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있는 시녀님-39화 (40/54)

Chapter 6

마음을 굳히며 마리가 열심히 정무를 보고 있을 때였다. 그가 떠난 지 5일이 지났을 때, 마리는 정원에서 뜻밖의 광경을 목격하였다.

“남작님?”

은발과도 같은 은은한 백금발. 린 남작이었다. 그는 정원에 쪼그려 앉아 길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냐옹. 냐옹.

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스러운 고양이었다. 좀 더 가까이서 보려고 그에게 다가간 그녀는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고양이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섬뜩할 만큼 무감정했기 때문이다.

‘뭐지?’

그녀는 자신이 잘못 본 건가 했지만 아니었다. 손은 부드럽게 고양이의 털을 쓰다듬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마치 세상과 유리되어 있는 듯한 눈빛.

“아…… 각하.”

린 남작은 곧 그녀의 기척을 눈치채고 시선을 돌렸다. 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

마리는 잠시 아무 말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 용건이 있긴 했는데, 방금 그의 눈빛이 떠오르며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알 수 없는 모습을 보여 줬었지.’

얼마 전 비가 오던 날이 떠올랐다. 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흘러가서 깊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 당시에도 린 남작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각하?”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물음에 그녀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생각지도 못 한 급보가 그녀에게 도착했다.

“각하! 각하! 큰일입니다!”

심상치 않은 음성에 마리는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일이죠?”

전력으로 달려온 것인지 전령은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적군이 수도 인근으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적군…… 이라고요?”

마리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했다. 갑자기 무슨 적군이란 말인가? 하지만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이교도 해적들입니다! 그들이 서제국 쪽으로 뻗은 레멘강의 하류를 통해 수도 방향으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

“적군의 추정 숫자는 3,000명이 넘습니다! 당장 사람들을 피난시켜야 합니다!”

마리의 얼굴이 하얘졌다. 생각지도 못 한 곳에서 최악의 위기가 닥쳐온 것이다. 그것도 하필 라엘이 없을 때.

* * *

갑작스러운 해적의 침공 소식에 총독부가 발칵 뒤집혔다. 마리는 즉각 긴급 대책 회의를 열었다.

“당장 인근의 사람들을 내성으로 피난시켜야 합니다.”

“맞습니다. 현재 우리에게는 해적들에게 대항할 만한 병력이 없습니다.”

총독부의 관리들이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리도 심각한 얼굴로 생각했다.

‘관리들의 말이 맞아. 전쟁에 패한 후 자체적인 상비군이 없는 클로얀 지방으로서는 3,000명이나 되는 해적들과 맞설 방법이 없어.’

이교도 해적은 단순한 강도들이 아니었다. 지중해를 근거로 남유럽에 맹위를 떨치는 일종의 군벌이나 다름없었다.

‘클로얀 지방을 방위하기 위한 3군단이 있지만, 서제국과의 국경에 주둔하고 있어 이곳까지 도착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지원군이 도착하면 해적들은 노략을 끝내고 떠난 뒤일 거야.’

마리는 암울하게 생각했다. 기껏 대홍수의 피해를 복구해 놓았는데 이제는 해적이라니. 다시 모든 것이 파괴되리라.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해적들이 이곳까지 올라온 거지?’

아무리 이교도 해적들이 강력해도 이 근방에는 손을 뻗치지 못했다. 동제국이든 서제국이든 강력한 해군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레멘강을 거슬러 올라왔다고? 레멘강은 서제국으로 뻗어 있으니, 서제국을 통해 올라와야 하는 거잖아.’

거기까지 생각한 마리는 곧 답을 깨달았다.

‘요하네프 3세야! 요하네프 3세가 이번 일을 꾸민 것이 분명해!’

마리의 안색이 하얘졌다.

‘클로얀 지방이 안정되고 있으니, 훼방하기 위해 이교도 해적을 이용한 거야.’

그녀의 머리에 요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말 지긋지긋한 악연이었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라면 이 근방은 또다시 쑥대밭이 될 텐데.’

그녀는 클로얀 왕국민들을 떠올렸다. 오랜 전란과 재앙을 겪은 왕국민들의 삶은 이제야 가까스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이런 고통이 들이닥친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각하?”

린 남작이 그녀에게 물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특별한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의견을 물을 뿐이었다.

“3군단의 지원군이 도착하려면 5일은 걸리겠죠?”

“네, 그 시간이면 해적들은 약탈을 끝내고 떠난 뒤일 겁니다.”

다른 관리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당장 사람들을 피난시켜야 합니다.”

“맞서 싸울 방법이 없습니다.”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들을 피난시키면 마을은? 다 엉망으로 노략당할 거야. 모두 불에 타 망가질 게 분명해.’

최선의 방법은 적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하지만 싸울 병력도 없고, 지휘할 인물도 없었다.

‘폐하가 있었으면, 아니, 알몬드 자작님이라도 있었으면…….’

