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있는 시녀님-48화 (49/54)

Chapter 3

대화를 마친 둘은 숲의 입구에 도착했다. 이제 헤어져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때였다. 그들은 마지막 입맞춤을 나누었다. 서로를 향한 갈망이 안타까움에 섞여 번져 나갔다. 한참이나 이어진 입맞춤이 끝난 뒤에도 둘은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한없이 바라만 보았다.

“란, 우리 다시 만날 수 있겠죠?”

마리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라엘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음에 만날 때는 넌 내 아내가 될 것이다.”

그 말에 마리는 웃음을 지었다. 그의 아내. 꿈같은 일이었다.

“네, 그러면 됐어요. 저 이만 가 볼게요.”

마리는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히 눈물이 울컥 나올 것 같아 그녀는 급히 등을 돌렸다.

“저…… 정말 가 볼게요.”

마리는 미리 준비해 둔 말에 올라탔다. 그러고 막 출발하려고 할 때, 라엘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

“신의 가호가 그대에게 함께하기를.”

그 축복에 마리는 마주 말했다.

“네, 란에게도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혹시라도 전투가 벌어지거나 하면 꼭 조심하세요. 다치면 절대 안 돼요.”

마리는 속으로 신께 기도했다.

‘주님, 정말로 저희를 축복해 주세요. 제발 저와 란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렇게 둘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이별을 하였다.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간 둘은 파국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사랑하는 서로를 위해서.

* * *

왕국으로 돌아온 마리는 일단 키에르한을 불렀다.

“각하,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무슨 일입니까, 전하?”

심상치 않은 그녀의 목소리에 키에르한은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이만 영지로 돌아가 주세요.”

키에르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를 생각해서 그러는 것입니까?”

마리는 부정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야 괜찮았지만 전쟁이 시작된 다음에도 왕국에 머물면 각하의 입장이 곤란해질 거예요. 이제는 돌아가셔야 해요.”

서제국과 전쟁 중에 클로얀 왕국을 도운 것은 용납 가능한 범위의 일이다. 서제국이 동제국의 주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동제국과의 싸움을 앞둔 지금 동제국의 대귀족인 그가 그녀의 곁에 머무는 것은 이적 행위나 다름없었다.

“상관없습니다. 그저 키에르한이란 일개 기사로서 머물고 있는 것이니까요. 세이튼 가문과 상관없는 제 개인의 일탈 행위이니 가문에 큰 피해를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리는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을 하였다. 서제국과 맞설 때 돕던 쉴트 기사단과 그의 군단병은 모두 동제국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그가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그렇다고 수하들에게까지 그 충성을 강요할 수는 없었기에 클로얀에 남은 것은 키에르한 한 명뿐이었다.

“전 그저 당신의 기사로서 곁에 남아 있는 것일 뿐입니다.”

“각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적합한 이에게 가주의 모든 권한을 위임한 상태입니다. 만약 동제국이 제 행동을 문제시 삼으면 그들이 알아서 저를 파문시킬 것입니다.”

“……!”

마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키에르한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녀의 곁에 남은 것이다. 지순할 정도로 헌신적인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그렇게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듯 희생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가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을 깨달은 마리는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이건 비단 각하만을 위한 제안이 아니에요. 이곳에 머무는 것보다 동제국으로 돌아가는 게 저한테 훨씬 도움이 되는 길이에요.”

“어째서입니까?”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마리는 설명을 이었다.

“사실 각하가 제 곁에 머무는 것은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아요. 아무리 각하가 강한 기사라고 해도, 전쟁 중에 개인의 영향력은 미비하니까요.”

키에르한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반면 동제국으로 돌아가면 이야기가 다르죠. 각하는 동제국의 손꼽히는 대귀족. 이곳에 머무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어요.”

“그 말씀은?”

“네, 맞아요. 저는 각하께서 동제국으로 가서 클로얀 왕국에 힘을 보태 주었으면 좋겠어요.”

키에르한은 그녀의 말뜻을 깨달았다. 지금 그녀는 그가 제국에서 친 클로얀파가 되어 칼끝을 걸을 양국 관계에서 조력을 달라는 뜻이었다. 확실히 이곳에서 기사로 머무는 것보다 훨씬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길이긴 했다. 하지만 키에르한은 바로 승낙하지 못했다. 그녀를 홀로 놔두고 떠나기가 꺼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말했다.

“저는 이제 괜찮아요. 그러니 절 믿고 떠나 주세요.”

키에르한은 마리의 결연한 눈빛을 보고 그녀가 모종의 결심을 했음을 눈치챘다.

“……더는 아파하지 않으시는군요.”

“어떻게든 이 상황을 극복해 내기로 결정했으니까요.”

그제야 키에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

“어디에 있든지 전 당신의 기사. 견디기 힘든 상황이 오면 제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마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자신을 위하는 그의 마음이 고마웠다.

“네, 감사해요.”

그렇게 키에르한이 돌아간 이후, 마리는 방법을 고민하였다.

‘그가 진군을 늦추려 노력한다고 해도 시간을 무한정 벌 수는 없어. 최대한 빨리 묘책을 마련해 내야 해. 어떤 방법을 써야…….’

수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녀였지만 쉽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에 매달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야. 반드시 방법이 있을 거야.’

그녀가 이를 악물며 고뇌하고 있는 사이, 도합 10여 만이 넘는 대군이 대치하고 있는 국경의 긴장감은 나날이 고조되고 있었다. 군사들끼리 우발적인 충돌이 잦아졌고, 사실상 전쟁에 돌입한 것과 다름없는 분위기가 흘렀다.

‘언제 진군을 시작하는 거지?’

‘폐하께서 작전을 준비 중이신 건가?’

동제국군은 황제의 진군 명령만 기다렸고,

‘이번에는 절대로 동제국군에 패하지 않겠어.’

‘반드시 승리하겠어.’

왕국군은 결전의 의지를 다지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팽팽한 긴장감이 극에 달해 터지기 직전의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양군에 갑작스레 열병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 * *

“열병이라고요?”

“네, 전하. 갑자기 여기저기서 고열을 호소하며 병사들이 쓰러지고 있습니다.”

바르한의 보고에 마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혹시 전염병이?’

그녀는 다급히 환자들을 보러 갔다. 대략 50명 정도 되는 병사들이 커다란 막사 안에 모여 진료를 받고 있었다.

“상태가 어떤가요?”

“다들 고열과 복통을 호소 중입니다. 피 섞인 변을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전염병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안 좋은 상황에 최악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최대한 빨리 조처를 해야 해. 잘못하다가는 큰 피해가 생길 수도 있어.’

수많은 병사가 밀집해 생활하는 군대에서 전염병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역사를 살펴도 전염병 때문에 군대가 전투 불능에 빠진 경우는 적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전염병이지?’

마리는 이전 꿈속에서 경험했던 ‘의사’의 능력을 사용해 환자들을 진료했고, 곧 특징적인 증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체온에 비해 심장의 맥이 느려.’

열이 나 체온이 올라가면 자연적으로 심장의 맥이 빨라지게 마련인데, 그런 것이 없었다. 상대적인 서맥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적 증상. 바로 가슴과 등 쪽의 담홍색 모양의 장미 모양 발진이었다. 그 특징들을 토대로 마리는 곧 한가지 진단을 추측했다.

‘장티푸스성 열이야. 양상이 다른 면도 있지만, 비슷한 질환임이 확실해.’

