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클로얀 지방은 제국의 서쪽 국경에 붙어 있었다. 서제국과 동제국 중앙에 위치해 있었기에 클로얀 왕국은 역사적으로 양 제국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맞추는 완충지 역할을 했고, 제국령이 된 현재는 핵심적인 요충지가 되었다. 클로얀 지방을 넘으면 동제국의 수도까지 아무런 지형적 장애물이 없었다. 탁 트인 평야밖에 없었기 때문에 단숨에 수도까지 진군할 수 있었다.
‘그래서 클로얀 지방을 안정시키는 것은 중요해. 만약 클로얀 지방이 서제국으로 넘어가면 중부 지방, 수도까지 적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니까.’
마리는 마차를 타고 가며 생각했다.
‘잘해야 할 텐데. 내가 잘해 낼 수 있을까?’
마리는 수심에 잠겼다. 당연히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하고 있지만, 솔직히 걱정이 들었다. 단순히 노력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와 동행하던 근위 기사단장 알몬드가 말했다.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각하.”
“아…… 말씀을 편히 해주세요, 자작님.”
마리는 알몬드의 경칭에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알몬드는 라엘의 명에 따라 마리를 호위했다. 그녀의 호위에 동원된 근위 기사의 수는 무려 200명. 황제나 왕이나 받을 법한 호위로, 그녀를 염려하는 라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공식적으로 예비 황후마마이기도 하고, 동시에 폐하의 명을 받은 총독이시니까요.”
총독. 황제의 직권을 대리해 지방을 통치하는 직위로, 보통 공작이나 후작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오히려 각하께서 저에게 말을 편히 해주셔야 합니다.”
“그, 그건…….”
마리는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차후 황후가 되면 그에게 말을 놓아야겠지만, 아직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한데 무슨 걱정을 그리 하십니까?”
“제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걱정되어서요.”
마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온 주제에 자신이 없네요.”
거구의 알몬드는 고민 없이 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잘해 내실 겁니다.”
“왜요?”
“남자의 직감입니다.”
“…….”
뭐랄까. 하나도 신뢰 안 가는 근거였다. 그녀가 그를 흘겨보자 알몬드가 머쓱하니 머리를 긁적였다.
“뭐……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한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몬드의 말이 옳았다.
‘그래, 최선을 다하자. 그러다 보면 어떻게든 될 거야.’
그녀는 굳게 다짐하며 생각했다.
‘이런저런 복잡한 사정이 많지만,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야. 클로얀 지방의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만 생각하자.’
* * *
마차를 타고 약 보름 정도 이동한 끝에 마리는 드디어 클로얀 지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라엘이 최고급 품종의 말과 황족 전용 마차를 내주었기에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클로얀 지방입니다, 각하.”
“……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몬드의 말이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그녀의 고향이니까.
‘이렇게 다시 클로얀의 땅을 밟게 되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그녀의 반가운 마음과 달리 클로얀 지방의 상황은 좋지가 않았다.
‘보고받았던 것보다 더 심각하구나.’
얼마 전 들이닥친 대홍수의 피해로 여기저기 흉측한 흉터가 남아 있었다. 연이은 가뭄에 이은 대홍수라 피해가 막심했다.
‘국경 지대의 마을도 이런데, 홍수 피해가 가장 극심한 내륙 지방은 어떨지.’
그런데 그때였다.
“꺼져라, 제국 놈들아!”
탁!
어디선가 작은 돌이 날아와 그녀 근처에 떨어졌다.
“……!”
마리가 놀라 고개를 돌리니 눈이 빨개진 꼬맹이가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감히.”
알몬드가 꼬맹이를 노려보며 검을 들려 했다. 마리가 급히 그를 말렸다.
“괜찮아요.”
“하지만 각하.”
마리는 황제가 직접 임명한 총독이자 제국의 예비 황후이다. 그런 그녀에게 돌을 던진 것은 죽음으로 갚아야 할 중죄였다. 알몬드가 쉽게 검을 거둘 생각을 안 하자, 마리는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정말로 괜찮으니 그만두세요.”
“……알겠습니다.”
