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있는 시녀님-43화 (44/54)

Chapter 3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모리나 여왕 만세!”

“클로얀 왕국 만세!”

왕국민들은 열화와 같은 외침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제국 3군단의 침공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지만, 왕국민들의 표정에 근심은 없었다.

우리에게는 그녀가 있다.

모리나 왕녀, 아니, 이제는 여왕으로 추대된 그녀와 함께라면 어떤 위기도 이겨 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었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모리나의 귀환에 이 순간 왕국민들의 분위기는 축제와도 같았다. 그건 일반 백성들뿐만이 아니었다. 왕국의 귀족들도 들고 일어섰다.

“모리나 왕녀께서 귀환하셨다고?”

“총독인 힐데른 자작이 모리나 왕녀 전하셨다고?”

제국의 눈치를 보며 숨죽이고 있었지만, 왕녀의 귀환을 바라던 것은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부르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모아 모리나의 밑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격동하는 정세 속, 클로얀 왕국은 새로운 국왕 모리나의 밑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모든 왕국민의 터질 듯한 열기 속에서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된 마리는,

“…….”

시커멓게 죽은 눈빛으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왕실 기사단의 단장이자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한 바르한 백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왕녀 전하가 여왕이 되기를 계속 바라 왔지만, 이런 상황이 일어날 줄이야.’

전혀 짐작지도 못 했던 일이었다. 이번 일의 원흉, 스토른 백작은 마리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후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전하…….”

바르한이 불렀으나 마리는 반응이 없었다. 단 한 방울의 핏기도 없는 얼굴로, 죽어버린 시체처럼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케일런 백작과 구렌 자작, 노실트 백작이 도착했습니다.”

바르한이 말한 인물들은 과거 왕실의 대신들이었다.

“북부의 겔린 남작도, 덴시엔 자작도 곧 합류할 것이라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거기까지 이야기한 바르한은 입을 우뚝 다물었다. 시커멓게 죽은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오른 것을 본 것이다.

“전하.”

뚝.

눈물이 한 방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해요. 혼자 있고 싶어요.”

“전하.”

바르한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마리가 괴로운 얼굴로 발작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부탁이에요! 제발! 제발 혼자 있게 해주세요.”

“…….”

“알아요. 지금 이럴 시간이 없다는 것. 그래도 제발 혼자 있게 해주세요. 제발…….”

마리는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애원했다. 바르한은 망설이다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바르한이 나가고, 혼자가 된 마리의 입에서 결국 울음이 터져 나왔다.

왜? 왜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일까? 그녀는 단 한 번도 이런 상황을 바란 적이 없었다. 아니, 이런 상황을 피하려고 끝없이 노력했었다. 하지만 운명의 낫은 그녀를 끔찍한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폐하…… 폐하…….’

어째서일까? 이 순간 마리는 라엘의 얼굴만 떠올랐다.

‘나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어. 절대 내가 원하던 바가 아니야.’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 순간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품에 안겨 그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이 그녀를 한없이 절망하게 하였다.

* * *

찢어지는 마음과 별개로 그날 마리는 꿈을 꾸었다. 그녀에게 능력을 주는 신비한 꿈이었다.

‘보고 싶지 않아.’

마리는 회색빛으로 죽은 눈으로 생각했다. 이런 꿈 따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냥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바람과 다르게 꿈은 그녀에게 선명한 영상을 보여 주었다.

「그래, 배의 흔들림을 막을 방법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승상.」

배경은 동방이었다. 대전에서 날카로운 빛을 지닌 남자가 어딘지 못난 인상의 남자에게 묻고 있었다.

「우리 청주군은 오나라와 다르게 수전(水戰)에 약하지. 배의 흔들림만 막을 수 있다면 크게 승리할 수 있을 터. 방법을 말해보라.」

못난 남자는 싱긋 웃었다.

「연환계(連環計)를 사용하면 됩니다.」

「연환계?」

「배들끼리 쇠사슬을 묶는 것입니다. 그러면 배의 흔들림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승상’이라 불린 사내는 손바닥으로 무릎을 쳤다.

「그렇군! 그 방법이면 흔들림을 막을 수 있겠어. 훌륭하도다. 곧 있을 적벽대전도 우리의 승리가 분명하군.」

승상은 기꺼운 투로 물었다.

「그대의 이름이 무엇이라고 했지?」

그 물음에 ‘와룡, 제갈량’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책략가라 꼽히던 못난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봉추(鳳雛), 방통이라고 하옵니다.」

마리는 가만히 눈을 떴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꿈인 것 같았지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닥칠 현실이 그녀의 가슴을 미칠 듯이 옥죄었다.

‘그냥 도망가 버릴까?’

정말로 도망가고 싶었다. 다 내려놓고.

‘그와 함께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마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은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아파.’

라엘을 떠올리니 다시 가슴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마리는 눈물이 나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방을 나섰다.

“전하?”

밖에서는 바르한이 노심초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나갔다 오겠어요.”

“지금 말입니까?”

바르한의 곤란한 표정에 마리는 자신을 추종하려는 귀족들이 도착했음을 눈치챘다. 하지만 마리는 굳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자신이 여유를 부릴 상황은 아님을 알았다. 하지만 도저히 이 상태로는 있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다녀오겠어요.”

“……호위하겠습니다.”

바르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마리는 바르한과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아니, 혼자 다녀오겠어요.”

“전하?”

“생각을 정리하고 오겠어요.”

“…….”

바르한은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마리는 홀로 왕성 밖으로 나왔다. 특별한 목적지는 없었다. 사실 생각을 정리하러 나온 것도 아니다. 왕성 안에 있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뛰쳐나온 것일 뿐이다.

“……비가 오네.”

마리는 멍하니 손바닥을 펼쳤다. 마침 하늘에서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를 보니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왜 이렇게 젖었느냐? 감기에 걸릴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말하지 않았느냐?”

“비 맞고 다니는 걸 보면 그가 화냈을 텐데.”

마리는 중얼거렸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시선을 어디에 돌려도 그에 대한 생각만 떠올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들만 머릿속을 울렸다.

“고맙다. 이렇게 태어나 주어서. 나와 만나 주어서.”

“잊지 마라. 넌 내 어떤 것보다 소중해. 나 자신보다도. 네가 위험할 바에는 내가 죽는 것이 나아.”

“사랑한다. 내 목숨보다도 널 사랑해.”

거기까지 떠올린 순간, 그녀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참지 못하고 또 울음이 새어 나왔다.

마리는 가슴에 넣어 둔 반지를 꺼내었다. 얼마 전 사랑의 서약 후 그에게서 받은 반지였다. 이 반지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그와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그만 정신 차려, 마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해결해야 해.’

마리는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맥없이 울고 있을 때가 아니란 것을. 원하지 않았던 일이라 해도, 클로얀 왕국민들은 자신의 어깨만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은 그들을 위해 앞장서 나가야 했다. 너무나 무거운 책임이었다.

‘알아. 다 안다고.’

하지만 무너져 버린 마음은 아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데 그냥 아프기만 했다. 그때였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그녀를 붙들었다.

“언니? 왜 울고 있어요?”

“아…….”

어린 꼬마였다. 꼬마는 눈물 흘리는 그녀를 걱정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 그, 그냥.”

마리는 눈가를 닦으며 말을 더듬었다. 꼬마는 고민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언니도 안 좋은 일이 있는 거죠? 그래서 우는 거죠?”

“으, 응. 훌쩍.”

꼬마가 힘내라는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힘내세요. 엄마, 아빠가 그러는데 이제 우리 클로얀 왕국에는 좋은 일만 있을 거래요.”