장티푸스! 이 시대에 흔히 유행하는 전염병으로 보통 오염된 물을 통해 전파된다. 일반적인 장티푸스에 비해 진행 속도가 훨씬 빠르고 양상이 더 심해 정확히 같은 병이라 하기는 어려웠지만, 대충 비슷한 전염병으로 보였다.

“현재 어디에서 물을 공급받고 있죠?”

“마이엘 호수에서 뻗어 나온 천의 물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마이엘 호수는 동쪽에 위치한 상수원이었다. 현재 동제국군 1군단이 호수 인근에 주둔 중이었는데, 수만 명이 머물며 물이 오염된 것 같았다.

“일단 다른 곳에서 물을 공급받도록 하세요. 그러면 추가적인 환자는 발생하지 않을 거예요.”

그나마 크게 전염병이 번지기 전에 원인을 확인해서 다행이었다. 오염된 물의 사용을 피하면 큰 피해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문제가 남아 있었으니, 이미 감염된 환자들의 치료였다.

“크으…….”

전염병에 걸린 병사들은 고통에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다행히 마리에게는 이들을 치료할 방법이 있었다. 바로 과거 동제국의 수도에서 라엘의 중병을 치료한 적 있었던 ‘푸른곰팡이 약’이었다.

‘전투에 대비해 미리 다량으로 준비해 놓길 다행이야.’

전장에 나서기 전 마리는 미리 푸른곰팡이에서 대량의 약을 추출해 놓은 상태였다. 부상당한 병사들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곧바로 약을 투약하였고, 하루 이틀이 지나자 환자들은 호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가, 감사합니다, 전하.”

마리의 빠른 조처 덕분에 목숨을 구한 환자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감사를 표했다.

“아니에요. 더 나빠지지 않아 다행이에요. 푹 더 쉬어서 빨리 낫도록 하세요.”

“네, 빨리 나아서 전하를 위해 싸우겠습니다!”

환자들은 침상에 누워 있는 상태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왕국군의 사기가 한층 더 올라갔음은 물론이다. 한편,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마리는 문득 한 가지 사실에 생각이 닿았다.

‘마이엘 호수는 우리보다 동제국이 주로 이용하는 상수원이야.’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면 지금 동제국군은 어떤 상태인 거지?’

* * *

그녀의 예상대로 동제국군에는 전염병이 말 그대로 창궐하고 있었다. 어느 날 고열 환자가 한 명, 두 명 발생하더니 기하급수적으로 그 수가 늘어나 버렸다. 겨우 수십 명의 환자만 생긴 클로얀 왕국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림잡아도 수백 명이 넘는 숫자였다.

“당장 마이엘 호수의 물 사용을 금지해라!”

더 상황이 악화하기 전 라엘이 적절한 조처를 하였다. 의학적 지식은 없었지만, 이전 수도의 전염병 사건 때 마리가 했던 조처를 떠올려 원인을 차단했다.

“환자들을 한 곳으로 몰아 접근을 차단하도록!”

“알겠습니다!”

명을 받은 병사들이 신속히 움직였다. 라엘은 막사의 의자에 몸을 기대며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피해 상황은 어떻지?”

“환자의 수는 총 500여 명입니다.”

“많군.”

라엘은 탄식하듯 말했다. 말이 500명이지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왕국군에 비해 훨씬 많은 사람이 오염된 물을 먹었고, 마리가 사용한 푸른곰팡이 약 같은 치료제가 없어 사람들 간의 전파도 조기에 차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환자들의 상태는 어떻지?”

오른이 어두운 낯빛으로 말했다.

“좋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경우에 비해 독성이 훨씬 강한 전염병인 것 같은데, 상당한 숫자의 사망자가 나올 것 같습니다.”

라엘은 침음을 삼켰다. 500명. 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의 숫자이다. 전투력 보존의 측면에서 보자면 큰 손실은 아니다. 오히려 고작 오백 명 정도로 추가적인 환자의 발생을 막았으니, 굉장히 적은 피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적다고 할 수 있을까? 저 중에 몇 명이나 죽을지 모르는데?’

라엘은 무겁게 생각하고 말했다.

“환자들을 치료할 방도는 없는가?”

오른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들의 희생이 안타까운 것은 오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순간 한 가지 방법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클로얀 왕국군이 사용한 약이라면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첩보에 의하면 왕국군은 푸른곰팡이 약을 사용해 거의 아무런 피해 없이 전염병을 넘겼다고 한다. 그 약을 사용하면 상당히 많은 환자를 구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야. 갑자기 약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오른은 고개를 저었다. 제국도 푸른곰팡이 약을 못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 마리가 약의 제조법을 남겨 두었다. 하지만 마리의 명으로 미리 다량의 약을 준비해 둔 왕국과 다르게, 제국은 비치해 놓은 약이 거의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클로얀 왕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인데, 그들이 침략군인 동제국군을 도와줄 리가 없었다.

“최대한 피해를 줄이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오른은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 * *

한편, 제국군의 소식은 왕국군에도 전달되었다. 싸움을 앞둔 적이다 보니 동정의 시선은 없었다. 오히려 병에 걸린 사람이 고작 500명밖에 안 되는 것에 아쉬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쨌든 크게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동제국에 어떤 피해가 생기든 남의 일일 뿐이다. 다만 왕국에서 단 한 명만이 다른 생각을 하였다.

‘그냥 모른 척해도 될까?’

바로 마리였다. 그녀는 동제국의 전염병 소식을 듣고 고뇌에 빠졌다.

‘푸른곰팡이 약을 지원해 주면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 텐데.’

마리는 스스로의 생각에 실소했다. 쥐가 고양이 생각해 주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생각해도 우스웠던 것이다.

‘하지만 모두 병사인 것도 아니고, 일반 백성들의 피해도 심하다는데. 우리 군에 약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군은 침략군이다. 그들을 도와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꾸만 병에 걸려 죽어 가고 있을 사람들이 떠올랐다. 전쟁이 나쁜 것이지 그들에게 죄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이번 도움이 화친의 계기가 될지도 모르니까.’

물론 도움 한번 준다고 해서 분위기가 극적으로 바뀔 리는 없다. 하지만 불씨가 일어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걸 떠나서라도 죽어 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건 의미가 있는 일이니까.’

결국, 마리는 마음을 결정하고 바르한 백작을 불렀다.

“동제국 측에 사신을 보내란 말씀이십니까? 무슨 일로?”

“이번 전염병 일로 논할 게 있다고 전해 주세요.”

바르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클로얀 왕국에서 전염병은 이미 다 해결된 상태다. 그런데 무슨 논할 일이 남아 있다고?

‘설마?’

바르한은 마리의 뜻을 눈치채고 눈을 크게 떴다. 마리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적국이라도 전염병으로 많은 이가 사망한다 생각하니 마음에 걸려서 그래요. 약품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그래도 역시 그만두는 것이 좋을까요?”

그녀도 확신이 들지 않아 바르한에게 의견을 물었다. 바르한은 고민하다가 답했다.

“원래대로라면 적국을 도와줄 필요는 없긴 하지만, 전하의 뜻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도와주지 않고는 못 견디실 것 아닙니까.”

마리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바르한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뭐…… 전하의 그런 면 때문에 저희가 더더욱 충성을 바치는 면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왕국과 제국 사이에 대화의 장이 열렸다. 약속 장소에 나간 마리는 제국에서 나온 인물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오랜만입니다. 이제는 전하라 불러야겠군요.”

