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마리는 위센성에 들어갔다. 나락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두려움이 들었지만,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었다.
“모리나 여왕 전하를 뵙습니다. 서제국군의 부총사령관인 헬리안 백작이라고 합니다.”
성에 들어가자 서제국군의 부총사령관 헬리안 백작이 그녀에게 예를 표했다.
“……네, 모리나입니다.”
마리는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당장 밧줄에 묶여 감옥에 갇힐 것이라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공손한 인사였다. 스토른 백작과 다르게 헬리안 백작은 다른 귀족들처럼 정상적인 인물 같았다. 헬리안 백작이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제국에 계실 적부터 많은 이야기 들었습니다. 이렇게 적으로 만나 뵙게 되어 유감입니다만, 최대한 예를 갖추어 불편함 없이 모시겠습니다.”
마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기사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에는 정말로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건……?”
“전하를 위해 스토른 백작님이 준비한 만찬입니다.”
테이블 위에 올라온 요리는 하나같이 진귀한 음식이었다. 이전 동제국의 황궁에서도 쉽게 볼 수 없던 진미도 많았다. 그때, 스토른 백작이 느긋한 발걸음으로 만찬회장에 들어오며 말했다.
“편히 앉으십시오.”
“무슨 속셈이죠?”
마리는 뾰족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차피 절 포로로 삼으려는 것 아니었나요?”
스토른 백작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건 맞습니다. 이제부터 전하는 제 손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대접을?”
“당신이니까요.”
이해할 수 없는 소리에 마리가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 스토른 백작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전하께 한 번쯤은 정성을 다해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마리는 더욱더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하였다.
“어째서죠?”
스토른 백작은 웃음을 지었다.
“양가감정이라고 아십니까?”
“……?”
그는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제 마음을 너무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요. 어쨌든 음식을 드시지요.”
마리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식기를 들었다. 그렇게 만찬이 시작되었다. 물론 마리는 음식을 즐길 기분이 아니었다. 진귀한 음식이 수없이 나왔지만, 무얼 먹어도 돌을 씹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리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스토른 백작을 힐끗 살폈으나, 그는 가면처럼 꾸민 듯한 미소를 지은 채 식사를 즐길 뿐이었다.
‘도대체 날 어떻게 하려고…….’
의외로 호의적인 분위기였지만, 마리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대우를 받으니 더욱 두려움이 들었다. 저 아름다운 얼굴 뒤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악의를 품고 있을까? 결국, 마리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제 절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그 물음에 스토른 백작은 그녀의 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백작의 눈은 맑은 푸른색으로 보석처럼 예뻤지만, 그 시선을 마주한 마리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마치 죽은 인형처럼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자신만 바라보고 있자 마리는 용기를 내어 재차 물었다.
“백작님은 왜 저를 증오하는 것이지요?”
마리는 그가 자신을 증오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스토른 백작이 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요.”
그는 평소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일단 식사를 마저 하시지요. 음식이 식겠습니다.”
* * *
별다른 대화 없이 만찬회가 끝나고, 마리는 하녀의 안내를 받았다.
“씻을 물을 데워 놓았습니다.”
“씻을 물이요?”
“네.”
마리는 또다시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 편히 씻을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녀가 의외의 말을 하였다.
“스토른 백작님께서 당부하셨습니다.”
마리의 안색이 굳었다.
“어째서 스토른 백작이?”
하녀는 자신은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마리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안내하세요.”
깨끗하게 단장된 욕실에는 향료가 피워져 있었고, 심지어 목욕 수발을 들 하녀들도 있었다. 왕성에 있을 때보다 더 호화로운 목욕이었다.
‘무슨 생각인 거지?’
마리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스토른 백작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전하, 손을.”
“목욕 시중은 됐어요.”
“백작님의 명령입니다.”
완강히 답한 하녀들은 마리의 몸을 부드럽게 씻겨 주었다. 그리고 하녀들은 씻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랜 여행에 지친 그녀의 몸을 가볍게 마사지해 준 후 피부에 좋은 오일까지 발라주었다.
“그, 그만.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돼요.”
“명령입니다.”
하녀들의 말에 마리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가축을 도축하기 전에 털을 다듬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뭘 하는 건지.’
그런데 순간 그녀는 멈칫했다.
‘설마? 날?’
순간 섬뜩한 두려움이 몸 안에 들어찼다.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스토른 백작은 나에게 정욕을 품고 있지 않아. 오히려 날 증오할 뿐.’
그건 확실했다. 스토른 백작이 자신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증오와 광기였지, 애욕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마리는 자신의 방으로 안내받았다.
“편히 쉬십시오, 전하.”
하녀가 공손히 인사한 후 방에서 나갔다. 그녀가 안내받은 방은 커다란 침대가 놓인 호화로운 방이었다. 전임 위센성의 성주 부부가 사용하던 방 같았다. 그 커다란 방에 우두커니 홀로 남겨지자, 마리는 다시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설마? 정말 아니겠지?’
그가 자신에게 그런 욕정을 품고 있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모르는 일이었다. 단순히 모욕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라도 자신을 범할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난 어떻게 해야지?’
마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궁극적으로 서제국을 무너뜨릴 계책을 가지고 사자의 굴에 들어왔다. 어떤 고초를 당해도 그 계책을 이루기 전에는 버텨야 했다. 하지만 그런 치욕을 당하면 참을 수 있을까?
그 순간, 쇠가 긁히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스토른 백작이었다. 방 안에 들어온 스토른 백작은 그녀를 바라보더니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역시 아름다우시군요.”
마리는 입술을 깨물며 경계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로 오신 거죠?”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면?”
스토른 백작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그냥 생각이 나서 왔습니다.”
마리는 그의 말에 더욱더 경계 어린 표정을 짓고 주춤 뒷걸음질 쳤다. 스토른 백작은 피식 웃고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
그와의 거리가 좁혀지자 마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침을 꿀꺽 삼키며 뒤로 물러났지만, 곧 탁하고 벽에 등이 부닥쳤다.
“다, 다가오지 마세요!”
마리는 이를 악물며 외쳤다.
“만약 허튼짓하려고 하면……!”
그 순간이었다. 지척까지 다가온 스토른 백작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조용히 하십시오.”
“……!”
얼음처럼 차갑고 섬뜩한 목소리.
“당신을 어쩌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스토른 백작이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벌레가 기는 듯 소름 끼치는 느낌에 그녀가 파르르 떠는 순간, 그가 말했다.
“저를 더 자극하면 제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가만히 있으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동자에는 이전부터 봐 왔던 광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손을 움직여 천천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귀한 것을 만지듯 부드럽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바라는 것은 당신의 몸이 아니니까요.”
“그러면 도대체 제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죠?”
마리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스토른 백작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바로 당신, 그 자체.”
마리는 흠칫 눈을 크게 떴다. 생각지도 못 한 대답이었다.
‘나를 바란다고?’
하지만 그녀는 곧 그가 말한 내용이 일반적인 뜻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의 눈빛에는 그녀를 향한 일말의 애정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득한 것은 혐오에 가까운 일그러진 감정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전 당신이 거슬립니다. 철저히 망가뜨리고 싶을 정도로.”
스토른 백작은 자신의 마음 일부를 꺼내었다. 그는 그녀가 거슬렸다. 악의에 일그러진 자신과 너무나 다른 존재였기에. 하지만 이 감정을 단순히 증오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어둠이 빛을 미워하면서도 동경하듯 그의 가슴 한구석에는 그녀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가슴속에는 모순되는 감정이 동시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녀를 철저히 짓밟고 망가뜨리고 싶다는 악의, 동시에 그녀를 손에 넣고 싶다는 갈망. 그 양가감정의 모순 속에서 스토른 백작은 말했다.