“…….”

“모리나 왕녀님이 오셨으니까.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더라도 왕녀님이 다 해결해 주실 거예요!”

그 말에 마리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모리나 왕녀가 무슨 기적의 천사 소녀도 아니고. 더구나 그 모리나 왕녀는 지금 여기서 맥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그…….”

“제시예요.”

“그래, 제시. 언니가 하나만 물어봐도 돼?”

마리는 힘없이 입을 열었다. 그냥 너무 답답해 아무에게라도 이야기하고 싶었다.

“만약에, 만약에…… 제시에게 정말로 소중한 친구가 있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사이가 멀어졌어. 그러면 어떻게 할 거니?”

“후움. 그건 싫은데.”

제시는 생각만 해도 싫은지 손가락을 깨물었다.

“그냥 계속 친하게 지내면 안 돼요?”

“어쩔 수가 없으면? 다시는 보지 못할 정도로 사이가 벌어지면 어떻게 할 거니?”

“후움.”

제시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냥 사이 좋아지려고 노력해 볼 것 같아요.”

“그게 절대 안 되면?”

“그래도 노력해 볼 거예요. 세상에 절대는 없댔어요!”

제시는 왜 이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로 소중한 친구라면서요? 안 되더라도 최대한 노력해 봐야죠. 설사 다시 사이가 좋아지지 않더라도, 그래도 노력해 볼 거예요.”

“……!”

제시의 말을 들은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제시는 활짝 웃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눈 후, 제시는 부모에게로 돌아갔다. 혼자 남겨진 마리는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잠겼다. 그냥 이대로 계속 주저앉아 있고 싶었지만 더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제는 마음을 추슬러 앞을 직시해야 했다.

‘이렇게 된 이상, 난 클로얀 왕국을 떠날 수 없어.’

싫더라도 받아들여야만 했다.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니까. 그 책임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요하네프 3세의 서제국에 맞서 클로얀 왕국의 위기를 극복하자. 그러면 그를 도와주는 길이 되지 않을까?’

방금 꼬마 제시가 한 말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노력해 볼 거예요. 설사 다시 사이가 좋아지지 않더라도, 그래도 노력해 볼 거예요.”

그래, 상황이 이렇게 되었더라도 자신은 그를 사랑한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메어 찢어질 것만 같을 정도로. 너무나 사랑한다. 그러니 어떻게든 그와 다시 하나가 되고 싶었다.

‘어떻게든 노력해 보겠어. 설사 안 되더라도 끝까지 노력하겠어.’

그녀는 굳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작금의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

‘서제국의 요하네프 3세가 클로얀 왕국에 이런 혼란을 일으킨 이유는 단 하나야. 바로 클로얀 지방을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만들기 위해. 그래서 클로얀을 발판으로 동제국을 정벌하려는 거야.’

그 순간 마리는 생각했다.

‘요하네프 3세의 야욕에 절대 굽히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클로얀의 위기를 극복해 낼 거야.’

서제국의 야욕에 휩쓸리면 클로얀이 어떤 상황이 될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녀는 클로얀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그게 이 순간, 그녀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와 다시 가까워질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이었으니까. 그렇게 마리는 모리나로서의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 * *

왕성으로 돌아온 마리는 바로 어전으로 향했다. 어전에는 바르한 백작을 비롯한 왕실 기사단의 인원 전원, 그리고 과거 왕국의 주요 대신들이 모여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수많은 기사와 귀족이 무릎을 꿇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마리는 어전 가장 높은 곳, 바로 국왕의 자리로 올라갔다.

“이 자리에 앉기 전, 그대들에게 한 가지만 이야기하겠어요.”

마리는 그들의 눈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전 솔직히 이 자리에 앉는 것을 바란 적이 없어요.”

“……!”

“하지만 환난에 휩싸인 왕국을 안정시키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라 생각하기에, 그대들의 청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국왕이 되는 것보다 클로얀 왕국을 위한 더 좋은 방법을 가지고 있는 분이 있다면 이 순간 바로 말씀해 주세요.”

대답은 곧바로 터져 나왔다.

“전하께서 왕이 되는 것! 그게 바로 클로얀을 위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저희를 이끌어주십시오!”

모두가 그녀가 왕이 되는 것을 강렬히 바랐다. 간절히 왕가의 재건을 바라 오기도 했고, 지금껏 그녀가 총독으로서 클로얀 지방에 한 일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만이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었다.

“전하야말로 왕국의 진정한 주인이십니다!”

“부디 저희의 왕이 되어주십시오!”

모두가 그렇게 한마음으로 그녀를 추대하자 마리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단 어전에 있는 이들뿐이 아니었다. 백성들까지 그녀가 왕이 되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알겠습니다. 왕국민들의 의지를 받아 나 모리나는 클로얀 왕국의 왕위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녀의 선언에 귀족들은 감격 어린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왕국에 진정한 주인이 돌아온 것이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바로 현안을 논의하겠습니다. 당장 이곳으로 진군 중인 3군단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귀족들이 곧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맞서 싸워야 합니다!”

“맞습니다! 지금 커먼성에 모여든 병력이면 일전을 벌여 볼 만합니다!”

다들 사기가 충전해 외쳤다. 하지만 마리는 속으로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성에 모인 병력은 약 1만 명 정도야. 제국군과 싸우면 필패할 것이 분명해.’

현재 커먼성에는 왕국 귀족들이 제국의 눈을 피해 남몰래 모아 온 영지병과 자발적으로 모인 민병을 합쳐 총 1만의 병력이 있었다. 적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제국군에 비해 숫자도 질도 모두 열세였다.

‘싸우면 어마어마한 희생이 생길 거야.’

그녀는 어떻게든 왕국민들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방법이 없을까?’

마리가 고뇌에 잠겨 있을 때였다. 뜻밖의 외침이 대전 밖에서 울렸다.

“전하! 급보입니다! 3군단에서 사신을 보내왔습니다!”

“……!”

제국 3군단에서 사신을? 모두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전령은 더욱더 놀라운 이야기를 하였다.

“사신으로 온 이는 라키 드 스토른 백작이라고 합니다!”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이 자리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라키 드 스토른 백작. 베일에 싸인 서제국의 이인자이자, 인형술사란 별명으로 악명 높은 음모가였다.

‘왜 서제국의 재상이 직접?’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사신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오랜만입니다, 각하. 아니, 이제는 전하라고 불러야 하겠군요.”

그의 얼굴을 본 마리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린 남작!”

여린 체구와 여인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옅은 백금발. 그녀를 나락에 빠뜨렸던 스토른 백작이 부드럽게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 * *

갑작스러운 스토른 백작의 출현에 장내가 침묵에 빠졌다. 마리는 그의 정체를 알고 모든 정황을 깨달았다.

‘애초에 이 모든 게 서제국의 음모였던 거야.’

그녀는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껏 그가 보이던 꺼림칙한 모습들이 떠올랐다. 왜 그때 조금 더 의심하지 않았을까. 뼈저리게 후회가 되었지만 이미 늦은 다음이었다. 그때, 스토른 백작이 부드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얼굴이 많이 상하셨군요. 저도 전하를 많이 걱정했습니다.”

“…….”

마리는 표정을 굳혔다. 자신을 나락에 빠뜨리고 미소 짓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치 악마의 것처럼 소름 끼치는 미소였다. 스토른 백작은 느긋한 얼굴로 대전에 모인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먼저 클로얀 왕국에 진정한 주인이 돌아온 것을 축하합니다. 드디어 숙원이 이루어졌군요. 우리 서제국도 진심으로 기쁩니다.”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하지 마세요. 무슨 일로 오신 거죠?”

