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있는 시녀님-31화 (32/54)

Chapter 4

그때, 추방을 명령받은 요하네프 3세와 로이스는 한참을 말을 타고 달리다 어느 언덕에 멈추어 섰다.

“하아, 조금 쉬었다가 가지. 내가 원래 조금 체력이 약해서.”

“괜찮으십니까?”

“괜찮긴 한데. 이거 꼴이 말이 아니군. 제대로 해본 것도 없이 이렇게 쫓겨나 버리다니. 라키한테 엄청 혼나겠어.”

인형술사 라키. 요하네프 3세의 측근으로 서제국의 재상이자 책략가였다.

“라키 님이 확실히 한마디 할 것 같기는 합니다.”

“그렇겠지?”

“네, 계획한 대로 이루어진 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부하의 냉정한 평가에 요하네프 3세는 좌절한 표정을 지었다.

“으아, 나도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동제국을 위해 선물을 4개나 준비했는데, 뭐 제대로 풀어 보기도 전에 모리나 왕녀가 다 해결해 버렸으니.”

요하네프 3세는 악당처럼 잔뜩 치명적인 음모를 준비해 왔는데, 제대로 진행하기도 전에 전부 가로막혀 버린 것이다. 마약 밀수, 위조 화폐, 사기도박…… 원래대로라면 하나하나가 동제국을 뒤흔들 음모였으나 모리나 왕녀 때문에 채 봉오리를 피워 보지도 못 했다.

“폐하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지 않습니까? 그때 하셨던 내기만 아니었으면 모리나 왕녀도 곧바로 음모를 눈치채지는 못 했을 겁니다.”

로이스의 지적이 옳았다. 확실히 요한이 힌트만 주지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쉽게 계략이 막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건 그렇긴 하지만 내기를 빌미로라도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고.”

“그래도 그때 내기는 폐하가 잘못하신 것 같습니다.”

로이스는 냉정하게 말했다.

“으아, 몰라. 어쨌든 이건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모리나 왕녀가 너무 뛰어난 탓이라고.”

요하네프 3세는 삼류 악당이라도 된 것처럼 중얼거렸다.

“오늘의 수모는 반드시 갚아주마, 모리나 왕녀. 꼭 내 것으로 만들어 이 수모를 갚아주겠어. 오늘은 실패했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아.”

요하네프다운 말에 로이스는 혀를 찼다. 어쩌면 저렇게 황제로서의 위엄이 없는지.

그런데 그때였다. 요한의 표정이 갑작스럽게 굳었다. 그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폐하?!”

‘발작’이 일어났음을 깨달은 로이스가 놀라 그를 불렀다. 요하네프 3세는 잠시 가슴을 부여잡고 신음을 삼켰다. 다행히 금세 가라앉았는지 그는 고개를 젓고는 씨익 웃었다.

“오랜만의 발작이군. 약을 잔뜩 먹고 있으니 당분간 괜찮을 줄 알았는데.”

로이스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요한은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그렇게 보지 말라고. 발작이 일어난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폐하…….”

로이스는 한숨을 삼켰다. 그는 요하네프 3세가 지병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깨닫고 화제를 돌렸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바로 서제국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며 로이스는 말했다.

“이제 우리가 굳이 더 동제국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묘한 의미의 말이었다.

“어차피 마지막 계략은 준비를 다 끝내 놓아 우리가 동제국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요하네프 3세도 가벼운 표정을 지우고 특유의 섬뜩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래, 지금까지의 일들은 가벼운 인사 정도였지. 진짜 재앙은 바로 이번 것이니까.”

로이스도 요한의 말에 동의했다.

“네, 동제국 수도는 큰 혼란에 빠질 겁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만약 이번 일이 폐하가 꾸민 일이라는 게 밝혀지면 사가(史家)들은 폐하를 역사에 다시없을 악마로 기록할지도 모릅니다.”

요하네프 3세는 피식 웃었다.

“안 들키면 되지. 증거도 없는데 알 게 뭐야?”

“하긴…….”

“그리고 내가 조금 욕먹더라도 ‘계획’이 성공해 우리 서제국의 후손들이 조금 더 행복해진다면, 그걸로 가치 있는 일이 아닌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도 나름 군주니까 말이야.”

로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들에게는 음흉한 음모가로 손가락질당하는 요하네프 3세였지만, 서제국 백성들은 그를 명군이라 부르며 칭송한다.

‘결국, 폐하의 계획도 궁극적으로는 서제국의 백성들을 위한 일.’

로이스는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겨 물었다.

“폐하.”

“응, 말해봐.”

“폐하의 계획은 오로지 서제국의 백성들을 위한 것입니까?”

요한은 대답했다.

“서제국의 백성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

묘한 의미의 답.

“그 말씀의 뜻은?”

“백성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내 개인적인 야망도 섞여 있지. 당연한 것 아닌가?”

요하네프 3세는 씨익 웃으며 솔직히 말했다.

“죽기 전 내 개인적 야망도 이루고, 그로 인해 서제국 백성들의 삶도 좋아지고. 뭐, 그런 거지.”

로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하네프 3세다운 답이었다. 로이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요하네프 3세에게 남은 시간을 떠올린 탓이다. 지병을 앓고 있는 그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렇게 무리해서까지 일을 진행하는 것이다. 자신이 죽기 전 모든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현재의 의술로는 손댈 수조차 없는 병.’

명의 중의 명의인 서제국의 어의는 요하네프 3세의 지병을 밝혀냈다. 하지만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다. 이 시대의 의술로는 손댈 수 없는 병이기 때문이다.

‘시대를 뛰어넘는 천고의 명의라도 나온다면 모를까.’

로이스는 순간 떠오른 생각에 속으로 고소를 지었다. 물론 그런 명의가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었다. 요하네프 3세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이는 세상에 아무도 없을 거다.

그때, 요하네프 3세가 말했다.

“어쨌든 다행이야. 여기 일은 망쳤지만, 우리 유능한 재상님은 계획을 착실히 진행하고 있으니까.”

“네, 결국 중요한 것은 클로얀 지방의 일이니까요.”

로이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클로얀 지방에 여러 재난이 발생한 덕분에 크게 시간을 아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놀라운 사실을 암시했다. 최근 악화를 거듭하고 있던 클로얀 지방의 상황이 어쩌면 서제국과 연관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로 동제국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요하네프 3세는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기로 약속했으니 돌아가긴 해야겠지. 하지만 조금만 있다가 돌아가지.”

