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Chapter 1
곧 폰틸 남작이 잔뜩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바르한 백작과 함께 마리 앞에 나타났다.
“데리고 왔습니다.”
바르한 백작은 힐끗 폰틸 남작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다. 무기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니.”
“닥쳐라!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바르한은 피식 웃었다.
“제국 근위 기사는 무기도 없는 자를 두려워하는가.”
“이놈이…….”
폰틸 남작은 이를 바득 갈았으나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바르한 백작은 왕실 기사단의 단장으로 사실상 클로얀 왕국의 최강 기사였다. 폰틸 남작도 정상급 기사였지만, 바르한 백작에는 한 수 못 미쳤다. 키에르한이나 라엘 정도나 그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네놈이 서기관이라니, 무슨 속셈이지?”
“난 글을 잘 쓴다. 충분히 서기관의 직책을 수행할 능력이 있다.”
“그런 뜻이 아니지 않은가!”
바르한은 길길이 날뛰는 폰틸 남작에게서 고개를 돌려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으며 예를 올렸다.
“세르안 백작가의 바르한입니다.”
그 극례에 폰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왕족에게 하듯, 아니, 충성을 맹세한 주군에게 하듯 공손함이 가득한 말투였다. 마리는 한숨을 내쉬더니 폰틸 남작에게 말했다.
“남작님, 죄송하지만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 주세요. 부탁할게요.”
폰틸은 안 나가려 했으나, 마리가 거듭 부탁하자 어쩔 수 없이 나가 대기했다. 둘만 남게 되자 마리가 바르한 백작에게 물었다.
“저도 궁금하군요. 무슨 생각이신 거죠? 서기관이라니.”
마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이마에 난 흉터를 바라보았다. 곰도 맨손으로 잡을 것 같은 강인한 인상으로 서기관을 지원하다니?
‘나를 따르기로 한 것인가?’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혼란이 가득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이전에는 없던 빛이 떠올라 있었는데, 그건 죄책감이었다.
‘죄책감? 왜?’
그 순간, 바르한이 다시 무릎을 꿇었다. 단순히 예를 표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죄를 고하듯 머리까지 바짝 땅에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백작? 갑자기 왜?”
마리는 깜짝 놀라 그를 불렀다.
“역시 전 전하의 뜻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왕가를 재건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하지가 않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괴로움이 가득했다. 마리는 그가 자신을 향한 충성과 왕가 재건 신념의 충돌 사이에서 뼈를 깎는 고통을 느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말 불충하기 짝이 없는 일이오나, 감히 한 가지를 청하옵니다! 제게 곁에 머물며 전하를 지켜볼 시간을 주십시오.”
“……!”
“전하의 길이 정말로 옳다는 확신이 들면, 그때는 전심으로 전하를 따르겠습니다! 부탁하옵니다!”
그는 다시 머리를 땅에 찧었다. 감히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 송구하다는 태도였다. 마리는 급히 그를 일으켜 세웠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녀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부탁하고 싶은 일이었다.
“일어나세요, 백작. 오히려 제가 감사해요.”
“전하?”
“저에게 기회를 준 것이니까요. 감사해요. 실망하지 않게 저 최선을 다할게요.”
마리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내민 손을 본 바르한 백작의 눈동자가 다시 흔들렸다.
“그러니 백작도 저를 많이 도와주세요.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
* * *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왕실 기사단의 단장, 바르한 백작이 마리의 밑으로 들어왔다. 물론 그가 그녀에게 완전히 충성을 바치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마리의 행보에 따라 그의 결심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래도 그가 그녀를 지켜보기로 결심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하기에 따라 마음을 바꿀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뜻이니까. 즉, 클로얀 지방 안정의 구분 능선을 넘었다 할 수 있었다.
‘이제 거의 다 됐어.’
어두운 밤, 마리는 달빛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정말로 거의 다 됐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클로얀 지방은 완전히 안정될 것이다. 왕가 재건을 바라는 이들은 뜻을 이루지 못해 아쉽겠지만, 그건 당사자인 그녀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왕가 재건이 아니라, 왕국민들이 행복을 찾는 일이이야.’
무엇보다 마리는 왕가 재건만이 왕국민들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방식대로 왕국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마리는 창밖 저 먼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라엘이 있는 황궁 쪽이었다.
‘보고 싶어요, 폐하.’
최근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일까. 지쳤다. 빨리 모든 일을 끝내고 돌아가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사랑…… 해요.’
그를 떠올리자 그리운 마음이 울컥 치밀었다. 너무 보고 싶어 괜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조금만 더 힘내자. 얼마 남지 않았어.’
시큰해진 눈가를 화급히 닦으며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 방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이 시간에?’
의아한 표정으로 문을 여니 폰틸 남작이 상기된 얼굴로 서 있었다.
“남작님? 무슨 일로?”
“초청장이 와서 급하게 찾아뵈었습니다.”
“초청장이요?”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초청장이길래 이 시간에 왔지? 하지만 남작이 건넨 초청장의 문장을 본 순간, 마리는 왜 그가 이 시간에 급하게 찾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황실 문장!’
고풍스럽게 단장된 초청장에는 동제국 황실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라엘이 보낸 것이 분명했다. 그녀를 황궁으로 부르는 초청장인 것이다! 마리는 다급히 초청장을 열어보았다.
[내 소중한 그대에게.
이번 제국 탄신 연회에 참석하여 연회를 빛내주길.]
‘탄신 연회?’
