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그녀는 곧바로 조치했다. 수로에 묻혀 있던 병든 쥐들의 시체를 없애고, 해당 수로에서 공급되던 물의 사용을 금지했다. 그러자 금방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끝없이 늘어나기만 하던 환자들의 수가 뚝 끊긴 것이다.
“이제 끝인가? 전염병이 끝난 거야?”
“오, 신이여.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드디어 막을 내린 전염병의 공포에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전염병의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다른 때에 비해 굉장히 양호했다. 모두 마리가 늦지 않게 원인을 파악한 덕분이다.
“이번에도 힐데른 예작이 공을 세웠다고 하던데?”
“정말이야?”
“그래, 수로가 오염된 것을 확인하고 조치한 게 모두 힐데른 예작님이라고 하더라고.”
“하, 정말 대단하군. 도대체 힐데른 예작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는 건지.”
수도의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마리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그녀 덕분에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녀가 제국에 공을 세운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성배 도난 사건부터 이번 전염병 사건까지. 짧은 시간 동안 그녀가 제국을 위해 세운 공은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았다.
“힐데른 예작님이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아닐까?”
“천사라고?”
“그래, 이전에 그런 소문이 있었잖아. 힐데른 예작님이 이런저런 문제를 몰래 해결해 주던 황궁의 천사라고. 그런데 최근의 모습을 보니 단순한 황궁의 천사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내려온 천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정말로 하늘이 제국을 위해 내려 준 천사가 있다면 그녀일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난 그분이 황태자비가 되는 것에 찬성일세!”
“나도 마찬가지야! 그분이 아니라면 누가 우리 제국의 황태자비가 된단 말인가?!”
“온 힐데른 만세!”
“황태자 전하 만세!”
그렇게 그녀 덕분에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마리와 황태자의 이름을 환호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평민들뿐만 아니라 귀족들 사이에서 그녀를 지지하는 이들이 대폭 늘어났다.
“나도 이번 일로 힐데른 예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소.”
“그러게 말입니다. 클로얀 왕국의 전쟁 포로 출신이라고 무시할 것이 아니었소.”
이번 전염병은 주로 귀족들의 거주지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그런데 마리 덕분에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큰 피해가 일어났을지 모른다. 목숨을 구제받은 귀족들은 그녀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난 이제 황태자 전하의 뜻에 찬성하오. 단순히 출신 성분만 놓고 판단할 것이 아닌 듯하오. 그녀가 황태자비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그 누가 황태자비가 될 수 있단 말이오?”
“나도 동의하오. 이미 온 힐데른은 제국의 은인이나 다름없으니까 말이오.”
“그녀가 받은 이름처럼 그녀야말로 성인(聖人) 힐데가르트에 조금도 못지않다고 생각하오.”
그렇게 평민, 귀족 할 것 없이 그녀의 이름을 높였다. 그만큼 이번에 그녀가 세운 공은 대단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녀의 이름을 높이고 있을 때, 마리는 웃을 수 없었다. 전염병에 걸린 황태자 라엘의 상태가 갈수록 악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저, 전하.”
마리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난…… 괜찮다. 신경 쓰지 말도록.”
라엘은 침상에 기대어 누운 채로 옅게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미소였지만, 안색이 파리하기 그지없었다. 마리는 다급히 그의 손을 잡았다. 한데 라엘의 손은 마치 끓듯이 뜨거웠다.
‘어떻게 이런 고열이? 이전보다 더 심해졌어.’
마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른 전염병 환자들에 비해서도 심한 고열이었다. 전염병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조사를 한 그녀이기에 이 고열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사망한 환자 모두 이렇게 고열에 시달리다 사망했어.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다.’
그녀의 안색이 하얘졌다.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 모두 죽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죽음에 이른 사람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저렇게 고열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아, 아니야. 전하가 그렇게 될 리가 없어.’
마리는 강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핏기가 하나도 없는 그의 얼굴은 평소와 전혀 달랐다. 가슴이 시릴 정도로 여리게만 느껴졌다.
그때, 황태자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 간단한 동작조차도 힘든지 그의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는 그 손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난 괜찮다.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전하.”
“참 묘하군. 이전에는 그대가 날 걱정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는데, 막상 걱정을 받으니 그대가 괜히 신경 쓸까 봐 오히려 걱정돼.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 정말 신경 쓰지 마라.”
저렇게 아픈 와중에도 도리어 자신을 걱정하는 그의 모습에 마리는 가슴이 울컥했다. 저 남자는 왜 이렇게 바보 같단 말인가? 라엘은 고열로 흐릿해진 시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도 큰 공을 세웠는데, 정말 고맙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괜찮습니다. 이제는 더 말씀하지 마시고 쉬셔야 해요.”
마리는 다급히 말했다. 라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대가 세운 공에 대해 상을 주어야 하는데…… 잠시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점차 낮아졌다. 고열에 못 이겨 다시 잠이 든 것이다. 마리는 눈을 감은 라엘을 보며 멍한 얼굴을 했다.
‘왜? 왜 이렇게 안 좋아지신 거지?’
아니,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아픈 모습을 보니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가깝게 지내던 이가 아프니 걱정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건 고작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누군가 가슴을 통째로 도려낸 것 같았다.
‘괜찮을 거야. 곧 좋아지실 거야. 전하가 누구인데. 철혈의 황태자잖아. 이러다가 금방 일어나 굳건한 모습을 보여 줄 거야.’
마리는 애써 좋게 생각했다. 그래, 다른 누구도 아닌 황태자가 병에 지다니. 그런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그녀는 그렇게 굳게 중얼거리며 그를 간병했다.
앉듯이 기댄 자세를 편하게 눕히고, 펄펄 끓는 이마에 차가운 수건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땀에 젖은 상의를 다른 옷으로 바꾸어주기까지 했는데, 평소라면 바로 깨어났을 그는 흐릿한 신음을 흘릴 뿐 전혀 눈을 뜨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니 마리는 다시 가슴이 울컥했다. 자신도 모르게 눈동자가 시큰해지려고 해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발…… 일어나세요. 이런 모습 전하한테 어울리지 않아요. 제발. 제발…….”
빈 물잔을 들고 침실 밖으로 나오니 어의인 고돈 준남작과 오른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해보게. 전하의 상태가 어떤가?”
“일단 최선을 다해 치료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건 알아.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정확한 상태야. 다른 누구도 아닌 재상인 나는 상태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해. 빨리 말해보게.”
“하아.”
마리는 고돈 준남작의 한숨을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라 믿고 있지만, 사실 지금으로서는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오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장담할 수가 없다고? 그 말은?”
“네, 최악의 순간을 생각하고 있어야 할 듯합니다.”
“그런……!”
그 순간이었다!
쨍그랑!
갑자기 물병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와 그들은 대화를 나누던 중 흠칫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마치 시체처럼 안색이 질린 마리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물병을 떨어뜨렸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에요.”
“힐데른 예작님?”
“아니라고요. 전하가 그렇게 될 리가 없어요.”
그녀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말했다.
“금방 일어나실 거예요. 저, 전하시니까.”
항상 침착하던 그녀가 이렇게 동요하는 모습은 처음 본 오른은 입을 다물었다. 고돈 준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작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 늙은이도 전하께서 금방 병을 떨치고 일어나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 다르게 황태자의 상태는 하루가 지날수록 안 좋아졌다. 열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이제는 깨어 있는 시간보다 의식을 잃고 있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이럴 수가. 전하…….”
오른은 누워 있는 황태자를 보며 망연한 얼굴을 했다.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태자가 전염병 때문에 사경을 헤매다니.
‘이제 곧 토른 2세 폐하도 붕어할 텐데, 이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오른은 황태자의 개인적인 친우의 입장에서뿐 아니라, 제국의 경영을 책임지는 재상으로서도 걱정했다. 극비이긴 했지만 현재 기식이 엄엄한 것은 황태자뿐이 아니었다. 현 황제인 토른 2세의 상태도 지극히 안 좋았다.