“네? 어차피 마지막 계략은 이미 시작되어서 굳이 있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요하네프 3세는 짙은 웃음을 지었다.

“내 마음속 피앙세에게 인사라도 하고 싶군. 떨어져 있는 동안 날 잊지 않게 말이야.”

* * *

제국의 경제를 뒤흔들 뻔했던 도박 사건이 큰 문제 없이 막을 내렸다. 모두 마리 덕분이었다.

“정말 감사하오, 힐데른 예작.”

“우리 가문은 결단코 예작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슐레안 대공가를 비롯한 네 가문의 가주들은 모두 마리에게 직접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가문 전체가 거덜 날 뻔했으니까.

마리는 애매한 얼굴로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사실 그녀는 저들 네 가문을 도와주려고 했다기보다는 저들이 몰락함으로써 생길 제국의 피해를 막기 위해 나선 것뿐이었다.

‘애초에 자업자득인 면이 있으니까.’

요하네프 3세가 의도적으로 접근했다고 해도 가문이 날아갈 정도로 도박에 빠진 것은 결국 그들의 잘못이었다. 그녀 덕분에 어떻게 잘 끝났어도, 저들은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이다. 그 생각은 황태자도 마찬가지인지 싸늘하게 말했다.

“힐데른에 대한 감사는 별개로, 너희의 잘못은 어떻게 책임질 거지?”

그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그리고 힐데른이 카탈락 백작에게서 돈을 되찾았으니, 너희의 재산은 모두 엄밀히 말하면 힐데른 예작의 소유이다.”

“저, 전하?!”

모두가 깜짝 놀라 외쳤다. 하지만 황태자는 차갑게 말했다.

“내 말에 틀린 부분이 있나?”

“그, 그래도…….”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냥 파산하는 것도 괜찮겠군. 힐데른 예작이 꼭 그대들의 빚을 변제해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황태자는 마리에게 말했다.

“축하한다. 전 대륙을 통틀어 가장 재산이 많은 부자가 되었군.”

마리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황태자가 지금 저들에게 나름의 벌을 내리려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죄, 죄송합니다! 제발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전하!”

“힐데른 예작님! 제발 자비를……!”

가주들은 사색이 되어 마리와 황태자에게 매달렸다. 마리가 요한과의 도박에 승리함으로써 1억 페나 빚의 채권자는 황실, 정확히는 마리가 되었다. 만약 그녀가 빚을 변제해 주지 않는다면 저들은 동전 한 닢 남기지 못하고 파산이었다. 아무 말 없이 한참이나 차가운 분위기만 풍기던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지예프 광산, 스트린 광산, 스키너 상단, 지리엔 지방, 유리안 지방, 빌레드 조선소…….”

황태자의 입에서 저들 네 가문의 알짜 재산이 흘러나왔다.

“그대들의 빚을 변제해 주는 대신 저 자산은 모두 이 순간 이후부터 황실로 귀속한다. 이의 있는가?”

“……!”

가주들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힘없이 어깨를 떨구었다. 어찌 거부하겠는가? 그들에게는 아무런 선택 권한이 없었다. 빚을 변제해 가문을 존속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큰 은혜였다.

황태자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각 가문이 운영하는 사업의 핵심 지분을 가져갔다. 즉, 네 가문이 하는 사업의 대주주가 된 것이다. 운영권은 각 가문에 그대로 맡기지만, 언제든 문제가 생길 시 운영권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때문에 네 가문은 껍데기는 그대로지만, 실질적인 힘은 대폭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약해진 만큼 황태자와 황실의 권한은 강력해졌다.

“자비에 감사합니다.”

가주들은 생살이 뜯겨 나가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한 마디의 반발도 하지 못했다. 정말로 그가 자비를 베푼 것이 맞으니까. 황태자는 원한다면 이번 일을 빌미로 네 가문을 몰락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모두 황실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면 이만 물러나도록.”

그들이 물러간 후 황태자는 혀를 찼다.

“한심한 것들. 도박 따위에 빠져서. 카지노를 폐쇄시키고, 카드 게임에 일정 이상의 돈을 거는 것도 금지해야겠어.”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다행히 큰 피해 없이 잘 끝나긴 했지만, 그는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마리는 조심히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불쾌한 데에는 그녀도 한몫했기 때문이다. 그의 뜻을 무시한 채 큰 위험을 무릅쓰고 도박을 했으니까.

“이번 일이 끝나면, 결과에 상관없이 너에게 큰 벌을 내리겠다.”

마리는 당시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직은 별다른 이야기가 없지만, 저 상벌이 명확한 황태자가 잊고 있을 리 없다. 그녀는 긴장된 마음으로 기다렸다. 과연 황태자는 곧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리, 이번엔 네 차례다.”

“네, 전하. 무엇이든 말씀하시옵소서.”

결과는 좋았지만, 분명 그녀가 무리해서 도박에 나선 것은 잘못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무슨 벌이든 받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황태자의 말은 뜻밖이었다.

“네가 받을 상은 다음과 같다.”

“상이요? 벌이 아니라요?”

마리는 눈을 크게 떴다. 황태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 덕분에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으니 당연히 상을 내려야지. 물론 마음대로 위험하게 행동한 것에 대한 벌은 따로 내릴 것이다.”

황태자다운 처사였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박으로 상을 받는다는 게 조금 이상하지만…….’

도박은 어떤 경우에도 옳지 않다. 이번에는 불가피한 상황이었을 뿐이다. 마리는 앞으로는 즐기기 위한 카드 게임이면 몰라도 이런 도박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황태자가 이야기한 상을 들은 마리는 깜짝 놀랐다.

“너, 너무 과합니다, 전하!”

“뭐가 과하지?”

“천만 페나라니!”

황태자가 그녀에게 내린 상은 무려 천만 페나였다!

‘천만 페나면 도대체 얼마야? 웬만한 영지를 몇 개나 사고도 남을 금액이잖아!’

얼마 전 위조 화폐 사건 때 손해 볼 뻔한 금액이 172만 페나이다. 당시 172만 페나만으로도 은행의 부도를 걱정했었는데 천만 페나라니?

일개 개인이 가지기에는 말도 안 되게 큰돈이다.

“거두어주시옵소서.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다. 이건 원래부터 그대 소유의 돈이다.”

