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있는 시녀님-47화 (48/54)

Chapter 2

까악. 까악.

동제국 동남부 지방의 드넓은 평야. 까마귀들의 을씨년스러운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까마귀들의 불길한 울음 밑으로 수많은 시체가 들판에 쓰러져 있었다. 모두 이교도 병사들의 시체였다.

“다 끝났군요. 대승입니다.”

오른이 언덕에서 평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황제 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쓴 철가면은 적들의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남은 적들은?”

“교국으로 퇴각 중입니다.”

“알몬드에게 일러 추격대를 보내도록. 제국을 침략한 것을 뼛속까지 후회하도록 만들어라.”

원래 동제국군은 교국군에 비해 열세였다. 하지만 라엘은 익숙한 지형지물을 이용해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더니 기만술을 사용해 적을 함정에 빠뜨렸다. 이곳 평원으로 유인당한 동방 교국군은 삼면에서 제국군을 맞이하게 되었고, 대패하였다. 교국군은 더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어 본국으로 퇴각하는 중이었다.

“추격은 알몬드 자작에게 맡기고, 수도로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래야지. 서제국군을 맞아야 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라엘의 눈빛을 본 오른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안광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죽음을 들은 뒤부터…….’

오른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모리나 여왕이 서제국의 스토른 백작과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부터 라엘은 계속 저런 상태였다. 마치 닿으면 베일 것처럼, 칼날처럼 날카로운 분위기가 전신에 흘렀다. 섬뜩할 정도로 깊은 분노였다. 그리고 그 분노 안쪽에 서린 감정은 끔찍한 좌절이었다.

‘……폐하.’

오른은 마리의 죽음을 접한 이후, 라엘이 괴로워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지옥에 떨어진 이가 저러할까 싶을 정도로 그는 괴로워했다. 마치 심장을 손으로 뜯어버리고 싶어 할 정도로 아파했다. 그러면서도 라엘은 한 가닥 희망을 놓지 않았다. 혹시나 그녀가 살아 있지는 않을까 하는 희망. 그래서 그는 더더욱 괴로워했다. 서쪽에서 소식이 전해져 올 때마다 혹시나 그녀의 소식이 아닐까, 기적이 일어나진 않았을까 하는 기대로 밤을 지새웠다.

‘하아.’

오른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파하는 라엘을 보는 것이 안타까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라엘은 점점 말라비틀어지는 것 같았다. 오른은 이러다 정말로 라엘의 심장이 굳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때, 막사로 돌아가던 라엘이 우뚝 멈추어 서더니 오른에게 고개를 돌렸다.

“폐하?”

라엘은 철가면 밑으로 무언가 입을 열려고 하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니다.”

오른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눈치챘다. 서쪽에서 그녀에 대한 소식이 없는지 물으려고 했던 것이리라.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폐하! 급보입니다!”

오른과 라엘은 흠칫 전령을 바라보았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 전령이 큰소리로 외쳤다.

“서제국이 클로얀 왕국에 항복했다고 합니다!”

“……!”

오른은 전령이 말을 잘못 전했다고 생각했다.

“서제국이 항복을? 그 반대이겠지.”

“아닙니다! 정말로 서제국이 패배를 선언했습니다!”

“뭣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클로얀 왕국의 별동대가 서제국의 수도 엘페론성을 함락시켜 요하네프 3세에게 항복을 받아 냈다고 합니다!”

그제야 오른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전령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별동대가 엘페론성을? 누가 그런 작전을?”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라엘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본능적인 직감이 그의 가슴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전령이 외쳤다.

“모리나 여왕입니다! 모리나 여왕이 직접 별동대를 이끌고 엘페론성을 함락했다고 합니다!”

* * *

라엘은 동방 교국과의 싸움을 마무리하고 수도로 개선했다. 불리한 전력임에도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 황제에게 백성들은 열렬한 함성을 질렀다.

“황제 폐하 만세!”

“제국 만세!”

마차 안에서 그 함성을 들으며 라엘은 눈을 감았다. 성이 떨어져 나갈 정도의 함성이 귀를 울렸으나, 그의 머릿속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 가득한 것은 바로 그녀에 대한 생각이었다.

“마리.”

라엘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는 마리가 아니라 모리나임을 알지만, 그는 ‘마리’란 이름을 고집했다. 그는 그녀와 다시 함께하게 될 때까지 마음속으로 마리라는 이름을 고집할 생각이었다.

‘마리.’

라엘은 눈을 감았다. 그는 사랑의 서약을 나누고 그녀와 헤어지기 전 받았던 징표를 꺼내 들었다.

낡은 은 목걸이. 라엘은 목걸이를 손에 움켜쥐며 생각했다.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야.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

그의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다른 것은 모르겠다. 그냥 이 순간은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이 기뻤다.

‘마리. 이제 난 너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라엘은 목걸이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의 죽음을 전해 들었을 때 깨달았다. 자신은 그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이렇게 그녀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지 않았다면, 자신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말라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영혼은 말라비틀어진 상태였다.

“마리, 마리, 마리.”

라엘은 계속해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간절히. 가슴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프게. 그는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난…… 절대 너를 놓지 않을 것이다. 어떤 난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클로얀 왕국과 동제국은 적국이었다. 적국의 군주인 그와 그녀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난관을 넘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절대로 굴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와 다시 하나가 될 때까지.

* * *

황궁에 돌아온 라엘은 곧바로 대신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동방 교국을 격퇴했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독립한 클로얀 왕국과 서제국에 대한 대처를 정해야 했다.

“대응책은 간단합니다. 토벌군을 보내야 합니다.”

1군단의 군단장 함멜 후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클로얀 지방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요충지입니다. 만약 클로얀 왕국이 서제국과 손을 잡는다면 단번에 수도가 서제국군의 사정권에 들어갑니다.”

다른 대신들도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서제국이 회군했다지만 우리 동제국을 다시 노릴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미리 클로얀 지방을 점령하여 대비해야 합니다.”

모두가 한목소리로 클로얀 지방 정벌을 주장했다. 라엘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신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신들의 주장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동제국 입장에서는 향후 다시금 벌어질 서제국군과의 쟁투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반드시 클로얀 왕국을 점령해 놓아야 한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동제국은 서제국군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한다.

하지만 라엘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클로얀 왕국을 정벌하려면 그가 목숨보다도 사랑하는 그녀에게 칼을 겨누어야만 한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방법은 없는가?”

“폐하?”

“반드시 클로얀 왕국을 정벌해야 하느냐는 말이다.”

생각지도 못 한 황제의 말에 대신들은 주춤한 표정을 지었다.

“…….”