“클로얀 왕국에 3군단, 아니, 우리 서제국의 입장을 전달하러 왔습니다.”

스토른 백작은 3군단이 서제국과 결탁했음을 공식적으로 표현했다.

“클로얀 왕국에 전달하고자 하는 전언은 이것입니다.”

스토른 백작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우리 서제국은 불안정한 상태의 클로얀 왕국을 모른 척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요하네프 3세 폐하께서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일정 기간 클로얀 왕국을 보호해드리고자 합니다. 어떻습니까?”

“……!”

그 자리 모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보호?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지금 우리 클로얀보고 서제국의 속국이 되란 말인가요?”

“클로얀이 안정될 때까지 보호해 주겠다는 뜻일 뿐입니다.”

그게 그 말이었다. 더구나 스토른 백작은 왕국의 귀족들을 더욱더 자극하는 말을 하였다.

“양 국가의 신뢰를 진작시키기 위해, 여왕 전하와 요하네프 3세 폐하가 혼인을 치러도 되겠군요. 여왕 전하께서 요하네프 3세 폐하의 총애를 받게 된다면, 폐하도 사랑으로 클로얀 왕국을 돌보게 될 것입니다.”

“……!”

거기까지 들은 순간이었다.

창!

바르한 백작이 칼을 꺼내 스토른 백작의 목에 겨누었다.

“닥쳐라! 개소리를 들어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곳에서 당장 죽고 싶나?”

그의 눈에서 섬뜩한 기세가 터져 나왔다. 당장에라도 스토른 백작의 목을 칠 것 같은 기세였다.

“흐음.”

하지만 스토른 백작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검날이 목을 파고들며 피가 주륵 흘렀지만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굉장히 자비로운 제안을 한 것인데, 의외군요.”

“뭐라고?”

“우리 서제국은 당장에라도 클로얀 왕국을 멸망시킬 수 있음에도 이런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원하지 않으시면.”

스토른 백작은 이를 하얗게 드러내며 웃었다.

“클로얀 왕국이 불에 타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운 일일 것 같군요.”

“……!”

마리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단순한 협박이 아니야. 진심이야.’

저 보석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깃든 광기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스토른 백작은 진심으로 클로얀 왕국의 멸망을 바라고 있었다. 다만 자신의 주군인 요하네프 3세의 뜻이 그러지 아니하기에 항복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스토른 백작은 마치 하찮은 개미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말했다.

“여러분께 솔직히 말씀드리죠. 저는 굳이 클로얀 왕국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밟고 지나가면 되는 일이니까요. 제가 여러분께 자비로운 제안을 하는 건, 오로지 요하네프 3세 폐하의 뜻 때문입니다.”

“……!”

“그러니 선택하십시오. 불에 타 멸망할지, 아니면 우리 서제국의 보호를 받을지.”

장내의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모두가 매서운 눈으로 스토른 백작을 노려보았다. 마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돌아가세요. 더는 당신과 할 말이 없군요.”

“알겠습니다.”

스토른 백작은 싱긋 웃었다. 그는 짙은 음성으로 말했다.

“다음에 만날 때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강녕하시길.”

* * *

협상 결렬 후 스토른 백작은 왕성을 빠져나왔다.

“가, 각하.”

동행한 수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하네프 3세 폐하께서는 클로얀 왕국과 최대한 평화적인 동맹을 맺기를 원하지 않았습니까?”

서제국이 클로얀 왕국을 독립시킨 이유는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거두어 동제국 침략의 교두보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난 폐하의 뜻에 동의하지 않는다.”

“각하?”

“클로얀 지방을 서제국의 영향권에 두려면 꼭 동맹을 맺을 필요는 없어.”

수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클로얀 왕국을 우리 손으로 다시 멸망시키는 것이다.”

“……!”

스토른 백작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서제국군이 동제국으로 진군하려면 반드시 클로얀 지방을 지나야 한다. 그게 클로얀 지방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유이지. 그런데 클로얀 왕국과 불완전한 협정을 맺고 동제국으로 진군하는 것은, 등 뒤에 비수를 놔두는 거나 똑같아. 차라리 철저히 짓밟아 후환을 남겨 두지 않는 게 낫다고 본다.”

전략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만약 대군이 동제국으로 진군했는데 클로얀 왕국이 다른 마음을 먹으면 오지도 가지도 못 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폐하의 뜻은…….’

수하는 뭐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현재 요하네프 3세는 클로얀 지방의 일에 개입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스토른 백작이 전권을 위임받은 것이다.

“각하, 혹시…… 다른 이유는 없으신지요?”

“무슨 말이지?”

“그…… 단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서.”

스토른 백작은 아름다운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군. 난 그저 우리 서제국에 가장 도움이 될 판단을 한 것일 뿐이다.”

“……네. 알겠습니다.”

수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가도록 하지.”

“넵!”

스토른 백작은 말을 달리며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다른 이유가 없지는 않지.’

그의 머릿속에 작은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과 다르게 빛나는, 그래서 거슬리면서 가슴에 박힌 듯 계속해서 생각나는 소녀.

‘마리. 아니, 모리나.’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 그녀가 눈물 흘리는 모습을 더 보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를 나락에 빠뜨려 절망에 몸부림치게 해, 철저히 망가뜨릴 것이다. 그래서 한 줄기의 빛도 없는 고통 속에서 그녀의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낸 후, 그는 그녀를 유린할 것이다. 그게 그녀를 향한 그의 욕망이었다.

한편 그때, 동제국의 수도. 제국의 백성들은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남부의 이스트반 백작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그뿐이 아니야. 동쪽에서는 동방 교국의 15만 군대가 몰려오고 있다고 해.”

“소문에 의하면 서제국에서도 대군을 보낼 거라는데.”

사람들은 혼돈에 빠져 우왕좌왕했다. 특히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소식은 클로얀 왕국의 새로운 국왕, 모리나 여왕이었다.

“힐데른 자작께서 클로얀 왕국의 모리나 왕녀였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마리는 제국 모두의 사랑을 받던 영웅이었다. 그런 그녀가 모리나 왕녀였고, 이번에 클로얀 왕국의 독립을 주도하였다니. 백성들은 충격을 안 받을 수가 없었다.

“난 아직도 믿을 수가 없군. 그 착한 분이 모리나 왕녀였다니.”

“나도 믿을 수가 없어. 도저히…….”

사람들은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혹시 모리나 왕녀가 지금껏 한 일이 모두 계획된 일은 아니겠지?”

누군가 그런 의심을 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힐데른 자작이 모리나 왕녀였다는 사실은 크나큰 충격이었지만, 그래도 지금껏 그녀가 쌓아 온 신망은 깊고도 깊었다.

“아니야. 난 설마 그분이 그랬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네.”

“맞아. 힐데른 자작님이 그간 우리를 위해 해온 일들은 다 거짓이 아니야.”

사람들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황궁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의문을 표했다.

“폐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지?”

“……폐하.”

오른은 입술을 깨물며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엘은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가만히 출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아, 어쩌다 이렇게까지 상황이.’

오른은 막막한 표정을 지었다. 예상하고 있던 것보다도 상황이 더욱 최악이었다.

‘이스트반 백작가의 준동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동방 교국에 클로얀 왕국까지라니.’

가장 뼈아픈 것은 모리나 왕녀의 일이었다.

‘만약 서제국이 클로얀 왕국을 통과하면 동제국의 수도까지는 너른 평야로 아무런 장애물이 없어.’

클로얀 지방은 동제국의 방파제였다. 서제국군이 클로얀 지방을 무혈로 통과하면 중간에 막을 만한 요충지가 없었다.

