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 있는 시녀님
8
Chapter 1
“……!”
우뚝 멈추어 선 소년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말이지? 형님…… 아니, 폐하를 치료하겠다고?”
마리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네, 저는 요하네프 3세 폐하를 치료할 수 있습니다.”
소년 대공 스테판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없이 많은 명의도 손을 내저은 병이었다. 그런데 치료할 수 있다고? 그 순간, 스테판의 머릿속에 모리나 여왕에 대한 소문이 떠올랐다.
-수없는 기적을 일으킨 성녀!
동제국에서 얻은 이름인 힐데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끝을 알 수 없는 능력을 지녔으며, 믿을 수 없는 실력의 의술도 있다고 한다. 중병을 앓던 클로얀의 대귀족 하워드 후작이 그녀에게 치료받은 것은 타국에까지 유명한 일이었다.
‘기적의 성녀라는 모리나 여왕이라면? 혹시 형님의 병도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스테판은 흠칫 놀라 경계 어린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너의 말을 어떻게 믿지? 너는 우리의 적인 클로얀의 왕인데?”
“저는 서제국을 적대하려고 했던 적이 없습니다. 전쟁을 시작한 것은 서제국이지요. 우리 왕국민들을 먼저 짓밟은 것은 당신들 서제국이에요.”
마리의 차분한 말에 소년 대공은 입을 다물었다.
“그건…… 형님께서는 클로얀 왕국을 공격할 생각이 없으셨다. 클로얀 왕국을 공격한 것은 스토른 백작, 그놈의 독단이야.”
소년은 이를 바득 갈며 말을 이었다.
“만약 형님이 건재하셨다면 스토른 백작이 감히 그따위로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리는 그 말에 동의했다. 요하네프 3세는 스토른 백작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가 멀쩡했다면 스토른 백작이 폭주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형님께서 예상보다 너무 빠르게 건강이 악화하는 바람에…….”
소년 대공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스토른 백작의 전횡을 막지 못한 것이 분한 듯했다. 마리는 가만히 그 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스테판 대공, 저는 원래부터 요하네프 3세 폐하를 치료하려고 했었어요. 아니, 제가 이곳까지 직접 온 이유가 그분을 치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어째서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에 마리가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 전쟁을 확실히 끝낼 수 있는 이는 요하네프 3세 폐하밖에 없으니까요.”
“……!”
“저는 단순히 선의로 요하네프 3세 폐하를 치료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폐하를 살려 내서, 직접 종전 선언을 받아 내 전쟁을 종결시키려는 것입니다.”
스테판 대공의 눈동자가 커졌다. 생각지도 못 한 이야기였다.
“폐하를 살려 내 직접 종전 선언을 받겠다고?”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하네프 3세를 치료하는 것. 그것이 그녀가 생각한 계획의 마지막 종점이었다. 별동대로 수도를 점령한다고 전쟁이 끝나는 것이 아니니까. 확실히 전쟁을 끝내는 길은 요하네프 3세를 살려 내 종전 선언을 받아 내는 것이 유일했다.
“저는 클로얀 왕국을 위해 요하네프 3세 폐하를 치료하고자 합니다. 그러니 저를 믿어주세요.”
“…….”
스테판 대공은 괴로운 얼굴로 고민하였다. 성문을 열어주었는데 말을 바꾸면? 만약 그랬다가는 고스란히 수도를 넘겨주게 되는 것이다. 소년 대공은 모리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선한 인상의 외모. 그는 그녀가 신뢰할 만한 존재라고 느꼈지만, 그래도 섣불리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지?’
정치 경험이 적은 소년 대공은 요하네프 3세라면 이 순간 어떻게 결정하였을까 생각하였다. 그때, 요하네프 3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아, 마음에 든 여인이 생겨서.”
“그게 누구입니까, 형님?”
“마리 폰 힐데른. 클로얀의 모리나 왕녀다.”
스테판 대공은 이를 악물었다. 저 소녀는 요하네프 3세가 사랑하던 여인이다. 형님이라면 허락하지 않았을까?
“좋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무엇이죠?”
“성에 들어오는 것은 너와 키에르한 후작만이다. 나머지는 허락할 수 없다.”
“……!”
옆에 서 있던 키에르한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명만 성에 들어갔다가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소년 대공이 말을 이었다.
“서제국의 명예를 걸고 너희의 안전을 보증하겠다. 치료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너희의 털끝 하나 건들지 못하게 하겠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네가 형님을 치료해 낸다면, 무의미한 피를 흘리는 일 없이 성문을 열어주겠다. 이건 서제국의 제1황위 계승자인 나 스테판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이다.”
키에르한은 곤란한 표정으로 마리를 바라보았다.
“전하, 너무 위험합니다.”