그러고 보니 제국은 연중 가장 큰 행사인 탄신 연회가 열릴 시기였다.
‘왜 갑자기?’
마리는 순간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초청이었던 것이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가? 아니면 그냥 내가 예비 황후라서?’
사실 예법상 당연히 참석하는 게 맞긴 했다. 예비 황후인 그녀는 황제 라엘과 더불어 탄신 연회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지금 클로얀 지방에서 몸을 빼기 어려운 상황이다. 라엘의 평소 성격을 고려하면 당연히 배려해 주었을 텐데, 왜 굳이 초청장을 보낸 건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정말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마리는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어 안색을 굳혔다.
마리의 불안처럼 라엘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녀를 부른 것이 아니었다. 수일 전 동제국의 황궁에서 있었던 일이다. 라엘은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적지나 다름없는 곳에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그녀가 있으니, 하루하루가 타들어 가는 심정이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혹시나 클로얀 지방에서 안 좋은 소식이라도 날아올까 조마조마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마리, 난 너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 마침 노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른입니다, 폐하.”
그 소리에 라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들어가겠습니다.”
곧 오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라엘의 표정이 한층 더 딱딱해졌다.
“무슨 용무지?”
“아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른도 마찬가지로 딱딱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노려보는 듯한 강렬한 시선이었다.
“만약 지난번과 같은 용무라면 난 더 할 말이 없다. 돌아가도록.”
라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마리가 클로얀 왕국의 독립을 획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따위 듣고 싶지 않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귀를 의심할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마리가 클로얀 왕국의 독립을 획책하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지만 오른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마리가 모리나 왕녀일 가능성은 폐하께서도 충분히 인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른은 최근에 클로얀 지방을 집중적으로 조사하며 여러 단서를 추가로 얻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단서들은 모두 하나의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리는 모리나 왕녀일지도 모른다.
아니, 가능성이 아니라 이 정도의 단서들이면 마리는 모리나 왕녀라고 봐야 했다.
“단순히 그녀가 모리나 왕녀인 게 문제가 아닙니다.”
오른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클로얀 왕국에서 그녀를 향한 지지율이 너무 높아졌습니다. 단순히 조금 높다 수준이 아니라, 거의 압도적일 정도입니다. 이전 클로얀 왕국의 왕들도 이 정도의 지지는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라엘은 인상을 찌푸린 채 오른의 말을 들었다.
“일반적으로라면 그녀를 향한 지지가 높은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됩니다. 오히려 환영할 일이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이기에 이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오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만약 마리가 모리나 왕녀가 맞는다면, 클로얀 왕국은 그녀를 여왕으로 추대하여 당장에라도 독립하려 할 테니까요. 그게 바로 문제입니다.”
섬뜩한 이야기였다. 마리가 모리나 왕녀가 맞는다면 클로얀 왕국은 단숨에 그녀를 중심으로 해서 뭉칠 것이다. 물론 마리 본인에게는 그럴 생각이 티끌만큼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마리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라엘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불쾌한 듯한 얼굴을 했다.
“그건 내가 확신한다.”
그의 굳건한 말에 재상 오른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저도 힐데른 자작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안은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갈 내용이 아닙니다. 만약 그녀가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제국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테니까요.”
오른도 그녀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껏 제국을 위해 한 헌신은 거짓이 아니었으니까. 마리는 라엘과 제국을 위해 큰 위험도 몇 번이나 감수했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꺼내는 이유는 워낙 제국에 치명적인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클로얀 지방이 독립하면 곧 일어날지 모르는 서제국과의 전쟁에서 동제국은 굉장히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무조건 막아야 한다.
“또한 몇 가지 수상쩍은 정황이 있습니다. 얼마 전 힐데른 자작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왕실 기사단의 바르한 백작과 밀회를 가졌습니다. 그때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아는 이가 없습니다.”
이전 마리가 남몰래 바르한 백작을 만나고 온 일을 말하는 거다. 라엘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불민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리가 없다.”
“저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둘의 시선이 다시 허공에서 마주쳤다. 라엘은 강한 눈빛으로 오른을 노려보았고, 오른은 피하지 않았다.
“그뿐이 아닙니다. 최근에는 왕국민들을 대상으로 기사 병력과 관리들을 모집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유화를 위한 시도라고 생각은 하지만 너무나 공교롭습니다. 물론 저도 압니다. 그저 가정일 뿐이죠.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현재 사면초가의 위기에 둘러싸인 동제국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위기를 맞게 될 겁니다.”
오른의 말은 옳았다. 기밀인지라 일반인들에게 퍼지지는 않았지만, 현재 동제국은 전례가 없는 위기를 맞고 있었다. 모두 서제국 요하네프 3세 때문이었다. 지금 라엘은 그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마리에게 가지 못하고 황궁에 머물고 있는 것이었다.
“전 힐데른 자작의 총독위를 해임하고 당장 본국으로 송환해 심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둘 사이에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 라엘은 강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짜 맞춘 의혹에 불과하다. 네 이야기는 그저 추측일 뿐 아무런 증거도 없어.”
“하지만 폐하…….”
“그만. 난 이 이야기를 더는 하고 싶지 않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난 그녀를 믿는다.”
하지만 오른은 이번만큼은 물러설 수 없다는 얼굴을 하였다.
“폐하, 제발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제국의 운명이 좌우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
라엘은 한참이나 대답하지 않았다. 오른은 간절한 눈빛으로 라엘을 바라보았다. 결국 라엘은 탄식을 내뱉듯 말했다.