‘남부의 이스트반 백작에, 동방 교국까지 침공해 오는 상황에 서제국군이 클로얀 지방을 통과해 오면 손을 쓸 방법이 없어.’

만약 그렇게 되면 동제국은 멸망이었다. 아무리 라엘이라도 수가 없었다.

‘역시 그때 힐데른 자작을 잡아야 했어.’

오른은 후회가 들었다. 사실 이번 일은 라엘의 잘못이었다. 그가 그녀를 믿고 보내 주었기에 이런 사단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오른은 그를 탓하지 못했다. 그가 이 순간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알기에 한 마디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오른.”

그때, 라엘이 입을 열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네, 폐하.”

“미안하다.”

“……!”

갑작스러운 사과에 오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른은 뭐라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폐하.”

“이번 일은 나의 책임. 내가 모든 것을 수습하겠다.”

오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엘은 그에게 명했다.

“대전에서 기다리도록. 곧 출정하겠다.”

“알겠습니다.”

오른이 나가자 라엘은 이를 악물었다.

“만약 그때 너를 놔주지 않았다면 …….”

마지막 순간, 그는 마리를 믿고 그녀를 클로얀 왕국으로 보내었다. 그때, 오른의 말처럼 그녀를 보내지 않았다면 클로얀 지방의 상황이 이렇게까지 최악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거다. 3군단의 준동과 더불어 마리가 국왕이 됨으로써 클로얀 지방은 완전히 동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라엘은 비틀린 웃음을 흘렸다.

“큭큭, 큭. 하하, 빌어먹을.”

우습게도 지금 그의 머릿속을 장악하고 있는 생각은 제국의 위기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것은 그녀에 대한 생각뿐.

“그때…… 내가 너를 놔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떨어질 일도 없었을 텐데.”

라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래, 차라리 그녀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둬 두기라도 할 걸 그랬다. 그러면 이런 사달이 나지도 않았을 거고, 그녀와 그가 대척점에 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클로얀의 왕이 되었다. 라엘의 동제국으로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그 말의 의미는 하나였다.

앞으로는 그녀와 함께할 수 없다.

그 사실이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무저갱에 떨어진 것 같은 절망과 아픔이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지금 이 순간, 그를 가장 미치게 하는 것은 그녀의 생각이 계속해서 떠오른다는 것이었다. 어디에 시선을 돌리나, 함께했던 순간순간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같이 밥을 먹었던 일, 같이 서류를 읽었던 일, 산책했던 일, 그녀가 기뻐하던 일, 슬퍼하던 일. 그녀의 얼굴, 목소리, 미소, 손짓. 그 모든 것이 눈앞에서 보듯 생생하게 떠올랐고 그를 아득한 괴로움에 빠지게 했다.

“하아.”

라엘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주먹을 움켜쥐었다. 피가 통하지 않을 때까지 하얗게.

‘마리, 넌 지금 괜찮은 것이냐?’

클로얀 지방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일었는지는 그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마리가 의도하여 그를 배신했을 리는 없다. 그건 의심할 것조차 없이 확실했다. 3군단의 준동과 관련하여 분명 이럴 수밖에 없었던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을 것이다. 라엘은 그런 마리가 걱정되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죽을 것만 같았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라엘은 강하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피가 흘러나왔다.

‘난 이렇게 너와 멀어질 수 없다. 절대로.’

지금 이 순간에도 머릿속에서 그녀의 생각이 끝없이 떠올랐다.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고, 환하게 웃던 미소가 떠올랐고, 자신을 향해 재잘거리던 목소리도 떠올랐다. 절대. 절대로 그녀와 멀어질 수 없었다. 라엘의 눈이 타올랐다.

‘앞을 가로막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다 베어버리고 말겠다.’

라엘은 그녀와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베어버리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폐하, 대신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정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때, 집무실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라엘은 주먹을 움켜쥐고 가슴을 억눌렀다. 그는 마리와 가까워진 후 버려 두었던 철가면을 꺼내 얼굴에 착용했다. 서늘한 금속 느낌이 얼굴에 와 닿았다. 내전 때 저질렀던 자신의 죄를 상기시키는, 제국을 위한 각오를 되뇌게 하는 차가움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그에게 철가면을 쓰는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건 그녀를 위한 자신의 다짐이었다.

“……가자.”

라엘은 갑주를 걸치고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에는 제국의 수많은 대신과 장군들이 모여 출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모두가 라엘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다. 최근에 못 보던 철가면을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한 것은 철가면뿐이 아니었다. 그의 전신에서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마치 피의 길을 걷던 과거의 모습처럼.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다. 우리 제국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위기에 처해 있다.”

라엘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상황의 유불리는 상관없다. 어차피 지금껏 우리가 유리한 상황에서 싸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의 말을 들은 대신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모두 내전 때부터 라엘을 따르던 이들이다. 라엘은 단 한 번도 유리한 상황에서 싸워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요하네프 3세는 반드시 이길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우는 걸로 유명하지. 반면 나는 이길 수 있는 상황에서 싸워 본 적이 없다. 항상 불가능에 가까운 싸움만 해왔고, 모두 승리했다.”

라엘은 검을 들었다.

“더 이야기하지 않겠다. 적의 목을 베러 가자.”

“알겠습니다, 폐하!”

대전에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 함성과 함께 드디어 격랑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라엘과 마리는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검을 들었다.

* * *

라엘이 출정을 하고 있을 때, 마리는 3군단과 맞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3군단의 위치는 어디죠?”

“이아노성에서 나와 이곳을 향해 진군 중입니다.”

지금껏 3군단은 왕국 남부의 이아노성에 주둔한 채 진군을 미루고 있었다. 아마 스토른 백작의 협상을 기다렸던 것 같다. 협상이 엉망으로 끝난 이상, 3군단을 격퇴해야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의 병력으로 정면 승부는 무리야. 회전을 벌이면 단번에 궤멸당할 거야.’

마리는 무거운 얼굴로 생각했다.

‘묘책을 생각해 내야 해.’

그녀는 얼마 전 꾼 꿈인 ‘봉추(鳳雛), 방통’의 꿈을 떠올렸다. 꿈속의 인물은 적은 군사력으로 강한 적을 물리친 뛰어난 책략가였다. 그런 책략이 필요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는 지도를 바라보며 고민에 잠겼다.

‘일단 객관적으로 비교해 보자. 우리 군과 3군단의 전력 차이를.’

절망적이었다. 병력 차도 세 배가 넘고 질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제국군은 말을 탄 기사 병력만 5,000명 이상이고, 나머지 병력도 중무장한 중장 보병과 석궁수야.’

반면 왕국군은 기사 병력은 손에 꼽았고, 무장도 형편없었다. 그나마 클로얀 왕국의 전통상 다들 활을 잘 다룬다는 것? 하지만 상대 측도 궁수만 1만 명이 넘으니 별로 장점이라 하기도 어려웠다.

‘이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나 마찬가지잖아.’

막막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야. 그래도 포기하면 안 돼.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포기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 라엘과 자신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방법을 찾아야 했다.

‘농성은 안 돼. 시간을 끌면 서제국에서 추가적인 대군이 몰려올 거야.’

마리는 어둡게 생각했다. 저 3군단도 감당 못 할 적인데, 시간이 지나면 서제국의 본대가 몰려올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3군단을 격퇴해야 했다.

‘상대방의 장점을 단점으로 만들고, 우리의 단점을 장점으로 만들 방법을 찾아야 해.’