솔직히 그는 저 제안에 따르고 싶지 않았다. 굳이 저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그들의 전력이면 성을 함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리는 역시나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쉴트 기사단이 성 밖에 대기하고 있는 한 함부로 우리에게 손을 쓰지는 못 할 거예요.”
마리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스테판 대공, 당신의 제안에 따르겠어요. 지금 바로 요하네프 3세 폐하께 안내해 주세요.”
* * *
그렇게 마리와 키에르한은 요하네프 3세에게 안내받았다.
“폐하는 황궁 처소에 거하고 계십니다.”
이전에도 안면이 있던 요한의 최측근 로이스가 말했다.
“상태는 어떤지요?”
마리의 물음에 로이스가 말했다.
“좋지 않으십니다. 전쟁 전부터 급격히 악화하시더니, 지금은 의식도 전혀 없으십니다.”
그러며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는 전하의 능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를 치료하는 것이 정말로 가능하시겠습니까?”
마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치료해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당당히 이야기하긴 했지만 솔직히 마리도 확신은 없었다. 그녀가 짐작하는 질병이 맞는다면 그 누구도 치료해 낼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으리라. 그만큼 어려운 병이었다. 하지만 마리는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했다. 모두를 위해.
“이곳입니다.”
문을 열자 어두운 기운이 확 밀려왔다. 방구석에 익숙한 외양의 사내가 파리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마리는 표정을 굳혔다. 안색을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상태가 안 좋았다.
‘요하네프 3세가 저런 모습으로 누워 있다니.’
요하네프 3세는 그녀를 몇 번이고 곤란에 빠뜨린 최대의 적이었다. 하지만 죽음에 직면한 모습을 보자 마냥 미워할 수 없어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클로얀 왕국의 모리나 전하를 뵈옵니다. 폐하의 주치의인 갈트 남작이라 하옵니다.”
서제국의 어의 갈트 남작이 그녀에게 예를 올렸다. 그녀가 요한을 진료하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들은 어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께서 클로얀 왕국에서 뛰어난 의술을 펼쳤다는 것은 들었습니다만, 불행히도 폐하의 병환은 치료 불가능합니다.”
그러며 갈트 남작은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섣부른 치료는 폐하의 상세를 더 나쁘게만 할 수도 있습니다.”
마리는 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괜히 섣부른 치료를 할 것이면 관두라는 의미였다. 그건 키에르한도 같은 마음이었다. 키에르한은 목소리를 낮춰 조용히 그녀에게 말했다.
“전하, 요하네프 3세의 상태가 생각보다도 안 좋은 것 같습니다. 치료가 어려울 것이라 생각되면, 돌아가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
“만약 치료에 실패하면 서제국이 어떻게 나올지 모릅니다. 괜한 억지를 부려 요하네프 3세가 죽은 책임을 덮어씌우려 할지도 모릅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마리는 고개를 젓고는 어의 갈트 남작에게 물었다.
“폐하의 병이 어떤 것인지는 확인되었나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짐작되는 것은 있습니다.”
갈트 남작은 요하네프 3세를 바라보았다.
“명성이 자자한 여왕 전하시라면 충분히 아실 수 있으시겠지요. 한번 확인해 보시지요.”
“……!”
그렇게 말하는 어의의 음성에는 만약 진단명도 밝혀내지 못할 거면 그냥 순순히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어의인 그가 그녀를 불신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라,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시 폐하를 살펴보겠어요.”
마리는 요하네프 3세 곁으로 가, 꿈속 명의의 능력으로 진찰을 시작했다.
‘안색이 창백하고 맥이 약해. 전형적인 쇼크 상태야. 동시에 호흡도 약해.’
그녀는 요하네프 3세의 생체 징후를 통해 혈역학적 상태를 분석했다.
‘이전부터 심장 발작을 자주 일으켰다고 했지. 그리고 반복되는 호흡곤란.’
마리는 요하네프 3세를 진료하기 위해 각종 의료 도구를 넣어 둔 가방에서 청진기를 꺼내었다. 폐음과 심장음을 반복해 들으며 중얼거렸다.
‘호흡곤란이 심하지만 폐음은 정상이야. 하지만 심장에서는 잡음이 들려. 역시 그 질환이 분명해.’
수많은 정보가 모여들며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진단명이 떠오르게 하였다. 그녀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어의 갈트 남작을 바라보았다.
“폐하가 앓고 있는 병은 이것이 아닌지요?”
갈트 남작은 그녀가 벌써 진단명을 말하려 하자 눈동자를 크게 떴다.
“심장 종양.”
“……!”
“심장 안의 종양이 커져 혈류 흐름에 문제가 생겨 쇼크가 왔고, 인접한 폐의 혈관에도 색전 물질이 날아가 객혈과 호흡곤란이 생긴 것 아닌가요?”
