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한편, 그렇게 마리가 3군단에 맞서 목숨을 건 혈전을 벌이고 있을 때, 동제국 남부 지역에선 또 다른 피의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모두 잡아라!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커억!”
수많은 피와 함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서제국과 내통해 반란을 일으켰던 이스트반 백작가의 비명이었다.
“폐, 페하! 폐하……! 모두 오해입니다!”
과거의 영광을 알리듯 고풍스러운 저택 안에서 황태자비 후보였던 레이첼과 똑 닮은 중년 남자가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애원했다.
“오해?”
라엘이 반문했다. 그의 얼굴을 가린 철가면에서 적의 피가 뚝뚝 떨어졌다.
중년 남자, 이스트반 백작이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요하네프 3세의 간악한 꾐에 넘어가! 모두 오해이니……!”
하지만 백작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라엘의 검이 그의 목을 꿰뚫어버린 것이다. 야심만만하게 반란을 일으켰던 이스트반 백작은 그렇게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
라엘은 비굴하게 엎드린 자세 그대로 시체가 된 백작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분노도 경멸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무생물을 바라보듯 무감정했고, 그래서 더욱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폐하.”
오른이 머뭇거리더니 그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알몬드 자작이 전해 왔습니다. 반란에 동조했던 이를 모두 소탕했다고 합니다.”
“그래, 수고했군.”
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갑옷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모두 적들의 피였다.
“…….”
오른은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왜 그러지?”
“아, 아닙니다.”
오른은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평상시의 폐하와 전혀 달라.’
마치 살이 베일 듯한 차가운 분위기. 물론 원래부터 라엘은 차가운 성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예 느낌이 달랐다. 마치 텅 비어버린 무저갱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푸른 눈동자는 아무런 감정을 띠지 않은 것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직무 수행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 문제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라엘은 단숨에 이스트반 백작의 반란을 진압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아무리 반란에 대비해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빠른 시간 안에 반란을 진압하는 것은 불가능했는데.’
하지만 라엘은 해냈다. 이스트반 백작의 허를 찌르는 작전을 계속해서 감행해 단숨에 궤멸시켜 버린 것이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성공이었지만, 오른은 자꾸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라엘이 자신을 돌보지 않고 몰아붙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무리하고 계셔. 지금까지 작전들도 원래의 폐하라면 시행하지 않았을 위험한 것들이야.’
오른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엘이 저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녀 때문이겠지.’
그래, 라엘이 저렇게 변한 건 마리의 소식을 들은 뒤부터였다. 오른은 라엘이 지금 무슨 심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아파하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절망?
누구보다도 서로를 사랑하던 둘은 이제 적대국의 군주가 되었다. 라엘이 얼마나 마리를 사랑해 왔는지 알기에, 오른은 그가 지금 어떤 마음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함부로 꺼낼 수조차 없었다.
그때, 라엘이 물었다.
“동방 교국은?”
“곧 동남부 지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전장은 동부 지역이 되겠군. 총 숫자가 15만이라고?”
오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15만. 듣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리는 숫자였다.
“두 배가 넘는 병력 차군. 우리 동제국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7만이 한계이니까.”
원래 동제국의 병력은 20만이 넘었었다. 하지만 아직 황자들 간의 내전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상황이라 병력의 수가 적었다.
“네, 수도에도 최소 3만 이상의 방어 병력을 두어야 하니까요. 분명 서제국이 진군해 올 것입니다.”
더 끔찍한 사실은 동방 교국의 15만 대군이 끝이 아니란 것이다. 바로 요하네프 3세의 서제국. 그들이 클로얀 왕국을 지나 동제국의 수도로 침공할 것이 분명했다.
‘서제국이 보낼 병력은 최소 10만 이상이야. 이 병력은 사실상 막을 방법이 없어.’
오른은 아찔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동방 교국의 15만 대군까지는 괜찮았다. 라엘의 탁월한 군사적 능력이면 2배의 병력 차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여기에 서제국의 대군이 합세하면 도저히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만약 클로얀 지방이 그렇게만 되지 않았다면, 우리 동제국이 이렇게까지 위기에 처하진 않았을 텐데.’
클로얀 왕국이 동제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남으로써 최악의 상황이 되어버렸다. 오른은 속으로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끝난 이야기다. 안타까워해도 소용없으니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뚜렷한 방법이 없었다.
‘모리나 여왕이 클로얀 지방에서 서제국군을 막아주면 모를까.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
그런 생각을 한 오른은 씁쓸하게 웃었다. 클로얀 왕국이 서제국군을 막다니. 절대로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때, 라엘이 명령했다.
“병력을 정비하도록. 바로 동방 교국을 맞이하러 간다.”
“네, 폐하.”
고개를 숙인 오른은 그에게서 멀어지기 전,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 배신한 3군단이 모리나 여왕과 교전하였다고 합니다.”
“……!”
순간 라엘의 몸이 흠칫 멈추어 섰다.
“……결과는?”
“아직은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3군단과 마리의 전투 결과는 아직 이곳 동제국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라엘은 한참이나 입을 다물다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다. 병력을 정비하도록.”
“……폐하.”
오른은 왠지 그를 혼자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전투를 마쳤더니 피곤하군. 나가 보도록. 금방 따라가겠다.”
“……네, 폐하.”
그렇게 혼자 남게 된 라엘은 이를 깨물었다. 비틀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마리. 넌 지금…… 괜찮은 것이냐.”
폐부에 서린 고통이 흘러나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라엘은 철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드러난 그의 얼굴은…… 기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터지려는 감정을 억누르려는 것처럼. 그녀가 3군단과 교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과연 괜찮은 것인지, 다친 곳은 없는 것인지, 찢어질 듯한 걱정만이 머릿속에 차올랐다.
‘만약 네가 격전 중에 다치기라도 하면? 만약…… 최악의 상황이라도 일어나면?’