알몬드는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섰다. 마리는 안쓰러운 눈으로 꼬마를 바라보았다. 넝마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깡마른 꼬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꼬마가 왜 돌을 던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전쟁고아구나.’
제국과 클로얀 왕국 사이에 일어났던 전쟁으로 수많은 이가 가족을 잃었다. 아마 저 꼬마도 그중 하나이리라. 그러니 제국을 증오하는 것도 당연했다. 마을 사람 중 하나가 급히 꼬마를 데려갔다. 그 마을 사람의 시선에도 제국을 향한 적의가 감돌고 있었다. 마리는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녀의 마음이 납덩이를 얹은 것처럼 무거워졌다. 앞으로 그녀는 저런 이들의 마음을 돌려야 한다. 저들을 따뜻하게 품고, 궁극적으로는 행복한 웃음을 짓게 하여야 했다.
‘주여, 저들을 축복해 주시고 저를 도와주소서.’
마리는 기도하며 마차를 달렸다. 며칠 뒤 그녀는 드디어 목적지인 클로얀 지방의 수도 커먼 성에 도착했다.
* * *
커먼 성은 왕성이 위치한 곳으로 과거 클로얀의 수도로 번성했다. 지금도 클로얀 지방을 통치하는 총독부가 위치해 있었다. 그런 커먼 성의 분위기는 외곽 지역보다 훨씬 더 좋지 않았다. 얼마 전 대홍수로 가장 큰 피해를 받은 도시이기도 했고, 최근에는 반란까지 일어났다가 진압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반 제국 세력인 전 왕실 기사단의 인물들이 비밀리에 활동하는 지역이기도 해서, 황실의 문양이 찍힌 그녀의 마차를 바라보는 눈빛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분위기가 좋지 않군요. 총독 관저 밖으로 나올 때는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알몬드의 말에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커멓게 가라앉은 안색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거리 사람들의 눈에는 적의가 강하게 깃들어 있었다.
그렇게 시내를 한참 통과한 후, 알몬드가 그녀에게 말했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각하.”
마리는 고개를 들어 마차 밖을 바라보았다. 웅장한 백색 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과거 클로얀 왕국의 왕성이었다. 모리나 왕녀였던 그녀가 유폐되었던 통원의 궁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총독부의 핵심 인물 2명이 그녀를 마중 나왔다.
“힐데른 총독 각하를 뵙습니다. 총독부의 행정을 담당하는 서기관 린 남작이라고 합니다.”
말을 한 이는 자잘한 서류 업무부터 모든 행정적 절차를 총괄하는 린 남작이었다.
‘와…….’
마리는 지금껏 긴장하던 것도 잊고, 린 남작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 예쁜 남자가 있다니.’
은발에 가까운 옅은 백금발, 투명한 푸른 눈동자, 선이 가는 얼굴선. 그저 수식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여인처럼 아름다운 이였다. 골격도 작고 여려 도저히 남자로 보이지 않았다.
‘나보다 훨씬 예쁘잖아. 혹시 남자가 아닌 것은 아니겠지?’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듯 린 남작이 살짝 웃었다. 여자는 물론 남자의 가슴마저 설레게 할 예쁜 미소였다.
“이래 뵈어도 건강한 남자가 맞는답니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마시고 마구 부려 먹어도 됩니다.”
“아…… 네.”
“어쨌든 이렇게 각하를 뵙게 되어 기쁩니다. 이전부터 간절히 뵙고 싶었습니다.”
마리가 의아함에 눈을 크게 뜨자 린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전부터 여러 번 이야기를 들어 궁금했거든요. 과연 어떤 분인지.”
그러며 린 남작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래서 정말로, 정말로 뵙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웃음을 본 순간, 마리는 흠칫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뭐지?’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부드러운 미소였다. 그런데 왜 이런 섬뜩한 느낌이 드는 건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냥 피로해서 드는 착각인가?’
마치 거짓이었다는 듯 흠칫한 느낌은 금방 사라졌다. 마리는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지만, 더 깊게 생각할 만한 근거가 없었다. 무엇보다 저 개미 한 마리 못 잡을 것처럼 여리고 선해 보이는 남자가 위험한 인물일 거라는 것은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여기 이분은 신임 고문관인 윈터 백작님이십니다.”