대신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그들은 라엘의 속뜻을 알아챘다. 라엘은 클로얀 왕국을 정벌하기보다는 동맹을 맺길 원하고 있는 거다. 하지만 동맹보다는 정벌이 동제국에 훨씬 유리한 선택이었다.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이런 국가의 중대사에 개인적인 감정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다른 방법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오른이 악역을 자처하며 나섰다.

“지금 클로얀 왕국은 제대로 된 국가라 불리기도 민망한 상태. 어린애 팔 비틀듯 쉽게 정벌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굳이 쉽고 확실한 길을 놔두고 다른 방법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

“오히려 시간을 주면 클로얀 왕국은 이전의 성세를 회복할 것입니다. 그러면 더더욱 상대하기 어려워지겠지요. 그 전에 토벌군을 보내 정벌하는 것이 더 낫겠지요. 클로얀 왕국을 점령하는 일은 비단 우리 세대만의 일이 아닙니다. 동제국과 서제국이 멸망하지 않는 한 양국의 분쟁은 끝없이 이어질 터. 미래를 위해서라도 클로얀 왕국을 점령해놓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오른은 전쟁이 불가한 이유를 더 설명하였다.

“물론 폐하와 모리나 국왕의 사이가 각별하였음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맹을 맺기에는 양국은 너무 먼 강을 건너 버렸습니다. 클로얀 왕국민도, 우리 제국민도 아무도 동맹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들은 숨을 죽이고 눈치를 살폈다. 저렇게 대놓고 황제에게 반대 의견을 내다니.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현재 상황에서 양국의 동맹은 무리였다. 군사적 이유도 군사적 이유이지만, 양국 사이에 파인 골이 너무 깊었다. 라엘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오른.’

그는 오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자신의 마음을 모르지도 않을 텐데 저렇게 정면으로 반대 의견을 내다니. 물론 재상인 오른의 입장에서는 황제의 눈치를 살피는 것보다는 제국을 위한 직언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오른…….”

황제 라엘이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오른이 라엘에게 뜻밖의 눈빛을 보냈다. 잠시만 기다려 보라는 눈빛이었다.

그 순간, 오른이 대신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양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반드시 전쟁만이 답은 아닐 수도 있지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재상?”

“클로얀 왕국에 조건부 항복 서신을 보내는 겁니다.”

그 말에 대신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받아들인다면 좋겠지만 과연 클로얀 왕국이 수긍하겠습니까?”

“만약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때 다시 대책을 생각하면 되겠지요.”

대신들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제국도 막 전쟁을 끝낸 상황이었다. 만약 군사를 일으키지 않고 왕국이 항복한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은 없으리라.

“그러면 왕국에 바로 사신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라엘은 오른을 붙들었다.

“무슨 생각이냐, 오른? 조건부 항복 제안이라니. 클로얀 왕국에서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은가?”

오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왕국에서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지요.”

“그런데 왜?”

“일단 당장 전쟁이 일어나는 건 피해야 하니까요.”

라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오른의 말뜻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때, 오른이 라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폐하. 모리나 여왕, 아니, 마리를 포기할 수 있으십니까?”

“……!”

라엘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절대로. 차라리 내가 목숨을 버리면 버리겠다.”

오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입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폐하와 모리나 국왕은 맺어질 수가 없습니다. 여러 정치적 이유는 차치하더라도, 폐하와 모리나 국왕을 제외한 양국의 누구도 그걸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니까요.”

오른은 씁쓸하게 웃음을 지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원래부터 클로얀 왕국과 동제국은 사이가 좋지 않았지요. 지금은 완전히 적국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니 두 분이 하나가 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

“네, 양국이 화합할 시간 말입니다.”

라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른의 말뜻을 이해한 거다.

“오른, 그러면 네 의도는?”

“네, 지금 전쟁이 일어나면 마리는 무조건 죽습니다. 그러니 전쟁을 어떻게든 미루어야 합니다.”

오른은 단호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시간을 미루고, 두 분께서 어떻게든 노력해서 양국의 화해 분위기를 이끌어 내야 합니다. 그게 지금 상황에서 두 분이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 * *

그렇게 결정 후, 동제국은 클로얀 왕국에 사신단을 보냈다. 겉으로 보이는 명목은 조건부 항복 제의. 물론 지금 상황에서 클로얀 왕국이 항복 제의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다. 라엘과 오른도 왕국이 항복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고 사신단을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진정한 의도는 어떻게든 전쟁을 미루고, 양국의 화친 계기를 만들려는 것. 그래서 사신단의 책임자인 랑트 백작에게는 따로 마리에게 보내는 서신을 은밀히 전해 주었다.

‘이 서신을 모리나 국왕에게 건네주어야 한다는 거지.’

랑트 백작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내전 당시부터 라엘의 심복으로, 마리에게 라엘의 뜻을 전달하는 중임을 맡았다.

“백작님, 곧 마을입니다. 오늘은 저 마을에서 묵어야 할 것 같습니다.”

호위를 맡은 기사가 말했다. 그들은 막 국경을 지난 상태라 클로얀 지방의 산간 마을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국경 지대에서 미리 연락을 받은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맞았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중년의 촌장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의 눈빛에서 제국을 향한 강한 적개감이 느껴졌다. 그건 촌장뿐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 전체가 곱지 않은 눈으로 사신단을 바라보았다. 양국 사이의 앙금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적개감이 훨씬 심하군.’

랑트 백작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환영받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거부감이 예상보다 훨씬 심했다.

‘괜한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 조심해야겠군.’

이런 때는 사소한 시비가 큰 충돌로 이어지기도 한다. 랑트 백작은 사신단에 행동을 주의하도록 일러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곧 그들을 안내할 인물이 나타났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당신은?”

후드를 깊게 덮어쓰고 있는 인물이었는데, 목에 깊게 베인 상처가 있었다. 무언가 바위 같은 것에 긁히기라도 한 것인지 얼굴 한쪽에 자글자글한 상처가 가득했다.

“저도 이 마을에 머무는 이입니다. 가끔 외부에서 오는 손님들이 있으면 제가 대접하곤 한답니다.”

“그렇군.”

후드를 쓴 남자는 그들을 어딘가로 이끌었다. 한참을 따라가던 사신단은 남자가 마을을 벗어나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어디로 안내하는 건가? 여긴 마을 밖 아닌가?”

“네, 마을 밖에 묵을 곳이 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걸은 후에야 그들은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 밖에서 상당히 거리가 떨어진 곳에 위치한 숙소였다.

“그러면 편히 쉬십시오. 간단히 마실 것과 요기할 것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후드를 눌러쓴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숙소의 불이 꺼졌다. 어떤 일인지 사신단은 금세 모두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어둠이 깊어지고 있을 때, 후드를 눌러쓴 남자가 밖으로 나가더니 짙은 어둠 속에서 숙소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편히 쉬십시오. 마지막 휴식일 터이니.”