‘토른 2세의 사망은 진즉부터 기다리고 있던 일이지만. 황태자 전하까지 한꺼번에 사경을 헤매게 되다니.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현재 제국은 오로지 황태자의 통치 아래 통합되어 있었다. 황태자가 없는 제국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가 사망하는 순간 제국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한편, 마리는 오른과 다르게 정치적인 문제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저 파리한 안색을 한 채 누워 있는 그의 모습만 눈에 들어올 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전하.’
얼마 전 역학자로서의 능력을 얻었기에 지금 황태자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이건 패혈증이야.’
패혈증(Sepsis). 균이 전신을 떠돌아다니며 몸을 해하는 상태를 말한다. 사망률이 50%가 넘는 위험한 상황이다.
‘그가 죽을 수도 있다고?’
마리는 멍하니 생각했다. 이전에 그를 두려워하며 도망 다닐 때는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불의의 일로 황태자에게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자신은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하지만 막상 그런 일이 닥치자 눈앞이 컴컴하기만 했다.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고, 그저 가슴이 아프고 머리가 멍했다.
그때, 침중한 표정을 짓고 있던 어의 고돈 준남작이 입을 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비방을 써야겠습니다.”
“비방? 무슨 좋은 방법이 있는가?”
오른이 동아줄이라도 발견한 표정으로 물었다. 고돈 준남작은 무겁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비소를 사용해야겠습니다.”
“……!”
그 이야기에 오른과 마리의 얼굴이 굳었다. 비소가 어떤 약품인지 알고 있는 탓이었다.
“비소…… 라면 약이라기보다는 독에 가까운 약품 아닌가?”
“그렇습니다. 실제로 독으로도 더 많이 사용하지요.”
“그런 독을 전하께 투약하겠다고?”
어의는 한없이 무거운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로서는 비소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비소의 독성을 전하께서 이겨 내시길 기도할 수밖에요.”
비소. 전신을 망가뜨리는 화학 물질로, 주로 독으로 많이 사용했다. 하지만 동시에 몸 안의 해로운 세균 등을 같이 죽이기에 이 시대의 유일한 항생 물질이었다. 따라서 이렇게 감염증이 최악으로 악화한 경우, 궁여지책으로 비소를 사용하곤 했다.
하지만 문제는 침투한 세균뿐만 아니라, 몸에도 치명적인 손상을 준다는 점이었다.
‘아, 안 돼. 그렇지 않아도 몸이 약해진 상탠데 버티지 못할 거야.’
마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오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난 동의하지 못하겠네. 비소라니. 너무 위험해.”
“하지만 현재 비소 말고는 다른 방법이…….”
결국, 오른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방법을 찾아내! 그게 어의인 자네의 역할 아닌가! 비소라니! 말 같은 소리를 하게!”
“……!”
오른이 언성을 높이자 그 자리의 모두가 흠칫 놀랐다. 사적으로는 쾌활하고 공적인 업무에서는 침착한 그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오른은 참혹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화내서 미안하네. 어쨌든 전하께 비소는 안 돼. 다른 방법을 찾아내게.”
“……네, 알겠습니다, 각하.”
어의는 주춤주춤 물러났다.
곧 깊은 밤이 되었다. 어의에게 버럭 화를 낸 오른은 황태자가 누워 있는 침실 바로 옆의 집무실에서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 알고 있었다. 어의를 닦달한다고 해서 없는 방법이 생겨나진 않는다는 것을.
마리는 황태자의 방에서 그를 간병하며 생각했다.
‘더 늦기 전에 비소를 써야 할지도 몰라.’
마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더 상태가 악화하면 아예 비소를 써 볼 기회도 없어질지 모르니까.’
그녀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비소 이야기까지 들으니 그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좋아질 거라 애써 믿고 있었지만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황태자는 정말로 죽을지도 몰랐다.
‘그가…… 죽는다고?’
마리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니, 그가 죽는 상황을 떠올리는 순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져 와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아…….”
순간 그와 지냈던 시간이 떠올랐다. 솔직히 애틋했던 시간은 별로 길지 않았다. 처음엔 그가 두려워 도망만 다녔고, 사자궁에 온 다음에도 그를 피하기만 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진정한 속마음을 마주한 순간부터 많은 것이 변했다.
“고맙다. 이렇게 태어나 주어서. 나와 만나 주어서.”
자신의 생일날 그가 해주었던 말.
“혹시나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난 너를 아끼니 혹시나 너에게 곤란한 사정이 있다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한테 이야기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마리, 넌 다른 누구도 아닌 내 것이다.”
그 밖에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이 떠올라 그녀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 마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흐윽. 흑.”
그녀는 급히 눈물을 닦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끝없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마리는 깨달았다. 황태자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난 바보야. 정말로.’
그저 흔들리고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그가 없으면 살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너무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제발. 제발…… 일어나 주세요. 제발…….”
마리는 이제야 마음을 깨달은 자신을 원망하며 그를 끌어안았다. 이대로 그를 보낼 수 없었다.
마리는 창가 너머로 보이는 대성당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제발…… 제발 부탁하옵니다. 부디 그를 살려 주시옵소서. 차라리 그 대신 제 목숨을 가져가 주시옵소서.’
마리는 그의 품에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다. 왜 이제야 마음을 깨달았을까? 진즉 깨달았으면 이렇게 도망만 다니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든 그와 함께하려고 더욱더 노력했을 텐데. 너무나 후회되었다.
라엘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던 마리는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다. 바로 그녀에게 능력을 주는 꿈이었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능력을 주는 꿈이라니. 황태자를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일지도 몰랐다.
‘제발. 제발.’
그녀는 간절히 기원했다. 부디 이 꿈이 황태자의 치료와 연관이 있는 꿈이길. 꿈속의 배경은 먼 미래의 실험실이었다. 실험실에서 두 남자가 신기하다는 듯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허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선생님. 휴가를 다녀왔는데 왜 배양하던 균들이 모두 죽어 있는지 모르겠군요.」
꿈속의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것 보게. 여기 죽은 균들 주위로 푸른곰팡이가 피어 있어. 혹시 푸른곰팡이가 균들을 죽인 것 아닐까?」
「어, 그러고 보니? 하지만 푸른곰팡이가 어떻게 균을 죽인 걸까요?」
「연구를 해봐야겠군. 푸른곰팡이가 가진 어떤 성분이 균을 죽인 게 분명해.」
그러며 꿈속의 남자, 인류 최초의 항생 물질을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이 말했다.
「어쩌면 대단한 발견을 해낼지도 모르겠어. 이건 ‘마법의 탄환’이 될지도 몰라.」
마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환희에 가득 차 생각했다.
‘알았어! 어떻게 전하를 치료할지!’
그녀는 곧바로 움직였다. 늦은 저녁 시간이었지만 지체할 틈이 없었다. 당장 꿈속의 지식을 이용해 치료 약을 만들어 내야 했다. 일 분, 아니, 일 초도 아까웠다. 마리는 침실을 나서기 전,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전하.’
그녀는 황궁 구석에 있는 연금술사의 연구실로 향했다.
“아니, 이곳에 예작님이 어쩐 일이십니까?”
부스스한 얼굴에 연금술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리가 원체 유명했던지라 연금술사도 그녀를 알아보았다.
“제가 이야기한 재료들을 준비해 주세요.”
“네? 네?”
“자세한 설명을 할 시간이 없어요. 중요한 일이니 최대한 빨리 부탁해요.”
다급한 그녀의 표정에 연금술사는 더 물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준비해 달란 재료를 듣는 순간, 연금술사는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빵에 핀 푸른곰팡이를 말입니까?”
“네, 최대한 많이요. 부탁할게요.”
연금술사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밖의 다른 재료는 필요 없습니까?”
“다른 재료는 옥수수 전분과 소금, 설탕, 아연…… 그리고…….”