“마리가 그럴 리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 미안하고 불쾌할 정도야.”
“폐하.”
라엘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 믿음을 다른 이들에게까지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러니 이렇게 하도록 하겠다.”
라엘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힐데른 자작에게 내가 직접 묻겠다. 곧 개최될 제국 탄신 연회 때 그녀를 황궁으로 부르도록.”
라엘은 직접 그녀에게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그녀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녀를 믿기에. 지금껏 고개를 돌려 왔던 그녀에 대한 진실을 직접 마주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 * *
마리는 곧바로 동제국의 수도로 출발했다. 탄신 연회는 코앞이었기 때문에 빠듯이 달려야 시간에 맞출 수 있을 듯했다.
“힘들지는 않으십니까, 각하?”
폰틸 남작은 중간중간 마리의 상태를 물었다.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강행 중이라 몸이 축나기라도 할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마리는 마차 안에서 고개를 저었다.
‘이제 곧 폐하를 뵐 수 있겠구나.’
그를 떠올리니 마리의 가슴이 두근 뛰었다.
‘폐하…….’
마리는 라엘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너무나 그리웠다. 빨리 그를 보고 싶었다. 마리의 표정을 본 폰틸 남작이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
“아…… 네.”
마리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를 만날 기대에 설레는 마음이 얼굴에 티가 났나 보다.
“앞으로 황도까지는 얼마나 더 걸리나요?”
“이 속도라면 내일 저녁쯤이면 도착할 수 있을 듯합니다. 조금만 더 고생해 주십시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그를 만나는데 그 정도야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마차의 창문을 닫으려는 순간이었다. 폰틸 남작의 얼굴이 갑작스럽게 굳었다.
“남작님?”
“각하, 마차 안으로 몸을 숨기십시오.”
“네?”
“정체불명의 무리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마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적? 하지만 수도 인근인데?’
남작의 시선을 따라 보니 정말로 저 멀리서 먼지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폰틸 남작과 근위 기사들은 굳은 표정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진 순간, 그들은 다른 의미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선두에 선 인물이 그들의 대장, 알몬드 자작이었던 것이다.
“적이 아니었군요. 각하가 걱정되어 폐하께서 미리 멀리 마중을 보낸 것 같습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걱정했는…….”
그런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마리의 눈이 우뚝 멈추어 섰다. 알몬드 자작의 뒤에서 말을 몰고 있는 한 인물을 본 것이다.
“아…….”
그림같이 아름다운 얼굴, 비단을 뽑은 듯 부드러운 금발, 깊은 푸른 눈. 그였다. 그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에 직접 먼 거리를 마중 나온 것이다.
알몬드 자작을 제치고 그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의 다급한 마음 탓인지 점점 말의 속도가 빨라졌다. 그리고 이윽고 마차 앞에 도착한 그를 보고 마리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폐, 폐하…….”
꿈인 것은 아니겠지? 그가 내 앞에 있다니. 꿈이면 안 되는데. 마리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말에서 내린 그가 그녀를 단단히 껴안았다. 마치 으스러지듯.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마리.”
그가 말했다.
“보고 싶었다.”
“……!”
짧지만 간절한 마음이 담긴 음성을 듣는 순간, 마리의 눈동자에서 주책없이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였다. 그가 정말 맞았다.
“네, 저도요. 저도 너무 보고 싶었어요.”
마리는 라엘과 다시 재회했다. 사실 객관적으로 그렇게까지 길었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이었지만, 그녀와 라엘에게는 너무나도 길게만 느껴진 시간이었다.
“잘 지냈느냐? 어디 다친 데는 없었고?”
마차 안에서 라엘은 마리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녀를 향한 걱정과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내가 함께했었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하다.”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전 잘 지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사실 잘 지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위험한 적도 많았고, 마음고생도 많이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생각 안 나는걸.’
마리는 배시시 웃었다. 그를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그간의 고초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좋았다. 라엘은 그런 그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보다 더 말랐어.”
“아…… 바빠서.”
“내가 아무리 바빠도 몸은 챙기라고 했었지?”
속상하다는 듯 말한 그는 그녀의 입술에 나직이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아…….’
그의 혀가 그녀의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부드러우면서도 열망이 담긴 키스였다. 그녀를 향한 애정과 갈망이 터져 나왔다.
“아…… 폐하.”
마리도 그의 키스를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녀도 너무나 그를 바라 왔었다. 마리는 손을 들어 그의 등을 꼬옥 끌어안았다. 마치 유혹하듯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부드럽게 시작한 키스가 점차 강렬해졌다. 라엘은 마치 그녀를 정복하듯 입맞춤을 이어나갔고 동시에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지나 귓불, 목덜미를 탐닉하듯 어루만졌다. 참을 수 없이 강렬한 그 느낌에 마리의 입가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폐하…… 정말로 보고 싶었어요. 정말로.”
마리는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라엘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나도. 나도 마찬가지다. 너를 보낸 내 결정을 미치도록 후회할 정도로 보고 싶었어.”
“폐하…….”
그렇게 말한 마리가 순간 돌발 행동을 하였다. 그의 입가에 자신이 먼저 입술을 맞춘 것이다.
“……!”
라엘은 살짝 놀랐다가 곧 눈빛이 타오르듯 달아올랐다. 먼저 입을 맞추는 것이 긴장되는지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입술이 그를 극도로 자극했다. 그의 몸이 덮치듯 그녀의 몸을 밀어붙였고, 그는 자신의 품 안에 갇힌 그녀를 거침없이 정복해 나가며 말했다.