현 상황에서 클로얀 왕국에 가장 유리한 길은 최대한 싸움을 피하고 서제국과 동맹을 맺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3군단과 평화 협정을 맺지 않고 교전을 벌인 이유는 아마 자신을 위한 마음이 있을 것이다. 지금 자신이 그녀를 위해 어떻게든 발버둥 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마리, 제발. 제발 무사하거라. 부탁이다. 제발…….’
만약 그녀가 털끝 하나라도 잘못된다면 그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의 시선이 서쪽을 향하였다. 그녀가 있을 클로얀 지방 쪽이었다. 그녀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 * *
한편 그때, 클로얀 왕국은 강적인 3군단을 물리치고 잠깐의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클로얀 왕국 만세!”
“모리나 여왕 만세!”
3군단은 그들과 비교가 안 되는 강병들이었는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다. 더구나 왕국군의 피해자는 없다시피 했다. 기적과도 같은 승리. 모두 그들의 여왕, 모리나 덕분이었다.
“역시 여왕 전하셔.”
“그래, 그분만 있으면 우리 클로얀 왕국은 뭐든지 할 수 있어!”
왕국민들은 흥이 나 외쳤다.
“위대한 분이여!”
“여왕 전하께 영광을!”
“신의 축복이 영원하옵소서!”
이런 외침이 왕국 전체에서 울려 퍼졌다. 왕국군의 사기가 용기백배해짐은 당연한 일. 자발적으로 왕국군에 투신하는 이도 많아졌고, 그간 눈치만 보고 있던 왕국 귀족들도 이제는 완전히 모리나를 인정하고 합류하였다. 그렇게 클로얀 왕국은 모리나 여왕을 중심으로 한층 더 굳건히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클로얀 왕국에 이질적인 존재가 한 무리 있었는데 그건 바로 키에르한 후작과 그가 이끌고 온 쉴트 기사단이었다. 왕국 사람들은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검과 방패가 교차하는 쉴트 기사단의 깃발을 바라보았다.
“저건 동제국의 명성 높은 쉴트 기사단이 아닌가?”
“그렇긴 한데…… 어째서 우리 클로얀 왕국에?”
클로얀 왕국민들도 키에르한 후작의 쉴트 기사단에 대해 알고 있었다. 동제국을 대표하는 최강 기사단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동제국의 기사단이 왜 우리를 도와준 거지?”
“들어 보니 키에르한 후작이 우리 모리나 여왕님께 기사의 충성을 맹세했다더군.”
“정말로?”
사람들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키에르한 후작은 일반 기사가 아니었다. 강대한 세력을 거느린 변경백으로 작위만 후작이지, 실제로는 클로얀 왕국의 왕보다도 더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이끌고 온 병사들만 해도 클로얀 왕국군 전체보다 강한 전력인데, 모리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몰라. 어쨌든 정말이라던데?”
그런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은 일반 왕국민들뿐이 아니었다. 왕국의 귀족들, 특히 왕실 기사단의 인물들은 강한 의문을 품었다. 결국, 모리나 여왕의 가장 가까운 측근인 바르한이 키에르한에게 따져 물었다.
“후작 각하!”
왕성 정원에서 연못을 보고 있던 키에르한이 고개를 돌렸다.
“아, 바르한 백작. 무슨 일입니까?”
바르한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돌리지 않고 이야기하겠습니다. 도대체 왜 우리 클로얀 왕국을 도와주시는 것입니까?”
“그거야 제가 모리나 여왕 전하께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각하는 동제국의 대귀족이 아닙니까?”
키에르한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그분께 충성을 맹세한 것은 클로얀이니 제국이니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전 그녀를 제 목숨보다도 소중히 여기고 있고, 그래서 충성을 맹세했을 뿐입니다.”
“……!”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 바르한은 키에르한의 눈빛을 본 순간, 그가 진심을 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바르한은 딱딱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 말씀은 여왕 전하에게 개인적인 감정이라도 품고 있다는 뜻입니까?”
키에르한은 물끄러미 바르한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
“아까 이야기했듯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간절히 바라고 사랑하고 있습니다.”
바르한은 말문이 막혔다. 설마 이렇게 간단히 인정해 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때, 키에르한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제 주제를 잘 알고 있으니까요.”
“…….”
“감히 제 마음을 받아주길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저 지켜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그래서 곁에 머물며 그분이 힘들 때 조금의 힘이라도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기쁠 것입니다.”
바르한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진심을 느낀 것이다. 안타까울 정도로 간절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키에르한을 순순히 인정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키에르한의 깊은 마음을 느끼니, 더욱 기이한 질투심이 들었다. 충성을 바친 주군을 그에게 뺏기기 싫다는 유치한 마음인 걸까? 바르한 본인도 자신의 유치한 마음이 어이가 없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동제국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우리 클로얀 왕국을 위해 싸우는 것은 동제국을 배신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키에르한은 차분히 설명하였다.
“지금 동제국에 가장 위협이 되는 적은 바로 서제국입니다. 클로얀 왕국을 도와 서제국과 맞서는 것은 동제국을 위하는 길이라 할 수 있죠.”
한 치의 틀림도 없는 말이었다. 재차 말이 막힌 바르한은 키에르한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전 당신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긴 어렵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바르한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기사가 마음을 통하는 방법은 하나. 저와 검을 겨루어주십시오. 저를 검으로 꺾는다면 당신을 진심으로 인정하겠습니다.”
키에르한은 잠시 바르한을 바라보더니 답했다.
“좋습니다. 원래 기사는 검으로 대화하는 법이니까요. 다만.”
스릉.
키에르한은 천천히 검을 꺼내 들고 말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
검을 든 키에르한을 본 바르한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이럴 수가! 빈틈이 전혀 보이지 않아.’
아무리 키에르한이 제국 최강의 기사라 불린다 해도 바르한도 왕국 최고의 기사였다. 따라서 충분히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자신이 얼마나 큰 오판을 했는지 깨달았다. 키에르한은 최소 그보다 한 수, 아니, 두 수는 윗줄의 실력이었다.