그녀는 푸른곰팡이에서 치료 물질을 추출할 흡착 물질의 재료를 읊었다.
“또 기름과 약산성의 용액도 같이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특별히 희귀한 재료는 아니었기에 금세 구할 수 있었다. 마리는 플레밍의 지식을 이용해 푸른곰팡이에서 치료 물질을 추출해 내기 시작했다.
‘일단 푸른곰팡이를 최대한 모으고…….’
곧 그녀의 앞에 수북한 푸른곰팡이가 쌓였다.
‘흡착액을 만들어 치료 물질을 푸른곰팡이에서 분리하고, 다시 기름과 약산성액의 용액에 섞어서…….’
그렇게 한참을 씨름한 끝에 푸른곰팡이에서 추출한 치료 약이 완성되었다. 바로 균을 죽일 수 있는 치료 약이었다.
‘됐어! 이 약이면 황태자 전하의 패혈증을 치료할 수 있어!’
마리는 약을 가지고 당장 황태자의 침실로 돌아왔다. 연구실에서 씨름하는 사이 시간이 많이 흘러 벌써 아침 해가 뜬 후였다.
‘바로 이 약을 먹여야……!’
그런데 침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난관에 부닥쳤다. 바로 어의인 고돈 준남작과 오른 공작이었다. 그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마리의 손에 들린 액체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엇이지, 힐데른?”
오른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마치 마녀의 수프 같은, 기분 나쁜 느낌의 액체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리는 저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곤란했다.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하지?’
황태자를 치료할 수 있는 비약이라고 말해봐야 믿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들에게 이 약은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으니까. 그들은 마리가 주춤하고 있자 원래 하고 있던 대화로 신경을 돌렸다.
“그래서? 결국, 비소를 투약해야 한다고?”
“현재로서는 이것 외에는 방법이 없사옵니다, 각하.”
“하아.”
오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의도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신도 전하의 옥체에 비소를 투약하고 싶지 않사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한가. 정말 없는가?”
오른은 괴로운 표정으로 반문했다. 황태자의 몸에 독약이나 다름없는 비소를 투약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는 방법이 없기에 오른이 어쩔 수 없이 비소를 투약하는 것을 허락하려는 찰나, 마리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말렸다.
“잠깐만요. 전하께 비소를 투약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무슨 방법이 있는가?”
마리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믿을 거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지금으로서는 이야기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 제가 전하를 치료할 약을 만들어 왔습니다.”
“뭐?”
오른과 어의는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치료 약이라고? 설마 손에 들고 있는 그것?”
그녀의 손에 들린 용액을 본 그들의 눈초리가 대번에 의심스럽게 변했다. 얼핏 봐도 기분 나쁘게 생긴 게 전혀 약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게…… 도대체 무슨 약입니까, 예작님?”
“몸 안에 떠도는 균들을 죽일 수 있는 치료 약이에요.”
“그러니까, 그걸 어디서 알고?”
고든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듯 물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는 동제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명의. 그런 그에게 듣도 보도 못 한 액체를 들고 와 치료 약이라 하다니. 만약 그녀가 명성 높은 힐데른 예작이 아니었다면, 장난치지 말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어떤 의서를 보고 제조한 것입니까?”
마리는 뭐라 대답할지 고민했다. 실제로 존재하는 의서를 대면 고돈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실존하지 않는 의서를 거짓으로 꾸며서 대답하면 근거도 없는 약을 황태자에게 먹이려는 꼴이 된다. 결국, 마리는 사실을 섞어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이건 식빵에 피는 푸른곰팡이를 정제한 약이에요.”
“푸른곰팡이 말입니까? 그 더러운 것을?”
고돈의 표정이 해괴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바뀌었다.
“네, 이전에 제가 상처가 곪았을 때 우연히 푸른곰팡이를 상처에 바른 적이 있는데, 깨끗하게 나았던 적이 있거든요. 이후로도 몇 번 확인해 봤는데 마찬가지의 효과가 있었고, 그 결과를 토대로 만든 약이에요. 전하의 현재 상태에도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녀의 설명을 들은 고돈은 입을 다물었다. 나름의 사리를 갖춘 말이지만,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눈치였다.
“그래도 전하의 몸에 입증되지 않은 약을 투약하는 것은…….”
그 순간이었다. 옆에서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마리. 넌 그 약이 전하를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
놀라 고개를 돌리니, 오른이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각하.”
그녀는 그가 반대할 거라 생각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오른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좋다. 마리, 네가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그 약을 투약해 보도록 하지.”
“각하?!”
고돈은 물론 마리도 놀라 오른을 바라보았다.
‘오른 공작이 이렇게 쉽게 고개를 끄덕이다니?’
솔직히 마리는 어의보다도 오른을 설득하는 것이 어려울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라니? 오른은 평소와 같이 못마땅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난 너를 믿지 않는다. 알고 있겠지?”
“……네, 각하.”
오른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널 의심하면서도 한 가지 인정하고 있는 것이 있지. 그건 바로 다른 사람을 향한 너의 마음과 늘 기적을 일으켜 온 너의 능력이다.”
“……!”
“이번에도 전하를 위해 기적을 일으켜 줄 수 있겠느냐? 제발 부탁한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약한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은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마리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믿어주십시오.”
이제 그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기에 그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황태자를 치료해 내야 했다.
마리는 푸른곰팡이에서 추출한 약을 들고 황태자에게 다가갔다. 어의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오른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다른 방법도 없지 않나? 난 그녀를 믿어 보겠다.”
마리는 오른에게 감사하단 표정을 지은 후, 먼저 자신의 입에 약을 머금었다.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그의 입에 전달해 주어야 했다.
‘제발. 제발 효과가 있기를.’
그녀가 추출한 약은 훗날 ‘마법의 탄환’으로까지 불리는 기적의 약이지만, 정말로 황태자를 살려낼 수 있을지는 몰랐다. 사람이 최선의 치료를 해도 결과는 하늘에 달려 있으니까. 그녀는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입에 머금은 약을 황태자의 입 깊숙이 넘겨주었다. 한 방울도 헛되이 흘리지 않게 정성을 다해.
‘꼭…… 일어나 주세요. 제발…….’
그런데 우연이 일어난 것일까? 그 순간, 의식을 잃고 있던 황태자의 손이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전하?”
마리는 흠칫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저 우연이었던 것인지 황태자는 미동도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약을 투약했으니, 이제는 기다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효과는 언제 나오는 것이지?”
“짧으면 하루. 길면 이틀 정도입니다.”
오른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그 안에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때는 더는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 * *
째깍째깍.
시간이 조금씩 흘러갔다. 이틀은 결코 긴 시간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아니었다. 일분일초가 마치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아직 큰 변화는 없지?”
“네, 각하.”
마리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약을 투약한 지 이제 반나절.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었다. 마리는 조금이라도 그의 회복에 도움을 주고자 정성 들여 간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면 어떻게 하지?’
오른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래, 아직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으니 조금 더 기다려 보지.”
모두가 초조한 마음으로 황태자의 회복을 기다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계속 악화하기만 하던 지금까지와 다르게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약을 투약한 지 만 하루가 지나갔다. 그때까지도 뚜렷이 회복되는 기미가 없어 마리의 마음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을 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마…… 리?”
“전하?”
희미하게 들려온 목소리에 마리는 눈을 크게 떴다. 잘못 들은 건가? 하지만 아니었다. 황태자가 흐릿하게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
드디어 눈을 뜬 그를 보자 마리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흐윽, 흑. 전하. 다, 다행입니다.”
황태자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우느냐…… 난 괜찮은데…….”
“전하…… 전하…….”
그가 깨어나면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지만, 가슴이 요동쳐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냥 기뻤다. 그가 눈을 뜬 것이, 그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는 것이. 이게 꿈이면 어떻게 하나 덜컥 걱정될 정도로.
