다. 과연 일생일대의 원수였다.

‘키에르한이 호위하고 있다고?’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제국 최강의 기사가 호위하니 안전은 확실하겠지만, 키에르한과 그녀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팍 상해 버렸다.

“일단 여기서 휴식을 취하시겠습니까, 폐하?”

라엘은 고민하다가 답했다.

“아니, 바로 출발한다.”

“네? 하지만?”

알몬드는 무리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기사들은 쉰다. 나와 너, 그리고 폰틸 남작, 아헤른 경, 이베틸 경을 포함한 소수만 출발한다.”

라엘이 언급한 이들은 제국 최고 근위 기사단 내에서도 최강의 실력을 지닌 이들이다. 그들의 말은 모두 명마 중의 명마라, 이런 강행군에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알몬드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며칠 후면 만날 텐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누가 감히 뭐라고 하겠는가? 지금의 라엘은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출발한다!”

그렇게 라엘은 애타는 마음으로 그녀를 만나기 위해 출발했다.

한편 마리는 라엘이 생고생을 하고 있는지는 상상도 못 하고 편안한 여행을 하고 있었다. 키에르한이 최선을 다해 그녀의 편의를 봐주었기 때문이다. 일체의 불편함도 허용할 수 없다는 듯한 극진함이었다.

“의자가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음식은 입맛에 맞으십니까?”

뭔가 어미 닭이 병아리를 살피듯 하나하나를 살피는 키에르한에게 마리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각하. 그렇게 신경 써 주지 않으셔도 돼요.”

하지만 키에르한은 잔잔히 웃을 뿐이었다.

“전 괜찮습니다.”

이게 제 즐거움입니다,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거절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분위기라, 마리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친절을 받으며 여행을 했다. 조금 부담스럽긴 했으나 몸은 확실히 편했다. 최상급 재질의 마차에 때에 맞춰 준비한 편안한 숙소, 그리고 길에서 먹는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맛있는 음식. 그녀는 지금껏 이렇게 편한 이동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수도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키에르한이 지나가듯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네?”

“이제 곧 국혼을 치르지 않습니까. 축하드립니다.”

“아…….”

마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자신의 결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키엘 님.’

마리도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은 잘 알고 있었다. 키에르한은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데 키에르한이 잔잔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주님께 전하의 행복을 기원하겠습니다. 결혼,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그의 눈빛에 담긴 마음이 간절했기에 마리는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제가 당신을 정말 많이 사랑하니, 꼭 행복하셔야 합니다.’

너무나 깊게 사랑하기에, 그는 그녀를 놔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사랑은 소유하고 함께하는 것만이 아닐지니, 그는 저 먼발치에서 그녀를 축복하며 행복을 기원하기로 다짐한 듯 보였다.

‘키엘 님…….’

마리는 왠지 먹먹한 마음이 들었지만,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감사해요. 저 꼭 행복할게요.”

미안함을 표하면 오히려 그에게 더 죄송한 일이리라. 키에르한은 고맙다는 듯 미소를 짓고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폐하가 서운하게 한다면 저한테 이르십시오.”

마리는 쿡쿡 웃었다.

“이르면요?”

“제가 대신 화내드리겠습니다.”

“그거 불경한 발언 아닌가요?”

키에르한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뭐 어떻습니까? 전하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 불경함은 괜찮습니다.”

그의 농담에 마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워요, 키엘 님.’

키에르한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그는 항상 그녀에게 베풀기만 하였다. 그가 있었기에 그녀는 그 힘든 시간을 조금은 수월하게 버틸 수 있었다.

“키엘 님.”

“네, 전하.”

마리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감사해요. 키엘 님도 앞으로 꼭 행복하셔야 해요.”

키에르한은 잔잔히 웃음을 지었다.

“전 지금도 행복합니다.”

그런데 그때, 키에르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이런. 그만 양보해야 할 때가 왔군요.”

“네?”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심코 시선을 돌린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커졌다. 그였다. 그녀가 꿈에서도 그리워하던 그가 저 멀리 있었다.

“……란.”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두근두근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처음에 천천히 걷던 말은 주인의 초조함을 눈치챈 것인지 점차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가 점점 가까워짐에 비례해, 마리의 심장의 진동도 커졌다. 이윽고, 바로 앞에 도착한 그는 말에서 내려 그녀와 마주 섰다.

“아…….”

마리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너무나 그리웠던 탓일까? 예를 표해야 하는데, 그와 마주하니 몸이 뻣뻣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뭐 하는 거야? 정신 차려.’

그녀가 화들짝 움직이려고 하는 순간, 그가 먼저 움직였다.

와락! 온몸으로 그녀를 껴안은 것이다.

“……!”

갑작스러운 포옹에 흠칫 놀란 것도 잠시, 그녀는 익숙한 그의 품에 눈을 감았다. 얼마나 이 품을 바라왔던 것인지. 단단하고, 따뜻하고 포근했다.

“……드디어 만났어.”

그녀의 귓가로 그의 사랑이 전해졌다. 라엘은 다시 한번 말했다.

“보고 싶었다. 정말로.”

마리도 말했다.

“네, 저도요. 저도 정말로 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둘은 간신히 재회할 수 있었다. 함께 마차에 탄 라엘은 이제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그녀를 자신의 품 안에 감싸 안았다. 마리는 그가 클로얀 왕국 북쪽까지 갔다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왕국 북쪽에서 여기까지 말을 타고 달려온 거예요?”

마리는 그가 어마어마하게 고생한 것을 깨닫고 입을 벌렸다.

“어차피 며칠만 있으면 만날 수 있었는데. 왜 그러셨어요?”

라엘은 못마땅하다는 듯 얼굴을 했다.

“어차피 며칠?”

그는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갔다.

“어차피 며칠이라니? 내가 그대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는 모르는 건가? 나에게는 천 년보다도 더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야.”

그는 지그시 그녀의 살결을 깨물었다.

“란.”

