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라엘의 강한 의지 아래 제국 측 분위기가 화친 쪽으로 급격하게 쏠리게 되었다. 물론 1군단장 메일 후작을 비롯한 주전론자들은 여전히 클로얀을 정복해야 함을 주장했다. 하지만 제국의 황제인 라엘을 비롯한 많은 이가 화친을 바라고 있었고, 실제로 라엘이 말하는 바가 틀린 것은 아니었기에 주전론자들의 주장은 힘을 얻지 못했다. 그렇게 화친과 동맹을 논하는 사이 시간이 흘러 겨울이 지나갔고, 봄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으, 추워.”
요새에서 경계를 서는 왕국군 한 명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다른 이들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많이 따뜻해졌어. 겨울도 거의 끝났나 봐.”
“그러게 말이야. 엄청 추웠는데, 이 정도면 많이 나아졌지.”
그들은 자신들이 입고 있는 따뜻한 옷을 만지작거렸다.
“동제국의 라엘 황제가 보내 준 옷이 아니었다면 겨울을 어떻게 보냈을지 몰라. 얼어 죽었을 것 같은데.”
왕국군이 입고 있는 방한복은 지난번 눈사태 사건 때 왕국에 감사하는 의미로 라엘이 선물한 것이었다. 제국군에 비해 복장이 부실했던 왕국군은 그 방한복에 의지해 겨울을 났다. 왕국군은 방한복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렇게까지 나쁜 이는 아닐지도 모르겠어. 동제국에서는 명군이라 불리기도 한다고 하고.”
“그러게.”
물론 여전히 동제국을 받아들이긴 어려웠다. 하지만 이전보다 조금씩은 반감이 수그러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계속 대치 중이지만, 양군은 별다른 충돌 없이 지내고 있었다. 곧 평화 협정이 체결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런데 여왕 전하께서 정말로 그 피의 황제와 국혼을 올리는 건가?”
그 물음에 왕국군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게 말일세. 난 이 결혼에 반대야.”
“어째서?”
“모리나 전하가 훨씬 아까워!”
“맞아! 전하께서 결혼이라니! 누구에게도 줄 수 없네!”
제국인들이 그녀를 황후로 맞길 바라는 것과 다르게 왕국민들은 국혼을 반대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딸의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처럼 자신들의 소중한 왕이 타국의 황제와 결혼하는 것이 그냥 싫었던 것이다. 물론 모리나가 자국의 귀족과 결혼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싫긴 했을 거다. 누구와 결혼한다고 해도 다 도둑놈처럼 느껴질 테니.
“그러면…… 이대로 전쟁은 끝나는 건가? 제국도 얌전히 물러나고?”
“그러게.”
왕국군은 중얼거렸다. 죽고 죽이는 전쟁을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 상대가 아무리 미운 동제국이라 해도 말이다. 그녀가 결혼하는 것은 싫지만 전쟁이 끝나는 것은 기뻐 마땅한 일이다.
“너무 잘 풀려 왠지 불안하구먼.”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그냥. 마치 꿈만 같이 다 잘 해결되고 있지 않은가.”
병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최근의 상황은 너무나 좋았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다 전하의 덕이야.”
누군가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친이 이루어진 것은 모리나의 선행들이 열매를 맺은 것이지, 왕국군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하께는 정말 감사해.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두.”
“맞아. 정말 우리에게 과분한 왕이셔.”
왕국군은 요새 가운데 있는 회색의 칙칙한 건물을 바라보았다. 모리나가 집무실로 쓰고 있는 건물이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클로얀 왕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기 싫은 일이었다. 이렇게 어엿한 나라로 발돋움하기는커녕 동제국과 서제국 양국 사이에 껴서 새우등만 터졌을 것이 분명했다.
“전하께 신의 축복이 있기를.”
모두가 진심을 담아 그녀를 축복하였다.
하지만 왕국의 모두가 화친을 기뻐하는 것은 아니었다. 제국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 특히 왕실 기사단원 중 일부가 강경한 반대를 표명했다.
“단장님, 제국은 왕국의 적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찌 제국과 국혼을 맺으려 하시는 것입니까?”