“네가 날 위해 이렇게 울다니.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흐윽. 아, 아닙니다, 꿈이. 절대로.”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깨어난 지금의 상황이 꿈이면 절대로 안 되었다. 황태자는 아직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옅게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울지 마라. 너는 우는 것보다 웃는 것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
그 말에 마리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펑펑 울다가 웃은 거라 얼굴이 엉망이었지만, 황태자는 따뜻하게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래, 웃으니 훨씬 예쁘지 않으냐. 네가 울면 내 마음이 많이 아프니 앞으로는 울지 마라. 나는 네가 웃는 모습만 보고 싶구나.”
“……전하.”
마리는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닦아도 눈물은 끝없이 흘러나왔다.
“야, 약속해 주십시오. 제발. 앞으로는 절대 이렇게 아프지 않겠다고.”
“그래.”
황태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너를 결코 이렇게 울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그 따뜻한 목소리에 마리는 다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였다. 그가 맞았다.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도되고 기뻐 그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 * *
마법의 탄환이라는 별명이 사실인지, 그녀가 추출해 낸 약은 정말로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다. 황태자가 의식을 차린 지 얼마 안 되어 조금씩 열이 떨어지더니 이틀 정도 지났을 때는 완전히 정상 체온으로 돌아온 것이다. 상태의 위중함을 생각했을 때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정말 대단하군. 마리, 네가 발견해낸 약이라고?”
어느 정도 기력을 차리게 된 황태자가 수프를 들며 말했다.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습니다.”
꿈에서 능력을 얻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어 마리는 그렇게 둘러대었다.
“이번에도 너에게 큰 도움을 받았구나. 수도를 구해 줬을 뿐만 아니라 나의 목숨도 살려 주었어.”
“아닙니다.”
마리는 고개를 저으며 겸양했지만 황태자의 감탄은 끊이지 않았다. 실제로 그가 한 말은 한 치의 과장도 없었으니까. 마리 덕분에 큰 피해가 생길 뻔한 전염병도 마무리되었고, 그의 목숨도 구할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이 약을 대량 생산하기는 어려운가?”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설비가 없어서 소량 추출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당장 대량 생산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이번 전염병 때문에 상태가 안 좋은 환자들에게는 약을 투약한 상태입니다.”
“그래, 잘했다. 사망자의 수가 더 줄겠군.”
황태자는 미소를 지었다. 최악의 상황이 닥쳤는데 다 잘 해결된 것이다. 모두 마리의 덕분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점이 있군.”
“네, 어떤 문제점인지요?”
“약이 너무 써.”
“…….”
마리는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이게 갑자기 무슨 황태자답지 않은 소리? 라엘은 이어서 입을 열었다. 역시 이유 없이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써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아무리 써도 꼭 먹어야 하는 약이니…….”
“그대가 대신 먹여 주면 잘 먹을 수 있을 것 같군.”
“……네?”
“내가 쓰러져 있을 때처럼 말이야. 그렇게 먹여 주면 아무런 문제 없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마리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당시 그녀는 입술을 통해 직접 그에게 약을 먹여 주었었다. 지금 라엘은 그걸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그건…….”
마리는 빨개진 얼굴로 뭐라고 대답 못 하고 버벅거렸다. 당시에는 워낙 상황이 급박해서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따지고 보니 자신이 그에게 입맞춤을 했던 것이다.
‘그, 그래도 그걸 어떻게 해!’
그녀가 울상을 지을 때, 그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다. 농담. 설마 내가 그런 걸 부탁하겠는가?”
마리는 민망함에 얼굴이 더욱더 빨개졌다. 그녀는 밉다는 듯 그를 흘겨보았다.
“전하, 그런 농담은…….”
하지만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있던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자신 쪽으로 화악 끌어당긴 것이다. 덕분에 그녀는 그에게 완전히 안겨 버렸다.
“저, 전하?”
“가만히. 잠시 가만히 있도록.”
마리를 자신의 품 안에 가둬 버린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저, 전하…… 놔주십시오.”
마리는 바둥거렸다. 그의 품에 안겨 그의 손길을 느끼고 있으니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녀의 귓가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가며 물었다.
“왜? 왜 놔줘야 하지?”
“그, 그건…… 몸이 아직 안 좋으시니…….”
황태자는 피식 웃었다.
“이렇게 그대를 안고 있으니, 오히려 몸이 좋아지는 기분인데?”
“그…….”
마리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황태자가 생각지도 못 한 행동을 하였다. 그녀의 목덜미를 지그시 깨문 것이다.
“……!”
마치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에 마리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심장이 멎을 만큼 강한 자극이었다. 그 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리는 목덜미를 자극했던 그의 느낌에 가슴이 놀라 뭐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었고, 라엘은 그런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슬슬 바빠지겠군.”
마리는 멍하니 물었다.
“네, 네? 어째서?”
황태자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를 내 비로 맞을 준비로 해야 하니까. 아니, 곧 토른 2세가 붕어할 테니 그대는 황후가 되겠군.”
“……!”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마리의 눈이 커졌다. 라엘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그대를 향한 마음을 더는 참을 수가 없어. 대관식을 치른 후, 그대가 이 제국의 황후가 될 것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겠다.”
* * *
날벼락 같은 이야기를 들은 후 이틀이 지났다. 마리는 멍한 표정으로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예작님, 너무 예뻐요.”
“피부가 좋으니 화장을 조금 더 밝게 하는 것이 어떨까요?”
오늘은 전염병이 큰 피해 없이 해결된 것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다. 그 주인공은 당연히 마리였다. 시녀들이 거울 앞에 앉은 그녀를 치장해 주며 떠들었다. 시녀들은 제국의 영웅이나 다름없는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지만, 마리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 얼마 전 라엘이 자신에게 던졌던 말만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대가 이 제국의 황후가 될 것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겠다.”
‘내가 전하의 비가 된다고?’
물론 싫은 것은 아니었다. 이제 그녀는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마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전하는 아직 내 정체를 몰라.’
모리나 왕녀는 현재 제국의 가장 중요한 적이다. 자신이 아무리 많은 공을 세웠다고 이해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해.’
그녀는 라엘을 떠올렸다.
‘그와 함께하고 싶어. 떳떳하고 당당하게.’
솔직히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진정으로 마주하기 위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이것 말고도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또 다른 문제를 떠올린 그녀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이제 곧 토른 2세가 붕어하게 돼. 그러면 키엘 님과 황태자가 정면으로 충돌할 거야.’
현 황제인 토른 2세의 죽음이 멀지 않았다. 길어야 일주일, 아니면 당장 오늘 밤에 임종할지도 몰랐다. 토른 2세의 죽음은 이전부터 예정되었던 바이다. 문제는 이어질 숙청에서 희생될 키에르한이었다.
‘키엘 님의 죽음을 두고 볼 수는 없어. 절대로.’
“하아.”
전염병은 해결되었지만 여전히 겹겹이 쌓여 있는 문제에 그녀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한숨이지?”
놀라 고개를 돌리니 철가면을 쓴 황태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마리를 치장해 주던 시녀들이 급히 예를 올렸다. 마리도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하려는데 그가 그녀에게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괜찮다. 치장 중인데 앉아 있도록.”
“그, 그래도…….”
“정말 괜찮아. 잘못 움직였다가 괜히 다 엉클어질 것 아닌가? 그나저나.”
그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무언가 타오르는 듯한 시선에 마리가 알 수 없는 긴장을 느끼는 순간 그가 말했다.
“오늘 정말로 아름답군. 당장 그대를 가지고 싶을 정도로.”
“……!”
그렇게 말한 그는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술을 맞추었다. 노골적인 애정 표현에 입맞춤까지. 마리의 얼굴이 사과처럼 붉어졌다.
“노, 농담하지 말아주십시오.”
마리는 애써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라엘의 말이 진담인 것은 그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한편, 시녀들은 놀란 얼굴로 둘의 다정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둘 사이가 심상치 않은 것은 황궁 내에서 비밀 아닌 비밀이었지만 오늘 보니 심상치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역시 황태자비는 힐데른 경…….’