“타인을 향한 당신의 숭고한 마음, 희생. 그 모든 것이 거슬립니다. 철저히 짓밟고 싶을 정도로 거슬립니다.”
심상치 않은 그의 목소리에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서? 그래서 저에게 무얼 바라는 거죠?”
스토른 백작은 대답 대신 다른 질문을 하였다.
“대답해 주기 전에 한 가지만 묻죠, 모리나 여왕. 당신은 어째서 클로얀의 왕이 된 것입니까? 원래 당신은 클로얀의 왕이 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습니까?”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스토른 백작의 말처럼 그녀는 클로얀의 왕이 되는 것을 바란 적이 없었다.
“사실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지 않습니까? 남들이 멋대로 짊어지게 한 책임만 내팽개치면 될 텐데요. 그런데 어째서 원하지도 않은 일을 하고 계십니까?”
“…….”
대답하지 못하는 마리에게 스토른 백작이 답을 말하였다.
“당신을 바라는 왕국민들의 마음을 저버리지 못해서이겠지요?”
“……왜 그런 걸 물어보시는 거죠?”
스토른 백작이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낮게 시작한 웃음은 점차 커지더니, 곧 소름 끼치는 광소가 되었다. 마리는 불길한 눈빛으로 웃음을 터뜨리는 스토른 백작을 바라보았다.
“역시 당신답습니다. 대단해요. 어쨌든 이제 제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을 말하지요.”
스토른 백작은 나직이 말을 이었다.
“클로얀 왕국을 버리십시오.”
“……!”
마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클로얀 왕국을 버리고 우리 서제국으로 항복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에게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 않겠습니다.”
마리의 손끝이 떨렸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녀가 서제국에 항복하면, 그녀만 바라보던 클로얀 왕국은 그대로 지리멸렬하여 멸망할 것이다.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나았다. 그러면 클로얀 왕국은 그녀의 유지라도 이어갈 것이다. 그때, 스토른 백작이 유혹하듯 속삭였다.
“어차피 클로얀 왕국의 왕이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이 멋대로 당신을 섬겼을 뿐.”
“…….”
“서제국에 항복한다면 아무런 위해를 끼치지 않음은 물론, 평생 안락한 생활을 보장하겠습니다.”
그 달콤한 속삭임을 듣는 순간, 마리는 그의 진심을 깨달았다.
‘그는 내가 백성들을 저버리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야.’
마리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거절하면 어떻게 하실 거죠?”
스토른 백작은 답했다.
“당신이 괴로워지겠지요.”
“……!”
심상치 않은 말이었다. 마리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거절하겠어요.”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저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녀를 제외한 모든 이가 몰락하게 된다. 왕국민도, 그녀가 사랑하는 라엘도. 그러니 차라리 그녀가 고통받는 것이 나았다.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일을 당해도?”
“네, 후회하지 않아요.”
스토른 백작은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정말 마음에 안 드는군요. 거슬립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가 생각지도 못 한 일을 하였다. 마리의 턱을 들더니 입을 맞춰 버린 것이다.
“읍……!”
마리는 저항하려 고개를 저었으나, 그는 단단하게 붙든 손을 놔주지 않았다.
그때, 그녀와 스토른 백작의 눈이 마주쳤다.
“……!”
스토른 백작의 눈에는 일말의 욕정도 들어 있지 않았다. 무생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감정 없는 눈길. 마리는 입안에 들어온 뱀 같은 혀의 느낌보다 그의 눈빛이 더욱 소름 끼치고 두려웠다. 마리는 주먹을 움켜쥐고 그의 혀를 확 깨물어버렸다.
“……!”
스토른 백작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의 입에서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마리는 혐오와 두려움이 섞인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더 어떤 행동을 할까,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다행히 스토른 백작은 더 그녀를 모욕하려 들지 않았다.
“큭큭. 어쨌든 좋습니다. 왕국민을 위해 희생하고자 하는 당신의 숭고한 뜻 존중해 드리지요.”
“……만약 절 모욕할 생각이면 차라리 깨끗하게 죽이세요.”
“그럴 수는 없지요.”
스토른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요하네프 3세 폐하는 당신을 극진히 모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의 실례는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다만 전 앞으로 당신의 눈앞에서 당신의 소중한 것들을 모두 무너뜨릴 것입니다. 클로얀의 백성들, 왕국, 그리고 더 나아가 동제국의 황제까지. 당신의 눈앞에서 하나하나 짓밟을 것입니다.”
“…….”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스토른 백작의 아름다운 눈동자에서 일렁이는 악의에 몸이 저릿저릿 떨렸다.
“그래서 당신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괴로움에 못 이겨 그 잘난 숭고한 마음을 포기하고, 제 앞에 무릎 꿇고 추하게 구걸하는 모습을 보고 싶군요.”
그는 창백하게 굳어 있는 마리를 보며 짙은 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 *
그때 그 시간, 동제국의 동부 지방. 라엘이 이끄는 동제국군은 동방 교국의 대군에 맞서 팽팽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크라임 자작이 보운 평야의 회전에서 승리했다고 합니다.”
“다행이군.”
라엘은 군영에서 보고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방 교국군은 동제국에 비해 2배가 넘는 대군이었으나, 라엘의 탁월한 지휘 덕에 전황은 나쁘지 않았다.
“앞으로 침공해 올 서제국군이 문제군.”
“네, 그렇습니다.”
오른이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동방 교국도 버거운 상대이지만 더 큰 문제는 서제국군이었다. 동쪽에서 동방 교국과 싸우고 있는 사이 서쪽에서 서제국군이 몰려오면 아무리 천재적인 군략가인 라엘이라도 방법이 없었다.
“사실 그것 때문에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모리나 여왕이 크로네 산맥에서 서제국군에 맞서 방어선을 펼쳤다 합니다.”
아직 소식이 전해지지 않아 마리가 스토른 백작에게 향한 것까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오른의 말을 들은 라엘의 몸이 흠칫 멈추어 섰다.
“모리나 여왕이?”
모리나. 그 이름을 들은 순간 라엘의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아프고 떨렸으며 가슴이 텅 비듯 그리웠다.
“클로얀 왕국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서제국과 싸움을 피하는 것이 이득일 텐데?”
“서제국의 스토른 백작이 굉장히 무리한 요구를 해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합니다.”
라엘은 그 말에 대충의 상황을 짐작했다.
“그렇군. 요하네프 3세가 지병으로 쓰러지니 이런 변수가 생겼군.”
“네, 요하네프 3세였으면 결단코 클로얀 왕국과 싸움을 벌이지 않았겠지요.”
라엘은 잠시 철가면 아래로 침묵에 잠겼다. 오른은 그가 향후 정세를 고민하는 거로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클로얀 왕국이 서제국과 맞서게 된 일이 어떤 변수로 작용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험한 크로네 산맥을 의지한다고는 하지만, 강맹한 서제국군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오른은 마리를 걱정하는 라엘의 마음을 알고 있어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라엘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만 물러가 보도록.”
오른이 물러나자, 라엘은 철가면을 벗으며 괴로운 얼굴을 하였다.
‘마리.’
오른의 생각처럼 소식을 들은 라엘의 마음속에 가득 찬 생각은 앞으로의 정세가 아니라, 그녀를 향한 걱정이었다.
‘서제국과 맞서다 패하면 모리나…… 아니, 마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 당장에라도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녀를 지키러 가고 싶었다. 그녀가 너무나 걱정되었다. 그녀가 잘못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미칠 듯했다.
