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있는 시녀님-40화 (41/54)

Chapter 7

그 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계절은 완전한 여름이 되었고, 클로얀 사람들은 곧 다가올 가을 추수를 풍성하게 맞이하기 위해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각하, 좋은 하루입니다.”

“네, 좋은 하루예요.”

“각하, 식사는 하셨나요?”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마리는 성안을 시찰하며 사람들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왕국민들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모두 이 작은 소녀를 좋아했다. 곁에서 호위하던 근위 기사단의 부단장 폰틸 남작이 물었다.

“각하,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

“아, 그래 보여요?”

“네.”

마리는 배시시 웃었다. 사실 기분 좋은 일이 하나 있었다.

“이제 내일쯤이면 폐하의 편지가 오거든요.”

“아…….”

“그냥…… 기다려져서. 못 본 지 오래되었으니까.”

마리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영락없는 사랑에 빠진 소녀의 표정이라 귀엽기 그지없었다.

‘폐하께서 왜 이렇게나 각하에게 빠지셨는지 알 것 같기도 하군.’

폰틸 남작은 헛기침하였다. 믿을 수 없는 능력을 가진 그녀이지만, 이럴 때 보면 귀여워 보이기만 했다.

‘빨리 두 분이 국혼을 치르셨으면 좋겠군.’

곁에서 모셔 보니 그녀는 그야말로 완벽한 황후감이었다. 이런 황후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은 제국의 큰 복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 사람은 서로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폰틸 남작은 저 여린 소녀가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사랑하는 이와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뭐, 곧 클로얀 지방도 안정될 테니 금방 국혼을 치르시겠지.’

남은 관문은 전 왕실 기사단밖에 없었다. 그는 마리가 그 마지막 난관도 무리 없이 해결할 것으로 믿었다.

* * *

하지만 그 순간 은밀한 곳에서 또 다른 마수가 다가오고 있었다. 전 왕실 기사단과는 전혀 별개의 위기로, 바로 서제국의 계략가, 라키 드 스토른 백작의 시커먼 손길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얼 말인가요?”

린 남작, 아니, 스토른 백작은 아름다운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스토른 백작에게 말을 걸었던 수하는 질린 표정으로 바닥을 힐끗 바라보았다.

“끄윽. 끅…….”

바닥에는 여린 인상의 소녀가 쓰러져 있었는데, 새파랗게 변한 얼굴로 죽은피를 토하고 있었다. 독에 당해 죽어 가는 상태였다.

“모리나 왕녀를 이렇게 죽여도 되는 것입니까?”

남자의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저 죽어 가는 소녀가 모리나 왕녀라니? 스토른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가짜 모리나 왕녀이지요.”

“어쨌든 그녀를 모리나 왕녀로 만들기 위해 투자한 공이 많지 않습니까? 이렇게 죽여도 되는 것입니까?”

남자는 걱정된다는 어투로 물었다. 하지만 스토른 백작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뭐, 계획이 바뀌었으니까요. 굳이 살려 둘 이유는 없겠지요.”

그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름답지만 악마와도 같은 잔인한 미소였다. 남자는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저 뱀과 같은 비정함을 볼 때다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아니, 저건 비정함이 아니야.’

단순한 비정함이 아니었다. 스토른 백작은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는 듯했다. 무심하게 죽어 가는 소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스토른 백작이 중얼거렸다.

“점점 재미있게 흘러가는군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스토른 백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어요.”

스토른 백작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모리나 왕녀가 있는 클로얀의 왕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후 스토른 백작은 수하를 물리고 가만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모리나 왕녀…….”

이 순간 그가 생각하는 것은 바로 모리나 왕녀, 아니, 마리였다. 라키는 피식 웃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집착하는 자신의 마음이 신기했다.

원래 그는 타인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단순히 비정한 게 아니라, 아까 수하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는 확실히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건 아마 그가 어릴 적 빈민가에서 사람들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학대를 받으며 자라왔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끝없는 지옥 속에서 평생을 살아왔었다.

“재밌는 놈이군. 날 따라오지 않겠느냐?”

그런 그를 구해 준 것은 요하네프 3세였다. 그 뒤로 그는 요한의 수족이 되어 요한의 적을 제거하며 살아왔다.

‘손쉬운 일이었지.’

비틀린 그에게 남을 몰락시키는 일은 적성에 맞는 일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요하네프 3세의 최측근이자, 서제국 모두가 두려워하는 은막의 존재가 되었다. 물론 요하네프와 함께했던 일들이 크게 재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개미를 밟아 죽인다고 해서 감흥이 생기지는 않으니까. 그렇게 무료하게 지내던 삶 속에서 그는 마음을 강하게 자극하는 이를 만났다. 바로 마리였다.

“거슬렸지. 아주.”

자신과 정반대의 존재. 빛이 나는 듯한 선함. 거슬렸다. 짓밟아 뭉개 버리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왜일까? 자신과 정반대의 존재여서일까, 아니면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잠재의식 속 동경일까? 그는 마음속에 한 가지 욕망이 싹트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녀에 대한 욕망이었다. 물론 그의 감정은 사랑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 우스운 감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까운 것은-

“철저히 망가뜨리고 싶어.”

그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항상 빛나던 그 얼굴이 괴로움에 물드는 것을 보고 싶었다. 좌절하고 눈물 흘리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 빛나던 모습이 추락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마치 자신처럼 비참하게.

“궁금하군. 정말로.”

그는 저 멀리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날이 왔을 때,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 * *

다음 날, 마리는 기지개를 켜며 잠에서 일어났다. 왜인지 기분이 상쾌했다.

“늦잠 잤네.”

마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미 해가 높이 떠 있었다.

‘그냥 조금 더 잘까?’

고민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지가 도착했는지 궁금했다.

‘폐하는 잘 지내고 계시겠지?’

원래 라엘은 곧바로 클로얀 지방으로 돌아오려고 했었다. 하지만 남부 지방에서 발생한 일이 난항을 겪고 있어 황궁을 못 떠나고 있었다.

‘사실 이게 당연한 거긴 하지.’

지난번 자신에게 와 있었던 것이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니, 그만큼이나 무리해서 자신을 생각해 주었다고 해야 할까?

‘보고 싶다.’

마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를 생각하니 간질간질한 행복감이 들면서도 보고 싶어 가슴이 욱신 아팠다.

‘모든 일이 끝나면 그때는 절대 떨어져 있지 않아야지.’

편지는 오후 늦게야 도착했다. 마리는 두근거리며 편지 봉투를 열었다.

날씨가 더워지는데 잘 지내고 있는가?

편지지에서 그의 무뚝뚝한 말투가 그대로 묻어나왔다.

‘네,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폐하는요?’

나는 잘 지내고 있다. 그대를 보고 싶은 것만 제외하면. 바쁘다고 밥을 안 챙겨 먹거나 하는 것은 아니겠지? 다른 것보다 그대보다 소중한 것은 없으니, 절대 무리하지 말고 반드시 조심하도록.

편지에는 특별히 대단한 내용이 적혀 있지는 않았다. 그저 그녀를 염려하는 이야기가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상적인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마리는 편지를 꼼꼼히 읽고 또 읽었다. 편지에서라도 그의 흔적을 느끼고 싶었다.

‘보고 싶다.’

마리는 멍하니 생각했다. 편지를 읽고 나니 그를 향한 그리움이 더 커져 갔다. 그녀는 다른 중요한 정무를 보고 늦은 저녁 시간에 펜촉을 들었다. 그에게 답장을 보내려는 것이다.