쾌활한 인상의 훤칠한 미남. 오른이 제국의 대표로 나온 것이다. 오른은 씁쓸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입장으로 다시 보게 될 줄은…….”

마리의 얼굴에도 복잡한 심경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그를 봤을 때만 해도 이런 식의 재회는 생각지도 못 했었다.

“일단 사적인 이야기는 접어 두지요. 양국을 대표하여 이야기를 나누러 온 것이니. 무슨 일로 대화를 나누고자 한 것입니까?”

“현재 돌고 있는 전염병 때문에 이야기를 나누고자 청했어요.”

“전염병이요? 클로얀 왕국은 이미 전염병을 해결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오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전염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자고? 클로얀은 아무런 피해 없이 전염병을 해결한 상태일 텐데 무슨 이야기를?

“제국은 현재 돌고 있는 전염병 환자들을 어떻게 치료하고 있는지요?”

“그거야 의사들을 최대한 동원해 치료 중입니다만, 치료약이 없어 희생자가 꽤 많이 나올 것 같습니다.”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하던 오른은 일순 멈칫했다. 그녀가 어떤 의도로 말을 꺼낸 것인지 짐작한 것이다.

“설마?”

마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대화를 하고자 청한 이유는 우리 왕국과 푸른곰팡이 약을 거래할 생각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예요.”

“……!”

오른은 눈동자를 크게 떴다.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푸른곰팡이 약을? 어째서?’

제국의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푸른곰팡이 약만 있다면 수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을 테니까. 마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하는 중이지만, 병에 걸린 사람들은 죄가 없잖아요. 살릴 수 있는데 모른 척 외면할 수가 없어서 그러는 것일 뿐이에요.”

“…….”

“물론 공짜는 아니에요. 비싼 값을 받을 거예요.”

오른은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전에 헤어졌을 때와 마찬가지인 맑고도 맑은 눈빛. 오른은 탄식하듯 말했다.

“……당신은 변하지 않으셨군요.”

그는 그녀가 라엘의 시녀였을 때를 떠올렸다. 당시에도 그녀는 항상 선의에 근간해 행동했었다. 그런 그녀이기에 적군에게 약품을 지원해 준다는 이런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리라.

“……당신이 황후가 되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오른은 작게 중얼거리고는 흠칫 입을 다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생각이 새어 나온 것이다.

“그거 아십니까? 당신이 모리나 왕녀임이 밝혀지고, 전 당신을 굉장히 많이 원망했습니다.”

마리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제국에 큰 피해를 주었을 뿐 아니라, 폐하께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주었으니까요. 그래서 원망하고, 또 참 많이 후회했습니다. 의심이 갈 때 망설이지 말고 어떻게든 당신을 잡아 가두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오른은 씁쓸히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역시나 미워하기는 어렵군요.”

“…….”

“전하의 제안에 제국을 대표하여 감사를 표합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약품의 대가는 부족하지 않게 치르겠습니다.”

그렇게 약품 지원에 대한 협상이 타결되었다. 왕국은 푸른곰팡이 약을 지원하기로 하였고, 제국은 그에 상응하는 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오른은 제국 진영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말했다.

“전하.”

“말씀하세요.”

“오늘의 호의에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마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푸른곰팡이 약은 즉각 제국에 전달되었고, 바로 환자들에게 투여되었다. 푸른곰팡이 약은 ‘마법의 탄환’이란 별명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효과를 내었다. 사경을 헤매던 환자들이 금세 호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살아난 거야?”

“어떻게? 그대로 죽는 줄 알았는데…….”

고열에 시달리다 회복되어 정신을 차린 환자들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의사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극적으로 호전을 보이다니, 믿을 수 없었다. 더구나 호전된 이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 마치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천사님이라도 왔다 가신 건가?”

환자들은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물론 그들의 의문은 오래지 않아 풀렸다.

“클로얀 왕국의 모리나 여왕이 푸른곰팡이 약을 지원해 주었다고?”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국은 클로얀의 적이다. 그냥 사이가 안 좋은 관계 정도가 아닌, 전쟁을 앞둔 정복군이었다. 그런데 이런 도움이라니?

“……역시 힐데른 자작님.”

병사 중 하나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가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이전에 수도에서 그분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서…… 그때 일이 생각나서 말해봤네…….”

제국의 모두가 모리나, 아니, 마리 폰 힐데른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제국을 위해 세운 수많은 공과 선행으로 제국민 모두에게 사랑받는 여인이었다. 제국민 모두는 그녀가 자신들의 황후가 될 것으로 의심치 않았었다.

“…….”

과거의 일이 떠오르며 병사들 사이에 잠시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새삼스럽게 그들이 누구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는지 깨달은 것이다. 그토록이나 사랑스럽고 훌륭하던 예비 황후 마리 폰 힐데른이 그들의 적이었다. 그들은 그녀의 목을 치기 위해 검을 들었고, 그런 그들을 향해 그녀는 다시 한번 말도 안 되는 선행을 베풀었다. 병사들은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심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어쨌든 정말 고맙구먼.”

“……이를 말인가. 덕분에 수많은 이가 목숨을 건졌어.”

그렇게 제국군 전체에 마리의 선행이 퍼졌고, 그 소식을 들은 병사들은 고마움과 더불어 복잡한 심경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국군을 향한 마리의 도움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푸른곰팡이 약을 투약하고도 회복되지 않은 국경 지대의 환자들을 왕국군 진영에서 직접 치료까지 해준 것이다.

사실 마리도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으나, 뛰어난 의술을 지닌 그녀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환자들을 외면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게 전장과 어울리지 않은 미담이 제국에 다시 한번 퍼졌고, 제국민들의 마음속에 마리에 대한 감사가 더욱 깊어졌다.

“어떻게 적에게 이런 도움을…… 힐데른 자작님은 정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 건가.”

누군가 알 수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양군의 분위기가 좋아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양군은 삼엄한 경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변화가 있었으니, 그건 제국군 사이에 그녀를 향한 그리움이 싹트기 시작한 거다. 제국민 모두가 예비 황후 시절의 마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 미담을 계기로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며, 그녀를 다시금 그리워하는 이들이 생긴 것이다.

그때, 제국 국경 지대의 한 마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가만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전신을 가리고 있는 후드를 입고 있었는데 체구가 굉장히 왜소했다. 남자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중얼거렸다.

“역시나 대단하군.”

온통 들려오는 소리가 모리나 여왕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남자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후드 속의 얼굴은 굉장히 기이했다. 얼굴선 자체는 마치 여인처럼 아름다웠지만, 얼굴 한쪽이 무언가에 긁힌 듯 자잘한 흉으로 가득했다. 목에도 깊게 베인 상처가 있었다. 남자는 다시 술을 입가에 가져갔다.

“역시나 모리나 여왕이야. 대단해.”

그러며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보고 싶군.”

묘한 광기가 담긴 목소리였다.

* * *

대치가 길어지며 겨울이 다가왔다. 올해따라 이른 눈이 내렸는데, 유례를 찾기 어려운 굉장한 폭설이었다. 자연스레 양군의 전쟁은 소강을 맞게 되었다.

‘눈이 많이 오네.’

떨어지는 눈을 보며 마리는 감상에 잠겼다. 전장이란 사실만 잊으면 참 아름다운 눈이었다. 그와 함께 이 눈을 바라보고 싶었다.