“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이건 그대가 카탈락 백작, 아니, 요하네프 3세에게 이겨 얻은 돈이다. 그러니 그대의 것이 맞지.”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당시 그녀는 도박 조건으로 요하네프 3세에게 동제국에 가져온 재산 전부를 걸라고 했었다. 그게 천만 페나인 것이다. 요한에게 이겨 얻은 것이니, 그녀의 소유가 맞긴 맞았다.

“그, 그래도 이건…….”

“됐다. 엄밀히 말하면 저 네 가문의 재산도 다 그대의 것이다. 그거라도 챙기도록.”

하지만 마리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너무나 큰 금액이었다. 하지만 황태자가 말했다.

“사양하지 말고 받도록. 왠지 그대라면 이 금액을 가치 있게 사용할 것 같아서 내리는 거다.”

“가치 있게…….”

“그래, 그냥 그런 생각이 드는군.”

황태자가 반복해서 강하게 권해 마리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녀는 생각했다.

‘가지고 있다가 혹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사용하자.’

물론 그녀라고 물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천만 페나는 개인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큰 거액이다. 10만 페나 정도만 있어도 평생을 부자처럼 살고도 몇 대가 평생 놀고먹을 수 있다. 마리는 언젠가 꼭 필요한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마리는 제국에서 손꼽는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받을 상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마리는 자신이 받을 추가적인 상에 대해 듣고 놀라 물었다.

“……승작과 봉토 말입니까?”

“그래, 이제 승작을 할 때가 되었지.”

“예, 예작위를 받은 지 아직 1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기간이 중요한 게 아니다. 쌓은 공이 중요하지. 지금껏 그대가 쌓은 공을 보면 충분히 남작위를 받을 만해.”

황태자의 말은 옳았다. 성배 도난 사건, 마약 밀수 사건, 위조 화폐 사건에 이번 일까지. 하나하나가 제국을 뒤흔들 뻔한 일이었는데, 마리 덕분에 해결할 수 있었다.

“다만 이번 건은 행위 자체가 떳떳한 일은 아닌지라, 당장 승작을 하기는 그렇군. 남작으로의 승작과 봉토 수여는 추후 기회를 봐서 진행하겠다.”

“화, 황공하옵니다.”

마리는 고개를 숙였다. 남작이라니. 명예 작위인 예작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작위였다. 일단 단승이 아닌 계승 작위이며 가문과 봉토의 주인(Lord)인 것이다.

그때였다. 황태자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상은 여기까지.”

“……!”

마리는 표정을 굳혔다. 이젠 걱정하던 벌을 받을 차례였다.

“말씀하시옵소서.”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생각했다. 과연 무슨 벌을 내릴까? 지난번처럼 근신?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화가 많이 나셨으니 더 중한 벌을 내리실까? 생각해 보았으나 잘 짐작되지 않았다.

황태자가 나직이 말했다.

“마리, 가까이 오도록.”

갑작스러운 말에 마리는 긴장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둘 사이의 간격이 가까워지며 가면을 쓰지 않은 그의 얼굴이 그녀의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아름다워.’

마리는 긴장된 상황도 잊고 그의 얼굴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마치 신이 직접 붓을 들고 그린 듯한 미였다. 살짝 찡그린 눈매도 그의 완벽함을 훼손하지는 못 했다. 아니,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듯했다.

마리는 그의 얼굴을 홀린 듯 보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런 생각을 할 상황이 아니잖아.’

그녀는 괜히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라엘이 말했다.

“더. 더 가까이 오도록.”

그 말에 마리는 당황했다.

“더 말입니까?”

지금도 충분히 가까운데? 작게 중얼거려도 들릴 거리였다. 하지만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 가까이.”

마리는 머뭇거렸으나 그가 계속 자신을 바라보자 어쩔 수 없이 주춤주춤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와는 다른 느낌의 긴장감이 그녀의 등줄기로 흘렀다. 살짝만 손을 뻗어도 닿을 거리에 마리가 멈춰 섰을 때, 이번엔 그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와 그의 사이에 거리가 사라지며 그의 몸이 창가에서 내려오는 햇빛을 가려 버렸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

“전…… 하?”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맹수 앞에 선 토끼가 된 듯한 긴장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라엘이 손을 들더니 마리의 뺨을 어루만졌다. 갑작스러운 터치에 마리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피하려고 하자, 라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만히. 그대로 있도록.”

“저, 전하?”

마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무거운 목소리와 다르게 라엘의 손길은 굉장히 부드러웠다.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에 닿듯 조심스러운 손길. 그런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뺨에 닿으며 미끄러질 때마다 마리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너무나 부드러워 달콤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손길이었다. 그저 뺨을 어루만질 뿐이건만 간질간질하며 동시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자극적이었다.

“전하, 그만…….”

마리가 울상을 지었지만, 라엘은 오히려 손가락을 움직여 목을 어루만졌다. 그 부드러우면서도 열기를 담은 손가락이 목덜미를 쓰다듬자 마리는 숨을 들이켰다.

“저, 전하…….”

마리는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손끝도 떨렸다.

그때, 라엘이 입을 열었다. 부드러운 손길과 다르게 타오르듯 뜨거운 눈길로 마리를 바라보며.

“내가 지금 왜 화가 났는지는 아는가?”

“…….”

“네 모든 것은 내 것이다. 손끝 하나도 함부로 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거늘, 그런 위험한 일을 해? 내가 얼마나 걱정할지, 속이 탈지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이냐?”

“…….”

마리는 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숙였다. 결과가 나쁘지 않았어도 이번 일은 그녀가 백번 잘못한 것이 맞았다.

그때, 황태자가 고개를 숙인 그녀의 턱 끝을 잡더니 위로 올렸다. 그러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를 올려다보게 된 마리의 눈동자가 커졌다.

“저, 전하?”

라엘이 다른 한 손으로 그녀를 자신 쪽으로 끌어안으며 말했다.

“눈을 감아라.”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긴장감에 몸이 저절로 굳었다.

“어서.”

안 된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으나, 그의 재촉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겹쳐졌다.

“……!”

마리는 심장이 멎을 듯 놀랐다. 난생처음 해보는 입맞춤이었다. 놀람도 잠시. 그가 자신의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건드렸다. 마치 노크를 하듯. 그 달콤한 베이비 키스에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자 곧바로 그의 혀가 그녀의 안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

그리고 격렬한 키스가 이어졌다. 그의 혀가 마치 탐닉하듯 그녀의 안을 헤집었다. 처음 경험하는 키스에 그녀의 혀가 도망가려 했지만 놔주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는 듯 거침없이 그녀를 정복해 나갔다. 그런 그의 키스에 마리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하얗게 변하며 전신이 마비되는 듯한 느낌이 들며 힘이 풀렸다.