갈트 남작의 얼굴에 경악이 스쳐 지나갔다. 정확했다. 그가 요하네프 3세의 곁에서 10년이 넘게 고민하다 얻은 결론을 저 소녀는 단번에 알아낸 것이다.
“폐하의 지병은 심장 종양이 맞습니다. 하지만 질병을 알아내도 소용이 없습니다. 심장 내의 종양은 치료할 방법은 없으니까요.
갈트 남작의 음성에는 깊은 좌절이 섞여 있었다. 그라고 왜 요한을 치료할 생각을 안 해봤겠는가? 하지만 심장 안에 생긴 종양을 어떻게 치료한단 말인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가능해요.”
“네? 그게 무슨?”
“종양을 절제하면 돼요. 그러면 혈류의 흐름이 회복되며 모든 증상이 좋아질 거예요.”
갈트 남작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종양이 모든 증상의 원인이니, 종양만 잘라 내면 회복되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심장 안의 종양을 어떻게 자른단 말인가? 그 문제에 대해 그녀는 더욱더 황당한 답변을 내놓았다.
“심장을 절개해 종양에 접근하면 돼요.”
“……!”
갈트 남작의 얼굴이 해괴해졌다.
“아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갈트 남작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지려고 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녀의 신분만 아니었다면 버럭 화를 내었을 것이다. 심장을 칼로 절개하겠다니?! 요하네프 3세를 죽이겠다는 뜻 아닌가! 그때, 마리가 갈트 남작은 무거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남작, 나는 폐하를 해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요하네프 3세 폐하가 회복하는 것은 우리 클로얀 왕국에도 중요해요. 그러니 나는 그분을 살려 내려고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그녀는 자신이 시도하려는 수술 테크닉을 설명하였다. 그 설명을 듣자 어의의 눈빛이 파도를 만난 것처럼 진동했다. 그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해본 접근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지금 설명하는 방법이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만큼 탁월한 수술 방법이었다. 하지만 갈트 남작은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하오나…… 너무나 고난이도의 접근법입니다. 저는 감히 그런 수술을 할 실력이 없습니다.”
“수술은 제가 할 거예요. 제가 할 수 있어요.”
“……!”
갈트 남작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가능하다고? 그런 수술이? 물론 그도 그녀가 기적의 성녀라 불리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가능하다 해도…… 너무 위험합니다. 수술 중 사망하실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이 폐하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마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
어의 갈트 남작은 침음을 흘렸다.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음은 알지만, 도저히 황제에게 위험한 수술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년 대공, 스테판이 말했다.
“진행하도록.”
“대공 전하?!”
“내가 아는 형님이라면 위험하다고 수술을 피하지는 않았을 거다. 오히려 웃으며 수술을 받았겠지. 그러니 진행해!”
마리는 소년 대공에게 고맙다는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그러면 바로 수술을 진행하겠습니다. 준비해 주십시오.”
수술은 황궁에 딸린 의무 시설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요하네프 3세가 오랜 기간 병환에 시달려서 서제국 황궁에는 병원급의 의무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상태가 워낙 위중했기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수면 효과가 있는 미약을 먹여 마취하는 등 필요한 준비를 끝낸 후 마리는 바로 수술에 임했다. 그런데 수술장에 들어가려는 순간, 소년 대공이 그녀를 불렀다.
“그…….”
혹시라도 수술 전 으름장을 놓으려는 것인가 해서 키에르한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소년 대공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혀, 형님을 잘 부탁한다.”
그의 눈에는 요하네프 3세를 향한 간절한 마음이 일렁이고 있었다.
‘스테판 대공은 진심으로 요하네프 3세를 생각하고 있구나.’
마리는 꿈속 의사의 마음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술 침대에 누워 있는 요하네프 3세의 앞에 다가간 그녀는 생각했다.
‘수술에 실패하면 어떻게 하지?’
파리한 요한의 안색을 보니 순간 걱정이 들었다.
‘아니야. 결과는 생각하지 말고 일단 최선을 다하자.’
그녀는 복잡한 사정을 모두 잊었다. 요하네프 3세를 살려 내 종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도, 여왕으로서의 부담감도 다 잊었다. 그저 의사로서 환자를 살린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하자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시작하겠습니다.”
마리는 미리 심장 수술을 위해 준비해 온 도구를 꺼내었다. 먼저 수술칼을 들어 갈비뼈 사이를 일직선으로 주욱 내리그었다. 순식간에 피가 튀어 올랐다.
“……!”
그 거침없는 움직임에 어시스트를 선 어의 갈트 남작의 눈이 요동쳤다. 하지만 마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피부 밑의 지방, 근육층까지 완전히 가른 그녀는 미리 특수 제작해 가져온 철제 도구로 갈비뼈 사이를 힘껏 벌렸다. 그러자 요하네프 3세의 심장이 드러났다.
