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있는 시녀님-38화 (39/54)

Chapter 5

한편 그렇게 모두가 마리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저 멀리 서제국에서도 그녀를 생각하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서제국의 황제 요하네프 3세였다.

“이레테강 상류의 댐 문제도 해결했다고? 정말 대단하군. 역시 그녀야.”

그렇게 말하는 요하네프 3세의 안색은 파리하기 그지없었다. 이전 동제국의 수도를 떠날 때보다 한층 건강이 악화한 것이다. 그런데 요하네프 3세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댐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 마치 그들과 연관이 있는 것 같은 눈치였던 것이다. 과연 그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라키, 이놈은 내가 그녀를 원하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무자비한 일을 하다니.”

곁에 서 있던 측근 정보부 부부장 로이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을 선동해 돌을 던지게 한 것도 그렇고, 이번 댐 사건도 그렇고, 모두 모리나 왕녀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일이니까요.”

그러며 로이스는 말했다.

“이제 앞으로 일어날 일도 정말 위험천만한 일이고요.”

놀라운 이야기였다. 지금껏 일어난 일이 모두 서제국의 라키 드 스토른 백작의 음모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또 위험천만한 일이 일어날 예정이라니?

“이러다 정말 그녀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이건 잘되면 좋고, 잘못되어 그녀가 죽어도 어쩔 수 없고, 이런 식이잖아.”

로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발생할 일은 아무리 왕녀의 능력이 뛰어나도 본인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니 위험하긴 할 것 같습니다.”

“이러다 정말 목숨을 잃기라도 할까 잠이 안 올 지경이라고. 쿨럭. 쿨럭.”

한숨을 내쉰 요하네프 3세는 거칠게 기침을 토했다. 한참 기침하고 난 후에야 안정을 찾은 요한은 다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였다.

“어쨌든 지금까지는 잘 진행되고 있어. 이대로만 되면 우리 계획은 무리 없이 이루어지겠어.”

로이스도 요한의 말에 동의했다.

“네, 지금까지는 모두 잘 진행되고 있지요. 모두 모리나 왕녀 덕분입니다.”

“그녀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불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녀 덕분에 다 잘 진행되고 있어. 역시 모리나 왕녀야.”

그러며 한숨을 내쉬며 요하네프 3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로 클로얀 지방, 마리가 있는 방향이었다.

“어서 계획이 마무리되었으면 좋겠군. 다시 빨리 그녀를 보고 싶어.”

요한의 말에는 그녀를 향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로이스는 잠시 주저하더니 물었다.

“정말로 그녀를 원하십니까?”

“당연하지. 그녀를 향한 마음은 진심이야.”

요하네프 3세는 파리한 안색으로 피식 웃었다.

“물론 나도 안다. 내가 하려는 일이 그녀의 행복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그녀의 행복만 생각한다면 그녀를 훨훨 놔주는 게 맞겠지.”

요하네프 3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머리로는 알아도 내 마음은 그녀를 전혀 놔주고 싶어 하지 않는데.”

* * *

한편 그때, 요하네프 3세가 자신을 생각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하고 있는 마리는 총독부 관저에서 끙끙대며 누워 있었다.

“몸은 좀 괜찮은가?”

“아, 아파요.”

비를 맞으며 작업한 탓에 감기에 걸린 것이다. 그녀는 열이 끓어올라 더운 날임에도 이불을 눈 밑까지 끌어 올리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 하아.”

라엘은 마리가 아픈 게 속상한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차갑게 적신 천을 이마에 올려 주자 마리는 아픈 와중에도 배시시 웃었다.

“왜 웃지?”

“그냥. 그냥 좋아서요.”

“뭐가?”

“폐하가 걱정해 주는 게 좋아서요.”

라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말 하지 마라. 나는 정말로 속상하니까. 자꾸 이러면 아예 가둬 두는 수가 있어.”

“가둬요?”

“그래, 어디 못 가고 나만 바라보게 꼭꼭 가둬 두겠다.”

