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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키에르한과의 대화를 마친 마리는 사자궁으로 돌아왔다. 다만 황태자의 집무실로 향하지 않고, 주방으로 향했다.
“자작님?”
갑작스레 그녀가 주방에 오자 주방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식사 시간은 지났는데…….”
지금 시간은 저녁 8시 정도였다. 마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요즘 입맛이 없으신 듯해서 제가 간단한 요리라도 해드리려고요.”
“아…… 그렇군요.”
주방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인지 황태자의 식사량은 현저히 줄어든 상태였다. 그녀가 직접 요리를 해준다면 입맛이 더 날지도 몰랐다.
“얼마든지 사용하십시오. 귀한 설탕이든 후추든 뭐든지 사용해도 좋습니다.”
“네, 감사해요.”
간만에 주방에 선 마리는 요리 도구를 들며 생각했다.
‘최대한 황태자 전하의 입맛에 맞추어서…….’
마리에게는 여러 요리사의 능력이 있었다. 과자 굽는 능력, 파티시에의 능력, 가정집 요리, 그랜드 비프 마스터의 솜씨. 그녀는 그 능력들을 최대한 발휘해 솜씨를 부리기 시작했다.
‘전하는 깔끔하고 담백한 스타일을 좋아하시니까. 기름기를 뺀 요리를 하고, 이전에 좋아하셨던 디저트도 같이 만들자.’
마치 전문 쉐프처럼 그녀의 손이 쓱쓱 지나가자 여러 요리가 짠 하고 완성되었다. 최고의 요리사가 정성 들여 만든 것처럼 보기에도 아름답고 맛도 좋을 것 같은 요리였다.
‘최대한 예쁘게.’
그녀는 마치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이 정성을 다해 접시에 음식을 담았다.
“허허, 정말 대단하군요. 못하는 게 없으시다고 들었지만, 요리도 이렇게 정통하다니. 황궁 최고의 요리사라는 이름은 오늘부로 내려놓아야겠습니다.”
사자궁의 쉐프가 감탄하며 말했다.
‘와인도 가져가야겠다.’
마리는 이전에 황태자가 좋아했던 와인을 주방에서 찾아 꺼내었다.
‘아무래도 술을 조금 마시는 게 이야기하는 데 낫겠지.’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자신이 이야기를 꺼내면 황태자가 어떤 반응을 할지 모르겠다. 최소한 기뻐하지는 않을 거다.
‘아니, 화를 낼지도…….’
그녀는 오늘 자신이 생각한 방법을 황태자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이전 사건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위험한 일이니, 좋은 반응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래도 꼭 이야기해야 해.’
그녀는 마치 전장에 나서는 것처럼 각오를 다지며 음식을 들고 황태자의 집무실을 찾았다.
“전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마리입니다.”
“들어오도록.”
황태자는 늘 그렇듯 서류를 보고 있었다. 알몬드는 근위 기사단의 일을 보러 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그건?”
라엘은 마리가 들고 온 음식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나같이 그가 좋아하는 요리였다.
“아, 요즘 식사를 잘 못 하시는 듯하여 준비해 보았습니다. 입맛에 맞을지는…….”
마리는 괜히 긴장돼 말을 더듬었다. 다행히 황태자는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고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네가 직접 한 요리인데 입맛에 안 맞을 리가 있겠느냐. 어쨌든 고맙구나. 그렇지 않아도 최근 마음이 복잡해 술이라도 한잔하고 싶었는데.”
“……네.”
그의 다정한 포옹에 마리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긴장된 상황과 별개로 그의 품은 언제나 두근거리고 따뜻했다. 라엘은 그녀가 요리한 음식을 감탄한 표정으로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이렇게 직접 요리하진 말도록. 네가 고생하는 것은 싫으니까. 알겠지?”
마리는 그의 품 안에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집무실에 놓인 쇼파에 나란히 앉아 음식과 와인을 들기 시작했다.
“마리, 너도 같이 들도록.”
“네, 전하.”
마리는 원래 술을 마실 생각이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술을 살짝 마셨다. 황태자는 최근에 연달아 터진 일들로 마음이 좋지 않은지 묵묵히 술을 마셨다.
‘전하.’
마리는 그런 그가 안쓰러웠다. 늘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 주지만, 그도 사람이니 심적으로 힘들 것이다. 특히 키에르한을 처형하기로 결정한 것은 아무리 그라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리라. 서로 깊은 친우 사이였으니.
마리는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전하.”
