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마리, 아니, 모리나는 꿈을 꾸었다. 능력을 주거나 미래를 보여주는 꿈이 아닌, 그저 평범한 꿈이었다. 꿈에서 그녀는 행복했다. 오래전 헤어졌던 엄마를 만났기 때문이다.
「엄마, 나 굉장히 신기한 일들을 겪었어요.」
모리나는 엄마의 손을 잡으며 그간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꿈속에서 엄마는 안쓰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리나가 겪은 마음고생을 그녀보다 더 속상하게 여겨 주었다.
「그래서 모리나, 너는 지금 행복하니?」
엄마의 물음에 모리나는 고민에 잠겼다. 솔직히 힘들었다. 어깨에 쏟아지는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행복해요.」
「어째서?」
정말 너무나 힘들어 당장에라도 모든 것을 놓고 싶었지만,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소중한 사람이 있기에.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바라고 있기에. 그녀는 행복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렇구나.」
엄마는 애잔한 눈으로 모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주께서 부디 너를 축복하시길.」
마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파.’
처음 든 감각은 극심한 두통이었다. 마치 망치로 두드려 맞은 듯 두통이 극심했다. 그리고 온몸이 물에 젖은 것처럼 무거웠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날아온 돌에 머리를 맞은 것까지 기억났다. 하지만 그다음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마리?”
이 순간 가장 듣고 싶었던 목소리. 마리는 자신이 들은 목소리가 그가 맞는지 입을 열었다.
“폐…… 하?”
“마리!”
단단한 몸이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익숙한 느낌에 마리는 정말로 라엘이 맞음을 깨달았다.
‘역시 윈터 백작님이 폐하가 맞으셨구나.’
하지만 그녀는 깊게 생각할 수 없었다. 라엘이 괴로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던 것이다.
“정말 미안하다. 내가 부주의해서 너를 다치게 하다니! 역시 클로얀 지방에 너를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정말 미안하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음성. 다친 자신보다도 더욱 괴로워하는 모습에 마리는 힘겹게 마주 손을 들어 그를 안아주었다.
“저, 전 괜찮…… 아요…….”
마리는 떠듬떠듬 말했다. 통증 때문인지 말이 잘 나오지가 않았다.
“그, 그냥 이렇게 폐하를 보게 된 것만으로도 기쁘니…….”
거기까지 이야기한 순간이었다. 마리의 눈에서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흐윽. 흑. 흐윽.”
왜 눈물이 나오는 것일까. 아파서? 진심을 다했건만 결국 이런 꼴이 된 게 아프고 속상해서? 모르겠다. 그냥 그의 품에 안겨 있으니 괜히 눈물이 나왔다. 바보같이.
그녀의 눈물을 본 라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를 지켜 낼 거라고 다짐했건만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해.”
“흐윽. 아, 아니에요. 그, 그냥 괜히 눈물이 나와서…….”
한참을 울고 나서 진정한 마리는 그에게 물었다.
“윈터 백작님. 폐하가 변장하신 거였죠?”
“…….”
라엘은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하신 거예요?”
“곁에서 너를 지키려고. 물론…… 이런 일을 당해 버렸지만.”
라엘은 죄책감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리는 대강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황제의 신분 그대로 클로얀 지방에 들어오는 것이 무리이니, 정체를 숨겨 자신을 따라온 것이다.
‘날 위해서…….’
마리는 다시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이런 꼴이 된 것에 극심한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지만 마리는 아니었다. 이게 어떻게 그의 책임이겠는가. 그저 자신을 이만큼이나 생각해 주었다는 것이 먹먹할 만큼 고마울 뿐이었다.
“고마워요. 정말…… 정말로 감사해요.”
마리는 그의 품에 더욱 깊이 안기며 말했다. 이 품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라엘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어쨌든 내가 잘못 생각했다.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이런 위험한 곳에 그대를 보내는 것이 아니었어.”
“폐하?”
“지금 당장 황궁으로 돌아가도록. 클로얀 지방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하겠다. 그대는 더는 신경 쓰지 마.”
마리는 화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전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그대가 여기 있으면 얼마나 더 위험할지 몰라서 그러는 건가?”
“괜찮아요. 앞으로는 더 조심하면 돼요.”
그녀의 말에 라엘은 감정이 복받쳐 올라 말했다.
“내 말 따라! 명령이다!”
“……!”
“내가 이번에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짐작이나 하는가? 그대를 잃는 줄 알고 얼마나 절망했는지 아느냔 말이야!”
거친 그의 음성에 마리는 주춤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아득한 고통과 괴로움이 가득했다. 마리는 자신이 쓰러져 있는 동안 그가 얼마나 괴로워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죄송해요. 하지만…….”
“안 돼.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
라엘이 완강히 말하자 그녀는 곤란했다. 그의 뜻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그녀도 양보할 수가 없었다.
“제발 부탁이에요, 폐하. 이렇게…… 이렇게 간절히 빌 테니 돌아가라는 명령만은 거두어주세요.”
“…….”
“제발요. 제발…….”
그녀는 애원했다. 클로얀 지방의 문제를 해결하면 그와 자신 사이에 가로막는 모든 것이 해결된다. 그렇게만 되면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와 진정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그녀는 반드시 클로얀 지방에 남아야 한다.
라엘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가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 내가 이렇게 부탁한다. 황제로서 하는 부탁이 아니야. 너를 바라는, 너만을 바라보는 사람으로서 하는 부탁이다. 제발 돌아가 줄 수는 없겠느냐?”
“…….”
“제발 부탁이다.”
마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괴로워하는 그의 말을 들으니 가슴이 찌르르 아팠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따를 수 없었다. 오로지 그와 함께하기 위해서.