존경하옵는 폐하께.

거기까지 쓴 마리는 펜을 멈추었다. 다른 편지는 일필휘지로 써 내려 가지만, 그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럴 수가 없었다. 최대한 단정한 필체로 마음을 담으면서 경박하지 않게, 그렇게 정성을 들여 썼다.

‘뭐라고 해야 하지? 보고 싶다고? 안 돼, 편지로 말하기에는 너무 경박해 보여. 무슨 다른 표현이 없을까?’

마리는 끙끙대며 고민했다. 마땅한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밤늦게까지 편지와 씨름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래도 한참 고민한 덕인지, 마음에 들게 문장이 나와서 다행이었다.

‘보고 싶어요, 폐하.’

마리는 그가 떠난 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를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꿈에서라도 그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 * *

다음 날 눈을 뜬 마리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전날 라엘을 생각하며 설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드디어 오늘이구나.’

마리의 얼굴이 결전을 앞둔 전사처럼 결연해졌다.

‘잘해야 해. 실수가 있으면 안 돼.’

오늘은 그녀의 행보에 굉장히 중요한 일이 계획되어 있었다. 집무실에서 만난 폰틸 남작도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그대로 진행하실 것입니까?”

“네.”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폰틸 남작은 염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전(前) 왕실 기사단이 예측과 다르게 움직이면 어떤 위험이 발생할지 모릅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각하를 해하려 하고 있습니다.”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진행해야 해요.”

폰틸 남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도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하는데, 그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러면 그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마리를 태운 마차가 왕성을 빠져나왔다. 목적지는 인근의 클레안 영지. 기존에 예정되어 있던 순시를 가는 길이었다. 폰틸 남작과 30여 명의 근위 기사는 굳은 표정으로 마차 주위를 경호했다.

‘이번 순시 길에 암살을 시도할 거라고.’

폰틸 남작은 최근에 입수한 정보를 떠올렸다. 우연히 그들은 전 왕실 기사단의 암살 계획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라면 당연히 일정을 취소해야겠지만, 마리는 반대로 움직였다. 이번 암살 기도를 통해 왕실 기사단의 꼬리를 잡기로 한 것이다.

‘문제는 너무 위험하단 거지.’

폰틸 남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철통같이 경호하고 있는지라 문제가 생길 확률은 적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니 어떤 돌발 변수가 발생할지 몰랐다.

‘정확히 예측할 수가 없으니.’

그들은 대략적인 암살 계획을 입수한 상태였다. 하지만 왕실 기사단이 그대로 계획을 시행할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계획을 바꾸어 돌발적인 암살 시도를 하면 마리는 그대로 위험에 노출되어야 한다.

‘긴장을 늦추지 말자. 각하께서 위험을 감수하셨으니, 이번 일로 반드시 왕실 기사단의 꼬리를 잡아야 해.’

그렇게 각오하며 폰틸 남작은 마리의 곁을 지켰다. 하지만 그런 긴장과 다르게 순시 중에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리는 자신을 환영하는 왕국민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영주와 간단한 만찬을 한 후 돌아오는 길에 올랐다.

“곧 산길입니다, 부단장님.”

수하의 말을 들은 폰틸 남작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가라앉았다. 산길. 그들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왕실 기사단은 바로 이 산길에서 암살을 시도할 계획이라 하였다.

“그래, 대비하고 있도록.”

그들은 마차를 철벽처럼 호위하며 산길을 이동했다. 암살은커녕 바늘조차 지나지 못할 철통 같은 호위였다. 그런데 산길을 절반 정도 지나고 있을 때, 생각지도 못 한 일이 일어났다.

쿠르릉!

“……!”

귀가 찢어지는 듯한 고성이 울렸다. 마치 산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였다.

“이게 무슨 소리?”

폰틸 남작이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곁의 기사가 당황해 손가락을 들었다.

“부, 부단장님! 저기!”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린 폰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거대한 바위였다. 마치 집채만 한 바위가 절벽을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낙석 공격?’

생각지도 못 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바위가 그대로 내리꽂혔다. 바로 마리가 타고 있던 마차를 향해!

콰직!

끔찍한 소리와 함께 마차가 으깨졌다. 형체도 남기지 않고 부서진 것이다. 안에서는 비명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

장내가 죽을 듯한 침묵에 잠겨 들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참변에 사람들은 몸이 마비돼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는 듯했다.

“성공했어!”

절벽 위에서 바위를 굴린 이들이 낮게 소리를 질렀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자. 곧 근위 기사가 들이닥칠 거야!”

그들은 반 제국 단체인 전 왕실 기사단의 일원이었다. 급속도로 민심을 얻은 총독 힐데른 자작은 그들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암살을 시도한 것이다.

‘제국의 개 따위는 클로얀 왕국에 필요 없어. 우리에게는 모리나 왕녀만 있으면 돼.’

이번 암살을 주도한 기사 마들렝은 이를 악물며 생각했다. 물론 그도 클로얀 지방에 많은 선행을 베푼 힐데른 자작을 암살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클로얀 왕국을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는 돌아올 그들의 진정한 주인 모리나 왕녀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었다.

‘빨리 서두르자.’

그런데 그가 빠르게 산길을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생각지도 못 한 일이 그를 기다렸다.

“멈추어라.”

“……!”

마들렝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미리 준비해 둔 도주로에 제국 근위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 어떻게?”

“함정을 파고 있었던 것은 너희만이 아니어서. 괜한 저항 말고 무릎을 꿇어라.”

마들렝의 안색이 하얘졌다. 애초에 저 마차에는 그들이 노리던 총독이 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마들렝은 화급히 상황을 살폈다. 정면을 가로막은 제국 근위 기사의 수는 10명이 넘었다. 한 명, 한 명이 자신을 상회하는 실력자인데 저만한 숫자면 답이 없었다.

“닥쳐라, 제국의 개!”

그는 단도를 근위 기사들에게 뿌리고 반대 방향으로 도주했다.

깡!

“굳이 어려운 길을.”

가볍게 단도를 막은 근위 기사가 미리 장전한 석궁을 겨누었다. 자신들이 가장 아끼고 존경하는 마리를 살해하려고 한 이다. 근위 기사는 한없이 싸늘한 눈으로 석궁을 발사했다.

퍼억!

쇠뇌는 단번에 도주하던 마들렝의 종아리를 꿰뚫었다. 마들렝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끄윽!”

마들렝은 더 이상의 도주를 포기했다. 대신 바닥에 쓰러진 채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날 잡아도 늦었다. 힐데른 자작은 이미 죽었으니까. 너희 제국은 영원히 우리 클로얀 왕국을 손에 넣지 못할 것이야.”

그는 단도를 꺼내 스스로 목을 찌르려 하며 외쳤다.

“클로얀 왕국 만세! 모리나 왕녀 만세!”

그런데 그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깐! 멈추세요!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

마들렝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그가 노리던 마리가 산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가 멈칫한 틈을 타 근위 기사들이 재빨리 제압했다. 바닥에 거칠게 쓰러진 마들렝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만전을 기했건만 결국 그녀의 손바닥에서 놀아나기만 한 것이다.

“날 잡아 심문해도 소용없다.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을 테니. 그냥 죽여라.”

마들렝은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마리는 그 증오 가득한 눈빛에 한숨을 내쉬었다. 적대감이 클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도 더 심했다.

“폰틸 남작님.”

“네, 각하.”