왕실 기사단의 부단장 페르딘 남작이었다. 그는 지난 전쟁 때 라엘이 이끄는 제국군에 자신의 영지와 가족들을 전부 잃은 과거가 있어 제국을 굉장히 증오하고 있었다. 단장 바르한 백작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양국의 화친은 전하께서 결정하실 문제이다.”
“하지만……!”
“우리는 전하를 섬기는 기사일 뿐이다. 주제넘게 나서지 말도록.”
부단장 페르딘 남작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전 클로얀 왕국의 재건을 바란 거지, 제국의 속국이 되는 것을 바란 것이 아닙니다.”
“말조심하게!”
바르한이 버럭 화를 내었다.
“우리와 제국은 동맹을 맺는 거지, 속국이 되는 것이 아니야. 국혼을 맺는다고 해도 전하께서는 여전히 왕국에 머물며 클로얀을 다스릴 거다.”
달래듯 설명하였으나 페르딘 남작은 여전히 받아들이는 기색이 아니었다.
“모르겠습니다. 전 이번만큼은 전하께서 잘못하고 계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제국은 싸워 물리쳐야 할 적입니다.”
내뱉듯 말한 페르딘 남작은 거칠게 등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부단장!”
곁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한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부단장님의 마음도 이해는 갑니다. 제국군에게 가족을 잃으셨으니까요.”
바르한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저렇게 생각하는 이가 많은가?”
“많지는 않습니다. 일부의 생각입니다. 대부분은 전하의 뜻에 따르고 있습니다.”
“그렇군.”
바르한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전하의 뜻이 옳다고 하더라도 당장 마음의 원한을 풀기는 어렵겠지. 그대가 가서 잘 달래 주기라도 하게.”
한편, 부단장 페르딘 남작은 성민들이 거주하는 주점에서 술을 마셨다.
“부, 부단장님. 과음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를 따르는 종자가 쩔쩔매며 말렸다. 아무리 화친으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지만 엄연히 전쟁 중이다. 가벼운 술 한잔은 몰라도 과음은 당연히 금지였다.
“시끄러! 내가 알아서 해!”
하지만 페르딘 남작은 버럭 화를 낼 뿐 술을 마시는 걸 멈추지 않았다. 페르딘 남작은 원래 이런 인물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참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제국과 화친한다고? 그것도 모자라 전하께서 제국의 황제와 국혼을 맺는다고?’
사실 페르딘 남작은 왕가의 재건보다는 복수심으로 반제국 활동을 벌여 왔었다. 그런 그에게 이번 결정은 결단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제기랄!’
그렇게 얼마나 술을 마신 다음일까? 말리는 종자를 쫓아 보낸 후 혼자서 고주망태가 되었을 때였다.
“페르딘 남작님이십니까?”
“……?”
페르딘은 눈을 깜빡거렸다. 기사단에서 자신을 찾으러 온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전신을 로브로 가리고 있었고, 무엇보다 처음 듣는 음성이었다. 허스키한 중성적인 느낌의 목소리.
“누구지?”
“남작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나에게?”
“네.”
페르딘 남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 보는 인물과 대화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다.
“할 말이 있다면 내일 기사단으로…….”
하지만 정체불명의 인물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그의 몸을 뻣뻣이 굳게 만들었다.
“제국과의 화친을 막고 싶지 않습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제국에 복수하고 싶지 않습니까?”
“……!”
페르딘 남작은 검에 손을 가져갔다.
“넌 누구지?”
그때, 남자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로브가 살짝 벗겨졌다. 그리고 드러난 외모에 페르딘 남작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넌…….”
마치 여인처럼 아름다운 외모, 동시에 얼굴의 반을 뒤덮은 흉측한 흉터. 죽었다고 알려진 라키 드 스토른 백작이었다.
“당신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두죠.”
“…….”
페르딘 남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스토른 백작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얼굴을 뒤덮은 흉터가 꿈틀대며 뱀 같은 섬뜩한 인상을 만들어 냈다.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 보시겠습니까?”