“말해보도록.”
“키에르한 후작을 살려 주실 수는 없으신가요?”
민감한, 어떻게 보면 주제를 넘는 질문이었지만 다행히 황태자는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살짝 술기운이 올라온 얼굴로 씁쓸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어렵지.”
“…….”
“나도 그를 처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반기를 든 이를 그대로 넘어가면 황권의 위엄을 올바로 세울 수가 없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쩔 수 없다, 이 말이 그녀의 가슴에 와서 박혔다. 라엘은 본인의 감정보다 대국적인 면을 우선시했다.
“그러면 전하, 혹시 이전에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어떤?”
“제가 큰 공을 세우면 한 가지 부탁을 들어준다고 하셨던 말씀 말입니다.”
과거 그녀에게 그런 약속을 하긴 했었다. 지나가듯이 말한 거라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그녀가 그 이야기를 꺼내자 라엘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기억나지. 말해보아라.”
“말씀드리기 전에 묻겠습니다. 들어주실 수 있는 부탁이면,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시겠습니까?”
“당연하지. 이전에 약속하지 않았느냐? 난 약속을 어기는 이가 아니다.”
마리는 숨을 들이쉬었다. 이 말을 꺼내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웠다.
‘하지만 해야 해. 이 방법 외에는 없어.’
각오한 그녀는 말을 꺼냈다.
“저를 클로얀 지방으로 보내 주십시오.”
“……뭐?”
술잔을 입가에 가져가던 황태자의 얼굴이 뻣뻣이 굳었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지금 뭐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마리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말을 이었다.
“6개월의 시간만 주시면 제가 클로얀 지방의 혼란을 안정시켜 보겠습니다. 만약 제가 그렇게 해낸다면 이전 전염병을 해결한 공에 더하여, 그 공들로 키에르한 후작님의 목숨을 살려 주세요.”
“…….”
“이게 전하께 드리는 부탁입니다.”
* * *
말을 마친 마리는 황태자의 눈치를 살폈다.
‘저질렀어.’
그녀가 생각하기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 외에는 없었다. 황제 즉위를 반대한 키에르한의 목숨을 살리려면 그에 상응하는 공을 추가로 세울 수밖에 없었고, 현재로서는 혼란에 빠진 클로얀 지방을 안정시키는 방법만이 유일했다. 작금의 정세상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지방인 클로얀 지방을 안정시키는 공이라면, 키에르한의 목숨을 살리는 명분이 충분히 될 수 있었으니까.
‘또한, 내 정체를 전하께 말씀드릴 수 있어.’
그녀가 그에게 진실된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것은 근본적으로 클로얀 지방이 혼란하기 때문이다. 만약 클로얀 지방이 안정된다면, 자신이 모리나 왕녀임을 드러내도 문제가 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전하에게 내 진실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클로얀 지방이 안정되어야 해.’
다만 문제는 이 일이 지극히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반란까지 일어난 상황에서 황제의 직권을 대리하는 행정관으로 파견되면 어떤 위험에 노출될지 모른다. 어떻게 보면 사지(死地)와 다름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그래도 해내야 해. 반드시.’
마리는 굳은 표정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한편, 라엘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클로얀 지방이라고? 그곳이 지금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인가?”
“…….”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가 맞느냐고 물었다.”
낮은 목소리에 담긴 분노에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껏 그가 화내는 것을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까지 분노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자신이 아끼는 여인이 사지가 될지도 모르는 곳으로 간다는 데 어떤 남자가 화내지 않겠는가?
“키에르한 때문인가? 지금 당장 그놈의 목을 치면 생각을 접을 것인가?”
마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물론 키에르한 후작님을 위한 것도 있지만, 전하와 제국을 위한 마음이 더 큽니다.”
그녀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그를 설득해야 했다.
“현재 요하네프 3세의 서제국이 호시탐탐 수작을 부리며 전쟁을 일으킬 기회를 엿보고 있는 상황에서 클로얀 지방은 반드시 안정되어야 합니다. 만약 클로얀 지방의 상황이 더욱 악화한다면, 서제국과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어떤 재앙이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마리의 말은 옳았다. 이대로 사태가 악화하면 클로얀 지방은 불붙은 화약고가 될 것이다.
“클로얀 지방이 중요한 것은 맞다. 하지만 네가 가는 건 안 돼.”
“전하.”
라엘이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
“넌 지금 나보고 사랑하는 사람을 사지로 보내라는 거냐!”