“죄송합니다.”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라엘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이었다. 그녀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인지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각하!”
나타난 이는 알몬드 자작과 린 남작이었다. 호위를 담당했던 알몬드는 죽을죄를 진 죄인처럼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 부주의로 이런 봉변을! 제 목을 쳐 주십시오!”
“아, 아니…… 괜찮아요. 전 괜찮으니 일어나세요.”
마리는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호위 기사라도 하늘에서 날아오는 돌까지 어떻게 막겠는가?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부주의했던 그녀 자신의 잘못이었다.
“지금 근처 민가를 샅샅이 수색 중이니 범인은 곧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에 마리는 순간 멈칫했다.
“민가요?”
“네, 범행 후 민가에 섞여 들어가 수색에 난항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위의 민가를 모조리 뒤지고 있으니 곧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수색은 그만두세요.”
“네?”
그녀의 말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마리는 굳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기사들이 민가를 뒤지면 죄 없는 사람들도 모두 공포에 질릴 거예요. 간신히 민심이 안정되고 있었는데, 그건 치명적이에요. 그러니 그만둬 주세요.”
“하, 하지만…….”
알몬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총독이자 제국의 예비 황후마마를 해하려 한 이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잡아 엄벌에 처해야 합니다.”
하지만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부탁이니 그만둬 주세요.”
그때, 둘이 대화하는 것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린 남작이 가만히 물었다.
“각하, 만약 범인을 잡으면 범인에게 벌을 주실 것입니까?”
마리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당연히 안 줄 수야 없겠지요.”
“그렇군요.”
린 남작은 옅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예쁜 미소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어쨌든 그렇게 그날의 대화는 일단락되었다. 알몬드는 불만이 가득한 눈치였지만 마리의 의견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라엘은-
“그대가 계속 고집을 부리겠다면 어쩔 수 없지. 나도 그대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
“페하!”
지금처럼 윈터 백작으로 분해 계속 마리의 곁을 지키기로 했다. 마리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위험합니다.”
“그러는 그대는?”
“저보다야 폐하의 옥체가 훨씬 중하니…….”
라엘은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중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나한테 너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결국 그렇게 그는 그녀의 곁에 있기로 결정되었다. 의사가 재차 그녀를 진료했고, 다행히 뇌진탕 외에는 머리 안쪽을 크게 다치진 않아 잘 요양하면 후유증은 남지 않을 것 같았다. 날아온 돌에 얻어맞은 것에 비하면 기적적으로 가벼운 부상이었다. 그래도 라엘은 마리의 이마에 둘린 붕대를 볼 때마다 마음이 상하는 듯했다.
“범인을 잡았어야 했는데.”
“괜찮아요. 잡으면 그게 더 곤란해요.”
어차피 반 제국 감정에 의한 범행일 것이다. 만약 범인을 잡으면 벌을 안 내릴 수가 없는데, 그러면 반 제국 감정이 더욱 악화할 것이다. 악순환의 반복이니 마리는 그냥 넘어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일은 그녀의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각하,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네?”
“각하를 해한 범인을 검거했습니다.”
“……!”
린 남작의 말에 마리의 눈동자가 굳었다. 린 남작이 예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범인은 예비 황후마마이자 총독인 각하를 해하려 한 중죄인. 검거할 수 있어서 천만다행입니다.”
범인은 결박당한 채 왕성으로 끌려오고 있었다.
“놔! 이 더러운 제국의 개놈들아!”
“시끄럽다!”
범인은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고, 왕국민들은 놀란 눈으로 범인이 압송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끌고 가도록!”
“꺼져! 내 몸에 손도 대지 마! 이 더러운 놈들아!”
한창 소동이 벌어지고 있을 때, 마리가 도착했다.
“멈추세요.”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근위 기사들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각하를 뵙습니다!”
왕국민들은 침묵에 휩싸였다. 그녀의 머리에 둘린 붕대를 본 것이다. 저 소녀는 한결같이 그들에게 잘해 주려고 노력해 왔다. 그럼에도 머리에 돌을 맞았다.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는 큰 부상이었다. 왕국민들이 아무리 제국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저 상처를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모두 복잡한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저자가 범인인가요?”
마리는 밧줄에 결박당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제 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어린 사내아이였다.
“그래, 내가 범인이다! 이 제국의 개야!”
소년은 시뻘게진 눈으로 외쳤다.
“이놈이!”
근위 기사들이 발끈하여 소년을 바닥에 쓰러뜨렸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려 하자, 마리가 다급히 말했다.
“잠깐! 멈추세요!”
“하지만 각하!”
“명령이에요.”
근위 기사들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멈추었다. 알몬드가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당장 즉결 처형해야 합니다. 자비를 베풀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만큼은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목소리에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원칙적으로 따지면 알몬드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렇게 풀 문제가 아니야.’
마음을 정한 마리는 쓰러져 있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이름이 무엇이지요?”
“…….”
소년은 입을 우뚝 다물었다. 마리는 조용한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야기해 주세요.”
“……에일이다.”
당장 자신의 목을 칠 거라 생각한 소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에일. 이유야 어쨌든 당신은 큰 중죄를 지었어요. 알고 있나요?”
에일은 이를 악물었다.
“날 조롱할 생각이라면 집어치워! 죽는 것은 무섭지 않으니, 당장 목을 쳐!”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전 당신에게 큰 벌을 내릴 것입니다.”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자 모두가 마리의 입을 바라보았다. 과연 저 소녀가 어떤 벌을 내릴까? 알몬드는 당연히 사형이란 눈빛이었고, 윈터 백작, 아니, 라엘은 가만히 그녀의 의견을 기다렸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그녀의 입에 집중되어 있을 때 마리가 입을 열었다.