“마리. 너를 놔주지 않을 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넌 내 것이다.”
마리는 눈을 감으며 답했다.
“네, 폐하.”
* * *
키스로 잔뜩 괴롭힘당한 마리는 지친 얼굴이었고, 반면 라엘은 부족한 얼굴이었다.
“빨리 황궁에 도착해야겠어.”
“네? 왜요?”
멍하니 묻던 마리는 그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답을 안 들어도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방금 나눈 키스로는 턱도 없이 부족한 눈치였다.
‘괘, 괜찮을까.’
마리는 울상을 지었다. 황궁에 도착하면 자신을 놔주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 그런데 황궁에 도착하면 전 어디서 지내나요? 숙소를 뺐는데. 백합궁에서 지내면 될까요? 아니면 궁 밖에 숙소를 마련할까요?”
백합궁은 황궁의 손님, 귀빈이 묵는 궁이었다.
“그냥 사자궁에서 묵으면 된다.”
“……!”
마리의 얼굴이 빨개졌다. 사자궁은 그의 궁이다.
“그, 그건…….”
그때 라엘이 피식 웃더니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농담이다. 아무리 내가 그대를 사랑해도, 국혼 전에 사자궁에서 머물 수는 없지. 그건 그대에 대한 예의도 아니니까. 사자궁 옆 별궁에 그대가 머물 곳을 준비해 두도록 했다. 머무는 데 불편하지는 않을 거다.”
그 말에 마리의 표정이 묘해졌다. 사자궁 옆 별궁은 대대로 황제나 황태자의 여인이 머물던 곳이다. 최근에는 간택 후보들이 머물던 곳이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앞으로는 그와 함께할 거라는 사실이 더욱 실감이 났다.
“별궁은 싫은가?”
“아니요, 좋아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좋았다.
‘이제 곧 클로얀 지방의 일들이 마무리되면 정말로 폐하와 함께…….’
그렇게 생각한 마리는 문득 떠오른 의문을 물었다.
“폐하, 그런데 특별한 일이 있는 건 아니지요?”
“무슨 말이지?”
“아니, 그게…… 혹시 제게 특별한 용무가 있어서 부른 것인가 해서요.”
라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사실 할 이야기가 있긴 하다.”
“……예?”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라엘이 창밖을 보더니 말했다.
“거의 도착했군. 수도다.”
“아…….”
고개를 돌리니 정말로 수도의 모습이 보였다. 익숙한 전경에 마리는 반가운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오랫동안 지내서 그런가? 고향에라도 돌아온 느낌이네.’
아닌 게 아니라, 어린 시절 고향 마을을 제외하고는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이다. 통원의 궁에서보다 더 오래 지냈으니까. 그래서인지 마치 집에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돌아와서 좋은가?”
“네.”
마리는 웃으며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친숙한 공기를 느끼고 싶었다. 그런데 마리가 창밖에 고개를 내밀자,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거리에 오가던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본 것이다.
“어! 힐데른 자작님이다?”
“정말?”
“진짜네?”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침 복잡한 구간이어서 마차의 속도도 굉장히 느려 모두의 시선이 마리에게 집중되었다.
“클로얀 지방에 가 계신 것 아니었어?”
“그곳에서도 공을 어마어마하게 세우셨다는데?”
“세운 정도가 아니야. 역시 우리 예비 황후마마님이셔!”
그들의 말에 마리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 순간 생각지도 못 한 일이 일어났다.
“힐데른 자작 만세!”
누군가 이렇게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외침은 곧 도로 전체로 퍼지기 시작했다.
“힐데른 자작 만세!”
“예비 황후마마 만세!”
“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그러며 이런 외침도 울려 퍼졌다.
“빨리 결혼하십시오!”
“휘익! 맞습니다! 모두 두 분의 결혼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점점 거세지는 함성에 마리는 당황해 라엘을 바라보았다.
“이거 혹시 폐하께서 미리 준비하신 것은 아니죠?”
“전혀.”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사람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말했다.
“마치 개선식 같군. 역시 대단해, 그대는.”
진심이 담긴 감탄이 섞인 목소리라 마리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대단한 광경이었다. 누가 선동한 것도 아닌데 그녀의 마차를 보자마자 이렇게 열렬한 환호성을 지르다니. 역대로 그 누가 백성들에게 이런 사랑을 받았을까? 마치 개선장군의 귀환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워서 그런가 봐요.”
마리는 끝나지 않는 사람들의 환호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말했다. 라엘은 고개를 젓더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창밖을 향해 섰다. 둘이 그렇게 다정한 모습을 보이자 환호성은 더욱 커졌다.
“와아!
“황제 폐하 만세! 황후마마 만세!”
아예 대놓고 황후마마라 부르는 외침도 많았다. 사실 아직 정식 약혼식을 올리지도 않은 상태이지만, 백성 모두 그녀가 제국의 안주인이 되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들의 황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
마리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 호응에 사람들의 외침이 한층 커졌다.
“황제 폐하 만세!”
“황후마마 만세!”
그 외침이 왠지 그와 자신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듯 들려 마리는 미소를 지었다.
* * *
황궁에 도착하자 총시녀장인 에슐린 백작 부인이 직접 그녀를 맞았다.
“힐데른 자작님을 뵙습니다.”