차앙!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물러설 수 없기에 바르한은 이를 악물고 검을 꺼내 들었다. 곧 왕성 정원에 숨 막힐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바르한은 매서운 눈빛으로 키에르한을 노려보았고, 반면 키에르한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갑니다. 조심하십시오.”
이윽고 바르한이 각오를 다지고 검을 날리려는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 지금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거죠?!”
“……!”
둘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마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전하. 그게…….”
도둑이 제 발 저린 바르한은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키에르한도 검을 거두며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였다. 다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기사로서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검을 겨루어 보았습니다.”
“친…… 목이요?”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마리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네, 기사들은 원래 술을 마시는 것보다 검을 겨루며 친목을 도모하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백작?”
키에르한이 바르한에게 눈치를 주었다. 바르한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전하. 원래 기사들은 말보다 검으로 이야기하는 존재입니다.”
마리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었지만, 둘 모두 입을 맞추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후작님.”
“네, 전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만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신가요?”
평소 키에르한에게 하던 것과는 다르게 딱딱한 말투였다. 키에르한은 잠시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눈빛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용건이 있음을 깨달았다.
“알겠습니다, 전하.”
마리는 인적 없는 정원의 구석으로 그를 이끌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마리는 용건을 꺼내기 전 고개를 숙여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먼저 클로얀 왕국을 대표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후작님이 아니었다면, 우리 클로얀 왕국은 큰 위기에 빠졌을 것입니다.”
키에르한의 얼굴이 굳었다. 마리의 공손한 말에서 알 수 없는 벽을 느낀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저는 당신께 충성을 바친 기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다른 걸 떠나, 당신은 제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위기를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 말에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이건 아닌 것 같았지만, 그의 태도가 너무나 완강했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녀가 입을 열려는 순간, 키에르한이 선수를 쳤다.
“만약 돌아가라는 말씀을 하려는 거면, 듣지 않겠습니다.”
“……!”
마리는 흠칫 놀랐다. 그녀가 하려는 말을 정확히 눈치챈 것이다.
“전하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려는 것인지는 압니다. 저를 걱정해서 그러는 것이겠지요.”
키에르한이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주시했다.
“하지만 전하, 아니, 마리 양. 제 눈동자를 보십시오.”
“……!”
“피하지 말고, 저를 똑바로 바라봐 주십시오.”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는 그녀를 향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 마음은 오로지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위험에 처해 있는데, 어떻게 제가 놔두고 떠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에서 자신을 향한 마음이 절절히 느껴졌다. 지금껏 홀로 아등바등 필사적으로 버텨 와서일까? 괜히 마음이 울컥했다.
“지난번에 이야기했듯이 키엘 님의 마음…… 받아들일 수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키엘은 단번에 답했다.
“제 마음을 받아주는 것, 감히 바라지도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당신께 조금의 도움이라도 되는 것뿐입니다. 당신이 힘들 때 어깨를 빌려줄 수 있는 것. 그게 제가 가진 유일한 소망입니다.”
왜일까? 그의 말을 듣는데 마리는 눈시울이 붉어져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래도 너무 힘들었던 것 같다. 아프지만 괜찮은 척하느라, 혼자서 클로얀 왕국의 무거운 짐을 감당하느라. 너무 힘들고 외로웠던 것 같다. 이렇게 눈물이 나려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그때, 따뜻한 온기가 그녀의 몸을 덮었다. 키에르한이 그녀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은 것이다.
“……!”
흠칫 놀라는 그녀의 귓가에 그가 말했다.
“힘들면 우셔도 됩니다.”
“……!”
“지금껏 혼자서 고생하셨습니다. 앞으로는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그 따뜻한 말을 듣자, 마치 벽이 무너지듯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키에르한은 그런 그녀를 조심스럽게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따뜻하게, 조금은 강하게. 마치 괜찮다는 듯, 이제는 혼자 괴로워하지 말라는 듯. 그의 단단한 품이 그녀를 감쌌다.
“끄윽, 흑. 죄, 죄송해요.”
마리는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눈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가슴이 복받쳐 올랐다. 그간의 괴로움이 터진 듯 흘러내렸다.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키에르한이 천천히 품 안에 안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마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보고 싶어요, 폐하.’
왜일까? 키에르한의 따뜻함이 그녀를 감쌌지만, 그 따뜻함을 느낄수록 마리는 다른 인물이 떠올랐다.
라엘. 그가 보고 싶었다. 이 순간 그녀를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 바로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순간 그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함께하고 싶었다.
“저…… 꼭 잘할 거예요. 반드시…….”
키에르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잘해 낼 것이라고 말하는 듯이. 간신히 마음을 추린 마리는 이를 악물고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죄송해요. 추한 모습을 보여서.”
힘들어 그저 주저앉아만 있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모두를 위해 움직여야 했다.
“마리 양…….”
키에르한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마리는 일부러 웃음을 지었다.
“저 이제 괜찮아요. 키엘 님 덕분에 다 괜찮아졌어요.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해요.”
억지로 꾸민 티가 역력한 말이라 키에르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녀가 너무나 과중한 짐에 괴로워하는 모습이 안타깝고 속상했다.
“마리 양, 그러지 말고…….”
하지만 운명은 그녀에게 잠시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외침이 들려온 것이다.
“전하! 큰일입니다! 전하!”
마리는 눈을 크게 떴다. 바르한의 목소리였는데 왠지 심상치가 않았다. 곧 바르한이 도착했다. 어찌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안색이 창백했다.
“무슨 일이죠?”
“서제국이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
마리와 키에르한의 얼굴이 굳었다. 드디어 요하네프 3세의 서제국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병력의 규모는 어느 정도죠?”
마리는 각오하며 물었다.
‘최소 10만은 넘을 거야.’
이번 대전은 요하네프 3세가 작심하고 일으킨 것이다. 그러니 최소 10만 이상의 대군일 것이다. 하지만 바르한의 대답은 그녀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20만입니다! 20만의 대군이 국경을 넘어 진군하고 있습니다!”