“에일, 당신에게는 앞으로 제 모든 행적을 기록해야 하는 벌을 내리겠습니다.”
범인, 에일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게…… 무슨 말이지?”
놀란 것은 범인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판결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당신의 목을 베는 것은 가장 손쉬운 처벌이겠죠. 하지만 전 그런 벌을 내리지는 않겠습니다.”
마리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 이 클로얀 왕국민들을 위해 끝없이 노력할 생각입니다. 어떤 난관이 닥치더라도요. 당신은 제 그런 행적을 직접 눈으로 지켜보고 기록하세요.”
“…….”
“그래서 훗날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 당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쓴 기록을 보며 저에게 저질렀던 일을 후회하게 하는 것. 그게 제가 당신에게 내릴 벌입니다.”
소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째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는 거지? 난 너를 죽이려고 했다.”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니에요.”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전 그저 당신이 훗날 오늘의 일을 진심으로 후회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일 뿐이에요.”
그녀는 소년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앞으로 절 똑바로 지켜봐 주세요. 잘못한 것이 있다면 여과 없이 기록하세요. 하지만!”
그녀는 말했다.
“만약 제 노력이 당신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그때는 편견 없이 저를 바라봐 주세요. 그리고 이건 당신만이 아닌 왕국민 모두에게 드리는 부탁입니다.”
* * *
그렇게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마리가 내렸던 판결은 클로얀 왕국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날 마리의 말은 단순히 범인에게만 전하는 말이 아니었다. 클로얀 왕국민 전체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만약 제 노력이 당신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그때는 편견 없이 저를 바라봐 주십시오.”
돌에 얻어맞은 상황에서도 그런 판결을 내린 마리를 보며 왕국민들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제국은 여전히 밉고 그들은 여전히 모리나 왕녀를 그리워하고 있지만,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를 보는 시선이 조금씩, 조금씩 마치 얼음이 녹듯 바뀌어 갔다.
한편, 알몬드는 마리의 판결이 불만족스러운 눈치였다. 그는 몇 번이고 범인을 처형했어야 했다고 투덜거렸다. 라엘은 감정적으로는 알몬드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그래도 마리를 칭찬해 주었다. 그녀가 현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판결을 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린 남작, 아니, 스토른 백작의 의중은 짐작하기 어려웠다.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깊어졌다는 것이다.
“타고난 선한 사람이라…….”
린 남작, 아니, 라키는 마리의 뒷모습을 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더럽히고 싶군. 철저히.”
* * *
사건이 마무리된 후, 마리는 꿈을 꾸었다. 마치 현실처럼 선명한 시야. 능력을 주는 자각몽이었다.
‘이번엔 또 무슨 꿈이지?’
깡! 깡!
건설 현장이었다. 커다란 공터에 한창 건설 중인 바실리카(Basilica)가 놓여 있었다.
「더! 그런 식이 아니야! 조금 더 아래쪽으로!」
고집 센 인상의 노인이 소리를 질렀다. 옹고집처럼 보이는 노인이었으나, 건설 현장의 모두는 군말 없이 지시에 따랐다. 노인이 어떤 자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건축물에는 이 세 가지를 반드시 갖추어야 해! 바로 견고함과 유용성, 또 아름다움이야!」
그때, 나직한 소리가 그에게 닿았다.
「수고가 많군.」
「아, 프린켑스.」
프린켑스(Princeps). 첫 번째 시민이란 뜻으로 고대 로마 시대 황제를 칭하는 호칭 중 하나였다. 노인의 뒤에 선 황제는 한창 건설 중인 바실리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멋진 건물이 나오겠군.」
「과찬입니다.」
황제는 웃으며 말했다.
「자네의 이름은 자네가 남긴 건축물과 더불어 영원히 이어질 걸세.」
황제는 후대의 건축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건축술에 대하여(De Architectura)」의 저자이자 위대한 건축가인 노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
마리는 번뜩 눈을 떴다.
“웬 건축가?”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왜 건축가의 꿈을 꾸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특별히 건물을 지을 계획은 없는데?’
고민해 보았으나 딱히 짚이는 것이 없었다. 그때, 노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되겠나?”
“아, 네! 폐…… 아니, 백작님!”
마리는 밝은 얼굴로 답했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이는 윈터 백작으로 분한 라엘이었다.
“먹을 걸 가져왔다.”
“괘, 괜찮은데…… 직접…….”
마리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대 제국의 황제가 직접 식사를 가져다주다니. 마리는 몇 번이나 사양했으나 라엘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내 즐거움이다. 몸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만이라도 받도록.”
그렇게 그녀는 아침마다 라엘이 챙겨 주는 밥을 먹게 되었다.
“와아.”
마리는 음식을 보고 감탄을 터뜨렸다. 치즈가 섞인 오믈렛과 고소한 냄새가 나는 갓 구운 빵. 그리고 훈제된 고기까지. 모두 그녀가 좋아하는 요리였다.
“혹시 폐하께서 직접 하신 건가요……?”
라엘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그냥 시간이 남아서 요리한 것이다. 할 일이 없으니 이런 일이라도 해야지.”
마리는 그 대답에 감동했다.
‘나를 위해 직접…….’
간단한 요리들이지만 얼핏 봐도 정성을 쏟은 것이 눈에 보였다. 요리가 익숙할 리도 없으니, 분명 아침 일찍 일어나 자신을 위해 노력한 것이리라.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군. 안 맞으면 말하도록. 버리고 새로 내오도록 할 테니까.”