“하아.”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막사 안으로 거친 바람이 들어오더니 촛대가 화악 하고 넘어지며 꺼져 버렸다.
“……!”
라엘은 하필 그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에 얼굴을 굳혔다. 라엘은 고개를 젓고는 그녀가 있을 서쪽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떨리듯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 제발 부탁이다. 아무 데도 다치지 말고 무사해야 한다. 제발…… 제발…….”
* * *
그때, 서제국과 일전이 벌어질 크로네 산맥의 제1관문. 방어선을 펼친 클로얀 왕국군에는 결연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모리나를 대신해 군권을 맡은 바르한 백작이 성벽에 올라 입을 열었다.
“모두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
“여왕 전하께서는 왕국민들을 위해 스스로 서제국군의 포로가 되셨다.”
왕국군들의 얼굴이 침통해졌다. 모리나는 단순히 왕가의 후예라 왕이 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모든 일에 자신을 돌보지 않고 희생하고 앞장섰다. 그런 그녀의 헌신이 모두의 마음을 울렸기에, 왕국민들은 그녀를 진정으로 자신의 왕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모리나는 그들의 왕일 뿐 아니라, 의지할 수 있는 정신적 기둥이며 마음속 가족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또다시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희생하여 서제국에 몸을 투신했는데 어찌 침통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때, 바르한이 말했다.
“너희도 알겠지만, 전하께서는 항상 우리를 위해 희생해 오셨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전하를 위해 나설 차례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왕국군들이 눈시울이 붉어진 채 물었다.
“간단하다.”
바르한이 결연한 얼굴로 외쳤다.
“왕국을 침공한 서제국군에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마라. 목숨을 바쳐 클로얀 왕국을 수호해 내라. 이게 바로 전하가 우리에게 내린 명령이다.”
그 말에 왕국군들은 다시 가슴이 울컥했다. 적군에 투신하면서도 그녀는 마지막까지 왕국을 걱정하였던 것이다. 왕국군들은 이를 악물었다.
“전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죽음에 이를지라도,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그러며 그들은 한마음으로 외쳤다.
“모리나 여왕을 위하여!”
“전하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왕국군은 결전의 각오를 다졌다. 바로 자신들을 위해 항상 희생해 온 그녀를 위하여.
한편, 그런 왕국군을 보며 바르한은 남몰래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다 잘되어야 할 텐데.’
사실 아무리 왕국군이 전의를 다져도 서제국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병력 숫자만 10배, 실질적인 전력 차는 20배가 넘으니까. 유일한 희망은 바로 마리가 짜낸 계책이었다. 지금 그녀는 그 계책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로 서제국군에 포로로 가 있었다.
‘성공만 한다면 서제국군에 승리할 수 있어. 이 전쟁은 우리 왕국의 승리야.’
하지만 너무 위험하고 도박과도 같은 일이란 것이 문제였다. 수많은 변수 중 하나만 잘못되더라도 그저 마리만 헛되이 목숨을 잃고 끝날 것이다.
‘안 돼. 그렇게는.’
바르한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순간 그녀는 왕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 희생이 헛되이 끝나지 않기 위해 그도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바르한은 딱딱한 눈으로 크로네 산맥으로 진군해 오는 서제국군의 20만 대군을 바라보았다. 피어오르는 먼지 구름만으로도 기가 질릴 정도의 대군이었지만, 바르한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을 각오로 외쳤다.
“서제국군이다! 모두 전투 준비! 여왕 전하를 위하여 한 걸음도 물러나지 마라!”
그렇게 왕국의 운명을 가를 결전이 시작되었다.
* * *
크로네 산맥에 도착한 서제국군은 곧바로 왕국군을 향해 총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왕국군도 만만치 않았다. 험준한 산맥과 관문에 의지하여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덕분에 쉽게 끝날 거란 예상과 다르게 서제국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쉽지 않군요.”
부사령관 헬리안 백작이 말했다.
“저런 필사적인 기세라니.”
헬리안 백작은 혀를 차며 관문을 바라보았다. 왕국군은 장비도 훈련도 엉망이었지만, 전멸당하기 전에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로 맞서고 있었다.
“흐음.”
스토른 백작이 말했다.
“모리나 여왕을 포로로 잡은 것이 오히려 저들을 자극했나 보군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헬리안 백작은 곤란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스토른 백작은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로 답했다.
“저런 기세는 계기만 생기면 사그라지게 마련이죠. 활활 타오르는 불도 물을 부으면 꺼지는 것처럼.”
“그러면 어떤 계기를?”
스토른 백작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모리나 여왕으로 피어오른 기세이니, 모리나 여왕으로 꺼뜨리는 것이 맞겠지요.”
“……!”
헬리안 백작이 눈동자가 커졌다. 스토른 백작의 말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서, 설마…… 지난번 말씀한 방법을?”
“네,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일국의 군주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스토른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백작,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이건 전쟁입니다. 예의보다는 승리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헬리안 백작은 머뭇거렸다. 그가 머뭇거리는 이유는 스토른 백작이 말과 다르게 단순히 승리를 위해 그 방법을 사용하려는 것 같지 않아서였다. 모리나 여왕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스토른 백작의 눈에서 위험한 광기가 번뜩였다.
“빨리 시행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헬리안 백작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자, 스토른 백작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시작이군. 기대돼.”
* * *
다음 날 관문에서 농성 중인 왕국군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게 뭐지?”
“그러게?”
서제국군이 천에 덮인 커다란 무언가를 앞쪽으로 밀고 왔던 것이다. 곧 서제국군이 멈추어서 천을 벗겨 내었다. 그리고 천에 가려졌던 ‘무언가’를 본 순간 왕국군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저, 전하!”
“이럴 수가!”
커다란 쇠창살이었다. 그 안에 창백하게 질린 마리가 손이 묶인 채 갇혀 있었다.
“이, 이놈들!”
“감히 전하를!”
왕국군이 분노해 외쳤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기본적인 예의가 있는 법인데, 그들의 왕을 저런 꼴로 묶어 쇠창살에 가둬 놓다니!
그때, 스토른 백작이 쇠창살에 다가가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왕국군에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너희의 왕은 우리 손에 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알겠지?”
그는 쇠창살 안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마리는 혐오스럽다는 듯 그 손길을 피했으나, 자신들의 왕을 희롱하는 모습에 왕국군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놈! 감히 전하께!”
하지만 스토른 백작은 그 분노를 비웃듯 말했다.
“어쨌든 현명히 생각하도록. 너희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왕의 목숨은 우리 손에 달려 있으니.”
그 뒤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왕국군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으나, 기세는 되레 꺾였다. 그들이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는 모리나가 위해를 입을까 자꾸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전력에서 열세였던 왕국군은 형편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왕국군이 무너지는 것을 본 마리는 쇠창살 안에서 외쳤다.
“저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고 싸우세요! 제발!”
그러나 그렇게 외칠수록 왕국군은 그녀에게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모두 스토른 백작이 의도한 대로였다. 결국, 왕국군은 대패하여 1관문에서 퇴각하여 2관문으로 물러났다. 물러나는 왕국군의 모습에 스토른 백작이 아름다운 얼굴로 웃음을 지으며 마리에게 다가왔다.
“애절한 모습이군요. 왕을 위하는 백성들과 백성들을 위하는 왕이라니. 이야기책에나 나올 법한 모습입니다.”
마리는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악마. 당신은 정말 악마예요.”
스토른 백작은 피식 웃었다.
“그런가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전 당신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반드시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거예요.”
그 말에 스토른 백작은 마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전하께서 그렇게 이야기하니 조금은 무섭군요.”
“…….”