그녀가 신음을 흘렸지만, 라엘은 멈추지 않았다. 이어지는 깊은 입맞춤. 지금까지의 그리움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라엘은 거칠게 그녀를 탐닉했다. 너무나 강렬한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뒤로 뺐다. 하지만 애초에 그의 품 안에 갇힌 상태다. 라엘은 강하게 그녀를 감싸 안고는 입맞춤을 이어 갔다.

“아, 란…… 잠시만…….”

그녀는 애원하듯 그를 불렀지만, 라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마리는 백기를 들었다. 머리가 하얗게 변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그녀를 놔준 라엘이 그녀의 눈가에 맺힌 이슬을 손으로 훑었다.

“마리, 어떻게 하지?”

“……네?”

“나 이대로 너를 품 안에서 놔주고 싶지 않은데?”

마리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품 안에 더욱 파고들었다.

“저도요. 저도 그래요.”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시 입을 맞추었다. 라엘은 몇 번째인지 모를 다짐을 다시 한번 하였다.

‘이제 영원히 놔주지 않을 거야.’

너무나 오래 그녀를 기다려 왔다. 라엘은 절대로 자신의 품 안에서 그녀를 놔주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그 다짐은 영원은커녕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난관을 맞닥뜨렸다. 마리를 찾는 인물이 수도 없이 많았던 것이다. 일단 제국의 대신들. 동맹국인 클로얀의 국왕이자 예비 황후인 그녀와 직접 논할 일이 수도 없이 많았다. 여러 고위 귀족도 그녀와 친분 다지기를 원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 꺼져!’

라엘은 우르르 그녀의 주위를 둘러싼 귀족들을 보며 험악하게 외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알몬드가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딸기 주스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그래.”

라엘은 애꿎은 딸기 주스를 거칠게 마시며 마음을 달랬다.

‘그래, 그녀는 왕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조금만 기다리자. 볼일만 다 끝나면 그때는 절대로 놔주지 않겠다.’

탄신연회가 열릴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있었다. 탄신연회가 열리면 또 정신없어질 것이 뻔해, 그는 그 전에라도 그녀를 독점하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도 그녀의 용무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개인의 신분으로 온 것이 아니라 클로얀의 왕으로 제국을 방문한 것이었으니까. 공식적인 친선 활동, 여러 외교, 정책 현안에 대한 제국 대신들과의 회의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랐고, 심지어 밤에는 그녀를 초청한 고위 귀족들의 연회에 참석해야 했다.

‘이런 제기랄. 나랑 시간은 언제 갖는 거야. 계속 일만 하다가 돌아갈 생각인가?’

라엘은 투덜거렸다.

“란, 표정이 안 좋아요.”

그녀가 그의 손을 잡은 채 속삭였다. 그들은 지금 함께 마차를 타고 제국의 대귀족 스벤 공작의 연회에 참석하러 가는 중이었다. 그녀의 제국 방문을 환영하여 개최한 연회이기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다.”

라엘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뭐라고 투덜거리고 싶었지만, 이렇게 바쁜 게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가 속으로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아.’

그때, 그녀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거 알아요? 저 지금 굉장히 행복해요.”

“……?”

“바쁘긴 하지만, 그래도 늘 함께 있잖아요. 이렇게 당신과 같이 있을 수 있다니 꿈만 같아요.”

라엘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리도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갈망을 담은 그들의 시선이 교차했다. 천천히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그녀가 말했다.

“사랑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라엘은 참지 못했다. 그의 입이 그녀의 입술을 그대로 덮쳤다. 마리도 양손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란.”

그녀가 떨리는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라엘은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며 말했다.

“더 불러봐.”

“……란.”

“더. 더.”

“……란. 란.”

왜일까? 그저 이름을 부르는 것뿐인데 가슴이 떨리며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라엘은 베이비 키스를 이어 갔다. 이마에서 눈가로, 그리고 뺨으로. 한없이 부드럽지만 또 다른 느낌의 강렬한 자극이 그녀의 몸에 흘렀다.

“란, 그만요.”

더는 자극을 참기가 어려워 그녀가 말했다. 이미 그녀의 얼굴은 사과처럼 빨갛게 상기된 지 오래였다. 라엘은 타오르는 듯한 시선으로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모자라. 턱없이.’

“연회 취소해야겠다.”

“네, 네?”

마리는 당황해 반문했다.

“그러면 안 돼요. 제가 꼭 참석해야 하는 연회라고요.”

“괜찮아. 그대가 핑계를 댈 것도 없이 황명을 내려 연회를 취소해 버리면 되지.”

마리는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실제로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녀가 잘 알았다. 마리는 애교를 부리듯 그의 팔에 매달렸다.

“말이라도 고마워요. 저도 이런 연회 말고 란이랑 단둘이 있고 싶어요.”

라엘은 소태 씹은 표정을 지었다.

‘빈말이 아니라 진담인데.’

그의 속마음도 모르고 그녀가 말을 이었다.

“탄신연회가 시작되면 조금 일정에 여유를 만들어 볼게요. 그때는 란하고 조금 더 시간을 보낼게요.”

결국, 라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약속해라.”

“네?”

“탄신연회가 시작하면 정말로 나하고 더 시간을 보내겠다고.”

마리는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라엘은 그림 같은 얼굴로 어린아이처럼 뾰로통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귀, 귀여워!’

철가면을 쓴 채 피의 황태자라 불리던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라엘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왜 대답이 없지? 설마 그것도 약속 못 하겠다는…….”

그 순간, 마리가 그를 껴안았다. 그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네, 꼭 약속할게요. 사랑해요, 란.”

그녀가 자신을 꼬옥 껴안자 라엘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는 옅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약속 꼭 지켜라. 계속 안달 나게 하면 화낼 테니. 꼭 명심해.”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빛은 이전과 다르게 맹수처럼 빛나고 있었다.

* * *

마리는 탄신연회가 시작하기 전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 지어 놓으려 노력했다.

“약속 꼭 지켜라. 계속 안달 나게 하면 화낼 테니.”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라엘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탄신연회가 시작한 후에도 계속 바쁘면 왠지 그에게 크게 혼(?)이 날 것만 같았다. 아니, 그에게 혼(?)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마리도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러다가 정말로 일만 하다가 돌아가겠어.’