섬뜩하기 그지없는 중얼거림. 그때, 남자 뒤에서 몇 명의 인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신단에 강한 적개심을 보인 촌장과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놀랍게도 칼과 창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준비는 끝나셨습니까?”

“그 전에 확실히 묻겠소. 정말로 동제국이 우리 클로얀 왕국을 다시 짓밟을 계획을 꾸미고 있는 거요?”

“이 서신을 보면 알겠지요.”

남자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바로 항복을 권유하는 서신이었다. 사신단이 잠이 든 틈을 타 서신을 훔쳐온 거다. 사신단이 서신을 소홀히 보관한 것은 아니었다. 후드를 쓴 남자가 물에 수면제를 풀어 모두가 잠에 빠진 탓이었다.

“이런…… 정말로…….”

서신을 본 마을 사람들은 분노에 찬 눈빛을 하였다. 후드를 쓴 남자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들은 몇 년 전 당신들의 가족을 죽인 원수. 그런데 또다시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

마을 사람들은 갈등하는 빛을 보였다. 그런 마을 사람들에게 후드를 쓴 남자가 뱀의 혀처럼 유혹하듯 속삭였다.

“어차피 저 서신대로라면 제국은 다시 이 땅을 짓밟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또다시 가족들을 잃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기 전에 차라리 당신들이 먼저 저들의 목을 베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

“저들은 모두 수면제에 잠들어 있습니다. 주머니 안의 물건을 꺼내듯 쉽게 목을 벨 수 있습니다.”

촌장은 갈등하는 빛을 보였다. 제국 놈들이 증오스럽긴 했지만, 막상 저들의 목을 베려고 하니 꺼려졌던 것이다. 그건 촌장 말고 다른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듯 모두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다. 촌장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어렵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이렇게는 아닌 것 같소. 아무리 제국 놈들이 미워도 당신의 제안을 따르긴 어렵소.”

그러며 마을 촌장은 수상쩍다는 듯 후드를 쓴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이기에 우리에게 나타나 제국 놈들의 목을 치라는 제안을 하는 것이지?”

촌장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경계 어린 표정으로 후드를 쓴 남자에게 창칼을 겨누었다. 후드를 쓴 남자는 촌장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아쉽게 되었군요. 하지만 뭐, 상관없습니다. 당신들이 동의하지 않아도 모든 건 다 결정되어 있으니까요.”

촌장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이었다.

퍼억! 퍼억!

화살이 날아와 촌장과 마을 사람들의 가슴을 꿰뚫었다.

“커억?!”

촌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드를 쓴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촌장에게 말했다.

“어차피 필요한 건 클로얀 왕국의 마을에서 사신단이 죽었다는 것뿐이라서. 그래도 동참해 주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요.”

“너, 너…….”

남자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안녕히 가시길. 곧 증오스러운 제국 놈들도 함께 보내 줄 테니 가는 길이 외롭진 않을 겁니다.”

후드를 쓴 남자가 어둠 속을 향해 말했다.

“모두 죽이도록. 아, 사신단은 마을 사람들에게 죽은 것처럼 위장하고, 마을 사람들은 제국 기사에게 죽은 것처럼 꾸며야 해.”

“알겠습니다.”

섬뜩한 대답이 들려왔다. 곧 어둠 속에서 피가 튀는 소리가 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리도 그쳤다. 후드를 쓴 남자는 사신단의 시체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좋군.”

곧 양국으로 사신단의 비보가 전해졌다. 클로얀 왕국의 마을에서 동제국의 사신단이 몰살당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정국을 순식간에 파국으로 치닫게 하였다.

* * *

파창!

마리가 들고 있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파편이 튀었지만 누구도 그걸 신경 쓰지 못했다. 그만큼 전해진 소식이 충격적이었다.

“동제국의 사신단이…… 왕국민들의 습격을 받아 몰살당했다고요?”

“네, 전하.”

바르한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마리는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전 전쟁 때 큰 피해를 입었던 마을이라 원래부터 제국에 대한 적개심이 강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니, 그래도 갑자기 이런 일을…… 정말 우리 왕국민들이 저지른 게 맞나요? 조사단을 보내 보세요. 당장.”

마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바르한이 고개를 저었다.

“조사단을 보내긴 했습니다만, 사신단이 머물던 곳이 완전히 불타버려 다른 단서를 찾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마리는 시체같이 질린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폐하.’

그녀는 처음 사신단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떻게든 전쟁을 피해 보고자 하는 라엘의 뜻을 짐작했다. 그런데 이런 참사가 발생하다니?

‘혹시 무슨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마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왜 하필 이런 중요한 시기에 그런 참사가 벌어졌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 당장 진상을 규명해 내는 것은 무리였다. 조사는 조사대로 진행하되 일단은 이 일로 인해 벌어질 사태에 대비해야 했다. 마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제국의 반응은 어떻지요?”

“아직 제국 측에서 공식적인 성명을 발표하지는 않고 있지만…… 일선의 분위기는 흉흉하기 그지없습니다.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에라도 진군할 기세입니다.”

바르한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전쟁에 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전하.”

마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 자신이 그에게 검을 겨눌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자신이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폐하.’

마리는 간절한 눈으로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그와 파국을 맞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다시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 * *

그 시각, 라엘은 한없이 무거운 얼굴로 침묵에 잠겨 있었다.

“…….”

이 충격적인 상황을 맞아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라엘은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오른이었다. 그의 손에 뜻밖의 것이 들려 있었다. 술이었다.

“한잔하려고 찾아뵈었습니다.”

라엘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가슴이 타오르듯 독한 술이었지만, 안주도 대화도 없었다. 둘은 묵묵히 술잔만 비워 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술을 마신 다음일까?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오른 오른이 불쑥 말했다.

“뜻대로 하십시오.”

“……!”

라엘은 흠칫 오른을 바라보았다. 오른은 무거운 얼굴로 다시 한번 말했다.

“폐하의 뜻대로 하십시오. 어떤 선택을 하든 따르겠습니다.”

라엘은 대답 대신 유리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그리고 다시 한번에 비워 버렸다.

“오른, 하나만 물으마. 나는 지금까지 군주로서 잘해 온 건가?”

라엘의 물음에 오른의 얼굴에서 취기가 가셨다. 오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폐하는 지금까지 그 누구보다 제국을 위해 애쓰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래, 고맙군.”

라엘은 잠시 입을 다물었고 묵묵히 술을 마셨다. 그렇게 술병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할 때, 라엘이 말했다.

“출정을 준비해라.”

오른이 눈을 크게 떴다.

“폐하? 지금 그 말씀은?”

“그대도 알고 있지 않나? 이렇게 된 이상 전쟁은 피할 수 없어. 제국의 누구도 이런 상황에서 클로얀과 화친을 바라지 않을 거다.”