마리는 생각했다. 알몬드 자작은 라엘을 호위하고 수도로 돌아간 상태였다. 현재 남아 있는 근위 기사의 숫자는 100명도 채 안 되었다.

‘어쩔 수 없는 걸까?’

마리는 주먹을 움켜쥐며 창밖으로 왕성 너머를 바라보았다. 성벽 밖으로 수많은 마을이 놓여 있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모습. 수많은 사람이 저 안에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적들이 들이닥치면 저 행복도 끝이었다. 피난해 간신히 목숨을 구한다 해도 삶의 터전은 모조리 망가진 뒤일 거다.

‘안 돼.’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모습 따위 보고 싶지 않았다. 부당한 재앙에서 저들을 지켜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3,000명에 달하는 해적을 상대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각하, 한시가 급합니다! 빨리 소개 명령을!”

결국,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피난 명령을 내리려는 찰나였다. 생각지도 못 한 소리가 총독부로 울려 퍼졌다.

“와아!”

수많은 사람의 함성이었다.

“……!”

모두가 놀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도대체 무슨 소리죠?”

곧 왕성의 입구를 지키던 경비병이 달려왔다.

“각하!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가?”

한 관리가 대신 물었다.

“지금 왕국민들이 왕성 앞에 모여들어 각하를 찾고 있습니다!”

마리는 놀라 왕성의 성벽 위로 올라갔다. 왕성 주위로 흐르는 해자 너머로 수많은 왕국민이 모여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마리는 덜컥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또다시 민란이라도?’

얼핏 봐도 수천 명에 이르는 인원이었다. 만약 반란이라면 그녀의 목숨은 오늘로 끝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반란은 아니었다. 그녀를 본 왕국민들 사이에서 이러한 함성이 터진 것이다.

“총독 각하다!”

“총독 각하! 저희의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에게 갑자기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겁니까?”

마리가 입을 열자, 함성이 뚝 하고 그쳤다. 한 인물이 대표로 나와 그녀에게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지금 이교도 해적들이 저희의 터전으로 몰려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문제 때문에 드릴 부탁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마리는 저들이 성 인근에 사는 사람들임을 깨달았다. 곧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 처한 자들.

“네, 그렇지 않아도 피난 준비를 하라고 이르려 했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모두 피난 준비를 해주십시오!”

마리도 마주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하지만 군웅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도망가지 않겠습니다!”

“……!”

“해적들이 우리의 터전을 짓밟게 놔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맞서 싸우겠습니다!”

그 말에 마리는 당황했다. 싸운다고? 어떻게? 싸울 병사는 물론, 무기도 없지 않은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군웅은 목소리를 높였다.

“곡괭이라도 들고 싸우겠습니다. 아니, 두 팔만 있으면 어떻게든 싸울 수 있습니다!”

“……!”

“대신 각하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십시오!”

생각지도 못 한 이야기에 마리의 눈동자가 커졌다. 군웅이 하늘이 터져 나갈 것 같은 함성을 외쳤다.

“각하와 함께라면 해적들 따위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이끌어주십시오!”

“와아!”

“저희와 함께해 주십시오!”

마리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가슴 벅차는 전율이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모리나 왕녀만 바라던 클로얀 왕국민들이 드디어 자신을 바라봐 준 것이다. 제국과 왕국민의 입장을 떠나 어떠한 편견도 가지지 않고.

마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 많이 부족합니다. 해적들과 싸우는 도중 어떠한 희생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클로얀 왕국민들의 대답은 하나였다. 모두 입을 모아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 * *

그렇게 모여든 민병대는 무려 5,000명이나 되었다. 해적들과 비교해 2배 가까이 많은 숫자. 하지만 마리와 총독부 수뇌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숫자는 많지만 이대로는 필패입니다.”

“네, 동의해요.”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을 찌르는 군중의 사기와 다르게 상황은 좋지 않았다. 말이 5,000이지, 제대로 된 무기도 없고 군사훈련을 받은 이들도 아니었다. 반면 해적들은 질 좋은 무기를 지니고 있음은 물론, 수많은 전투 경험으로 다져진 바다의 전사들이었다.

“정면으로 충돌하면 대패할 것이 분명합니다.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폰틸 남작이 말했다. 그는 근위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라엘과 함께 떠난 알몬드 자작을 대신해 그녀를 호위하고 있었다.

“…….”

마리는 지도를 보며 잠시 침묵에 잠겼다.

‘방법이 없지는 않아. 질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도 큰 승리를 거둘 방법이.’

생각을 마친 마리는 말했다.

“해적들의 접안 예정 지점은 어디지요?”

“선단의 규모나 강물의 흐름을 봤을 때 커먼성의 남쪽 지점으로 예상됩니다.”

“잘됐군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보며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무슨 묘책이 있으십니까, 각하?”

누군가 기대감을 담아 물었다. 항상 대단한 능력을 보여 준 그녀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기상천외한 묘책을 보여 줄지 모른다 생각한 것이다. 과연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 가지 생각이 있긴 해요.”