그건 그녀도 싫었다. 어떻게든 그와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다. 마리는 열심히 노력했고, 덕분에 탄신연회 전에 대부분의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됐어. 이제 그와 함께 연회를 즐기자!’

그와 그녀가 황제와 왕이다 보니 연회 자체에 불참할 수는 없지만, 적당히 얼굴만 비치는 식으로 최대한 시간을 가져 보기로 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그녀는 연회 때도 거의 시간을 내지 못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축가를 연주할 피아니스트가 급성 복통으로 쓰러졌다고?”

상석에서 연회의 시작을 기다리던 라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악장 바한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방금 갑자기 쓰러져 대체할 연주자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연주자가 급환으로 쓰러진 게 어찌 악장의 잘못이겠는가. 라엘과 궁내대신 길버트 백작은 곤란한 표정을 하였다.

“탄신연회의 시작을 기념하는 축가를 연주할 피아니스트가 없다니. 악단 내에 다른 연주자는 없는가?”

“죄송합니다. 워낙 고난도의 연주라 악단 내에서도 대체할 만한 비르투우소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워낙 고난도의 기교가 필요해 외부에서 최고의 피아니스트를 초빙한 상태였는데 갑자기 이런 사달이 난 것이다. 그나마 바한 정도면 연주가 가능했으나, 그는 오케스트라단을 지휘해야 했다.

“흐음, 큰일이군. 연회의 시작을 기념하는 축가를 생략할 수도 없고.”

모두가 곤란해하고 있을 때, 뜻밖의 손길이 도움을 주었다.

“제가 연주할까요?”

“전하?”

마리였다.

바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그녀라면 아무리 어려운 곡이라도 완벽히 연주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과거의 시녀가 아니었다. 감히 일국의 왕에게 피아노를 연주해 달라는 말을 못 하고 바한은 끙끙거렸다. 마리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잠깐인걸요, 뭘. 그리고 전 클로얀의 왕일 뿐 아니라 제국의 황후가 될 예정이니, 이곳 황궁의 일은 제 일이기도 해요.”

“그래도…….”

“그리고 제가 연주하면 모두 좋아할걸요?”

마리의 말이 옳았다. 그렇지 않아도 과거 그녀가 했던 연주를 잊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녀가 연주하면 모두 기뻐하리라.

그렇게 마리는 축가를 연주하였다. 사람들의 반응은 열화와 같았다. 탄신연회의 축가가 아니라 마치 피아노 독주회에 참석한 듯한 박수와 앙코르가 터져 나왔다.

“수고했다.”

연주를 마치고 돌아온 그녀의 손을 라엘이 꼬옥 잡았다. 라엘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제는 놔주지 않을 것이다.”

마리는 귓가를 빨갛게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둘은 적당히 연회를 빠져나올 눈치만 봤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 다르게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갑자기 응급 환자가 생기지를 않나, 만찬회의 음식이 상하지를 않나, 정원이 훼손되지 않나, 심지어 분실 도난 사건도 일어났다. 뭔가 그녀와 그가 처음 만난 탄신연회 때를 연상시키는 스펙타클함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몰래 서로 간의 시간을 갖기는커녕 일을 해결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황궁의 이런저런 사고에 휘말리니 한 가지 좋은 점이 있긴 했다. 그건 바로 과거 시녀 시절 연을 맺었던 이들과 차례로 재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악장 바한부터 시작해 이전의 상급자 수잔 시녀, 친구 제인, 정원사 한스, 주방장 피터. 만나지 못할 뻔했던 이들과 빠짐없이 재회할 수 있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그녀와 다시 만난 그들은 기뻐하며 반가워했다. 모두 그녀에게 도움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다. 정원사 한스는 남몰래 조각을 도움받았고, 주방장 피터는 소고기가 상해 곤란에 처했을 때 도움을 받았다. 제인은 누명을 쓸 뻔한 걸 구제받았다. 그 밖에도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이가 수도 없이 많았다.

“축복이 당신에게 임하기를.”

이제는 지고한 신분이 되었기에 그들은 과거처럼 편하게 그녀를 대하진 못 했다. 그래도 가족처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녀를 축복하였다. 그리고 그들 말고도 반갑게 재회한 인물이 있었다.

“어?”

황궁의 정원을 걷던 마리는 의외의 인물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하!”

마지막에 봤을 때에 비해 키가 훌쩍 큰 소년. 바로 10황자 오스카였다. 그런데 오스카의 반응이 의외였다. 당장 반갑게 뛰어올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반응이 없었다.

‘뭐지?’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못 들은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움찔하고 등을 돌린 채 땅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못 들은 체하는 모습이었다.

‘왜 날 피하시지?’

사실 그녀가 오스카를 찾은 건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계속 만나려 했으나, 이상하게 오스카가 그녀를 피했다.

“……전하?”

마리는 조심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오스카가 버럭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가까이 오지 마!”

그러고 오스카는 후다닥 앞으로 달려가 버렸다. 도망가는 오스카를 보며 마리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 뭐지?’

오스카는 한참 도망가다 돌에 걸려 넘어져 버렸다. 쿵, 하고 넘어지는 소리에 그녀는 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전하, 괜찮으세요? 그러니까 그렇게 급하게 달리시면…….”

넘어진 상처를 살피던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오스카가 울먹이고 있었던 것이다.

“전하?”

마리는 무언가 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를 달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에요? 속상한 일 있었어요?”

하지만 오스카는 입술을 질끈 깨물 뿐 좀처럼 말을 꺼내지 않았다.

“괜찮으니 저한테 이야기해 보세요.”

결국, 오스카가 입을 열었다.

“결혼 안 하면 안 돼?”

“……네?”

“내가 너랑 결혼하겠다고 했잖아! 난 너랑 결혼하겠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폐하랑 결혼하겠다니……!”

거기까지 이야기한 오스카가 눈물을 글썽였다. 왜 오스카가 자신을 피하고 있었는지 깨달은 마리는 당황하고 말았다.