그녀의 부름에 근위 기사단 부단장 폰틸 남작이 마들렝에게 다가갔다. 자신을 심문하려는 거라 생각한 그는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심문해도 소용없어! 헛수고니 그냥 죽여라!”

“누구 좋으려고? 순순히 죽일 수는 없지.”

차갑게 이야기한 폰틸 남작은 쓰러진 마들렝을 향해 몸을 굽혔다. 곧 닥칠 고통에 마들렝이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예상외의 일이 일어났다. 폰틸 남작이 피가 흐르는 마들렝의 종아리에서 쇠뇌를 뽑더니, 붕대를 감아 치료를 한 것이다.

“뭐, 뭐 하는 거지?”

마들렝은 생각지도 못 한 상황에 놀라 폰틸 남작을 바라보았다. 폰틸 남작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으르렁거렸다.

“각하께 감사드려라. 감히 각하의 목숨을 노린 네놈의 목을 당장 베어버리고 싶지만 각하께서 원하지 않으시니.”

“……그게 무슨?”

마들렝은 의아한 표정으로 마리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건지 알 수 없었다.

“전 당신을 처형할 생각이 없어요. 그렇다고 심문할 생각도 없고요.”

“그럼 날 어쩔 생각이지?”

“전 당신을 이대로 그냥 놔줄 생각이에요.”

“……뭐?”

마들렝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목숨을 노린 암살자를 그냥 놔준다고? 믿을 수 없었다.

“무슨 속셈이냐? 설마 목숨을 살려 준다고 해서 내가 감사한 마음을 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그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대신 당신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무슨?”

“바르한 백작께 제 이야기를 전달해 주세요.”

“……!”

바르한 백작. 클로얀 왕국이 건재할 적 왕실 기사단의 단장이자, 현재는 반 제국 활동을 이끄는 주동자였다. 워낙 은밀히 은신하고 있어 제국은 전혀 그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네 말을 들어줄 거라 생각하느냐?”

“안 들어주면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니 가급적 전해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며 그녀는 말했다.

“제가 전하고 싶은 말은 이거예요. 나, 마리 폰 힐데른은 바르한 백작과 만남을 요청합니다. 바로 클로얀 지방의 평화와 번영을 상의하기 위해.”

“……!”

마들렝의 얼굴이 황당하게 변했다. 지금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제국과 왕실 기사단이 평화와 번영을 위한 회동을 가지자고? 농담도 이런 농담이 없었다. 하지만 마리의 얼굴은 진중했다. 빈말이 아닌 것이다.

“놓아주세요, 남작님.”

“네, 각하.”

그들은 정말로 마들렝을 풀어주었다. 마들렝은 정말로 자신을 살려 주는 건지 엉거주춤하다가 후다닥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며 폰틸 남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심문해서 왕실 기사단의 정체를 밝히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정체를 밝힌 후 토벌하는 것이 제일 나아 보입니다만.”

마리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건 하책이었다.

“저들을 토벌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그렇게 강압적으로 해결해 보았자, 제2의 왕실 기사단을 만들 뿐이에요. 보다 근본적으로 저들의 마음을 얻어야 해요.”

“쉽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마리도 안다. 쉽지 않은 일이란 것을. 폰틸 남작의 말처럼 힘으로 토벌하는 것이 훨씬 손쉬울 것이다.

‘그래도 그건 안 돼. 힘으로 토벌하면 분명 제2의 왕실 기사단이 나타날 거야.’

힘으로 누르면 또 다른 반발을 부를 뿐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했다. 쉽지 않겠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노력해 보기로 다짐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안정되어 라엘에게 떳떳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싶었으니까.

‘이제 마지막 관문이야. 폐하,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마리는 시선을 돌려 황궁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빨리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다.

그 뒤 마리는 정무를 보며 왕실 기사단의 연락을 기다렸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넘게 지났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바르한 백작이 연락해 올 거라 생각하십니까?”

폰틸 남작은 회의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마리는 솔직히 대답했다. 그녀가 마음으로 접근하려고 한다 해서 상대방도 그러라는 법은 없으니까.

‘사실 그간 왕실 기사단의 행적을 보면 내 제의에 응할 가능성은 낮아.’

전임 총독의 목숨을 뺏은 것도 왕실 기사단이었다. 오로지 모리나 왕녀만을 추종하며 제국에 적개심을 불태우는 그들이 마리의 의견에 따를 가능성은 낮았다.

‘그래도 기다려 보자.’

마리는 클로얀 지방을 위해 정무를 보며 연락을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연락은 전혀 없었고, 긴장감만 점점 커졌다. 제안을 무시했다는 것은 앞으로도 그녀를 계속 암살하려 할 거라는 뜻이었으니까.

‘역시 쉽지는 않구나.’

마리는 씁쓸하게 웃었다. 의연한 척하고 있지만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니 힘들단 마음이 들었다. 칼날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두고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마리는 그럴 수는 없었다. 중간중간 라엘에게서 오는 편지만이 유일하게 그녀의 숨통을 트이게 해주었다.

“라엘 폐하.”

여전히 자신을 염려하는 내용으로 가득한 서신을 보며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마리는 그가 염려할까 봐 자신이 암살 위협을 받고 있음을 정확히 알리지 않았다. 왕실 기사단에게 암살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을 알면 그가 자신을 이곳에 놔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총독인 그녀가 정보를 제한하니 거리가 먼 황궁에서는 정확한 사정을 알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정확한 사정을 모름에도 라엘의 편지에는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급한 일이 마무리되면 당장에라도 달려올 기세였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저 힘낼게요.’

마리가 편지를 갈무리하는 순간이었다. 하녀가 머뭇거리며 마리에게 다가왔다.

“각하, 편지가 한 통 왔습니다.”

“편지가? 어디서?”

“그게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아서.”

마리는 의아한 마음으로 편지를 펼쳤다. 그리고 화들짝 눈이 커졌다.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내가 지정한 장소로 나오도록.

왕실 기사단의 바르한 백작이 분명했다. 그가 드디어 답변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어진 내용을 본 순간 뻣뻣이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홀로 나오도록. 다른 인원을 동행 시 대화는 없다.

마리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나 혼자 나오라고? 말도 안 되는…….’

저들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다. 홀로 그들에게 가는 것은 사자 떼에 몸을 던지는 것보다 위험한 짓이었다. 마리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편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고뇌에 물들었다.

* * *

달조차 구름 속에 숨은 늦은 밤. 마리는 침대에서 가만히 눈을 떴다. 옷을 입은 그녀는 조용히 기척을 내지 않고 총독부를 벗어났다. 지금 그녀는 왕실 기사단의 바르한 백작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들이 요구한 대로 홀로. 폰틸 남작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무리 최대한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는 그라도 허락할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직감했다. 바르한 백작의 제안을 거절하면 다시는 평화로운 대화를 시도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즉, 이건 바르한 백작의 시험이었다. 자신의 진정한 뜻을 확인하려는.

‘물론 함정일 수도 있지. 눈엣가시인 나를 없애려는.’

그녀는 허리춤에 챙긴 숏 소드를 어루만졌다. 혹시나 해서 챙기긴 했지만, 그들이 그녀를 해하려 든다면 이런 무기 따위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바르한 백작은 날 해하지 못할 테니까.’

마리가 이렇게 홀로 가는 것은 무모한 용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바르한이 자신을 건들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난 단순히 ‘마리’로서 그를 만나려는 게 아니니까.’

전 왕실 기사단은 모리나 왕녀를 찾는 집단. 즉, 바로 그녀를 찾는 집단이다.