마리는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다 먹을 거예요. 하나도 안 남기고.”
그녀는 포크를 들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맛은 괜찮은 편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 굉장히 훌륭했다. 그의 정성이 들어가 있어서인지 그녀에게는 세상 어떤 요리보다도 맛있게 느껴졌다.
“맛있어요. 정말로. 정말 감사해요.”
그렇게 한참을 먹다가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말없이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렇게 보세요?”
“예뻐서.”
마리는 얼굴을 붉혔다.
“놀리지 마세요. 뭐가 예뻐요. 엉망인데…….”
그녀는 막 일어나서 부스스한 것은 물론, 아직 부상이 낫지 않아 이마에 붕대를 두른 채였다.
“놀리는 게 아니다.”
고개를 저은 그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마리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그가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입술 곁을 혀로 핥았다.
“……!”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그녀의 얼굴이 빨개지자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소스가 묻어서. 묻히지 말고 먹도록.”
“그, 그런 식으로 안 닦아주셔도 되거든요!”
마리는 민망한 얼굴로 소리를 높였다. 라엘은 쿡쿡 웃음을 짓더니 덮치듯 그녀를 껴안았다.
“폐하?”
그녀의 몸이 기우뚱 기울었고, 커다란 침대에 서로 붙어 앉아 있었던 탓에 함께 풀썩 침대 위로 넘어지게 되었다. 졸지에 그의 품에 갇히게 된 그녀의 얼굴이 사과처럼 물들었다.
“폐, 폐하. 놔주세요.”
라엘은 빨개진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싫은데?”
두근!
이렇게 그의 품에 안긴 채 침대에 누워 있으니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마치 맹수에게 붙잡힌 토끼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금방이라도 잡아먹힐 것만 같은 긴장감이 들었다.
“마리.”
“……네, 폐하.”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지나 귀를 어루만졌다. 귀의 예민한 끝 부분을 간지럽히듯 어루만지자 마리의 얼굴이 더욱더 붉어졌다.
“너는 모를 것이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너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얼마나 아파했는지, 얼마나 애달프게 바랐는지.”
“…….”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나직한 목소리에 담긴 그의 마음에 마리는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도 알아요.”
“알아?”
“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다. 간절히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만이 아니니까. 자신도 그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으니까.
“저도 전하를 싫어하지 않으니까. 아니…… 사실은…….”
마리는 자신의 마음을 말하려다 말이 꼬여 버렸다. 이런 표현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라엘은 그녀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했다. 행복과 열망이 타오르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입을 맞춘 것이다.
“아…… 폐, 폐하…….”
거칠게 들어오는 그의 느낌에 마리는 신음을 내뱉었다. 마치 그녀의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는 듯, 그의 혀가 그녀를 강하게 집어삼켰다. 온몸이 마비되는 듯한 강렬한 자극에 마리는 주먹으로 그의 상의를 움켜쥐었다. 너무나도 강렬한 키스의 감촉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로지 그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하아…….”
그는 한참이나 그녀를 괴롭힌 다음에야 키스를 멈추었다. 그리고 살짝 눈물이 맺힌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나에겐 이 세상 무엇보다도 네가 소중하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떠나지 말아라.”
마리는 눈을 감으며 답했다.
“네.”
* * *
이후 며칠이 흘렀다. 아직 부상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인지라, 마리는 조금 더 정양하기로 했다. 그녀는 활동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라엘이 단호히 명령했다.
“완전히 나을 때까지 방에서 나오는 것은 금지다.”
그렇게 그녀는 강제로 휴식을 취하게 되었고, 덕분에 라엘과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꿈만 같아요.”
“어떤 것이?”
둘은 침대에 나란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녀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말했다.
“이렇게 폐하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요.”
마리의 서류를 대신 검토해 주던 라엘은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정말인가요?”
“당연하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어투의 답에 마리는 배시시 웃었다.
‘그래, 영원히.’
불의의 사고가 있긴 했지만,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이대로만 가면 클로얀 지방을 안정시키고 그와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것도 꿈이 아니리라.
그때, 라엘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가 많이 오는군.”
“그러네요. 벌써 4일째인데.”
“곧 멈출 것 같긴 하겠지만 혹시나 길어질까 봐 걱정되는군.”
마리도 같은 걱정이 들었다. 대홍수의 참사가 얼마 전이었기 때문이다. 라엘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아직 제방이나 댐 수위에는 여유가 있지?”
“네, 만수위가 될 때까지 여유가 있어요.”
“다행이군. 그래도 만전을 기하고 있는 게 좋겠어.”
마리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렇게 대화를 마친 그들은 말없이 서로를 느꼈다. 라엘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마리는 그 손길을 느끼며 빗소리를 들었다.
‘좋다. 편안해.’
그냥 꿈만 같았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이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행복해 그녀는 괜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 행복이 떠나갈까 봐 두려웠다.
‘이제는 그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가 없는데, 그가 없어지면 나는 어떻게 하지?’
너무 행복하고, 동시에 두려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 정말로 그를 좋아하는구나.’
마리는 몰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폐하, 잠시 산책하러 나가면 안 될까요?”
“산책을? 비가 오는데?”
“안에만 있다 보니 답답해서요. 의사도 조금 돌아다니는 것이 좋다고 했잖아요.”
라엘은 서류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래도 비에 젖을 수 있으니, 나한테 꼭 붙어서 걷도록.”
마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둘은 클로얀 왕성을 거닐었다.
“절대 무리하면 안 된다. 힘들면 바로 이야기하도록.”
“저 거의 다 나았어요. 이 정도는 거뜬해요.”