‘맙소사. 이전에 했던 말이 진심이었던 거야?’

몰랐는데, 자신이 오스카의 첫사랑이었나 보다. 마리는 자신 때문에 실연(?)의 아픔을 겪는 소년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다행히 오스카는 더 떼를 쓰지 않았다. 붉어진 눈가를 소매로 닦고는 최대한 의젓한 말투로 말했다.

“미안해. 남자라면 좋아하는 여자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누가 그랬어요?”

“키에르한 후작이.”

뭔가 너무나 키에르한 후작다운 말이다. 오스카는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땅을 바라보며 말했다.

“약속해. 무슨 일이 있어도 행복하겠다고.”

마리는 따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약속할게요. 꼭 행복할게요.”

“정말 약속해. 만약 폐하께서 잘 안 해주면 나한테 와서 말해! 알았어?!”

그녀는 쿡쿡 웃음을 지은 후 손가락을 오스카에게 내밀었다.

“뭐야, 이건?”

“약속을 꼭 지키자는 행동 같은 거예요. 이렇게 손가락을 서로 마주하면 서로 꼭 약속을 지키자는 의미가 되어요.”

오스카는 마리가 시킨 대로 손가락을 그녀와 맞대었다.

“전하께도 약속해 주세요. 전하도 꼭 씩씩하게 살겠다고.”

“내가 무슨 꼬맹이인지 알아? 걱정 마. 씩씩하게 살게.”

불퉁하게 투덜거리는 오스카의 모습은 귀엽기 그지없어 마리는 다시 웃음을 삼켰다.

‘축복받길, 꼬마 황자님.’

그녀는 저 어린 오스카의 앞날에 행복만이 가득하길 기원했다.

탄신연회 막바지에 그녀는 오른과도 대화를 나누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도 되겠습니까, 전하?”

“소비엔 공작.”

연회의 번잡함에 지쳐 잠시 발코니에서 바람을 쐬고 있을 때였다. 오른이 그녀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제 탄신연회도 곧 끝이군요.”

“아, 네.”

마리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은 항상 그녀를 의심하고 반대해 왔었다. 이제는 다 지난 일이 되었지만, 그가 불편한 것은 여전했다.

“…….”

잠시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를 흘렀다. 막상 말을 걸긴 했지만, 오른도 마땅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단 눈치였다. 그도 그녀가 어색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마리는 어색함을 타파하기 위해 대화를 꺼내었다.

“음, 이제 밤바람이 조금 싸늘하네요. 감기 조심해야겠어요.”

“네, 그래야겠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도 헛되이 둘 사이에는 다시 어색함이 흘렀다.

‘어, 어색해!’

마리가 속으로 울상을 지을 때였다. 오른이 용건을 꺼내었다.

“감사합니다.”

“……네?”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감사하다니? 다른 이면 몰라도 오른이 그녀에게 꺼내기엔 어울리지 않은 말이었다.

“폐하를 웃게 해주셔서 말입니다.”

“아…….”

오른은 연회장 쪽으로 시선을 돌려 라엘을 바라보았다. 라엘은 과거와 다르게 아름다운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폐하께서 가면을 쓰셨던 이유를 아십니까?”

“내전에 희생당한 이들을 위한 맹세 아닌가요?”

라엘이 철가면을 쓰는 이유는 자신이 흘린 피를 잊지 않고,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기 위해서라고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른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이유만은 아닙니다. 저 가면은 폐하의 두려움과 상처입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마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가 되기 전, 4황자 시절의 폐하는 굉장히 성격이 여렸습니다. 피를 보는 거는 상상도 못 하셨죠. 과거 폐하의 꿈은 예술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마리는 라엘이 문학, 예술 등 다방면에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는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당시 1황자였던 황태자는 폐하를 살려 두기를 원하지 않았죠. 어쩔 수 없이 검을 들게 된 폐하는 본인의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가면을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생각지 못한 라엘의 과거 이야기에 마리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생모가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고, 누이가 형제에게 죽임을 당하고, 본인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런 지옥에서 폐하는 살아왔습니다. 저는 살면서 폐하가 행복해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거기까지 이야기한 오른은 잔잔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런 폐하께서 전하를 만나고 행복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웃음을 짓기 시작했지요. 여기까지 오는 데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만 감사합니다. 폐하를 행복하게 해주셔서.”

“아, 아니에요.”

“재상으로서 황후가 되실 분께 따로 드릴 부탁은 없습니다. 어차피 제가 아뢰지 않아도 누구보다도 훌륭히 해내실 걸 알고 있으니까요.”

오른은 라엘에게 다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다만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일이 두 분 사이에 있겠지만 서로 영원히 행복하기를. 그것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그럴게요. 감사해요.”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제가 너무 오래 전하를 잡고 있었던 것 같군요.”

“네?”

“폐하의 표정을 보니 말입니다.”

라엘을 보니 그림 같은 얼굴에 불만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연회 기간 내내 바쁜 그녀를 향한 불만이었다.

“아…… 저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네, 많이 삐치신 것 같으니 잘 달래 주십시오.”

제국의 황제에게 삐쳤다고 하다니. 매우 불경한 용어였으나, 그것 외에 라엘의 불만 어린 표정을 설명할 단어가 없었다. 이대로 더 놔두었다가는 정말 폭발할 것 같아 마리는 허겁지겁 그에게 달려갔다. 홀로 발코니에 남은 오른은 피식 웃고는 중얼거렸다.

“축복받기를.”

이윽고 탄신연회가 막을 내렸다. 연회가 끝났으니 이제 그녀는 클로얀 왕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제 내일이면 가겠군.”

라엘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기껏 오랜만에 만났는데, 제대로 함께 시간을 보내지도 못 했다. 상황이 어쩔 수가 없었지만 아쉬움과 서운함이 가슴속에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이대로 그녀를 보내면 화병이라도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란, 미안해요.”

라엘은 대답하지 않고 침상에 앉아 벽만 바라보았다. 완전히 삐친 모습인지라 그녀는 다가가 애교를 부렸다.