“저, 전하…… 제발 그만…….”

그녀가 애원하듯 그의 옷을 움켜잡았으나, 그는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를 단단한 팔로 강하게 끌어안으며 키스를 이어 갔다. 그의 혀가 자신의 안을 스칠 때마다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너무나도 강렬한 느낌이었다.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그러면서도 구름에 뜬 듯한 몽롱한 감각에 마리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저, 전하…….”

그렇게 입맞춤이 끝났다. 그녀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는지 라엘이 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하아.”

젖은 눈동자로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그녀를 보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참는 듯한 한숨이었다. 짧지 않은 키스였지만 그에게는 한없이 모자라기만 했다. 그녀가 정말로 울어버릴 것 같아 멈추긴 했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다. 사실 단순한 입맞춤이 아닌, 그녀를 탐닉하고 싶었다. 놔주지 않고 영원히. 그렇게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한편 마리는 키스를 끝냈음에도 여전히 불타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보며 가슴이 떨렸다. 마치 먹이를 지금 먹을까, 아니면 조금만 참았다가 먹을까 고민하는 맹수의 눈빛 같았다.

“전하……?”

마리는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그 떨리는 음성에 라엘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 너를 향한 내 마음은 잘 알고 있겠지?”

당연히 모를 리가 없었다.

“난 당장 지금에라도 너를 가지고 싶다. 그렇게 널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놔주고 싶지 않아. 다만 네가 조금 더 마음을 열길 기다려 주고 있을 뿐이야.”

그는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점점 인내심이 바닥이 남을 느낀다. 널 향하는 마음이 점점 더 커지기 때문이겠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전하.”

“그런 상황에서 만약 이번처럼 네가 위험한 일을 저지른다면, 그때는 고작 입맞춤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라엘은 고개를 숙여 그런 그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러니 내 말 명심하도록. 알겠나?”

나직이 경고한 그의 입술이 다시 그녀의 입술에 겹쳐졌다.

* * *

황태자와 처음으로 입맞춤한 마리는 며칠간 멍하니 지냈다.

‘내가 키스를 하다니. 그것도 전하와.’

워낙 순진하게 지내서일까, 자신이 이런 입맞춤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당시의 감각이 떠올랐다. 아득하면서도 아찔한 느낌.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저 자신의 안을 침범하던 그의 느낌만 자꾸 떠올랐다.

‘그, 그만. 이제 그만 생각해.’

업무를 보다가 또 떠오른 입맞춤에 마리는 얼굴을 붉혔다. 도대체 오늘 몇 번째 떠올리는 건지 모르겠다.

그때, 그녀와 함께 서류를 보던 황태자가 물었다.

“얼굴이 붉군. 혹시 몸이 안 좋은가?”

그 물음에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울컥했다.

‘다, 당신 때문이잖아요!’

정말로 몰라서 저렇게 물어보는 걸까? 혹시 놀리려는 것은 아니겠지? 어쨌든 확실한 것은 그는 그날의 입맞춤 이후에도 일말의 동요도 없다는 것이다. 자신과 다르게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그를 보며 마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왠지 얄미웠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건가? 물론 신경 써 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도 신경 안 쓰는 것 같으니 그것도 좀, 아니, 이러면 신경 써 주길 바라는 것인가?

‘신경 써 주길 바라는 게 아니라, 너무 안 쓰니 그냥 그런…… 아, 몰라.’

또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입맞춤 이후 이런 생각이 부쩍 는 느낌이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집중. 집중하자.’

한편 마리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황태자는 그날의 입맞춤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아니란 것을. 오히려 너무 신경 쓰여 억지로 티를 내지 않고 있을 뿐이다.

‘미치겠군.’

황태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업무를 보는데 서류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계속 그녀만 신경 쓰였다. 저 붉은 입술에 다시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치밀어 올라 곤욕스러울 정도였다.

‘괴롭군.’

황태자는 마리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은 행복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두 남녀는 서로를 앞에 두고, 같으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였다.

* * *

한편, 사자궁과 떨어진 행정부에서 깊은 고뇌에 잠겨 있는 인물이 있었다. 오른이었다. 그는 자신의 집무실에 잔뜩 쌓인 서류를 바라보았다. 모두 마리와 모리나 왕녀를 조사한 서류였다. 하지만 산더미 같은 서류의 양과 다르게 내용은 별것이 없었다.

[특이 사항 없음.]

[추가로 밝혀낸 사항 없음.]

이게 조사 결과의 전부였다.

‘두 명 다 똑같아.’

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리 조사해도 두 명 다 나오는 게 없었다.

‘일부러 조작이라도 한 것 같지 않은가?’

오른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그 둘이 공교롭게 클로얀 왕궁 비슷한 곳에서 거주했고, 둘 모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단순한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오른은 딱딱해진 눈으로 두 장의 서류를 살폈다. 각각의 종이에는 모리나와 마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리의 식견은 어떤 면에서는 재상인 나보다 뛰어날 때가 많아. 정말 일개 시녀가 그럴 수 있을까? 정말로?’

음악, 요리 등. 다방면으로 재능이 많은 것은 그럴 수 있다. 재능은 신분을 가려 내려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식견은 다르다. 그건 타고나는 것이 아닌, 길러지는 것이다. 평범한 시녀가 저런 식견을 기르는 것이 가능할까?

‘……얼굴 없는 성녀라는 모리나 왕녀라면 몰라도.’

오른은 모리나 왕녀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린 나이에 유폐되어 있던 와중에도 남몰래 선행을 베풀었다는 모리나 왕녀. 그녀라면 이런 식견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확실하지는 않아. 가능성에 불과할 뿐이야.’

일단 증거가 없었다. 그리고 둘이 동일 인물이라기에는 걸리는 점이 있었다. 마리가 모리나 왕녀라면 왜 황태자의 곁에 머무른단 말인가?

‘그녀가 모리나 왕녀라면 진즉 도망갔겠지. 정체가 밝혀지면 죽는 걸 뻔히 아는데.’

클로얀 지방의 상황은 지금도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다. 황태자는 거듭해서 선정을 베풀려 노력했지만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오며 민생이 악화하였고, 최근에는 모리나 왕녀를 찾는 왕실 기사단 출신의 반동분자들도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태자의 곁에 머물며 제국에 공을 세울 이유가 없어.’