왕성에는 최소한의 관리 인원밖에 없었기에, 그들은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손을 잡고 걸었다.
“이곳도 나름 운치가 있군. 황궁과는 다른 느낌이야.”
“맞아요.”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황궁이 화려하고 웅장하다면, 클로얀 왕성은 고즈넉하고 고풍스러웠다.
‘왕성을 제대로 보는 것은 나도 거의 처음이구나.’
통원의 궁에 주로 갇혀 지냈던 터라 왕녀였던 그녀도 왕성을 느긋하게 구경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대는 이곳 왕성 출신이군. 가 보고 싶은 곳이 있나?”
“저도 잘 몰라서…….”
“그래? 그러면 그냥 걸어 보지. 정경이 예쁘니까.”
둘은 서로 손을 잡고 정처 없이 왕성을 걸었다. 비가 살짝 거세긴 했지만 그와 함께 산책하니 마리는 평안한 마음이 들었다.
‘좋아.’
그들은 정원을 산책하다가 비어 있는 궁에 도착했다.
“잠시 들어갈까?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는군.”
“네, 폐하.”
둘은 궁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궁은 적막하니 고요했다.
“비에 많이 젖었군. 돌아가면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바로 몸을 말려야겠다.”
라엘은 걱정하며 그녀의 몸에 묻은 물기를 털어주었다.
“잠깐 안이나 살펴보지. 어차피 당장 나가기에는 빗줄기가 너무 거세니까.”
“네, 그렇게 해요.”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마치 관광이라도 온 기분으로 궁 안을 살폈다. 그렇게 한참 안을 걷다가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별다른 것은 없군. 잠시 안에서 쉬었다가 돌아갈까?”
그러며 빈방을 가리키는데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왠지 심상치 않았다. 저 으슥한 방에 따라 들어갔다가는 왠지 몹쓸(?) 일을 당할 것만 같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또 이상한 짓 하려고…….”
“이상한 짓? 무슨?”
짓궂은 물음에 마리는 얼굴을 붉혔다.
“몰라요. 빨리 돌아가요.”
하지만 그 순간, 라엘이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
갑작스러운 기습 키스에 마리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곧 농밀한 자극에 힘이 풀렸다.
“사랑한다, 나의 마리.”
잠시 키스를 멈춘 라엘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 달콤한 음성에 마리의 심장이 요동쳤다.
“저도 정말 많이 사랑해요.”
둘은 다시 키스를 이어 갔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궁에서 서로를 탐닉했다. 이윽고 키스가 끝나 그의 품에서 벗어난 마리는 얼굴을 사과처럼 붉게 물들였다. 인적 없는 궁에서 키스라니. 괜히 부끄러웠다.
“왜 그러지?”
“아, 아니요.”
“흐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리는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라엘은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듯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포근하게 감싸 안으며 말했다.
“이만 돌아가지.”
“……네.”
어깨에 와 닿은 그의 부드러운 느낌에 마리는 가슴이 두근 뛰었다. 설레면서도 포근한 느낌이었다. 이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마리는 궁 밖으로 시선을 돌려 커먼 성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클로얀을 안정시켜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그와 함께할 것이다. 어떤 난관이 가로막는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무릎 꿇지 않으리라 그녀는 다짐했다.
그때, 라엘이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사랑해요.”
* * *
며칠이 지났다. 그녀의 몸은 이제 다 나았고, 둘 사이는 행복했다. 다만 문제가 있었으니, 그건 멈추지 않는 비였다.
“좀처럼 멈추질 않는군. 아직은 괜찮지만 빗줄기가 더 거세지면 큰일 날 수도 있겠어.”
“제방의 상태를 다시 확인해 봐야겠어요.”
마리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수위에 아직은 여유가 있었지만 그녀는 계속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왜 건축가의 꿈을 꾸었던 것일까?’
처음엔 건물 건축과 연관된 일이라 생각했지만 아닌 것 같았다. 왜 그런 꿈을 꾼 것인지 짐작이 되지 않아 계속 불안했다.
‘혹시 지금 내리는 비와 연관이 있는 걸까?’
그때, 라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멘강 유역을 살펴보고 오겠다. 범람에 대비해야겠어.”
“아, 그건 제가 가서.”
“됐다. 그대를 도와주러 온 것이니 열심히 일해야지.”
그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마치 출근할 때 아내에게 하듯 다정한 키스였다.
“다녀오마. 쉬고 있도록.”
“……네.”
마리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간 후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간신히 안정화되기 시작한 클로얀 지방이다. 만약 다시 제방이 범람하기라도 한다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다.
‘왜 또 홍수가…….’
답답한 마음에 그녀는 우산을 들고 방을 나섰다. 걸으며 생각이라도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왕궁 정원 깊은 곳을 걷고 있을 때, 마리는 의외의 인물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한 남자가 비를 맞으며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은발에 가까운 백금발, 여인처럼 아름다운 얼굴. 린 남작이었다. 온몸이 비에 젖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표정은 굉장히 고통스러워 보였다. 마리는 주춤 멈추어 섰다. 뭐라고 말을 걸기가 어려운 모습이었다.
‘왜 저런 표정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아픈 얼굴이었다. 그의 눈빛은 마치 왜 자신에게 이런 고통을 준 것이냐는 듯, 하늘을 원망하고 있는 듯했다. 그저 예쁜 얼굴로 차분한 모습만 보아 와서 저런 아픔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 했다.
“아, 각하.”
인기척을 느낀 린 남작이 흠칫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금세 평소와 같이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갔지만, 마리는 그가 순간 멈칫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무얼 하고 계셨나요?”
마리는 주저하다가 물었다.