그렇게 고민하던 중이었다. 꿈속 책략가의 능력을 받은 덕일까? 그녀의 눈에 지도의 한 지점이 들어왔다.

‘있어! 절대적으로 불리한 우리가 유리하게 싸울 수 있는 방법이! 우리에게 유리한 장소에서 싸우면 돼!’

자신에게 유리한 장소에서 싸운다. 군략 중 가장 기본이 되는 내용이었다.

‘3군단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철갑으로 둘러싼 중장무장이야. 하지만 오히려 그 무장이 방해되는 지점에서 싸우면 돼.’

마침 커먼성 인근에는 그런 지형이 있었다.

‘문제는 3군단을 이곳으로 유인해야 하는데…….’

마리는 그것도 금방 방법을 찾아냈다.

‘나를 미끼로 삼으면 돼.’

3군단의 최우선 목표는 다름 아닌 바로 그녀, 모리나 여왕이었다. 그녀가 계획된 장소에서 진을 치고 있으면 분명 3군단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 전투를 시작으로 다른 책략도…….’

추가적으로 이어지는 연환계를 생각해 낸 그녀는 바르한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마리는 바르한에게 자신의 작전을 설명해 주었다. 바르한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작전에 놀란 것이다. 그는 감탄해 모리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훌륭한 전략이었다. 그녀의 계획대로만 된다면 3군단을 격퇴하는 것도 꿈이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르한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꼭 직접 나서야 하겠습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제가 가지 않으면 3군단을 유인할 수 없어요.”

“그래도…….”

너무 위험했다. 작전 과정 중 하나만 어긋나도 목숨을 잃을 것이다.

“전하께서는 우리 클로얀 왕국의 왕입니다.”

“그러니 더욱 앞으로 나서야죠. 그게 왕의 역할 아닌가요?”

단번에 나온 그녀의 답에 바르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이런 일이 반복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말릴 수 없으니 바르한은 곁에서 털끝 하나 상하지 않게 지켜 내기로 다짐하며 말했다.

“따르겠습니다.”

* * *

마리는 3군단의 알베론 백작에게 서신을 보냈다.

“커먼성 남쪽 이노슨 지역에서 결전을 치르자고?”

알베론 백작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부관이 말했다.

“이노슨 지역은 수풀이 우거진 지대로 최근 내린 비 때문에 땅이 진흙으로 변해 있어 기병들의 기동력이 제한될 것입니다.”

“그래, 우리 부대에 불리한 지형이지. 역시 마리 폰 힐데른. 아니, 이제는 모리나 여왕이군. 나름 머리를 썼어.”

“그러면 거절을?”

알베론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받아들인다.”

“어째서입니까?”

알베론 백작은 무거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녀가 무슨 잔꾀를 쓰더라도 상관이 없으니까.”

“……!”

“병력 차만 3배 이상. 실질적인 전력 차는 10배 가까이 나는 상황이다. 불리한 지형이어도 상관없어. 그냥 정공법으로 밀면 끝이다.”

그의 말은 옳았다. 왕국의 오합지졸과 그들의 전력 차는 잔꾀로 메워질 게 아니었다.

“다만 이번 전투에서 유의할 것이 있다.”

“무엇입니까?”

“마리 폰 힐데른, 아니, 모리나. 그녀를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

그렇게 말한 알베론 백작은 서제국과의 밀약을 떠올렸다.

“반드시 그녀를 생포해 주십시오.”

알베론은 동제국을 배신하는 대가로 요하네프 3세에게 대공위를 약속받았다. 그런 그가 당부받았던 부탁. 바로 클로얀의 여왕 모리나를 죽이지 말고 만드시 생포해 달라는 것이었다.

‘첩으로라도 삼으려는 건가? 어쨌든 어려울 거는 없지.’

그는 그녀가 회전을 제의한 곳을 나타낸 지도를 바라봤다.

‘저런 오합지졸을 데리고 회전을 걸다니 어리석군. 어쨌든 편하게 됐어. 성에서 틀어박혀 농성하면 시간이 꽤 걸렸을 텐데.’

알베론은 이번 회전으로 왕국군을 격파함은 물론, 그녀를 사로잡아 완벽히 왕국을 점령하리라 생각하며 명했다.

“진군한다. 모리나가 제안한 회전 장소로. 이번 전투로 클로얀 왕국을 다시 한번 멸하겠다.”

* * *

미리 결전 장소에 도착해 전투를 준비 중이던 왕국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멀리서 3군단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게 제국 3군단.’

마리는 진열을 보고 질린 표정을 지었다. 3군단은 동제국군 중에서도 정예 군단이다. 군기가 하늘을 찌를 만큼 날카로웠다.

‘과연 승리할 수 있을까.’

번뜩이는 철갑 갑옷과 평원을 가득 메우는 수많은 군마를 보니 가슴이 쪼그라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모한 도전을 하는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두려움을 떨치며 생각했다.

‘아니야. 이길 수 있어. 반드시 이겨야 해.’

이번 전투에서 지면 모든 게 끝장이다. 클로얀은 다시 멸망할 것이고, 자신은 서제국에 끌려가 어떤 꼴을 당할지 몰랐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라엘도 몰락의 길을 걸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가 사랑하는 라엘을 위해서라도 이 전투에서 승리해야 한다. 마리는 바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바르한 백작, 시작하세요.”

“네, 전하.”

바르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서제국의 개, 알베론은 앞으로 나와라!”

“……!”

그 외침에 3군단의 병사들이 일순 동요했다.

서제국의 개. 그건 3군단을 아프게 찌르는 말이었다. 지휘관 알베론은 모리나를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3군단을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행보가 수상쩍은 점이 많았기에 많은 이가 알베론의 명령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서제국의 개라는 말을 들으니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르한이 다시 외쳤다.

“부끄럽지도 않으냐! 고작 부귀영화 때문에 주인을 개 바꾸듯 바꾸다니!”

“……!”

듣고 있던 알베론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른 왕실 기사단의 기사들도 비웃듯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개도 주인을 배신하지는 않으니 너를 개에 비교하는 것은 개에 미안한 짓이구나! 너는 먹을 거를 보면 주인도 몰라보는 돼지 같은 놈일 뿐이다!”

알베론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이를 갈았다.

“이놈들을!”

순간 그의 눈에 주변 병사들이 동요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동제국을 배신했다는 일갈에 병사들이 의문을 품고 동요하고 있었다. 가만히 두면 손쓸 수 없을 만큼 사기가 떨어질 것이 뻔해 알베론은 급하게 외쳤다.

“닥쳐라! 우린 제국의 적인 모리나를 처단하러 온 것일 뿐이다! 모두 쓸데없는 말을 들을 필요 없다! 공격해라! 적들을 격퇴하고 모리나 여왕을 사로잡아라!”

기사들이 랜스를 붙들고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오천에 달하는 기사들이 한 번에 기마 돌격을 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 마치 산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궁수 공격!”

클로얀 왕국군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비처럼 화살이 쏟아졌지만 기사들은 꿈쩍도 안 했다. 어차피 한 달음이다. 적들에게는 제대로 된 장창병도 없으니 그냥 돌파하면 끝이었다.

“돌격!”

그렇게 기사들의 선두가 왕국군을 덮치려는 순간이었다. 마리와 바르한 백작이 서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바로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퍼석!

“크아악!”

전열의 앞에서 땅이 움푹 꺼지며 기사들이 넘어진 것이다! 함정이었다! 그리고 함정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쇠줄을 당겨라!”

기사들의 돌격 경로 양옆 수풀에서 매복하고 있던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수풀 밑에 깔아 두었던 쇠줄들을 양측에서 힘껏 당겼다.