마리는 웃었다. 이런 이야기도 기분 좋게 들리는 것을 보면 자신이 정말 아프긴 한가 보다. 아니면 그를 정말 좋아하거나. 그렇게 기분 좋은 한때를 보내고 있을 때, 라엘이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잠시 이곳을 떠났다 와야겠다.”

“아…….”

마리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겨서.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그녀의 곁에 와 있지만 그는 황제다. 이곳에 와 있음에도 그는 남몰래 오른의 보고를 받으며 국정을 보고 있었다.

‘당연히 가셔야 하는 건데. 떠난다니 속상하네.’

당연한 일이고 다시 돌아온다고까지 했는데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냥 가슴 한구석이 비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런 자신의 마음에 당황했다.

‘정신 차려.’

마리는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그러면 바로 떠나실 건가요?”

“아니, 내일 파티에는 참석해야겠지. 기사들의 노고를 치하해야 하니까.”

내일은 지난 댐 사건 때 위험을 무릅쓴 기사들을 치하하는 비공식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다.

“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를 당분간 못 보게 되니, 내일 파티 때는 그와 즐겁게 보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 * *

한숨 자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정무를 보고 파티에 참석할 준비를 하였다.

“평소처럼 단정하게 꾸미면 될까요, 각하?”

총독부에 고용된 어린 하녀가 물었다.

“응, 어차피 비공식 파티라 거창하게 꾸밀 필요 없으니…….”

그런데 마리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어 말을 바꾸었다.

“아니, 그냥 최대한 예쁘게 꾸며줘.”

“네? 알겠습니다.”

하녀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마리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그렇게 한참 단장하고 방을 나서자, 에스코트를 위해 미리 기다리던 라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리?”

“……이상한가요?”

마리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특별히 공을 들여 꾸민 이유는 당연히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당분간 못 본다고 생각하니 최대한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아니.”

라엘은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나 예쁘군. 품 안에 숨기고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을 정도야. 괜히 잡놈들이 쳐다볼까 봐 싫으니 적당히 꾸미도록. 나에게는 전혀 안 꾸며도 예쁘게만 보이니까.”

마리는 그의 품에서 빼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 때문에 꾸민 거예요.”

“뭐?”

마리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다른 사람 말고 폐하에게 보이려고. 폐하에게 예뻐 보이려고 꾸민 거예요.”

그렇게 말한 마리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민망했다.

“…….”

그런 그녀를 보는 라엘의 눈동자가 타오르듯 뜨거워졌다. 그녀가 사랑스럽고 귀여워 참을 수가 없었다. 라엘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를 보는 순간, 그의 입술이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아…… 폐, 폐하.”

예상치 못한 키스에 그녀는 신음을 흘렸다. 평소보다 더 강렬하고 거친 키스였다.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이 정복당하는 듯한 키스에 힘이 풀려 그녀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

탁.

벽에 등이 닿았으나 라엘은 멈추지 않았다. 한 손으로 그녀를 허리를 감싸 안은 채, 혀로 그녀를 탐닉했다.

“하아.”

그렇게 한참이나 강렬한 키스를 한 그는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있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날 너무 자극하지 말도록. 그렇지 않아도 지금이라도 당장 그대를 가지고 싶어 미칠 지경이니까.”

“……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특별히 자극한 것은 없었지만 정말 잡아먹을 듯한 눈빛이라 뭐라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가지.”

“……네.”

그렇게 마리는 라엘의 에스코트를 받고 야외 파티장으로 향했다.

“와아!”

그들이 도착하자 기사들이 우렁찬 박수와 함성으로 맞았다. 라엘이 말했다.

“우리끼리 있는 자리이니 부담 없이 즐기도록. 오늘은 취해도 용서해 주겠다.”

“감사합니다!”

파티장은 왕성 뒤편 정원으로, 말이 파티이지 그냥 바비큐 구이를 동반한 기사들끼리의 술자리에 가까웠다. 특별히 초대한 인원도 없어 그들은 편안하게 술을 마셨다.

“폐하,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폐하가 아니다. 지금은 윈터 백작이다.”