‘그러니 그들은 날 해하지 못해.’

마리는 굳은 표정으로 생각했다. 그렇다. 그녀는 오늘 왕실 기사단의 대표인 바르한 백작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생각이었다. 그러니 그들은 그녀의 손끝 하나 건들지 못할 것이다.

‘물론 난 그들이 바라는 모리나 왕녀가 아니야.’

그들이 바라는 모리나 왕녀는 바로 왕국을 재건할 존재이다. 반면 마리는 왕국 재건에 뜻이 없었다. 라엘과의 일 때문에도 그렇지만, 꼭 왕국을 재건하는 것이 백성들을 위한 길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 문제를 그들과 담판 지어야 해. 모리나 왕녀로서. 그래야만 그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어.’

마리는 각오를 굳히며 약속 장소로 나아갔다.

얼마 뒤 약속 장소에 도착한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바르한 백작이 지정한 장소는 수도 인근에 위치한 저택이었다. 저택은 오랫동안 방치돼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시커멓게 열려 있는 문이 마치 괴물의 입처럼 느껴졌다.

‘가자.’

마리는 홀로 호랑이를 잡으러 가는 심정으로 저택 안에 발을 디뎠다.

저벅.

그녀가 그렇게 발을 디디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등불이 켜지며 사위가 화악 하고 밝아졌다.

“……!”

그녀가 흠칫하여 몸을 굳히는 순간,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혼자서 왔군.”

먼지와 거미줄로 덮인 계단 위에 한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이제 30살쯤 되어 보이는 강직한 인상의 미남이었다. 미간 사이에 한줄기 검상이 남아 있었다.

‘바르한 백작!’

마리는 곧바로 남자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바로 저자가 왕실 기사단의 단장인 바르한 백작이었다.

“마리 폰 힐데른이라고 해요.”

마리는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말했다. 바르한 백작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눈동자에는 서늘한 적의가 흐르고 있었다. 그건 그의 주위에 서 있는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살이 에일 듯한 살의가 느껴졌다. 잠시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 당장에라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기였지만, 마리는 의연하려고 노력했다. 기세에 밀리는 순간 모든 게 끝이었다.

“넌 내가 네 목숨을 취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온 것인가?”

이윽고 바르한 백작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그렇다면 오산이다. 충성을 바치던 왕가가 너희 제국의 손에 멸망한 순간, 나는 명예를 버리기로 다짐했다. 이제 내 삶에 남은 것은 왕가의 마지막 후예인 모리나 왕녀 전하밖에 없다. 그분을 위해서라면 네 목숨 따위는 얼마든지 뺏을 수 있다.”

그 목소리에는 진득한 살의가 깃들어 있었다. 마리는 그가 정말로 자신의 목숨을 뺏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당연히 그런 순진한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어째서 홀로 나타난 거지?”

바르한 백작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기색이었다. 홀로 이곳에 나오라 편지를 보냈지만, 그녀가 따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자살행위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왔다. 제국의 예비 황후라는 지고한 신분임에도 죽음을 무릅쓰고. 도대체 어째서?

“위험을 무릅써야 할 정도로 절박하기 때문이에요.”

“무엇이?”

“당신들의 마음을 설득하는 것이. 그래서 클로얀 지방이 진정한 안정을 찾아, 왕국민들이 행복을 찾게 하는 것이 그만큼 절박하기에 목숨을 건 도박을 한 것이에요.”

“……!”

전혀 생각지 못한 그녀의 답에 바르한 백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꾸민 말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긴장에 희미하게 떨리는 소녀의 눈동자에는 정말로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바르한 백작은 혼란스러웠다.

“이해할 수가 없군.”

“…….”

“그래, 한번 이야기나 들어보지. 미리 말해두지만, 제국에 고개를 숙이라는 말을 하면 당장 네 목을 치겠다. 우리가 충성을 바칠 대상은 모리나 왕녀 전하밖에 없어.”

모리나 왕녀를 찾는 완고한 말에 마리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제국에 충성을 바치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다만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을 뿐이에요.”

“할 이야기라고?”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도 될까요?”

“말해봐라.”

“당신들은 왜 여전히 모리나 왕녀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이지요? 그저 전(前) 왕가에 대한 충성인가요? 아니면 클로얀 왕국민을 위한 것인가요?”

그 물음에 왕실 기사들의 기세가 단번에 흉흉해졌다. 바르한 백작은 당장에라도 달려들 기세인 기사들을 손을 들어 만류 후 불쾌한 어조로 답했다.

“어리석은 질문이군. 당연히 둘 다다. 우리가 충성을 바칠 대상은 왕가뿐이고, 모리나 왕녀를 다시 추대하는 것만이 이 왕국을 진정으로 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답에 마리는 바르한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만약 모리나 왕녀가 왕가의 재건을 바라지 않는다면요?”

“……!”

전혀 생각지도 못 한 질문에 바르한을 비롯한 기사들이 움찔한 표정을 지었다. 모리나 왕녀를 통해 왕가를 재건하려고만 했지, 그녀의 의사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난 왕가의 재건 따위 바란 적 한 번도 없어.’

마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모르겠다. 왕가의 재건을 바라는 왕국민들이 그녀보고 무책임하다고 손가락질할지는.

하지만 마리는 클로얀 왕가의 일원으로서 행복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통원의 궁에 유폐되어 고통만 받았을 뿐 왕가의 가족들과 정을 나눈 적도 한 번도 없었고, 그녀에게 온정의 손길을 베푼 이도 아무도 없었다. 어렸던 그녀는 왕궁에서 오로지 고독과 싸워야만 했다.

‘그런 나에게 무작정 왕가 재건의 책임을 지라고 하는 건 너무 부당한 이야기 아닐까?’

그때, 바르한 백작이 싸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무례한 이야기를 하는군. 왕가의 고귀한 피를 이은 왕녀 전하가 그럴 리가 없다. 그분만이 우리 클로얀 왕국을 진정한 부흥으로 이끌 것이야!”

마리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면 왕가를 재건하는 것은 진정으로 왕국의 백성들을 위하는 것인가요?”

“뭐? 그야 당연히…….”

“정말로 그런가요? 정말로 왕국민들이 원하는 일인가요?”

마리는 이를 악물며 날카롭게 물었다.

“아니면 주류 기득권에서 밀린 당신들 귀족들이 원하는 일은 아닌 건가요?”

그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한 기사가 분노로 손을 떨며 말했다.

“이년이! 뚫린 입이라고. 당장 목을……!”

하지만 그때 바르한 백작이 기사를 말렸다.

“그만.”

“하지만 단장님! 저런 모욕을 듣고만 있을 수가!”

“엄밀히 말하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

나직한 음성에 기사들이 흠칫 멈추어 섰다. 바르한은 형형하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마리를 노려보았다.

“제국의 예비 황후라더니. 역시 보통은 아니군. 그래, 네 말이 맞을 수도 있지. 민초들이야 배불리 먹기만 하면 될 뿐, 누가 자신을 다스리는지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니까.”

아직 근대적 국가관이 형성되기 전이다. 귀족이 아닌 일반 백성들은 생각보다도 국가에 대한 개념이 옅었다.

“그런데 그래서?”

바르한은 천천히 마리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의견에 동조한 것과 달리 차갑기 그지없는 얼굴이라 마리가 주춤 뒤로 물러서는 순간.

차앙!

그가 검을 꺼내 그녀의 목에 겨누었다.