“네, 네? 화 풀어요. 금방 다시 올게요.”

평소라면 이 정도만 해도 단박에 기분이 풀렸겠지만, 라엘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가 그녀와의 만남을 도대체 얼마나 기대했던가?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다니. 기분이 도통 풀리지가 않았다. 그런 라엘의 모습을 보며 마리는 쿡쿡 웃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만 그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왜 웃지?”

라엘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마리는 왠지 그를 골려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안 되겠네요. 사실 폐하를 위해 선물을 하나 준비했는데.”

“선물?”

라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선물을 받아 봤자 무엇하겠는가? 내일이면 그녀가 떠나는데. 어떤 귀한 선물이라도 다 의미 없었다.

“궁금하지 않으세요?”

“안 궁금해. 선물 따위 필요 없다.”

마리는 웃음을 참으며 흘리듯 말했다.

“선물로 귀국을 늦추려 했는데, 필요없다니…….”

그런데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였다. 라엘이 획 하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지?”

아까까지 보였던 삐친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타오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귀국을 늦춘다고? 거짓말은 아니겠지?”

기쁨이 가득한 목소리라 마리는 웃음을 지었다.

“네, 연락을 보냈어요. 용무가 며칠 더 걸릴 것 같다고. 중요한 일정은 다 미뤄 두라…….”

마리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마리!”

라엘이 그녀 쪽으로 다가와 와락 껴안은 것이다. 곧바로 이어지는 입맞춤.

“아, 란.”

마리는 순간 몸의 힘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마침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참이라 자연스레 그가 그녀를 위에서 덮치는 자세가 되었다.

“……란?”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의 눈빛을 보고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눈빛만 봐도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아직 대낮인데?”

라엘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다시 입을 맞추었다. 라엘은 그녀의 입술에 여전히 입을 맞추며 속삭이듯 말했다.

“대낮이라서, 싫은가?”

마리는 얼굴이 빨개진 채 입을 다물었다. 라엘은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가린 머리칼을 옆으로 쓸어 넘겼다.

“싫어도 소용없어.”

그러곤 이마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내가 놔주지 않을 테니까. 각오해.”

그렇게 마리는 며칠 더 제국에 체류하기로 하였다. 늦은 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잠에서 깼다. 그간 쌓인 서운함과 아쉬움에 대한 앙갚음인지, 라엘은 끝없이 그녀를 괴롭히고 또 괴롭혔다.

‘어떻게 그렇게 지치지도 않으시는 거지.’

마리는 한숨을 삼켰다. 얼마나 괴롭힘당한 것인지 온몸이 빨갛고 욱신거렸다.

“깬 건가?”

눈을 떠보니 라엘이 침대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시간이 늦었는데…….”

마리는 놀라 물었다. 라엘이 손으로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조금 더 그대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보고 있었다.”

“아…….”

“꿈만 같군. 그대가 이렇게 내 곁에 있다니.”

마리는 배시시 웃으며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저도 꿈만 같아요. 이렇게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게.”

라엘은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거 아세요, 란? 제가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그런가?”

“네, 정말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요.”

라엘은 그 말에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음을 지었다. 마치 보석처럼 아름다운 미소였다. 마리는 순간 달빛에 비친 그의 미소가 너무나 아름다워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지?”

“아, 아니에요.”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라엘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무슨 할 말이 있으면 해도 좋아. 혹시나 나에게 바라는 것은 없는가?”

“바라는 거요?”

“그래, 지금 그대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라도 들어주고 싶어.”

그의 말에 마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불쑥 한 가지를 부탁하였다.

“바람피우면 안 돼요.”

“바람?”

라엘의 얼굴이 해괴한 소리를 들은 양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녀는 진지했다.

“란은 너무 아름다우니까. 유혹하는 여자들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래도 절대 넘어가면 안 돼요. 알았죠?”

그렇게 이야기한 마리는 혹시나 그가 불쾌하게 여길까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그녀의 예상과 달랐다.

“지금 그거 불안해하는 건가?”

그녀가 자신을 신경 쓰는 것이 기쁘단 반응. 마리는 고개를 저으며 당부했다.

“꼭 약속해 주세요. 절대 바람피우지 않겠다고.”

라엘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하겠다. 아니, 약속할 필요도 없지.”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어차피 난 그대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으니까. 사랑한다.”

그렇게 둘은 꿈같은 며칠간의 시간을 보내었다.

“절대로 방해하지 말도록!”

라엘이 미리 단단히 주의를 주었기에, 둘은 정말로 서로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일어났군.”

마리는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멍하니 눈을 떴다.

“푹 잤나?”

“……아니요. 힘들어요.”

마리는 밉다는 듯 그를 흘겨보았다. 라엘은 그런 그녀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림처럼 아름답지만, 왠지 얄미운 미소였다.

“그래?”

그는 그녀의 뺨을 어루만진 후 품 안에 끌어안았다.

“난 아직도 모자란데?”

“……!”

그 말에 마리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왠지 이대로 방심하고 있다가는 또 괴롭힘당할 것 같은 분위기다.

“아, 안 돼요!”

“음?”

“그…… 어쨌든 안 돼요!”

마리는 허겁지겁 고개를 저었다. 라엘은 그 말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알겠다. 어쩔 수 없군. 배고프지는 않나? 아침은 어떤 걸로 하겠나?”

“아…… 상관없어요.”

“그러면 간단히 준비해 오도록 하지.”

같이 머무는 며칠간, 라엘은 그녀의 식사를 일일이 본인이 준비하였다. 황제인 그가 직접 식사를 준비하다니. 화들짝 놀라며 만류했으나, 라엘은 웃으며 그저 이렇게만 말할 뿐이었다.

“내 즐거움을 위해서다. 자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내 즐거움을 빼앗지 말았으면 좋겠군.”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직접 요리를 하는 것. 라엘은 그 즐거움을 느끼고 싶은 듯했다. 덕분에 마리는 무려 제국의 황제가 직접 해주는 요리를 먹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아니, 황제라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그가 해주는 요리이기에 더욱 값진 음식이었다.