“과연! 역시 각하이십니다!”

총독부 관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가 떠올린 생각이면 이 난관을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일 것임이 분명했다.

“무엇입니까, 그 계책이?”

“그건…….”

사람들은 기대감 섞인 얼굴로 그녀의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무언가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아니, 분명 묘책이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것도 결단코 용납할 수 없는 문제가.

“그건 안 됩니다, 각하!”

결국, 폰틸 남작이 거센 목소리로 외쳤다. 마리는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이 방법이면 해적들을 큰 피해 없이 물리칠 수 있어요.”

“그건 그렇지만!”

폰틸 남작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각하를 미끼로 해적들을 함정으로 유인하겠다니 너무 위험합니다!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마리가 떠올린 묘책. 그건 바로 그녀 자신을 미끼로 해서 해적들을 함정으로 유인하는 것이었다. 분명 성공만 하면 대승을 거둘 방법이지만 문제는 그녀에게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살짝만 잘못 삐끗해도 그녀는 목숨을 잃을 테니까.

“폐하께서 제게 각하의 털끝 하나라도 상하지 않게 지키라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완강한 폰틸 남작의 말에 마리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남작님,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래도 안 됩니다.”

마리가 다시 입을 열어 폰틸 남작을 설득하려고 할 때였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린 남작이 입을 열었다.

“각하.”

린 남작이 이런 의사 결정 때 발언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각하께서는 두렵지 않으십니까?”

“……!”

뜻밖의 물음에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린 남작이 그녀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일이 잘못 풀리면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괜찮으신 것입니까?”

마리는 표정을 굳히며 답했다.

“괜찮지 않아요. 당연히 두려워요.”

“그런데 어째섭니까?”

“저들이 저를 믿고 와 주었기 때문이에요.”

마리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몰려든 민병들이 해적들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들도 소중한 가족이 있을 거예요. 죽음이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겠죠. 하지만 모두 저를 믿고 와 주었어요.”

“…….”

“남작님의 말처럼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아니, 사실은 굉장히 무서워요. 저는 전쟁은커녕 제대로 싸움을 해본 적도 없는걸요. 하지만 저 하나가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저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면, 무조건 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저를 믿고 모여 준 저들에 대한 책임이니까요.”

그녀가 말을 마치자 장내가 조용해졌다. 왕국민들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려는 그녀의 각오에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결국, 근위 기사단의 부단장이자 그녀의 호위 책임자 폰틸 남작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각하가 미끼로 나설 때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마리도 그것까지는 거절하지 않았다.

“네, 잘 부탁할게요.”

* * *

해적과의 일전을 앞두고 마리의 계책이 빠른 속도로 준비되었다.

“내일이군요.”

“네, 출정은 이른 새벽에 할 것이니 잠시라도 눈을 붙이십시오.”

폰틸 남작의 말에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내일 오전 해적과 조우하게 된다. 위험한 작전을 수행해야 하니 조금이라도 자 두어야 한다.

“그러면 주무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폰틸 남작을 보며 마리는 순간 머뭇거렸다.

“각하?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폰틸 남작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리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내일 새벽에 뵐게요.”

의아한 표정으로 물러나는 폰틸 남작의 뒷모습을 보며 마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폐하가 옆에 있었으면.’

사실 강한 척 이야기하긴 했지만 많이 두려웠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그녀는 전장에 나가는 것이 처음이었다. 아니, 제대로 싸움을 해본 적도 없었다.

‘과연 내가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광경을 견딜 수 있을까?’

그녀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전장에 나가는 것도 떨리는데, 그녀 자신이 미끼가 되어 적을 유인해야 한다. 겁먹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자꾸만 가슴이 떨리고 무서웠다.

‘라엘, 폐하. 보고 싶어요.’

마리는 하필 이럴 때 자신의 곁을 떠난 라엘을 원망했다. 그가 자신의 곁에 있었다면, 그렇다면 이 불안감도 조금은 덜했을 텐데. 하지만 지금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홀로 두려움을 극복해 내야 했다.

‘정신 차려, 마리. 잘해 내야 해. 떨지 마.’

마리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눈을 감았다. 그녀의 어깨에 수많은 이의 목숨이 걸려 있었다. 이렇게 두려워할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다짐한다고 해서 없던 용기가 생겨나지는 않았다. 당장 내일 아침 수많은 적군의 앞에 서야 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제발. 제발 저에게 용기를 주시옵소서.’

그녀는 그렇게 몇 번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되뇌고 되뇌었다.

* * *

얼마나 뒤척인 다음이었을까? 그녀는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눈을 크게 떴다. 마치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라도 한 듯 능력을 주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무슨 꿈을?’

마리는 집중해 꿈속의 내용을 바라보았다.

어린 소녀였다. 예쁘고 강인한 인상의 소녀였는데, 창밖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소녀는 아무런 말없이 굳은 표정으로 저 멀리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가 바라보는 곳에는 수많은 병사가 모여 출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소녀가 지휘해야 할 병력이었다.