고문관은 총독부에서 총독 바로 다음 서열로 그녀를 도와 대내외적인 일을 총괄하는 직위이다.
‘라엘 폐하께서 믿을 만한 인물을 신임 고문관으로 보낸다셨지.’
문득 라엘 생각이 난 그녀는 그가 그리웠다. 벌써 못 본 지 20일이 넘어간다. 보고 싶었다. 그때, 린 남작의 소개를 받은 윈터 백작이 앞으로 나섰다.
“윈터 백작이라고 한다.”
“……!”
순간 그 자리의 모두가 흠칫 놀라 윈터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가 초면에 신임 총독이자 예비 황후인 그녀에게 너무나 편하게 하대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하대가 너무나 자연스러워 전혀 이상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 실수를 했군. 윈터 백작이라고 합…… 니다, 각하.”
윈터 백작은 모두가 자신을 보자 실수를 깨닫고 말을 정정했다. 하지만 경어가 더 어색했다. 평생 하대만 하고 산 것처럼 경어를 쓰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
‘윈터 백작님이 이렇게나 카리스마가 넘치는 인물이었나?’
마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뭐랄까. 굉장한 카리스마와 위압감이 느껴졌다. 호랑이가 억지로 몸을 낮추고 고양이인 척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뭐지? 듣던 거랑 많이 다르네?’
다른 것은 분위기만이 아니었다. 외모도 초상화와 전혀 달랐다. 마치 신이 직접 붓을 들고 그린 그림처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마리는 이렇게나 아름다운 얼굴선을 가진 인물을 지금껏 한 명밖에 보지 못했다. 바로 라엘 황제였다.
“어쨌든 두 분 다 잘 부탁해요. 부족하지만 신임 총독으로 부임받은 마리 폰 힐데른이라고 해요.”
마리는 총독부의 두 중요 인물과 인사를 나누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 여독을 푸시지요. 총독 관저는 클로얀의 왕이 사용하던 궁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린 남작은 전반적인 상황을 설명할 서류를 챙겨 오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떠나는 뒷모습도 부드럽고 예뻐, 마리는 신기하단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남자가 저렇게 예쁠 수 있는 건지 놀라웠다.
‘그나저나 전 국왕이 사용하던 중앙궁을 총독 관저로 사용하고 있다고?’
마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래도 되는 걸까? 클로얀 지방의 백성들이 불쾌하게 여길 수도 있을 텐데.’
마리는 이 문제를 다시 한번 고민해 보기로 하였다. 그때, 윈터 백작이 말했다.
“따라와라. 음식과 씻을 물을 준비해 두었다.”
그는 또 아차 한 표정으로 말을 바꾸었다.
“준비해…… 두었습니다.”
엄청 어색한 말투라 마리는 쿡쿡 웃음을 지었다. 사실 웃을 일은 아닌데, 왜인지 이유 없이 그에게서 친숙한 느낌이 들며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그렇게 걸어가던 중 윈터 백작이 그녀를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이라 마리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윈터 백작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혹시 오는 중 힘들지는 않았습니까?”
생각지도 못 한 염려에 마리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어요.”
“식사를 거르거나 하지는 않았습니까? 잠자리는 괜찮았습니까?”
“네, 그냥…….”
그녀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윈터 백작은 냉기가 가득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몸을 챙겨야 합니다. 식사도 거르지 말고. 알겠습니까?”
“……네, 명심할게요.”
마리는 어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닿으면 베일 것 같은 차가운 얼굴로 저런 말이라니? 그냥 표정만 저런 거고 원래는 굉장히 따뜻한 성격인 건가?’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꼭…….’
마리는 윈터 백작과 비슷한 성격의 남자를 떠올렸다. 바로 라엘이었다. 라엘도 늘 저렇게 무뚝뚝한 말투로 자신을 걱정해 주었었다. 그때는 그 소중함을 잘 몰랐는데, 이렇게 떨어지니 알 수 있었다. 그립고, 못 보니 계속해서 떠올랐다.