“아…… 말씀을 편하게 해주세요.”
작위상 그녀보다 에슐린이 더 위였다. 하지만 에슐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자작님께서는 이 제국에서 가장 지고한 여인이 될 분이니까요.”
“…….”
“궁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총시녀장은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마리를 안내했다. 다른 시녀도 모두 마리에게 예를 다해 대했다.
‘어색해.’
마리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차차 익숙해져야 할 문제였다. 그렇게 짐을 풀고, 몸을 씻은 후 잠시 휴식을 취하다 마리는 사자궁으로 향했다. 라엘과 단둘이 만찬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와아.”
마리는 식탁에 놓인 음식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였다. 역시 라엘은 그녀의 취향을 꿰뚫고 있었다. 모두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가득했다.
“많이 들도록. 여윈 것 같아 속상하니까.”
“네, 감사해요.”
마리는 웃음을 지었다.
‘왠지 집에 돌아온 것 같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클로얀 지방에서 힘들긴 했었나 보다. 이렇게 그와 함께 있으니 날카롭게 서려 있던 감각이 무뎌지며 노곤하고 평온한 기분이 들었다.
“내일부터 당장 탄신 연회인데 참석할 수 있겠는가? 피로하다면 하루 정도는 불참해도 돼.”
“괜찮아요. 당연히 참석해야죠.”
“절대 무리할 필요는 없다. 그냥 쉬다가 대연회 날에만 얼굴을 비쳐도 상관없어.”
라엘은 고생하다 돌아온 그녀가 푹 쉬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렇게 쉴 수는 없겠지만, 그의 배려가 고마워 마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무슨 할 말이 있으신 거지?’
마리는 그가 용무를 꺼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일상적인 이야기만 할 뿐, 좀처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음식이 식겠군. 들지.”
* * *
그렇게 날이 지나고, 탄신 연회가 시작되었다. 온 거리가 축제 분위기에 덮였고, 황궁에서도 연회가 시작되었다.
‘내가 제국의 예비 황후로 탄신 연회에 참석하게 되다니.’
마리는 새삼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늘 하급 시녀로 연회를 준비하는 입장이었는데, 1년 만에 완전히 상황이 바뀐 것이다.
‘그간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
라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연회장으로 향하며 마리는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하지?”
라엘의 물음에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라엘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연회장에서는 절대 무리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즐기도록.”
“네.”
곧 연회장에 도착하자 문지기가 나팔을 불었다.
“황제 폐하와 힐데른 자작이십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편안히 즐기도록.”
간단히 인사를 받은 라엘은 마리의 손을 잡고 단상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마리는 라엘의 곁에서 탄신 연회를 즐겼다. 중간중간 인사해 오는 귀족들을 응대해야 했지만, 허드렛일을 해야 했던 작년과 비교하면 훨씬 편안한 연회였다.
‘휴가라도 온 것 같네.’
마리는 연회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 석연치 않은 것이 있었다. 라엘의 용무였다.
‘왜 말해주지 않는 걸까? 도대체 무슨 이야기기에?’
마리는 고심에 빠졌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오른의 태도였다.
“클로얀 지방에서 잘하고 있다고 들었다. 수고가 많군.”
오른이 그녀에게 건넨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조금은 반가워할 만도 한데,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도대체…….’
그때, 라엘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가 연회의 주인공인데 한 곡은 추어야지.”
마리는 상념에서 벗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폐하.”
그렇게 탄신 연회의 날이 하루하루 지나갔다. 라엘은 한결같이 그녀에게 잘해 주었다. 단순히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아닌 행동 하나하나에 그녀에 대한 사랑이 뚝뚝 묻어나왔다. 하지만 그 사랑을 받는 마리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마리는 대연회 도중 정원에 나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문제가 있으신 건가? 정국이 좋지 않아서일까? 클로얀 지방은 안정되고 있지만, 주변 정세가 심상치 않으니.’
라엘이 그녀를 만나러 가지 못하고 황궁에 머물고 있는 것은 주변 정세가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서제국은 물론 바다를 맞댄 동방 교국, 그리고 제국 내부의 귀족들까지. 수상쩍은 움직임이 시시각각 보고되고 있었다.
‘아니야. 물론 정세가 심각하긴 하지만 분명 다른 문제가 있어.’
순간 그녀의 등줄기에 한줄기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껏 외면하려고 했던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오른 것이다.
‘혹시…… 내 정체를 아시게 된 것은 아니겠지?’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이것 외에는 짚이는 것이 없었다. 얼마 전 보았던 오른의 차가운 태도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들이 자신의 정체를 눈치채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그녀의 가슴을 스쳐 지나갔다.
‘만약 그러면 어떻게 하지?’
마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물론 그녀도 그들에게 언제까지 정체를 숨길 생각은 아니었다. 클로얀 지방이 더 안정되면 정체를 밝힐 생각이었다.
‘조금만. 이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돼. 그러면 아무런 문제 없이 폐하를 마주할 수 있어.’
마리는 괴로운 얼굴로 고뇌했다.
‘하지만 이미 폐하가 내 정체를 짐작하고 있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쉬고 있군. 많이 피곤한가?”
“……!”
라엘이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얼굴이 왜 그렇지? 무슨 일이 있는가?”
“아, 아니에요.”
마리는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라엘은 옆에 앉고서 부드럽게 그녀를 자신 쪽으로 끌어안았다. 그렇게 그녀를 자신의 품에 안은 그가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지?”