‘역시 종양이 우측 심장을 완전히 짓누르고 있어.’
마리는 요하네프 3세의 심장을 보고 신음을 흘렸다. 생각보다도 종양의 크기가 커다랬다. 밖에서 보기에도 우측 아래 심장에서 불쑥 튀어나와 있는 종괴가 보일 정도였다.
‘최대한 신속하게 저 종양을 잘라내야 해.’
마리는 작은 수술칼을 들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최대한 빠르게, 그러면서도 정확하게 움직여야 했다.
찌익.
날카로운 칼날이 우측 심장의 벽면을 갈랐고, 왈칵 피가 솟구쳐 올랐다!
“……!”
지켜보던 어의 갈트 남작은 아찔해져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을 정말로 가르다니! 너무 떨려 그의 심장이 멎을 지경이었다.
“정확히 잡고 있어주세요! 잘 보조해 주셔야 해요!”
그 외침에 갈트 남작은 이를 악물었다. 마리도 이를 악문 것은 마찬가지였다. 심장을 열고 보니 종양의 형태가 좋지 않았다. 커다랗고 뿌리 부분이 넓었다.
‘저 종양을 다 절제해 내야 해.’
문제는 종양 자체에는 손을 대지 않고 뿌리 부분만 도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종양을 잘못 건들면 건든 부분이 떨어져 다른 부위에 날아갈 수도 있다. 피를 울컥울컥 토하며 움직이는 심장 안에서 저 커다란 종양을 건드리지 않고 뿌리만 정확히 도려내야 하니 정말 아찔한 난이도였다.
‘최대한 조심히.’
마리는 심장이 펌프질할 때마다 흔들리는 종양의 뿌리 부분을 칼로 도려내기 시작했다. 하필 종양 뿌리가 심장의 안쪽까지 파고 들어가 있어 더욱 쉽지 않았다. 마리는 최대한 심장벽을 적게 도려내며, 동시에 종양도 건들지 않도록 뿌리를 잘라 나갔다.
‘어떻게 저럴 수가?’
갈트 남작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경이로운 솜씨였다. 그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해본 경지의 손놀림. 그런데 그때, 요하네프 3세의 상태를 관찰하던 다른 의사가 외쳤다.
“피가 너무 많이 흐르고 있습니다! 맥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더 빨리!’
그녀는 더욱더 속도를 내었다. 심장을 절개하는 수술은 시간과의 승부였다. 심장이 움직일 때마다 피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일분일초가 급했다. 수술장에 오로지 그녀의 손이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고, 이윽고 마술과도 같은 손놀림 끝에!
탁!
종양이 뿌리부터 심장에서 떨어져 나왔다.
‘됐어!’
그런데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폐, 폐하의 맥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꿀렁꿀렁 펌프질하던 심장의 움직임이 멈추어 있었다. 마리의 얼굴이 하얘졌다.
‘심실 부정맥이야! 종양을 떼어 낸 충격으로 심장 내부의 신호에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해!’
강한 충격을 받으면 심장을 움직이는 신호 체계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커다란 종양이 억지로 떨어져 나가며 그 신호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를 어떻게?”
요하네프 3세가 사망한 것으로 여긴 갈트 남작이 멍하니 물었다. 마리는 그 순간,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심장을 압박해 피를 순환시켜 줘야 해!’
충격에서 돌아오면 심장의 움직임은 다시 회복될 것이다. 그때까지 피를 순환시켜 주어야 했다. 마리는 양손으로 심장을 압박했다. 개흉 심장 압박이었다.
‘제발!’
그렇게 가슴이 타들어 갈 정도로 아찔한 시간이 흐른 후.
두근.
요하네프 3세의 심장이 다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아.”
갈트 남작은 가슴이 떨어질 것 같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정말로 요한이 죽은 줄 알았었다.
“아직 다 끝나지 않았어요.”
“네, 전하.”
마리는 굳은 얼굴로 심장의 내부를 바라보았다. 종양이 자라며 심장 내부, 특히 판막이 망가져 있는 상태다. 저 판막을 수리해 주지 않으면 요하네프 3세의 상태는 금세 다시 악화할 것이다.
‘움직임이 돌아오긴 했지만 약해. 그리고 출혈량이 너무 많아.’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이제부터는 정말로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출혈성 쇼크로 다시 심정지가 일어나기 전에 판막 수리를 마무리해야 했다.
“실 부탁해요.”