“하지만 그 전에 당신의 처지를 다시 한번 상기시킬 필요가 있겠군요. 오늘 밤, 즐거운 구경을 시켜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마리의 안색이 굳었다. 그가 말하는 즐거운 구경이 정말로 즐거운 일일 리가 없었다.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죠?”
“글쎄요. 하여튼 기대하십시오.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스토른 백작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 *
그날 밤, 그녀는 스토른 백작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죠?”
마리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떨리는 것은 비단 목소리뿐이 아니었다. 그녀의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만큼 눈앞에서 벌어질 일이 충격적이었다.
“아아, 보시는 대로입니다. 우리가 포로를 살필 여유가 되지 않아서요. 그렇다고 돌려보내 줄 수도 없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모두 처형하게 되었습니다.”
스토른 백작이 그녀에게 보여 주려 한 것은 오늘 전투에서 사로잡힌 왕국군의 포로를 처형하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머, 멈춰요. 그, 그럴 수는 없어요!”
마리의 동공이 진동했다. 포로로 잡힌 병사는 대략 300명이었다. 그들 모두를 이 자리에서 죽이겠다고?
“죄송하지만 제가 아무리 전하를 은애한다고 해도, 그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동제국까지 진군해야 하는데 포로를 남겨 둘 수는 없는 일이지요.”
마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애원했다.
“제발 부탁해요. 이미 저항할 수 없는 이들이에요. 이렇게 빌 테니 저들의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제발. 제발…….”
스토른 백작은 재밌다는 표정을 지을 뿐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았다. 마리는 그가 자신에게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제발……. 제발 부탁해요. 무엇이든 따르겠어요.”
“무엇이든 말입니까?”
스토른 백작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면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제게 굴복하십시오. 그러면 저들을 살려 주겠습니다.”
“……!”
마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오로지 그녀를 모욕하기 위한 제안이었다.
“그, 그런…….”
그 순간이었다. 포로로 잡혀 있던 병사들이 외쳤다.
“차라리 우리를 죽여라, 이 나쁜 자식아!”
“절대 따르지 마십시오, 전하!”
그 외침에 스토른 백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는군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만.”
마리는 주먹을 움켜쥐고 창백한 얼굴로 포로들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결심을 굳힌 그녀가 말했다.
“당신의 말에 따르겠어요.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흐음?”
“왕인 제가 무릎을 꿇는 것은 클로얀 왕가가 굴복했다는 의미나 마찬가지. 그러니 당신에게 무릎을 꿇기 전에 성지에 가서 죄를 고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녀의 말에 스토른 백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성지라면 왕국의 건국이 시작된 장소로, 왕가에 굉장히 뜻깊은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제가 굳이 그 부탁을 들어드려야 할 이유를 모르겠군요.”
스토른 백작은 어깨를 으쓱했다. 마리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대대로 클로얀의 왕들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성지를 방문하곤 해왔어요. 만약 마지막으로 성지를 방문하게 해달라는 부탁마저 들어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저는 이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겠어요.”
강한 그녀의 음성에 스토른 백작은 생각을 바꾸었다. 어차피 성지는 이곳 전선에서 이틀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그리고 왕국의 건국이 시작된 성지에서 그녀가 굴복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굉장히 즐거운 일이리라.
“나쁘지 않군요. 성지에서 당신이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본다면 왕국민들도 저항 의지를 잃을 테니 말입니다.”
스토른 백작은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녀를 굴복시킨다는 비틀린 욕망에 사로잡힌 탓일까. 그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번뜩이던 빛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눈빛은 자신의 목숨을 건 결연한 각오였다.
* * *
클로얀의 성지는 크로네 산맥의 서북쪽에 위치한 낭떠러지였다. 낭떠러지 아래에는 케일강의 급류가 흐르고 있었다. 건국왕인 쉘만은 당시 동제국군의 추격을 받다가 낭떠러지에서 케일강의 급류에 몸을 던져 살아남았다. 그 뒤 쉘만은 클로얀을 건국하였고, 왕가의 후손들은 건국의 시발점이 되었던 이곳을 성지로 정하였다.
“전하! 크흐흑!”
“안 됩니다!”
성지 근처에는 클로얀 왕국민들이 모여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미리 스토른 백작이 왕국민들을 모이게 한 것이다. 그녀가 무릎 꿇는 것을 모두가 목격하게 할 목적이었다.
“선조들과 좋은 대화를 나누도록 하시지요.”
스토른 백작은 비웃듯 말했다. 마리는 힐끗 그를 보고는 낭떠러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낭떠러지의 끝에서 급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이 건국왕 쉘만이 몸을 던졌던 곳.’
그녀는 다른 왕족들과 다르게 성지에 처음 와 본다. 낭떠러지는 생각보다 얕았다. 물론 생각보다 얕다는 것이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높이였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했을까?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운데. 그만큼 절박했던 걸까?’
마리는 씁쓸히 생각했다. 그녀는 건국왕에 대해 아무런 경외심이 없었다. 애초에 왕가의 후예라는 자각도 별로 없었으니까. 하지만 저 낭떠러지를 보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이런 곳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했을까? 그때, 그녀가 말없이 낭떠러지를 바라보고 있자 스토른 백작이 비웃음을 지었다.
“성지를 보며 기도라도 하는 것입니까? 아무리 기도해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리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기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죄송해서 그래요.”
“무엇이?”
“제가 못나서 왕국에 이런 치욕을 주게 되었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왕국민들은 더욱 소리 높여 울었다. 마리는 그들을 잠시 슬프게 바라보다가 스토른 백작에게 말했다.
“왕국의 선조들에게 사죄의 의미로 춤을 한 곡 올려도 될까요?”
“그러도록 하십시오.”
마리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절박한 마음과 다르게 하늘은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저 하늘 너머 어딘가에 있을 라엘을 떠올렸다.
‘폐하,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마리는 천천히 손을 들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얼마 전 꾸었던 꿈속에서의 춤이었다.
그녀가 춤을 추기 시작하자 장내의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아름다웠다. 하늘하늘하게 움직이는 손짓과 몸동작이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녀가 추는 춤의 진가는 단순한 아름다움에 있지 않았다. 바로 처연함. 클로얀의 왕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과 괴로움이 손끝 하나하나에서 흘러나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슬픔이 가슴을 저미는 듯 느껴졌다. 왕국민들은 여왕의 처연한 춤을 보며 눈물을 흘렸고, 서제국의 병사들도 가슴을 찌르는 아픔을 느꼈다.
그 자리의 단 한 명, 스토른 백작만이 다른 감정을 느꼈다. 그가 그녀의 춤을 보며 느낀 것은 비틀리다 못해 짓이겨진 추악한 욕망이었다.
‘가지고 싶군.’
스토른 백작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가 슬퍼하는 모습이 그의 가슴을 자극했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
‘모자라. 더욱더.’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아직은 모자랐다. 그녀가 더욱더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 순간, 마리의 눈동자가 스토른 백작과 마주쳤다.
“……!”
희미하지만 슬픔에 가득한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는 그를 향한 원망이 비치고 있었다. 스토른 백작은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 어떤 유혹보다도 그녀의 눈빛이 그를 자극했다. 저 원망 어린 눈빛을 짓밟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 큰 절망을 주고 싶었다. 그는 홀린 듯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 자리의 모두가 그녀의 춤에 홀려 있었기에 그를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
한 걸음, 두 걸음. 그와 마리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춤을 추는 그녀의 눈빛에 얼핏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 두려움을 본 스토른 백작의 가슴은 더욱더 욕망에 번뜩였다.
“아름다우시군요. 저도 함께해도 되겠습니까?”