‘보고 싶어요, 폐하.’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 * *
“이상이 현재 클로얀 지방의 상황입니다, 각하.”
간단히 휴식을 취한 후 린 남작의 보고를 들은 마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최악이군요.”
“네, 맞습니다.”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껏 폐하가 펼쳐 온 융화책은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금을 감면해 주고, 여러 혜택을 보장하는 등 굉장히 훌륭한 융화책이었죠. 하지만 문제가 생겼으니.”
린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바로 수년을 거듭한 가뭄과 대홍수입니다. 실제로 재난에 제국이 관여한 바는 전혀 없지만, 백성들은 제국이 왕국을 점령했기 때문에 이런 재난이 왔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마리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하필 점령 후부터 가뭄이 왔으니까요.”
린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그래서 제국이 아무리 친화적인 융화책을 펼쳐도 왕국민들은 꿈쩍도 안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여기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마리는 린 남작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짐작했다.
“모리나 왕녀군요.”
“역시 제국의 성녀, 힐데른 자작님이시군요. 맞습니다.”
린 남작이 감탄하며 말한 표현에 마리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제국에서 세운 공들로 최근 그녀를 ‘제국의 성녀’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힘든 처지에 처할수록 사람들은 정신적 도피처를 찾으려 하니까요. 왕가의 마지막 후예이자 어린 나이임에도 여러 구제 활동을 펼쳤던 ‘얼굴 없는 성녀’, 모리나 왕녀가 그 도피처가 된 것이지요.”
“…….”
“실제로 왕가의 부활을 바라는 잔당 세력이 퍼뜨린 소문까지 합쳐져, 백성들은 모리나 왕녀를 자신들을 구원해 줄 희망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거기까지 들은 마리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상황이 예상보다 심각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린 남작과 윈터 백작이 동시에 물었다. 같은 물음이었지만 안에 담긴 뉘앙스는 조금 달랐다. 린 남작은 그 유명한 힐데른 자작이 어떤 묘책을 낼지 기대된다는 눈치였고, 윈터 백작의 눈에는 그녀에 대한 염려와 신뢰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상황이 복잡하지만 해야 할 일은 명확해.’
마리는 생각을 정리 후 입을 열었다.
“일단 백성들의 생각을 직접 들어봐야겠어요. 외유를 준비해 주세요.”
신분을 숨긴 후 거리에 나간 마리는 직접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착한 인상의 그녀에게 사람들은 별다른 경계심 없이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이렇게 재앙이 온 것도 다 피의 황태자가 우리 왕국을 침략해서야. 하늘이 노한 거라고.”
“맞아. 가뭄이 계속되다가 이번에는 대홍수라니. 이전에는 이랬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찾아온 가뭄에 대홍수, 반란까지. 연이은 재난에 사람들은 괴로운 삶을 이어 가고 있었다. 당장 내일 먹을 끼니를 걱정하는 이도 많았다. 그렇게 삶에 지친 백성들은 희망을 찾았다.
“모리나 왕녀께서 빨리 오셨으면 좋겠어. 왕녀님이라면 우리를 구해 줄 수 있을 텐데.”
“맞아. 유폐당한 어린 시절에도 우리를 위하던 분이니, 분명 우리를 도와주실 거야.”
“그렇지 않아도 옆 동네의 신묘한 힘을 가진 집시가 미래를 예지하는 꿈을 꾸었는데, 모리나 왕녀가 곧 오신다더군.”
“그게 정말이야?”
“그래,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가 있는데 이건 비밀이니 아무한테나 떠들지 말게.”
“무슨 이야기인데?”
사람들은 한 남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마리도 사람들 틈에 섞여서 이야기를 들었다.
“모리나 왕녀가 은밀히 전 왕실 기사단에 연락을 취했다는 거야. 곧 클로얀 왕국을 해방시키러 온다고.”
“그게 정말이야? 지난번 반란처럼 거짓인 것은 아니야?”
“아니야. 이번에는 정말인 것 같아.”
남몰래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리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언제?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그것뿐이 아니었다. 성 안에는 모리나 왕녀에 대한 별의별 소문이 다 돌고 있었다. 왕국을 해방하기 위해 치밀한 준비를 하고 있다느니, 곧 군대를 몰고 올 거라느니, 사실은 모리나 왕녀가 천사라느니. 진짜 모리나 왕녀인 그녀로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였다.