하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있음에도 그는 자꾸만 둘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떠올랐다.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면, 지금껏 풀리지 않던 많은 의문이 해결되기 때문이다.

‘전하는 무슨 생각이신 걸까?’

누구보다도 명민한 황태자이다. 그런 그가 자신이 했던 의심을 안 해봤을 리가 없다.

‘마리가 모리나 왕녀일 가능성은 생각하고 있을 거야. 증거가 없으니 확신은 못 하더라도 말이야.’

오른은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왜 아무런 말이 없는 걸까?’

그날 이후 오른은 넌지시 황태자를 떠보았다. 하지만 라엘은 두루뭉술 넘어갈 뿐이었다.

‘왜지? 무슨 생각이신 거지?’

* * *

“날씨가 정말 따뜻해졌네.”

마리는 황태자의 명령으로 내무대신에게 서류를 건네주고 난 후, 시간이 남아 정원을 산책하다 화창한 햇살을 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봄이 깊어졌다.

‘벌써 능력을 얻는 꿈을 꾼 지도 1년이 되어 가네.’

1년 사이, 정말 다양한 일이 있었다. 많은 사건, 사고를 겪으며 수많은 사람과 만났고, 황태자와도 만났다. 소중한 친구인 키에르한도 만났고, 악연이지만 요하네프 3세와도 만났고.

‘난 지난 1년간 잘 산 걸까?’

그녀는 아마 처음 능력을 얻게 된 계기, 죄수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너는 능력을 얻는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느냐?”

그때 자신은 이렇게 답했었다.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삶을 살고 싶어요. 그게 제 소원이에요.”

당시 바랐던 대로 그녀는 능력을 얻었다. 그런데 지난 1년간, 과연 당시의 소원대로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저 정신없이 삶에 휘말리기만 한 것 같다.

‘앞으로는 바라던 대로 살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솔직히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자신의 운명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까.

‘전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마리는 문득 라엘이 떠올랐다. 그를 향한 마음은 점점 복잡해져만 갔다.

‘사실 떠나는 것이 맞지.’

클로얀 지방을 안정시키려는 황태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가뭄에 이은 홍수까지 겹쳤고, 덕분에 민심이 악화하며 모리나 왕녀를 찾는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황궁에 머무는 것은 그녀 입장에서는 사자 굴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 떠나고 싶지 않아.’

마리는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고 다시 한번 속으로 중얼거렸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닌데. 그저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텐데.’

곁에 있으며 그의 일을 도와주고, 그와 대화하며, 간혹 그와 즐거울 수 있는 것. 그게 그녀가 가진 작은 바람이었다.

‘방법이 없을까? 전하의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게 잘 해결될 방법이?’

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심란한 심정과 다르게 정원은 꽃이 예쁘게 만발해 있었다.

“하아.”

그 순간이었다. 생각지도 못 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왜 한숨이십니까, 마리 양?”

마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조각 같은 은발의 미남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엘 님!”

황실친위대 단장 키에르한 후작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봤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미소였다.

“반갑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마리는 반가운 마음에 고민을 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잘 지냈어요. 후작님께서도 잘 지내셨나요?”

키에르한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웃는 얼굴에 그늘이 짙게 느껴져 마리는 의아해졌다.

‘왜 표정이?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

그러고 보니 마리는 그가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전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하네프 3세와의 일 때문에 그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리 정신이 없었어도 소중한 친구에게 소홀했던 것 같아 마리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이곳 정원에는 어떤 일로 오셨나요?”

이곳은 재상 오른의 행정부 근처의 정원이다. 키에르한이 머무는 황제 토른 2세의 자운궁과는 거리가 멀었다. 키에르한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리 양. 당신을 보려고요.”

“네?”

“당신을 보러 온 것입니다. 하도 오랫동안 못 뵈어서 뵙고 싶어서요.”

“아…….”

마리는 그 말에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그간 제가 바빠서…….”

아무리 바빴어도 신경을 썼어야 하는데. 마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늘 키에르한에게는 받기만 하는 입장이라, 자신이 그라면 서운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키에르한은 개의치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오늘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어서 매우 기쁩니다.”

그는 정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잠시 걸으며 이야기나 하지 않겠습니까? 오랜만에 뵈었는데, 바로 헤어지긴 싫군요.”

“네, 그렇게 해요.”

그와의 만남이 반가운 것은 마찬가지인지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시간도 넉넉하게 있었다.

“정원에 꽃이 참 예쁘게 폈군요. 혹시 좋아하는 꽃이라도 있습니까?”

가벼운 주제부터 시작해 그와 그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별다른 주제가 아니라도 그와의 대화는 참 편안하고 즐거웠다. 마음이 통하는 이와 같이 있는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봤지만 마치 어제 만났던 것 같다. 다만 그녀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건 그의 얼굴에 보이는 어둠이었다. 그녀는 지난번 만남이 떠올랐다.

“저와…… 저와 함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 주실 수는 없습니까?”

당시 그는 그녀에게 자신과 함께 떠나지 않겠느냐고 물었었다. 그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는 그녀는 그 제안을 거절했었다.

‘그런데 그때 키엘 님은 왜 나에게 떠나자고 했던 것일까?’

당시에는 자신을 향한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저 어두운 모습을 보니 다른 의문이 들었다. 혹시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키엘 님,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신가요?”

키에르한은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말씀해 주세요. 전 키엘 님을 소중한 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도움을 드리고 싶어요.”

비록 그의 마음을 받아줄 순 없지만, 그래도 그가 자신의 소중한 이임은 변하지 않는다.

그녀의 말에 그는 옅게 웃었다. 그녀를 향한 고마움과 씁쓸함. 그리고 괴로움이 복잡하게 섞인 미소였다.

“알겠습니다.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만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마리 양과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산책인데, 이 느낌을 더 간직하고 싶군요.”

마리는 그의 말에 표정을 굳혔다.

‘마지막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마리는 그에게 생긴 일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이쪽으로 걸을까요? 이 방향 길이 더 예쁘고 볼만합니다.”

키에르한은 여전히 부드럽고 친절한 태도로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산책을 이어갔다. 하지만 마리는 그 모습이 어딘지 안 좋은 마음을 억지로 숨기려는 것 같아 불길했다. 이윽고 키에르한은 산책로 끝 부분에서 멈추어 섰다. 아기자기한 연못이 있는 곳으로, 인적 드문 곳이었다.