‘다음 겨울에는 반드시 그와 함께 눈을 보겠어.’

그녀는 속으로 다시 한번 다짐하며 외투를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귀족들과 회의가 예정되어 있어 참석해야 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회의실에 참석하니 바르한 백작을 비롯한 왕국군의 수뇌들이 그녀를 맞았다. 이제 그녀도 귀족들의 예를 받는 것이 익숙해졌다. 마리는 상석에 앉아 입을 열었다.

“회의를 시작하겠어요. 장궁병의 훈련은 잘 진행되고 있나요?”

“네, 아직 부족하긴 합니다만, 숙련도가 눈에 띄게 좋아진 상태입니다.”

“다행이군요.”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궁은 중갑을 입은 기사들에게도 위협적인 무기이다. 이전부터 클로얀 왕국은 석궁이 아닌 장궁을 주로 사용해 왔는데, 마리는 국력을 확충할 수단으로 장궁병을 육성하고 있는 거다.

‘기사나 보병 전력을 단기간에 강화할 수는 없어. 그나마 가능성 있는 것은 장궁병을 훈련시키는 거야. 장궁병이 대규모로 있으면 제국군도 경시하지 못할 거야.’

문제는 역시나 시간이었다. 병사들이 장궁을 능숙하게 다루게 만들 시간이 부족했다.

“어쨌든 최선을 다해 주세요. 폭설로 기온이 낮으니 병사들의 건강도 신경 써 주시고요.”

“네, 전하.”

“군량 보급 쪽은 문제가 없나요?”

“네, 폭설로 운반에 지장이 있긴 하나 미리 비축해 둔 양이 있어 큰 문제는 없습니다.”

마리와 귀족들은 제반적인 사항을 상의했다. 그런데 한참 회의를 하고 있을 때였다. 요란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전령이 회의장 안으로 들어왔다.

“급보입니다, 전하!”

곧 이어지는 전령의 말에 회의장의 분위기가 날카롭게 곤두섰다.

“제국군 일부가 국경 북쪽, 알피엔산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

귀족들은 갑작스러운 보고에 수군거렸다.

“제국군이? 이 폭설이 내리는 와중에?”

“알피엔산을 넘으려는 것인가?”

“하지만 제국군이 알피엔산 쪽으로 접근할 이유가 없는데? 도대체 무슨 속셈인 거지?”

알피엔산은 국경 북쪽에 있는 험준한 산으로, 위치상 그렇게 중요한 지역이 아니다. 무리해서 제국군이 공격할 이유가 없는 지역이라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전령이 이유를 설명하였다.

“공격하러 접근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틀 전 폭설로 알피엔산에 대규모의 눈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제국군은 눈에 매몰된 제국민들을 구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리의 표정이 굳었다. 대규모 눈사태라고?

“그러면 왕국민들은요? 알피엔산에는 제국민들만 거주하는 것이 아니지 않나요?”

알피엔산은 국경선으로 따지면 제국에 속하는 지역이다. 하지만 산의 형태가 동서로 넓게 뻗어 있었고, 위치가 왕국 내륙에 조금 더 가까웠기 때문에 실질적인 구분이 모호하여 왕국 출신 산악민들과 제국 출신 산악민들이 섞여 살아가고 있었다.

“왕국민들도 함께 눈사태에 휩쓸린 것으로 보입니다.”

“눈사태에 휘말린 주민들은 몇 명이나 되죠?”

“왕국민만 최소 1,000명 이상은 될 것으로 보입니다. 하필 산악민이 모여 사는 지대에 눈사태가 일어나서…….”

그 비보에 마리는 고민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악민들을 구하기 위해 알피엔산으로 가 봐야겠어요. 채비를 해주세요.”

일부 귀족들이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전하, 제국군을 앞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희생자들이 안타깝긴 하나, 지금 움직이시는 것은…….”

틀린 지적은 아니었으나,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제국군도 폭설로 전투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제국군에 맞서는 이유는 왕국민들을 지키기 위해서인데, 당장 눈앞에 목숨이 경각에 달한 이들을 모른 척할 수는 없어요.”

1,000명. 서류상 숫자로 보면 큰 숫자는 아닐지도 모른다. 군주라면 대의를 위해 저런 작은 희생 따위는 모른 척하는 면모를 지녀야 하는 것이 맞을지도. 하지만 마리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한 명, 한 명의 목숨도 가치를 따질 수 없이 소중한데, 무려 천 명이다.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여러 사정상 제국군도 당장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다.

‘최대한 사람들을 구해 내자.’

마리는 굳게 다짐했다.

* * *

마리는 왕실 기사단과 함께 재난 지역으로 향했다. 알피엔산과 가장 가까운 요새는 네링스 성으로 하워드 후작이 이끄는 3,000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미리 연락을 받은 하워드 후작이 마중 나와 고개를 숙였다. 하워드 후작은 이전 췌장 농양을 앓을 때 그녀에게 목숨을 구제받은 바 있어 눈빛에 강한 충성심이 흘렀다.

“피해 상황은 어떻죠?”

“워낙 눈사태가 넓은 지역에 걸쳐 일어나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눈사태가 일어나 피해가 클 것으로 보입니다.”

마리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도 상황이 좋지가 않았다.

“그리고 문제가 또 하나 있습니다.”

“무슨 문제죠?”

“이 근방으로 제국군이 진군해 현재 대치 중입니다.”

마리는 상황을 이해했다.

‘눈사태로 피해를 입은 것은 왕국민들뿐이 아니야. 오히려 제국민들의 피해가 훨씬 커.’

누구보다도 라엘은 백성들을 위하는 군주였다. 그런 그이니만큼 위기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병사들을 보낸 것이리라.

‘문제는 눈사태가 발생한 지역으로 가려면 이 요새를 지나야 한다는 거야.’

알피엔산의 지형적 특성 때문이었다. 산이 위치한 곳은 제국이지만, 산악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촌락으로 향하려면 왕국 국경 지대를 통과해 가야 했다.

“일단 절대 불가능하다 말했으나, 제국군도 물러서지 않고 있습니다.”

마리는 곤란한 마음이 들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전쟁 중이다. 제국군을 왕국 땅에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국군은 현재 일전을 불사할 기세입니다. 오늘 중으로 이 요새를 함락하려 들 수도 있습니다.”

마리는 고민에 빠졌다. 제국군을 받아들이기도 곤란했고, 그렇다고 맞서 싸우는 것은 더더욱 안 되었다. 교전을 벌이는 사이 눈사태에 휘말린 사람들은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일단 제국군과 이야기를 해봐야겠어요.”

“제국군과 말입니까?”

하워드 후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제국군에 강한 적개심을 표했다.

“네, 제국군도 지금 상황에서 우리 군과 무턱대고 싸우려 들지는 않을 거예요.”

하워드 후작은 마뜩잖은 표정이었으나, 그녀가 하는 말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으로 진군한 제국군을 이끄는 자는 누구지요?”

하워드 후작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제국의 황제입니다. 그가 직접 왔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마리의 눈동자가 커졌다.

‘란이 이곳에 와 있다고?’

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가슴이 뛰었다. 생각지도 못 하게 그와 재회하게 된 것이다.