20만! 그 까마득한 병력의 규모에 마리의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그렇게 클로얀 왕국은 다시금 위기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었다.
* * *
클로얀 왕국의 귀족들은 충격에 말을 잃었다. 3군단에 대승을 거두고 사기충천해 있었지만, 이건 고작 사기로 극복할 수 있는 병력 차가 아니었다.
“아니, 20만이라니…… 어떻게 그런 대군을…….”
“20만이면 서제국의 모든 병력을 끌어모은 것 아니오?”
“20만의 대군을 어떻게 상대한단 말이오? 우리의 병력은 고작해야 2만 남짓인데.”
“병력의 질도 서제국군에 비해 훨씬 떨어지오.”
귀족들은 공황에 빠져 떠들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20만의 대군은 3군단의 3만 병력을 상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으니까.
‘10배…… 아니, 병력의 질을 따지면 실질적으로 20배가 넘는 전력 차야. 이러면 어떤 책략을 써도 소용이 없어.’
마리는 어두운 얼굴로 생각했다. 그녀가 꿈속, ‘봉추 방통’의 책략을 가지고 있어도 이 병력 차는 극복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상대방이 순순히 책략에 당해 줄 리도 없고.’
서제국군을 이끄는 총사령관의 이름을 들은 마리는 다시 절망에 빠졌다. 라키 드 스토른 백작. 그녀를 나락에 빠뜨렸던 스토른 백작이 서제국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것이다.
‘스토른 백작은 서제국 내에서도 귀계로 악명이 높은 책략가야. 3군단처럼 쉽게 내 책략에 빠지지 않을 거야.’
마리는 자신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광기 섞인 미소를 짓던 스토른 백작의 얼굴이 떠올랐다. 위험한 광기와 별개로, 그의 지략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꿈속의 인물 ‘봉추 방통’과 최소 동급. 아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에 어쩌면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어쩌지?’
객관적인 전력은 물론, 지략적인 면에서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안 돼.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해. 안 그러면 클로얀 왕국은 철저히 서제국의 발에 짓밟힐 거야.’
마리는 이전 협상 때 스토른 백작의 태도를 떠올렸다. 스토른 백작은 요하네프 3세와 다르게 클로얀 왕국과 공존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마치 벌레를 짓밟듯, 동제국을 치러 가기 전 짓밟고 지나갈 존재로만 여겼다.
‘클로얀 왕국이 그렇게 멸망하면…… 라엘, 그도 무너지겠지.’
마리는 라엘을 떠올렸다. 이미 그는 동방 교국이라는 강적과 싸우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20만 대군이 반대 측에서 몰아치면 방법이 없었다.
‘안 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법을 찾자. 클로얀 왕국을 위해, 그리고 그를 위해.’
하지만 골똘히 생각해도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협상해 볼까 했지만 그것도 불가능했다.
‘요하네프 3세의 상태가 정상이면 협상의 여지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마리는 살다 살다 요하네프 3세를 아쉬워하게 될 일이 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첩보에 의하면 요하네프 3세는 현재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고 했다.
‘지병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라니.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스토른 백작이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마리는 이전에 동제국에서 요하네프 3세를 만났을 적을 떠올렸다. 카탈락 백작으로 분했던 그는 늘 쾌활한 느낌이었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 아마 그때부터 병이 악화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짐작하고 있는 병이 맞다면 요하네프 3세는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마리에게는 ‘의사’로서의 능력도 있었다. 그 ‘의사’의 시각으로 봤을 때 요하네프 3세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물론 수술을 하면 완치도 가능한 병이지만, 이 시대에 그런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는 한 명도 없겠지.’
요하네프 3세가 받아야 하는 치료는 까마득히 뛰어난 명의의 실력을 가진 마리도 장담할 수 없는 고난도 수술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또 다른 급보가 회의장에 날아들었다.
“전하! 비보입니다! 서부 국경 지대의 위센성, 니빙성, 헤잉성이 서제국군에 함락되었습니다!”
다시 회의실이 충격에 빠졌다. 위 3개의 성은 국경을 담당하는 성들이었다. 사실상 서제국과의 국경 지대가 완전히 점령된 것이다.
“하…… 이럴 수가…….”
“도대체 어떻게…….”
회의장의 사람들은 무겁게 중얼거렸다. 20만의 대군이 공격해 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곧 머지않아 국경 지대뿐만 아니라, 클로얀 왕국 전역이 같은 꼴이 될 것이 분명했다.
“전하, 명령을…….”
사람들이 왕좌에 앉은 마리만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그녀밖에 없었다. 늘 기적을 일으켜 온 모리나 여왕이라면 이번에도 기적을 일으킬지 모른다.
“…….”
마리는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만큼은 그녀도 딱히 떠오르는 묘책이 없었다.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때, 가만히 옆에서 상황을 듣던 키에르한이 나섰다.
“제가 한 말씀 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각하.”
외부인이었지만 그가 이끌고 온 병력은 현재 클로얀 왕국 전력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모두 그의 말을 경청했다.
“정면으로 맞서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수성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수성을 한단 말입니까? 어떤 단단한 성을 의지해도 10배의 병력 차는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바르한이 반문했다. 키에르한은 고개를 젓고는 지도에 한 지점을 가리켰다.
“성을 방어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크로네 산맥. 이곳을 기점으로 방어전을 펼치면 됩니다.”
“……!”
사람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크로네 산맥은 클로얀 왕국 중앙을 위아래로 가로지르는 산맥으로 굉장히 험난했다. 확실히 그 험준한 산맥을 의지하면 서제국군을 상대로도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이 작전에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어 마리가 지적했다.
“분명 크로네 산맥을 의지하면 서제국군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산맥 너머의 서쪽 지방은 어떻게 하죠?”