마리는 미리 소독해 온 실을 손에 쥐었다. 심장 판막은 피의 흐름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데, 종양 때문에 뿌리 부분이 늘어나 제대로 닫히지 않고 있었다. 늘어난 부분을 꿰매 판막의 크기를 맞춰 주어야 했다. 다시 마리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보았던 의사의 솜씨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손놀림이 수술장에서 펼쳐졌다. 한 땀, 한 땀 실이 손상된 부위를 꿰맬 때마다 추욱 늘어나 있던 판막이 기능에 맞게 조절되었다.
“폐하의 맥이 다시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시간! 점점 악화하는 요하네프 3세의 상태에 마리는 이를 악물었다.
‘제발! 조금 더 빨리……!’
그렇게 가슴이 멎을 것 같은 시간이 지나고, 판막의 수리가 끝이 났다. 마리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수리가 끝난 판막의 움직임을 살폈다. 만약 수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으면 다시 시도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다.
탁. 탁.
조용한 수술장에 판막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다행히 판막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맞물렸다. 수술이 성공한 것이다.
“끄, 끝난 것입니까?”
갈트 남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무리하겠습니다.”
“아아! 신이여!”
어의인 갈트 남작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 마리는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개한 심장을 다시 봉합해야 했다.
‘내막과 외막에 오차가 생기지 않도록 정확히.’
끝없이 펌프질하는 근육을 꿰매는 것이니 봉합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마리는 끝까지 놀라운 집중력을 유지하며 심장 절개창의 봉합을 마쳤다. 이윽고 모든 수술이 끝나고 마리는 요하네프 3세의 상태를 확인했다.
“폐하의 상태는 어떤가요?”
상태를 살피던 의사가 상기된 얼굴로 답했다.
“맥이 아직 약하긴 하지만, 그래도 안정적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마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동서 양 제국과 클로얀 왕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술이 마무리되었다.
* * *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바로 요하네프 3세가 눈을 뜬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수술 당시에 흘린 피로 몇 번이고 상태가 악화되었고, 마리를 비롯한 의료진이 매달린 후에야 간신히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틀 뒤.
“…….”
드디어 요하네프 3세가 눈을 떴다.
“형님! 폐하!”
“……스테판?”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한참 후에야 눈을 뜬 요하네프 3세는 주변 상황이 파악이 안 되는 눈치였다. 그는 멍하니 있다가 뒤에 서 있는 마리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녀가 보이는 거지? 꿈인가? 아니면 여기가 천국?”
“꿈도, 천국도 아니에요, 폐하.”
마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폐하를 치료했어요.”
그 말에 요하네프 3세는 다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한 말의 뜻을 일순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날 치료했다고? 그게 무슨……?”
그런데 그 순간, 그는 가슴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신음을 흘렸다. 수술 상처로 인한 통증이었다.
“제가 폐하의 심장 종양을 수술로 제거했어요. 이제 폐하는 완전히 치유되었어요.”
“…….”
천하의 요하네프 3세이지만 그 말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리가 눈앞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믿기지 않은데, 치료가 불가능한 자신의 병을 완치시켰다고?
“……뭔가 상황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요, 로이스. 그간의 이야기를 설명해 보도록.”
“네, 폐하.”
서제국 정보부 부부장이자 최측근인 로이스가 그간 있었던 일을 말하였다. 자신이 의식을 잃고 있던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들은 요하네프 3세는 한참이나 침묵에 잠겼다.
“그렇군. 라키가 결국 선을 넘어버렸군. 내가 조금이라도 더 버텼어야 했는데.”
자신의 손에서 벗어난 스토른 백작의 행보와 최후를 들은 요하네프 3세는 착잡한 심경으로 중얼거렸다. 요하네프 3세가 제국 일통을 위해 세운 계획은 완벽했었다. 그런데 스토른 백작이 예상 밖의 행보를 보이며 클로얀 왕국을 공격하는 바람에 계획이 완전히 꼬인 것이다. 만약 요하네프 3세가 지금처럼 빨리 쓰러지지 않았다면 스토른 백작이 폭주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수도인 엘페론성은 클로얀 왕국의 별동대에 점령된 상태라고?”
“네, 폐하.”
로이스는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무사히 수술이 끝난 후, 키에르한은 별동대를 이끌고 엘페론성에 입성하였다. 어차피 500명 남짓한 근위병만으로는 방어가 불가능했고, 제1황위 계승자인 스테판 대공이 미리 한 약속이 있었기에 별동대는 사실상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그렇군.”
요하네프 3세는 침묵에 잠겼다. 의식을 차렸더니 너무나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우리의 패배군.”
요하네프 3세는 담담한 목소리로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래, 믿을 수 없게도 그의 패배였다. 저 소녀에게 모든 계획이 막혔고, 심지어 수도까지 함락된 것이다. 그는 마리를 향해 빙긋 웃었다.
“대단합니다, 왕녀. 아니, 이제는 여왕이 되었군요. 승리를 축하합니다.”