그때, 방의 문이 열리며 화려한 갑주를 입은 기사가 들어왔다. 기사는 소녀의 굳은 얼굴을 보고 주저하며 물었다.

「괜찮나?」

그들은 곧 대전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 소녀는 저 많은 병력을 이끌고 그 대전에 앞장서야 했다. 어지간한 강단의 기사라도 중압감을 느낄 상황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굳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괜찮아요.」

그러며 소녀는 담담히 말했다.

「이게 제게 내려진 사명이니까요.」

그 말에 기사는 복잡한 눈을 하였다. 그는 알고 있었다. 저 소녀도 남들과 마찬가지로 두려움과 중압감을 느낀다는 것을. 하지만 소녀는 절대로 그런 티를 밖으로 내지 않았다.

「시간이 되었네요. 이제 슬슬 나가 봐야겠어요.」

소녀는 정말로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방에 놓인 자신의 갑주를 걸쳐 밖으로 나갔다.

「와아!」

소녀가 말을 타고 출진하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거센 함성을 내질렀다. 마치 소녀와 함께하는 한, 절대로 지지 않을 거라는 함성이었다.

차앙!

소녀는 검을 치켜들며 외쳤다.

「목표는 랭스! 출진하겠습니다!」

그렇게 백년전쟁을 승리로 이끈 성녀, ‘잔 다르크’가 출진을 명령했다.

마리는 번뜩 눈을 떴다. 밖을 보니 새벽 시간이었다.

“잔 다르크…….”

지금까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보통의 인물은 아닐 거다. 그녀는 급히 자신이 무슨 능력을 얻게 된 것인지 점검해 보았다.

‘지휘 능력? 검술? 전략?’

하지만 모두 아니었다. 혹시나 하여 장식용 검까지 꺼내 휘둘러 보았으나, 무게에 낑낑대며 넘어질 뻔했을 뿐이다.

‘무슨 능력이 생긴 거지?’

그때, 노크와 함께 폰틸 남작이 기척을 알렸다.

“각하, 출진할 시간입니다. 모두 대기하고 있습니다.”

“네, 나갈게요.”

마리는 준비된 경갑을 입고는 왕성 밖으로 향했다. 미리 명을 받은 5,000의 민병은 다른 장소로 이동한 상태였고, 약 100명의 제국 근위 기사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모인 건가요?”

“네, 각하!”

근위 기사들은 우렁차게 답했다. 라엘의 뒤를 따라 수라장을 헤쳐 온 용사들답게 기세가 엄정했다. 다만 특이하게 다들 남루한 갑주를 입고 있었는데, 이는 해적들을 방심하게 하기 위한 계책이었다.

“바로 출발하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말에 오른 순간이었다. 마리는 순간 기이한 점을 깨달았다.

‘어? 그러고 보니?’

이제 적을 향해 출진하기 직전인데 전혀 떨리지가 않았다.

‘꿈에서 얻은 능력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용기!’

두렵기는커녕 마음이 차분했다. 지금 당장 적과 싸운다고 해도 동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이 역전의 용사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한 가지만 말하겠습니다! 아무도 죽지 마십시오! 우리는 승리할 테니, 기쁜 마음으로 다시 만나겠습니다!”

“네, 각하!”

“출발하겠습니다!”

그렇게 외친 그녀와 근위 기사들은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바로 해적들이 도착한 장소로.

* * *

배에서 막 내린 라흐잔은 기지개를 켰다. 오랜 항해를 마쳐서인지 뭍이 그리웠다.

‘우리가 제국의 땅을 밟게 되다니.’

제국은 그들, 해적들 사이에서 성역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막강한 해군들이 수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접근할 엄두도 못 냈겠지만 다른 곳도 아닌 서제국이 먼저 제안을 하다니. 흐흐. 우리야 뭐 마다할 이유가 없지.’

전해 듣기로 이곳 레멘강 유역은 변변한 병력이 없다고 들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황금 밭에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이 그들의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대장, 빨리빨리 움직입시다. 잔뜩 약탈하려면 바빠요.”

“크큭, 이곳 여자들이 그렇게 야들야들하다던데. 모두 노예로 끌고 가야겠습니다.”

해적들은 곧 있을 피의 축제가 흥분되는지 눈을 번뜩였다. 대장 라흐잔은 곡도 샴쉬르(Shamshir)를 높게 쳐들며 외쳤다.

“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이곳의 주도인 커먼성이 나온다! 젊은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노예로 잡아라!”

“네, 알겠습니다!”

해적들은 희희낙락해 진군을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았을 때였다. 그들은 기이한 일행과 마주했다. 남루한 갑주를 입은 백여 명의 기사였는데, 작은 소녀가 선두에 서 있었다.

“뭐지? 적군인가?”

라흐잔은 눈살을 찌푸렸다.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다. 저 정도 병력이야 뭉개 버리고 진군하면 그만이었다. 다만 선두에 선 소녀가 그의 흥미를 자극했다.