“…….”

마리는 자신의 목에 와 닿은 금속의 감촉에 침을 꿀꺽 삼켰다. 차가운 예기가 검날을 타고 흘렀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지? 이미 멸망한 왕가를 재건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너희 제국을 따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건가?”

“…….”

“그래, 알고는 있다. 너희 제국이 왕국민들에게 생각보다 좋은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이전 왕가보다 너희 제국이 왕국민들을 더 배부르게 할지도 모르지.”

그 순간, 바르한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우리는 너희를 믿을 수 없다. 지금이야 유화책을 베풀고 있다지만, 시간이 지나면 너희 제국이 어떻게 변할지 안단 말이냐.”

바르한은 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린 침략자인 너희를 믿을 수 없다.”

마리는 잠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만약 신뢰할 수 있다면요?”

마리가 불쑥 물었다.

“뭐?”

“만약 제국을 신뢰할 수 있다면, 아니, 제국과 왕국이 진정으로 하나가 될 방법이 있다면. 그때도 무작정 제국을 반대할 건가요?”

바르한은 고개를 저었다.

“제국과 왕국이 진정으로 하나가 된다고?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마리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 가능해요.”

“뭐?”

“제가 있으면 가능한 일이에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네가 있으면 가능하다고?”

“네.”

“하!”

바르한은 그냥 그녀의 목을 베어버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손에 힘만 주면 끝이었다. 그렇게 마음먹고 소녀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봤을 때였다. 결연한 소녀의 얼굴을 본 그는 알 수 없는 서늘함을 느꼈다.

‘뭐지?’

그 순간, 마리가 말했다.

“바르한 백작, 긴밀히 할 말이 있으니 주변을 물러 주세요.”

주위 기사들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어디서 감히! 단장님! 그냥 바로 목을 치십시오!”

하지만 바르한의 반응이 의외였다.

“물러가라.”

“네?”

“물러가라고!”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기사들은 서로를 바라보다 주춤주춤 저택에서 물러났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바르한은 마리를 노려보았다. 이윽고 마리가 입을 열었다.

“바르한 백작, 나를 보세요.”

“……무슨?”

마리가 재차 말했다.

“백작. 내 얼굴을 보세요. 이 얼굴을 보고 떠오르는 인물이 없나요?”

바르한 백작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마리의 얼굴을 살폈다. 옅은 갈색 머리, 갈색 눈, 조그만 얼굴에 선한 인상의 귀여운 외모. 그렇게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생각지도 못 한 이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가 마음속 깊이 바라고 있는 바로 그 인물이었다.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바르한은 강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그의 머릿속에 저 소녀와 똑 닮은 인물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마리는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백작은 알겠죠. 스치듯 지나가긴 했어도, 우리는 과거에 분명 만났던 적이 있으니까요. 바로 이 클로얀 왕국의 왕성에서.”

“……!”

바르한 백작의 눈이 파도를 만난 듯 요동쳤다. 그녀의 말을 듣자 수면 아래로 깊게 가라앉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왜 보자마자 못 알아봤던 것일까? 이렇게나 닮았는데.

“서, 설마…… 정말로 당신이?”

“맞아요.”

마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이름은 마리 폰 힐데른…… 동시에 모리나 드 브란데 라 클로얀이에요.”

클로얀 왕국의 고귀한 핏줄, 모리나.

“제가 바로 당신이 그토록 찾던 모리나 왕녀예요.”

그렇게 마리, 아니, 모리나는 바르한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 * *

마리는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총독부로 돌아왔다. 폰틸 남작은 중간에야 그녀의 부재를 깨닫고 사색이 되어 찾고 있었다.

“각하! 도대체 어디에 있으셨던 겁니까?!”

“아, 잠시 볼일이 있어서 다녀왔어요.”

“다음부터는 제발 말씀을 미리 해주십시오. 무슨 문제라도 생겼는지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폰틸 남작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창백한 안색을 보니 마음고생을 보통 한 것이 아닌 것 같아, 마리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네, 죄송해요.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그렇게 침실에 들어간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어떻게 될까?’

마지막 바르한 백작의 반응을 떠올렸다.

“다, 당신이…… 정말로…… 왕녀 전하……?”

바르한 백작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모리나 왕녀가 생각지도 못 한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니까. 충격이 어마어마하리라.

‘괜한 모험을 한 것일까?’

사실 바르한에게 정체를 밝히는 것은 그녀로서도 굉장한 위험을 감수한 것이었다. 일단 충격받은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미지수였다.

‘난 그들이 바라던 모리나 왕녀가 아니니까.’

그래, 그녀는 그들이 바라는 모리나 왕녀가 아니었다. 그렇게 될 수도 없었고,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았다.

‘아까 전 분노해 검을 날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사실 그녀는 불의의 사태도 각오하고 있었다. 실의에 빠진 그가 돌발 행동을 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난 왕가의 재건을 바라지 않아. 내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하나. 클로얀 왕국민이 행복해지는 것뿐이야.’

클로얀 왕국민들이 다시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 그게 왕녀로서 그녀가 이루려는 책임이었다.

‘꼭 왕가를 재건해야 클로얀 왕국민들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니까. 아니, 사실 왕국민들이 행복해지는 것과 왕가의 재건은 크게 상관이 없어.’

그녀의 생각이 옳았다. 사실 어느 왕조가 다스리느냐는 백성들의 행복과 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바르한 백작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어.’

그녀의 뜻을 따라 준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가능성도 높았다. 특히 마리는 마지막 순간 바르한이 보인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그의 눈빛은 고대하던 왕녀를 만났다는 기쁨보다는 큰 좌절에 싸여 있었다.

‘그의 뜻이 변하길 바랄 수밖에.’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 * *

그 뒤 일주일이 흘렀지만, 바르한 백작에게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생각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겠지.’

마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정무에 몰입했다. 이제 곧 여름이 지나고 가을 추수철이 다가온다. 그만큼 그녀가 신경 써야 할 일도 많았다.

‘폐하께서도 바쁘게 지내고 계시겠지?’

서류에 파묻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니 라엘이 생각났다. 그도 자신처럼 서류에 파묻혀 있을 게 분명했다.

‘내가 없다고 식사를 거르거나 하진 않겠지? 불면이 다시 악화하면 안 될 텐데.’

함께 있지 않으니 자꾸만 이런저런 걱정이 들었다. 그리고 그 걱정의 끝은 항상 같았다.

‘빨리 보고 싶다. 잠깐이라도 보러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마리는 푹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 그리움이 덜해질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가슴이 아플 정도로 커질 뿐이었다. 그냥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의 품으로 달려가고 싶을 정도였다.

‘정신 차려, 마리. 할 일이 많잖아.’

마리는 휙휙 고개를 저은 후 서류에 집중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린 남작이 집무실 문을 노크했다.

“각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네. 들어오세요.”

곧 문이 열리며 여인처럼 예쁜 얼굴의 린 남작이 웃음을 머금은 채 들어왔다. 마리는 그런 린 남작을 보자 과거 몇몇 일이 떠오르며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맑게 웃으며 들어오는 린 남작 자체에는 전혀 이상한 점이 없었다.

“네, 무슨 일이시죠? 예산 문제는 다 처리해 놓았어요.”

“아, 예산 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뜻밖의 소식이 들어와 전해드리러 온 것입니다.”

마리는 의아한 낯빛을 했다.

“뜻밖의 소식이라뇨?”