스토른 백작의 손에 그녀의 작은 손이 맞닿았다. 그는 그녀의 손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그의 품에 그녀의 몸이 안겨 들어갔고, 스토른 백작은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자리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어……?”
파앗!
스토른 백작의 목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아니, 각하?!”
서제국의 병사들이 깜짝 놀라 외쳤다. 스토른 백작은 비틀하더니 무릎을 꿇었다. 그는 피가 쏟아져 나오는 목을 어루만지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이건……?”
그의 눈에 마리의 손에 들린 작은 유리 조각이 보였다. 그녀는 소매 안에 저 조각을 숨겨 놓았다가 그가 방심한 틈을 타 목을 베어버린 것이다. 스토른 백작은 모든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음을 깨달았다. 마리는 무릎 꿇은 스토른 백작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고작 스토른 백작을 죽인다고 해서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계획은 인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저와 함께하고 싶다고 하셨죠?”
마리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차갑게 그지없었다. 스토른 백작은 그녀가 만나 본 이 중 가장 최악의 악인이었다.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 부탁 들어드리지요.”
그녀는 무릎 꿇은 그의 손을 붙들었다. 목이 베여 전신의 힘이 빠진 탓에 스토른 백작의 몸은 맥없이 그녀에게 딸려 갔다.
“각하!”
“거기 놔라!”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서제국의 병사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마리는 그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나 클로얀의 왕 모리나가 말한다. 간악한 스토른 백작은 위대한 클로얀 왕국을 능멸하였기에 본왕이 징벌을 내리겠다. 그의 영혼은 구원받지 못한 채 연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으리라.”
그러고 그녀는 이번엔 클로얀의 백성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부족하였기에 왕국이 이런 상황을 맞이하였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전하! 전하!”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할지 직감한 왕국민들이 미친 듯 그녀를 불렀다. 마리는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제가 오늘 떠나게 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클로얀의 기치는 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에게 있는 것이니까요. 당신들이 굴복하지 않는 한, 저는 죽어도 영원히 당신들과 함께할 것입니다.”
“전하! 안 됩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등을 돌려 낭떠러지를 바라보았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 거센 급류가 흐르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했다.
‘내가 뛸 수 있을까?’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전신이 두려움에 떨렸다. 하지만 마리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두려워도 뛰어내려야 했다. 그녀가 여기서 ‘죽어야’ 모든 계획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다.
‘폐하, 사랑해요.’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마지막으로 그를 생각했다. 이 순간 그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미치도록. 그렇게 결심을 한 그녀는 낭떠러지에 발을 내밀었다. 스토른 백작과 함께.
“안 됩니다, 전하!”
“멈춰라!”
왕국민들과 서제국의 병사들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파앗!
마리는 스토른 백작과 함께 절벽에서 뛰어내렸고, 곧 급류가 그들을 집어삼켰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그 자리의 모두가 까마득한 눈빛으로 낭떠러지를 내려다보았다. 모리나 여왕과 스토른 백작이 동시에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케일강의 급류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시퍼런 물길만 도도히 흐를 뿐이었다.
* * *
이 참변은 순식간에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모리나 여왕과 스토른 백작이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그 소식을 들은 모두가 공황에 빠졌다. 일단 난데없이 총사령관을 잃은 서제국은 대혼란에 빠졌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헬리안 백작은 황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스토른 백작은 단순한 지휘관이 아니었다. 요하네프 3세가 중병에 빠져 의식을 차리고 있지 못한 지금, 서제국을 대신해 다스려야 하는 황제 대리였다. 현재 벌어지는 모든 일의 주동자이기도 했고. 그런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서제국의 침공 동력을 크게 악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갑작스레 서제국군을 총지휘하게 된 헬리안 백작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괴로움은 모리나 여왕을 잃은 클로얀 왕국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왕국민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하께서? 그럴 리가 없어.”
“헛소리하지 마! 전하께서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을 리가 없어!”
왕국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모리나는 단순한 왕이 아니라 그들이 가족처럼 소중히 여기는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왕국민들을 위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안 돼. 난 믿을 수 없어.”
“그래,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왕국민들은 시뻘건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악을 썼다. 도저히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모두들 알고 있었다. 헛소문이 아니란 것을. 그녀의 죽음을 목격한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슬픔은 곧 분노로 변하기 시작했다.
“전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서제국을 용서하지 말자!”
“내가 죽더라도 반드시 서제국군을 응징하겠어!”
“모두 일어서 서제국군에 맞서자!”
왕을 잃었지만 클로얀 왕국민들의 저항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을 위해 희생한 그녀를 위해 더욱더 전의를 불태웠다. 미리 마리에게 명을 받았던 바르한 백작이 그런 왕국민들을 통솔했다.
“한 치도 물러서지 마라! 전하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마라!”
바르한 백작이 이를 악물며 외쳤고, 왕국군은 모리나 여왕을 떠올리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움에 임했다. 그렇게 총사령관을 잃은 서제국군은 혼란에 빠져 주춤했고, 클로얀 왕국은 전의를 불태우며 서제국군에 맞서 전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전하.’
바르한 백작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모두 전하의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서제국군에 승리할지도 모릅니다.’
마리가 스토른 백작에게 걸어 들어가기 전 짠 책략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바르한 백작이 서제국군의 발목을 잡아 두고 있는 사이, 키에르한 후작이 그녀의 계획의 방점을 찍을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 최후의 작전이 성공한다면 서제국과의 전쟁은 왕국의 승리였다.
‘하지만.’
바르한 백작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전하께서는 정말 무사하신 것입니까? 대답해 주십시오, 제발.’
지금 모든 일은 애초에 그녀가 계획한 것이었다. 스토른 백작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능욕할 것을 알고, 성지로 그를 유인해 같이 투신할 계획을 짰던 것이다. 그래서 왕국군은 성지의 급류가 흐르는 곳에 그녀를 구할 인력을 미리 은밀히 파견해 놓은 상태였다.
건국왕 쉘먼이 살아났던 것에서 알 수 있다시피 낭떠러지의 높이가 생각보다 낮고 급류가 조금만 흐르면 유속이 현저히 느려져, 잘만 구조한다면 죽음을 위장한 채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획에 문제가 생겼다. 시간이 흘렀지만 구조대가 그녀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그녀가 떠내려 올 거라 예상했던 지점을 샅샅이 수색했으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전하…….”
바르한은 초조한 표정으로 탄식했다. 만약 이대로 그녀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이미 그녀가 목숨을 잃었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득해졌다.
“안 돼. 절대로.”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얼마나 거세게 움켜쥐었는지 손가락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신이여, 제발 도와주시옵소서. 이렇게 부탁하옵니다. 제발…….”
바르한은 기도하듯 간절한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 * *
모리나 여왕의 사망 소식은 당장 동제국으로도 전파되었다. 워낙 중요한 소식인지라 시간 차를 두지 않고 곧바로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전달받은 동제국의 황제 라엘은…….
쨍그랑!
하얗게 질려 비틀거렸다. 그의 손에서 떨어진 잉크병이 산산이 깨져 흐트러졌다.
“뭐라고?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
소식을 전해 온 오른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라엘의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오른은 그가 이렇게 동요하는 모습을 난생처음 보았다.
“모리나 여왕이 성지에서 투신하여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라엘의 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크게 휘청했다.
“폐하!”
주변의 인물들이 놀라 그를 부축해 침상에 앉혔다. 라엘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게 정말인가? 정말로 그녀가 사망했느냐는 말이야.”
“시신을 확인하지는 못 했습니다. 하지만…….”
오른은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파르르 떨리는 턱을 질끈 깨물었다.
“아니야.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야. 그렇게 죽었을 리가 없다.”
“……폐하.”