크로네 산맥은 클로얀 지방의 중앙을 가로지른다. 그곳을 방어선으로 삼으면 서쪽 지방은 버리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키에르한은 냉철한 말투로 말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서쪽 지방을 방어하려다가는 오히려 모든 것을 다 잃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침묵에 빠졌다. 키에르한의 말이 옳았다.
“전하, 후작 각하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서부 지방까지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도 키에르한의 작전이 옳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왜일까? 이 작전대로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서부 지방을 통째로 넘겨줘야 한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고, 무엇보다 스토른 백작의 음흉한 귀계가 불길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스토른 백작이 가만히 있을까? 분명 어떤 계책을 쓰지 않을까?’
그렇게 불길한 마음이 들었으나, 지금으로서는 그녀도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크로네 산맥을 중심으로 방어전을 펼치겠습니다.”
* * *
한편, 그때 서쪽 지방. 어마어마한 숫자의 깃발과 병사들이 군영을 이루고 있었다. 바로 서제국의 20만 대군으로, 그 군영이 내려다보이는 인근 야산에서 여인처럼 아름다운 인물이 옅게 미소 짓고 있었다.
“모리나 여왕이 크로네 산맥에서 방어전을 펼치기로 했다고요?”
“네, 각하.”
강직한 인상의 중년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헬리안 백작으로 원정군의 부사령관직을 맡고 있었다.
“왕국군은 고작 2만 남짓한 숫자이지만, 크로네 산맥이 워낙 험준하다 보니 틀어박혀 방어하면 뚫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습니다.”
헬리안 백작은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스토른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크로네 산맥을 의지하면 아무리 병력이 많아도 뚫기가 어렵겠죠. 하지만 괜찮습니다. 아니, 아주 좋습니다.”
“네?”
부사령관 헬리안 백작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곤란한 상황인데 오히려 좋다니?
“제가 가장 바라던 상황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스토른 백작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체스 좋아하십니까, 백작?”
“……그럭저럭 즐깁니다.”
설명은커녕 난데없는 체스 이야기에 헬리안 백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체스를 이기려면 왕을 잡아야지요. 왕만 잡을 수 있으면 다른 것들은 다 필요가 없습니다.”
“그거야 그런데…… 그건 왜?”
“전 모리나 여왕을 잡을 생각입니다. 그래서 클로얀 왕국을 단숨에 무너뜨릴 것입니다.”
헬리안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그녀를 잡으면 클로얀 왕국은 끝이겠지만,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가능합니다.”
스토른 백작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스스로 나에게 걸어오도록 만들 것이거든요.”
그러며 스토른 백작은 자신의 계책을 말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헬리안 백작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 그런……. 확실히 그 방법을 쓰면 모리나 여왕을 잡을 수 있겠군요.”
하지만 헬리안 백작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전 이 작전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죠?”
“너무나 비인륜적입니다. 따를 수 없습니다.”
그렇다. 스토른 백작이 말한 계책은 너무나 잔혹하고 끔찍했다. 오로지 스토른 백작이기에 떠올릴 수 있는 계책. 정상적인 도덕관념을 가진 헬리안 백작은 그의 계책을 따를 수 없었다. 하지만 스토른 백작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건 전쟁입니다. 너무 무르군요, 백작은.”
“…….”
“어차피 승리가 중요하지, 적국의 백성 따위 얼마나, 어떻게 죽든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스토른 백작의 눈을 본 헬리안 백작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수많은 이의 죽음을 이야기함에도 스토른 백작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개미 떼를 밟을 때 그 안에 개미가 몇 마리인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타인의 죽음에 전혀 감흥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폐하의 전권을 맡은 것은 백작이 아니라 나입니다. 오로지 서제국을 위한 일이니 백작은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헬리안 백작은 주먹을 움켜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사라지자 스토른 백작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기대되는군. 소식을 들은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아까 전 무감정했던 것과 다르게 스토른 백작의 눈동자에는 기이한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건 일그러진 광기였다.
“기대돼, 아주. 앞으로 그녀가 보일 표정이.”
어린이가 잠자리를 죽일 때는 바로 죽이지 않는다. 천천히 다리 하나, 날개 하나씩 뜯으며 괴로움을 준다. 그리고 그 괴로움을 보며 즐긴다. 스토른 백작도 그녀에게 그러한 고통을 줄 생각이었다. 한 걸음씩 괴로움에 빠져드는 그녀의 얼굴을 감상하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를 유린하고 싶었다.
* * *
한편 그때, 마리는 밤새 서제국군에 맞설 고민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잠이 든 그녀는 꿈속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꿈이야!’
능력을 주는 신비한 꿈을 다시 꾸게 된 것이다.
꿈속 배경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동방처럼 보이는 곳이었는데, 마치 구름 같은 짙은 안개 속에서 한 여인이 정자 아래에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고하면서 맑은 느낌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는데,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이 감돌았다.
「…….」
거칠게 흐르는 강물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꿈속 여인의 처연한 눈빛에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여인이 천천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사람의 혼백을 잡아끄는 듯 아름다운 춤이었다. 고혹적이면서도 투명해 너무나 아름다워, 마치 몽환(夢幻) 속을 거니는 듯했다. 특히나 눈길을 끄는 것은 슬픔에 젖은 눈동자. 아름다운 춤사위 속 처연한 눈빛은 보는 이의 영혼을 홀리듯 잡아당겼다.
그때, 저 멀리서 여인의 춤사위를 훔쳐보던 한 남자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얼핏 망설이던 여인은 고아한 손짓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남자가 그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꿈이 끝이 났다.
마리는 멍하니 눈을 떴다.
“이건…… 또 무슨 꿈이야?”
늘 그렇지만, 대전을 앞둔 꿈치고는 굉장히 생뚱맞았다.
“웬 무희의 꿈이지? 춤추는 능력이라도 얻은 건가?”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고 침대에서 내려와 춤을 추어 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마치 전문 무희가 춤을 추듯 아름다운 동작이 나타났다.
“저, 정말 춤의 능력을 얻은 거야? 진짜로?”