오른은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애초에 독립을 좌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참사까지 일어났다.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라엘은? 그녀에게 검을 겨누어도 그는 괜찮단 말인가? 오른은 한참을 황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라엘의 딱딱하게 굳은 눈동자로는 그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결국, 오른은 고개를 숙였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오른이 물러가고 라엘은 남아 있는 술을 모두 잔에 따르고 창가를 바라보았다. 서쪽. 그의 시선은 그녀가 있을 클로얀 왕국을 향해 있었다. 그는 짓씹듯 입을 열었다.

“마리, 난 절대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다. 비록 이런 상황이 되었더라도 상관없어.”

그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제까지 모든 삶을 제국을 위해 살아왔으니, 이번만큼은 내 뜻대로 해도 되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의 눈동자에 결연한 빛이 서렸다. 그는 마지막 남은 술을 입에 털어 넣고, 탁자에 앉아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은밀히 알몬드를 불러 그 서신을 전달해 주었다.

“사람을 시켜 은밀히 이걸 전해 주도록. 지금 당장.”

“폐하, 이건 설마?”

수신인을 본 알몬드의 눈동자가 커졌다. 라엘은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녀에게 전하는 서신이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그녀와 만남을 갖기 위한 서신이었다.

* * *

동제국의 원정 준비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총 8만에 달하는 대군이 클로얀 왕국과의 국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그 소식은 곧바로 마리에게 전달되었다.

“결국, 동제국군이.”

“총 8만의 대군이라니…….”

왕국의 귀족들은 탄식을 내뱉었다. 얼마 전 침공한 서제국의 20만보다야 적었지만, 그래도 아찔한 규모의 대군이었다. 아직 제대로 국가의 형태도 정비하지 못한 클로얀으로서는 상대 불가능한 대군.

“우리 군의 다섯 배가 넘는군요.”

“병사들의 훈련도나 장비를 고려하면 10배, 아니, 그 이상의 전력 차로 봐야 할 거요.”

귀족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의견을 나누었다. 더구나 그들을 더욱더 불안하게 만드는 사실이 있었다.

“황제가 친정하였다고.”

“혈가면이 또다시 우리 클로얀 왕국을…….”

바로 불패의 천재 군략가 라엘의 친정 소식이었다. 과거 클로얀 왕국을 멸망시킨 것도 라엘이었다. 당시 클로얀은 지금과 비교할 수도 없는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라엘이 이끌었던 군대는 클로얀 왕국의 반도 안 되는 2만 병력. 그럼에도 라엘은 천재적인 군략으로 왕국군을 궤멸시켜 버렸다.

라엘의 천재적인 군사 재능은 클로얀 왕국과의 전쟁 때뿐 아니라, 황자들 간의 내전과 이번 동방 교국과의 전쟁에서도 여과 없이 드러났다. 열세인 상황에서도 단 한 번의 패배도 허용하지 않은 전략가. 그게 황제 라엘이었다. 그 두려운 존재가 친정한다는 소식에 대전의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모두의 머릿속에 왕국을 멸망시켰던 라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누군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이렇게 말했다.

“모두 약한 말씀 하지 마십시오. 적들이 몇 명이 오든, 누가 오든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는 지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국왕 전하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절대 굴복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무거운 분위기를 떨치고, 전의를 다졌다. 모두가 어전에 앉아 있는 마리를 바라보았다.

“전하, 말씀을.”

마리는 입술을 깨물고 명령했다.

“병력을 모아 맞설 준비를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왕국에 다시금 전운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어두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불리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지만, 왕국민들은 강하게 전의를 불태웠다.

“동제국 녀석들을 물리치자!

“클로얀 왕국 만세!”

“국왕 전하 만세!”

왕국민들은 사기충천해 외쳤다. 객관적으로 절대 승리 불가능한 전력 차였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모리나 여왕이 자신들과 함께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왕국민들은 용기백배해졌다.

“나도 나서겠어!”

“그래, 동제국 놈들을 물리치자!”

자발적으로 군대에 투신하는 이도 늘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모인 병력은 무려 3만. 물론 장비도 제대로 없었고, 훈련은 전혀 안 되어 있는 오합지졸 잡병이었지만 사기만은 하늘을 찔렀다. 한편 그때, 마리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정말 방법이 없을까? 난 그와 싸울 수 없어.’

어떻게 그에게 검을 겨눈단 말인가? 그럴 바에는 그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제발 생각해 내.’

하지만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커다란 절벽을 마주한 것처럼 막막하기만 했다. 답답한 마음에 방을 나와 그녀는 왕궁의 정원을 걸었다. 그런데 정원의 인적 없는 곳을 거닐고 있을 때, 뜻밖의 일이 생겼다.

“서신이라고요?”

“네, 전하.”

처음 보는 얼굴의 시종이었다.

“누구의 서신이죠?”

“그게…… 밀봉이 되어 있어서…….”

마리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서신을 열어 보았다. 그리고 서신 안에 적힌 몇 가지의 글을 본 순간, 그녀의 심장이 덜컥 멈추어 섰다.

마리에게.

작금에 와서는 아무도 그녀를 마리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녀를 ‘마리’라고 칭할 만한 인물은 이제 단 한 명밖에 없다.

‘설마……?’

그녀는 떨리는 눈빛으로 서신의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발신인의 내용을 본 순간. 그녀의 세상이 멈추었다.

란.

란. 바로 황제 라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시계가 고장 난 것처럼 마리의 머릿속이 멈췄다. 그가 나에게 편지를? 떨림인지, 기대인지, 두려움인지, 아픔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 휘몰아쳤다. 편지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나와 만나 줄 수 있겠나?

“……!”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과 만나자고? 그녀가 그토록 바라왔던 일이다. 편지는 긴 내용 없이 짧게 끝을 맺었다.

보고 싶다, 마리.

편지에는 만날 장소와 시간이 적혀 있었다. 양군이 대치하는 국경 지대에서 거리가 떨어진 인적 없는 숲속이었다. 마리는 말을 타고 홀로 은밀히 군영을 빠져나왔다. 바르한에게는 작전을 구상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러 간다고 핑계 대었다.

다그닥다그닥.

마리는 굳게 입을 다문 채 말을 몰았다. 말발굽 소리만 주변에 울렸다.

‘폐하.’

마리는 그를 떠올렸다. 약속한 장소로 다가갈수록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를 너무나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을 떨리게 하는 것은 단순한 기대만이 아니었다. 두려웠다. 그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만나지 못하는 시간 동안 그는 무슨 마음이었을까? 나는 여전히 그를 가슴 저리게 사랑하고 있지만, 그도 그럴까? 결과적으로, 그녀는 그의 기대를 저버린 게 되었다. 그는 분노하고 실망했을까?

‘폐하.’