“수많은 기적을 일으켜 온 그녀인데, 고작 강에 빠져 죽었다고? 그럴 리가 없어. 오른,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응?”
마지막 말은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오른은 눈을 감았다. 도저히 그를 마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찢어질 듯한 그의 아픔이 느껴졌다.
“네,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섣불리 판단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오른은 그녀의 생존 가능성이 거의 없다 여겼다. 그게 당연한 판단이었다. 아마 라엘도 알 것이다. 그녀가 살아 있을 확률은 굉장히 적다는 것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오른은 그에게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주기 위해 수하들과 함께 물러났다. 홀로 남은 라엘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마리.”
그의 입에서 신음처럼 그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난 너를 믿는다. 네가 이렇게 죽을 리가 없어. 난 믿어.”
라엘은 마치 주문을 외우듯 몇 번이고 그 말을 반복했다. 언제나 기적을 일으켜 온 그녀이니, 이번에도 거짓말처럼 살아날 것이다.
“그러니 슬퍼할 필요 없어. 넌 살아 있을 테니까. 지레 걱정할 필요도 없어.”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뚝.
그의 손바닥을 타고 한 방울 물방울이 떨어졌다. 눈물이었다.
“마리…… 제발…… 제발…….”
라엘의 어깨가 떨렸다. 그는 그녀가 살아 있을 거라 믿는다. 그녀가 죽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함에도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아픔? 이 느낌을 고작 그런 단어로 표현할 수가 있을까? 마치 심장을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 나와 약속하지 않았느냐. 영원히 함께하겠다고.”
라엘은 그녀와 함께했던 사랑의 서약을 떠올렸다. 당시 그와 그녀는 영원을 맹세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녀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떠올라 그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생살이 뜯기듯 너무 아파 오히려 감각이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제발…… 제발…… 마리…… 앞으로 날 얼마든지 아프게 해도 좋으니.”
라엘은 심장을 쥐어짜듯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만 있어다오.”
* * *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황망히 가슴 아파하고 있을 때. 케일강 하류 기슭.
“컥! 쿨럭. 쿨럭! 커억!”
한 여린 체구의 소녀가 흠뻑 젖은 채 괴로운 기침을 토하고 있었다. 마리였다! 모두의 간절한 바람이 통한 것인지 기적적으로 살아 있었던 것이다.
“컥. 쿨럭!”
마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한참이나 기침을 하였다. 폐로 물이 얼마나 들어간 것이지 숨이 차고 기침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도 눈물이 범벅인 상태로 괴로워하면서도 그녀는 감사했다.
‘살았어! 내가 정말로 살았어!’
물론 급류에 휘말려도 살아날 확률이 있기에 계획을 시행한 것이다. 건국왕 쉘먼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케일강의 급류는 성지를 조금만 지나면 완만해지기에 생존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무모한 계획이었다. 살 가능성보다 죽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던 계획. 그럼에도 이렇게 살아난 것이다.
‘여기가 어디지?’
마리는 계속 기침을 해대며 주변을 살폈다. 원래는 떠내려갈 거로 예상되는 지점에 바르한 백작이 구조대를 보내 놓기로 했는데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훨씬 더 떠내려온 것 같았다.
‘이렇게 있을 시간이 없어. 빨리 키엘 님과 합류해야 해. 내 ‘죽음’으로 서제국의 시선이 쏠려 있을 때 마지막 작전을 성공시켜야 해.’
물에 젖어 체온이 떨어져서인지 안색이 창백하고 온몸이 떨렸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어려웠지만, 편안히 있을 여유가 없었다. 마리는 안간힘을 다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대한 빨리 합류 지점으로 가자. 늦으면 안 돼.’
그녀는 힘겹게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지만 쉽지 않았다. 자꾸만 다리에 힘이 풀려 몇 걸음 옮기지도 못 하고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안 돼. 더 힘을 내, 마리.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그렇게 바닥에 무릎 꿇은 채로 이를 악무는 순간, 생각지도 못 한 음성이 들려왔다.
“마리 양?”
놀람과 떨림, 걱정과 안도가 뒤섞인 목소리. 마리는 그 음성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고개를 돌리니 키에르한이 서 있었다.
“키엘 님?”
“마리 양!”
키에르한이 달려오더니 그녀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그러고 물기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마리 양. 당신이 잘못되었을까 봐 제가 얼마나!”
흐느끼는 듯한 그 목소리를 들으며 마리는 눈을 감았다. 그의 단단한 품이 그녀를 얽어매듯 감싸 안았다. 평소 부드러움과 다르게 강하고 억센 포옹이었다.
“다시는…… 절대로 당신이 이런 위험에 처하는 것을 놔두지 않겠습니다.”
마리는 키에르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단정한 평소와 다르게 괴로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키엘 님…….”
마리는 고개를 숙였다. 그가 그동안 얼마나 아파했는지 느껴졌다. 그때, 키에르한이 물기에 젖은 마리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마치 자신의 품 안에 안긴 그녀가 진짜인지 확인하려는 듯 아련하고 간절한 손길이었다.
“약속해 주십시오, 마리 양.”
키에르한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위험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놔주지 않겠습니다.”
그 말에 마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약속할게요.”
* * *
원래 키에르한은 그녀의 작전을 시행하기 위해 예정된 합류 장소에서 마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없어 가슴이 끓어 직접 달려왔다는 것이다.
“그렇군요. 스토른 백작의 시신은 확인되었나요?”
“스토른 백작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강 아래로 가라앉은 것 같습니다.”
키에르한은 더러운 것을 언급하듯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살아 있는 것은 아니겠지?’
마리는 순간 불안감이 들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목에 치명상을 입은 상태로 급류에 빠졌다. 살아 있을 리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시신이 발견되겠지.’
그녀가 스토른 백작에게 걸어 들어가며 노렸던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서제국군의 중추인 그를 제거하는 것. 두 번째는 자신의 죽음을 위장함으로써 모두의 시선을 빼앗는 것이었다. 스토른 백작이 자신에게 집착하며 능욕하려 들 것을 알았기에 시도한 계획이었다.
‘정말 도박이나 다름없었지만, 모두 다 잘되었어. 이제 마지막 작전만 성공하면 서제국에 승리할 수 있어.’
마리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듯 키에르한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이런 작전은 절대로 안 됩니다.”
“네.”
“약속한 것입니다?”
마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워낙 마음고생을 한 탓일까. 키에르한은 몇 번이고 그녀에게 당부했다.
“네, 꼭 명심할게요.”
그렇게 그와 함께 목적지로 향하며 그녀는 씁쓸한 얼굴로 생각했다.
‘폐하도 내 사고 소식을 들으셨겠지. 많이…… 아파하시고 계실까.’
마리는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에 대해 어떤 감정일까? 자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때문에 저릿하고 아픈데, 단 한순간도 그를 잊지 못하고 있는데, 그는 어떨까? 혹시 자신 때문에 아파하고 있지는 않을까?
‘……폐하, 죄송해요. 정말로.’
마리는 아릿한 얼굴로 한숨을 삼켰다.
그때, 키에르한이 그녀에게 물었다.
“바르한 백작에게 전하의 무사 소식을 전하지 않을 생각입니까?”
“네, 적을 속이려면 아군을 속이라는 말처럼 저는 이대로 죽은 걸로 알려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키에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따르겠습니다.”
“합류 지점은 멀었나요?”
합류 지점. 서제국과의 전쟁을 마무리 지을 그녀의 진정한 계획이 시작될 장소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모두 대기하고 있습니다.”
키에르한은 말을 서쪽으로 이끌었다. 서제국과 인접한 국경 지대까지. 그러고 가도를 벗어나 인적 없는 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자 고요한 분지가 나타났는데, 그곳에는 놀라운 모습이 있었다.