“……!”
격한 음성에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너는…… 왜 너는 도대체 내 마음을 신경 쓰지 않는 거냐? 네가 조금만 눈에 보이지 않아도 무슨 일이 있을까 온종일 네 염려만 하거늘, 이제는 그런 위험한 곳까지 가겠다고?”
“……전하.”
그의 분노에는 그녀를 향한 걱정과 마음이 절절히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물러설 수 없었다. 키에르한뿐 아니라 그와 자신을 위해서라도 클로얀은 안정되어야 한다.
“죄송합니다, 전하. 그래도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아무런 일 없이 무사히 돌아오겠다고도 맹세하겠으니, 제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라엘은 굳은 얼굴로 그녀를 매섭게 바라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그녀를 향해 분노에 찬 시선을 보낸 뒤, 그가 말했다.
“듣고 싶지 않다. 돌아가라.”
“……전하.”
“그대에게 더 화내고 싶지 않아. 명령이니 돌아가.”
마리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 상황에는 더 이야기해 봤자 역효과만 날 것 같았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마리는 조심스럽게 집무실을 나왔다.
탁.
문을 닫은 그녀는 눈을 감았다.
‘주여. 도와주소서.’
* * *
그녀가 나간 후, 황태자는 늦은 밤까지 술을 마셨다. 답답한 듯 술을 목으로 넘긴 그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마리, 너는 정말로 모리나 왕녀인 것이냐?’
그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만약 네가 모리나 왕녀가 맞다면, 그때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지금껏 수도 없이 반복했던 고뇌. 깊게 한숨을 내쉰 라엘은 아까 전 마리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네가 한 말 중 틀린 것은 하나도 없지.”
사실 클로얀 지방을 안정시키는 것은 이전부터 그가 골똘히 고민하고 있던 것이다. 클로얀 지방은 반드시 안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추후 어떤 재앙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마리가 모리나 왕녀가 맞다면, 그녀를 자신의 여인으로 맞을 수 있는 방법은 클로얀 지방을 안정시키는 것이 유일했다.
“……그래도 내가 어떻게 너를 클로얀 지방에 보내겠느냐.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 곳에.”
물론 그도 안다. 지금껏 숱하게 기적을 일으켜 온 마리라면 클로얀 지방에서도 기적을 일으킬지 모른다. 하지만 너무 위험했다. 그게 문제였다. 라엘은 그녀가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라엘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복잡하게 얽히고 얽힌 상황이 그의 가슴을 옥죄어 왔다.
‘아무리 그래도 널 보낼 수는 없어. 차라리 내가 직접 가는 것이 낫지. 잠깐, 지금 뭐라고?’
번뜩 떠오른 생각에 그는 한참이나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래…… 그렇군.”
라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방법이면 모든 것을 만족할 수 있겠어.”
그는 자신이 방금 떠올린 방법을 생각했다. 클로얀 지방은 무조건 안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녀만큼 적합한 인물을 찾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리에게 위험을 감수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손끝 하나라도 상한다면 자신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방금 생각한 방법이면 괜찮지 않을까? 최소한 그녀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오른의 반대를 어떻게 하지?’
그는 고심하다가 밖의 근위 기사에게 말했다.
“오른을 불러오도록.”
“지금 말입니까?”
근위 기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거의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장 불러오도록.”
* * *
다음 날 해가 뜬 후, 스올의 탑에 갇혀 있던 키에르한에게 뜻밖의 명이 떨어졌다.
“키에르한 후작님, 보일 궁으로 출두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근위 기사단장 알몬드가 직접 키에르한을 찾아와 말했다. 제국 최강의 기사에 대한 예우였다.
“보일 궁에?”
키에르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보일 궁은 황제가 직접 죄인을 판결할 때 사용하는 재판장이었다.
“후작님에 대한 처우를 최종적으로 결정한다 하셨습니다.”
키에르한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처형하기로 결정된 것 아니었나?”
“저는 들은 바가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키에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네. 가지.”
보일 궁에 가니, 의외의 인물들이 눈에 보였다. 우선 오른 공작이 있었다.
‘칼루안 후작과 모르펜 백작도 있군. 저들이 왜?’
키에르한은 의외란 표정을 하였다. 칼루안 후작과 모르펜 백작뿐이 아니었다. 심지어 이디언 후작, 오레온 공작, 루캄 공작도 있었다. 모두 명망 높은 제국의 대귀족들로 선제후의 일원이었다.