‘생각보다 모리나 왕녀를 바라는 목소리가 높구나.’
이런 황당한 유언비어가 떠도는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백성들이 그만큼 그녀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지?’
왕국민들이 설마 이 정도로 자신을 바라고 있을 줄은 몰랐던 마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괜히 라엘이 모리나 왕녀의 목을 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은 마리는 관저로 돌아왔다.
‘이대로는 안 돼.’
직접 들은 민심은 굉장히 심각했다. 이대로 놔두면 클로얀 지방은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방법을 생각해야 해.’
그녀는 골똘히 대책을 강구했다.
‘일단 가장 첫 번째 과제는 왕국민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거야. 이렇게 궁핍한 상황에서는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을 거야.’
마리는 복잡한 상황에 현혹되지 않고 사태의 본질을 꿰뚫었다. 백성들이 제국에 등을 돌린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삶이 궁핍하기 때문이다. 모리나 왕녀를 찾는 것도 그녀가 자신들을 구해 주길 바라는 것이다.
‘일단 추수철 때까지 버틸 식량을 배급해야 해. 이대로는 수많은 사람이 아사하고 말 거야.’
마리는 린 남작과 윈터 백작을 불러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윈터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재원은 어디서 마련할 것입니까?”
“총독부에서 가용 가능한 금액이 얼마나 되지요?”
그건 린이 답했다.
“빠듯하게 모으면 50만 페나 정도 추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마리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50만 페나. 턱없이 모자랐다.
“적군요. 더 사용할 수 있는 돈은 없나요?”
“이것도 제국 황실에서 지원해 주어서 가능한 금액입니다. 거듭해서 재난을 당한 클로얀 지방민들에게 세금을 거의 면제해 주었기 때문에 총독부 재정은 이미 파탄 상태입니다.”
마리는 침음을 흘렸다.
‘폐하께 지원을 요청할까?’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제국 황실도 재정이 빠듯함은 보좌관이었던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거대 제국은 들어오는 수입도 많지만, 나가는 지출은 더 많다. 이미 클로얀 지방에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식으로 재정을 퍼붓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지원은 불가했다.
그때, 윈터 백작이 말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구휼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고문관인 저도 동의합니다. 재정이 문제라면 황제 폐하께 내가 어떻게든 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 말에 마리는 고맙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감사해요. 하지만 제국 황실도 재정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라 먼저 다른 방법을 강구해 봐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없는 돈을 갑자기 만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황제 폐하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
윈터 백작의 말이 옳았다. 다른 문제라면 몰라도 재정 문제는 그녀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해결할 수가 없다.
‘하지만 황실의 도움을 받는 건, 결국 제국민 전체에 부담을 강요하는 거야. 다른 방법은 없을까?’
정말 어쩔 수 없다면 손을 벌려야겠지만, 마리는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 내고 싶었다.
그때, 린 남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디서 금광이나 보석 광산이라도 발견되었으면 좋겠군요. 그러면 펑펑 돈을 쓸 수 있을 텐데.”
그 말을 들은 마리의 눈이 흠칫 커졌다.
‘잠깐. 지금 뭐라고?’
“남작님, 방금 뭐라고?”
“네? 아, 그냥 광산이라도 발견되었으면 좋겠다고…… 왜 그러십니까?”
린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으나, 마리는 그를 신경 쓰지 못했다. 방법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 그거야! 그거라면 황제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윈터 백작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면 황궁에 연락해 재정 지원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돈을 마련할 방법이 있어요.”
린 남작과 윈터 백작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각하?”
“제 개인 재산을 사용하면 돼요.”
린 남작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각하께서도 돈이 많긴 하겠지만 왕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구휼입니다. 한두 푼으로 될 것이…….”
“천만 페나.”
“……네?”
마리는 품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었다. 그 서류를 본 린 남작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예치 증명 서류였는데, 정말로 천만 페나란 금액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제가 가진 재산이에요. 이걸로 백성들을 구휼하겠어요.”