“키엘 님…….”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말씀해 주세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키에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는 잠시 입을 열지 않고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무나 소중한 것을 바라보는 듯한 눈길이 왜인지 아련하게 느껴져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지도 못 한 충격적인 것이었다.

“지금…… 그 말씀이 사실인가요?”

“네, 사실입니다.”

키에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 황제이신 토른 2세 폐하께서 위독하십니다.”

“……!”

키에르한이 무겁게 말을 이었다.

“어의의 말로는 1~2주 정도가 될 것이라 하더군요. 정말 짧으면 1주 안에도 붕어하실지 모릅니다.”

마리의 얼굴이 하얘졌다. 왜 키에르한이 저런 표정이었는지 깨달은 것이다.

‘맙소사! 토른 2세가 곧 사망한다고? 그러면 앞으로는?’

황제가 사망하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수년째 의식을 못 차리고 있던 그가 언제고 병사할 것이란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문제는 그로 인해 파생될 결과다. 정확히 말하면 오로지 황제에게만 충성을 바치며 황태자를 반대해 온 키에르한과 세이튼 가문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가 문제였다.

‘황태자 전하가 황위에 오르면…… 자신을 반대하는 키엘 님의 세이튼 가문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어. 피의 바람이 몰아닥칠 거야.’

황위 계승에 이어질 피의 숙청. 그 대상은 분명 키에르한의 세이튼 가문이 될 것이다.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황태자 라엘과 키에르한이 대립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현 황제인 토른 2세가 서자인 라엘을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 토른 2세는 황후의 소생만을 후계로 인정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천명했었지. 따라서 원칙적으로 서자인 라엘 전하는 황위 계승권이 전혀 없었어.’

하지만 중간에 토른 2세가 불의의 사고로 의식불명이 되며 이야기가 달라졌다. 황자들 간의 내전이 일어났고, 라엘과 오스카를 제외한 모든 황자가 사망했다. 의식을 회복할 가능성이 없는 토른 2세의 뜻은 무시되었고, 라엘은 스스로의 힘으로 황태자 지위에 올라섰다.

‘다른 귀족들은 모두 시류에 순응해 라엘 전하에게 무릎을 꿇었지만, 전통적으로 황실의 수호 가문이었던 키엘 님의 세이튼 가문은 라엘 전하를 인정하지 않고 있어. 현 황제가 남긴 의지에 따르면 적법한 황위 계승자는 라엘 전하가 아닌 황후 소생의 오스카 전하이니까.’

이것이 바로 황태자 라엘과 키에르한의 갈등의 원인이었다. 키에르한의 세이튼 가문은 현 황제의 의지에 따라 라엘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라엘로서는 자신을 반대하는 키에르한의 세이튼 가문을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다. 라엘은 세이튼 가문을 반역죄로 토벌할 것이다. 그러면 키에르한도 당연히 죽임당할 것이다.

‘그건 안 돼! 절대로!’

그가 왜 이렇게 최근 어두운 표정이었는지 깨달은 마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키에르한이 죽는다니? 그것도 라엘의 손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을 소중히 대해 준, 저 따뜻하고 친절한 남자가 목숨을 잃는다고? 마리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런 일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마리는 어떻게든 비극을 막고 싶어 다급히 말했다.

“키엘 님의 세이튼 가문과 황실이 충돌하면 셀 수도 없는 피가 흐를 거예요. 그건 오히려 제국을 수호해 온 가문의 기치에 어긋나는 일 아닐까요?”

마리는 그에게 뜻을 돌이키라 설득해 봤자 듣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일부러 이런 식으로 설득했다. 키에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 양의 말씀이 맞습니다. 변경백인 우리 세이튼 가문과 황실이 충돌하면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은 피가 흐르겠지요.”

“네, 그러니…….”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어떤?”

마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하지만 키에르한은 잔잔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키엘 님?”

마리는 덜컥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미소에 담긴 뜻을 번뜩 깨달았다.

‘설마?’

마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스스로를 희생하려는 것인가요?”

“…….”

“대답해 주세요! 지금 키엘 님은 가문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하는 것 아닌가요?”

그녀가 절박하게 목소리를 높이며 거듭 묻자, 키에르한은 씁쓸히 웃었다.

“이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

“황태자 전하가 우리 세이튼을 징벌하기 위해 칼을 꺼내 드실 때, 가문의 대표인 제가 스스로 목을 바친다면 전하도 그 이상으로 세이튼 가문의 피를 흘리려 하지는 않을 겁니다.”

마리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키에르한은 더 큰 피가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세이튼 가문의 기치와 명예를 지키면서도 큰 피가 흐르는 것을 막을 방법은 그게 유일하긴 했다. 가주인 그가 모든 것을 짊어지고 희생하는 것.

“말도 안 돼요.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마리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남들은 명예로운 죽음이라 할지 모르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절대 그가 죽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키에르한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저 하나의 목숨으로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 피가 흐르는 것도 막을 수 있다면 충분히 이득인 일이지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란 말인가! 마리는 담담한 그의 목소리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마리가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마리 양.”

키에르한이 애잔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저에게 안타까운 것은 단 하나. 바로 당신을 더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조금 더 함께하고 싶은데. 아니, 솔직한 마음으로는 영원히 모든 것을 당신과 함께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나 속상합니다.”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키에르한은 머뭇거리더니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잠시만. 정말 죄송하지만…… 잠시만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조심스럽게 마리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너무나 소중해 감히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운 것을 어루만지는 듯한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당신은 모를 것입니다. 제가 얼마나 당신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키엘 님…….”

“만약 당신을 만난 처음부터 이런 결말이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면, 저는 이렇게 당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참을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제 모든 것을 바쳐 당신과 함께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입니다.”

마리는 그 말에 지금껏 키에르한이 보인 태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갈망하면서도 황태자와 다르게 거리를 두어 왔다. 바로 이런 자신의 운명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지금껏 함께한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순간이 저에게는 모두 너무나 소중합니다. 늘 무채색이던 제 삶이 당신으로 인해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했다.

“지금껏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안 죽으면 되잖아요!”

“마리 양.”

“왜 그런 선택을 하려는 거예요?”

그녀는 가슴이 울컥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었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키에르한은 가만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제가 세이튼가의 가주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 * *

그렇게 키에르한과의 대화가 끝났다. 마리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기를 간구했으나, 그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안 돼. 절대 이대로 지켜볼 수는 없어.”