마리는 당황해 중얼거렸다.
“전쟁을 앞두고 무슨 춤이야?”
그것도 그냥 춤이 아니었다. 마치 꿈속 여인이 추던 것처럼 나비가 날아다니듯 부드럽고 매혹적인 춤사위였다. 그 어떤 누구라도 홀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마리는 춤으로 어떤 남자라도 유혹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아니, 왜 이런 능력을?’
마리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겠다. 일단 서제국군을 상대할 방법이나…….’
하지만 그녀는 생각을 끝맺지 못했다. 방 밖으로 급박한 노크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전하!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죠?”
“서제국의 스토른 백작한테서 사신이 왔습니다!”
“……!”
* * *
급히 접견실로 가보니 바르한 백작과 키에르한 후작이 미리 나와 있었다.
“사신은?”
“저자입니다.”
마리는 사신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자가 사신이라고?’
사신으로 온 이는 땅딸한 꼽추 남자였다. 보통 사신으로 오는 이는 번듯한 용모의 귀족이란 것을 생각하면 의외의 일이었다.
“크, 클로얀…… 왕국의 모리나 여왕 전하를 뵙습니다.”
사신으로 온 꼽추는 심지어 말도 심하게 더듬었다. 눈동자도 자꾸만 좌우를 힐끗거리는 것이 정서 불안도 앓고 있는 것 같았다. 마리는 스토른 백작이 무언가 의도가 있어 저런 이를 사신으로 보냈다는 짐작이 들었다. 과연 꼽추는 이렇게 말을 꺼냈다.
“스, 스토른 백작님의 전언을 전하러 왔습니다.”
“무엇이죠?”
“백작님께서 여왕님을 위센성에서 열릴 만찬회에 초청한다고 합니다.”
마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전언인가? 위센성은 서제국군이 점령한 성인데, 그런 곳으로 자신을 초청한다니? 들을 가치도 없는 이야기였다. 서제국군이 점령한 위센성에 가면 그녀가 어떤 꼴이 될지는 안 봐도 뻔했다.
“설마 제가 그 이야기를 들을 거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니면 스토른 백작은 우리 왕국을 조롱하려는 목적으로 당신을 보낸 건가요?”
그런데 꼽추가 이해할 수 없는 답을 하였다.
“배, 백작님께서는…… 여왕님이 이 제안을 들을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에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들을 것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전하를 감히 자기들 진영으로 오라고 하다니. 우리를 조롱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니, 저놈을 당장 쫓아내도록 하겠습니다.”
바르한이 화를 내며 말했다. 키에르한도 싸늘하게 사신을 노려보았다.
“머, 먼저 이걸 봐주십시오.”
꼽추는 떠듬떠듬 말하며 커다란 상자를 가리켰다.
“그게 무엇이죠?”
“스토른 백작님이 여왕님께 보낸 선물입니다.”
선물? 모두 수상쩍은 표정을 지었다.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전하.”
바르한이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리고 상자를 연 순간, 바르한은 경악해 비명을 질렀다.
“헉!”
사람의 목이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죽은 이들의 목이 상자에 들어 있었다.
“……!”
그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마리는 심장이 덜컥 멎는 것 같았다. 키에르한이 급히 마리의 눈을 가렸으나, 썩은 냄새가 어전에 확 퍼졌다.
차앙!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지?”
바르한이 분노해 검을 들어 꼽추의 목을 겨누었다.
“저, 전 잘 모릅니다. 그, 그냥…… 선물을 전하라고.”
꼽추는 바보처럼 더듬거리며 말했다.
“스토른 백작님은 저한테 이렇게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여왕님께서 만찬회에 참석해 주지 않으면 클로얀 왕국민들의 목을 매일매일 100개씩 치겠다고.”
“……!”
“왕국민들이 죽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여왕님께서 위센성으로 와 주시는 것 외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마리의 얼굴이 시체처럼 굳었다. 꼽추는 그런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백작님께서는 여왕님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답니다.”
* * *
시체들의 목을 본 마리는 큰 충격에 빠졌다.
‘어떻게 이런 잔악한 방법을!’
자신이 올 때까지 하루에 100명씩 백성들의 목숨을 인질로 하여 자신을 사로잡으려 하다니. 끔찍하기 그지없는 계책이었다. 문제는 그녀로서는 전혀 속수무책이란 것이다.
‘스토른 백작은 약속한 기한이 지나면 분명 왕국민들의 목을 치기 시작할 거야.’
마리는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 악마 같은 남자라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왕국민들의 목을 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위센성으로 갈 수도 없어. 위센성에 발을 들이는 순간 나도, 클로얀 왕국도 끝이야.’
마리는 자신을 바라보던 스토른 백작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의 광기를 생각하면 위센성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녀는 어떤 고초를 당할지 몰랐다.
‘나 혼자서 고초를 당하는 것은 괜찮아. 왕국민들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니까. 하지만 나를 사로잡는 걸로 스토른 백작이 멈추어 설까?’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그녀를 포로로 삼고, 옴짝달싹 못 하는 왕국군을 궤멸하려 들게 분명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왕국 귀족들은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왕국민들을 인질로 전하를 위협하다니!”
“이럴수록 전하께서 중심이 되어 서제국에 맞서야 합니다!”
마리는 가만히 그들의 의견을 들었다. 그들의 말이 옳았다. 이런 악독한 수작에 굴복할 수는 없었으니까. 오히려 이럴수록 굳건히 적에게 맞서야 한다. 하지만 집무실로 돌아와 키에르한과 바르한하고만 남은 마리는 고뇌에 빠졌다.
‘하지만 죄 없이 희생당할 사람들의 목숨은 어떻게 하지?’
귀족들의 의견이 맞다는 것은 알지만, 죄 없이 죽을 이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도저히 그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내가 가면 그들의 목숨이라도…….’
그때, 바르한이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듯 말했다.
“안 됩니다, 전하.”
“…….”