천만 페나. 이전 카탈락 백작, 아니, 요하네프 3세와의 도박에서 승리한 대가로 얻은 돈으로 어마어마한 거금이었다. 이 정도면 백성들을 구휼하고도 남았다.
“천만 페나라니…… 어마어마한 부자셨군요.”
린 남작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냥 운 좋게 얻은 돈일 뿐이에요.”
도박으로 딴 거니 운 좋게 얻은 거는 맞았다.
‘완전히 잊고 있었어.’
마리는 머쓱하게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돈을 만질 일이 없다 보니 천만 페나를 받은 것을 까먹고 있었다.
‘어쨌든 다행이야. 이 정도면 급한 불은 충분히 끄겠지.’
그때, 린 남작이 묘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천만 페나를 다 잃게 되는 건데. 되돌려 받지도 못 할 겁니다. 아깝지 않으십니까?”
마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도 사람이니 물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전혀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리라.
“제가 가지고 있으면 어차피 은행에서 썩을 돈이에요. 반면 이렇게 사용하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으니까요. 어차피 주님께서 거저 주신 돈.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조심히 말했다.
“그래도 조금은 아쉬우니…… 일만 페나만 남겨 주세요. 아, 아니, 혹시 모자라면 괜찮고요.”
린의 눈빛이 더욱더 오묘해졌다. 남을 위해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거금을 내놓는 것이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이었다. 그러나 그 묘한 눈빛도 잠시, 쿡쿡 웃음을 터뜨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만 페나 정도는 충분히 남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윈터 백작이 말했다.
“황제 폐하께는 뭐라고 할 겁니까? 그 천만 페나는 폐하가 각하께 직접 하사한 것이 아닙니까?”
마리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아마…… 폐하라면 기뻐하실 거라 생각해요. 제가 아는 폐하는 누구보다도 백성을 생각하는 분이니까요.”
그 대답에 윈터 백작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오히려 폐하라면 더 차고 넘치게 부어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구휼미를 마련하는 것은 내가 담당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최대한 싸게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만 페나 이상은 충분히 남겨 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리는 살짝 얼굴이 빨개졌다.
“그, 그냥 해본 말이에요. 안 남겨 주셔도 괜찮으니…….”
“아니, 남겨 주겠습니다. 그것도 아주 넉넉하게요.”
윈터 백작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이래 뵈어도 여러 인맥이 많으니 아마 다들 싸게 팔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렇게 마리의 사비를 턴 구휼이 시작되었다.
* * *
인맥이 많다는 윈터 백작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는지 구휼 식량은 순식간에 마련되었다. 곧 식량을 잔뜩 실은 수레 마차들이 왕국 곳곳으로 달려갔다.
“저게 뭐지?”
거듭된 재난으로 퀭한 눈동자의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마차들을 경계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다 곧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수레에 쌓여 있는 산더미 같은 식량을 본 것이다.
“저, 저건? 뭐지?”
굶주림이 길었던 탓에 다들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총독부에서 나온 관리가 큰소리로 외쳤다.
“다들 줄을 서십시오! 구휼 식량이 나왔으니, 사람 수에 맞추어 배급을 시작하겠습니다!”
“……!”
왕국민들은 깜짝 놀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구휼 식량이라고?
“뭐지?”
어쨌든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서둘러 줄을 섰다. 이런저런 것을 따지기에는 배고픔이 너무 길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구휼 식량을 주는 거지?”
“신임 총독이 왔다던데, 그 총독이 베푸는 건가?”
“에이, 설마.”
사람들은 배급을 기다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지도 못 했던 구휼인지라 다들 이 식량의 출처를 궁금해했다. 거듭된 흉년으로 클로얀 지방에서는 이런 식량을 마련할 여력이 없었다. 누군가 용기를 내서 물었다.
“저, 관리님.”
“왜 그러십니까?”
“이 식량은 어떻게 마련된 것입니까?”
그 물음에 관리는 놀라운 대답을 하였다.
“총독 각하 개인의 사비로 마련한 것입니다.”
모두의 얼굴이 놀람이 떠올랐다. 이 많은 식량이 총독 각하 개인의 재산으로 마련한 거라고?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웅성거렸다. 그때, 누군가 다른 질문을 하였다.