“…….”
린 남작은 답하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지만, 이런 자신의 모습을 들킨 것이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여기는 어떻게 오신 것입니까?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인데.”
“그냥 우연히 걷다 보니…… 혹시 안 좋은 일이 있으신 건가요?”
마리는 자신이 실례하는 것일까 봐 조심히 말했다.
“아, 혹시 말씀하기 어려운 일이면 괜찮아요. 그냥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있을까 해서…….”
그녀의 말에 린 남작은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 평소와 다른 느낌의 미소였다.
“각하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네?”
“각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생각지도 못 한 말에 마리는 당황했다.
“농담하지 마세요.”
“전 농담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린 남작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마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제 생각을?”
린 남작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왜 각하 생각을 한 것인지. 그냥 요즘 들어 계속해서 각하 생각만 나는군요. 저도 이런 제가 이상할 정도입니다.”
얼핏 들으면 오해의 소지가 충분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담긴 뉘앙스는 라엘이나 키에르한, 심지어 요하네프 3세와도 전혀 달랐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마리는 그렇게 느껴졌다.
“아마 제가 각하와 너무 달라 그런 것 같습니다.”
“달라요?”
고개를 끄덕인 린 남작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말없이 그렇게 하늘을 보던 그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저도 제가 왜 이런지 모르겠군요. 특별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모른 척해 주십시오.”
마리는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비에 젖으면 감기 들어요.”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우산을 씌워 주었다.
“돌아가요.”
“네.”
그렇게 함께 빗길을 걷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각하, 궁금한 것이 있는데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각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선하실 수 있는 것입니까?”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목소리에 흐르는 분위기가 묘했던 것이다. 무언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도 기이했다. 마리는 괜히 흠칫한 마음이 들었다.
‘뭐지? 그냥 착각인가?’
마리는 다시 린 남작을 살폈다. 그는 평소처럼 단아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전 남작이 생각하는 것처럼 선하기만 한 것은 아니에요. 클로얀 왕국을 안정시키는 게 제 개인적인 목적과 일치하기에 노력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여전히 묘한 느낌의 음성이었다.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런 걸 묻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입을 열어 물어보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저 멀리서 다급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각하! 각하! 급보입니다! 큰일 났습니다!”
놀라 고개를 돌리니 제방을 관리하는 건설 책임자였다.
‘설마?’
그녀가 갑작스럽게 드는 불길함에 물었다.
“제방에 문제가 생긴 건가요?”
“아닙니다. 각하의 명으로 보수 작업을 해서 제방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레멘강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큰일이 일어난 건가요?”
그는 제방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일이라는 듯 사색이 된 표정으로 외쳤다.
“댐이! 이레테강 상류에 설치된 댐이 붕괴할 위기입니다!”
“……!”
“지금 당장 하류의 성민들을 피난시켜야 합니다!”
댐이 붕괴할 위기다! 마리는 하류에 사는 사람들에게 당장 피난 명령을 내린 후, 한달음에 댐이 위치한 곳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이레테강 상류는 수도와 멀지 않아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맙소사. 신이여.”
마리는 댐의 상태를 보고 창백하게 질려 중얼거렸다. 댐 여기저기에 누수가 발생하고 있었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붕괴할 것이 분명했다.
‘댐이 붕괴하면 물길에 위치한 마을은 한순간에 쓸려 나갈 거야. 어마어마한 사망자가 나올 것이 분명해.’
마리는 물었다.
“물의 예상 경로에 위치한 성읍은 어디가 있나요?”
“가장 큰 성은 서핀 성입니다. 10만이 넘는 인구가 거주 중입니다. 그 외에 3만이 사는 캠타 성도 있습니다. 피난을 준비 중이나 워낙 인구가 많아…….”
마리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안 돼. 상태를 봤을 때 오래 버티지 못하고 붕괴할 거야. 그러면 피난을 못 간 사람들은 모두 사망할 거야.’
두 성읍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성읍 사이에 수많은 마을도 있었다.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마을도 많을 테니,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급류에 휘말릴 것이다.
‘어떻게 하지? 아무리 급하게 피난시킨다고 해도 한계가 있어. 이대로는 수없이 많은 희생자가 나올 거야.’
이 상태에서 방법은 하나였다. 댐이 붕괴하기 전 보수하는 것! 그래야 희생자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보수 작업을 할 수는 없나요?”
“바로 옆에 벅시 성이 있으니 자재를 마련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저 댐을 보수할 만한 기술자가 근방에 없습니다. 그리고 있다고 해도 과연 나서 줄까 의문입니다. 워낙 현재 댐의 상태가 위험해서…….”
마리는 그 말에 침음을 삼켰다. 관리인의 말이 옳았다. 언제 붕괴할지 모르는 댐이다. 보수 작업 중 급류에 휘말릴 수도 있는데, 누가 나서려고 하겠는가?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머리에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내가…… 건축가의 꿈을 꾼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그녀라면, 꿈의 능력을 받은 그녀라면 저 댐을 보수할 능력이 있었다. 마리는 누수가 시작된 댐을 바라보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붕괴까지 얼마나 걸릴까?’
그건 모른다. 며칠이 걸릴지, 아니면 1시간 뒤에 바로 붕괴할지. 지금은 누수이지만 균열로 이어지는 순간 곧바로 붕괴였다. 그 시기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작업 중 댐이 붕괴하면 그대로 사망할 거야.’
아무리 그녀라도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당연히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사람들의 희생을 막으려면 이 방법 외에는 없어.’
외면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의 생명이 걸려 있었다. 마리가 각오를 다지며 입술을 깨무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라엘이었다.