그리고 며칠 뒤, 성 밖 으슥한 곳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신이 발견되었다. 건장한 남자의 시신이었는데, 특이한 점은 얼굴 가죽이 벗겨진 채 죽었다는 것이다.
“으…… 누구지?”
“누가 이런 끔찍한 짓을?”
시신을 발견한 병사들은 얼굴을 찌푸렸다.
“소란 피우지 말도록. 무슨 일인가?”
그때, 옆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목소리에 병사들은 놀라 경례했다.
“남작님을 뵙습니다.”
나타난 이는 왕실 기사단의 부단장 페르딘 남작이었다. 페르딘 남작은 심기가 불편해서인지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가 발견되어서…….”
“됐다.”
“네?”
“내가 처리하겠으니, 그만 가서 일 보도록.”
병사들은 고개를 갸웃하고 물러갔다.
‘원래 이런 일을 챙기는 분이셨나?’
‘그러게. 표정은 왜 저렇게 딱딱하지?’
‘기분이 안 좋으신가 보지. 괜히 불똥 튀기 전에 돌아가자.’
병사들이 속삭이며 사라지자, 페르딘 남작이 시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쁘지 않군. 얼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 찝찝하긴 하지만, 잠시만 참으면 되니.”
그렇게 말하는 페르딘 남작의 미소는 라키 드 스토른 백작의 것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 놀랍게도 스토른 백작이 페르딘 남작으로 위장한 것이다. 이전 요하네프 3세가 사용했던 동방의 역용술과 직접 벗겨 낸 얼굴 가죽을 이용한 결과였다.
“오래 남지 않았군.”
페르딘 남작, 아니, 라키는 모리나 여왕이 거하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좋은 선물을 준비 중이니, 부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요.”
그는 섬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은애하는 전하.”
* * *
며칠 뒤, 드디어 양국은 화친을 맺기로 결정하였다. 아직 하얗게 덮인 눈이 녹기 전, 늦은 겨울의 일이었다.
‘드디어.’
마리는 떨리는 눈동자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와 함께할 수 있어.’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 하지만 이제는 꿈이 아니었다. 눈앞에 다가온 현실이었다.
‘물론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아직 양국 간의 문제는 남아 있었다. 하지만 마리는 다 잘 해결해 나갈 거라 다짐했다. 라엘과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
그렇게 꿈만 같은 기대감과 함께 며칠간의 시간이 흘렀고, 평화 협정을 위한 회담 날이 다가왔다.
“알피엔산으로 출발하겠습니다, 전하.”
마차에 탄 마리에게 기사가 말했다. 회담 장소는 알피엔 산기슭으로 정했다. 화친의 계기가 된 눈사태 구조 사건의 장소이기도 했고, 양국의 공동 영향권이라 중립적인 장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가시죠.”
평화 협정을 위한 회담인 만큼 호위 인원은 단출했다. 명목적인 이유는 상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지만, 각국의 군주가 라엘과 마리니 서로를 믿는 마음이 더 컸다. 제국도 최소한의 경호 인원만 대동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마차가 출발하기 전이었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선두에 꽂힌 왕가의 깃대가 툭 하고 부러져 버렸다.
“이런. 바로 새 깃대로 바꾸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기사가 찝찝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뭐지?’
마리도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겠지만, 깃대가 부러지는 것은 대단히 불길한 징조로 여긴다. 하필 평화 회담을 앞두고 저런 흉조라니?
“선두 출발!”
깃대를 간 후, 호위 책임자인 부단장 페르딘 남작이 외쳤다. 기사단의 단장인 바르한은 마리가 부재한 사이 왕국군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기사들은 혹시나 무슨 일이 있을까봐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의 불길함과 다르게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아무런 일 없이 마차는 회담 장소에 도착하였고, 비슷한 시간에 도착한 제국의 황제 라엘이 화한 표정으로 그녀를 맞았다.
“마리!”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가 그는 아차, 한 표정으로 말을 바꿨다.
“클로얀 왕국의 모리나 국왕을 뵙소. 먼 길 오느라 수고하셨소.”
마리는 속으로 쿡쿡 웃음을 지었다.