“아! 뭐, 우리끼리만 있는데 상관없지 않습니까. 어쨌든 폐하, 아니, 백작님! 소신이 한잔 올리겠습니다!”

이미 잔뜩 마셨는지 얼굴이 빨개진 기사가 술을 권했다. 라엘은 피식 웃으며 잔을 받았다.

“너무 많이 주지는 말도록. 힐데른 자작을 에스코트해야 하니까.”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오늘은 마셔야지요!”

마리는 그 친근한 모습에 신기하단 마음이 들었다.

‘하긴 근위 기사단은 내전이 시작하기 전부터 폐하를 따라온 이들이니, 전우나 다름없겠구나.’

기사들은 라엘에게 연신 술을 권했다. 그들끼리만 있으니 한층 더 격의가 없는 것 같았다.

“아, 그만. 많이 마셨다.”

“괜찮습니다! 더 받으십시오!”

조금씩 받아 마신 게 쌓이다 보니 라엘도 취기가 올라오는 듯했다. 그때, 한 기사가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예비 황후마마도 한잔 받으십시오!”

라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 이놈이?”

알몬드도 말렸다.

“취했다. 물러가라.”

그때, 마리가 의외의 행동을 하였다.

“괜찮아요. 마실 수 있어요.”

기사가 건넨 술을 받더니 쭈욱 들이켠 것이다.

“와아!”

그런 예비 황후의 화통한 모습에 기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예비 황후마마 만세!”

“제국 만세!”

그러자 기사들이 한 명, 두 명 다가와 그녀에게 술을 건네었다.

“랑슨이라고 합니다! 한잔 드리겠습니다, 마마!”

“아, 아니…… 아직 마마는 아닌데.”

“저는 칼튼입니다! 존경합니다, 마마!”

“저는 케밍입니다! 사랑합니다, 마마!”

잠시 지켜보던 라엘은 그녀에게 끝없이 술이 들어가자 다급히 그들을 말렸다.

“그만! 그만!”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마리는 빨개진 얼굴로 딸꾹질하였다.

“끄윽. 폐, 폐하? 폐하도 한잔…….”

라엘은 이마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저었다.

“들어가서 쉬어야겠다.”

“괘, 괜찮은데.”

“아니, 안 돼. 들어가자.”

“조, 조금 더 마시고 싶은데…….”

라엘은 칭얼거리는 그녀를 일으킨 후 술을 권한 이들을 노려보았다.

“너희들…… 다음에 보자.”

그는 그녀를 끌어안듯 부축한 후 그녀의 방으로 함께 들어갔다.

“각하?”

“시원한 꿀물을 가져오도록.”

하녀에게 명한 라엘은 조심히 그녀를 침대에 눕혀 주었다.

“하아.”

그는 흐트러진 채 누워 있는 마리를 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렇게 무방비해서야. 어떤 꼴을 당하려고.”

그렇지 않아도 그녀를 향한 감정을 억누르기 어려운데, 저렇게 흐트러져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요동쳤다. 그는 그녀 곁에 풀썩 앉아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모를 거다. 내가 너를 얼마나 바라는지, 너 때문에 얼마나 가슴 아파하는지.”

취하긴 했어도 정신은 있는 마리는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저도…… 알아요.”

“아니, 너는 몰라.”

라엘은 고개를 숙여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절대로 모를 거야. 이 아픔을.”

하지만 마리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안다. 그녀도 그를 사랑하니까.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면서 행복하고. 안타까우면서 불안하고 아픈 감정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때, 하녀가 꿀물을 가져왔다. 라엘은 마리를 일으켜 세워 준 후 꿀물을 마시게 했다.

“천천히 마시도록. 속에 좋을 거다.”

“감사합니다.”

그러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 보겠다. 푹 쉬도록.”

그때, 마리가 그를 덥석 붙잡았다.

“저…….”

마리가 사과처럼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돼요?”

“……안 돼. 쉬어라.”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를 가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어려운 상태였다. 이대로 더 함께 있는다면 더는 참을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마리가 말했다.