‘왜 선제후들이 한자리에?’
키에르한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와 오른을 포함하면 무려 7명의 선제후가 모여 있었다.
‘날 처형할 목적이면 이렇게나 거창한 인물들을 소집할 이유가 없는데?’
이 7명이면 사실상 선제후 전원이 모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혼란스러워하는데, 곧 황태자가 도착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바로 시작하지.”
상석에 앉은 황태자는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황권을 능멸한 죄인 키에르한에 대한 처벌을 결정하겠다.”
라엘은 무감정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키에르한 후작은 확인할 수 없는 선황의 유지를 빌미로 황위 계승자인 나 라엘의 계승을 반대함은 물론, 정통성을 의심해 위대한 황권을 능멸하였다. 이는 씻을 수 없는 죄인 바.”
거기까지 들은 키에르한은 담담한 눈빛을 하였다. 당연히 사형선고가 나올 것이다.
그런데 그때, 라엘이 고개를 들어 키에르한을 바라보더니 뜻밖의 말을 하였다.
“세이튼 가문의 선제후 직위를 박탈하고, 황실 수호직을 박탈한다.”
키에르한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이게 무슨?
“……전하?”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당연히 사형 판결이 나올지 알았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황태자는 선제후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선제후들에게 묻겠다. 내 판결에 동의하는가?”
선제후 직위의 선출과 박탈은 다른 선제후 전원의 동의가 필요하다. 라엘은 그래서 이렇게 직접 그들을 판결에 부른 것이다.
“네, 소비엔 공작가의 대표로서 동의합니다.”
“칼루안 후작가의 대표로서 동의합니다.”
“모르펜 백작가의 대표로서 동의합니다.”
선제후 전원이 동의하자,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선제후 전원의 동의로 세이튼 가문의 선제후 직위와 황실 수호직을 박탈하겠다.”
판결이 나자 선제후들은 예를 표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장내에 그들만 남게 되자 키에르한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어째서 이런 판결을?”
라엘은 딱딱한 얼굴로 말을 하였다.
“마리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녀가 청하였다. 자신이 공을 세울 테니, 대신 네 목숨을 살려 달라고.”
키에르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공이라니?”
“그녀는 네 목숨을 구하는 대신 클로얀 지방을 안정시키는 공을 세우기로 나와 약속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키에르한의 손끝이 떨렸다. 지금 뭐라고? 그녀가 자신을 위해 무슨 약속을 했다고?
“이런 결정……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
“마리 양을 클로얀 지방에 보내겠다니! 제가 목숨을 잃는 것이 낫습니다!”
키에르한은 거칠게 소리를 높였다. 그는 결코 이런 결말을 원하지 않았다. 죽음을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자신 대신 그녀가 위험에 처하는 거라면 차라리 그냥 죽는 게 나았다.
“그냥 저를 죽이십시오! 그녀가 클로얀 지방에 가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키에르한은 그녀를 위험에 내모는 결정을 내린 황태자를 향해 거친 기세를 내뿜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오른의 가슴이 내려앉을 정도로 그 기세는 강렬했다. 하지만 황태자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키에르한에게 다가와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닥쳐.”
“……!”
라엘은 끓어오르는 듯한 눈동자로 키에르한을 노려보았다.
“그녀를 누구보다도 걱정하는 것은 나야. 그리고 네놈 따위가 그녀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이 있는가?”
라엘의 말에 키에르한의 안색이 파랗게 변했다. 라엘은 멱살을 움켜쥔 주먹에 더욱 힘을 주며 언성을 높였다.
“네놈 때문에 그녀가 위험을 감수하게 되었다. 그런 주제에 뭐라고? 지금 당장에라도 목을 치고 싶으니 닥치고 있어!”
키에르한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도…… 그녀를 클로얀 지방에 보내기로 하면 안 되었습니다. 차라리 저를 죽이지 그랬습니까?”
그녀를 위험에 처하게 할 바에는 자신이 죽는 것이 낫다. 키에르한은 굳게 생각했다.
“어째서…… 이런 선택을 하신 것입니까? 전하라면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라엘은 키에르한의 멱살을 잡았던 손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물론 무방비로 그녀를 보낼 생각은 없다. 그건 미친 짓이지. 그녀의 안전은 확실하게 지킬 것이다.”
“어떻게?”
키에르한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굳은 결의에 가득한 푸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그는 라엘의 뜻을 짐작했다.
“전하…… 설마?”
키엘은 황태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래, 네가 짐작하는 것이 맞다.”