회담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둘의 신분이 각 나라의 군주였던지라, 공식적인 절차를 걸치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게 뻔했기에 회담은 비공식적으로 처리되었다. 이윽고 회담 장소에 도착해 라엘의 모습을 본 마리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클로얀의 왕 모리나입니다. 이렇게 만남에 응해 주어 감사합니다.”

마리는 떨리는 마음을 움켜잡으며 예를 갖추어 말했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당장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지만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반갑소.”

짧은 말이었지만 마리는 그도 동요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요, 란.’

마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정말 보고 싶었다. 빨리 모든 일이 마무리되어 그와 영원히 함께할 수 있었으면.

“이번 눈사태 사건과 관련하여 우리 제국은 왕국이 길을 열어주었으면 하오. 오로지 구조 작업을 위한 것이니, 이번 재난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왕국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소.”

마리는 라엘의 말을 믿었다. 하지만 왕국의 다른 귀족들은 아니었다. 당장 국경 북쪽의 방어를 담당하는 하워드 후작이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안 됩니다, 전하. 제국이 왕국 영토 내로 들어왔다가 칼을 꺼내 들면 상황이 곤란해질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동행한 기사들이 마찬가지의 의견을 내었다. 그들의 입장상 충분히 할 수 있는 걱정이었기에 마리는 잠시 고민한 후 말했다.

“상황이 급박하긴 하지만, 우리 왕국도 제국에 조건 없이 국경을 열어줄 수는 없어요.”

“그러면?”

“어차피 구조 작업을 위한 것이니, 꼭 필요한 무장 외에는 내려놓고 와 주세요.”

그녀가 이야기한 불필요한 무장은 중갑이나, 할버드, 메이스, 쇠뇌 등의 전장용 대인 살상 무기였다. 확실히 구조 작업을 하는 데 그런 무기를 가져올 필요는 없으나, 제국 측은 그녀의 제안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구려. 무장을 해제하고 들어갔는데 그쪽이 공격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소이까?”

라엘과 동행한 장군 중 한 명이 말했다. 물론 마리는 그에 대한 대답도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그 구조 작업에 저를 포함한 왕국군도 함께 참여할 거예요. 물론 똑같이 무장을 해제하고요.”

“……!”

“그러면 서로 믿을 수 있지 않을까요?”

뜻밖의 제안에 제국의 귀족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클로얀 왕국군도 똑같이 무장을 해제하고 구조 작업을 하면 뒤통수를 맞을 가능성은 적었다. 특히나 모리나 여왕이 직접 참여한다면 더더욱 그렇고.

“그래도…….”

무언가 찝찝한 기분에 제국 측이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고 있을 때, 라엘이 말했다.

“좋소. 그렇게 하도록 하지.”

“폐하?”

“다만 이렇게 구두로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구조 작업을 할 때에 한해서 불가침 협약을 맺는다는 사실을 각자의 직인을 찍어 명문화하는 것이 좋겠소.”

그렇게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해괴한 협약이 맺어졌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전쟁 중인 양군이 불가침을 맺고 협동하는 기이한 협약을 말이다. 양국의 군주가 다른 어떤 것보다 백성을 중시하는 마리와 라엘이었기에 가능한 협약이었다.

그리고 문서에 서명 후, 마리가 막사에서 나와 왕국의 요새로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수행원들이 미리 막사에서 나가 돌아갈 채비를 하던 중이라 마침 둘만 딱 막사에 남게 되었을 때, 라엘이 그녀를 뒤에서 강하게 끌어안았다.

“마리.”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람도 잠시, 마리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등 뒤에서 그의 단단한 품이 느껴졌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느낌이었다. 마리는 눈시울이 시큰해져 입술을 깨물었다. 입을 열면 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꼭 조심하거라. 어떻게든 전쟁이 진행되는 걸 막고 있지만,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몰라. 난 그대가 손가락 하나라도 다친다면 견디지 못할 거야.”

마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 제안은 참으로 좋았다.”

“무슨 말이죠?”

“사실 지난번 네가 우리 군의 환자들을 도와준 이후로 군내에 조금씩 다른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마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굳이 클로얀 왕국과 전쟁을 해야 하느냐는 회의론이지. 정확히 말하면 그대를 제국의 황후로 맞고 양국의 화친을 꾀하는 방법도 있지 않으냐는 의견이야.”

“아…….”

마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단 지난번 전염병 사건뿐 아니라 지금껏 그녀가 해온 일이 쌓인 덕분이다.

“물론 아직은 소수의 의견에 불과하다. 그래도 이번 일까지 잘 해결된다면 그런 의견이 더욱 커지겠지.”

라엘은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친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더 커지면 황제의 권한으로 공식적으로 그대와의 국혼을 논해 보겠다. 그러니 몸조심하며 조금만 기다려다오.”

그 말을 들은 마리의 가슴이 파르르 흔들렸다. 불가능하다고만 여긴 일이 구체적인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함께할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주님, 저희를 도와주세요.’

* * *

곧바로 구조 작업이 시작되었다. 눈사태가 워낙 광범위하게 일어났고 아직도 거센 눈바람이 몰아치고 있어서 쉽지는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어려움. 왕국군과 제국군 간의 불편함이었다.

“…….”

왕국군과 제국군은 서로를 힐끗 바라보았다. 공동 작업을 하기로 했지만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단순히 어색함을 떠나 매서운 적개심이 흘렀다.

‘무장을 간소화해서 망정이지.’

왕국의 기사 중 한 명이 고개를 내둘렀다. 구조 작업을 하는 왕국군과 제국군은 모리나의 의견대로 최대한 간소한 무장만 하고 있었다. 물론 몸을 지킬 수 있는 간단한 무기 정도는 소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 해머, 할버드, 쇠뇌, 철퇴 같은 전장용 무기는 해체한 상태인데, 이게 심리적 억제 효과가 있어서 양 군의 충돌을 막고 있었다.

‘그래도 긴장하고 있자.’

왕국 기사는 눈을 부릅뜨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곳에는 병사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국의 희망인 모리나 여왕도 있었다.

‘언제 충돌이 일어날지 몰라. 전하를 지켜야 해.’

그렇게 양군은 구조 작업보다는 서로를 경계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양군의 분위기가 변하는 일이 일어났다.

“뭐 하고 있는 거예요? 미적거리고 있을 틈이 없어요!”

날카로운 외침에 왕국군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모리나였다. 수많은 사람의 생명이 걸려서일까? 그녀가 평소의 온화한 표정과는 전혀 다르게 매섭게 말했다.

“지금 이러는 순간에도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어요. 빨리 움직여 주세요!”

그녀는 손수 삽을 들고 매몰 지역의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왕국군이 당황해 외쳤다.

“저, 전하! 저희가 하겠습니다!”

“뭣들 하느냐? 빨리 움직여라!”

제국 측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퍼석!

황제 라엘이 검을 꺼내 들더니 땅에 내리꽂았다. 어찌나 강하게 내려쳤는지 섬뜩한 소음과 함께 검이 박혀 들어갔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

라엘은 차갑게 제국군을 노려보았다.

“우리 제국군의 사명이 무엇이라 생각하는 거냐?”

“…….”

“너희의 사명은 제국과 제국민을 지키는 것이다. 지금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는데,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는가?”

병사들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적에게 검을 겨누는 것은 일단 사람들을 구하고 난 다음이다. 당장 움직이도록!”