“폐하께서도 먼 길 행차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종전 및 양국 간의 불가침조약…….”
라엘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국혼을 동반한 동맹 협약에 대해 논하고자 하오.”
국혼.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마리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녀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폐하.”
그렇게 협정이 시작되었다. 서로의 관계가 관계이니만큼 분위기는 좋다 못해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쉽게 협약 문서에 직인을 찍지는 못했는데, 양국의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부분은 세세히 조율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서로를 사랑한다고 해도 국가의 이익이 걸린 일에 무작정 양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종전과 국혼을 동반한 동맹이란 대원칙은 쉽게 합의가 되었지만, 세부 사항으로 들어가자 그와 그녀는 긴 논의를 이어 가야 했다.
“역시 그대와 협정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군.”
라엘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워낙 똑똑한 그녀다. 자신의 편으로 있을 때는 몰랐는데, 상대국으로 만나니 이렇게 까다로운 협상 상대가 없었다.
“그래도 이 부분은 왕국 동부 지방 사람들한테 양보할 수 없는 사항이라…….”
마리는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말했다. 라엘은 피식 웃었다.
“됐소이다. 그러면 그 부분은 왕국 측으로 할당하고, 대신 이 사항을 양보해 주시오.”
그래도 전반적으로 협상은 원활했다. 고성과 욕설이 오가기도 하는 협상장에 비하면 티 파티라도 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때, 가만히 경호를 서고 있던 페르딘 남작이 주변 기사에게 조용히 말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다.”
“네, 알겠습니다.”
기사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쉽군.”
근처 얕은 언덕에 올라온 페르딘 남작, 아니, 라키가 미소 지었다. 언덕에서는 협상 장소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양국을 파멸시킬 방법은 간단하지.”
나직하게 중얼거린 그는 근처에 미리 숨겨 두었던 장궁을 집어 들었다.
“왕국군이 라엘 황제를 죽이면 돼. 아주 간단한 방법이지.”
섬뜩한 이야기였다. 왕국 기사단으로 위장한 채 라엘을 시해하겠다니! 만약 그렇게 되면 평화 협정은 물론 왕국의 운명은 끝이었다. 분노한 제국군은 왕국을 초토화할 게 분명했다. 마침 이 근방에는 제국의 대표적 주전론자인 메일 후작의 1군단이 주둔 중이었다.
“이 한 발이면 모든 게 끝이다. 왕국도, 그리고…… 모리나, 당신의 행복도.”
그는 활시위를 끼익 하고 뒤로 잡아당겼다. 화살은 막사의 중앙 부분, 라엘이 자리한 부분을 향했다. 날카롭게 벼린 철시(鐵矢)라 저런 막사 따위 단숨에 관통하고 라엘의 몸을 꿰뚫을 것이다.
‘끝이다.’
그런데 모두의 운명이 갈릴 그 결정적 순간! 막사 안에서 서류를 살피던 마리는 순간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신이 도우신 것일까? 아니면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기적을 일으킨 걸까? 싸늘한 한기가 그녀의 온몸에 감돌았다. 마치 목에 칼이 들어오는 듯한 불길한 느낌.
“모리나 국왕?”
파리해진 그녀를 보고 라엘이 의아한 표정을 보았다. 마리도 그를 마주 보았다. 그 순간 왜일까? 마리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였다. 다급히 그를 껴안은 것이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마리?!”
라엘은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휘익! 퍼억!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마리의 몸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
협상 장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뻣뻣이 굳어버렸다. 잠시간 시간이 멈추어 선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비명이 울렸다.
“전하! 이게 무슨?!”
“폐하, 괜찮으십니까?!”
왕국 기사와 제국 기사들이 그들에게 몰려들었다.
“마리! 마리! 이런 제기랄!”
라엘은 다급히 마리의 상태를 살폈다. 화살은 팔뚝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었으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독이었다!
“라, 란…….”
마리가 파리해진 얼굴로 라엘을 바라보았다. 급속도로 창백해지는 얼굴을 본 라엘은 화살에 독이 발라져 있음을 깨달았다.
“독이다! 빨리 붕대와 응급처치할 것을 가져와라! 어서!”