라엘이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가 클로얀 지방으로 향할 때 내가 은밀히 뒤따를 것이다.”
“……!”
“뒤에서 그녀를 도와주며 지키겠다.”
생각지도 못 한 라엘의 말에 키에르한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그건…….”
황위에 오를 그가 그녀를 몰래 뒤따라가겠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라엘은 단호히 말했다.
“현재 제국에 가장 중요한 클로얀 지방이니. 군주인 내가 직접 가도 과한 일은 아니지.”
“하지만…… 위험할 것입니다.”
라엘이 만약 클로얀 지방에서 정체가 드러난다면? 제국에 반감을 품은 클로얀인 모두의 표적이 될 것이다.
“알고 있다.”
“그런데?”
“내게는 내 목숨보다 그녀가 중요하니까.”
“……!”
라엘은 말했다.
“클로얀 지방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녀의 털끝 하나 상하지 않도록 지켜 내겠다.”
그건 마치 맹세와도 같은 다짐이었다.
그렇게 키에르한의 일이 마무리되었다. 다행히 누구의 피도 흐르지 않았다. 곧 라엘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황제 폐하 만세!”
“폐하께 신의 은총이!”
“영광이!”
이미 라엘은 만인의 존경을 받는 군주였다. 그가 자신의 상징이 된 철가면을 쓴 채 단상에 올라가자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제국과 폐하의 앞날에 주님의 축복이…….”
라엘은 무릎을 꿇고 주교의 축도를 받은 후 황제의 관을 썼다. 드디어 동제국의 진정한 군주, 황제가 된 것이다.
모두의 기쁨과 축복 속에서 대관식이 마무리된 후, 라엘은 생각지도 못 한 내용을 공표했다.
“힐데른 자작을 클로얀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하겠다.”
“폐하?”
모두가 깜짝 놀라 황제를 바라보았다. 힐데른 자작을 클로얀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하겠다니? 그게 무슨?
“폐하, 그것은…….”
“왜? 그녀의 능력이 모자라다 생각하는 것인가?”
“그건 절대 아닙니다.”
모두 화급히 고개를 저었다. 세상 그 누가 마리의 능력을 의심하겠는가? 능력만 따지면 최고의 인선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괜찮으시겠습니까? 힐데른 자작께서는…….”
한 대신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말끝을 흐렸지만, 모든 이가 뒤의 내용을 알아들었다. 힐데른 자작은 황후가 될 존귀한 여인이다. 그런데 위험하기 그지없는 클로얀 지방으로 보내겠다고? 자신들도 가기 싫은 그곳으로?
‘전임 총독도 불의의 일로 사망했어. 이번에 일어난 반란은 거의 진압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위험한데.’
모두의 머리에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그녀를 황후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하지만 황제 라엘이 답했다.
“6개월 뒤, 그녀가 클로얀 지방을 안정시키고 돌아오면 바로 국혼을 치르겠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이 될 것이다.”
“……!”
가장 존귀한 여인. 황후를 뜻한다. 드디어 라엘이 그녀와의 결혼을 선포한 것이다.
이로써 마리는 제국의 공식적인 예비 황후가 되었다. 이 놀라운 소식에 수도가 한차례 들썩였다.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일단 그녀가 예비 황후가 된 것에 대한 반응은 모두 같았다.
“황제 폐하와 힐데른 자작께서 국혼을 치를 거라고? 최근 들었던 소식 중 가장 기쁜 소식이구먼.”
“그래, 그분이 아니면 그 누가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겠나?”
“제국의 큰 복이야. 정말로.”
귀족이든 평민이든 할 것 없이 모두 한결같이 마리의 예비 황후 소식을 기뻐했다. 다만 그녀가 클로얀 지방에 총독으로 파견된다는 것에는 의견이 갈렸다.
“국혼을 치르기 전 클로얀 지방에 갔다 오신다고? 물론 그분의 능력이면 클로얀 지방의 혼란을 가라앉힐 수 있겠지만…….”
“너무 위험할 것 같은데. 전임 총독도 불의의 일로 사망한 판국에.”
“하지만 확실히 힐데른 자작님이라면 클로얀 지방을 안정시킬 수 있을 테니…….”
“그래, 클로얀 지방은 현재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 아닌가. 그래서 자작님이 직접 가시는 것일 거야.”