“아니에요. 그냥 조금 피로한가 봐요.”
마리는 그의 품 안에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의 단단한 품은 언제나 그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긴장되었다. 하지만 라엘은 한결같이 따뜻한 말을 할 뿐이었다.
“안 좋은 일이 있다면 절대로 숨기지 말도록. 그대보다 내게 중요한 것은 없으니. 알겠나?”
그의 따뜻한 말이 움푹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네, 폐하.”
그렇게 둘은 잠시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라엘은 품에 안긴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고, 마리는 눈을 감고 그의 손길을 느꼈다.
“벌써 대연회도 끝이군. 탄신 연회가 끝나면 곧 돌아가야겠지?”
“……네.”
라엘의 음성에는 단순한 서운함을 넘어 타는 듯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폐하.’
마리도 그와 다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마음만 같아서는 이렇게 영원히 있고 싶었다. 그때, 라엘이 품 안에서 마리를 조심히 일으켜 세우더니 가만히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폐하?”
바람 끝에 실린 마리의 음성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 눈빛을 마주하는 마리의 가슴에 참을 수 없는 불길함이 차올랐다. 라엘이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마리.”
그녀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드디어 그가 숨겨 둔 용건을 꺼내려는 거라 생각된 것이다.
‘어떻게 하지? 내 정체를 물으면?’
마리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녀로서는 부인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라엘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어딘지 씁쓸하게 웃고는 이렇게 말했다.
“마리, 그것 아느냐?”
“네?”
“내가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라엘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러고 부드럽게 이마에 입을 맞춘 후 말했다.
“이만 들어가도록 하지. 날씨가 많이 추우니.”
* * *
그날 둘은 함께 밤을 보냈다. 라엘은 그녀를 부드럽게 안았다. 손길 하나하나에서 그의 사랑이 느껴져 마음이 울컥할 정도였다.
‘……폐하.’
그렇게 온몸으로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며 마리는 가슴이 메어 왔다. 마음속의 근심 때문일까? 자신을 향하는 그의 눈동자를, 손길을 느끼는 것이 무거웠다.
그렇게 밤을 보낸 후, 마리는 자신의 옆에서 잠든 라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새벽 늦게까지 자신을 안다가 방금 잠이 든 상태였다.
‘폐하…….’
마리는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그가 한 말을 떠올렸다.
“내가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아느냐?”
그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는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를 바라고 있는 것 아닐까?’
그녀의 얼굴에 고뇌가 깃들었다.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두려웠다. 그가 자신의 정체를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신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어줄지. 하지만 이렇게 그를 속이고 있는 것도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하아.’
그 순간, 라엘이 뒤척거리더니 눈을 떴다.
“아직 안 자는군. 잠이 안 오는가?”
“아…… 네.”
“이쪽으로 오도록.”
라엘은 그녀를 끌어안고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잠이 안 오는 아이를 달래 주듯. 그 평온한 손길에 마리는 눈을 감았다. 옷을 입지 않고 있었기에 맨살에 그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폐하…….’
그의 모든 것이 너무나 소중했다. 그와 조금이라도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폐하, 내일 함께 길거리 축제에 가면 안 될까요?”
라엘은 그 말에 살짝 놀란 눈을 하였다.
“거리 축제라. 좋군. 준비하도록 하지.”
작년 탄신 연회 때도 그와 그녀는 함께 거리 축제를 구경했다. 마리는 그의 품에서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 해.’
* * *
대연회가 마무리되었으니, 황제가 직접 참석해야 하는 행사는 모두 끝났다. 다음 날 늦은 시간, 둘은 남몰래 변장하고 길거리로 나섰다. 황제와 예비 황후의 비밀스러운 길거리 데이트였다.
“와아.”
거리의 활기찬 분위기를 본 마리는 탄성을 내뱉었다.
“좋은가?”
라엘은 옅게 웃으며 물었다.
“네, 좋아요.”
마리는 거리의 이것저것을 구경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길거리 축제는 황궁의 축제와 전혀 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나도 그대와 함께 나오니 좋군.”
“저도요.”
마리는 라엘의 팔에 팔짱을 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도 폐하와 함께여서 좋아요.”
라엘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켰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가까이했다. 이어지는 입맞춤. 사랑이 듬뿍 담긴 입맞춤이었다.
“아…….”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 사람들이 보겠어요.”
“뭐 어떤가. 그대는 내 것인데.”
내 것. 그 말에 마리는 다시 마음이 묵직해졌다. 가슴속 무거움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폐하와 함께 길거리 축제에 왔었네요.”
“그랬었지.”
“그때는 폐하인지도 몰랐는데. 너무했어요.”
라엘은 싱긋 웃었다.
“만약 정체를 밝혔으면 도망쳤을 것 아닌가. 날 잔뜩 무서워했었으니.”
그건 그랬다. 1년 전만 해도 마리는 그를 피에 미친 폭군으로만 알고 도망 다녔으니까.
‘1년 동안 정말 많은 게 변했구나.’
새삼스레 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라엘이 말했다.
“마리”
“네.”
“내년에도…… 아니, 매년, 1년에 한 번씩 탄신 연회 때마다 이렇게 길거리 축제에 같이 와 주겠느냐?”
마리는 순간 흠칫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부탁에 담긴 의미를 생각한 것이다.
‘그와 매년. 늘 함께.’