기사들이 다급히 약품과 처치 도구를 가져왔다.
“제발! 마리, 조금만 버텨라! 제발……!”
라엘은 미친 듯한 마음으로 그녀의 상처를 치료했다. 독이 퍼지지 않게 팔뚝 위를 묵고, 조심스럽게 화살을 뽑은 후 직접 입을 대어 독을 빨았다. 일반적으로 상처에 입을 대어 독을 빠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권유되지 않는 처치법이지만, 지금은 이런저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란…….”
마리가 독 기운 때문에 몽롱한 시선으로 라엘을 바라보았다.
“괜…… 찮으신 거죠?”
“난 괜찮다. 그대가 지금!”
“……다행이다.”
괜찮다는 말에 옅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라엘은 울컥 가슴이 치밀어 올랐다.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다.
“조금만 견디도록. 바로 처치했으니, 곧 좋아질 거야. 그러니!”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막사 밖에서 요란스러운 함성이 들렸다.
“와아!”
“동제국 놈들을 쳐라!”
막사 안에 있던 제국 기사들은 검을 꺼내 들었다.
“이게 무슨? 왕국군의 공격인가?”
왕국 기사들도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우, 우리의 공격이 아니오! 이건 분명 무슨 오해가……!”
하지만 바로 화살이 협상 장소 안으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폐하!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라엘은 마리를 안고 몸을 일으켰다. 마리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저, 저는 괜찮아요. 놓고 가세요.”
정황을 봤을 때 음모를 꾸민 흉수는 라엘을 노리고 있었다. 바로 몸을 빼내야 하는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자신을 데리고 가면 발목을 잡힐 게 분명했다.
“내가 그대를 어떻게 놓고 가는가!”
하지만 라엘은 버럭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길을 열어라!”
“네, 폐하!”
제국 기사들이 먼저 막사 밖으로 뛰쳐나왔다. 왕국 기사들도 그들과 힘을 합쳤다. 밖에 나와 보니 왕국군 복장을 한 병사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족히 100명은 넘어 보였다.
‘이게 어떻게 된?’
마리는 라엘의 품에 안긴 채 눈을 깜빡거렸다. 믿기지가 않았다.
‘평화 협정을 반대하는 이들이 이렇게 많았다고?’
그녀도 제국과 화친에 부정적인 인물들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수의 의견일 뿐이었고, 이렇게 군사적 행동에 나설 기미는 전혀 없었는데? 그때, 저 위에서 모든 음모를 꾸민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의도치 않게 국왕 전하의 옥체를 손상케 하였군요. 모두 왕국을 위한 충심으로 한 일이니 용서해 주길 바랍니다.”
마리는 그 인물을 본 순간 직감했다.
‘페르딘 남작이 아니야! 아무리 페르딘 남작이 화친을 반대했어도 이런 일까지 저지를 리가 없어.’
무엇보다 눈빛이 전혀 달랐다. 페르딘 남작이 우직한 눈빛이었다면, 지금 저 위에 서 있는 이의 눈빛은 뱀처럼 사이했다.
‘설마?’
마리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침을 꿀꺽 삼켰다. 저 눈빛은 누군가를 강하게 연상시켰다. 바로 기이할 정도로 발견되지 않던 시신. 스토른 백작이었다.
“제국의 황제를 죽여라!”
“왕국민의 원한을 갚자!”
왕국 병사들은 눈에 핏발을 세운 채 검을 휘둘렀다.
‘그, 그만둬!’
마리는 저들이 모두 제국에 깊은 원한을 가진 이들임을 깨달았다. 스토른 백작은 왕국의 페르딘 남작으로 위장한 후 저들을 포섭해 이번 일을 벌인 것이다. 마리는 그들을 말리려 하였으나, 독에 마비된 탓인지 입도 벙긋할 수가 없었다.
“폐하를 지켜라!”
“막아!”
호위로 온 기사들이 필사적으로 막아섰지만 병력의 차이가 너무 컸다. 눈앞의 적을 베어도 옆에서 창이 날아왔다. 기사들은 한 명, 한 명 몸에서 피를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폐하, 피하십시오!”