“안 돼.”
“…….”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너에게 기적을 일으킬 힘이 있는 것도 알고. 그래도 안 돼.”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라엘의 입장에서는 말리는 것이 당연했다. 만약 입장을 바꿔서 라엘이 위험한 일에 나선다고 하면 자신도 싫을 것이다. 아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리려고 할지 몰랐다.
“폐하.”
“안 돼. 안 된다고.”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라엘의 눈동자는 그녀를 향한 걱정으로 파르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매번 그의 가슴을 타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마리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가 포기하는 순간, 얼마나 많은 인명이 희생될지 몰랐으니까.
“죄송해요.”
“…….”
“반드시 무사히 끝낼게요. 제게 안전히 공사를 마무리할 방법이 있어요.”
사실 거짓말이었다. 이건 도박과도 같은 시간과의 싸움이었으니까. 언제 붕괴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무리 그녀가 꿈의 능력을 받았다고 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아.”
라엘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는 당연히 반대할 거라 생각하고 어떻게든 그를 설득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가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좋다. 허락하겠다.”
“……!”
마리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라엘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넌 절대 내 말을 듣지 않겠지?”
“…….”
“네 고집을 못 꺾을 바에는 실랑이 벌일 시간에 한시라도 빨리 공사를 시작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서 허락하는 거다. 이건 시간과의 싸움이니까.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거기까지 이야기한 라엘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 공사에는 나도 참가한다.”
“폐, 폐하?”
마리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위험? 너는?”
“저와 폐하는 입장이 다르지 않습니까!”
마리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황제다. 아니, 그런 걸 떠나서 그가 이 위험한 공사에 참여하는 것이 싫었다.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자신만으로 충분했다.
“이 나라의 백성을 위한 거다. 가장 앞에 나서서 백성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나는 가만히 있고 너만 나서겠다고?”
“……!”
“그리고 이건 그대가 위험에 처할 확률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다.”
라엘은 말을 이었다.
“어차피 너 혼자서 할 수 있는 작업도 아니지 않은가? 지금 와서 사람을 구하려면 또 시간이 훌쩍 지나갈 거다. 그리고 내가 이래 뵈어도 이런저런 작업을 많이 해봐서 웬만한 숙련공 못지않다.”
그는 근위 기사단의 인원들을 가리켰다.
“그건 저들도 마찬가지이기도 하고.”
마리는 입을 벌렸다.
“아니, 황자랑 기사분들이 무슨 작업을?”
“내전 초기에 우리는 항상 형편없이 열세여서 신분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두 팔이 있다면 뭐든 다 해야 했지.”
피식 웃은 라엘은 가만히 대기하고 있던 근위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비밀리에 그가 라엘임을 알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그는 하대로 말했다.
“대충 상황은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목숨이 걸린 일이니 강요하지는 않겠다. 원하는 이만 앞으로 나오도록.”
그 자리에 따라온 오십의 근위 기사는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모두 다.
라엘은 눈썹을 꿈틀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명령이 아니다. 탓하지 않을 테니 빠지고 싶으면 빠져도 좋아. 목숨은 하나밖에 없다.”
“그냥 성공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알몬드가 뭐가 문제냐는 듯 말했다. 다른 근위 기사들도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성공하면 그만이지요. 그리고 저희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폐하와 함께이니까요. 내전 당시 이것보다 힘든 상황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맞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이 정도 일은 위험한 것도 아니지요. 폐하와 함께하는 한 저희는 불패입니다!”
근위 기사들이 기사도의 구호를 외쳤다.
“주군께 충성을 바치며!”
“레이디를 존중하며!”
“약자를 보호한다!”
“그러니 시간 없으니 빨리 시작하기나 합시다!”
“끝나면 위험수당으로 술이나 내려 주십시오!”
그들의 용기백배한 외침에 라엘은 어깨를 으쓱하며 마리를 보았다.
“그렇다는군. 시간 없으니 바로 시작하지.”
그 모습을 보며 마리는 괜히 마음이 울컥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광경이었다.
“그러면 먼저 누수가 되는 곳을 수리해야겠지?”
라엘의 물음에 마리는 ‘건축가’의 시선으로 댐을 바라본 후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누수보다 더 급한 것이 있어요.”
“무엇이지?”
“여수로의 정비예요.”
라엘은 곧바로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렇군. 댐의 붕괴를 막으려면 여수로 먼저 뚫어야겠군.”
여수로(Spillway). 댐에서 물이 하류로 흘러내려 가는 길로, 이 댐의 경우에는 일정 수위 이상으로 물이 차오르면 수문이 열리며 자연스럽게 물이 내려가도록 여수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네, 퇴적물이 쌓여서인지 여수로가 모두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어요. 그 때문에 물이 빠져나가지 못해 댐이 받는 압력이 커져 누수가 발생한 것이에요. 그러니 일단 여수로를 뚫어 압력을 해소해 주어야 해요.”
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러면 그대는 근위 기사들을 데리고 여수로를 뚫도록. 나는 누수가 더 심해지지 않도록 보강 작업을 하겠다.”
그렇게 시간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이의 목숨이 걸린 전쟁이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해. 언제 붕괴가 시작할지 몰라!’
점점 누수가 되는 부위가 늘어나고 있었다. 이러다 아차 하면 붕괴할 것이다.
“영차!”
“거기 빨리 치워!”
근위 기사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여수로의 퇴적물을 치웠다. 하지만 퇴적물을 치워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수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왜지? 지금까지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마리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으나, 지금은 원인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일단 문제를 해결하고 봐야 했다.
‘이 문의 구조는…….’