“호오, 제법?”

소녀는 하얀 드레스 위에 경갑을 입고 있었는데, 천하의 절색은 아니어도 하얗고 귀여운 인상인 것이 딱 그의 취향이었다. 그렇게 느낀 것은 라흐잔만이 아니었는지 곁의 수하가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대장, 저년은 죽이지 말고 꼭 잡죠. 어디 팔지 말고 우리가 두고두고 데리고 다닙시다.”

해적들은 음흉한 눈빛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소녀가 말을 탄 채 그들의 앞으로 나섰다.

“난 클로얀 지방의 총독 마리 폰 힐데른 자작이다! 너희는 무슨 용무로 이곳에 온 것이냐?”

“……!”

작은 소녀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백에 해적들은 순간 놀라 마리를 바라보았다.

“난 너희가 클로얀 지방에 발을 딛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다. 황제 폐하의 직권을 대리하여 명하느니, 당장 이곳을 떠나라! 지금 떠나면 더는 죄를 묻지 않겠다.”

해적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놀란 것도 잠시, 곧 비웃음이 그들 사이에 퍼졌다.

“큭큭. 뭐? 총독이라고?”

“총독 속살은 무슨 맛일지 궁금하구먼.”

해적들의 대장 라흐잔도 피식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나야말로 말하마. 지금 당장 내 앞에 알몸으로 무릎을 꿇으면 특별히 예뻐해 주마.”

“킥킥.”

해적들은 모욕적인 말을 뱉으며 마리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멀찍이 떨어져 있던 거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는데도 소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도망가지도, 달려들지도 않고 조용히 서 있다가 서로가 상당히 가까워졌을 때, 소녀는 말안장에 매단 활을 꺼내 들었다.

“활? 그걸 꺼내서 뭐 하려고?”

라흐잔은 입가에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활은 쉽게 다룰 수 있는 무기가 아니다. 거리가 가깝긴 했지만 저 소녀가 활을 다룰 수 있을 리가 없다. 저 소녀를 잔뜩 짓밟을 생각에 흥분하며 달려들려는 찰나! 화살에 활을 매긴 소녀가 가만히 시위를 당겼다.

끼이익.

“……!”

알 수 없는 한기가 라흐잔의 등줄기에 스쳐 지나갔다.

“자, 잠깐…….”

하지만 늦었다. 마리는 차갑게 그를 바라보며 시위를 놓았다.

파앗!

마리는 과거 사냥터에 갔을 때 궁사의 꿈을 꾸었던 적이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잠들어 있던 그 능력이 위기를 맞아 다시 깨어났다. 궁사의 능력을 담은 화살은 공기를 가르며 쇄도했고, 목적지에 정확히 내리꽂혔다!

“크아아아악!”

라흐잔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대장!”

곁의 해적들도 하얗게 질려 라흐잔을 바라보았다.

“크아악! 내, 내……! 안 돼! 내……!”

라흐잔은 눈을 시뻘겋게 뜨며 비명을 질렀다. 처연하기까지 한 비명이었다. 왜냐하면 하필 화살이 꽂힌 곳이 그의 가장 중요한 부위, 신체의 중심부였기 때문이다.

“크악! 이, 이…… 빌어먹을 년이……!”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더한 분노가 라흐잔의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제 그는 평생 남자 구실을 못 하게 되었다. 마리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추가적인 죄는 묻지 않겠어요.”

물론 그녀의 말은 라흐잔의 분노를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

“크아악! 잡아! 당장 저년을 잡아!”

마리는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근위 기사들이 호위하듯 그녀를 에워쌌다.

“잡아! 잡아!”

라흐잔과 해적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그녀를 쫓았다. 마리가 향한 곳은 그들의 원래 목적지인 북쪽이 아닌 남쪽이었지만,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못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들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마리를 잡을 생각만 가득했다.

“이년! 잡히기만 해봐라! 절대 곱게 죽이지 않겠다!”

파앙!

해적 중 누군가 그녀를 향해 화살을 쐈다.

“……!”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옅게 상처가 나며 주륵 피가 흘렀다.

“각하!”

놀란 근위 기사들이 외쳤으나, 마리는 흔들림 없이 외쳤다.

“전 괜찮습니다. 목적지로 향하는 데 주력하십시오!”

마리와 기사들은 이를 악물고 ‘목적지’로 향했다. 해적들은 지옥의 악귀처럼 그들을 쫓아왔다. 그들이 잡힐 듯 안 잡힐 듯 아슬아슬하게 도망가서 해적들은 더욱 화가 났다.

“잡히기만 해봐라!”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 때였을까? 저 멀리서 의외의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병영?”

해적들은 순간 주춤했다. 목책과 막사가 놓인 병영이었던 것이다. 마리와 기사들은 그 병영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떻게 합니까, 대장?”

라흐잔은 이를 바득 갈며 말했다.

“뭘 어떻게 해? 딱 보니 오랫동안 방치된 병영인데. 같이 밀어버려!”