‘소문이 사실이었어.’
시녀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황태자는 방 한구석으로 물러나 그녀가 치장을 마무리하는 것을 기다렸다.
“전하, 불편하실 테니 사자궁에서 쉬고 계십시오. 치장이 끝나면 제가 사자궁으로 가겠습니다.”
“괜찮다.”
“하지만…….”
“그냥 그대가 보고 싶어서 온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 그러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말도록.”
그의 말에 마리는 살짝 민망한 표정을 지었고, 주변 시녀들은 속으로 어머 어머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얼굴에 쓴 철가면처럼 무섭기만 한 황태자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은 꿈에서도 상상 못 했다.
곧 치장이 끝나고, 마리는 어색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편하게 다니던 평소와 다르게 화장을 하고 이런저런 장신구를 다니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
황태자가 말없이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자 마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상한가요?”
“아니.”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름답다. 다른 놈들에게 보여 주기 싫을 만큼.”
마리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어쩌면 유치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에게서 들으니 괜히 가슴이 설레었다.
“정말 괜한 잡놈들이 들러붙을까 걱정이군. 치장을 다시 시킬까…….”
뭔가 진지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인지라 그녀는 화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말고 누가 자신을 예쁘게 봐주겠는가?
“그럴 리 없어요. 가요.”
“흐음.”
황태자는 그녀에게 하얀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나에게 그대를 에스코트할 수 있는 영광을 주겠는가?”
레이디를 에스코트할 때 취하는 예였다. 마리도 예에 맞춰 라엘의 손을 잡았다.
“전하의 은총에 감사합니다.”
둘은 준비된 마차에 올라탔다. 그들이 지금 가고 있는 곳은 전염병이 큰 피해 없이 해결된 것을 기념하는 연회였다. 즐기기 위한 호화로운 연회가 아니라 흔들렸던 민심을 다독이기 위한 행사였다.
‘황궁에서는 간단한 연회를 열고, 백성들에게는 술과 음식을 무상으로 내준다 했지.’
곧 마차는 연회장에 도착했다.
“황태자 전하와 힐데른 예작이십니다!
연회장에 들어서자 모든 이가 움직임을 멈추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모두 예를 표하면서도 그의 손을 붙잡고 있는 마리를 바라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전염병을 해결한 마리야말로 이 연회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비단 연회의 주인공일 뿐 아니라 제국의 영웅이라고 칭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래, 다들 노고가 많았다. 이 연회는 그대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전염병으로 인한 아픔을 잊기 위한 연회이니 편하게 즐기도록.”
“감사합니다!”
황태자의 이야기가 끝난 후 중요한 식순이 이어졌다. 이번 일을 해결한 제국의 영웅, 마리 폰 힐데른의 작위 수여식이었다.
“힐데른 예작은 앞으로.”
모든 이의 시선이 마리에게 쏠렸다. 마리는 긴장된 마음에 숨을 살짝 들이쉬고 단상으로 나아갔다. 그녀가 자신 앞에 무릎을 꿇자 황태자는 황제의 권한을 상징하는 검을 쥐고 입을 열었다.
“동방 교국과의 협상과 성배 도난 사건부터 많은 공을 세워 온 마리 폰 힐데른은 마약 밀매 사건, 위조 화폐의 일을 비롯해 이번 전염병을 해결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여 그 공로를 인정해 자작위를 내리노라.”
그의 말에 사람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작이면 결단코 낮지 않은 작위였다. 유례가 없는 초고속 계급 상승이었다. 하지만 이의를 표하는 이는 없었다. 그만큼 그녀가 이룬 공들은 대단했기 때문이다.
황태자가 말을 이었다.
“또한, 마리 폰 힐데른에게 자작위와 더불어 덴틸슨 광산의 소유권을 내리노라.”
그 말에 마리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전에 듣지 못한 포상이었다.
‘뭐라고? 덴틸슨 광산이라고?’
덴틸슨 광산이면 금, 은이 채취되는 광산은 아니지만, 여러 광물이 다량으로 채굴되는 알짜배기 광산이었다. 그런 곳을 나에게 주겠다고?
“저, 전하 그건 너무 과한…….”
마리는 사양의 의사를 표명했지만 황태자는 이렇게 답했다.
“내 목숨은 이런 광산보다도 더 값지다. 그러니 받아.”
그 말에 마리는 더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이전의 천만 페나에 더해 광산까지, 졸지에 제국에서 손꼽는 거부가 되었다.
‘돈 쓸 곳도 없는데.’
마리는 곤란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받은 재산이 훗날 어떤 식으로 사용될지.
한편, 연회장의 귀족들은 그녀가 받은 포상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봉토가 아니라 광산이라. 역시 그렇군.’
‘황태자 전하의 뜻은 역시.’
사실 이번에 마리가 어떤 포상을 받을지는 귀족들 사이에서 굉장히 큰 관심사였다. 승작은 당연했고 어떤 봉토가 내려질지 궁금했던 것이다. 무려 황태자의 목숨을 구했으니 그저 그런 봉토가 주어질 리는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광산이라니. 일반적인 봉토와 의미가 전혀 달랐다.
‘역시 황태자 전하의 뜻은 확고하군. 힐데른 자작을 비로 들일 생각인 거야. 어차피 황태자비…… 아니, 황후가 되면 봉토는 의미가 없어지니, 개인의 재산으로 삼을 수 있는 광산을 내린 거겠지.’
그렇게 귀족들의 마음속에 마리는 차기 황후로 강력하게 자리 잡았다. 이 자리의 수많은 사람 중 그녀가 황후가 될 거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이는 마리 본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그녀가 황후가 되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겼다. 어쨌든 그렇게 작위 수여식이 끝을 맺었고, 연회가 이어졌다.
“그러면 편하게 즐기도록.”
“네, 알겠습니다!”
전염병의 종식을 기념하는 연회인지라 화려함은 없었다. 단출한 음식에 잔잔한 음악이 흘렀고, 덕분에 귀족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연회를 즐겼다. 황태자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마리에게 손을 뻗었다.
“……전하?”
마리가 무슨 뜻인지 몰라 눈만 껌뻑이자 그가 말했다.
“춤.”
그제야 마리는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추, 춤은 안 됩니다.”
“어째서?”
“……제가 너무 못 춰 전하의 발을 밟고 말 거예요.”
이전에 그녀는 그와 춤을 출 때 스텝이 엉망이었던 것은 물론, 수없이 그의 발을 밟아 댔었다. 황태자에게 그런 잘못을 또 할 수는 없었다.
“그 뒤로 연습 안 했나?”
마리는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죄송…….”
황태자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그녀의 허리를 한쪽 팔로 강하게 감싸 안았다.
“……저, 전하!”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갑작스레 자신을 감싸 안자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라엘이 말했다.
“못 춰도 괜찮아. 그냥 그대와 함께 즐기고 싶은 거니까. 그대가 밟는 것은 얼마든지 괜찮으니 편하게 그냥 따라오기만 하도록.”
황태자와 마리는 홀의 중앙으로 가 춤을 추었다.
“오, 전하와 힐데른 자작께서 춤을?”
두 주인공의 춤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정말 잘 어울리는구려.”
“그러게 말입니다. 황태자 전하의 기품이야 원래부터 말할 것도 없지만, 힐데른 자작께서도 참 아름다우십니다.”
“힐데른 자작이 저렇게나 아름다운지는 오늘 처음 알았구려.”
사람들이 마리에 대해 하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원래도 귀여운 외모였는데, 오늘은 마치 꽃이 개화한 듯 아름다웠다. 평소 그녀의 꾸미지 않은 모습만 보던 사람들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자작이지만, 춤은 좀 잘 못 추는 것 같구려.”
“…….”