그녀는 수문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복잡한 구조였지만 건축가의 능력을 십분 활용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촤악!
시원한 물이 하류로 뻗어 나갔다. 여수로 한 곳이 드디어 뚫린 것이다.
“와아!”
작업 중인 근위 기사들이 함성을 질렀으나, 마리의 표정은 좋아지지 않았다.
‘작업 속도가 너무 더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댐은 로마 시대에 건축된 것으로 총길이만 1㎞가 넘었다. 그런 댐을 오십 명밖에 안 되는 인원으로 정비하고 있으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는 붕괴되는 속도가 더 빠를지도 몰라. 어떻게 하지?
마리는 초조한 마음에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가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인력이 부족한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때, 가슴이 철렁한 일이 일어났다.
파앗!
“누수가 더 심해진다!”
댐 측면에서 추가적으로 누수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안 돼!’
안 좋은 신호였다. 댐의 내구성이 점점 한계에 도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하지?’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선택을 해야 했다.
‘댐을 포기해야 할까?’
어쩌면 그게 옳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댐이 붕괴하면 이 자리의 모두는 목숨을 잃을 것이니까. 하지만 저 하류에서 피난하지 못한 사람들을 떠올리자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포기하는 순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을지 몰랐다.
‘어쩌지?’
그 순간이었다. 생각지도 못 한 기적이 일어났다. 드높은 함성이 댐을 향해 울려 퍼졌던 것이다.
“우리도 나서자!”
“저희도 같이하겠습니다!”
“제국에게만 맡겨 두지 말자! 댐의 붕괴를 막자!”
마리의 눈동자가 떨렸다. 수백 명이 넘는 사람이 댐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인근의 왕국민들이 소식을 듣고 일을 거들기 위해 나선 것이다.
‘아…….’
제국의 기사들과 왕국민들이 한 몸으로 섞여 일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본 마리는 가슴이 울컥했다. 그녀가 지금껏 간절히 바라던 모습이었다. 왕국민들은 몸을 돌보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마음이 움직여 나서게 된 것이다.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각하!”
왕국민 중 누군가가 외쳤다. 마리도 목소리를 높여 지시를 내렸다.
“인원을 나눠 일부는 여수로의 퇴적물을 치우고, 일부는 누수가 되는 부위에 강화 작업을 해주세요! 시간이 없으니 최대한 빨리 움직여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인원이 열 배 가까이 늘어나자 작업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일단 누수 부위를 수리해 물이 새는 것을 막고, 여수로를 뚫어주었다.
쏴아! 쏴아!
수문이 연달아 열리고 물이 폭포 같은 기세로 떨어지며 하류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시원해지는 광경이었다. 다행히 빗줄기도 많이 약해져 댐의 수위가 점차 내려가기 시작했다.
‘됐어!’
마리는 안전한 곳으로 사람들과 함께 피난 후, 초조한 마음으로 댐을 바라보았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이제 수위가 안정적으로 내려갈 때까지 수리한 댐이 버텨 주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발, 주님.’
그때, 라엘이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괜찮을 거다.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빗줄기가 그치고 무지개가 떠올랐다. 폭우 끝에 떠오른 무지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댐은…… 아무런 문제 없이 무사했다. 결국, 그녀와 사람들의 노력이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와아!”
사람들은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그 기쁨에는 제국의 기사나 왕국민이나 구별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서로를 바라보며 기뻐했다.
그렇게 삶의 터전을 지키게 된 왕국민들은 마리가 있는 곳으로 올라왔다. 그런 그들을 알몬드 자작이 막아섰다.
“계속 댐을 살피다 방금 잠이 드셨다. 매우 무리한 상태이니, 방해하지 말도록.”
그 말에 왕국민들은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마에 비에 젖은 붕대를 감고 있는 소녀는 지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왕국민들은 가슴이 흔들렸다. 모두 저 작은 소녀가 자신들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저 소녀의 목숨을 건 노력 덕분에 자신들은 살 수 있었다. 아무리 그들이 모리나 왕녀를 기다리고 있다지만, 마음이 안 흔들릴 수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어딘가를 후다닥 갔다 오더니 머뭇거리며 알몬드에게 다가갔다.
“무엇이지?”
“그…… 추우실 것 같아서 담요를 가져왔습니다. 물에 젖지 않은 담요입니다.”
알몬드는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렇지 않아도 천이란 천이 다 비에 젖어 덮어줄 것이 없었던 참이다.
“고맙군.”
왕국민 중 한 명이 마리에게 직접 담요를 덮어주었다. 깊게 잠든 것인지 마리는 잠에서 깨지 않고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담요의 포근한 느낌이 좋은 것인지 마리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왕국민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비가 그치고 따스한 햇살이 모두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 * *
그날의 일은 클로얀 지방 전체로 퍼졌다. 왕국 사람들은 뭐라고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잃을 것을 각오하고 나서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거짓말은…… 아니겠지? 그게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인가?”
“예끼! 그런 말 하지 말게! 당시 총독과 제국 기사들이 얼마나 큰 위험을 무릅썼는데!”
“그래, 아무리 그들이 밉더라도 이번 일만큼은 폄훼하려고 들지 말게.”
당시 상황을 목격했던 이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게…… 정말이라고?”
“말도 안 되는…….”
이건 정치적인 문제를 따질 사항이 아니었다. 어떤 누가 그 상황에서 남을 위해 나설 수 있단 말인가? 남을 구하려다 자신이 죽을 위험이 훨씬 높은 상황이었는데. 하지만 저 신임 총독은 그 위험을 감수했다. 바로 그들을 위해.
“도대체…….”
대화를 나누던 이들은 왕성이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모두의 눈에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