기사 한 명이 피를 토하며 외쳤다. 그렇게 기사들이 목숨을 바친 덕에 퇴로가 열렸다. 라엘은 한 손으로 마리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검을 휘두르며 왕국군 사이를 헤쳐 나갔다.
“끄악!”
라엘의 검술은 극에 달한 경지인지라, 왕국군은 짚단이 쓰러지듯 옆으로 무너졌다.
“폐하, 어서 가십시오! 어서!”
라엘은 이를 악물고 포위망에 순간적으로 생긴 틈으로 빠져나갔다.
“적들을 막아라!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
제국 기사들이 라엘이 빠져나간 길을 틀어막았다. 목숨을 버린 그들의 분투에 왕국 병사들은 쉽게 길을 뚫지 못했다.
“남작님, 이러다가 라엘 황제가 도망가겠습니다.”
한 기사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페르딘 남작과 마찬가지로 과거 전쟁 때 제국군에 일가족을 잃은 이로 복수를 위해 이번 거사에 동참했다. 라키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도망가도 괜찮다.”
“어째서?”
라키는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함정은 이것 하나만이 아니니까.”
그는 이번 음모를 꾸미며 이중, 삼중의 설계를 하였다. 화살이 빗나갈 때를 대비해 병사들을 매복했고, 혹시나 도주할 경우를 대비해 또 다른 병사를 도주로에 준비해 두었다.
‘어차피 저 길은 병사들이 매복해 있는 곳. 느긋하게 잡으러 가면 되겠군.’
천천히 걸어가면 이미 라엘 황제는 목숨을 잃은 뒤일 거다. 라키는 라엘의 시신을 보며 절망에 빠져 있을 모리나의 얼굴을 기대하였다.
이윽고 마지막 제국 기사가 쓰러진 후, 라키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갔는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도주한 방향으로 마리가 흘린 피가 점점이 떨어져 있었으니까. 라키는 땅에 엉겨 붙은 그녀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었다. 그는 악마처럼 그녀의 피를 혀로 핥았다. 비릿하게 퍼지는 향을 느끼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모리나.’
라키는 그녀의 이름을 속으로 불렀다. 마치 갈망하는 듯한 마음으로.
‘드디어 당신이 파멸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겠군.’
저 앞에 매복한 이는 하메른 남작이었다. 제국에 반감을 가진 이들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강경론자. 심지어 하메른 남작은 이전부터 서제국, 정확히는 그와 연결점이 있었다. 반제국 활동을 벌일 때 라키의 지원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하메른 남작은 라키의 이번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 하메른 남작이면 이미 라엘의 목을 치고도 남았다. 그때 저 멀리 매복 장소에서 거친 함성이 들려왔다.
‘끝났군.’
라엘의 목이 떨어지는 소리라 생각한 라키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매복 장소에 도착한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생각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왜 대치하고 있는 거지?’
하메른 남작은 검을 든 채 라엘을 노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압도적인 숫자이니 공격 명령만 내리면 바로 목을 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왜 가만히 있는 것입니까? 저 피의 황제는 왕국의 원수입니다. 당장 목을 치십시오.”
하지만 하메른 남작은 요지부동 뚫어져라 라엘을 노려볼 뿐이었다.
“누가 감히 저런 일을 한 거지? 네 짓인가?”
“네?”
라키는 반문했다.
“누가 전하의 옥체를 상하게 했느냐는 말이다!”
“……!”
그제야 라키는 하메른 남작이 바라보는 게 모리나였음을 깨달았다.
“거사 중 작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니…….”
“작은 문제? 전하께서 쓰러지셨는데, 작은 문제라고?”
라키는 당황했다.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는 애써 침착함을 되찾고 타이르듯 말했다.
“지금은 저 악마, 제국의 황제를 처단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잊으셨습니까? 저 악마가 이전에 왕국에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하메른 남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에 라키의 선동에 넘어간 모든 이가 그렇듯, 하메른 남작도 제국의 침공 때 모든 걸 잃었던 사람이었다. 깊은 원한에 사로잡혀 있어 황제를 죽일 수 있다는 말에 앞뒤 가리지 않고 나서게 되었다. 하지만,
‘맙소사.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지?’