“여왕 전하와 각하를 뵙습니다!”
우렁찬 외침! 5천 명에 달하는 키에르한의 정예병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5천 명 전원이 말을 모는 기병대였다.
“준비는?”
“모두 끝난 상태입니다.”
쉴트 기사단의 단장 헤인 자작이 답했다. 키에르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마리와 함께 5,000명의 병사 앞으로 나섰다.
“모두 기다리느라 수고가 많았다. 이제 우리는 서제국과의 전쟁을 마무리할 작전을 수행할 것이다.”
키에르한은 병사들의 눈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마리가 생각해 낸 작전의 개요를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 서제국군은 대혼란에 빠져 있다. 총사령관인 스토른 백작이 사망한 데다, 여기 모리나 여왕 전하의 사망 소식에 왕국군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기 때문이지.”
병사들은 묵묵히 키에르한의 말을 경청했다.
“우리는 그 혼란의 틈을 노린다.”
“서제국군의 뒤를 치는 것입니까?”
한 기사의 물음에 키에르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는 서제국군을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면?”
서제국군의 뒤를 노리지 않는다는 말에 병사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서제국군은 혼란한 상태로 뒤를 치면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서제국군을 상대하지 않고 국경을 우회하여 서제국의 수도로 진격할 것이다.”
“……!”
키에르한의 말에 장내의 모두가 경악에 빠졌다. 서제국의 수도로 곧바로 진격한다고?
“가, 각하…… 그 말씀은?”
쉴트 기사단의 단장 헤인 자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엔 옆에 서 있던 마리가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서제국군의 시선이 제 죽음에 쏠려 있는 사이 우리는 별동대로서 서제국의 수도를 함락시켜 요하네프 3세를 사로잡을 것입니다.”
“……!”
장내의 모두가 전율에 빠졌다. 곧바로 수도를 함락시키겠다니, 어마어마한 계획이었다. 그리고 충분히 실현 가능한 계획이기도 했다. 20만이나 되는 대군이 몰려온 탓에 서제국 내에는 별다른 병력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제국군의 주력이 그녀의 죽음에 시선이 쏠려 있는 지금을 노리면 충분히 서제국의 수도를 함락시켜 요하네프 3세를 사로잡을 수 있었고, 그렇게 되면 이 전쟁은 그들의 승리였다.
그때, 마리가 병사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 자리의 모든 분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이 작전이 성공하면 우리는 서제국이란 강적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제가 먼저 앞에 나설 테니, 여러분께서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짧은 연설 후 병사들은 함성을 질렀다. 고작 5천에 불과한 병력이지만 서제국에 승리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이 그들의 가슴을 진동시켰다. 마리는 미리 준비해 둔 경갑을 걸친 후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키에르한을 향해 말했다.
“진군하겠습니다. 목적지는 서제국의 수도. 요하네프 3세를 사로잡겠습니다.”
그렇게 국경을 우회하여 별동대가 진군을 시작했다. 5천 명 전원이 말을 탄 기병대였기에 진군 속도는 어마어마했다. 전쟁의 흐름에 변곡점의 쐐기를 박을 진군이었다.
* * *
별동대의 주력은 키에르한이 이끄는 쉴트 기사단과 기마병들이었다. 수많은 실전으로 다져진 그들은 동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최정예로서, 다른 병사들을 압도하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기동력 또한 대단해서 순식간에 서제국 내부로 파고들 수 있었다.
‘이제는 시간과의 싸움이야. 서제국이 눈치채지 못할 때 단번에 수도를 함락해야 해.’
마리는 기마병들을 따라가며 이를 악물었다. 기마술이 능숙한 편은 아니었지만 자신 때문에 속도가 처지면 안 되므로 그녀는 필사적으로 말을 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뒤 잠시 말을 쉬게 하고 있을 때, 키에르한이 염려 섞인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진군 속도를 조금 천천히…….”
마리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전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도…….”
“정말로 괜찮아요. 아니, 조금 힘들어도 어떻게든 따라붙을 테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키에르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은 맞았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전하께서는 그냥 남아 계셔도 되셨을 텐데…….”
그는 안타까운 마음에 말했다. 사실 수도를 함락하는 데 꼭 마리가 있을 필요는 없었다. 전투는 키에르한과 병사들이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저도 꼭 동행해야 해요.”
하지만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수도를 함락한다고 끝이 아니에요. 서제국과 진정으로 종전(終戰)하기 위해 제가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키에르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리는 대답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행히 여기까지는 특별한 방해 없이 왔네요.”
그들은 이미 서제국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상태이다. 이제 며칠만 더 말을 달리면 요하네프 3세가 있는 수도였다.
“일부러 가도와 요지를 피해서 진군하고 있으니까요. 큰 무리 없이 수도까지 진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키에르한이 다행이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현재 수도를 지키는 병력은 500명 남짓한 근위병이라 하니 함락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은 없을 듯합니다.”
서제국의 수도를 지키는 병력치고는 굉장히 적었다. 모든 주력이 클로얀 왕국으로 진군한 탓이었다.
‘설마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지.’
키에르한은 감탄하여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서제국의 수도를 직접 공격한다는 상상은 해보지도 못 했을 것이다.
‘큰 변수가 없다면 서제국과의 전쟁은 승리로 끝날 것이 확실해.’
그렇게 생각한 키에르한은 마리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여쭈어볼 것이 있습니다.”
“네?”
“서제국과의 전쟁이 끝나면 폐하와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마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라엘.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아마 폐하는 오래지 않아 동방 교국을 격퇴해 낼 것입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그렇게 생각했다. 라엘은 클로얀 왕국과의 전쟁 때부터 내전까지 불리한 상황에서도 단 한 번의 패배도 허락하지 않은 천재적인 군략가였다. 서제국의 침공이 마리에 의해 막힌 이상, 동방 교국 정도는 무리 없이 격퇴해 낼 것이다. 실제로 현재 전황도 유리하게 이끌고 있다.
“서제국의 항복 선언을 받아 내면 이제는 동제국과의 문제를 풀어내야 합니다.”
마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키에르한의 말이 옳았다. 독립한 클로얀 왕국의 적은 비단 서제국뿐이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 클로얀을 강제 점령했던 동제국도 왕국의 뿌리 깊은 적이라 할 수 있었다.
‘양국이 동맹을 맺을 수 있으면 가장 좋을 텐데.’
마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국혼으로 클로얀과 동제국이 혈맹을 맺는 것. 그것이 그녀와 클로얀 왕국에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면 라엘과도 하나로 맺어질 수 있고, 클로얀 왕국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마리는 씁쓸히 생각했다. 동제국 입장에서 보면 굳이 불확실한 동맹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국혼으로 인한 동맹이라도 먼 훗날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또 동맹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확실히 점령해 복속시키는 게 훨씬 손쉽고 장기적으로 이득이 되는 선택이다. 지금 클로얀 왕국의 국력은 미약하기 그지없어 어린이 팔 비틀 듯 점령할 수 있으니까.
또한 현재 악화할 대로 악화하여 있는 양국의 관계상 쉽사리 동맹을 맺을 수도 없다. 그러니 아무리 그녀와 라엘이 동맹을 원한다고 해도, 제국 귀족들과 제국민들이 쉽게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제국 귀족들은 당연히 클로얀 왕국에 토벌군을 보낼 것을 라엘에게 청할 거다.
‘폐하.’
마리는 굳은 얼굴로 생각했다.
‘동제국과의 문제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거야.’