마리는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를 왜 치료해 준 것입니까? 혹시 당신도 사실은 마음속에 저를 담고 있어 차마 제 죽음을 외면하지 못했던 것입니까?”
막 죽을 위기에서 돌아왔음에도 여전히 흰소리를 하는 요하네프 3세를 보며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종전 협상을 하기 위해서예요.”
“흐음?”
“폐하만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니까요.”
요한은 마리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별동대로 수도를 함락시킨다고 해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항복 선언을 받아 내야 한다. 그리고 실권자인 스토른 백작이 사망한 서제국에서 항복 선언을 할 수 있는 인물은 요하네프 3세밖에 없었다.
“저에게 항복 선언을 받아 내려 한 것이군요. 이거 자존심이 조금 상하는군요.”
요하네프 3세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마리의 눈빛이 굳어졌다.
“그렇다면 원하는 일은 아니지만 클로얀 왕국을 위한 선택을 할 수 밖에요.”
“클로얀 왕국을 위한 선택이라면?”
“제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것으로 생각해요. 다만 저는 피를 보고 싶지는 않아요.”
요하네프 3세의 미소가 짙어졌다. 정전이 결렬된다면 그녀가 고를 수 있는 선택은 하나였다. 요하네프 3세와 황위 계승권자인 스테판 대공의 목을 치는 것. 둘 모두 목숨을 잃으면 전쟁도 흐지부지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큭큭. 이거 신선하군요. 설마 당신에게 협박을 듣는 날이 오다니. 너무 신선해 새로운 매력이 느껴지는군요. 나쁜 여자의 매력이랄까?”
“…….”
“농담이 아니라 진담입니다, 진담. 그렇게 노려보지 마십시오. 제가 당신을 좋아하는 것 알고 있지 않습니까? 키에르한 후작, 당신도 노려보지 마십시오.”
요하네프 3세는 어깨를 으쓱하다 수술 상처가 자극되어 신음을 흘렸다. 통증에 한참을 끙끙거리다 그는 입을 열었다.
“어쨌든 알겠습니다. 칼자루는 당신이 쥐고 있는 상황이니, 안 따를 수가 없군요. 패배를 인정하고 군대를 회군시키겠습니다.”
“……!”
그 긍정적인 답변에 마리는 속으로 기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서제국과의 전쟁을 종결시킨 것이다. 라엘의 동제국과 풀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지만 큰 위기 하나를 넘겼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기뻐하기는 일렀다. 요하네프 3세가 이렇게 말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를 어떻게 믿을 것입니까?”
“무슨 말이죠?”
“종전 후 불가침 협약을 맺는다고 해도, 우리가 그걸 꼭 따른다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제 장기가 배신인 것은 잘 아시죠?”
마리의 안색이 딱딱해졌다. 마치 반드시 뒤통수를 치겠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실제로 요하네프 3세가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은 없었다. 별동대가 물러나고 지금의 위기에서만 벗어나면 당장 다시 군대를 보낼지도 몰랐다.
“그러니 정전 협정에 이런 내용을 넣는 것은 어떻습니까?”
요하네프 3세가 말을 이었다.
“저와 당신이 국혼을 맺는 것입니다.”
“……!”
마리의 눈이 커졌다. 농담하는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요하네프 3세의 눈빛은 평소와 다르게 조금의 장난기도 없었다. 진심인 것이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하나로 맺어지면 클로얀 왕국이 다시 위기에 처할 일은 없어질 것입니다. 저는 신의로서 당신을 대하고, 클로얀 왕국을 최고의 동맹국으로서 우대할 것입니다.”
마리는 싸늘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국혼을 제안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이죠?”
요하네프 3세가 좋은 의도로 저런 제안을 할 리가 없었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진짜 이유라…… 그거야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는 여전히 장난기 없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전부터 누누이 말하고 있지만 저는 당신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필요합니까?”
“……!”
“물론 양국이 국혼으로 동맹이 된다면 여러 이득이 발생하겠지만, 그거야 사소한 문제일 뿐이지요.”
마리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요하네프 3세는 천천히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치 그녀가 자신의 손을 맞잡아주길 바라는 것처럼. 하지만 마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겠어요.”
“어째서입니까?”
“그렇게 말씀하셔도 결국 클로얀 왕국을 다리 삼아 동제국을 침공하려는 계획인 것 알고 있어요. 우리 클로얀 왕국은 폐하의 야욕에 휘둘릴 생각이 없어요.”
요하네프 3세는 입을 다물었다. 마리를 향한 그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지적도 틀렸다고 할 수 없었기에 할 말이 없었다. 그때, 마리가 의외의 제안을 하였다.
“정전에 서로의 신뢰가 필요하다면 이런 조약은 어떠세요?”