“와아!”

대장의 명에 해적들이 함성을 지르며 병영에 뛰어들었다. 과연 라흐잔의 추측대로 병영에는 거의 인원이 없었다. 그나마 있던 인원도 해적의 침입에 놀라 도망가기 바빴다.

“저기다! 저기 가서 잡아라!”

저 멀리 소녀가 도망가는 모습을 본 라흐잔은 외쳤다. 그렇게 해적들은 마리를 따라 병영에 들어왔다. 그런데 한참 병영 안을 헤매는데 한 해적이 라흐잔에게 말했다.

“대장. 무언가 이상한 냄새 나지 않습니까?”

“뭐?”

라흐잔은 얼굴을 굳혔다. 그러고 보니 자꾸만 이상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있었다.

“기름 냄새?”

그들은 빽빽이 설치된 막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안을 확인한 순간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건……?”

누군가 침을 꿀꺽 삼켰다. 막사 안에는 기름이 잔뜩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왜…… 여기에 기름이?”

모두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이런 상황에서 기름의 용도는 단 하나였다. 화공(火攻). 라흐잔이 창백한 얼굴로 외쳤다.

“함정이다! 모두 물러나라!”

하지만 너무 늦은 외침이었다.

휘익!

그 순간 바람 가르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불화살이었다.

“아…… 이런…….”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중얼거림을 마지막으로 그들의 주변에 지옥도가 펼쳐졌다.

* * *

“하아. 하아.”

간신히 시간에 맞춰 병영 안에서 빠져나온 마리는 전황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언덕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꿈에서 굳센 용기를 받았어도 체력은 그대로인지라, 몸이 부서질 것처럼 힘들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대성공입니다.”

폰틸 남작이 아비규환의 혼란에 빠진 병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해적들은 불지옥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4년도 전에 버려진 병영을 이렇게 이용하다니 대단합니다.”

“아니, 적들을 직접 유인한 게 더 대단하지요. 역시 각하이십니다.”

주변의 모두가 마리에게 감탄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감탄은 절대 빈말이 아니었다. 화공 작전을 세운 것부터 적을 유인한 것까지 모두 마리의 뛰어난 능력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어요. 병영에서 빠져나오는 해적들을 상대해야 해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포위망을 구축해 놓았으니.”

폰틸 남작은 시원하게 답했다. 5,000의 민병대는 죽창으로 무장한 채 근위 기사단과 함께 포위망을 형성했다. 불길을 빠져나온 해적들은 민병대를 상대해야 했다.

“사실상 끝났군요.”

“저들이 언제 항복할지가 관건이겠습니다.”

마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해적들이 역전의 전사라 해도 이런 상황에서 힘을 쓸 수는 없었다.

‘끝났어.’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 죄책감이 들었다. 아무리 해적이라지만 자신의 계책 때문에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저들을 놔두었으면 자신들이 같은 꼴을 당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와아아!”

“크악!”

전장에 함성과 비명이 울려 퍼졌다. 대부분의 비명은 해적들의 것이었다. 전황은 일방적으로 그들 쪽으로 기울었다.

‘더 이상의 싸움은 의미가 없어. 이제 항복 제의를 해야…….’

마리가 그렇게 생각하며 앞으로 나서려고 할 때였다. 전장에서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크아악! 개 같은 년! 가만히 두지 않겠다!”

“……!”

한 번에 수백에 달하는 해적들이 불길을 뚫고 뛰쳐나왔던 것이다. 선두에는 대장인 라흐잔이 있었다. 그는 얼굴에 빨갛게 화상을 입은 채 얕은 언덕 위에 서 있는 마리를 노려보았다.

“저기다! 다른 놈은 상관없다! 저년을 잡아라!”

해적들의 수장인 그는 이 위기를 극복할 방법은 그녀를 잡는 것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판단은 정확했다.

“막아!”

“크아악!”

라흐잔을 비롯한 수백 명의 해적이 포위망을 뚫고 마리를 향해 돌진했다. 근위 기사들이 하얗게 질려 막아섰으나, 독기에 찬 그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포위망에 흩어져 있었기에 애초에 그녀 주위에 머무는 기사들의 숫자도 많지 않았었다.

“크아아아!”

라흐잔이 한 손에 도끼를 들고 괴성을 지르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아…….’

마리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막아야 하는데 막을 방법이 없었다. 수많은 능력이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그 절체절명의 순간, 생각지도 못 한 일이 일어났다.

푹!

“컥?”

어디선가 쇠뇌가 날아와 라흐잔의 목에 박힌 것이다. 해적들의 대장 라흐잔은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누가?’

마리는 놀라 고개를 돌리고 깜짝 놀랐다. 저 언덕 건너편에서 전신을 갑주로 둘러쓴 기사들이 해적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숫자는 대략 200명 정도였는데 아무런 문장도, 깃발도 없어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선두 돌격한다.”