“클로얀 지방 북쪽의 대영주인 하워드 후작이 중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진료를 본 의사 말로 오래 버티지는 못 할 거라고 하더군요.”

“……!”

마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워드 후작이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는 것이었다. 과거 왕국의 대장군이었던 하워드 후작은 클로얀 왕국의 뿌리 깊은 거목으로, 바르한 백작의 검술 스승이기도 했다.

“전 이게 기회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아무리 중병이라도 각하의 의술이면 치료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며 린 남작이 말했다.

“하워드 후작은 왕국민 모두에게 뿌리 깊은 존경을 받는 인물. 만약 그를 치료해 낼 수만 있다면 왕국민들은 물론, 왕실 기사단의 마음을 돌리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마리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린 남작의 말은 모두 옳았다. 하지만 마리는 이게 단순히 좋은 기회가 아님을 깨달았다.

‘병을 치료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만약 치료하다 실패하면? 반발만 살 것이야.’

의사가 누구도 치료 못 할 거라 했다던 중병이다. 아무리 꿈속의 능력을 받은 그녀라도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일 리가 없었다.

“하워드 후작의 병은 무엇이지요?”

린 남작이 답했다.

“배 깊은 곳의 농양이라고 합니다. 이 부위라고 하더군요.”

그러며 린 남작은 배 가운데를 가리켰다. 꿈속의 능력을 받은 그녀는 단번에 후작이 앓는 병의 정체를 깨달았다.

‘췌장 농양일 가능성이 높아! 수술을 해야 해.’

마리의 눈동자가 더욱 깊어졌다. 후작의 병은 수술을 통해 치료하면 된다. 그러나 이 시대의 의술로는 그 수술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후복막 깊은 곳에 농양이 자리해 굉장히 큰 수술을 해야 해. 수술하다가 사망할 확률이 훨씬 높아.’

만약 그녀가 수술을 시도했는데 수술 중 사망한다면 정치적 후폭풍은 끔찍하리라. 그녀가 무겁게 생각할 때, 린 남작이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각하?”

* * *

그때, 저 먼 동쪽에 위치한 동제국의 황궁. 황제 라엘은 굳은 얼굴로 편지를 읽고 있었다.

존경하옵는 황제 폐하께.

폐하의 충실한 신하 마리 폰 힐데른 자작이.

그가 읽고 있는 편지는 바로 마리가 보낸 것이었다. 격식을 잔뜩 갖추긴 했지만, 편지의 내용에는 그를 향한 마리의 마음이 잔뜩 담겨 있었다.

“하아.”

편지를 읽은 그는 돌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십니까, 폐하? 혹시 예비 황후마마께 무슨 일이라도?”

알몬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문제는 없다. 모든 일이 순탄하다고 하는군.”

라엘은 편지지의 내용을 다시 읽으며 말했다.

“그러면 왜 한숨을 쉬시는지요?”

“그래도 걱정되어서.”

라엘은 괴로운 얼굴을 했다.

“혹시라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미칠 듯이 걱정돼.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심정이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그녀에게 문제라도 생긴다면?’

이미 그녀 없는 삶은 상상도 못 하게 된 라엘이다. 이렇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데, 실제로 문제가 생기면 어떨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내가 곁에 있어야 하는 건데.’

원래 그는 곁에 머물며 철통같이 그녀를 지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최근 제국 주변이 심상치 않아 도저히 황궁을 떠날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역시 애초에 그녀를 보내는 것이 아니었어.’

라엘은 하루에 몇 번을 반복하는지 모를 후회를 하였다.

‘마리. 정말 괜찮은 거냐? 아무런 일 없는 게 맞는 거지?’

그녀가 보내는 편지에는 괜찮다고, 염려하지 말라는 내용만 가득했다. 하지만 라엘은 안심이 되지 않았다. 노파심일 수도 있지만,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왕실 기사단, 그놈들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잠잠하다고. 정말로?’

결국, 라엘은 이렇게 말했다.

“오른을 불러라.”

“알겠습니다.”

곧 오른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클로얀 지방의 상황을 따로 조사하도록.”

오른의 눈에 의아함이 퍼졌다.

“총독부에서 계속해서 정보를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나 총독부에서 놓치는 정보가 있을까 해서 그렇다.”

“네, 알겠습니다. 바로 착수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오른이 나가자, 라엘은 괴로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마리가 있을 클로얀 왕국이 있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어서 빨리 그녀와 영원히 하나가 되어 다시는 이렇게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 * *

한편 그때 마리는 클로얀 지방의 북쪽, 하워드 후작의 영지로 향하고 있었다. 바로 하워드 후작에게 생긴 중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얼핏 들어도 위험한 수술일 것 같은데.”

폰틸 남작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각하께서는 선의로 나서는 것이지만, 결과가 안 좋을 시 못된 의도를 가진 것들이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릴까 걱정입니다.”

마리도 남작의 걱정에 동의했다.

하워드 후작. 과거 클로얀 왕가를 섬기던 대귀족으로 왕국민들의 뿌리 깊은 존경을 받고 있다. 제국이 왕국을 점령한 후에는 저항의 의지로 영지에 칩거 중이었다. 왕실 기사단 단장인 바르한 백작의 스승이기도 하니, 그를 살려 낼 수 있으면 왕국민들의 마음을 얻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하지만 성공 시 얻을 이득이 크다는 것은, 실패 시 감수해야 할 위험도 크다는 뜻이었다.

‘잘못했다가는 내가 손대서 하워드 후작이 사망한 것으로 소문이 날 수도 있어. 아니, 반드시 그렇게 소문이 날 거야.’

문제는 이 수술이 성공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이었다. 마리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정했다.

“그냥 쓸데없는 생각하지 않으려고요.”

“네, 그게 무슨?”

폰틸 남작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저런 정치적 사항을 다 떠나, 하워드 후작은 죽음의 위기에 처한 환자니 그것만 생각하려고요.”

그래, 그게 마리의 결론이었다. 한참을 정치적 손익을 가늠하던 그녀는 순간 이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최초에 그녀가 능력을 원했던 것은 남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삶을 살기 바랐기 때문이다. 지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고, 그녀에게는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마리는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군요.”

폰틸 남작은 결과가 걱정되긴 했지만, 마리다운 결론이라 생각했다.

“도착했군요.”

마리는 마차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산 밑에 작은 고성이 보였다. 하워드 후작의 영지였다.

“총독 각하를 뵙습니다!”

마리가 후작의 성에 도착하자 수많은 사람이 몰려와 인사를 올렸다. 하워드 후작의 중병 소식에 임종을 지키러 몰려온 클로얀 지방의 귀족들이었다.

‘굉장히 많구나.’

마리는 놀란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에게 인사를 하러 나온 왕국의 귀족만 수십은 되어 보였다. 그것도 하나하나가 이름 높은 귀족들이었다.

‘후작이 왕국 귀족들의 정신적 구심점이라니.’

제국에 점령당했다고 해서 왕국의 귀족이 모두 물갈이되는 것은 아니다. 제국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보통 이전의 영지를 인정해 주었는데, 사실 하워드 후작은 그대로 영지를 인정하기에는 위험성이 높은 인물이었지만 왕국민들의 존경이 워낙 깊어 건드리지 못한 경우였다.

“그런데 각하께서 이곳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귀족들이 마리에게 물었다. 그런 그들의 눈동자에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의혹, 경계심, 제국의 총독인 마리에 대한 적대감 등. 어쨌든 호의적인 감정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저 중 몰래 왕실 기사단에 끈을 대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속 부담감이 커졌다. 하지만 마리는 속으로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하워드 후작을 뵈러 왔어요.”