하메른 남작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그건 함께 행동에 나섰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라엘의 품에 안겨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모리나의 모습이 그의 가슴에 박혀 들었다. 그들은 원수를 갚으려 했던 거지, 소중한 왕을 해하려 했던 것이 아니다.
‘눈에 무언가 씌었던 건가? 내가 어쩌자고.’
피 흘리는 모리나의 모습을 본 순간, 꿈에서 깨듯 정신이 확 들었다. 만약 그들이 라엘 황제를 죽이면 그녀도 죽을 것이다. 그녀뿐이 아니다. 수많은 왕국민이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전하.’
하메른 남작의 머리에 지금껏 그녀가 헌신해 오던 일이 떠올랐다. 오로지 왕국을 위해 희생만 해온 그녀이다. 그런데 자신들은 그런 그녀를 배신한 것이다. 오로지 복수만을 위해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라키가 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무엇하는 겁니까? 저 악마 때문에 흘린 왕국의 피눈물을 생각하십시오.”
하메른 남작을 비롯한 기사들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복수심과 모리나를 향한 죄책감이 충돌했다. 그때였다. 라엘의 품에서 마리가 울컥 죽은피를 토했다. 미처 해독하지 못한 독이 퍼진 탓이다.
“마리!”
라엘의 얼굴이 하얘졌다. 최대한 빨리 제대로 된 치료를 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치료를…….’
그는 잠시 고심하더니 결단을 내렸다.
챙그랑!
모두가 놀라 크게 눈을 떴다. 라엘이 검을 땅에 버린 것이다.
“그냥 날 죽여라.”
“……?!”
“이렇게 대치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나보다 그녀의 목숨이 훨씬 소중하니, 빨리 날 죽이고 그녀를 치료하도록. 어서!”
맹독을 사용했는지 마리의 상태는 시시각각 나빠지고 있었다.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 대치가 더 길어지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어차피 도주하기 그른 상황. 라엘은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더라도 그녀를 살려 내기로 결정했다.
“어서!”
하지만 왜일까? 하메른 남작은 오히려 더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꿈에도 그리던 복수의 순간이건만, 이대로 그를 죽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가 계속 망설이자 다급해진 라키가 나섰다.
“모리나 전하를 걱정하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독에 대한 해약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거기까지 이야기한 라키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하메른 남작이 라키를 돌아보았다. 남작의 눈빛은 지극히 차가웠다.
“지금 혹시 무슨 생각을……?”
“닥쳐라. 이 악마.”
하메른 남작은 쇠뇌를 라키에게 겨누었다. 라키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고, 남작은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퍼억!
화살이 라키의 머리를 꿰뚫었다. 인형술사라 불리며 공포의 대명사였던 스토른 백작의 허무한 최후였다.
“빨리 해약을 찾아 전하께 투약하도록!”
“네!”
병사들이 라키의 품을 뒤져 약을 찾았다. 다행히 해약은 쉽게 발견되었고, 왕국군은 라엘의 품에서 모리나를 받아와 해약을 먹였다. 다행히 효과가 있는지, 모리나의 상태는 더 악화하지 않았다. 추가로 급한 처치를 더 한 후, 하메른 남작은 라엘을 바라보았다.
“…….”
라엘은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지 쓰러진 마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이 가득한 눈길로.
“날 죽일 건가?”
하메른의 시선을 의식한 라엘이 물었다. 하메른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빛에 다시금 원념이 차올랐다. 라엘은 씁쓸히 웃었다. 길이 막혀 도주도 무리였고, 저항할 방법도 없었다. 하메른 남작이 죽이려 든다면 그는 그냥 죽어야 했다. 그런데 하메른 남작이 의외의 물음을 하였다.
“죽음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전 당장에라도 당신을 죽일 수 있습니다.”
“두렵지는 않다. 지금껏 많은 피를 흘렸으니, 이런 단죄를 받아도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라엘은 씁쓸히 말했다.