“곧 이제 못 보는데……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서…….”

“…….”

“그냥 둘이 간단히 한잔만 더 하면 안 될까요?”

마리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라엘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말하는데 거절할 수 있는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딱 한 잔만이다.”

“네, 딱 한 잔만.”

“정말 딱 한 잔만이야.”

라엘은 자기 자신에게 강조하듯 말했다. 그 이상 마시면 안 될 것 같았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둘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헤헤. 이렇게 폐하와 술을 마시다니. 꿈만 같아요.”

“뭐가 꿈만 같은가?”

“서로 좋은 친구가 된 것 같잖아요. 이렇게 편하게 술도 마시고, 예전에는 상상도 못 했는데.”

라엘은 그 해맑은 말에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좋은 친구라고? 아닌데.’

그는 힐끗 옆에 앉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노출이 있는 연회용 드레스를 입고 있었던 그녀는 술에 취한 탓인지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옷 사이로 보이는 하얀 살결과 발그레하게 변한 얼굴을 볼 때마다 라엘은 타오르는 욕망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곁에 앉은 탓에 손과 어깨가 움직일 때마다 스쳤는데 그때마다 심장이 덜컥덜컥 내려앉았다. 라엘은 속으로 고개를 젓고는 입을 열었다.

“마리. 사랑한다.”

“……!”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랑해.”

진심을 담은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가슴에 울려 퍼졌다.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 폐하. 저도…… 저도 사랑해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이 겹쳐졌다. 서로를 향한 갈망과 사랑이 뒤섞였다. 참을 수 없는 소유욕이 서로를 향해 치달았다. 부드럽게 시작한 키스는 점차 뜨거워졌고, 이윽고 거칠 정도로 격렬해졌다.

“아. 폐, 폐하…….”

마리가 달뜬 신음을 흘렸으나, 라엘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상대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듯 소유욕 가득한 키스였다. 그녀를 향한 마음이 너무나 강렬해 애달프게까지 느껴졌다.

‘모자라.’

라엘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서 내려와 목을 훑었다.

“폐, 폐…… 하.”

그의 혀가 살결에 닿을 때마다 마리는 참을 수 없는 자극에 신음을 흘리며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라엘은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취해도 부족했다. 갈증만 계속해서 심해질 뿐이었다.

‘널 가지면 이 갈증이 조금은 해소될까?’

라엘은 이를 악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저히 이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마리가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해요. 라엘. 정말로…….”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라엘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하고 끊겼다. 그가 마리의 입술을 다시 한번 덮쳤다. 그녀의 몸이 자연스럽게 뒤로 넘어가며, 그가 쓰러진 그녀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

곧 일어날 일을 직감한 마리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사실 각오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자 마음이 떨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하지는 않았다. 라엘은 천천히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도…… 사랑한다. 내 목숨보다도 널 사랑해.”

마리는 눈을 감았다.

“네, 저도요.”

라엘의 얼굴이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렇게 둘은 달빛을 받으며 하나가 되었다.

* * *

다음 날, 늦은 아침. 마리는 멍하니 눈을 떴다.

‘아파.’

처음 든 생각은 그거였다. 아프다고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아플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라더니. 진짜구나.’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에 동료 시녀들에게 들었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지금도 아프고, 어젯밤에는 더 아팠다. 그리고 아픈 곳은 그곳만이 아니었다. 전신이 몸살이라도 난 것처럼 욱신거렸다. 온종일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좋았어.’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독히도 아팠지만 나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그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젯밤 그의 손길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아파할까, 괴로워할까, 걱정하는 게 느껴졌고, 그의 손길 하나하나에는 그녀를 향한 사랑이 가득했다. 그 사랑을 느낄 수 있었기에 마리는 행복했다.

‘폐하는 떠나셨겠지? 벌써 정오가 다 되었으니.’

마리는 일찍 일어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당분간 못 볼 테니 떠나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보고 싶다.’

어제까지 봤으면서도 그가 없다고 생각하니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히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문이 열리며 생각지도 못 한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나? 몸은 괜찮나?”