사람들은 침묵으로 동의를 표했다. 둘은 단상 가운데서 춤을 추고 있었는데, 그녀가 쉬지 않고 황태자의 발을 밟아 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콱!
또 황태자의 발을 밟으며 마리는 울상을 지었다.
“죄, 죄송합니다.”
“괜찮다.”
누가 봐도 아팠을 것 같은데, 황태자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답했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더욱 긴장하게 되었고, 그 결과 황태자의 발을 더욱더 밟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때, 황태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밟는 건 상관없는데 너무 긴장하는군. 편하게 추면 된다니까. 어쩔 수 없군.”
혀를 찬 그는 돌연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바짝 끌어안았다.
“……!”
“괜찮으니 편하게 추어라.”
천천히 스텝을 밟으며 그의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분명 긴장을 풀라는 의도였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등이 파인 드레스를 입은 탓에 그의 손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고,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얼굴이 사과처럼 변하며 당황으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부담 갖지 말고. 편안하게.”
‘저, 전혀 편안하지 않아요!’
마리는 속으로 외쳤지만,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를 따랐다. 밀착한 그의 몸이 신경 쓰여 뭐라고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자신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에 가슴이 두근거리느라 춤에 대한 긴장은 조금 덜하게 되었다.
콰악!
발을 밟는 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흠. 긴장이 안 풀리나 보군. 조금 더 긴장을 풀게 해줘야 하나.”
“괘, 괜찮습니다!”
그가 또 어떤 행동을 할지 몰라 그녀는 화급히 고개를 저었다. 한편 귀족들은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전하의 발등이 걱정되긴 하지만 보기는 좋구려.”
“그러게 말입니다. 좋은 부부가 될 것 같습니다.”
“제국의 흥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차기 황후와 황제의 사이가 좋다면 그것도 나라의 복이었다. 귀족들은 기쁜 마음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마리에게는 곤혹스러운, 다른 이들에게는 흐뭇한 춤이 끝이 났다. 그녀는 얼른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수, 수고하셨습니다.”
“한 곡 더…….”
“그, 그건…… 안 됩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면 전 잠시 이만……!”
그녀는 그가 강제로 붙들까 봐 도망치듯 벗어났다. 황태자를 피해 구석으로 숨어 오늘은 절대 춤을 추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춤을 청하려고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저는 오늘은 춤을…….”
거절하려던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춤을 청하기 위해 다가온 사람이 생각지도 못 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힐데른 예작? 아니, 이제는 힐데른 자작이군.”
쾌활한 느낌의 보기 드문 미남이 살짝 눈매를 찡그렸다. 사교계의 쾌남 같은 인상이지만 공적인 업무에 있어서는 꽉 막힐 정도로 깐깐하고, 어떨 때는 비정할 정도로 냉혹한 남자.
“나와 춤을 추어주지 않겠나, 레이디 힐데른?”
오른 공작이 그녀에게 춤을 청했다.
거절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기에 마리는 그와 춤을 추게 되었다.
‘왜 오른 공작이 나에게 춤을?’
마리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오른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오른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연회장에서 춤은 누구에게나 신청할 수 있는 것 아니었나? 그리고 나는 원래 춤을 추는 것을 좋아한다.”
“…….”
마리는 문득 그의 평소 소문을 떠올렸다.
‘사교계에서는 쾌남으로 유명하다고 했던가.’
그는 사교계에서 유쾌하고, 여자들의 마음을 흔드는 바람둥이로 유명했다.
‘업무를 볼 때는 냉철하지만, 퇴근 후 사적인 영역에서는 유쾌한 스타일이랄까?’
그녀는 그의 딱딱한 모습만을 보아온 터라 그의 쾌활한 모습이 전혀 짐작이 안 되지만, 그가 춤, 정확히는 사교계의 유흥을 즐기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춤이 좋아도…….’
그녀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콰악!
‘……이렇게 발이 밟히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을 텐데.’
또다시 그의 발을 밟아버린 마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황태자의 경우에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면, 오른의 경우에는 무서웠다. 원래부터 사이가 안 좋았는데 이렇게 발을 밟아 대다가는 결투라도 신청받을 것만 같았다.
“끄응…….”
아프긴 아픈지 오른은 신음을 흘렸다.
“마리, 넌 좀 더 연습을 해야겠군. 이렇게나 춤을 못 추다니.”
“……죄송합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가 뜻밖의 말을 하였다.
“황후가 되려면 춤은 기본 중의 기본에 속하는 소양이다. 최대한 빨리 숙달하도록.”
“……!”
마리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오른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뭘 그렇게 보지?”
“그게…… 방금?”
그는 지금껏 그녀가 황태자의 짝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런데 방금 그 말은 그녀를 인정하는 말이었다.
“난 너를 믿지 않아.”
마리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들었다.
“그래도 이번 일을 통해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어떤?”
“의심스러운 것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너라면 황후로서 손색이 없지 않을까 하고 말이야.”
묘한 말이었다. 의심스럽지만 황후로서는 적합하다니?
“제 능력 때문에 그렇습니까?”
“아니, 그것보다도.”
오른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를 향한 네 마음이 진심인 것을 알았으니까. 최소 네가 전하께 해를 끼칠 일은 없다고 확신한 거다.”
그의 말뜻을 이해한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서 네가 전하의 짝이 되는 것을 더는 반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거기까지 이야기한 오른은 입을 다물었다.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는 가만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가 꺼내려다 만 이야기. 그건 바로 이것이었다.
‘전하의 마음이 너를 향해 있으니까.’
“각하?”
“아니다.”
오른은 생각을 멈추고 춤을 추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각하.”
곧 춤이 끝난 후, 마리는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오른은 그런 그녀에게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하나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군.”
“예?”
“이번 일. 고마웠다. 정말로.”
“……!”
“너에게 따로 감사를 표한다고 한 것이 계속 기회가 안 되어서 지금에야 이야기하는군. 네 덕분에 전하께서 살아나셨고, 제국은 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어. 정말로 고맙다.”
그가 이렇게 감사를 표하는 것이 처음이라 마리는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어쨌든 즐거운 연회 되도록.”
그렇게 오른과의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 * *
오른과의 대화 후 마리는 연회장을 빠져나와 벤치에 앉았다. 잠시 쉬고 싶었다.
“밤이라 그런가, 아직 날씨가 조금 춥네.”
그녀는 밤하늘을 바라보다 오른의 말을 떠올렸다.
‘황후라.’
그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꺼낼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황후란 직위는 전혀 관심 없었다. 오로지 원하는 것은 그와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아무리 전하가 나를 원한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안 돼. 방법을 찾아야 해.’
이전처럼 무작정 피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드는 생각은 어떻게 하면 라엘과 자신이 행복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일 뿐. 생각에 잠겨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이곳에 있었구나.”
“아, 전하.”
황태자였다. 그가 성큼 다가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이곳엔 어째서?”
“너 때문에.”
“네?”
“갑자기 안 보여서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겼나 찾았다.”
“아…….”
마리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쉬고 있던 건가?”
“네, 바람을 쐬니 시원해서요.”
“그렇군. 확실히 연회장보다는 시원해서 좋군.”
특별할 것 없는 대화를 하며 마리는 신기하단 마음이 들었다. 옛날엔 그와의 대화가 긴장되기만 했는데, 이제는 굉장히 편안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늑하고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일분일초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그냥 계속 아무런 생각 없이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렇게 잠시 평안히 대화를 나누다 라엘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전쟁을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어.”
“……!”
“마리, 네 말대로 이번 전염병이 요하네프 3세와 연관된 일이면 말이야.”
마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황태자에게 전염병이 요하네프 3세의 음모였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증거가 없으니 죄를 물을 수는 없겠지만, 상황이 안 좋아질 것을 대비하고 있어야겠어.”
마리는 동의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요하네프 3세의 목적은 결국 동제국을 정복하는 것일 거다. 그때, 라엘은 딱딱한 표정을 풀더니 마리를 바라보았다.