기사들의 선두에 서 있던 자가 나지막하게 명했다. 라흐잔을 쇠뇌로 사살했던 이였다. 그리고 그 명과 함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지며 기사들이 돌진을 시작했다. 벼락같은 기세의 랜스 차징이었다.

‘근위 기사단에 밀리는 실력이 아니야!’

마리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생각했다. 저 정체불명의 기사들은 제국 최강의 기사단 중 하나라는 근위 기사단과 비교해도 실력이 떨어지지 않았다.

‘클로얀 지방에 아직도 저런 기사단이? 도대체 무슨 기사단이지?’

마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클로얀 왕국의 대규모 기사단은 제국에 병합된 후 모두 해체된 뒤였다.

‘설마?’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기사단이 떠올랐다.

‘전(前) 왕실 기사단?’

왕실 기사단! 클로얀 왕국의 최강 기사단이자, 반 제국 활동에 주축이 되는 집단이었다.

‘틀림없어. 전 왕실 기사단이야!’

그들이 왕국의 위기에 침묵을 깨고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왕실 기사단까지 가세하자 전투는 순식간에 막을 내렸다. 해적들은 전의를 잃고 무기를 버리고 속속 투항했다. 그렇게 대승을 거둔 클로얀 왕국민들은 크게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와아! 이겼다!”

“클로얀 만세!”

왕국민들은 이번 승리를 이끈 주인공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했다.

“총독 각하 만세!”

“마리 폰 힐데른 만세!”

모두 그녀의 덕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런 대승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패배했을 가능성이 훨씬 컸고, 이겨도 어마어마한 피해가 생겼을 것이다. 마리는 손을 들어 그들의 환호를 받은 후 고개를 돌렸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다행이긴 하지만, 아직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베일에 싸여 있던 왕실 기사단이 나타나다니.’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전투를 끝낸 왕실 기사단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는데, 전원이 얼굴에 투구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일단 이야기를 해봐야.’

마리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저들은 클로얀 지방의 안정을 위한 마지막 관문이었다. 저들을 설득해야 했다.

“저는 마리 폰 힐데른 자작이라고 해요. 잠시 대화를…….”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다가가고 있을 때였다. 선두에 서 있던 기사단의 대장이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투구 안에 얼핏 보이는 눈동자에 선명한 적의가 가득했다. 마리가 주춤하는 순간, 왕실 기사단의 대장은 말안장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녀를 향해 뻗었다.

석궁이었다!

“자, 잠깐. 저는…….”

파앙!

뜻밖의 상황에 마리가 당황해 입을 여는 순간, 기사단의 대장이 그대로 석궁을 발사해 버렸다.

“……!”

마리는 돌처럼 몸이 굳었다. 화살은 그녀의 목덜미를 제법 깊게 스치고 지나가 울컥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 진짜 죽이려고 했어.’

궁사로서의 능력을 지니고 있기에 마리는 알 수 있었다. 방금 기사단 대장은 단순히 위협사격을 한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자신을 죽이려 화살을 발사한 것이었다. 요행히 빗나간 것이었다.

“각하!”

“이놈들!”

근위 기사단의 기사들이 분노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근위 기사단을 상대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려 장내에서 사라져 버렸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결국 그들을 놓친 근위 기사단의 기사들이 마리에게 다가와 안위를 살폈다.

“……네, 저는 괜찮아요.”

마리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깊긴 했지만 다행히 목숨에 지장이 갈 상처는 아니었다. 그녀는 상처보다는 마지막 순간 기사단의 대장이 보여 준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눈빛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음에는 반드시 죽여 주마.

마리는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서늘한 바람이 그녀의 상처에 와 닿았다.

* * *

어쨌든 해적 침공 사건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전적으로 마리의 공이었고, 그녀가 해낸 일들은 순식간에 클로얀 지방, 아니, 제국 전체로 퍼져 나갔다.

“뭐라고? 클로얀 지방에 해적이?”

“네, 폐하.”

라엘은 황궁에서 소식을 전해 듣고 딱딱하게 굳었다. 클로얀 지방과의 거리 때문에 그가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은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마리는? 그녀는 괜찮은가?”

라엘은 다른 모든 것보다 그녀의 안위가 가장 중요했다.

‘이런 빌어먹을. 내가 떠나는 것이 아니었는데.’

라엘은 마리를 잘 알고 있었다. 백성들이 위기에 처해 있는데 홀로 안전한 곳에 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 이번에도 앞장서 위험을 감수했으리라.

‘만약 다치기라도 했으면.’

라엘의 머릿속에 그녀가 다치는 장면이 떠올랐다. 털끝 하나만 상해도 견딜 수 없을 텐데, 만약 정말 심하게 다쳤으면? 아니, 혹시라도 최악의 경우가 일어났으면?

‘안 돼. 절대로.’

라엘은 이를 악물고 옥좌에서 일어났다.

“폐하?”

오른이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클로얀 지방으로 가겠다. 가장 빠른 기병대를 준비하도록.”