“무엇 말입니까?”
“양국에 도움이 되는 협력 조약을 추가로 맺는 거예요.”
요하네프 3세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들었다.
“서제국은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릴 때가 많다고 들었어요. 그 부족한 부분을 우리 클로얀 왕국이 최대한 도와드리겠어요.”
요하네프 3세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말처럼 서제국은 대부분의 영토가 숲과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목축업과 광산업이 주 산업이었는데, 옥토가 많은 동제국에 비해서 식량 수급 상황이 좋지가 않았다. 그래서 매번 광물로 얻은 수익으로 타국에서 식량을 구해 오곤 했다.
‘역대로 서제국이 동제국의 영토를 노려 온 것은 이런 속사정 때문이었지.’
마리는 속으로 생각하며 말했다.
“다행히 우리 클로얀 왕국도 대부분의 영토가 비옥한 옥토예요. 불가침 조약이 유지되는 한 왕국에 여분으로 생산되는 식량을 모두 서제국에 팔겠어요.”
“확실히 우리 서제국에 도움이 되는 제안이군요. 하지만 값은 어떻게 받으실 생각인 거죠? 만약 무리한 값을 요구한다면 특별히 클로얀 왕국과 거래할 만한 이유가 없습니다만.”
서제국에는 풍부한 광물 자원이 있었다. 그것이 식량 수급이 좋지 않음에도 서제국이 강대국으로 군림할 수 있는 이유였다. 만약 식량 거래에 대한 대가로 광물을 요구한다면 특별히 서제국이 얻을 이득이 없었다. 다른 나라와 거래해도 되는 문제니까. 하지만 마리가 말한 거래의 대가는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나무.”
“……?”
요한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했다. 식량 거래의 값으로 뭘 바란다고? 하지만 마리는 재차 말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바로 나무예요.”
요한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서제국에서 가장 많이 남아도는 것이 나무였다. 지금 당장 엘페론성 밖만 나가도 울창한 숲이었으니까. 식량을 받는 대가로 나무를 주면 된다니. 이건 너무 서제국에 유리한 제안이었다.
“우리가 마냥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에요. 앞으로 클로얀 왕국에는 목재가 아주 많이 필요하게 될 테니까요.”
마리는 클로얀 왕국의 청사진을 떠올렸다. 그녀는 단순히 농업뿐 아니라 여러 산업 분야에서 클로얀 왕국을 진흥시킬 생각이었다. 개척되지 않은 광산 개발, 소금 정제업, 심지어 최근 소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종이 생산까지.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산업 분야에 대규모의 목재가 필요했다. 하지만 클로얀은 서제국에 비해 목재 자원이 크게 부족했다.
‘그러니 남는 식량으로 다량의 나무를 구할 수 있다면 절대 손해가 아니야.’
더구나 이 거래의 가장 큰 이점은 바로 서제국과의 상호 신뢰였다. 서로 간의 이득이 되는 거래를 하는 한 함부로 서제국도 클로얀 왕국을 건들지 못할 테니까.
“앞으로 5년. 그 기간 동안 불가침 조약을 맺도록 해요.”
“불가침이 유지되는 한, 식량과 나무 거래는 지속되는 것입니까?”
“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하네프 3세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왜 하필 5년입니까?”
“우리 클로얀 왕국은 5년 안에 서제국의 침공을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강해질 생각이니까요.”
“……!”
마리의 강한 목소리에 요하네프 3세의 눈이 커졌다. 그는 곧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 그렇군요. 5년 안에 우리 서제국에 맞설 정도로 강해질 생각이다라. 대단합니다.”
“비웃는 것인가요?”
“아니요. 천만에요.”
요하네프 3세는 빙긋 웃었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비웃었겠지만 모리나 여왕, 당신이 그렇게 이야기하니 비웃을 수가 없군요. 나도 긴장하고 있겠습니다.”
그는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끝을 알 수 없는 그녀라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충분히 가능하리라.
“그런데 만약 이런 협정을 맺었음에도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생각지 못한 불의의 일로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거나 하는 등의 일 말이지요.”
“불가침 협정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인가요?”
“설마요. 그냥 물어보는 것입니다.”
마리는 한숨을 내쉬고 날카롭게 말하였다.
“그때 폐하께서는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셔야 할 거예요.”
“네, 그게 무슨?”
“이번에 치료한 심장 종양. 나중에 다시 재발할 가능성이 있어요. 만약 우리 클로얀을 공격한다면 훗날 폐하는 자신의 병을 치료할 의사를 잃게 될 거예요.”
그렇다. 심장 종양. 정확히는 심장 점액종(Cardiac myxoma). 상당히 높은 빈도로 재발하는 병이다. 요하네프 3세는 마리가 진정으로 노렸던 안전장치가 자신의 병인 것을 알고 당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병이 언제 재발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클로얀 왕국을 공격했다가는 훗날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하리라.