마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점차 약속한 장소가 가까워졌다. 인적 없는 숲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고요했다. 늦은 오후라 조금씩 어두워지는 시간. 마리의 가슴이 더욱더 떨려 왔다. 이제 곧이다. 조금만 더 가면 약속한 장소이다. 기대와 두려움이 복잡하게 교차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약속한 장소에 도착한 순간.

‘아…….’

마리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저 멀리 보이는 모습에 그녀의 세상이 멈추었다. 그였다. 가면을 쓰지 않은 채,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낸 그가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

그의 얼굴을 보자 톱니바퀴가 멈춘 듯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몸이 뻣뻣이 굳었고, 반면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터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그 순간, 라엘이 그녀의 기척을 눈치챈 듯 고개를 돌렸고, 둘의 눈이 마주쳤다.

“……!”

순간 둘의 시간이 멈추었다.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로만 바라보았다. 라엘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그녀에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벅. 머뭇거리던 발걸음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빨라졌다.

두근두근.

거리가 좁아질수록 심장의 진동이 커졌다. 마리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일까? 눈물이 차오르며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마리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

이윽고 그녀의 앞에 도착한 라엘은 잠시 주저하더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말했다.

“……보고 싶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그녀의 마음의 벽이 산산이 조각났다. 결국,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흐윽……. 폐하.”

라엘은 그녀를 말없이 끌어안았다. 수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것이 변했으나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한 품이었다. 마리는 그 품에 안겨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마리는 한참을 운 후에야 마음을 진정할 수 있었다.

“이제 좀 괜찮나?”

“추, 추한 모습을 보여 죄송해요.”

마리는 민망한 얼굴을 하였다.

“얼마든지 괜찮다.”

라엘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전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말투와 몸짓에 마리는 다시 가슴이 울컥했다.

‘나 정말로 그를 보고 싶어 했었구나.’

그저 그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 오면서 들었던 두려움과 걱정은 지워진 듯 떠오르지 않았다. 오로지 그만이 마음속에 들어왔다.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

그녀는 상상하곤 했었다. 혹시라도 그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면 무슨 말을 할지. 보고 싶었다, 너무 힘들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등등. 너무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었지만 지금은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이렇게나 사랑하는데.’

마리는 가슴이 욱신거리며 아팠다. 영원히 그의 품에 안겨 있고 싶었다. 그때, 라엘이 입을 열었다.

“마리…… 아니, 이제는 모리나, 라고 불러야겠군.”

모리나. 그 단어가 마리의 가슴을 찔렀다. 왠지 그와 더 멀어지는 느낌이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마, 마리라고 불러 주세요.”

순간 라엘의 얼굴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마리는 입술을 깨물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해다.

“부탁이에요. 모리나가 아닌 마리라고 불러 주세요.”

라엘은 한참을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그래, 마리. 그동안 잘 지냈느냐?”

“……네.”

사실 빈말로라도 잘 지냈다고 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폐하께서는요?”

“난 잘 지내지 못했다.”

라엘은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너무 힘들었었어.”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왜 잘 지내지 못했는지는 듣지 않아도 뻔했다.

“……죄송해요.”

“무엇이 죄송하지?”

“전부 다. 전부 다 너무 죄송해요.”

마리는 고개를 떨구었다. 뭐라고 그에게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녀는 그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주었다.

“아니, 그런 이야기를 듣자고 널 부른 것이 아니다. 어차피 일어나 버린 일.”

라엘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마리의 눈빛에 의아함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붙들어 부드럽게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고, 입술이 천천히 겹쳐졌다.

“아…….”

마리는 신음을 흘렸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건드렸다. 머뭇거리며 입술 안으로 들어온 그의 혀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혀를 감쌌다. 강렬하기보다는 조심스러운 키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 깊숙한 곳, 자신을 향한 사랑이 느껴져 마리는 생각했다.

‘저도 사랑해요.’

그렇게 짧은 입맞춤 후, 라엘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보고 싶어서.”

“…….”

“그대가 너무나 보고 싶어서 보자고 했다.”

마리는 눈을 감았다.

“네, 저도 보고 싶었어요, 폐하.”

라엘은 마리를 미리 준비해 둔 별장으로 이끌었다.

“이곳은?”

“이 근방에 살던 귀족이 가끔 와서 머물던 별장이다. 지금은 주인이 비어 있지.”

마리는 숲속 깊은 곳에 자리한 별장을 보고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일반 백성의 집만 한 크기의 작은 별장이었는데, 미리 준비해 둔 것인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들어오도록.”

마리는 라엘의 손에 이끌려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 두 개와 주방, 그리고 거실로 이루어진 단출한 구조였다.

“내가 머물 방은 이쪽이다. 저쪽에 그대가 머물 방을 준비해 두긴 했지만…….”

그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떨어져 있고 싶지 않군.”

마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그녀도 거절하지 않았다.

“……네.”

둘은 같은 방에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방에 단둘이 있게 되자 잠시 어색한 공기가 맴돌았다. 마리는 왠지 민망한 마음이 들어 그의 시선을 피한 채 외투를 벗었다.

“저…… 식사는 하셨나요?”

“괜찮다. 그대는?”

“저도 특별히…….”

그렇게 의미 없는 대화를 몇 마디 나누자 분위기가 더욱 어색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머릿속에 서로의 생각만 가득하게 되었다. 마리는 애써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예민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홀린 듯 그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건 라엘도 마찬가지인 듯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왔다.

“마리.”

“……네, 폐하.”

“마리.”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 그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뺨과 귓불, 그리고 목덜미. 너무나 소중한 것을 어루만지듯 천천히 그의 손이 움직였다. 라엘의 눈동자에 흐르는 아릿함 때문일까? 부드러운 손길임에도 마리는 울컥했다.

“마리…….”

그와 그녀의 입술이 다시금 겹쳐졌다. 아까 전 조심스러움과 다르게 부드럽게 시작한 키스는 점차 강렬해졌다. 그는 애달프게 그녀의 깊은 곳을 헤집었고 마리는 신음을 흘렸다.

“아…… 폐하…….”

마리는 그의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았던 그의 손이 밑으로 향해 그녀의 단추를 푸르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을 느끼고 마리는 순간 움찔했으나 거절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둘의 몸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마리.”

라엘이 그녀의 몸 위에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리는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폐하, 사랑해요. 정말로.’

마리는 눈을 감았다. 라엘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그날 밤 라엘은 끝없이 마리를 탐닉하고 탐닉했다.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간신히 잠든 마리는 다음 날 정오가 가까워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읏.’

마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찌나 괴롭힘당했는지 온몸이 욱신욱신했다. 얼핏 살펴보니 하얀 피부 여기저기가 울긋불긋했다.

‘폐하는?’