그녀도 간절히 바라는 소망.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소망이었다. 하지만 마리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렇게 둘은 길거리 축제를 즐겼다. 길거리 공연도 보고, 달달한 소스가 듬뿍 묻은 거리 음식도 먹고, 우연히 마술쇼에서 마술사에게 지목되어 공연장에 올라가 게스트가 되기도 하고. 마음속 무거움만 아니라면 너무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추었으면 할 정도로. 하지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고, 곧 황궁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다.
“아…….”
마리는 손바닥을 펼쳤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나기인가 봐요.”
“그렇군. 잠시 피했다 가는 것이 좋겠어.”
주변을 둘러보니 마침 비어 있는 성당이 하나 보였다. 둘은 성당 안으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생각보다 빗줄기가 거세 잠깐 사이에 흠뻑 젖어버렸다.
“이런.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는데.”
라엘은 손수건을 꺼내 다급히 마리의 머리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었다. 걱정 어린 자상한 손길에 마리는 배시시 웃었다.
“전 괜찮아요.”
“아니야. 조심해야 해. 그대가 아프면 내가 훨씬 속상하니, 꼭 조심하도록.”
마리는 시선을 돌렸다. 왠지 익숙한 성당의 모습에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 거기예요.”
“음?”
“우리 작년에도 이 성당에 온 적이 있어요. 그때도 비가 내려서.”
라엘도 탄성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똑같이 비가 와 이 성당에서 비를 피한 적이 있었다.
“신기하네요.”
라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운명이라서 그런 것 같다.”
“운명이요?”
“그래, 운명이니 이런 신기한 우연이 일어나지.”
그 말에 마리는 웃음을 지었다. 별로 그럴싸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와 자신이 운명이란 이야기는 듣기 좋았다.
“네, 우리는 운명이에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 목소리인데?”
“아니,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는 운명.”
그렇게 이야기한 둘은 서로를 보며 너 나 할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행복해. 너무 행복해서 불안할 정도로.’
마리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 함께하는 순간순간이 너무나 행복했다. 그래서 너무나 괴로웠다. 이 행복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때, 라엘이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이렇게 성당에 다시 오게 된 것도 운명인데, 피아노나 같이 연주하지 않겠나?”
그는 성당 구석에 놓인 피아노를 가리켰다. 1년 전, 그들은 이 성당에서 같이 포핸드(Four hand) 곡을 연주한 적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와 처음으로 소통한 경험이었다. 그때의 피아노가 똑같은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네, 그렇게 해요.”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한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제가 주성부를 맡을까요?”
“아니, 그러면 내가 그대의 연주를 따라가기 어려우니 그냥 내가 주성부를 맡지.”
라엘은 다방면에 걸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피아노도 전문 건반 연주자 못지않은 실력이었다.
“그러면 시작하지.”
그는 건반을 눌렀다. 곧 낮으면서 잔잔한 소리가 성당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세레나데(Serenade). 마리는 라엘이 연주하는 곡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저녁 음악’이란 뜻의 세레나데는 밤에 연인의 집 창가에서 연주하곤 하던 사랑의 노래였다. 역시나 편안하면서 부드러운 선율이 라엘의 손가락을 통해 흘러나왔다.
마리는 옆에 앉아 그 선율을 따라가며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이건 다름 아닌 그녀를 향해 연주하는 곡이었다. 음표 하나하나에 그녀를 향한 사랑이 가득 느껴졌다. 라엘은 곡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내가 너를 너무나, 참을 수 없이 사랑하고 있다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할 거라고.
그때 반주하던 마리의 손등 위로 한 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이 울려 도저히 연주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마리?”
라엘이 놀라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돌연 눈물을 흘리자 당황한 눈치였다. 마리는 한참 동안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도저히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아직은 그에게 정체를 밝힐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숨기는 것도 무리였다. 그를 속이고 있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입술에 맺혀 떨어졌다. 그녀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라엘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깨달았다. 라엘이 천천히 말했다.
“마리, 괜찮으니 이야기해라. 난 너를 믿으니까.”
“……!”
마리의 눈동자가 다시 흔들렸다. 그녀는 입을 벌렸다. 하지만 막상 이야기하려고 해도 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두려웠다. 결국,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는 저를 믿으시나요?”
“당연히.
“……그렇다면 만약, 정말로 만약…….”
거기까지 이야기한 마리는 다시 우뚝 입을 다물었다.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라엘은 가만히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아무런 재촉도 하지 않고. 결국, 마리는 말했다.
“만약 제가 폐하를 속인 것이 있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라엘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잠시 답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당연히 아프겠지. 실망스럽기도 하겠고.”
마리는 그 답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당연한 답이었다. 그런데 라엘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난 그대를 사랑하니까. 믿으니까.”
“……!”
“내가 아는 그대라면 이유 없이 날 속이진 않았을 테니, 최대한 이해해 보려 노력할 거다.”
왜일까? 그의 말을 듣는데 왈칵 가슴이 흔들렸다.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리 용기를 내려 해도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주여. 제발 저를 도와주소서.’
라엘은 말없이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그 어떤 재촉도 하지 않고. 그 기다림에 마리는 희미한 용기를 낼 수가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괜찮다.”
그녀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 사실 폐하를 속인 것이 있습니다.”
“……!”
“사실 제 이름은…….”
마리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앞에 진실을 꺼내기가 두려웠다. 하지만 더는 피할 수 없었다.
“모리나 드 브란덴 라 클로얀. 그게…… 제 이름입니다.”