“이번만큼은 절대로 안 됩니다. 가시려면 제 목을 베고 가십시오.”
그 강경한 어조에 마리는 키에르한을 바라보았다. 키에르한도 당연히 마찬가지의 반응이었다.
“안 됩니다.”
칼처럼 단호한 말이었다. 마리는 암담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키에르한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만약 스토른 백작의 악독한 수작을 막을 방법이 있다면 제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루어 내겠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 말에 마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죄 없는 왕국민들이 목숨을 잃는 것을 볼 수 없어요.”
키에르한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리는 굳게 입술을 깨물었다. 스토른 백작의 악독한 수법에 분노해서인지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어떻게든 왕국민들을 구할 방법을 생각해 낼 거예요. 반드시. 그리고 스토른 백작에게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거예요.”
키에르한은 고개를 숙였다.
“당신의 뜻, 제가 돕도록 하겠습니다.”
죄 없는 왕국민들이 죽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다. 어떻게든 그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가능할까?’
강하게 키엘에게 이야기했던 것과 다르게 막막하기만 했다.
‘서제국군을 패퇴시키지 않는 한 스토른 백작의 악독한 계략을 막을 방법이 없어. 하지만 우리의 전력으로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그녀는 이런 방법을 생각해 낸 스토른 백작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극악하지만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 귀계였다.
‘결국…… 내가 스토른 백작에게 가야 하는 걸까.’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누군가 각하를 증오하고, 망가뜨리고 싶어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의 목소리. 그의 손에 떨어진다면 그녀는 어떤 고초를 당할지 모른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두려웠다.
‘그래도 왕국민들을 위해 내가 희생해야 한다면 하겠어. 나 하나의 희생으로 끝난다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어.’
마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문제는 자신이 희생한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니란 것이다. 자신이 포로가 되면 클로얀 왕국도 같이 몰락한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마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무저갱에 떨어진 것 같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그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없어. 왕국민들의 목숨도, 왕국의 운명도. 방법을 생각해 내!’
그녀는 지도를 바라보았다. 클로얀 왕국 전역이 표시된 지도였다. 왕국 서쪽은 20만의 서제국군으로 까마득하게 덮여 있었다. 감히 대항할 엄두도 안 나는 대군이었다.
‘5만, 아니, 10만만 되었어도 어떻게든 승부를 걸어 볼 수 있었을 텐데.’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20만이면 서제국의 모든 역량을 끌어모은 대군이야. 이제 갓 독립한 클로얀 왕국이 상대가 될 리가 없잖아.’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마리의 머릿속에 일련의 사항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있어! 왕국민들을 구할 계책이!’
그녀는 자신이 방금 떠올린 계책을 생각했다. 이 방법이면 왕국민들을 구해 내는 것뿐 아니라, 전쟁 자체를 끝내 버릴 수도 있었다. 바로 클로얀 왕국의 승리로! 서제국에 승리할 수 있는 거다.
‘물론 커다란 운이 따라야겠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야.’
하지만 금세 마리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방금 생각한 방법의 문제점이 떠올랐던 것이다.
‘내가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해. 어쩌면……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높아. 아니, 도박에 가까운 일이야. 일이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대로 풀리지 않으면 난 죽을 거야.’
이 계략은 그녀가 스토른 백작의 포로가 됨으로써 시작한다. 만약 한 치라도 잘못되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지도 몰랐다.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그녀는 굳게 생각했다.
‘그래도 해야 해. 아무리 위험하더라도. 성공하면 왕국은 물론, 라엘 폐하께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어.’
이 방법이 성공하면 서제국의 야욕도 끝이니, 라엘 그도 위기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었다.
‘……폐하.’
마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그를 떠올렸다. 지금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자신 때문에 많이 아파하고 있을까?
‘정말로 죄송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마리는 눈을 감았다. 그를 다시 보고 싶었다.
‘제가 너무나 원망스럽겠지만…… 저에게 한 번만 힘을 주세요, 폐하.’
그렇게 다짐한 그녀는 키에르한과 바르한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두 분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뵙자고 했어요.”
진중한 음색에 둘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키에르한이 먼저 그녀의 뜻을 눈치챘다.
“전하? 설마…… 스토른 백작에게?”
마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짐작하신 대로예요.”
“안 됩니다!”
키에르한은 목소리를 높였다.
“스토른 백작에게 가면 어떤 일을 당할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바르한 백작은 뒤늦게야 마리가 스토른 백작의 요구에 응할 뜻이란 것을 깨닫고 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마리는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이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두 분은 저를 믿나요?”
그 물음에 키에르한과 바르한은 입을 우뚝 다물었다.
“……믿습니다.”
“그렇다면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토른 백작에게 간다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가는 것이에요.”
전쟁을 끝낸다. 그 말에 둘은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씀은?”
“네, 제게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방법이 있어요.”
그녀는 자신이 떠올린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둘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며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 그런…….”
둘은 그녀의 방법이 충분히 승산 있는 이야기란 것을 깨달았다. 이 방법이면 모든 일의 원흉인 스토른 백작을 참하는 것을 뛰어넘어 정말로 전쟁 자체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부술 수도 있는 책략이었다. 하지만 너무 위험했다. 아니, 이건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안 됩니다. 전하께서 너무 위험합니다.”
둘은 한마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 방법 외에는 없어요.”
“전하는 우리 클로얀의 왕입니다. 왕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도록 놔둘 수는 없습니다.”
바르한이 강경하게 말했다.
“왕이니 더더욱 백성들을 위해 나서야 하는 것이에요, 백작.”
바르한은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를 높였다.
“거의 도박에 가까운 방법이지 않습니까? 죽을 가능성이 훨씬 높단 말입니다! 아니, 십중팔구 죽을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키에르한도 말했다.
“전하. 아니, 마리 양. 당신의 소중한 친구로서 부탁합니다. 다시 한번만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그녀를 향한 간절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마리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키엘 님, 바르한 경, 저는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에요.”
“마리 양…….”