침대 옆을 보니 그녀 혼자였다. 순간 마리는 가슴이 덜컥했다. 혹시 그가 말없이 떠났을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그때, 라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는가?”

“아…….”

라엘은 안도하는 듯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의아한 빛을 띠었다.

“왜 그러지?”

“아, 아니에요.”

라엘은 그녀에게 다가와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달콤한 모닝 키스였다.

“간단히 요기할 것을 준비해 두었으니 일어나지.”

마리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밤을 보내고 그의 모닝 키스를 받자 느긋하게 아침을 즐기는 연인이 된 것 같았다. 거실 한편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빵과 오믈렛이 따뜻한 차와 함께 준비되어 있었다.

“이건 누가?”

“내가 했다.”

그 답에 마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시중드는 이를 본 적이 없다 했는데, 그가 직접 요리한 것이다.

“죄, 죄송해요. 제가 늦게 일어나서.”

“아니다. 대충 레시피대로 했는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군.”

마리는 새삼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난 후 그가 해준 요리를 먹는 날이 오게 되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꿈만 같았다.

‘꿈이면 깨고 싶지 않아.’

속으로 중얼거린 마리는 오믈렛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먹을 만한가?”

“아, 네. 맛있어요. 정말로.”

빈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맛이 훌륭했다. 생각해 보니 이전에도 그는 그녀에게 요리를 해준 적이 있었는데, 항상 맛있었다. 라엘은 옅게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군. 처음 해보는 종류의 요리라 걱정했었는데.”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그릇도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더 먹도록.”

“아, 괜찮은데…… 폐하께서도 드셔야.”

“난 괜찮아. 그대야말로 못 본 사이 너무 말랐어. 최대한 많이 먹도록.”

그의 목소리에 담긴 속상함에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마른 것은 폐하도 마찬가지잖아요.’

얼굴이 상한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라엘의 얼굴도 피폐해져 있는 것은 마찬가지라, 마리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폐하.”

“왜 그러지?”

“……아니에요.”

마리는 주저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라엘은 그녀가 꺼내려던 말을 눈치챘는지 채근하지 않았다.

“…….”

식사 분위기가 자연스레 어두워졌다. 다시금 현실이 그녀의 가슴을 옥죄었다. 그때, 라엘이 마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마리, 그대는 날 사랑하는가?”

마리는 잠시 의아한 빛을 보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랑해요. 폐하를…… 당신을 정말 많이 사랑해요.”

마리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표현이 부족하단 마음이 들었다. 이 감정을 그저 ‘사랑’이란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렇게나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아프고, 그의 눈빛 하나에 세상이 멈출 것 같은데. 무슨 말로도 이 감정을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 그렇군.”

그녀의 말을 들은 라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눈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그녀의 옅은 갈색 머리를, 눈동자를, 하얀 뺨을 담았다.

“……폐하?”

마리는 순간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의 눈빛에서 알 수 없는 각오 같은 것이 느껴졌다.

‘각오? 무슨 각오?’

그러나 그 느낌은 찰나 지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 느낀 건가 싶었다.

“마리, 그러면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되겠나?”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삼 일. 단 삼 일만 다른 모든 것을 잊고 나의 여인으로 시간을 보내 줄 수 없겠나?”

라엘의 그녀를 향한 강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부탁한다.”

그렇게 둘은 3일의 시간을 함께 보내기로 하였다. 조건은 간단했다.

-3일 동안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서로만을 바라보기.

마리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도 라엘만큼이나 그를 바라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좋아요.”

마리는 침대에서 그에게 기대어 누운 채 중얼거렸다.

“무엇이 좋지?”

“그냥……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요.”

이전에는 몰랐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이렇게나 소중하고 귀할 것이라고는.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벅찬 느낌이 들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도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아무런 말 없이 멍하니 그의 품에 안겨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면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간 뒤기 일쑤였다. 누군가 시간을 도둑질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라엘도 자신의 가슴에 기댄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폐하?”

“란.”

“네?”

“폐하라 부르지 말고, 란이라 부르도록.”

마리는 어색하니 웃었다. 란은 어린 시절 그와 가까운 이들이 부르던 아명이었다.

“……란.”

“다시.”

“란.”

“다시. 다시 한번 불러 보도록.”

라엘은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좋은지 거듭 말했다. 마리는 얼굴을 붉혔다.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것에 불과하건만,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입술이 다시금 맞닿았다. 그의 혀가 마리의 입술을 부드럽게 훑었다. 짜릿한 감각에 그녀가 신음을 흘리자 그의 혀가 안으로 들어와 입천장을 두드렸다.

“폐, 폐하.”

집요하게 안을 괴롭히자 마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그를 붙들었다.

“폐하가 아니라, 란.”

라엘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지그시 깨물었다. 짜릿한 통증에 마리는 그의 머리를 애원하듯 감싸 안았다.

“아…… 란. 그, 그만…….”

“싫은데?”

평소와 다르게 라엘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껏 그녀를 갈망하던 것이 마음에 반영된 듯 괴롭히고 또 괴롭혔다. 그는 끝없이 그녀를 안고 탐닉하다 그녀가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로 녹초가 된 후에야 놔주었다.

“너, 너무해요.”

마리는 알몸으로 그의 품 안에서 축 늘어진 채 말했다.

“뭐가?”

“알잖아요.”

마리는 밉다는 듯 그를 흘겨보았다. 라엘은 쿡쿡 웃더니 그녀의 귓가로 고개를 숙였다.

“잘 모르겠는데. 아니면.”

그의 혀가 그녀의 목덜미를 훑었다.

“……!”

마리는 급히 숨을 들이켰다. 한참이나 괴롭힘당해 감각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러다 또다시 괴롭힘당할 것 같은 불안감에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그만. 이제는 정말로 못 해요.”

“그러니까 뭘?”

“아, 알잖아요!”

마리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쪼르륵 옆으로 도망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왠지 다람쥐같이 귀여운 모습이라 라엘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마리는 이불에서 눈만 빼꼼히 내민 채 물었다.

“이, 이제 그만 괴롭힐 거죠?”

“흐음.”

라엘은 턱을 쓰다듬었다.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저렇게 귀여운 모습을 보여 주자 참기 어려웠다. 그런 그의 마음을 눈치챈 듯 마리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라엘은 피식 웃고는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래, 오늘은 그만 쉬지.”

그는 그녀의 머리에 팔베개를 해주었다.

“푹 쉬도록.”

마리는 또 그가 괴롭힐까 긴장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스르르 풀어지며 눈을 감았다. 긴장하고 있기에는 그의 품이 너무나 포근했다.

라엘은 자신에게 안겨 잠이 든 마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사랑한다, 마리.”

그는 다시 한번 말했다.

“정말로 많이 사랑해.”

마리는 눈을 부스스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몇 시지? 얼마나 잔 거지?’