“와, 맛있어요.”

“그래?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군.”

“아니에요. 정말, 정말로 맛있어요.”

빈말이 아니었다. 못 하는 게 없는 라엘답게 요리 솜씨도 발군이었다. 특히 그녀의 취향을 고심하여 연구한 것인지 입에 딱 달라붙는 맛이었다.

“왜 안 드세요?”

그녀는 벌꿀을 얹은 팬케이크를 맛있게 먹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라엘은 포크를 내려놓고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

“예뻐서.”

라엘의 말에 마리는 얼굴을 붉혔다.

“놀리지 마세요.”

“진심이다. 정말 예뻐. 이렇게 보고만 있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말하는 라엘의 눈빛은 진지하기 그지없어, 마리는 더욱 민망해졌다. 곧 식사가 끝나고 시종들이 식기를 치워 갔다.

“제가 차를 끓여 드릴게요.”

“괜찮다. 내가 하지.”

“아니에요, 이번엔 제가 할게요.”

뭐든지 직접 해주려고 작정한 것인지, 차마저 본인이 끓이려는 황제를 보고 마리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엔 그녀가 그에게 끓여 주고 싶었다.

‘폐하께서 좋아하는 향으로…….’

이전 시녀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정성을 다해 차를 끓였다. 라엘은 향을 맡고는 옅게 웃음을 지었다.

“역시 좋군. 다른 이들이 끓여 준 차보다 훨씬 좋아.”

그의 칭찬에 마리는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둘은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여유를 즐겼다.

‘행복해.’

그녀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황궁이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수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늦잠을 자고 사랑하는 남자가 해준 요리를 먹은 후 한적하게 있으니 행복했다. 너무나 좋아 시간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싶을 정도였다.

“란, 저 하나 바라는 거 있어요.”

“무엇이지?”

그녀가 바라는 거라면 제국의 반이라도 떼어줄 것 같은 눈동자로 라엘이 물었다.

“저 데이트하고 싶어요.”

“데이트?”

“네, 길거리 데이트. 이렇게 방에 있는 것도 좋지만 같이 거리를 걷고 싶어서요.”

라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군. 바로 준비하라고 하겠다.”

* * *

마침 날씨도 선선하니 맑았다. 화창한 가을 하늘을 보며 마리는 밝은 표정을 하였다.

“좋은가?”

마리는 그의 팔에 찰싹 달라붙으며 말했다.

“네, 란은요?”

“나도 좋다.”

사랑이 가득한 그의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대와 함께라면 어디든 다 좋아.

“어디 가고 싶은 곳 있는가?”

“아니요. 그냥 우리 걸어요.”

둘은 특별한 목적지 없이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축제가 모두 끝난 뒤라 거리는 한산했다. 시끌벅적했던 축제의 여운을 뒤로하고 사람들은 또 일상을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천천히 걷고 있는데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둘의 귀에 들려왔다.

“그러면 모리나 전하와 폐하의 혼인식은 언제인 거지?”

자신들을 언급하는 소리에 마리와 라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얼굴을 가리는 후드를 입고 있어서 정체를 들키지 않고 있었다.

“준비할 것도 많고, 조금만 지나면 겨울이니 내년 봄쯤이 되지 않겠나?”

“빨리 두 분이 결혼하셨으면 좋겠구먼.”

“맞아. 얼마나 오래 기다린 건지.”

백성들은 그들의 결혼식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라엘은 마리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백성들의 뜻도 있으니 결혼식을 앞당길까?”

“언제로요?”

“당장 내일이라도. 난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그의 말을 농담이라 여긴 마리는 쿡쿡 웃음을 지었다.

“우리 저기도 가 봐요.”

마리는 손을 잡고, 라엘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골목에 자리한 예쁜 카페에 가서 케이크를 먹고, 미리 알아 온 유명한 음식점에서 늦은 점심도 먹고, 오페라 공연도 보았다. 알찬 길거리 데이트였다.

“아, 오페라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재밌었어요.”

마리는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하고 싶었던 일을 잔뜩 해서 기분이 매우 좋은 듯했다. 그런데 라엘은 그녀의 말에 대꾸 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슨 생각하세요?”

“그대를 납치할까 하는 생각.”

“네, 네?”

마리는 당황해 반문했다. 라엘은 잔뜩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곧 왕국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는가. 도저히 보내 줄 자신이 없으니, 납치라도 해버릴까 고민 중이다.”

마리는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라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저도 더 같이 있고 싶어요.”

멀어질 자신이 없는 것은 라엘만이 아니었다. 그녀도 그를 떠날 일이 걱정이었다.

‘며칠 더 있을까.’

마리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계속 함께 있고 싶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왕국에는 그녀만 기다리고 있는 급한 현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하아.’

마리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를 떠날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때, 어둠이 어스름하게 깔리기 시작하는 것을 본 라엘이 말했다.

“많이 늦었군. 슬슬 돌아가도록 하지.”

“네.”

둘은 천천히 황궁을 향해 아쉬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마리는 익숙한 건물이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란, 이 성당.”

라엘도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아, 그 성당이군. 이전에 몇 번 왔던 적 있는.”

아직 서로가 이렇게 가깝지 않을 때, 길거리 축제를 구경하던 둘은 이 성당에 왔던 적이 있었다.

“잠깐 들어갈래요?”

마침 인적이 없어서 둘은 성당 내부로 들어갔다. 성당 안을 둘러본 마리는 중얼거렸다.

“이전이랑 똑같네요. 여기 피아노도 있고.”

과거 둘은 비 내리는 밤, 함께 저 피아노를 연주한 적이 있었다. 마리는 피아노 앞에 앉아 가볍게 건반을 눌렀다. 맑은 소리가 성당 안에 울려 퍼졌다.

“잠시 연주해도 괜찮아요?”

“나야 좋지.”

“어떤 곡으로 할까요? 혹시 듣고 싶은 곡 있으세요?”

“그대가 원하는 곡으로.”

라엘은 제대로 감상하겠다는 듯 느긋하게 자리에 앉았다.