“공적인 이야기는 여기까지. 오늘은 이런 이야기 말고 그저 그대와 함께 있고 싶군.”
“네, 전하.”
그와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은 마리도 마찬가지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그의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대었다.
“……!”
라엘은 그녀가 자신에게 먼저 몸을 기대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리는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불편하신가요?”
“……그럴 리가.”
그는 미소를 지었다. 부드러움과 따뜻함이 담긴 웃음이었다.
“언제든지, 얼마든지 기대어도 좋다.”
그는 자신에게 기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지극히 소중한 것을 대하는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편안해.’
마리는 눈을 감았다. 이렇게 그의 손길을 느끼고 있으니 머릿속의 모든 복잡함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저 아늑하고 편안했다. 둘은 가만히 시간을 보냈다. 별다른 대화도 없었지만, 수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깊게 소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지?”
“그냥…… 그냥요.”
“잠깐만 저쪽을 봐라.”
마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놀라 탄성을 내뱉었다.
“와…… 예뻐요.”
밤하늘에 별똥별이 아름다운 선을 그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저렇게 선명하고 아름다운 별똥별은 처음이었다.
“전하, 소원 비세요.”
“소원?”
“네,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그건 근거 없는 미신일 뿐이다.”
“그래도 한번 빌어 보세요.”
거듭된 재촉에 황태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소원을 빌었다. 마리도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잠시 후 황태자가 물었다.
“무슨 소원을 빌었지?”
“전하는요?”
“나야 당연히 그대와 내가 행복할 수 있기를 빌었지.”
그의 말에 마리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저는…… 비밀이에요.”
라엘은 궁금해하는 눈치였으나, 마리는 알려 주지 않았다.
사실 그녀의 소원도 그와 똑같았다.
그와 자신이 행복할 수 있기를.
제발 이루어지기를 그녀는 다시 한번 간절히 바랐다. 바로 그 순간, 상황이 순식간에 바뀌는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저 멀리서 높은 목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전하! 전하! 급보입니다!”
심상치 않은 목소리에 라엘과 마리는 표정을 굳혔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곧 그에게 다가온 시종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토른 2세 폐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
마리의 얼굴이 하얘졌다. 결국 토른 2세가 사망한 것이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니 가슴이 덜컹했다. 반면 황태자는 그저 올 것이 왔다는 듯 덤덤한 눈치였다.
“알겠다. 장례 절차를 준비해야겠군. 궁내부장에게 이르도록.”
“네, 알겠습니다!”
마리는 그런 그를 보며 마음을 졸였다. 이제 토른 2세가 사망했으니, 선황의 유지를 지키려는 세이튼 가문과 라엘은 본격적으로 충돌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 키에르한은 죽음을 맞이할 확률이 높았다.
‘그것만큼은 절대로 안 돼.’
마리는 굳게 생각했다.
‘막아 내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리가 다짐하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다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급보입니다!”
“뭐지?”
황태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토른 2세가 사망한 와중에 또 다른 급보가? 곧 그들 앞으로 또 다른 전령이 도착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전령을 본 황태자와 마리는 크게 놀랐다. 이곳 황궁 내에서 달려온 전령이 아니었다. 마치 전장에서 곧바로 달려온 듯 먼지가 가득한 갑주를 걸치고 있었고, 수많은 거리를 주파한 것인지 전신이 땀에 전 채 안색이 창백했다.
“그대는 누구지?”
“3군단, 알베론 백작님 휘하의 기사 워드입니다!”
전령의 소개에 황태자와 마리의 얼굴이 굳었다. 3군단이면 제국 서부 전선을 책임지는 군단이었기 때문이다. 3군단은 서제국을 경계하며, 클로얀 지방을 담당하고 있었다.
‘설마?’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클로얀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
방금 토른 2세의 붕어 소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충격이 내려앉았다. 클로얀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그게 사실인가?”
“네, 전하!”
“주동자는 누구지?”
마리는 순간 전(前) 왕실 기사단의 인물들이 떠올랐다. 반란의 주모자라면 그들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하지만 전령은 전혀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반란의 주동자는 클로얀 왕가의 모리나 왕녀라고 하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리의 시간이 멈추어 섰다.
‘지금…… 뭐라고?’
* * *
토른 2세의 장례식은 담담하게 거행되었다. 국묘에 안치되는 토른 2세의 관을 바라보는 라엘의 얼굴은 무표정하였다. 친부이긴 했지만 그의 어머니를 죽인 것도, 누이의 독살에 관여한 것도 모두 토른 2세였다. 서자인 라엘이 인망을 얻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1황자의 손을 들어 숱한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었다. 친부임과 동시에 원수와도 다름없었던 존재. 그래서 라엘은 감정의 동요가 크지 않은 듯했다. 그렇게 장례식을 마친 후, 황태자는 사자궁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피곤하군.”
오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전하.”
그렇게 말한 오른은 아차 하고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이제는 ‘전하’가 아니군요, 폐하.”
폐하. 오로지 황제에게만 붙이는 존칭. 이제 토른 2세가 서거했으니 라엘이 황제가 된 것이다.
“진정한 제국의 지배자가 되신 것을 감축합니다.”
하지만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다. 선제후들의 승인 절차를 거쳐야지.”
“그거야 어차피 형식적인 절차 아닙니까?”
동방과 다르게 유럽에는 선제후(選帝侯)라는 직위가 있었다. 바로 황제 선출권을 가진 대귀족을 뜻하는 말로, 그들 모두의 승인을 받아야 진정한 황제로서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오른의 말처럼 명목적인 절차일 뿐이긴 했다.
“어차피 형식적인 선제후 회의. 차나 한잔하고 끝나겠지요.”
오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참고로 소비엔 공작가의 가주인 오른도 선제후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황태자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에는 조금 다를 것이다. 키에르한 후작의 세이튼 가문이 내 즉위를 반대할 테니.”
“……!”
“엄밀히 말하면, 정통성만을 따진다면 적법한 후계자는 내가 아니라 황후의 적통인 오스카니까.”
오른이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만약 키에르한 후작이 반대하고 나선다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선제후 회의는 만장일치로 통과되어야 합니다. 그게 우리 동제국의 황위 계승에 관한 법칙이니까요.”
“만약 세이튼 가문이 끝까지 반대한다면 방법은 하나뿐.”
라엘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세이튼 가문에 역모죄를 씌워 멸해야겠지.”
옆에서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마리의 얼굴이 하얘졌다. 역시나 예상하고 있던 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당장 내일이 선제후 회의이니 키에르한 후작이 어떻게 나올지는 곧 알 수 있겠지. 그나저나 이 문제보다는 클로얀 지방이 문제군. 어떻게 진행되고 있다고?”
황태자는 클로얀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화제를 돌렸다.
“3군단에서 2만의 병력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하였습니다. 압도적인 병력 차니 무리 없이 진압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진압 자체야 문제가 없겠지.”
황태자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문제는 반란을 일으켰다고 알려진 주동자다. 모리나 왕녀라고?”
오른이 3군단에서 전해진 보고서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그렇게 소문이 퍼지긴 했습니다만…… 3군단장 알베론 백작이 추가적으로 올린 보고에 따르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반란 세력이 퍼뜨린 거짓말이란 증거를 확보했다고 합니다.”
라엘은 가만히 오른의 보고를 들었다. 오른은 가타부타 반응이 없는 황태자를 보며 생각했다.
‘반란 세력이 가짜 모리나 왕녀를 세운 건 왕국민들을 선동하기 위해서야. 모리나 왕녀란 이름만 대면 수많은 클로얀 왕국 사람을 움직일 수 있으니까.’
문제는 이번 반란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클로얀의 정세상 이런 반란은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었고, 반란군들은 항상 모리나 왕녀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울 것이다.
‘마리.’