“그렇습니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마리는 폰틸 남작을 대동하여 성 안에 들어갔다. 후작의 성은 검소한 성품이 그대로 반영돼, 삭막할 정도로 장식이 없었다. 마리는 복도를 걸어 가장 깊숙한 곳에 방 앞에 도착했다.

“이곳입니다. 후작 각하께서는 상태가 위중해 의식이 없으십니다. 현재 양아들께서 곁을 지키고 계십니다.”

고개를 끄덕인 마리는 방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

누워 있는 노년의 남자 옆에 생각지도 못 한 인물들이 있었던 것이다. 왕실 기사단 단장 바르한 백작과 왕실 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왕실 기사단!”

차앙!

폰틸 남작은 바르한 백작을 알아보고 놀라 검을 꺼내 들었다. 생각지도 못 한 곳에서 적들을 만난 것이다. 왕실 기사단의 기사들도 마주 검을 꺼내 들었다. 병실이 순식간에 흉흉한 살기로 뒤덮였다. 금방이라도 피가 튀려는 위기의 순간!

“잠깐! 병실이에요. 멈추세요!”

“멈춰라!”

마리였다. 그런데 뜻밖의 목소리가 하나 더 있었다. 바르한 백작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기사들을 만류한 것이다.

“단장님? 어째서?”

기사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바르한 백작을 바라보았다. 폰틸 남작도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저들은 늘 마리를 암살하려던 왕실 기사단이다. 절호의 기회를 만난 것일 텐데 만류하다니?

“…….”

하지만 바르한 백작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무거운 눈으로 마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강직한 얼굴에 혼란, 괴로움, 원망 등의 감정이 한데 섞여 지나갔다. 그 자리에서 오로지 마리만이 바르한의 감정을 이해했다. 모리나 왕녀이자 제국의 예비 황후인 자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괴롭고 혼란스러운 것이리라.

그때 기사 한 명이 소리를 높였다.

“단장님, 당장 저년의 목을 쳐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바르한이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닥쳐라! 저년이라니? 네놈이 죽고 싶으냐!”

그렇게 외친 그는 흠칫 멈추어 섰다. 모리나 왕녀에게 막말하는 것을 보자 반사적으로 분노한 것이다. 바르한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수하에게 둘러대듯 말했다.

“그, 그래도…… 너무 심한 말은 좋지 않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왕실 기사단이다. 품위를 지켜라.”

“……네.”

“어쨌든 나가 보도록. 아버지의 임종이 임박했는데, 소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다.”

왕실 기사단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러섰다. 마리도 폰틸 남작을 내보냈다. 단둘만이 남게 되자, 바르한 백작이 마리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왕실 기사단의 바르한이 위대한 왕가의 후예, 모리나 왕녀 전하를 뵙습니다.”

왕족을 향한 극례였다. 바르한은 그녀를 모리나 왕녀로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인정했다고 해서 눈빛의 혼란이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당연했다. 모든 것을 바쳐 그녀를 기다려 왔는데, 제국의 예비 황후가 되어 돌아오다니. 더구나 그녀는 왕가의 재건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의 입장에서 이런 날벼락도 없으리라. 마리는 그의 눈빛에 담긴 혼란과 원망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나세요, 백작.”

“네, 전하.”

“백작께서 하워드 후작의 양아들인가요?”

“그렇습니다. 후작 각하의 자제분이 없어 제가 임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바르한의 말투는 지극히 공손했지만 마리는 그가 자신을 마음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과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 왕녀 전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거라 생각해요.”

바르한의 눈에 의혹이 깃들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설득하려 들 거라 예상했었다.

“오늘은 백작에게 용무가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면 이곳에는 어째서?”

“말씀드렸다시피 하워드 후작을 뵈러 온 것이에요.”

그녀의 말에 바르한의 눈에 슬픔이 깃들었다.

“아버님을 말입니까? 그렇군요.”

바르한은 의식을 잃고 있는 하워드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 괴로운 눈빛에 마리는 후작에 대한 바르한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바르한은 하워드 후작을 말뿐인 양아버지가 아닌, 정말로 친아버지와 다름없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 아버지가 그토록 기다리던 모리나 왕녀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바르한은 하워드 후작의 손을 꾸욱 붙잡았다. 하지만 어떤 자극을 주어도 후작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바르한은 복받쳐 오는 슬픔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받아들이는 게 쉽지가 않군요. 친아버지와 다름없는 분인지라.”

“…….”

“이렇게 돌아가실 분이 아닌데. 클로얀을 위해 하셔야 할 일이 많은 분인데. 갑자기 이런 병에 걸려서.”

바르한은 한탄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마리가 입을 열었다.

“백작, 하나만 묻겠어요. 만약 후작의 병을 치료할 방법이 있다면 시도해 볼 건가요?”

바르한은 씁쓸히 고개를 저었다.

“불행히도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모든 의사가 손을 놓은 지 오래입니다. 히포크라테스가 다시 돌아와도 아버지를 살리는 건…….”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였다. 바르한은 우뚝 입을 다물었다. 클로얀 지방의 수도, 커먼성에서 떠도는 그녀에 대한 소문 중 하나를 떠올린 것이다. 그녀가 불가해한 경지의 의술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설마…… 전하께서 오신 것이?”

마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후작을 치료하기 위해 온 것이에요.”

그녀는 굳은 의지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제가 하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수술이에요. 하지만 저는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후작을 치료하고 싶어요.”

“……!”

바르한의 눈빛이 흔들렸다. 마리는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저를 믿고 아버지의 수술을 맡겨 주실 수 있으신가요?”

* * *

바르한은 고민하였으나 수술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수술이 굉장히 위험하긴 했으나, 가만히 놔두어도 사망하는 상태였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다면 시도해 보는 것이 옳았다. 다만 수술 자체가 너무 위험한 것이 문제였다.

“위 일부, 소장의 일부와 췌장을 자르고 다시 연결한다는 말입니까?”

“네, 농양은 수술적으로 깨끗이 걷어내면 치료할 수 있어요. 다만 후작의 경우에는 워낙 깊은 곳에 문제가 생겨 저 장기들을 잘라 내지 않으면 접근할 수가 없어요.”

바르한은 마리의 설명을 듣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슨 수술을 한다는 건지 이해도 되지 않았다.

한편 마리도 안색이 밝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성공 확률보다 실패 확률이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의지를 세웠다.

‘반드시 살리겠어.’

그렇게 성안의 의무실에 마련된 방에서 수술하려고 들어가는데 바르한이 그녀에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어째서 이런 무리한 일을 하려는 것입니까? 제 마음을 돌리려고 그러는 것입니까?”

“…….”

“물론 저로서야 하해와 같이 감사한 일이지만, 아버지를 치료하는 것과 별개로 제 뜻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알고 있어요.”

“그러면 어째서?”

마리는 수술 준비를 하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하워드 후작을 치료함으로써 백작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던 의도가 없지는 않았어요.”

바르한은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건 아니라고 결론 내렸어요.”

그녀는 곧 그 의도를 접었다. 죽어 가는 환자를 통해 무언가를 의도한다는 것이 옳지 않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째서?”

“그냥 치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예요.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슬퍼하고 백작도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위험한 수술이라도 어떻게든 후작을 치료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

바르한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는지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듣던 이야기와 똑같으시군요.”

바르한은 그녀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황궁의 천사. 성인 힐데르가르트의 재림. 제국의 성녀.