마리는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편한 마음으로, 마음이 가는 방향대로. 곧 성당 안에 잔잔한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들판에 앉아 천천히 흐르는 개울물을 보는 듯 평온한 곡이었다. 마치 한적한 시골에 와 있는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전에는 그가 나에게 곡을 들려주었었지.’

마리는 이전에 그가 들려주었던 곡을 떠올렸다. 두려움과 따뜻함이 공존했던 월광(月光). 그는 무슨 마음으로 그런 곡을 연주했었던 것일까? 그 곡에는 어떤 상처가 깃들어 있었던 것일까?

“철가면은 폐하의 두려움과 상처였습니다.”

문득 오른이 얼마 전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리는 라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낸 적이 없지만, 그의 가슴속에 얼마나 많은 상처가 있었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울컥 치밀었다. 라엘뿐이 아니었다. 수많은 상처를 경험한 것은 그녀도 같았다. 둘 모두 수많은 상처를 딛고 난 후에야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괜찮아. 함께니까.’

앞으로의 삶에도 괴로운 일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의 곁에는 그녀가 있고, 그녀의 곁에는 그가 있을 것이니까. 언제까지고 함께일 것이니까.

‘주여.’

마리는 고개를 들었다. 유리창을 통해 하늘이 올려다보였다.

‘그와 나의 앞날을 축복해 주시옵소서.’

그녀는 그와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건반을 눌렀다. 마치 그와 그녀의 앞날을 축복하는 듯한 따스한 빛이 창을 통해 그들에게 내려앉았다.

에필로그

다시 시간이 흘렀다. 가을이 깊어지고, 낙엽이 졌으며, 하얀 눈이 세상을 덮은 뒤, 새싹이 나기 시작했다. 싱그러운 봄기운이 온 세상을 덮은 때, 드디어 모든 사람이 기다리던 날이 다가왔다. 바로 라엘과 마리의 결혼식 날이었다.

“드디어 두 분이 국혼을 올리시는구먼.”

“그래, 도대체 얼마나 기다린 건지.”

동제국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기쁜 얼굴로 떠들었다. 그들은 그녀가 제국의 황후가 되기를 손꼽아 바라고 있었다. 반면 클로얀 왕국민들의 반응은 다소 달랐다.

“결국, 오늘이 왔구먼.”

“그러게 말이야. 영원히 안 왔으면 했는데.”

“아무리 동맹을 위해서라지만, 꼭 전하께서 동제국의 황제와 국혼을 올려야 하는 건가?”

물론 왕국민들이 마리의 결혼을 축하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딸을 시집보내는 아비의 심정이랄까? 그들은 괜히 섭섭한 감정이 들었다. 몇몇 인물은 술에 취해 이렇게 외치기도 했다.

“전하를 울리기만 해봐라. 그때는 황제가 뭐고!”

“맞아! 전하를 속상하게 하면 동맹은 당장 파기야!”

어쨌든 제국민이든 왕국민이든 둘의 행복을 마음은 하나와 같았다. 결혼식은 양 국민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거행되었다.

결혼식은 왕국 동쪽, 국경 인근에 위치한 교역 도시에서 치르기로 하였다. 사실 국혼을 어디에서 올릴 건지로 많은 논의가 있었다. 제국에서 올리면 클로얀 왕국의 반발이 있을 것이고, 왕국에서 올리면 제국의 반발이 있을 것이니 쉽지 않은 문제였다.

고민 끝에 결정된 곳은 바로 국경 인근의 교역 도시 캐시엔. 캐시엔시는 마리가 양국의 화합과 번영을 위해 발전시키고 있는 교역 도시로 양국 어디에서도 반발을 사지 않을 장소였다. 위치 또한 양국 수도의 한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하객들이 오기에도 편했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국왕 전하를 위하여!”

결혼식 전야제를 앞두고 캐시엔시는 축제 분위기에 물들었다. 제국과 왕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건배를 하였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그런 백성들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마리를 보며 바르한 백작이 물었다.

“아니, 왕국민들과 제국민들이 아직도 조금은 어색한 것 같아서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앙금이 풀리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할 테니까요.”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민과 왕국민의 관계는 앞으로 그와 그녀에게 남겨진 과업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리라.

“일단 그런 생각은 다음에 하십시오. 전하께선 이 결혼식의 주인공 아닙니까. 결혼식 전날에도 국정을 고민하는 분은 전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리는 미소를 지었다.

“네, 그럴게요.”

“곧 연회에 갈 채비를 하겠습니다.”

결혼식 전야제를 맞아 연회가 준비되어 있었다. 마리는 시녀들의 시중을 받아 한껏 예쁘게 차려입고 연회장으로 향했다.

“클로얀의 모리나 국왕 전하이십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 몸에 쏠렸다. 그들은 예쁘게 단장한 그녀의 모습에 감탄을 터뜨렸다.

“전하께서는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지시는 것 같구려.”

“그러게 말입니다.”

사랑에 빠진 탓일까? 그들의 말처럼 마리는 점점 더 아름다워지고 있었다. 특히 오늘은 하얀 드레스가 순백한 이미지를 강조해 마치 하늘의 천사 같은 느낌을 주었다.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마리는 연회장의 가장 높은 상석으로 안내받았다. 그곳에는 라엘이 미리 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군.”

중저음의 음성을 듣자, 마리는 가슴이 뛰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하건만, 여전히 그를 보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늘 정말 아름답군.”

라엘은 옆에 앉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마리는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남들이 봐요.”

“보면 어때서?”

라엘은 그녀의 이마에 도둑처럼 입을 맞추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데. 얼마든지 봐도 괜찮다.”

마리의 뺨이 빨개졌다. 사람들이 힐끗힐끗 그들을 바라보았다. 다정하기 그지없는 둘의 모습에 모두 미소를 지었다. 그때, 라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라엘이 손을 내밀었다.

“주인공인데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춤이나 한 곡 추지 않겠는가?”