파앙!

그러자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한창 기마 돌격을 하던 중간에 바닥에 숨어 있던 쇠줄들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자, 말들이 굴러 넘어진 것이다. 돌격 전열이 한 번에 무너지며 제국군은 대혼란에 빠졌다.

“궁수 모두 발사!”

쓰러진 기사들을 향해 다시 화살의 비가 날아들었다. 바닥에 쓰러진 기사들은 별다른 저항도 못 하고 비명을 질렀다.

“이런! 모두 말에서 내려라! 하마해서 진군해라!”

알베론 백작이 명했다.

“아무리 잔꾀를 써도 저 오합지졸들은 우리의 상대가 아니다! 당장 적들의 목을 쳐라!”

알베론의 말처럼 중갑을 입은 기사는 말에서 내려도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지닌다. 하지만 지형지물이 중갑을 입은 기사들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최근 연달아 내린 비로 마치 늪처럼 변한 땅이 밧줄로 낚아채듯 그들의 발목을 잡았고, 수십 킬로가 넘는 철갑을 입은 기사들은 기우뚱거리며 우왕좌왕하기 일쑤였다.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던 동료 기사들도 그들의 움직임을 더디게 했다.

“쏴라! 계속해서 쏴라!”

왕국의 지휘관들이 목이 터지라 외쳤다. 끝없이 화살이 쏟아지자 제국의 기사들도 도리가 없었다. 진흙과 함정으로 앞으로는 나아갈 수가 없고, 왕국의 궁사들이 사용하는 장궁은 철갑을 뚫을 만큼 위협적이었다.

“각하, 빨리 추가적인 병력을 투입해야 합니다.”

부관이 다급히 알베론 백작에게 명했다. 이대로는 기사들이 몰살당할 위기였다. 알베론은 주먹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더 병력을 투입해 봐야 피해만 커질 뿐이다.”

“그러면?”

“이번 전투는 우리의 패배다. 더 피해가 커지기 전에 물러난다.”

탐욕에 동제국을 배신하기는 했지만, 알베론도 뛰어난 장군이었다. 그는 자신이 너무 상대를 무시했음을 인정했다.

“그래도 저런 오합지졸들을 상대로…… 일단 밀어붙이기만 하면 저들의 전열로는 버틸 수 없을 것입니다.”

부관의 말이 옳았다. 지금은 일시적으로 밀리고 있지만, 백병전이 시작되면 그들의 압승일 것이다. 그만큼 전력 차이가 컸다. 하지만 알베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무언가 불안해.’

그는 저 멀리 언덕 너머에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모리나 여왕.’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신을 보는 소녀를 보니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만약 저 소녀가 또 다른 계책을 준비해 놓았다면 큰 피해를 입을 거야.’

알베론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전쟁의 승패는 한두 번의 전투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번 전투에서 물러나더라도 저 소녀를 잡을 기회는 많았다.

“물러간다!”

그렇게 3군단은 퇴각을 시작했다. 적이 물러나는 것을 본 왕국군은 하늘을 찌를 듯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 이겼다!”

“클로얀 왕국 만세!”

제국군에게 승리를 거둔 게 도대체 얼마 만인가. 더구나 단 한 명의 피해도 없는 압승이었다. 왕국민들은 자신에게 승리를 안겨 준 그녀의 이름을 높여 불렀다.

“여왕 전하 만세!”

“모리나 여왕 만세!”

바르한도 다가와 그녀에게 감탄의 말을 건네었다.

“압승입니다. 우리 측 피해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마리는 긴장으로 하얗게 질려 있던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위험했어요. 만약 알베론 백작이 피해를 무시하고 돌격했다면, 우리 측은 궤멸했을 거예요.”

바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다행입니다. 이제 승리는 우리의 것이군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전투에서 한번 패했다지만, 여전히 3군단은 강력한 전력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승리가 자신들의 것이라니? 바르한은 그 이유를 이어서 말했다.

“전하의 책략이 이어질 테니까요.”

놀라운 이야기였다. 이번 전투가 마리의 계획의 끝이 아니란 뜻이었으니까. 그녀는 3군단을 향해 연속해서 이어지는 연환계를 준비해 놓았던 것이다! 바르한은 확신을 담아 이야기했다.

“저들은 오늘 승리할 유일한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

“잘되어야 할 텐데요.”

“잘될 것입니다.”

바르한은 이제 그는 그녀를 완전히 믿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책략을 짜도, 실제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아무도 몰라.’

마리는 초조한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3군단이 퇴각한 방향. 바로 그녀가 2번째 책략을 준비해 놓은 곳이었다.

* * *

전열을 물린 알베론 백작은 피해 상황을 보고받았다.

“……이상입니다.”

알배론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다행히 재빨리 퇴각한 덕에 희생자의 수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기사 병력이 타격을 입은 것은 뼈아팠다.

‘괜찮아. 여전히 우리 군단의 전력이 압도적이다.’

이번에야 상대를 무시하는 바람에 피해를 자초했지만, 앞으로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정공법으로 나가면 아무리 잔꾀를 부려도 소용없어.’

알베론은 앞으로는 절대로 마리의 잔꾀에 휘둘리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두 번째 계략이 실행되었다는 것을.

“각하! 각하! 큰일입니다!”

다급한 전령의 목소리가 막사로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이냐?!”

“나리안 성이 습격받았습니다!”

“……!”

그 급보에 알베론을 비롯한 수뇌부는 깜짝 놀랐다. 나리안 성은 바로 3군단의 군량이 보관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왕실 기사단입니다! 그들이 몰래 우회하여 성을 습격 후 군량을 모조리 빼돌렸습니다!”

알베론의 얼굴이 하얘졌다.

‘그러고 보니 아까 회전 당시 왕실 기사단의 주력이 없었어. 그러면 처음부터 회전은 눈속임이었고, 진짜 목적은 군량 창고였다는 말인가?’

“군영에 남아 있는 식량은 얼마나 되지?”

“며칠분밖에 되지 않습니다.”

알베론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배를 쫄쫄 굶게 생긴 것이다. 아무리 강병이라도 굶고서는 제대로 싸움을 할 수가 없다. 더구나 마리의 계책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각하!”

“또 뭐냐?!”

“왕실 기사단입니다!”

놀라 막사 밖으로 나가 보니, 왕실 기사단의 기사들이 말을 타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게, 습격하러 온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선두에 선 바르한 백작이 화살이 닿기 직전 거리까지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뭐지?’

알베론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그는 곧 그들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바르한 백작이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제국의 병사들에게 묻는다! 그대들은 지금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저 추악한 알베론은 탐욕 때문에 사악한 서제국에 영혼을 판 자이다! 그런 자를 왜 따르고 있는 것이냐?”

“……!”

“너희가 정말로 동제국의 병사라면 마땅히 저 추악한 알베론의 목을 베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알베론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게졌다. 그렇지 않아도 알베론이 서제국과 결탁했다는 의문이 암암리에 3군단 내에 퍼지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저런 이야기를 듣자 병사들은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군단장님이 서제국과 결탁했다고?”

“그러면 그때 들었던 소문이 정말 사실이었던 말이야?”

알베론은 병사들이 더 동요하기 전에 외쳤다.

“우리는 모리나를 처단하기 위해 나섰을 뿐이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듣지 마라!”

곧 기사들이 출진했다. 하지만 바르한을 비롯한 왕실 기사단은 크게 비웃으며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리고 그런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낮이고 밤이고 가릴 것 없이 왕실 기사단은 불쑥 찾아와 알베론이 서제국과 결탁했다고 비웃었다. 3군단의 사기는 갈수록 떨어져 바닥을 기었고, 군량 부족까지 겹쳐 최악의 상황이 되었다. 탈영자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각하, 큰일입니다. 병사들이 계속해서 탈영하고 있습니다.”