“폐하! 어차피 상황은 끝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사태가 장기화되어도 3군단에서 알아서 해결할 겁니다!”

라엘은 이를 악물었다. 그도 안다. 지금 자신이 달려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녀가 위기에 처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심장이 멎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리고, 미쳐 버릴 것만 같은 마음이었다.

‘떠나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올 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같이 오는 것이었는데.’

“클로얀 지방으로 가겠다.”

“안 됩니다. 어차피 가도 아무런 의미 없습니다!”

그렇게 라엘과 오른이 팽팽하게 맞서는 순간이었다. 클로얀 지방에서 새로운 소식이 도착했다. 바로 마리가 해적을 소탕했다는 내용이었다.

“하…….”

서신을 읽은 라엘과 오른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대단하긴 하군요.”

“……그래.”

라엘은 서신을 살피고 또 살폈다. 해적들을 맞서며 그녀가 해냈던 일들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오른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힐데른 자작의 능력은 어디까지가 끝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능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오른은 생각했다.

“더구나 위험을 감수하는 희생까지. 이러니 클로얀 지방의 사람들도 힐데른 자작에게 감화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겠지요.”

한편 서신을 보고 있는 라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라엘은 그녀에게 감탄하는 오른과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해적들 코앞까지 나서는 위험을 감수했다고? 잘못되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라엘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물론 안다. 그녀도 원해서 한 일이 아니란 것을. 어쩔 수 없이 나선 일이란 것을. 굉장히 무섭고 떨렸겠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억지로 참고 나선 것이란 것을 다 안다. 그래서 라엘은 더욱 속이 상했다. 자신의 모든 것과 같은 그녀이기에. 그녀가 위험을 무릅쓴 것도, 두려운 마음속에서도 무리한 것도 다 속상하고 마음이 아팠다.

‘마리.’

라엘은 눈을 감았다. 그녀가 밝게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떨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보고 싶었다. 너무나 미치도록.

* * *

그리고 그때, 라엘 말고도 안타깝게 마리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황실친위대 전임 단장이자 제국 서북부 지방의 변경백인 키에르한 후작이었다. 그는 조각 같은 얼굴을 얼음처럼 차갑게 굳히고 있었다.

“그래도 잘 해결되어 다행입니다, 각하.”

한 수하가 그에게 말했다. 키에르한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지.”

그는 단장직에서 물러난 후, 국경 지대 영지에 머물며 변경백으로서의 업무를 수행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단 한순간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었다. 늘 그녀를 생각하던 중 해적 침공 소식을 들었다. 심장이 떨어지듯 놀랐을 때, 곧바로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마리가 놀라운 기지를 발휘해 해적들을 소탕했다는 소식이었다.

“다 잘 해결되었는데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으십니까, 각하?”

키에르한은 씁쓸히 웃었다.

“안타까워서.”

“네?”

“그 여린 성격으로 해적들 앞에 서다니. 얼마나 떨리고 무서웠을지.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좋지가 않군.”

키에르한은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옆에 있었다면 그녀가 그런 위험을 감수하게 놔두지 않았을 텐데.’

그는 한탄하듯 생각했다.

‘언젠가 제 도움이 필요할 때 당신의 곁으로 가겠습니다. 반드시.’

그녀와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전 했던 기사의 맹세. 마리는 당시의 맹세를 깊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키에르한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맹세를 단 한순간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나의 레이디여.’

* * *

한편, 위기에서 벗어난 클로얀 사람들은 축제 분위기였다.

“와아!”

“클로얀 만세!”

사람들은 거리에 나와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 환호성의 대부분은 그들을 위기에서 구해 준 마리에게 향해 있었다.

“총독 각하 만세!”

“힐데른 각하 만세!”

마리도 그들의 부름에 부응해 성벽 위로 올라가 손을 흔들었다. 그녀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

그들의 함성을 들으며 마리는 가슴 벅찬 느낌을 받았다. 드디어 클로얀 왕국민들이 자신을 진정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은 있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고비를 넘겼어.’

마리는 붕대에 감긴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쇠뇌가 남긴 상처는 생각보다 깊어 그녀는 제대로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한 치만 깊었어도 목숨을 잃었을 상처였다.

‘전(前) 왕실 기사단은 분명 다시 암살 시도를 할 거야. 그들의 입장에서 나는 눈엣가시나 다름없을 테니까.’

사실 우스운 일이었다. 모리나 왕녀를 추종하는 그들이 진짜 모니라 왕녀인 그녀를 죽이려 하고 있다니. 어쨌든 그녀는 그들의 위협을 극복하는 것뿐 아니라, 그들을 마음속으로 승복시켜야 했다.

‘그래도 그들만 거둘 수 있으면 클로얀 지방은 완전히 안정될 것이고 이제 나는 진정으로 그의 앞에 나설 수 있어.’

마리는 떨리는 마음으로 생각했다. 지금껏 간절히 바라던 일. 라엘의 앞에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드러낼 순간이 멀지 않았다.

‘조금만 더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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