질책을 받은 병사들이 허겁지겁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제야 구조 작업이 진척을 보였다. 하지만 어색함은 어쩔 수가 없었기에 양군은 서로를 힐끗힐끗 경계하며 작업을 하였다. 그런데 그런 경계심이 누그러지는 일이 일어났다. 삽을 들고 병사들과 함께 직접 작업을 돕던 마리가 제국민을 구해 낸 것이다.

“감사합니다! 흐윽. 정말 감사합니다!”

토사물에 휩쓸려 무너진 집에 갇혀 있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진 아이들이 마리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마리가 제국민을 구하자 제국의 병사들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심경을 느꼈다. 저 소녀는 그들의 주적이다. 그런데 지난 전염병 때도 그렇고, 또다시 자신들을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그때, 공교롭게 라엘에게서 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마리와 마찬가지로 직접 구조 작업에 나섰던 그가 왕국민을 구해 낸 것이다. 알피엔산 자체가 왕국민과 제국민이 뒤섞여 사는 곳이라 일어난 일이다.

“…….”

왕국군도 묘한 눈으로 라엘을 바라보았다. 비단 마리와 라엘뿐이 아니었다.

“여기 사람이 갇혀 있어! 정신 차리세요!”

“부상이 심해! 응급 처치를 해줘!”

작업이 진행되며 왕국군이 제국민을, 제국군이 왕국민을 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고 자연스레 서로 간의 경계가 조금씩 누그러졌다.

“거기 도와줘!”

“조금 더 잡아 당겨줘!”

무엇보다 서로 경계하며 구조 작업을 하기에는 상황이 만만치 않았다. 부상자들을 발견하고, 응급처치를 하고, 이송하고, 정신없이 구조 작업을 하며 왕국군과 제국군은 협력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상대에게 도움을 받았다 머쓱한 표정을 짓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양군이 제대로 협력하니 구조 작업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그나마 늦은 밤에 눈사태가 일어나 다행이야. 대부분이 집 안에 있던 상태라 생존자가 많아.’

이번 재난이 흙더미가 무너진 일반적인 눈사태였다면 희생자들을 거의 구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눈만 쏟아져 내려, 대부분 건물 안에 있던 상태라 상당수의 사람을 구해 낼 수 있었다.

“조금 더 힘내 주세요! 더 많이 살릴 수 있어요!”

마리는 목소리를 높여 병사들을 독려했다. 자신들이 힘을 내면 낼수록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안 병사들은 최선을 다해 눈과 흙을 팠고, 건물 안에 깔린 부상자들을 구해 내었다. 생명을 구하는 작업에는 아군과 적군의 구분이 없었다.

그런데 한창 구조 작업을 하던 중 또 다른 비보가 날아들었다.

“폐하! 큰일입니다!”

알피엔산 깊숙이 상태를 살피러 나갔던 제국군 기사였다.

“무슨 일이지?”

심상치 않은 기색에 라엘은 얼굴을 굳혔다.

“저 안쪽 절벽 너머에 큰 촌락이 있는데, 눈사태로 다리가 끊겼습니다!”

라엘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다리가? 다시 지으면 되지 않는가?”

그가 알기로 절벽 너머의 마을은 눈사태가 일어나지 않은 곳이다. 다리 정도야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다시 지으면 된다.

“일단 눈사태에 휘말린 마을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먼저다.”

라엘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기사가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 됩니다, 폐하. 다리를 먼저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째서지?”

그리고 이어진 말에 라엘의 얼굴이 싸악 굳었다.

“절벽 너머의 마을 쪽 산봉우리에서도 눈사태가 일어날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당장 다리를 지어 남아 있는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합니다!”

라엘은 다급히 절벽 마을을 향해 달려갔다.

“이런……!”

도착해 절벽 너머를 바라본 라엘은 신음을 흘렸다. 깎아지른 절벽 지대였다. 아찔한 높이의 절벽 밑에는 바위와 꽝꽝 언 계곡이 있었고, 크게 소리쳐야 간신히 들릴 정도의 거리 건너편에 또 다른 절벽이 놓여 있었다. 절벽 마을은 그 반대편 절벽 위에 있었는데, 마을 옆에 놓인 봉우리에는 눈이 잔뜩 쌓인 상태였다.

“상황이 좋지 않군.”

라엘은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봉우리에 잔뜩 쌓인 눈이 무너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딱 봐도 급박한 상황.

“저곳에는 얼마나 사람이 있는 거지?”

“저 절벽 마을이 이 알피엔산에서 가장 큰 마을입니다. 제국민이 모여 사는 곳인데 500명 이상은 될 것으로 보입니다.”

“큰일이군. 당장 다리를 설치하도록.”

하지만 기사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다리를 설치하려 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

“임시로 다리를 만들기 위해 밧줄을 화살에 묶어 반대편 절벽으로 쏘아 보내야 하는데, 눈바람이 너무 거세 계속 실패하고 있습니다.”

라엘은 기사의 말에 절벽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화살이 닿기나 할까 의심스러운 거리였다. 바람까지 거센 상태면 닿을 리가 없었다.

“다시 한번 화살을 쏴 보도록.”

기사는 사정거리가 긴 장궁을 힘껏 당겨 반대편 절벽을 향해 쏘았다.

후웅!

하지만 거친 바람 소리와 함께 화살은 힘을 잃고 협곡 밑으로 떨어졌다.

“무너진 다리 말고는 길이 없는 건가?”

“네, 절벽 밑으로 협로가 하나 있긴 한데 눈으로 다 막힌 상태입니다.”

라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라면 저 마을 사람들은 모조리 눈사태에 휘말려 죽을 게 분명했다. 한편 라엘을 따라온 마리도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저 마을 사람들을 구할 수 있지?’

수많은 사람의 생명이 걸린 일이다. 무조건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다리를 만들어야 해. 하지만 무슨 수로?’

마리는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라엘을 바라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본 것이다.

‘저긴?’

그들이 있는 곳 옆으로 까마득한 높이의 암벽이 놓여 있었다. 라엘은 그 암벽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 위로 올라갈 방법은 없는가?”

마리는 그의 생각을 눈치챘다.

‘저 암벽 위에서 화살을 쏘면 반대편 절벽에 닿을 수 있을 거야!’

암벽은 대략 40~50m 정도로 되어 보였다. 아무리 바람이 강해도 저 위에서 화살을 쏘면 충분히 반대편 절벽에 떨어질 거다. 그들은 암벽 위로 향하는 길을 알고 있는 병사들을 찾았다. 하지만 알피엔산 출신의 병사 중에서도 길을 아는 이를 찾기 어려웠다. 애초에 사람의 발길이 닫는 암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샅샅이 수소문한 끝에 기적적으로 길을 아는 이를 찾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왕국 병사였다.

“길을 알고 있다고요?”

“네, 전하. 이전 어렸을 적 저 암벽의 중턱까지 올라가 본 적이 있습니다.”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그녀는 반색하며 말했다.

“그러면 지금 당장 길을 안내해 주세요.”

그런데 왕국 병사는 바로 나서지 않고 주춤하였다. 마리는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러죠?”

“전하, 정말 죄송합니다. 외람되지만 하나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보세요.”

왕국 병사는 그녀에게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길을 안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하. 어째서 그래야 합니까? 저곳에 사는 이들은 다 제국민입니다. 왜 우리를 침략한 제국을 도와줘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마리의 얼굴이 굳었다. 저 병사가 지금 한 말은 다른 이들도 다 함께하고 있는 생각일 거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욕심 때문이에요.”