그렇게 마리의 파견을 찬성하는 측과 염려하는 측으로 의견이 갈렸다. 의견은 다소 달랐지만 그녀야말로 현재 클로얀 지방의 문제를 해결할 적임자라는 생각과 그녀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은 모두 동일했다.
“어쨌든 걱정이군. 아무런 탈 없이 돌아오셔야 할 텐데.”
“오늘부터 자작님을 위해 기도라도 해야겠어.”
“나도 같이 해야겠군. 이제 우리 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 될 텐데 다치기라도 하면 안 되지.”
황제 라엘이 백성들의 존경과 경외를 받는다면 예비 황후 마리는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수도의 백성들은 소식이 발표된 날부터 마리의 무사 귀환과 라엘과 그녀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여, 예비 황후마마의 앞날을 지켜 주시옵소서. 축복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사람들의 응원과 염려를 받으며 마리는 떠날 준비를 하였다. 정식으로 황제의 권한을 위임받는 총독으로 발령받는 거라 바로 훌쩍 떠날 수는 없었다.
‘내가 클로얀 왕국에 돌아가게 되다니. 그것도 총독으로.’
마리는 복잡한 눈빛을 하였다. 이곳 황궁에 끌려올 때만 해도 클로얀 왕국에 돌아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총독으로 돌아가게 되다니.
‘반드시 잘해 내야 해. 모두를 위해서.’
마리는 정원의 호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자신과 황태자하고만 연관된 일이 아니었다. 직접적으로 클로얀 왕국 사람들의 삶과도 연결된 일이었다.
‘모든 우선순위는 클로얀 왕국민들이야. 그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게 노력해야 해.’
여러 복잡한 사정과 정세가 얽혀 있지만,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클로얀 왕국민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그들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했다.
‘오로지 왕국민들을 위해 노력해야 해. 그 노력이 쌓여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이번 일을 성공할 수 있을 거야.’
마리는 정확하게 판단했다. 클로얀 왕국을 안정시키려면 다른 것보다 왕국민을 위해야 했다. 그래야 이번 일을 성공할 수 있다. 아니, 일의 성공 여부를 떠나 그녀는 클로얀 왕국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노력으로 그들이 조금이라도 더 웃음 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주여, 제발 도와주소서.’
그렇게 기도하고 있을 때, 그녀에게 뜻밖의 인물이 다가왔다.
“키엘 님?”
마리는 반가우면서도 난처한 마음이 들었다. 그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기로 한 자신의 선택을 그가 뭐라고 탓할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마리 양.”
과연 키엘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마리는 그가 혼내기 전, 눈을 감고 재빨리 말했다.
“죄송해요. 키엘 님을 잃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주제넘게 나섰어요. 반드시 무사히 돌아올 테니 용서해 주세요.”
“…….”
“죄송해요. 정말로.”
그녀의 사과에 키엘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제가 뭐라고 할 수는 없겠죠.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들어주시겠습니까?”
“네.”
키엘은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전에 제가 했던 말 기억합니까? 만약 제게 더 삶을 이어 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을 위해 살겠다는 말 말입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기억나긴 했다. 하지만 갑자기 그 말을 왜? 그런데 그 순간, 키에르한이 뜻밖의 행동을 하였다.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키, 키엘 님!”
그는 그녀의 한쪽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 키에르한 드 세이튼이 레이디 힐데른에게 간절히 청하옵니다. 당신 덕분에 얻은 삶. 앞으로는 영원히 당신을 위해 바치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
마리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지금 키에르한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이다.
“키, 키엘 님? 이, 이건…….”
“허락해 주십시오.”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지금 청하는 것은 바로 레이디에게 하는 기사의 충성 맹세였다.
‘받을 수 없어.’
키에르한의 충성 맹세라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리가 고개를 저으려는 순간, 키에르한이 말했다.
“앞으로의 제 삶은 모두 당신 덕분에 얻은 것입니다. 앞으로의 삶, 당신을 위해 바치지 않는다면 제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리는 깨달았다. 그가 결코 뜻을 거두지 않을 것임을.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녀의 승낙이 떨어지자 그가 마리의 손등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기사가 레이디에게 하는 맹세의 서약이었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마리는 곤란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비록 황실친위대의 단장직에서 물러났지만, 그는 여전히 세이튼 가문의 가주이며 제국 서북부의 국경을 책임지는 변경백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다니. 마리는 이렇게 받아들여도 되는가 곤란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키에르한은 결단코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지 않을 각오였다. 그렇게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정원에서 키에르한은 마리를 향해 충성의 맹세를 하였다.