“그러면 이 구휼미는 어느 정도의 이율로 언제 갚아야 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할 내용이었다. 세상에 공짜 구휼 식량은 없었다. 아무리 구휼이라도 훗날 추수가 끝나면 갚아야 했다. 때로는 이 과정에서 폭리를 취하는 악독한 군주도 있었다.
그 물음에도 관리는 친절한 태도로 답하였다. 혹시나 백성들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도록 마리가 사전에 단단히 주의를 준 덕이었다.
“갚지 않아도 됩니다.”
“……네?”
“이 구휼은 전적으로 힐데른 총독 각하의 개인 사비를 들여 배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유가 된다면 갚아주시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갚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홍수를 겪었으니 추수철 작황도 안 좋을 것이 뻔했다. 마리가 판단하기에는 겨울을 나는 것도 모자랄 것이 분명해 무상 배급을 결정한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왕국민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살면서 무상 배급이라니. 듣지도 보지도 못 한 일이다.
“이번 신임 총독은 상상할 수도 없는 부자인 건가?”
“그러게 말이야. 돈이 너무 많이 남아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부자인가 봐.”
충분히 그럴 법한 오해였다. 돈이 정말 차고 넘쳐 주체할 수 없는 한 이런 일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돈이 많으니까 이런 일도 가능한 거지.”
“그러게. 신임 총독은 얼마나 부자인 건지 짐작도 안 되는군.”
하지만 오해는 곧 밝혀졌다. 원체 마리가 유명 인사였던지라, 클로얀 지방에서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시녀 출신이었다고? 그것도 하급 시녀?”
“그래, 그뿐 아니라 전쟁 포로 출신이라 거의 봉급도 받지 못했었다고 하던데?”
“그런데 어떻게 이런 돈을?”
“이전에 큰 공을 세우고 받은 포상금을 턴 거라고 하더라고. 전 재산을 탈탈 턴 거라고 하던데?”
그 말을 들은 왕국민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가진 전 재산을 털어 구휼 식량을 마련한 거라고?”
그들은 자신들의 손에 들린 식량을 바라보았다. 그런 왕국민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모두 같았다.
‘어째서 이런 일을?’
의아해하는 이는 왕국민들만이 아니었다. 본토에 사는 제국인들, 특히 몇몇 귀족 중에는 의아함을 넘어 강한 목소리로 그녀를 비난하는 이도 있었다.
“그 큰돈을 그렇게 낭비하다니요. 더 가치 있게 쓸 수 있는 일도 많았을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제국 본토에도 돈이 필요한 일이 많은데.”
하지만 마리는 그들의 비난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어차피 제 개인 돈이니, 어떻게 사용할지는 모두 제 권한이에요.”
물론 마리도 안다. 천만 페나면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많다는 것을. 하지만 당장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이들을 구하는 것보다 급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돈도 꽤 남았어. 윈터 백작님이 저렴하게 식량을 구해서.’
도대체 무슨 인맥을 동원한 것인지 윈터 백작은 시세보다 싼 가격에 식량을 구해 왔다. 그것도 보통 싼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가격으로 사왔다.
‘불법적인 수단을 쓴 것은 아니겠지? 정상적인 거래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가격인데.’
마치 칼을 들이밀고 협박이라도 한 듯한 가격. 마리는 얼떨떨하게 생각했다.
‘어쨌든 급한 굶주림은 해결했으니, 다음에는 복구 작업을 해야 해. 아직까지 수해가 제대로 복구되지 못하고 있어.’
역시 이번에도 문제는 복구 작업에 필요한 돈이었다. 클로얀에는 피해를 복구할 만한 돈이 부족했다.
‘정말 재정이 빠듯하구나. 하긴 이건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지겠지.’
마리는 새삼 라엘의 고충이 이해가 되었다. 그가 가장 고민했던 것도 재정 문제였다.
‘일단 구휼 식량을 구하고 남은 돈으로 급한 복구라도 해야겠구나.’
마리는 총독 관저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서 돈이라도 떨어졌으면 좋겠다. 주님, 도와주세요.’