“……?”

마리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실 일개 병사의 물음이다. 그냥 윽박지르고 무시해도 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했다.

“전 국왕으로서 한 가지 욕심이 있어요. 클로얀 왕국이 영화롭게 되는 것은 물론, 언젠가는 동제국과의 악연의 고리를 끊고 싶어요. 비록 지금은 이렇게 서로 검을 겨누고 있지만, 제국이든 우리 왕국이든 그간의 증오를 털고 서로 웃으며 마주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욕심 때문에 이러는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왕국 병사의 표정이 묘해졌다. 마리는 그가 자신의 말을 납득하지 못했음을 눈치챘다. 하긴, 당연히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동제국과의 화해라니. 하지만 그때, 왕국 병사가 말했다.

“전하, 제가 무지렁이라 솔직히 전하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전하가 원하시는 길이기에 그저 따르겠습니다.”

주변에서 같이 이야기를 들던 다른 왕국 병사들도 고개를 숙였다.

“전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마리는 고맙다는 듯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빨리 안내해 주세요. 시간이 없으니.”

왕국 병사는 곁으로 난 길로 그들을 이끌었다.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험난한 길을 간신히 헤치니 암벽의 중반 지대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더는 올라갈 수가 없군. 이곳에서 밧줄을 반대쪽으로 보내야겠어.”

라엘이 말했다. 마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바람이 강해 이곳에서 화살을 쏴도 반대쪽에 닿을까 걱정스러웠지만 더는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든 닿길 바랄 수밖에. 먼저 제국 기사들이 활을 들고 나섰다.

파앙!

하지만 야속하게도 화살은 바람에 휘말려 반대편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몇 번을 반복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모두 안색을 굳혔다. 이곳에서도 화살이 닿지 않으면 다리를 설치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쿠르릉!

“……!”

마리와 라엘의 안색이 하얘졌다. 마을 근처의 봉우리에서 울린 소리였다. 눈사태가 임박했다는 징조였다. 이대로 눈사태가 발생하면 저 마을 사람들은 모조리 몰살할 것이다.

‘어떻게든 해내야 해.’

마리는 이를 악물며 앞으로 나섰다.

“제가 한번 해보겠어요.”

마리는 장궁을 들었다. 이전 꿈에서 얻은 명궁수의 능력을 사용해 보기로 한 거다.

‘…….’

마리는 바람의 방향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과연 닿을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거리가 너무 멀고, 무엇보다 바람이 너무 거셌다.

‘하지만 해내야 해.’

마리는 활시위를 뒤로 한껏 잡아당겼다. 시위를 잡은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파앙!

이윽고 화살이 시위를 벗어나 날아갔다.

‘제발!’

그녀는 간절한 마음으로 협곡을 가르는 화살을 바라보았다. 화살은 마치 허공을 꿰뚫듯 맹렬한 기세로 뻗어 나갔다. 하지만 절반 이상 날아가자 거센 바람의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힘을 잃기 시작했다. 결국, 화살은 반대편 절벽에 닿지 못하고 떨어져 버렸다.

“아……!”

모두가 안타까운 탄성을 내뱉었다.

그때, 묵묵히 반대편 절벽을 바라보고 있던 라엘이 나섰다.

“이번엔 내가 해보겠다.”

“폐하? 하지만?”

모두가 실패한 마당이다. 마리는 아무리 그라고 해도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라엘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마리, 날 믿는가?”

“……!”

마리는 굳은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 폐하를 믿어요.”

“그래, 고맙다.”

라엘은 강한 손길로 화살촉 끝에 밧줄을 매달며 말했다.

“그대와 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해 보겠다. 나를 믿어다오.”

라엘은 활을 들며 반대편 절벽을 바라보았다. 밧줄을 쏘아 보내 다리를 지으려는 것을 눈치챈 건지 반대편 절벽에는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절박한 표정으로 무어라 외치고 있었다. 라엘은 활시위를 강하게 당겼다. 강력한 완력에 장궁이 부러질 듯 휘었다. 한계까지 작용한 장력에 시위가 찢어질 듯 떨렸다. 이제 그가 쏘는 화살이 저들 마을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모두가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이여.’

라엘은 가만히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저와 마리를 축복해 주소서.’

그는 이 화살이 저 마을 사람들을 구할 수 있기를. 그래서 오늘의 일이 양국이 화친을 다지는 데 씨앗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시위를 당기는 손의 힘을 천천히 풀었다. 이제 이 화살이 운명을 가르게 될 것이다.

파앙!

밧줄을 매단 화살이 촤라락 허공을 갈랐다. 라엘이 쏜 화살은 마리 때보다 한층 맹렬한 기세로 허공을 갈랐다. 마리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화살이 날아가는 궤적을 바라보았다.

‘안 돼. 여전히 부족해!’

라엘이 쏘아 보낸 화살은 누구보다도 강한 궤적을 그리고 있지만, 여전히 반대편에 닿기는 부족했다. 이대로라면 지금까지처럼 중간쯤에서 바람에 휘말려 힘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거세게 몰아치던 바람이 일순 기세가 약해진 것이다!

“……!”

그리고 이윽고.

퍼억!

반대편 절벽에 놓인 나무에 화살이 박혀 들어갔다.

“마리!”

“폐하!”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성공한 것이다! 절벽 밑과 반대편에서도 함성이 터져 나왔다. 라엘은 기쁜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다시 화살을 꺼내 들었다.

“아직 한 번 더 남았다. 이번에도 성공해야 해.”

다리를 건설하려면 밧줄 한 가닥으로는 모자랐다. 최소 두 가닥은 필요했다. 이번에도 신이 도우신 것일까? 라엘이 쏜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반대편 절벽에 닿았다.

“와아아! 황제 폐하 만세!”

“여왕 전하 만세!”

결국, 기적을 이루어 낸 두 명에게 모두가 함성을 내질렀다.

“하아.”

라엘과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되었다. 얼른 서둘러 임시 다리를 건설하면 모두 살릴 수 있었다.

“마리…….”

“란…….”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껴안았다. 보는 시선이 많았지만 이 순간 서로를 향하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마리, 잘 들어라.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놔주지 않을 거다.”

라엘은 강하게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안으며 말했다.

“사랑한다.”

마리는 그의 품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의 단단한 품은 그녀가 마치 자신의 것이라는 듯, 절대로 놔주지 않겠다고 속박하는 듯했다.

“네, 저도 사랑해요.”

그런 그들을 축복하기 위해서일까. 마침 구름 사이로 햇볕이 내리쬐었다. 쓰다듬듯 따뜻한 햇살이었다.

그 뒤 제국군과 왕국군은 신속하게 임시 다리를 건설했다.

“자, 거기 조심하세요!”

“여기 좀 도와주세요!”

처음 적대하던 것은 어디로 가고, 일사분란하게 협력하는 모습이었다. 덕분에 빠른 속도로 다리가 건설되었고, 눈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절벽 마을 사람을 모두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최악의 참사가 될 뻔한 눈사태 재난은 양군의 협력으로 큰 피해 없이 마무리되었고, 온 전선으로 그날의 일이 퍼졌다.

“알피엔산에 눈사태가 일어났는데, 클로얀 왕국군이 도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고?”

제국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클로얀과 제국은 전쟁 중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제국군은 지난번 전염병 때처럼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그들은 왕국을 침략하려고 있는데, 모리나 여왕은 거듭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는 것이다.