오른은 시선을 돌려 황태자 뒤에서 묵묵히 서 있는 마리를 바라보았다. 아직 오른은 마리의 정체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그녀가 오른이 추측하는 대로 정말 모리나 왕녀가 맞다면,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런 그녀를 놓고 황태자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때, 국방대신이 거친 목소리로 의견을 내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이미 클로얀 지방을 달랠 안정책은 쓸 만큼 썼고, 이제 방법은 하나입니다.”
모두가 국방대신을 바라보았다. 국방대신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모리나 왕녀의 망령이 떠도는 한 이런 일은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짜’ 모리나 왕녀를 찾아내서 그녀의 목을 베어야 합니다.”
국방대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왕가의 마지막 후예인 모리나 왕녀를 죽이면, 왕국민들도 더는 왕국의 부활을 꿈꾸지 못할 것이다.
‘전하.’
오른은 라엘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황태자는 철가면 아래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무겁게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 * *
다음 날, 상황은 역시나 더 안 좋게 진행되었다. 선제후 회의에서 키에르한이 반대 의견을 표명한 것이다.
“우리 세이튼 가문은 선황이신 토른 2세 폐하의 유지를 받들어, 라엘 전하의 황제 즉위를 반대합니다.”
“……!”
선제후 모두가 숨을 죽이고 키에르한과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차가운 눈동자로 키에르한을 노려보았다.
“다시 한번 묻겠다, 후작. 정말로 내 즉위를 반대하는가?”
“네,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묻지. 정말인가?”
거듭된 물음에 선제후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차피 라엘이 황제가 되는 것은 정해진 사실이다. 만약 키에르한이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는다면, 그는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전하.”
여전히 흔들림 없는 대답. 라엘은 언성을 높이려다 입을 다물었다. 키에르한의 눈을 마주한 순간 그의 진정한 마음을 깨달은 것이다.
죄송합니다.
키에르한의 눈동자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라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어리석은.”
분명 키에르한도 라엘을 반대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문의 입장상 라엘을 반대할 수밖에 없기에 눈빛으로라도 사죄하고 있는 것이었다.
“키에르한 후작. 아니, 내 친우였던 키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다시 묻겠다. 너희 세이튼 가문의 고고한 기치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때로는 그 기치가 올바른 방향을 향하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이다. 진정으로 제국과 너희 가문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라.”
그렇게 말하는 라엘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라엘도 한때 소중한 친우였던 키에르한의 목을 치고 싶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마음을 느꼈기에 키에르한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말씀에 감사합니다, 전하. 하지만…… 죄송합니다. 저희로서는 토른 2세 폐하의 유지를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라엘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키에르한이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다. 네가 망령과도 같은 헛된 전통에 얽매인다면 어쩔 수가 없지.”
라엘은 덜컥 자리에서 일어났고, 선제후 회의는 파장을 맞았다. 그리고 그날 밤, 황태자의 명에 따라 키에르한 후작은 스올의 탑에 감금되었다. 정치적 이유에 따라 여러 죄목이 그에게 덮어 씌워졌으나, 키에르한은 굳게 입을 다물 뿐 스스로를 변호하는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 * *
세이튼 가문의 가주인 키에르한이 스올의 탑에 갇혔다는 소식은 곧 수도 전체에 퍼졌다.
“키에르한 후작께서?”
“그래, 대관식 전에 처형이 거행될 거라는군.”
“제국 최강의 기사인 키에르한 후작이 이렇게 목숨을 잃게 되다니.”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면서도 큰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했다. 만약 키에르한이 군사를 일으켜 저항했다면 세이튼 가문과 황실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을 것이다.
한편, 마리는 자신의 방에서 괴로운 표정으로 고뇌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가 죽는 것을 이대로 지켜볼 수는 없어.’
클로얀의 반란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해 터질 것 같았지만, 일단 키에르한의 목숨을 먼저 구해야 했다. 문제는 그를 구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이었다.
‘전염병을 해결한 대가로 그를 살려 달라고 빌어 볼까?’
그나마 가능성 있는 방법. 하지만 마리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무려 황위 계승이 걸린 일이야. 이것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해. 그를 살려 줄 만한 더 큰 이유가 있어야 해.’
그녀는 끙끙거리며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그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까? 이전 일들에 대한 공만으로 그를 살리는 데 부족하다면 더 큰 공을 세우면 어떨까?
가능성은 있는 이야기였다. 고래로 큰 공으로 벌을 면한 예는 많았다. 전염병 일에 더해 또다시 큰 공을 세운다면, 키에르한의 처벌을 면죄할 근거가 충분히 되었다. 무엇보다 황태자도 마음속으로는 키에르한을 처형하길 원하지 않고 있었다. 정치적 상황상 어쩔 수 없을 뿐이다. 그러니 그녀가 큰 공을 추가로 세우면 황태자에게 키에르한을 살려 줄 핑계를 마련해 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공을 어떻게 세우지?’
그 순간이었다. 한 가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번뜩 떠올랐다. 그녀가 방금 생각해 낸 방법은 성공하면 큰 공을 세울 수 있음은 물론, 황태자와 자신과의 문제도 동시에 해결할 수 있었다. 즉, 앞으로는 ‘마리’로서 그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모리나’로서 그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의 문제점을 떠올린 마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내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무모한 시도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중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남들이 그녀의 생각을 들으면 미쳤다고 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해야 해. 키엘 님뿐만 아니라, 전하와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굳게 다짐한 마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처형일이 다가와. 일단 움직이자. 최대한 빨리.’
* * *
그녀가 먼저 향한 곳은 키에르한이 갇힌 스올의 탑이었다. 간수에게 간곡히 부탁해 그를 면회할 수 있었다.
“……키엘 님.”
마리는 그를 본 순간, 가슴이 울컥해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마리 양, 이곳에는 어떻게……?”
독방에 갇혀 있던 키에르한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그는 평소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마리 양을 뵐 수 있게 되다니. 주님께서 제 소원을 들어주셨나 보군요.”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건만 별다른 동요 없이 차분한 기색이었다.
“……키엘 님.”
마리는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키에르한은 아련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마리는 그의 눈빛이 가슴이 아파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키엘이 먼저 말했다.
“죄송합니다.”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엇이 죄송하다는 거죠?”
“전부 다. 모든 것이 다 죄송합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해서 죄송합니다.”
마리는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뜻을 바꿀 생각은 없으신가요?”
“…….”
“키엘 님이 방금 말씀하셨듯이 어리석은 일이에요.”
“네, 잘 알고 있습니다.”
키에르한은 씁쓸히 말했다.
“그래도 제 목숨 하나면 가문의 명예를 지킬 수 있으니까요.”
가주인 키에르한이 이렇게 아무런 저항 없이 스스로 목숨을 바치는데, 라엘도 더 피를 흘리려 들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마리는 그 말에 울컥했다.
“제 마음은요?”
“마리 양?”
“고작 목숨 하나라니요? 키엘 님이 죽으면 제 마음은 어떨지 생각 안 하는 건가요? 제가 얼마나 슬퍼할지는 상관없냐고요?”
마리는 감정이 격해져 입술을 깨물었다.
‘고작 가문의 기치와 명예가 뭐라고?’
물론 안다. 고귀한 귀족 중에는 가문의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이가 많다는 것을. 하지만 솔직히 마리는 그들의 입장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죽으면 남겨진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고?’
키에르한이 탄식하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마리는 굳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키엘 님. 한 가지만 묻겠어요.”
“무엇입니까?”
“만약……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받아들이실 건가요?”
키에르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대답해 주세요.”
그는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이유는 없겠죠. 저도 죽음을 원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는 자신이 뜻을 굽히지 않는 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는 거듭해서 물었다.
“만약 정말로 살아날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
마리의 진중한 물음에 키에르한의 눈빛이 달라졌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눈동자에서 억눌러 있던 무언가가 타오르는 눈빛으로.
“만약 나에게 삶을 이어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는 내 모든 삶을 당신을 위해 바칠 것입니다.”
능력 있는 시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