* * *
드디어 황궁을 떠나는 날이 가까워졌다. 마리는 무거운 얼굴로 황제 라엘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클로얀 지방에 가기로 청한 이후, 마리는 황제의 얼굴을 편하게 볼 수가 없었다. 그에게 얼마나 큰 걱정을 안긴 것인지 알고 있는 탓이었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이유로 가는 것이라지만, 그는 이 황궁에서 자신을 염려하며 노심초사하리라.
“반드시 일을 완수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마리는 굳게 다짐하며 말했다. 그때, 라엘이 고개를 저었다.
“약속이 잘못되었다.”
“네?”
“일이 잘못돼 실패해도 괜찮아.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네가 무사히 돌아오는 것이다.”
“……!”
“지금 이 순간, 약속해라. 털끝 하나라도 다치지 않고 돌아오겠다고.”
마리는 고개를 숙였다.
“네, 약속하겠습니다. 꼭,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그런 그녀를 라엘이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반드시.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그의 따뜻하면서 아늑한 품을 느끼며 마리는 눈을 감았다. 이 품을 영원히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를 마주하기 위해서는 나아가야 했다.
“……네, 전하.”
그때, 그가 마리의 턱을 살짝 들어 자신을 바라보게 하였다.
“눈을 감아라.”
“……네.”
곧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와 닿았다. 이전처럼 거친 입맞춤은 아니었다. 오히려 애틋한. 그녀를 향한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는, 그래서 가슴이 아프기까지 한 키스였다.
‘폐하.’
마리는 그의 키스를 받으며 눈을 감았다. 그의 마음이 느껴지기에 가슴이 울렁했다. 괜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달콤하지만 애달픈 키스가 끝난 후, 그가 고풍스러운 느낌의 십자가 목걸이를 그녀의 목에 걸어주었다.
“폐하, 이 목걸이는?”
“제국의 황후에게 대대로 대물림되는 목걸이다.”
“아…….”
라엘이 옅게 웃었다.
“즉, 그대가 내 것임을 입증하는 징표이지.”
그가 다시 한번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니 넌 어디에 있든 내 여인임을 잊지 마라. 알겠느냐?”
“네, 폐하.”
마리는 손을 들어 목걸이를 어루만졌다. 그와 자신을 이어주는 징표라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좋았다.
“그러면 다녀오겠습니다.”
그녀가 물러간 후, 오른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연기를 잘하시는군요, 폐하.”
“그런가?”
“네, 오페라 배우를 해도 되겠습니다.”
오른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투덜거렸다.
“어차피 바로 뒤따라갈 것이면서. 보는 제가 다 애절하더군요.”
라엘은 피식 웃었다.
“그녀는 내가 뒤따라가는지 모르지 않는가. 그러니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해야지.”
오른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한번 부탁합니다, 폐하. 그냥 안 가시면 안 됩니까?”
“안 돼. 그녀 혼자 보낼 수는 없다.”
“그래도 폐하가 직접 가시는 것은…….”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클로얀 지방을 안정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그대도 동의하지 않는가? 그녀 혼자 가는 것보다 내가 가서 도와주는 것이 사태 해결에 훨씬 나을 거다.”
“그거야 그렇지만 중앙은 어떻게 합니까?”
라엘은 의뭉스럽게 웃었다.
“어차피 이곳 수도에는 제국 최고의 명재상이 있지 않은가?”
“하아.”
오른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하루에 백 번 이상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다 좋은데. 위험하지 않습니까?”
“물론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해야겠지.”
그러며 라엘은 말했다.
“지난번 요하네프 3세가 사용한 동방의 역용술이 참 대단하더군. 그 역용술을 사용하면 감쪽같이 변할 수 있으니, 들킬 가능성은 거의 없을 거다.”
동방의 역용술. 지난번 요하네프 3세가 동제국에 잠입할 때 카탈락 백작의 외모로 변한 수법이었다. 라엘은 당시 그가 사용한 역용술을 조사하였고, 어느 정도 자신도 사용할 수 있게 익힌 상태였다. 오른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 폐하의 역용술, 어설픕니다.”
“뭐?”
“요하네프 3세에 비해 완전히 어설퍼요.”
쌓인 게 많은지 오른은 악감정을 담아 말을 내뱉었다. 라엘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괜찮지 않나? 완전히 다른 사람의 외모로 변했는데?”
“외모는 변했지만 기품이나 위엄이 그대로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최소 힐데른에게는 금방 들킬 것입니다.”