“오히려 저는 살기 위해 가는 것이에요.”
마리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대로 가면 클로얀 왕국이 무너지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에요. 제 목숨도 같이 끝이 나겠지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모두를 위해 도박을 해보는 것이 나아요.”
모두를 위해. 클로얀 왕국민들과 나아가 그녀가 사랑하는 라엘을 위해. 이건 지금 이 순간 그들을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발버둥이었다. 마리는 굳은 눈동자로 두 명을 바라보았다.
“전 살기 위해 죽으려고 해요. 두 분은 그런 저를 도와주세요. 두 분의 도움이 없으면 이 작전은 성공할 수가 없어요.”
결국, 키에르한은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절대로 그녀를 위험에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해 주십시오. 그래서 웃는 얼굴로 다시 저를 바라봐 주십시오.”
키에르한은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만약 당신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토른 백작을 죽인 후, 당신을 따라 죽겠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티끌 하나 다치지 말아주십시오.”
마리는 마주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르게 딱딱하기만 한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그녀를 향한 걱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치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담긴 그 걱정에 마리는 가슴이 뭉클 흔들렸다.
“……네, 약속할게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키에르한과 바르한을 설득한 그녀는 작전의 개요를 설명해 주었다.
“이 작전의 핵심은 제가 죽는 것이에요.”
둘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는 정말로 중요하다는 듯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이 작전이 성공하려면 제가 반드시 목숨을 잃어야 해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녀가 죽어야 작전이 성공할 수 있다니? 하지만 마리는 그저 비유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닌 정말로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제 사후(死後). 그 뒤가 중요해요. 바르한 백작은 제 죽음이 퍼진 후 흔들리는 왕국을 수습해 서제국군에 저항해 주세요.”
바르한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이번에 마리는 키에르한을 바라보았다.
“각하께서는 제 죽음에 서제국의 시선이 쏠려 있는 사이, 제가 따로 말한 작전을 수행해 주세요.”
키에르한도 마찬가지로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마리는 말을 이었다.
“제 죽음 이후, 두 분의 역할에 따라 이 작전의 성패가 결정될 것이에요. 즉, 두 분이 잘해 주시면 우리는 서제국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두 명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는 잠시 눈을 감았다. 곧 자신에게 닥칠 운명이 두려운 것일까? 남들에게 보이지 않게 그녀의 눈썹이 희미하게 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모든 것을 각오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저는 두 분을 믿고 스토른 백작에게 죽음을 맞이하러 가겠습니다.”
* * *
작전을 하달한 마리는 소수의 왕실 기사단을 대동한 채 위센성으로 향했다.
‘빠듯이 가야겠구나.’
위센성은 서쪽 국경에 인접한 성이다. 스토른 백작이 제안한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말을 달려야 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는 중이었다.
뚜둑. 뚝.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전하, 비가.”
왕실 기사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마리는 말을 몰고 있어 고스란히 비를 맞아야 했다.
“저는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마리는 괜찮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본 왕실 기사는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저 여린 소녀는 지금 모두를 위해 적진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저 수행하고 있을 뿐인 자신도 이렇게 긴장되고 떨리는데, 본인은 얼마나 두려울까? 하지만 그녀는 굳은 얼굴로 말을 몰 뿐, 겉으로 전혀 자신의 두려움을 티 내지 않았다.
“……전하.”
“전 괜찮아요. 시간이 없으니 더 빨리 말을 몰아야 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왕실 기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몰았다. 부슬비가 추적추적 그들을 적셨다. 마리는 비를 맞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폐하, 보고 싶어요.’
그녀는 라엘을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옆에 있었으면 자신이 이렇게 비에 젖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텐데. 단단한 품으로 안아주었을 텐데.
‘보고 싶어요, 정말로. 정말로…….’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그에게로 도망가고 싶었다. 그냥 그의 품에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를 위해서라도. 마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정신 차려, 마리.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해. 이번 작전에 모든 것이 달려 있어.’
그녀의 목숨뿐이 아니었다. 그녀만 바라보는 왕국민들의 운명과 그녀가 사랑하는 라엘의 운명도 걸려 있었다.
‘꼭 성공해야 해. 그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마리는 그가 있을 동쪽 방향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는 무얼 하고 있을까?
‘폐하, 제발 저에게 힘을 주세요. 제발…….’
그렇게 마음을 굳힌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달렸다. 서제국군에 점령된 왕국 서부 지방을 지나 한참을 간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위센성.’
마리는 딱딱한 표정으로 위센성을 바라보았다. 위센성은 성곽 요새로 서제국의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며칠을 연달아 내린 비와 짙은 먹구름으로 마치 망자의 성처럼 어두운 분위기가 풍겼다.
끼익.
그녀의 도착을 눈치챈 것인지 성문이 거슬리는 소음을 내며 열렸고, 마치 타락한 천사처럼 아름다운 외모의 스토른 백작이 말을 몰고 나왔다.
“이런, 흠뻑 젖으셨군요.”
스토른 백작은 마리의 모습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말을 달리는 내내 비에 맞아 그녀는 생쥐처럼 젖어 있는 상태였다.
“귀한 몸이신데. 빨리 들어가서 몸을 녹여야겠습니다.”
스토른 백작은 그녀에게 다가와 손수건으로 얼굴에 잔뜩 묻은 물기를 닦아주려 하였다. 하지만 마리는 탁 하고 그의 손을 쳐내었다.
“마음에도 없는 걱정 하지 마세요. 왕국민들은 무사한가요?”
날카로운 목소리에 스토른 백작은 미소를 지었다.
“아쉽게도 시간에 맞춰 도착하셔서 모두 무사합니다.”
마리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그는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제가 이렇게 왔으니, 왕국민들을 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지켜 주길 바라요.”
“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스토른 백작은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마리는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 일렁이는 광기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뺨에 가져갔다. 마치 뱀의 피부가 닿는 느낌에 마리가 파르르 떨 때,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제 제 관심사는 당신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