하루 종일 그와 함께 별장 안에만 있다 보니 시간 감각이 무뎌졌다. 창밖을 보니 달이 기울고 있는 것으로 봐서 늦은 저녁이나 새벽에 가까운 시간 같았다.

‘란은?’

함께 누워 있던 그가 보이지 않자 마리는 괜히 또 덜컥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훌쩍 사라져 버렸을까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마리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품에 안겨 그가 자신의 곁에 있음을 느끼고 싶었다. 그때, 별장 한구석에서 의외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피아노 소리?’

페달을 밟고 일부러 소리를 죽인 듯 옅은 소리였다. 달밤에 어울리는 녹턴, 야상곡이었는데 잔잔하고 따뜻한 선율이 마음을 울렸다. 마리는 홀린 듯 피아노 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별장 구석에 자리한 방에서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란.’

문틈으로 방 안을 들여다본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역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던 이는 라엘이었다. 그의 선율은 너무나 따뜻하고 아름다워 마리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때, 라엘이 기척을 눈치챈 듯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아, 깨웠나 보군. 미안하다.”

“…….”

“그냥 잠이 안 와서 쳐 보고 있었다. 아직 일어나기에는 이르니 들어가서 좀 더 자도록. 나도 금방 들어갈 테니.”

마리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잠이 안 와요.”

“그래?”

라엘은 잠시 고민하다가 뜻밖의 제안을 하였다.

“그러면 잠시 같이 피아노나 치다가 들어가지 않겠나?”

“같이요?”

“그래, 같이. 혼자 치는 것도 좋지만 오랜만에 그대와 같이 치고 싶군.”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아노를 연주하면 복잡한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그녀는 라엘의 옆에 앉아 건반에 손을 올렸다.

“편안하게 천천히.”

라엘의 타건을 시작으로 다시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방금 연주하던 잔잔한 야상곡이었다. 특별히 기교를 뽐내고자 하는 것이 아닌지라 둘은 편안하게 피아노를 연주했다.

‘좋아.’

마리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마치 고요하게 흐르는 강물을 보는 듯했다. 조용한 선율이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었다. 더욱 좋은 것은 그와 소통하는 느낌이었다. 둘이 함께 멜로디를 만들어 가는 느낌은 마치 서로의 마음이 하나로 되어 가는 것과 비슷했다. 그렇게 작은 별장 안에 아름다운 선율이 가득 찼고, 밤이 깊어 갔다. 그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가슴 벅찰 정도로 그녀 안에 기쁨이 차올랐다. 마리는 이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다음 날도 조금 더 일찍 일어난 라엘이 아침을 준비하였다. 그가 주방에서 부스럭거리고 있는 것을 본 마리가 말했다.

“폐하, 아니, 란. 오늘은 제가 준비할게요.”

“괜찮아. 그대는 조금 더 누워 있도록.”

“아니, 어떻게 그래요. 제가 할 테니 쉬고 계세요.”

그래도 명색이 황제인 그가 요리 도구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게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라엘은 낯빛 하나 안 바꾸고 이렇게 말했다.

“원래 내 취미가 요리였다.”

“거, 거짓말하지 마세요. 무슨 폐하 취미가 요리예요.”

“정말이야. 야영할 때 종종 직접 요리해서 먹고는 했었다. 기사 놈들 요리 솜씨가 워낙 형편없어야지.”

그는 프라이팬에 올라간 반죽을 휙 하고 뒤집었는데 그 모습이 범상치 않았다. 마치 전문 쉐프를 연상시키는 손놀림인지라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역시 다방면의 천재.’

그녀는 새삼스럽게 그의 천재성을 떠올렸다. 음악이면 음악, 검이면 검, 정치면 정치. 손만 대면 못 하는 것이 없는 라엘답게 요리도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 라엘은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씨익 웃었다.

“이건 사실 비밀인데, 어릴 적 내 꿈이 가정적인 남자였다.”

“……거짓말 같은데요?”

“그래, 사실 거짓말이다.”

평소답지 않은 실없는 농담이었다. 그렇게 한적한 아침 시간이 흘러갔다. 마리는 의자에 앉아 멀뚱히 그가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멍하니 하품을 하며 그가 요리해 주는 것을 기다리다니. 생각지도 못 한 일상적인 모습이라 적응이 되지 않았다.

“다 됐다.”

“와.”

마리는 라엘이 내온 요리를 보며 탄성을 뱉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양파 수프와 보드라운 빵, 그리고 싱싱한 샐러드에 꿀을 뿌린 팬케이크까지. 정성이 잔뜩 들어간 아침 식사였다. 맛도 굉장히 훌륭했다.

“먹을 만한가?”

“네, 엄청 맛있어요.”

“그래?”

“네, 감사해요.”

라엘은 빤히 그녀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빈말로?”

“네?”

“고마우면 감사의 인사를 해야지.”

마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채고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가, 감사의 인사예요.”

“모자란데?”

“그러면 어떻게?”

라엘은 피식 입꼬리를 올리더니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깊은 딥키스. 그의 혀가 그녀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핥았다. 찌릿한 느낌에 그녀가 몸을 떨자, 라엘은 더욱더 격렬히 그녀의 입안을 침범해 들어갔다. 그렇게 한참이나 키스를 한 라엘은 정신이 빠져 멍한 표정의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아침 먹어야지.”

“아, 네, 네!”

마리는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서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라엘은 그녀가 식사하는 것을 잔잔히 바라보더니 물었다.

“오늘 하고 싶은 것은 없는가?”

마리는 고민했다. 이렇게 그와 별장 안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좋지만, 다른 일을 함께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나들이를 가고 싶어요.”

“나들이?”

“네, 맛있는 도시락을 싸서 예쁜 장소에 놀러 갔다 오고 싶어요.”

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마침 이 주변에 전경이 예쁜 호수가 있으니 그곳에 갔다 오면 되겠군.”

그렇게 둘은 나들이를 떠났다. 마리는 내리쬐는 햇볕에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날씨가 맑네요. 햇살이 예뻐요.”

“최근 비가 많이 왔었는데, 오늘은 다행히 괜찮군.”

마리는 한 손에 도시락을 들고 있는 그를 보며 조심히 물었다.

“혹시 나들이가 싫으신 건 아니지요? 만약 싫다면 다른 일을 해도…….”

라엘은 피식 웃고는 그녀의 머리를 살짝 헝클어뜨렸다.

“그대와 함께하는데 무슨 일이 안 좋겠는가? 걱정하지 마라.”

마리는 라엘의 손을 잡고 숲을 걸었다. 천천히 느긋하게.

‘좋아.’

마리는 숲의 공기를 들이 마시며 생각했다. 화창한 숲속을 걷고 있으니 마치 삼림욕을 하는 것처럼 마음이 평온해졌다. 가장 좋은 것은 아무도 없는 곳을 단둘이서 걷고 있다는 것. 오로지 그와 함께하는 느낌이 그녀의 가슴을 차오르게 했다.