쉬워 보이지 않는다 해도 마리는 절대로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동제국과의 난제도 해결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서제국에 승리해야 했다. 동제국과의 화평은 그다음에 해결할 문제였다.
“말씀 고마워요. 일단은 서제국에 승리하는 것이 먼저니, 그것만 생각할게요.”
“네.”
“저 때문에 너무 오래 쉬었네요. 바로 다시 출발하죠.”
마리는 결연한 눈빛으로 말에 올라탔다. 이후 마리와 키에르한이 이끄는 별동대는 계속해서 진군해 나아갔고, 며칠 뒤 커다란 성을 마주했다. 서제국의 수도, 엘페론성이었다.
* * *
그런데 엘페론성에 도착한 별동대는 의외의 상황을 마주했다.
“성벽 위에 병사들이?”
그들의 도착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성문을 굳게 닫은 엘페론성의 성벽에는 중갑을 입은 근위병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우리의 진군을 중간에 눈치챈 모양이군요.”
최대한 은밀히 진군했지만, 무려 5,000의 병력이 이동하는 것이다. 중간에 누군가에게 발각된 것이리라.
“뭐, 큰 상관은 없습니다. 어차피 대부분의 병사가 클로얀 왕국에 나가 있는 상태이니까요.”
키에르한의 말처럼 성벽 위에 서 있는 근위병들은 굉장히 적었다. 먼저 키에르한이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가 외쳤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성문을 열어라! 너희도 농성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 일반 백성들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을 테니, 염려하지 말고 성문을 열어라!”
그 말에 성벽 위가 소란에 빠졌다. 곧 지휘관으로 여겨지는 이가 나타났는데, 키에르한과 마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년?’
한 13살쯤 되었을까? 흑발, 흑안의 미소년이었다. 철갑을 입은 소년의 외모를 보고 마리는 그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요하네프 3세의 친동생이자 서제국의 제1황위 계승자인 스테판 대공이구나!’
요하네프 3세가 지병으로 의식을 잃고 스토른 백작마저 사망한 지금, 저 소년이 실질적인 서제국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었다. 소년은 붉은 입술을 깨물더니 외쳤다.
“너, 너희야말로 물러나라! 지금 물러나면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아직 어린 나이인지라, 소년은 수많은 적을 마주하는 것이 긴장되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도 과연 요하네프 3세의 핏줄이랄까. 눈빛만은 흔들림 없이 굳셌다.
“어쩔 수 없을 것 같군요. 공성을 시작하겠습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를 흘리는 전투를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전쟁이었다. 그들도 물러날 수 없었다.
“공격! 성을 함락시켜라!”
키에르한의 외침과 함께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생각지도 못 한 이변이 발생했다.
“우리도 나서자! 요하네프 3세 폐하를 지켜라!”
“적들은 황제 폐하를 노리고 있다! 막아라!”
“황제 폐하 만세!”
요하네프 3세를 외치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사람이 성벽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놀랍게도 무장한 병사가 아닌, 일반 백성들이었다.
“아니?”
그 모습에 키에르한과 마리는 당황했다. 성벽 위에 올라선 백성 중에는 노인이나 아녀자도 많았다. 그들이 자신들의 황제인 요하네프 3세의 이름을 외치며 별동대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러 백성들을 동원한 것인가?’
하지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소년 대공도 백성들의 합류에 당황한 눈치였다. 금방이라도 성을 함락시킬 것 같던 별동대의 기세는 예상외의 저항에 푹 하고 꺾여 버렸다. 마리는 급히 명령했다.
“일단 병사들을 물리세요. 피해가 커지겠어요.”
그렇게 별동대는 공성을 중단하고 뒤로 물러섰다. 마리와 키에르한을 비롯한 수뇌부들은 긴급히 작전 회의를 하였다.
“생각지도 못 한 일이군요. 일반 백성들이 저렇게 나서다니.”
키에르한이 황망히 중얼거렸다. 마리도 전혀 예상 못 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요하네프 3세가 저런 존경을 받고 있었다니.’
그녀는 백성들이 외치던 함성을 떠올렸다.
“황제 폐하를 지켜라!”
그들은 다른 것보다 자신들의 황제인 요하네프 3세를 지키고자 일어난 것이다.
‘적에게는 끔찍한 상대이지만, 백성들에게는 선정을 베푸는 명군이라고 했지.’
마리는 요하네프 3세의 평판을 떠올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방식으로 적에게 경원시되는 요하네프 3세이지만 자국 백성들 사이에서는 큰 존경을 받고 있다고 들었다.
‘내전과 학정으로 고통받던 백성들의 삶을 크게 안정시켰다고 했지. 백성들 사이에선 거의 영웅처럼 추앙받는 명군(名君)이라고.’
그녀가 보아 온 요한의 모습을 떠올리면 도저히 명군이란 단어가 매치가 되지 않았지만, 백성들의 태도를 보면 사실인 것 같았다. 그때, 키에르한이 입을 열었다.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공성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번엔 당황해 물러서긴 했지만, 제대로 된 무장도 없는 일반인들이니 함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함락이야 할 수 있겠지만, 일반 백성들에게 칼을 겨누어야 한다는 것이 꺼려졌다.
‘어린이나 여자도 많았어. 무리해서 성을 공격하면 큰 피가 흐를 거야.’
마지막 순간, 생각지도 못 한 난관이었다. 그녀는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최대한 피를 흘리지 않을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전하?”
키에르한은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고 고민에 빠졌다. 그도 명예로운 기사로서 일반인들에게 칼을 겨누는 것이 마음 편치 않았다. 하지만 고민해 보아도 특별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들이 성문을 스스로 열어주지 않는 한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들은 순간, 마리의 머릿속에 한 가지 방법이 퍼뜩 떠올랐다.
‘있어! 저들이 스스로 성문을 열게 할 방법이!’
“협상을 해봐야겠어요.”
키에르한은 회의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은 추앙하는 요하네프 3세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목숨이라도 바칠 기세입니다.”
그런데 마리가 의외의 말을 하였다.
“아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예요.”
“전하?”
“저들이 지키려는 것은 바로 자신들의 존경하는 황제인 요하네프 3세이니까요. 그러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예요.”
키에르한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은 것이다.
“설마…… 전하께서 직접 이곳까지 온 이유가?”
“네, 맞아요.”
마리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곳에서 하고자 하는 일을 안다면 저들은 반대하지 못할 거예요.”
* * *
바로 협상 자리가 마련되었다. 협상은 여왕인 그녀가 직접 나섰고, 상대측에선 소년 대공 스테판이 나섰다. 이전 동제국에서 봐 온 요하네프 3세의 최측근 로이스도 동행했다. 별동대의 진영과 엘페론성 가운데 마련된 회동 장소에 도착한 스테판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미리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항복 의사가 없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할 거면 당장 물러가도록.”
소년은 적의가 가득한 눈으로 마리를 노려보았다. 물론 너무 어려 무섭기보다는 귀여워 보이는 눈빛이었다. 몸에 두른 철갑도 아버지의 것을 입은 것처럼 커서 어색했다.
“협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협상? 무슨?”
“나 클로얀의 왕, 모리나는 서제국 백성들의 무고한 피를 흘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무의미한 희생을 피하고 싶으니, 성벽을 열어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 말에 소년 대공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의 말을 모욕이라 여긴 것이다. 소년 대공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화를 냈다.
“기적의 성녀라길래. 무슨 이야기를 하나 했더니 역시나 우리를 모욕하러 부른 것이군. 웃기지 마라! 감히 우리 서제국을 어떻게 보고!”
그는 등을 돌려 거칠게 회동 장소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만약 성벽을 열어준다면 당신들의 황제인 요하네프 3세를 제가 치료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