“다만 그녀와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군. 아니, 내가 없어져 그녀가 고통스러워할 것을 생각하니 그게 걱정돼.”
라엘은 그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아릿함에 물들었다. 하메른은 검을 움켜쥐었다.
“당신으로 인해 우리 왕국에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압니까? 제 주변에 수많은 이가 당신으로 인해 죽어 갔습니다.”
“…….”
“신께서는 용서를 강조하셨지만, 제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전 영원히 당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라엘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가 흘린 피의 무게이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왔지만, 영원히 떨칠 수 없으리라. 라엘은 원념에 번득이는 하메른 남작의 눈빛을 보며 죽음을 각오했다. 그녀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지만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 하메른 남작이 생각지 못한 행동을 하였다.
쨍그랑!
바위에 검을 내려쳐 자신의 검을 부러뜨린 것이다!
라엘은 그 돌발 행동에 눈을 크게 떴다. 하메른 남작은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당신을 죽이고 싶습니다. 갈기갈기 찢어 죽은 이들의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라엘은 말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 하메른 남작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 몸짓에는 깊은 절망이 담겨 있었다.
“정말. 정말 당신을 살려 두고 싶지 않지만…… 제가 어찌 전하를 고통스럽게 하겠습니까? 오로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 오고 있는 분인데.”
하메른 남작은 왕위에 앉은 그녀의 모습을 모두 지켜봤었다. 오로지 왕국민을 위해 희생만 해온 그녀이다. 아무리 복수를 간절히 바라 왔다고 해도, 그런 그녀를 도저히 배신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제길…… 제기랄.”
결국, 복수를 포기한 하메른 남작은 욕설을 내뱉었다. 마치 울음을 삼키는 듯한 욕설이었다. 라엘은 입을 다물었다. 이 순간 그가 뭐라고 하든 그건 다 기만에 불과할 것이다.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하메른 남작과 그 뜻을 함께했던 기사들은 이를 악물고 슬픔을 삭였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힘겹게 떨리는 목소리가 그들에게 들려왔다.
“남작…… 그리고 경들…….”
“전하!”
마리였다. 해약을 먹고 간신히 의식을 차린 그녀가 파랗게 죽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마리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손끝 하나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겨, 경들의 마음 이해해요. 오히려…… 제가 경들의 마음을 배려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그녀는 떠듬떠듬 힘겨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그래도 조금만 저를 믿어주시면 안 될까요? 저…… 최대한 노력해 볼게요. 당신들의 오늘 결정이 복수보다 훨씬 값진 결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훗날 돌이켜 봤을 때, 당신들이 후회하지 않도록…….”
마리는 천천히 라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반드시 해낼게요. 그와…… 함께.”
라엘이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맞잡았다. 그러고 그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너희의 마음을 위로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 섣부른 말은 하지 않겠다. 대신 한 가지만 맹세하겠다.”
“…….”
“클로얀 왕국을, 이제 국혼으로 맺어질 동맹국이 될 너희 왕국을 항상 속죄하는 마음으로 대하겠다. 그래서 먼 훗날, 양국의 사람들이 지금처럼 증오에 가득 찬 것이 아닌, 서로 함께 행복해할 수 있도록 그녀와 함께 노력하겠다.”
라엘은 자신의 말에 저들의 마음이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고작 말 몇 마디에 움직이기에는 깊고 깊은 원한이었으니까. 그래도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지금껏 제국민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았듯 왕국에도 마찬가지였다.
“…….”
둘의 말은 들은 하메른 남작과 기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하메른 남작은 굵은 눈물을 흘렸다. 남작뿐이 아니었다. 각자의 원한으로 검을 들었던 기사들은 모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전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도저히 황제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메른 남작이 무릎을 꿇었다.
“다른 건 모르겠습니다. 그저 전하이기에 믿겠습니다.”
다른 기사들도 함께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전하를 따르겠습니다.”
짧지만 굳은 마음이 담긴 음성이었다. 라엘과 마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둘 사이를 가로막던 마지막 난관도 끝을 맺었다. 마침 구름에 가려 있던 하늘에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마치 둘의 앞날을 축복하는 듯한 따뜻한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