장내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드디어 라엘에게 진실을 고백한 것이다. 마리는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숙였다. 자신의 지금 고백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너무나 두려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자신의 고백을 들은 라엘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마리는 심장이 멈추어버릴 것 같았다. 다른 어떤 것보다 그와의 관계가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결단코 폐하께 해를 끼치고자 속인 것은 아니옵니다. 제발…… 저를 믿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거기까지 이야기한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와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까? 목이 메어 더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그때, 라엘이 입을 열었다.
“의미 없는 부탁을 하는구나.”
“……!”
마리의 마음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두려워하는 최악의 결말이었다. 그런데 곧 그녀의 귀에 담담한 라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그대를 단 한순간이라도 믿어 보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니 그대의 부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미 믿고 있었으니까.”
“……!”
그 말을 들은 마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라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안타까움이 가득한 눈동자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이미 그는 알고 있었다는 것을. 다 알고 자신이 솔직히 이야기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마리의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며 눈에서 와락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흐윽. 흑. 폐, 폐하.”
라엘이 무릎을 꿇고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너무나 따뜻해 마치 괜찮다고 말하는 듯한 손길이었다. 그의 품이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품었다.
“네가 클로얀에서 그토록 노력한 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였던 거냐?”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이 복받쳐 와 그녀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폐하와 함께하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 그래야 아무런 거짓 없이 폐하 앞에 설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래서…….”
라엘의 얼굴에 씁쓸함이 번졌다. 그는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말처럼 그와 그녀 사이에는 너무 큰 장벽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난관을 모두 극복해야만 했다. 라엘은 그녀가 조금 진정하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리, 정말로 클로얀 지방을 안정시킬 수 있겠느냐?”
그 물음에 마리는 이를 악물었다.
“네,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누구도 아닌 폐하와 저를 위해서라도 해내겠어요. 저를 믿어주세요.”
그 말에 라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너도 알 것이다. 작금의 상황에서 클로얀을 안정시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네, 서제국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으니…….”
요하네프 3세의 서제국과 전쟁이 일어난다. 그건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클로얀 지방이 독립하면 동제국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하지만 라엘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비단 그런 이유에서만이 아니다.”
“그러면?”
“만약 클로얀 지방이 안정되지 못하고 만에 하나라도 독립하게 된다면, 그땐 너와 나는 적이 된다.”
“……!”
마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의 말이 옳았다. 라엘이 딱딱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반드시 클로얀 지방을 안정시켜야 한다. 할 수 있겠느냐? 널 이대로 믿어도 되겠느냐?”
마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반드시 해낼게요.”
그 대답을 들은 라엘은 더는 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다. 그러면 너도 나의 부탁을 한 가지만 들어다오.”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를 믿고 떠나보내 주기 전에 한 가지 징표를 받고 싶구나.”
라엘은 성당의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오늘 이 순간. 저 십자가 아래에서 그대와 내가 하나가 되는 서약을 올려다오.”
마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라엘의 말에 담긴 뜻을 깨달은 것이다.
“폐하……?”
라엘은 마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들어주지 못하겠느냐?”
마리의 눈동자에서 다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의 사랑이 그녀의 가슴을 흔들었다.
“아니요. 저도 원하고 있어요.”
“그러면 오늘 밤 이곳에서 서약을 올리지.”
비어 있는 성당이었지만, 라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한 그는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 나서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돌아왔는데, 그와 같이 온 인물을 보고 마리는 깜짝 놀랐다.
“예하?”
하얀 수염과 인자한 인상. 동제국 성당의 최고 성직자인 대주교였던 것이다. 대주교는 자다가 불려 왔는지 끄응- 소리를 내었다.
“폐하, 갑자기…….”
“미안하게 되었소. 하지만 그만큼 중한 일인지라…….”
라엘은 대주교에게 상호 존칭을 사용하였다.
“나와 힐데른 자작이 하나가 되는 서약을 주재해 주시오.”
대주교는 잠이 화들짝 달아난 표정을 지었다. 하나가 되는 서약이라니? 그건 혼인 서약 아닌가!
“아니, 폐하?”
“어떻게 그렇게 되었소. 정식 혼인식은 추후 다시 치를 것이니, 부탁하오.”
“어어, 그래도 이건…….”
대주교는 말도 안 된다고 입을 벌렸다. 무려 황제와 황후의 서약을 이렇게 대충 하려고 하다니? 하지만 상대가 누군데 안 따르겠는가. 대주교는 이건 아닌데, 하는 표정으로 둘의 서약을 주재했다.
“두 분은 앞으로 나오십시오.”
그렇게 둘은 손을 잡고 십자가 앞에 섰다.
“주님의 이름으로 동제국의 지배자, 폐하께 묻습니다. 힐데른 자작을 영원토록 사랑하고 아낄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십니까?”
라엘은 굳건한 목소리로 답했다.
“맹세합니다.”
대주교는 마리에게 물었다.
“주님의 이름으로 힐데른 자작에게 묻습니다. 폐하를 영원토록 사랑하며 보필할 것을 맹세합니까?”
마리는 눈을 감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답했다.
“맹세합니다.”
대주교는 둘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축복했다.
“주님께 기도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두 분께 당신의 축복을 영원히 내려 주시옵소서.”
마리도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지금껏 몇 번이나 했을지 모를 기도였다.
‘저와 폐하의 앞날을 축복해 주세요. 제발.’
그렇게 둘은 어느 이름 없는 성당 안에서 사랑의 서약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