“……그래?”
“네, 그녀에게 들킬 확률은 백 프로입니다. 제 재상직을 걸겠습니다.”
라엘은 입을 다물었다. 원래 그는 마리 몰래 그녀를 지키며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조금 더 노력해야겠군.”
“노력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무조건 들킵니다.”
최근 쌓인 스트레스를 복수라도 하려는 듯 오른은 ‘무조건’에 악센트를 넣었다. 그렇게 다소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던 오른은 황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
“무슨 일인데 그리 뜸을 들이지?”
“마리가 모리나 왕녀일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순간, 라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속으로 짐작만 하고 있으면서 서로 직접적으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이야기를 오른이 처음으로 언급한 것이다. 한참을 침묵하던 라엘이 입을 열었다.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만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그녀를 믿는다. 모리나 왕녀이든 아니든 그녀가 나를 배신할 리가 없다는 것을 믿어.”
라엘의 말에 오른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른도 마리를 믿는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녹록지가 않았다.
“만약 마리가 모리가 왕녀가 맞다면, 전 두 분의 결합을 찬성할 수 없습니다. 현재 모리나 왕녀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클로얀 왕국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
황제는 무거운 눈빛으로 오른을 주시했다. 그때, 오른이 뜻밖의 말을 하였다.
“그러니 그녀를 폐하의 여인으로 맞고 싶다면 반드시 클로얀 지방을 안정시키십시오.”
라엘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늘 마리와의 결합을 반대하던 그가 처음으로 제한적이나마 긍정적인 뜻을 비친 것이다. 라엘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럴 생각이다.”
* * *
한편 그 순간. 수도에서 머나먼 서쪽에 위치한 클로얀 지방.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폐건물에 한 인물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흐음. 일이 재미있게 되는군.”
“끄읍! 끄읍!”
마치 여인과도 같이 고운 남자였다. 여린 얼굴선에 가냘픈 뼈대, 보는 이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튀어나온 목울대가 아니라면 아무도 그를 남자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남자의 주변이 이상했다. 몇몇 인물이 전신이 결박당한 채 재갈이 물려 있었던 것이다.
“읍! 읍!”
남자는 그런 이들을 신경 쓰지 않고 중얼거렸다.
“진짜 모리나 왕녀가 클로얀 지방에 온다라. 우리의 ‘계획’에 없던 일이긴 한데.”
남자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름답지만 마치 악마와도 같은 섬뜩한 미소였다.
“어쨌든 나쁜 일은 아니군. 이용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훨씬 늘게 되었으니.”
“읍! 읍! 으읍!”
남자는 고개를 돌려 결박당한 이의 재갈을 빼 주었다. 그러자 거친 신음과 함께 고함이 들렸다.
“허억! 이게 무슨 짓이냐! 왜 우리에게 이런 짓을?!”
“흐음.”
“이건 약속했던 바와 다르잖아! 우린 너만을 믿었거늘, 라키! 아니, 스토른 백작!”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저 여인처럼 아름다운 이의 정체가 스토른 백작이라니! 스토른 백작은 바로 서제국의 악명 높은 재상의 이름이었다.
“흐음. 그걸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니요.”
“뭐?”
“난 너희를 이용한 것일 뿐이야. 너희는 나에게 이용당한 것이고. 뭐, 더 설명이 필요한가요?”
결박당한 남자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는 분노에 차 몸을 비틀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이! 이 개자식! 우린 너만 믿고 반란을 일으켰건만! 모리나 왕녀의 이름까지 걸고!”
“큭.”
스토른 백작, 아니, 주위 인물들에게는 라키라 불리는 그는 피식 비웃음을 짓더니 품에서 단도를 꺼냈다.
“뭐, 뭐 하려고?”
결박당한 남자는 라키가 단도를 꺼내 들자 주춤 놀랐다.
“처리.”
“뭐?”
“이용 가치가 끝난 말은 깨끗이 정리해야 뒤끝이 없으니까요. 너무 원망은 말길.”
그렇게 이야기한 라키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의 목에 단도를 꽂았다. 남자는 비명도 제대로 못 지르고 목숨을 잃었다.
“흐음.”
라키는 몸에 튄 피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살인을 저질렀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태연한 얼굴이었다. 사람을 죽였건만 아무런 감흥도 없어 보였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모리나 왕녀라…… 빨리 만나 보고 싶군.”
그는 옅게 웃었다.
“곧 볼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