수하의 말에 알베론은 탁자를 쾅 하고 내려쳤다.

“빌어먹을! 절대 가만히 두지 않겠다, 모리나!”

“각하, 빨리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수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떻게 이런 책략을.’

왕국군은 3군단의 상대가 아니었다. 3군단의 전력이라면 이미 모리나 여왕을 사로잡는 것은 물론, 수도인 커먼성까지 함락한 상태여야 했다. 그런데 몇 가지 간단한 계책만으로 완전히 상황을 역전시킨 것이다. 적이지만 소름 끼칠 정도로 대단했다. 그녀가 왜 과거 동제국에서 기적의 성녀로 불리었는지 알 수 있었다.

“모리나 여왕은 지금 어디에 있지?”

“커먼성 인근 루캄 협곡에 머물고 있습니다.”

“루캄? 지금 바로 진격한다.”

수하는 흠칫 놀라 만류했다.

“무슨 함정이 있을지 모릅니다. 조금 더 신중히 진격하는 것이.”

알베론은 버럭 화를 내었다.

“더는 시간을 끌 수가 없어! 이대로 있다가는 싸우지도 않고 궤멸할 판이다!”

알베론도 그녀가 함정을 팠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선택 사항이 없었다. 그는 초조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어. 모리나 여왕만 잡으면 돼. 그러면 우리의 승리다.’

* * *

운명의 결전의 날. 마리는 루캄 협곡에서 3군단이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처음의 위용과 비교하면 3군단은 굉장히 초라해 보였다. 사기가 많이 꺾여 칼 같은 군기가 상해 있었다.

‘제발 모든 일이 잘 풀리길.’

그녀는 속으로 간절히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계획대로 모두 잘 풀렸다. 하지만 마지막 결전의 순간, 단 하나의 톱니바퀴라도 어긋나면 자신들이 패할지도 몰랐다.

“돌격! 왕국 촌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어라!”

알베론은 불문곡직 돌격을 명했다.

“와아아!”

곧 어마어마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기사 돌격이 시작되었다. 첫 전투 때만큼의 기세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산을 쪼갤 듯한 위력이었다. 하지만 그 돌격을 그대로 당하고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곧 마리가 판 함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히히힝!

말들이 바닥에 깔린 캘트롭(마름쇠)을 밟고 비명을 질렀다. 말들이 쓰러지며 돌격 진형이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매복조 공격!”

바르한 백작이 명하자 양 협곡에 매복하고 있던 병사들이 우르르 일어나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진열이 붕괴된 채 정면과 좌우 양면에서 협공당하게 된 기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저, 저런……!”

3군단 수뇌부들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는 첫날 전투의 악몽이 재현될 뿐이었다.

‘빌어먹을!’

알베론 백작은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가, 각하? 어떻게 합니까? 퇴각을 명합니까? 이대로는 피해만 커질 겁니다.”

하지만 알베론은 굳게 고개를 저었다.

“퇴각은 없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면 우리는 끝이야, 이 멍청아!”

“……!”

이를 바득 간 알베론은 얼굴 전체를 가리는 투구를 쓰고 전투용 도끼를 꺼내 들었다.

“내가 직접 나서겠다.”

그는 도끼를 정면, 바로 그녀가 위치한 진형을 향해 가리켰다.

“좌우 매복한 적은 신경 쓰지 마라! 모리나 여왕만 잡으면 우리의 승리다! 모두 나를 따르라!”

그렇게 후방에 머물고 있던 3군단의 모든 병력이 협곡 안으로 몰려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왕국군의 바르한 백작이 혀를 찼다.

“역시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군요.”

그는 말을 이었다.

“하긴 지금 상황에서 물러나면 더는 다음 기회가 없을 테니까요. 대단합니다, 전하.”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은 모두 그녀의 책략 덕분이었다. 그는 감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리는 대답하지 않고 굳은 표정으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괴롭구나.’

이기고 있었지만 마냥 기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아무리 적군이라도 자신의 책략으로 많은 이가 다치고 죽는 것을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이런 전쟁 따위 하고 싶지 않은데.’

그녀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어쨌든 지금은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적들을 물리치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을 테니까. 그녀는 왕국민들을 지킬 책임이 있었다. 마리는 눈을 질끈 감으며 명했다.

“마지막 작전을 시행하세요.”

“네, 전하!”

바르한은 우렁차게 답한 후 명했다.

“화시(火矢)를 쏴라!”

한편 한창 마리를 향해 돌진하던 알베론은 화시란 이야기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화공이라고?’

놀라 주변을 보니, 수풀이 우거져 충분히 불을 붙일 수 있는 지형이었다. 수많은 병력이 모여 있는 상태에서 불을 지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명백했다.

‘이런……!’

휙! 휙! 휙!

불화살이 하늘을 뒤덮으며 날아들었다. 곧 불이 붙었고, 협곡 안을 가득 메우던 3군단은 대혼란에 빠졌다.

“정신 차려라! 큰불은 아니야! 무시하고 돌진해 모리나 여왕을 잡아라!”

알베론이 도끼를 휘두르며 혼란을 잡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3군단은 옆에서 타오르는 불과 하늘에서 날아오는 화살에 비명을 지르다 쓰러져 갔다.

‘이대로 끝인가.’

알베론은 절망 어린 얼굴로 생각했다. 욕망에 배신까지 했지만 결국 이렇게 허무하게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아니야.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알베론은 고개를 젓고는 이를 바득 갈았다.

‘모리나 여왕! 모든 걸 다 잃어도 그녀만 잡으면 돼! 그러면 나의 승리야!’

그는 측근에게 명했다.

“아비스 기사단을 모아라.”

“각하? 퇴각해야 합니다.”

측근은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알베론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외쳤다.

“시끄러워! 아비스 기사단을 모아!”

아비스 기사단! 3군단 내에서도 정예 기사단으로 과거부터 알베론 백작을 따르던 이들이라, 깊은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각하.”

곧 딱딱한 인상의 기사단장이 알베론 백작 앞으로 나섰다. 알베론은 도끼로 저 멀리 서 있는 마리를 가리키며 명했다.

“다른 것은 다 필요 없다. 우리는 모리나 여왕을 잡으러 간다. 할 수 있겠느냐?”

기사단장은 묵묵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중앙에 의의로 변변한 방어 병력이 없군요. 일단 이곳을 돌파만 하면 가능할 듯합니다.”

“가자!”

그렇게 알베론과 아비스 기사단이 돌진을 시작했다. 일련의 철갑 기사들이 돌진해 오자 왕국군은 깜짝 놀라 앞을 막아섰다.

“막아라!”

“어딜 감히!”

하지만 양군이 부닥친 순간, 생각지도 못 한 이변이 일어났다! 아비스 기사단이 압도적인 무력으로 왕국군의 진열을 단숨에 무너뜨린 것이다.

‘이런!’

그 모습을 지켜본 마리의 얼굴이 하얘졌다. 원래부터 왕국군의 기량은 형편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매복 작전을 위해 왕실 기사단같이 강한 전력들이 좌우로 퍼져 있어 막상 그녀가 머무는 중앙은 굉장히 방어벽이 얇았다.

“막아! 뚫리면 안 된다!”

“크아악!”

왕국군들은 필사적으로 앞을 막아섰지만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저기다! 저기에 모리나 여왕이 있다!”