“이거 빠져나갈 틈이 없군요. 완전히 졌습니다. 당신의 요구를 전부 수용하지요.”
요하네프 3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리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드디어 수많은 고비를 넘어서 서제국과 클로얀 왕국의 전쟁이 끝나게 된 것이다.
“그러면 문서에 정확히 협정 내용을 기입해 남기고…….”
그렇게 그녀가 말하는 순간, 갑자기 이변이 발생했다. 요하네프 3세가 가슴을 움켜잡으며 신음을 흘린 것이다!
“크윽!”
“……폐하?!”
마리가 당황해 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그 순간, 요하네프 3세가 그녀의 손을 탁 하고 잡았다. 그의 얼굴에는 방금 신음을 흘렸다고는 생각할 수 없게 은근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폐하?”
그녀는 그가 꾀병을 부렸음을 눈치챘다.
“가슴이 너무 아프군요.”
“……정말요? 거짓말 같은데…….”
“정말입니다. 너무 아파서 견디지 못할 정도입니다.”
“아닌 것 같은데…….”
요하네프 3세는 고개를 젓고는 그녀의 손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아플 것 같은데, 협약에 이런 내용을 추가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네?”
“당신이 주치의로서 계속해서 제 진료를 봐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국의 신뢰도 돈독해지고, 제 가슴의 통증도 없어질 것 같습니다.”
그는 사심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만약 당신이 제 개인 주치의가 되어주지 않는다면, 저는 협약에 동의하지 않겠습니다.”
* * *
그렇게 모리나와 요하네프 3세 간의 협정이 이루어졌다. 서제국군의 즉각 철수 및 5년간의 불가침 조약. 그리고 향후 양국의 협력을 담은 협정이었다.
“전쟁이 끝났다고?”
“서제국군이 물러간다고?”
종전 소식은 곧바로 클로얀 왕국에 전파되었다. 서제국군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해가던 왕국민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더욱 왕국민들의 가슴을 벅차게 한 소식이 있었다. 바로 그들의 여왕인 모리나의 생존 소식이었다.
“여왕 전하께서 살아 계시다고?”
“정말로?”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죽은 줄 알고 얼마나 슬퍼했던가. 그런데 살아 계실 뿐 아니라, 별동대를 이끌고 서제국군의 수도를 함락해 종전을 이루어 내다니. 왕국민들은 너무나 기뻐 가슴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다, 다행이야. 정말로 다행이야…… 난 여왕 전하께서 정말로 돌아가신 줄 알고…….”
“그러게 내가 살아 계실 거라고 했잖나! 모리나 여왕님께서 그렇게 쉽게 돌아가실 리가 없다고! 천사님께서 지켜 주신 거야!”
사람들은 기쁨의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여왕 전하 만세!”
“신께서 당신께 축복을!”
사람들은 서제국과 전쟁이 끝났다는 것보다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에 더 큰 기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심지어 너무 기뻐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많았다.
그렇게 클로얀 왕국에 잠시간의 평화와 행복이 찾아들었다. 왕국은 서제국에서 승전하고 돌아온 모리나 여왕을 중심으로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각 체계를 정비해 나갔다. 모든 게 순조로운 상태. 다만 한 가지 찝찝한 사실이 있었다.
“아직 스토른 백작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고요?”
“네, 전하.”
마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당연히 지금쯤 시신이 발견되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니라고?
‘혹시 아직 살아 있는 것은 아니겠지?’
마리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살아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설사 살아 있다고 해도 이미 서제국과의 전쟁은 끝이 났어.’
하지만 그 뱀 같은 눈동자를 떠올리니 등줄기가 서늘했다. 마리는 확실히 하기 위해 말했다.
“그래도 계속해서 시신을 수색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전하.”
그렇게 스토른 백작의 일은 다소의 찝찝함을 남겼다. 그것 외에는 평화로운 기간이었다. 왕국민들은 기쁜 표정으로 왕국을 재건해 갔다. 하지만 평화의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얼마 뒤 급보가 왕국에 날아들었다. 바로 라엘의 동제국이 동방 교국을 패퇴시켰다는 소식이었다. 동방 교국을 몰아낸 동제국의 칼날이 어디로 향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을 원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런 국가의 일은 황제 혼자의 뜻으로 결정할 수가 없어.’
마리는 무거운 얼굴로 생각했다. 만약 라엘이 동제국 귀족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면 동제국은 왕국을 향해 토벌군을 보낼 것이다.
“상황이 안 좋게 풀릴 것을 대비해야겠군요.”
마리는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또 다른 전운이 왕국에 몰려들었고, 마리와 라엘의 운명은 칼날 위에 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