그런데 그러고 나서 며칠 뒤, 말도 안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뭐라고요?”
마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덴틸슨 광산에서 금강석이 발견되었다고요?”
“네, 자작님. 축하드립니다!”
부랴부랴 달려온 광산 관리인이 기쁜 표정으로 외쳤다.
덴틸슨 광산. 그녀가 전염병을 해결한 공로로 라엘에게 받은 광산이었다. 나름 알짜배기 광산이긴 했지만 금은은 채취되지 않아 2급의 광산이었는데, 다이아몬드의 원석인 금강석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매장량은요?”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마리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쪼들렸는데 재정 문제에서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당분간은 돈 걱정을 크게 하지 않아도 되리라.
“대단하군요. 정말 각하께는 신의 가호라도 함께하는 것 같습니다.”
린 남작이 말했다. 이렇게나 딱 맞춰 호재가 터지다니. 그는 다소 황당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린은 예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쨌든 다행입니다. 앞으로는 복구 작업을 훨씬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게 되었군요.”
“네, 다행이에요.”
“그러면 저는 관련 서류들을 다시 한번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부탁할게요.”
린 남작은 고개를 숙이고, 마리의 집무실에서 나왔다.
그렇게 클로얀 지방은 대규모 복구 작업을 시작하며 모처럼의 활기를 띠게 되었다.
“영차!”
“거기 조심하게!”
사람들의 얼굴에 간만에 밝은 기운이 돌았다. 좋은 일이 이어지니 저절로 밝은 표정이 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네. 그렇지 않아도 경작지와 수로를 제대로 정비하지 못해 가을 작황이 걱정이었는데.”
“그러니까. 이대로 놔두면 곧 다가올 여름철에 전염병도 심했을 텐데, 정말 다행이야.”
복구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대화가 자연스레 신임 총독으로 흘렀다.
“이번 일도…… 신임 총독이 도와준 거라고 하지?”
“그렇다고 하더군.”
사람들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우리를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거지?”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의문을 표시했다. 물론 어진 총독이 온 것은 기쁜 일이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어진 정도가 아니지 않는가?
“이 정도면 보통 큰돈이 드는 것이 아니었을 텐데…….”
“넌지시 총독부에서 일하는 친척에게 들으니 가진 재산을 다 털어놓고 있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도대체 왜?”
고깝게 생각한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현혹하려는 것 아닐까? 돈으로 눈을 멀게 하는 거지.”
그 생각에 많은 이가 동의했다. 제국의 군마에 짓밟히고 가족을 잃은 게 채 5년도 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아직 제국을 곱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때,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래도…… 우릴 현혹하려는 목적이라도 난 고맙다는 마음이 드네. 이렇게 사비를 털어 우리를 도와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그 말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모리나 왕녀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그래도 신임 총독분도 나쁜 분은 아닌 것 같네.”
“부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아직은 몰라.”
“그렇긴 하지. 그래도 제국 내에서도 ‘제국의 성녀’라고 불린다지 않나? 어떤지 한번 지켜보게.”
사람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서 볼 수 있듯이 마리가 이번에 한 일이 클로얀 왕국민들의 마음을 돌아세운 것은 아니었다. 왕국민들은 여전히 제국을 증오하고, 모리나 왕녀를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기. 왕국민들이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투자한 자원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성과일 수도 있지만, 마리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었고, 무엇보다 힘들어하던 클로얀 왕국민들이 처음으로 웃기 시작했으니까. 그러니 충분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왕국민들 모두에게 선명히 마리란 이름이 선명히 박혔다는 것이다.
한편, 총독부 관저 조용한 방에서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오자마자 변화가 일어나는군.”
여인보다도 아름다운 얼굴.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남자의 이름은 린 남작이었다.
“요하네프 폐하의 말씀처럼 그녀의 곁에는 정말 신의 가호라도 함께하는 것인가.”
그런 린 남작의 얼굴은 마리에게 보여 주었던 것과는 달리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신의 가호라…….”
린…… 아니, 서제국의 악명 높은 음모가 라키 드 스토른 백작은 창문을 통해 저 높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웃기고 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