‘그냥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그때, 라엘이 툭 하고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지?”

“아,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라엘은 손가락을 들더니 말했다.

“도착했다.”

시선을 돌린 마리는 작게 탄성을 질렀다. 파란 호수가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예뻐 마리는 고민도 잊고 감탄했다.

“예뻐요. 어떻게 이런 곳을 아셨어요?”

“마침 이번에 오다가 우연히 봤다. 제법 전경이 괜찮아 그대와 함께 오고 싶더군.”

마리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란. 그거 알아요?”

“응?”

“사랑해요.”

라엘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나도. 나도 사랑한다.”

둘은 햇살을 받으며 호숫가에 앉았다.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챙겨 온 도시락 간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던 중 의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 저건? 결혼식 하나 봐요.”

십여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호숫가 한편에 모여 있었다. 늙은 촌장 앞에 곱게 차려입은 젊은 남녀가 서는 것을 보니, 호숫가에서 야외 결혼식을 하려는 것 같았다.

“근처 마을 사람들인 것 같군. 가서 한번 구경해 볼까?”

“사람들 눈에 띄어도 괜찮을까요?”

이래 봬도 둘은 황제와 왕이었다.

“이런 시골 마을 사람들까지 우리를 알아보지는 못 할 거다.”

틀린 말이 아닌지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은 멀찍이 서서 결혼식을 구경했다. 손톱만 한 작은 마을의 결혼식이니만큼 대단한 볼거리는 없었다. 인자한 인상의 촌장의 축사 후 남녀는 언약의 징표를 나누었고, 마을 사람들이 박수로 그들의 미래를 축하해 주었다.

“보기 좋네요.”

“그렇군.”

조촐한 결혼식이었지만 남녀는 행복해 보였다. 서로를 사랑하는 게 잘 느껴져 마리는 부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와 함께 저럴 수 있었으면.’

그때, 그도 같은 생각을 하였는지 그녀의 손을 꼬옥 붙들었다. 둘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마음이 느껴졌다.

“……마리.”

그때, 그가 입을 열었다.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뜻밖의 목소리가 그들을 불렀다.

“나으리. 나으리들!”

놀라 고개를 돌리니 결혼식을 올린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라엘과 마리를 지나가던 귀족으로 여겼는지 나으리라고 호칭했다.

“무슨 일인가?”

“저…… 그게…….”

결혼식을 올린 젊은 남자가 말했다.

“혹시 부케를 받아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저희 마을에 부케를 받을 만한 또래가 없어서…….”

그러며 그는 화들짝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기분 나쁘시다면 죄송합니다. 그저 이 호수에서 부케를 받으면 반드시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내려와서. 좋은 의미로…….”

“반드시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젊은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수해 보이는 밝은 표정이었다.

“네, 저도 그렇고, 이전의 커플도 그렇고 부케를 받고서 사랑이 이루어졌거든요. 신비한 기적을 일으키는 부케이니 아무에게도 안 주기에는 안타까워서…….”

라엘은 마리를 바라보았다. 이 호수의 결혼식에서 부케를 받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니. 그런 게 어디 있겠는가? 시골 무지렁이의 순박한 믿음일 뿐이다. 하지만 마리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받을게요.”

마리는 신혼부부의 부케를 받았고, 마을 사람들은 환한 표정으로 마리와 라엘을 축복해 주었다.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십니다!”

“행복하세요!”

짧은 결혼식이 끝이 났고 마리와 라엘은 다시 별장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 마리는 부케 안의 꽃을 보며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왜 웃지?”

“그냥 좋아서요. 사랑이 이루어지는 부케라잖아요.”

라엘은 옅게 웃음을 지었다. 그녀를 향한 사랑이 담긴 미소였다. 둘은 서로의 손을 잡고 잠시 말없이 숲길을 걸었다. 여전히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이제 하루만 지나면 그들은 적국의 황제와 왕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사실이 그들의 가슴을 짓눌렀다.

“란. 우리가 이루어지는 것은 어려울까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라엘이 흠칫 멈춰 섰다. 서로 애써 꺼내지 않고 있던 이야기였다. 그가 대답하지 못하자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알아요. 다 내려놓고 도망치지 않는 한 우리가 맺어지는 일은 쉽지 않다는 것을. 그런데 어떻게 하죠?”

마리는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 당신과 이렇게 멀어지고 싶지 않아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전 당신 없이 살 수가 없어요.”

“……마리.”

흔들리는 마음 때문일까.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라엘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이다. 난 어떻게든 그대와 함께할 것이야. 어떤 어려움이 가로막고 있다고 해도, 설사 운명이 막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대는 나의 것이니, 그대가 내 운명이니, 결단코 굴복하지 않을 거다.”

그 말을 들은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강한 의지가 그녀의 가슴에 와닿았다. 마리는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방법이 없을까요? 저는 솔직히 모르겠어요. 아무리 고민해 봐도 답이 보이지 않아요.”

“우리가, 아니, 클로얀과 제국이 평화롭게 하나가 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어떤 거죠?”

“첫째는 바로 클로얀 왕국이 힘을 갖추는 거다. 동제국으로서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국력을 갖춘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동등한 자리에서 국혼을 논할 수 있게 된다.”

마리는 라엘의 말뜻을 이해했다. 동제국이 침공하려는 것은, 근본적으로 클로얀 왕국의 힘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만약 클로얀이 동제국으로서도 상대하기 부담스러운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큰 희생을 감수하고 전쟁을 치르는 것보다는 동맹을 맺는 것이 더 이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화친의 분위기다. 이게 어쩌면 더 중요한 점이라 할 수 있지. 지금은 클로얀이든 제국이든 서로를 향한 앙금이 너무 깊어. 그 앙금을 풀어야 한다.”

마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해요.”

시간만 있다면 어떻게든 풀어 나갈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라 시간이 없었다. 그때, 라엘이 말했다.

“아니, 시간은 벌 수 있다. 한 가지 우리를 돕고 있는 일이 있다.”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곧 겨울이다.”

“아…….”

마리는 그의 뜻을 눈치채고 감탄을 내뱉었다.

“난 황제의 권한을 이용해 어떻게든 진군을 늦출 거다. 어차피 겨울이 다가오니 제대로 된 전쟁을 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지.”

그는 강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어떻게든 양국의 화친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분위기가 조금만 풀린다면.”

라엘은 맹세하듯 말했다.

“내 황위를 걸고서라도 그대와의 국혼을 추진하겠다.”

깊은 숲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갈라놓은 운명에 맞서 싸우기로 했다. 서로를 위해, 함께하기 위해 절대로 굴복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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