모두 동제국에서 마리 폰 힐데른이 얻은 이름들이다. 그리고 과거 모리나 왕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바로 클로얀 왕국의 얼굴 없는 성녀. 그때 그녀가 보여 준 모습은 지금 그녀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비록 정치적 견해는 완전히 달랐지만, 타인을 위하는 모습은 바르한이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모리나 왕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수술 시작하겠어요. 준비해 주세요.”

마리는 다른 의사들과 함께 수술대에 섰다. 그녀가 메스를 움직였다. 피가 튀어 오르며 삶과 죽음이 갈리는 수술이 시작되었다. 바르한은 굳은 얼굴로 그녀의 수술 장면을 지켜보았다.

예상대로 수술은 쉽지 않았다. 애초에 고난도 수술이었고, 수술 환경도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안 좋았던 것은 하워드 후작의 상태였다. 수술을 진행하며 후작은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맞았고, 마리는 이를 악물며 그 난관을 헤쳐 나갔다.

“거기, 지혈용 실 주세요!”

“시야 확보해 주세요! 시간이 부족해요!”

수술 보조는 왕성에서 동행한 최고 실력의 의사가 했다. 그렇게 수술은 장장 7시간이 넘게 진행되었고, 숱하게 많은 위기를 넘으며 마리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그리고 이윽고 하얗게 지친 얼굴로 마리가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술을 끝내는 선고였다.

“성공…… 한 것입니까?”

왕실 기사단의 단장이자 후작의 양아들 바르한 백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경과를 지켜보기는 해야겠지만, 아마 큰 무리 없이 회복할 수 있을 거예요.”

“……!”

바르한 백작의 눈이 파르르 흔들렸다. 기적적으로 성공한 것이다. 그를 흔드는 것은 단순히 아버지가 살아난 것에 대한 감사만이 아니었다. 그는 수술의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그렇기에 그녀가 7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얼마나 필사적으로 노력했는지, 얼마나 간절히 아버지를 살리려 매달렸는지 알고 있었다. 아무리 딱딱하기 그지없는 바르한이라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바르한은 무릎을 꿇으며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마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할 뿐이었다.

“아니에요. 수술이 잘 끝나서 저도 기뻐요.”

그녀는 하루 정도 후작을 살핀 후, 상태가 안정되자 동행한 의사에게 추가적인 치료를 맡기고 커먼성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랐다. 그런데 떠나기 직전, 바르한이 굳은 얼굴로 그녀를 쫓아왔다. 무언가 그가 할 말이 있음을 직감한 마리는 주위를 무르고 독대했다.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떠나시는 겁니까?”

마리는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바르한이 이를 악물며 재차 물었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떠나는 것입니까?”

마리도 입을 열었다.

“해야 할 말은 지난번에 다 했다고 생각해요.”

“…….”

“저는 백작과 향하는 방향이 달라요. 그래도 클로얀 왕국민들을 위하는 마음만은 같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나요?”

정치적 지향점은 완전히 다르지만, 둘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는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백작에게 내가 생각하는 바를 강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말 몇 마디로 백작의 신념이 바뀌지도 않을 거고요.”

“……그렇다면?”

백작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마리는 가만히 말했다.

“그냥 앞으로 저를 지켜봐 주세요.”

“지켜…… 보란 말씀입니까?”

“네, 과연 제가…… 마리 폰 힐데른이자 모리나인 제가 정말로 클로얀 왕국민들을 위하는 존재인지, 믿을 수 있는 존재인지 지켜봐 주세요.”

“…….”

“그렇게 지켜보다가 백작의 마음에 저를 향한 신뢰가 진심으로 생긴다면, 그때는 저를 따라 주세요.”

그렇게 말을 마친 마리는 커먼성으로 돌아갔다. 바르한은 그녀가 떠난 자리를 한참이나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 * *

마리는 커먼성으로 돌아와 다시 정무를 보았다. 일주일 정도 뒤 의사에게서 서신이 왔는데, 하워드 후작은 완전히 건강을 되찾았다고 했다.

‘다행이야.’

무리한 보람이 있었다.

“하워드 후작이 조만간 방문해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고 합니다.”

린 남작이 보고했다.

“이번 일로 몰래 제국에 반감을 품은 왕국 귀족 중 일부가 마음을 돌린 듯합니다. 역시 각하이십니다. 대단합니다.”

린 남작은 웃으며 마리에게 감탄했다.

“아…… 네. 다행이네요.”

마리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게 저 예쁜 남자를 마주하면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폰틸 남작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전 지난번 같은 일은 반대입니다. 클로얀 지방 곳곳은 위험하기 그지없으니, 이곳 커먼성에서 멀리 벗어나는 것은 숙고해 주십시오. 각하는 곧 황후마마가 되실 존귀한 몸이십니다.”

하워드 후작을 치료하기 전 왕실 기사단을 마주한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마리야 바르한 백작이 자신을 해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폰틸 남작의 입장에서는 가슴이 철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래도 경호 인력을 늘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근위 기사단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 부분에 대해서 그녀도 생각이 있었다.

“네, 기사를 더 확충해야 할 것 같아요. 근위 기사분들만으로는 확실히 업무가 과중해요.”

“맞습니다. 그러면 바로 수도에 연락을…….”

“아니, 수도에는 연락하지 마세요.”

“그러면?”

폰틸 남작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 클로얀 지방의 왕국민 중에서 기사를 모집하겠어요.”

“……!”

폰틸 남작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안 됩니다! 왕국민들을 어떻게 믿고 그들에게 맡길 수 있단 말입니까?”

폰틸 남작의 걱정은 타당했다. 많이 안정되었다지만, 그래도 아직은 저들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만약 기사로 받았다가 불의의 일이라도 일으키면? 하지만 마리는 강경하게 주장했다.

“제국과 왕국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려면, 일방적인 관계가 지속되어서는 안 돼요. 물론 위험 부담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에요.”

“그래도…….”

폰틸 남작은 반대했지만 마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마리의 경호만큼은 근위 기사단에서 전담하는 것으로 타협하고 기사를 모집하기로 했다.

기사단 모집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좋은 조건에 혹한 것도 있지만, 그만큼 제국에 대한 반감이 희석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그간 마리의 노력이 빛을 보는 것이다.

‘기사단뿐 아니라 행정관도 확충해야겠어.’

현재 클로얀 지방의 행정관은 대부분 제국에서 파견 나온 이였다. 마리는 이번 기회에 왕국민들을 행정관으로 대폭 채용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마리의 결정은 왕국민들의 큰 지지를 받았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기사단과 관리를 왕국민 중에서 뽑는 것은 그들을 단순히 통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 진정 하나로 여긴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그간 마리의 행보와 합쳐 이번 일은 다시 그녀에 대한 지지를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다만 그러던 중, 한 가지 생각지도 못 한 문제가 일어났다.

“각하,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죠?”

폰틸 남작의 심각한 표정에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난 건가요?”

“아니, 안 좋은 일은 아닌데…… 아니, 안 좋은 게 맞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폰틸 남작은 횡설수설 말했다.

“괜찮으니 진정하고 말씀해 주세요.”

하지만 이어진 남작의 말에 마리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바르한 백작이 서기관 채용에 지원했습니다!”

“……!”

마리는 들고 있던 펜을 뚝 하고 떨어뜨렸다. 왕실 기사단의 바르한 백작이 지원을? 그것도 기사도 아닌, 서기관으로?

능력 있는 시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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