알베론 백작이 시뻘게진 눈으로 외쳤다. 살기등등한 그의 눈을 바라본 순간 마리는 몸이 뻣뻣이 굳었다.

‘어, 어쩌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의 책략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전하, 뒤로 물러서십시오! 제가 막고 있겠습니다!”

바르한 백작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 하지만……!”

“어서! 전하가 잡히면 그대로 끝입니다!”

바르한을 비롯한 기사들이 그녀를 지키기 위해 검을 꺼내 들었다. 결연한 기세였지만 숫자가 너무 부족했다.

‘왕실 기사단을 양옆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었어.’

바르한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대부분의 실질 전력이 협공을 위해 양옆으로 퍼져 있는 상태라 이런 사달이 났다.

‘설마 저 아수라장을 뚫고 올 줄이야.’

이미 늦은 후회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지켜 내야 했다.

“빨리 피하십시오, 전하!”

하지만 그녀는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안 돼. 내가 도주하면 왕국군은 한 번에 밀릴 거야. 예비 전력이 없는 우리로서는 패하면 그걸로 끝이야.’

지금 왕국군은 간신히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온갖 책략을 퍼부었음에도 기본적인 전력이 워낙 차이가 나 아직도 명확한 승기를 못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도주하면 끝이었다. 단번에 승패가 역전될 것이다.

“전하! 빨리!”

그때, 드디어 근처까지 다가온 아비스 기사단의 기사들이 검을 휘둘렀다.

까앙!

바르한을 비롯한 기사들은 필사적으로 방어했다. 남아 있는 일반 병사들도 악귀처럼 달려들었다.

“여왕 전하를 지켜라!”

“죽더라도 막아라!”

그들의 맹렬한 투혼에 아비스 기사단의 기세가 주춤 죽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저리 꺼져라!”

괴성과 함께 전투 도끼가 피의 폭풍을 일으켰다. 알베론 백작이었다! 그는 왕실 기사 두 명과 일반 병사들을 단번에 베어버린 뒤 방어벽을 뚫고 단숨에 그녀가 서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모리나!”

“전하!”

바르한이 급히 뒤에서 따랐으나 한발 늦었다. 지척까지 다가온 알베론 백작의 핏발 선 눈동자를 본 순간, 마리의 몸이 마비되었다.

‘아…….’

알베론은 징이 박힌 철갑을 그녀의 목을 향해 뻗었다. 그녀의 여린 목을 움켜쥐고 바닥에 처박을 심산이었다.

“각오해라!”

그런데 그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피하십시오, 마리 양!”

익숙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고, 한 줄기 은빛 검광과 함께 알베론의 철갑이 튕겨져 나갔다.

까앙!

“……!”

알베론은 눈을 부릅떴다. 이 순간 이 자리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인물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다, 당신이 이곳에 어떻게?”

찬란한 은발. 마치 신이 직접 다듬은 듯한 얼굴선. 냉랭한 기운을 띠고 있는 바다 같은 푸른 눈동자.

“키에르한 후작!”

그 자리의 모두가 경악에 빠졌다. 변경백이자 동제국 최강 기사인 키에르한이 나타난 것이다!

“키, 키엘 님이 어떻게?”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키에르한은 평소처럼 그녀를 향해 옅게 미소를 지은 후 시선을 돌렸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드리고 싶은 말이 많지만, 저 냄새나는 돼지를 먼저 치워야 할 것 같군요.”

알베론 백작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도끼를 휘둘렀다.

“이놈! 감히! 죽어라!”

하지만 일검. 딱 일검이었다. 키에르한이 한 손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은빛 검광이 번뜩인 후,

“컥……?”

알베론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알베론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키에르한을 바라보았다. 그의 검이 자신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 궤적을 따라가지도 못 할 빠르기였다.

“마, 말도 안…….”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알베론은 쿵 하고 쓰러졌다.

“…….”

장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모두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키, 키엘 님…….”

그 자리에서 오로지 단 한 명,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 키에르한이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마리 양…….”

그는 순간 머뭇거리더니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그의 손가락에 묻어나오는 물기에, 마리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키에르한의 눈동자에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지금껏 느꼈던 아픔을 자신의 아픔보다 더 크게 느끼는 듯한 그의 눈동자는 이런 말을 담고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마리는 그의 마음을 느낀 순간 가슴이 울컥 흔들렸다. 지금껏 아파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어깨에 놓인 짐에 홀로 무거워했던 것도 떠올랐다. 모든 일을 그녀 홀로 아파하고 감당해야 했다. 겉으로 티 내지는 않았지만, 너무나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보다 더 아파하는 남자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정말로.”

“키엘 님.”

키에르한은 천천히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키, 키엘 님? 일어나세요.”

마리는 그가 무릎을 꿇자 당황했다. 하지만 키에르한은 고개를 젓고 말했다.

“그날의 맹세를 기억하십니까?”

마리의 눈이 커졌다. 이전,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을 때 그는 그녀에게 충성의 맹세를 한 적이 있었다.

“나 키에르한 드 세이튼. 당신께 충성을 맹세한 기사로서 당신에게 제 모든 것을 바치고자 돌아왔습니다.”

“……!”

“제 마음과 검을 받아주십시오.”

마리의 손끝이 떨렸다. 마음과 검. 기사의 모든 것을 뜻하는 단어였다. 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그의 충성을 받을 수 있겠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일어나세요.”

하지만 키에르한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미 저는 마음을 결정하고 온 상태입니다. 거절하셔도 저는 당신께 제 모든 것을 바칠 것입니다.”

“……!”

그렇게 말한 키에르한은 몸을 일으켜 아비스 기사단과 3군단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뻣뻣이 굳어 있었다.

“알베론 백작은 죽었다. 계속 의미 없는 싸움을 할 텐가?”

그녀에게 말할 때와는 전혀 다른 냉랭한 목소리. 키에르한은 차가운 심판자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당장 검을 버려라.”

“……!”

아비스 기사단의 기사들은 이를 바득 갈고 말했다.

“키에르한 후작! 아무리 제국 최강 기사라고 해도 당신 혼자서 우리를 감당할 수는 없소!”

그들의 말이 옳았다. 알베론 백작은 목숨을 잃었지만, 아비스 기사단의 기사들은 여전히 멀쩡했다. 만약 그들이 한 번에 달려들면 키에르한은 물론 모리나 여왕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다.

“혼자?”

하지만 키에르한이 반문했다.

“누가 혼자라고 했지?”

“뭐?”

3군단 기사들의 눈이 흠칫 커졌다.

저 멀리서 새로운 군세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검과 방패가 교차하는 문장(紋章). 바로 황실친위대와 근위 기사단과 더불어 제국 3대 기사단이라 불리는 세이튼 가문의 쉴트 기사단이었다. 쉴트 기사단이 돌진해 오며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적들에게 징벌의 칼날을!”

“징벌의 칼날을!”

3군단 모두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쉴트 기사단뿐이 아니었다. 저 멀리서 또 다른 먼지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변경백인 키에르한 휘하의 군단병들이었다.

“이, 이럴 수가…….”

3군단은 몸을 떨었다. 키에르한 후작의 병사들은 멀쩡한 상태에서 부닥쳐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강병인데, 지금 상황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때, 키에르한이 가만히 3군단을 향해 검을 들어 겨누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하겠다. 살고 싶다면 무기를 버리도록.”

까앙. 까앙.

그의 말이 끝나자 3군단의 병사들이 하나둘 무기를 버리기 시작했다. 더는 싸울 이유도, 싸울 기력도 없었다. 그렇게 치열했던 클로얀 왕국군과 3군단의 전투가 막을 내렸다. 클로얀 왕국의 대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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