“폐하?”

마리는 눈을 크게 떴다. 그였다!

“시간이 늦었는데 어째서 안 떠나시고?”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대를 놔두고 어떻게 바로 떠나겠는가? 하루 미루었다.”

“아…….”

마리는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어젯밤 처음으로 밤을 보낸 그녀를 배려해 일정을 미룬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속마음을 숨기고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일이시잖아요. 전 괜찮으니 지금 바로 떠나세요.”

“하루 정도는 괜찮아. 대신들이 잘하고 있을 거다.”

“전 정말 괜찮은데…….”

“그만.”

라엘은 고개를 저으며 서운하다는 듯 물었다.

“그대는 내가 떠나는 것이 아쉽지 않은가 보지?”

“그…….”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열었다.

“……아쉬워요.”

라엘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곁에 앉았다.

“나도 아쉽다. 그대를 떠나는 것이. 그래서 하루 미룬 거야. 뭐, 황제로서 불성실한 태도이지만, 늘 열심히 해왔으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는 부드럽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제 그대는 완전히 내 것이니, 보통 떠나고 싶지 않아야지.”

내 것. 그 말이 이상하게 마리의 가슴을 흔들었다. 그래, 이제 나는 그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그간 남몰래 불안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사랑해요.”

사랑해. 아무리 속삭여도 질리지 않는 달콤한 말.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더욱더 전달하고 싶었고,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을 더욱더 느끼고 싶었다.

‘아……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마리는 가슴이 벅차올라 생각했다. 이것보다 더 행복할 수가 있을까? 너무나 행복해 불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 마음은 라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향한 마음이 가득한 그의 눈은 따뜻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라엘은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춘 후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로 널 내 품에서 놔주지 않을 거다. 각오하는 것이 좋아.”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폐하.”

그렇게 둘은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모든 근심을 내려놓고 오로지 서로만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이튿날. 그가 떠날 때가 되었다.

“절대 무리하지 말고 반드시 조심히 지내도록. 최대한 금방 돌아올 테니까.”

라엘은 마리를 홀로 놔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클로얀 지방은 아직도 불안 요소가 많았다. 마리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네, 폐하께서도 조심하세요.”

“난 괜찮다. 정말 꼭 조심해야 한다.”

몇 번이고 말해도 안심이 안 되는지 라엘은 거듭 말했다. 보다 못한 알몬드가 말릴 정도였다.

“이제는 그만 떠나시지요, 폐하. 각하는 괜찮으실 겁니다.”

어쩔 수 없이 그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폐하, 저를 사랑하시는지요?”

“당연하지.”

라엘은 왜 그런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 답했다.

“저는 폐하의 것이지요?”

“그래.”

라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이야기다. 왜 자꾸 묻는 거지?”

마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다시 한번 듣고 싶었어요.”

라엘은 피식 웃고는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금방 돌아오겠다. 기다리고 있도록.”

라엘은 그렇게 말하고 떠났다. 떠난 그의 자리를 보며 마리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떠나니 가슴이 텅 빈 것 같았다.

‘정신 차려. 어차피 금방 다시 볼 거잖아.’

그녀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행복한 와중에도 문득문득 알 수 없이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마리는 그건 지금이 너무 행복하기 때문이어서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순탄했다. 불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클로얀 지방이 안정되면 그에게 내 정체를 밝히자.’

물론 아직은 정체를 밝히기에는 일렀다. 클로얀 지방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하기에는 한참 멀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민심뿐만 아니라, 전(前) 왕실 기사단의 문제를 해결해야 해.’

왕실 기사단. 반 제국 운동의 핵심적인 주축으로, 전 왕실 기사단의 인원들뿐 아니라 제국의 반감을 품은 왕국 귀족들이 모두 가입되어 있다. 어마어마한 규모였지만 그 실체는 아직 파악되지 않은 비밀 결사였다. 앞으로 그녀는 그들과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들과의 문제까지 해결하면, 이제 그녀와 그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리라.

‘최선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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