마리는 자신의 숙소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려는 그의 마음은 이해한다. 황실을 수호하며 황제의 뜻을 대행하는 것은 세이튼 가문의 존재 의의였으니까. 이제 와서 토른 2세의 뜻을 어기고 황태자 라엘에게 무릎을 꿇으면 세이튼 가문의 고고한 명예는 땅에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키엘 님이 이대로 목숨을 잃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어. 아무리 가문의 명예가 중요해도 키엘 님의 목숨보다 중요하진 않아.’

마리는 굳게 생각했다. 왕녀로 클로얀 왕성에 끌려가기 전 유년기를 평민으로 보내서일까? 솔직히 그녀는 잘 모르겠다. 가문의 명예가 목숨보다 중요한 것인지는. 그들의 숭고한 뜻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키에르한이 이런 일로 목숨을 잃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소중한 이였으니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데, 그가 정말로 죽는다고? 안 돼. 무조건 막아야 해.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할 거야.’

키에르한을 설득하는 것은 무리로 보였다. 부드러운 외모와 다르게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그는 결단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다른 방향으로 방법을 찾아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마리는 생각에 잠겼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다. 아니, 없어도 만들어 내야 했다. 키에르한과 황태자, 그녀 모두를 위해서.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던 중이었다. 마리의 머릿속에 한 가지 방법이 번뜩 떠올랐다!

‘전하도 실제로는 자신의 친우였던 키엘 님을 죽이고 싶어 하진 않을 거야. 정치적 상황상 어쩔 수 없는 것일 뿐이지. 그러니 황태자에게 키엘 님을 ‘면죄’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드리면 되지 않을까?’

마리는 생각을 이어갔다.

‘내가 큰 공을 세워 키엘 님을 살려 달라 요청드리는 거야!’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렇게만 되면 키에르한과 황태자, 그리고 그녀 모두에게 행복한 결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마리는 곧 자신이 떠올린 생각의 문제점을 깨닫고 시무룩해졌다.

‘그런 공을 당장 세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보통 큰 공을 세워서 될 일이 아니었다. 토른 2세의 붕어까지 남은 시간은 길어야 2주 남짓. 아니, 당장 며칠도 못 넘길 가능성이 높은데 그 안에 무슨 공을 세운단 말인가?

“하아. 그래도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생각해 보자.”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숙소로 들어섰다. 아마 오늘 밤은 고민으로 한잠도 못 잘 듯싶었다. 그런데 자신의 방에 도착한 그녀는 흠칫 놀랐다.

“이게 무슨 편지지?”

침대 한가운데 고풍스럽게 꾸며진 편지가 올려져 있었던 것이다.

‘뭐지? 왜 편지가 숙소 침대 위에? 누가 편지를 놓고 갔지?’

마리는 고개를 갸웃하고 편지를 들었다. 그리고 편지지 겉에 쓰인 문장을 본 그녀의 안색이 굳어졌다.

나의 마음속 피앙세에게.

그대를 간절히 사모하는 가련한 이가 보냄.

얼핏 보면 단순한 연서 같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이런 말투를 쓰는 이를 알고 있었다.

‘설마?’

마리는 급히 편지지를 뜯었다.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보고 싶습니다. 며칠 안 뵈었다고 가슴이 타들어 갈 듯 그립군요. 이렇게 괴로울 줄 알았으면 정말 납치라도 할 걸 그랬습니다.

여기까지 읽은 그녀는 편지를 보낸 이가 누구인지 확실히 깨달았다.

‘요하네프 3세가 보낸 편지야!’

분명했다. 필체도 그렇고, 문체도 그렇고. 요한이 분명했다. 편지에는 정확한 일시와 장소까지 명시되어 그녀와 만나고 싶다고 적혀 있었다.

‘그냥 무시하자.’

마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그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내용을 본 순간, 마리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혹시나 만나러 와 주시지 않을까 봐 첨언합니다. 수도에 올 재앙이 지난번 일로 끝났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뭐라고? 수도에 재앙이 또 닥칠 예정이라고?!’

간밤에 예지몽을 꾸었는데, 곧 동제국 수도에 큰 재앙이 올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끔찍한 재앙이.

뒤이어 적힌 내용은 이러했다.

저를 만나러 와 주시면, 당신을 만난 기쁜 마음에 재앙에 대한 힌트를 드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거기서 편지의 내용은 끝났다. 마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편지를 바라보았다.

‘재앙이 올 거라고? 그것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예지몽이라고 표현했지만, 그건 다 저 요하네프 3세가 꾸민 음모가 틀림없었다.

‘이번엔 무슨 음모를 꾸몄길래?’

요한이 직접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고 표현했으니, 보통 음모가 아닐 것이다. 실제로 그녀의 걱정처럼 제국의 수도에는 큰 재앙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저 수식적 표현이 아닌, 정말로 말 그대로 ‘재앙’이었다. 그리고 그 재앙은 결론적으로 그녀와 황태자 모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번 재앙을 비롯해 연속적으로 일어난 일들로 그들의 운명은 큰 변혁을 맞게 되었다. 변곡점(變曲點)의 시작이었다.

* * *

깊은 밤, 마리는 번뜩 눈을 떴다. 약속한 시간이었다.

‘요하네프 3세를 만나러 가야 해.’

남들의 눈을 피해 가야 하기에 조심스러웠다. 마리는 늦은 밤 몰래 황궁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준비해 둔 마차를 타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요하네프 3세가 지정한 장소는 수도 인근의 인적 없는 야산이었다. 한참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한 그녀는 저 멀리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얼굴을 굳혔다. 흑발에 흑안. 지적인 인상의 아름다운 외모. 동방의 역용술을 푼 요하네프 3세였다. 곁에는 집사였던 로이스도 있었다.

“어째서 동제국을 떠나지 않은 거죠?”

마리는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 요한은 카드 게임을 패배한 대가로 동제국을 떠나기로 약속했었다. 그뿐이 아니라 황태자에게도 정체를 들켜 당장 떠나기로 했는데, 이렇게 버젓이 수도 근처에 머물고 있다니? 대담하기도 했고 대단하기도 했다.

요하네프 3세는 고개를 저었다.

“약속을 어길 생각은 없습니다. 동제국은 곧바로 떠날 겁니다. 다만 제 마음속 피앙세인 당신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뵙고 싶어 잠시 유예를 둔 것이지요.”