마리는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뭐든지 잘하는 그녀이지만 약점이 있었다. 바로 춤이었다. 혼자 추는 춤은 완벽했지만, 긴장되어서일까? 이상하게 그와 짝을 맞춰 추는 춤은 여전히 미숙한 면이 있었다.

“또 밟을지도 모르는데.”

라엘은 피식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품에 안긴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얼마든지 밟아도 괜찮다. 어떻게 해도 그대는 사랑스러우니.”

귓가를 간지럽히는 그의 달콤한 목소리에 마리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라엘은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한 곡 추도록 하지.”

“……네.”

단상에 올라가 춤을 추려는 그들을 보고 모두가 환호성을 터뜨렸다. 마리는 얼굴을 붉힌 채 춤을 추기 시작했다.

라엘도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춤을 추었다. 사람들은 행복이 가득한 둘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보기 좋구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두 분이 잘 어울리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결혼식 전날 밤이 깊어 갔다. 그들의 앞날이 행복이 가득할 것이라 예고하듯 축복과 사랑이 넘치는 전야제였다.

마리는 그날 밤 꿈을 꾸었다. 일반적인 꿈이 아니었다. 능력을 주는 자각몽과도 달랐다. 마치 주마등처럼 여러 개의 자각몽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비올라, 너는 내가 가진 최고의 보배이니까.」

첫 번째 스쳐 지나간 꿈은 하녀의 꿈이었다. 마치 잔상이 아른거리듯 최고의 하녀 비올라의 모습이 지나갔다.

「그대가 조각하는 모습은 어째서 이토록 경건해 보이는 건지.」

두 번째는 조각사의 꿈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음악가의 꿈. 마리는 지금껏 꾼 꿈을 차례로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이런 꿈을?’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윽고 수많은 영상이 스쳐 지나간 후, 마지막에 꾼 꿈도 끝이 났다.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생각지도 못 한 장면이 꿈속에 나타났다.

‘이건?’

마리의 눈이 커졌다.

「너의 진실 된 이름, 진명이 무엇이느냐?」

「너에게 정말 그런 능력이 생긴다면, 너는 그 능력으로 무엇을 할 생각이니?」

‘……!’

그녀가 능력을 얻게 된 계기. 죄수를 만났을 때의 일이 꿈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꿈속 죄수의 모습이 이상했다. 당시 죄수의 얼굴에는 죽음의 빛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하얀 광채가 가득 빛나고 있었다.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어요.」

「무엇이 의미 있는 삶이지?」

죄수와 나누었던 문답. 그때 마리는 이렇게 답했었다.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삶을 살고 싶어요. 그게 제 소원이에요.」

그래, 이게 그녀의 답이었었다. 꿈속에서 죄수는 잔잔히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마리가 의아한 얼굴을 하는 순간, 죄수가 따뜻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래서 지금까지 넌 네 소원을 이루었느냐?」

마리는 고민하였다.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저는…….」

그녀가 대답을 마치기 전, 꿈속 세계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마리는 멍하니 눈을 떴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꿈이 끝났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게 갑자기 무슨 꿈이지?’

그녀는 눈을 깜빡거렸다. 하지만 고민을 길게 하지는 못 했다. 오늘은 고대하고 고대하던 결혼식 날이다. 꿈을 고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신부 치장을 마치고 안면이 있었던 사람들, 왕국의 귀족들, 제국의 귀족들에게 다시 한번 축하의 인사를 받았다. 그렇게 정신없는 시간이 지난 후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와아아아!”

“국왕 전하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보통의 결혼식은 성 안에서나 성당 안에서 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그들은 대광장에서 결혼식을 하기로 했다. 많은 백성이 결혼식을 지켜볼 수 있기 위한 조치였다.

“마리.”

라엘이 행복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란.”

그를 바라보니 마리의 얼굴에도 행복이 차올랐다. 이제 둘은 정말로 하나가 된다. 이 순간이 꿈이면 어떻게 하나 싶은 걱정이 들 정도로 가슴이 떨렸다.

“먼저 주님께 두 분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축사는 성당의 대주교가 직접 진행하였다. 지고한 신분 두 명의 결합인지라, 축사는 길고도 길었다. 이윽고 긴 축사를 마치며 대주교가 선언하였다.

“이로써 두 분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와아아!”

그 선포와 함께 광장이 떠나갈 것 같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인제는 오케스트라단이 축가 연주를 할 차례. 그런데 사람들은 오케스트라단의 자리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희한하게 피아노가 두 대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서 모두 의문을 표하고 있을 때, 마리가 단상에서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이 자리에 와 주신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결혼은 우리 둘의 결합만이 아닌, 양국이 하나가 되는 국혼이라 생각합니다.”

모두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양국이 하나가 되었음을 기념하고, 앞으로의 화합을 기원하는 의미로 연주를 들려 드리려 합니다. 저와 폐하가 함께하는 합주입니다.”

사람들은 놀란 얼굴을 하였다. 그녀와 황제가 직접 그들을 위해 연주를 들려 주겠다고? 물론 이건 마리의 아이디어였다. 둘의 결혼식이 조금 더 양국의 화합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계획한 것이다. 마리와 라엘은 피아노 앞에 각자 앉았고, 곧 청명한 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아름답고 밝은 음색이 사람들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축복을 기원하는 듯한 느낌에 사람들은 눈을 감고 음악을 감상하였다.

‘마리.’

‘란.’

피아노를 연주하며 서로를 바라본 둘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나 행복해.’

마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일까? 너무나 행복해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문득 그녀는 어젯밤 꾸었던 꿈속 죄수의 물음이 떠올랐다.

「그래, 그래서 지금까지 넌 네 소원을 이루었느냐?」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노력하며 살 것이란 것이다. 비록 조금 부족할지라도, 그날 죄수에게 이야기했던 대로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며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다. 사람들 사이로 그와 그녀가 연주하는 피아노 합주 소리가 아름답게 울려 퍼졌다. 그 음악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고, 모두를 축복하듯 청명한 하늘이 밝은 빛을 반짝였다.

능력 있는 시녀님 <완결>

능력 있는 시녀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