“힐데른 자작님…….”

제국인들은 과거 그녀가 제국에 있을 때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사탕수수 재배와 성배 도난 사건부터 전염병의 해결까지. 그녀가 제국을 위해 한 일이 수도 없었다. 당시에 그녀를 기적의 성녀로 부르는 이도 있었고, 황궁에 내려온 천사라 부르는 이도 있었다. 제국의 모든 이가 그녀가 황후가 되기를 원했었다.

‘모리나 여왕이 제국의 황후가 되어 동맹을 맺으면 안 되는 건가? 꼭 전쟁을 해야 하는 건가?’

물론 대신들이 누누이 말했듯이 현재 제국의 입장에서는 동맹보다는 정복이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런 정략적인 계산을 떠나, 제국군 전체로 반전 여론이 확산해 갔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모두 자신들에게 항상 선의를 베풀어 온 모리나 여왕에게 검을 겨누고 싶지 않아 했다.

그리고 클로얀 왕국에서도 화친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원래 클로얀 왕국은 자신들을 짓밟은 제국을 증오했었다. 하지만 이번 구조 사건 때 협력한 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더구나 라엘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최대한 화친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저 수레들은 뭐지?”

“그러게? 제국군의 깃발인데?”

성벽에서 경계하던 왕국군은 난데없이 다가오는 대규모 수레 행렬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제국 깃발인데, 전투 병력 없이 수레만 있었다. 수레의 정체는 곧 밝혀졌다.

“폐하께서요?”

“네, 전하. 황제 폐하께서 이번 눈사태 재난 때 왕국의 협력을 감사하며 보내는 선물입니다.”

수레를 이끌고 온 기사가 깍듯한 어투로 말했다. 마리는 놀란 눈으로 수레를 살폈다. 수레에는 고기와 술, 그리고 추위를 이겨 낼 수 있는 따뜻한 옷이 잔뜩 담겨 있었다.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마리는 라엘의 의도를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선물을 통해 한층 양국의 분위기를 좋게 하려는 것이리라. 그런데 사신으로 온 기사가 돌아가기 전 마리에게 고개를 숙이며 뜻밖의 인사를 하였다.

“전하, 개인적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경?”

“전 알피엔산 출신입니다. 전하의 은혜로 제 가족이 모두 살 수 있었습니다. 고작 이런 말로 이 큰 은혜를 갚을 수는 없겠지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진심이 담긴 그의 말에 마리는 가슴이 따뜻해져 웃었다. 그렇게 매섭게 추운 날씨와 다르게 전선에 따뜻한 기운이 흘렀다.

라엘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행동에 나섰다. 정식으로 양국의 화친을 논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제국 수뇌부 사이에서는 반대의 의견이 더 많았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클로얀 왕국을 점령하는 것은 제국의 안위를 위해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전염병 사건과 눈사태 재난 때 도움을 준 것은 크게 감사한 일이나, 그 일과 전쟁은 별개의 일입니다.”

화친을 반대하는 대신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라엘은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말했다.

“정말로 클로얀 왕국을 점령하는 것이 제국에 유익한 일인가? 물론 훗날 서제국과의 분쟁을 고려하면, 클로얀 지방이 우리의 영토가 되는 것이 좋기는 하겠지. 하지만 그 와중에 발생할 우리 제국의 피해는 어떻게 하지?”

“지금 클로얀 왕국군은 오합지졸에 가까운 잡병입니다. 우리 제국군이라면 큰 피해 없이 점령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런가?”

대신들은 그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첩보에 의하면 전염병과 폭설로 진군이 늦어진 사이, 모리나 여왕은 대규모로 장궁병을 양성하고 있다고 한다.”

그 말에 대신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장궁병을 말입니까?”

“물론 숙련도는 아직 미숙할 거다. 그래도 아무런 피해 없이 승리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황제의 말에 대신들은 고민에 빠졌다. 장궁병은 짧은 기간에 양성할 수 있는 병과가 아니다. 그러니 모리나 여왕이 육성하는 장궁병들은 아직 숙련도가 무르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수의 장궁병을 상대하면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어.’

장궁은 기사들의 갑주마저도 무력화시키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위력만 따지면 석궁을 능가하는 무기. 아무리 숙련도가 떨어진다고 해도 위협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만약 전투가 뜻하지 않게 풀린다면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서제국은 물론 동방 교국까지 견제해야 하는 우리 군의 입장에서 그건 용납할 수 없는 피해야.”

회의에 참석한 대신들과 장군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폐하의 말씀처럼 만약 큰 피해를 입게 된다면, 그건 큰 문제요. 곤란하구려.”

“하지만 아직 충분한 훈련을 받지 않은 숙련도가 떨어지는 장궁병들이라 큰 위협이 안 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이대로 클로얀 지방에서 물러서기에는 너무 아쉽습니다.”

“맞습니다. 시간이 지나 클로얀 왕국이 왕년의 성세를 회복하면 더더욱 점령하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주전론자들이 목소리를 높여 전쟁을 주장했다.

“클로얀이 훗날 서제국과 힘을 합치게 되면 그건 더 큰 문제입니다. 무리해서라도 지금 점령해야 합니다.”

그때, 토의 내용을 듣던 라엘이 입을 열었다.

“클로얀 왕국이 서제국과 힘을 합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라엘은 잠시 대신들을 가만히 둘러본 후 말했다.

“나와 모리나 여왕이 국혼을 맺게 될 테니까. 클로얀 왕국과 우리 동제국은 피로 이어진 혈맹이 될 것이다.”

“……!”

라엘의 입에서 국혼 이야기가 나오자 대신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때,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한 가지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고개를 돌려보니, 매서운 인상의 중년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표적인 주전론자인 1군단장 메일 후작이었다.

“말해보게, 후작.”

“국혼이 클로얀 왕국을 점령하는 것보다 제국에 나은 점이 있사옵니까?”

“……!”

불경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도전적인 목소리였다. 대신들은 숨을 죽이며 메일 후작을 바라보았다.

“물론 폐하께서 모리나 여왕을 은애하고 계심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국으로서는 점령에 비해 국혼을 해서 얻을 이득이 없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라엘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후작. 그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불확실한 동맹을 맺는 것보다 제국에 복속시키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동맹을 맺으면 제국이 한 가지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모리나 여왕이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향해 라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배 도난 사건.”

“……?”

“동방 교국과의 외교 분쟁과 사탕수수 재배, 그리고 불법 마약 근절, 위조 화폐 사건…….”

라엘의 목소리가 이어짐에 따라 사람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 갔다. 저 수많은 일은 모두 마리가 제국에서 해낸 공적이다.

“너무 많아 일일이 다 말하기도 어렵군. 어쨌든 고작 1년 남짓한 시간 만에 제국을 위해 이렇게나 많은 일을 해낸 그녀이다. 그런데 만약 그녀가 제국의 황후가 된다면 어떨까?”

“…….”

대신들은 입을 다물었다. 전쟁에 대한 의견은 다 달랐지만, 모든 이가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녀의 선한 마음과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뛰어남이었다.

“모리나 여왕이 제국의 황후가 된다면, 클로얀 왕국과 제국은 서로 협력하며 공전의 발전을 이룩해 낼 수 있음이 분명하다.”

라엘은 모두를 훑어보며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이득은 왕국을 점령하는 것에 비해 결단코 적지 않을 것이고. 그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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