그는 마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입가로 끌어가 입을 맞추려 하자 마리는 화급히 손을 빼었다. 아무리 레이디를 향한 예의 표현이라도 요한의 입맞춤이라니. 절대 싫었다.

“이런, 서운하군요. 인사하는 것도 허락지 않는 것입니까? 전 당신을 그렇게나 그리워했었는데.”

“용건만 말씀하세요. 곧 재앙이 올 거라니. 무슨 뜻이죠?”

마리는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요한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말 그대로입니다. 제가 예지몽을 꾸었는데, 제국 수도에 큰 재앙이 올 예정이더군요. 아무리 동제국이 우리 서제국의 적국이라지만, 제 가슴이 다 아플 지경이었습니다.”

참 웃기지도 않은 말이었다. 자기가 꾸민 음모면서 가슴이 아프다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죠?”

“말하기 싫은데요?”

“……뭐라고요?”

요한은 빙글 웃었다.

“왕녀가 아무리 제 마음속 피앙세라 해도 제가 말씀드릴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인 법이니까요.”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인 법이지만 이런 경우에 쓸 말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그가 말하기 싫다면 말하게 할 방법도 없었다. 마리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요. 그러면 우리가 더 대화를 나눌 이유는 없겠군요. 이만 가 볼 테니 당장 동제국을 떠나세요.”

요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런, 화내지 마십시오. 제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제 말씀에 따라 주시면 재앙의 내용은 물론 해결책까지 알려드리겠습니다.”

“무엇이죠?”

요한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제게 키스해 주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

“…….”

마리는 황당함에 입을 다물었고, 옆에서 아무 말 없이 대화를 듣고 있던 로이스는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로이스의 표정은 ‘아무리 자신의 주군이라지만, 저건 좀……’이었다. 반응이 너무 싸하자 요한은 헛기침하였다.

“농담입니다.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마십시오.”

“전 지금 농담할 기분이 아니에요.”

“아니, 사실은 아예 농담은 아니고, 진담이기도 한데…… 키스 한 번이면…….”

말을 이어갈수록 그녀의 눈빛이 더욱더 매서워지자, 요한은 어깨를 으쓱했다.

“알겠습니다. 이제 제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은 다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왕녀, 정말로 저를 따라 서제국으로 오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

“제가 바라는 것은 누누이 이야기했듯 당신이 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저를 따라 서제국으로 오십시오. 그러면 지난번 약속드렸던 부와 영광을 드림은 물론, 이번 재앙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주겠습니다.”

마리의 얼굴이 굳었다. 재고할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거절하겠어요.”

요한은 그녀의 말을 이미 예상했는지 별 반응이 없었다. 그녀의 거절에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그렇군요. 아쉽군요.”

마리는 무슨 속셈을 꾸미고 있는 건지 그를 쏘아보았다. 요한은 빙글 웃었다.

“너무 매달리는 남자는 매력적이지 못하니, 여기까지만 하죠. 저는 이만 동제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다만 제 제안은 제가 떠나도 계속 유효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혹시나 재앙의 해결책이 필요하면 언제든 저를 찾아오시란 뜻입니다.”

“……!”

“아무리 왕녀라도 이번 재앙만큼은 해결하기 힘들 겁니다. 제가 생각해도 최악의 재앙이거든요.”

마리는 심상치 않은 그의 말에 안색을 굳혔다.

“그러니 만약 해결책이 필요하면 언제든 저를 찾으십시오. 저를 찾아오신다면 곧바로 해결책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마리는 그의 진정한 뜻을 깨달았다.

‘요하네프 3세는 해결책을 찾지 못한 내가 제 발로 자신에게 걸어오기를 바라는 거야!’

도대체 무슨 음모를 꾸몄길래?

그런데 그때였다. 요하네프 3세가 마리의 손을 낚아채더니 그녀가 반응하기 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가 입을 맞추었다.

“……!”

손등에 닿는 그의 느낌에 마리가 화들짝 놀라는 순간 요한이 입을 열었다.

“만약 결정하실 거면 빨리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요. 당신의 결정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피해는 계속해서 커질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음성은 지금까지의 장난스러움은 온데간데없이 무겁기 그지없었다.

요한과의 대화가 끝난 후, 마리는 황궁으로 돌아갔다. 떠나는 그녀를 보며 로이스가 입을 열었다.

“괜히 쓸데없이 단서를 주신 것 아닙니까?”

“그런가?”

요한은 이미 사라진 그녀의 자취를 좇는 듯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물론 아무리 그녀라도 이번 일을 해결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굳이 나서서 문제가 일어날 거라 알려 줄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로이스는 지난번처럼 괜히 왕녀에게 단서를 알려 주었다가 일이 뜻대로 안 풀릴까 걱정인 듯했다.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로이스 네 말대로 저 모리나 왕녀라면 기적을 일으킬지도 모르지.”

“그런데 어째서?”

요한은 옅게 웃음을 지었다.

“내 마지막 양심이랄까?”

“……예?”

“우리 재상님의 의견에 따라 이번 일을 진행하긴 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조금 심하긴 한 것 같단 말이지.”

그 말에 로이스는 서제국의 재상 인형술사 라키를 떠올렸다. 여인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지만 지극히 잔혹한 심성을 지닌 계략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수법의 지독함은 요하네프 3세마저도 혀를 내두르게 했다. 이번에 수도에서 진행될 재앙도 바로 그 라키가 고안한 작품이다.

“뭐, 내가 말하기엔 웃긴 이야기긴 하지만 너무 인륜을 저버린 일 같아서. 모리나 왕녀가 기적을 일으켜 주거나, 그게 안 되면 너무 늦지 않게 날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군.”

로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동제국으로…….”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로이스는 눈을 크게 떴다. 요하네프 3세가 가슴을 움켜쥐더니 거칠게 기침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아아…… 괜찮아. 이 정도는.”

하지만 로이스는 염려 섞인 표정을 거둘 수 없었다. 입가를 가린 요한의 손가에서 옅은 피를 본 탓이었다. 요한은 쓴 표정을 지었다.

“어의가 6개월은 아무 일 없을 거라 했는데, 예상보다 빠르군.”

“폐하…….”

요한은 괜찮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 모르고 있었던 일도 아니고.”

그는 서북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만 계획을 서두르긴 해야겠군. 예상보다 시간이 부족할 것 같으니.”

그가 바라본 서북 방향. 그곳에는 클로얀 지방이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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