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있는 시녀님-30화 (31/54)

Chapter 3

그날 밤 마리는 꿈을 꾸었다. 선명한 자각몽. 그녀에게 능력을 주는 그 신비한 꿈이었다.

「자, 밑장 빼다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구라칠 거면 안 걸리게 잘해.」

「에헤, 말 많네. 빨리 돌리기나 하소.」

어두운 밀실이었다. 작은 등불 하나에 의존해 몇 명의 남자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카드?’

마리는 눈을 깜빡였다.

‘카드 게임의 꿈인가?’

그런데 분위기가 단순한 게임이 아닌 것 같았다. 테이블 위에 섬뜩한 단도가 놓여 있었고, 각자의 앞으로 수북한 돈뭉치가 쌓여 있었다.

‘저 정도 액수면 완전히 도박이잖아.’

사실 카드 게임과 도박을 나누는 기준은 굉장히 모호하다. 귀족들의 유희인 카드 게임을 할 때도 일정량의 금액을 거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금액이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가면, 그건 도박이 된다. 즉, 놀이를 목적으로 소량의 금액을 거는 것은 게임이지만, 정도가 심해지면 도박인 것이다.

‘혹시 요하네프 3세가 운영 중인 카지노와 연관이 있는 건가?’

마리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 주변에 도박과 연관된 일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어쨌든 마리는 꿈속의 내용에 집중했다.

「스트레이트.」

「아, 거기서 스트레이트가 나오네. 가져가슈.」

「다음 사람?」

「다운.」

도박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았아 파산한 사람도 나왔고, 가운데 앉은 사람 쪽으로 돈이 쌓여갔다. 잔뜩 돈을 딴 사람이 피식 웃더니 반대 측 사람에게 말했다.

「라스베가스(Las Vegas)의 전설이라더니, ‘미스터(Mr.) Choi’도 별것 없네? 다 허명이었나 봐?」

하지만 전설이라 불린 남자, ‘Mr. Choi’는 아무런 반응 없이 카드를 돌릴 뿐이었다. 그의 반응에 남자는 재미없다는 듯 입술을 씰룩하며 카드를 받았다. 그리고 카드를 확인한 상대는 속으로 환호를 지르며 돈을 걸었다. 굉장히 좋은 패가 들어온 듯했다.

「100만!」

그런데 그가 그렇게 호기롭게 외친 순간이었다. ‘Mr. Choi’가 가만히 상대를 바라보았다. 무감정한, 그래서 섬뜩한 느낌이 드는 그 눈빛에 상대가 움찔하는 순간, ‘Mr. Choi’가 말했다.

「100만 받고, 올인(All in).」

게임을 끝내는 선언이었다.

거기까지 꾼 마리는 번뜩 눈을 떴다.

“꿈…… 이구나.”

창밖을 보니 아직 새벽이었다.

“도박이라니. 겜블러의 능력을 얻은 걸까?”

겜블러. 전문 도박사를 뜻한다. 그녀는 확인을 위해 숙소에 보관 중인 카드를 꺼냈다. 가끔 시녀들끼리 놀이 삼아 하는 카드였다.

‘맞구나. 겜블러의 능력을 얻게 된 것이.’

카드를 게임의 형식에 맞춰 펼치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눈앞에 놓인 3장의 오픈 카드로부터 앞으로 어떤 식의 경우의 수가 펼쳐질지 떠올랐다.

‘이건 메이드 확률 14%, 이 배열은 풀 하우스 확률 9%. 이 배열에서는 그냥 죽어야…… 이건 블러핑(공갈) 찬스…….’

마치 카드 게임을 직업으로 삼은 전문가처럼 카드에 대한 모든 것이 떠올랐다.

‘카드로는 누구한테도 질 것 같지가 않아.’

마리는 차오르는 자신감에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 누구에게도 질 것 같지 않다니. 살면서 이런 대단한 자신감이 드는 것은 또 처음이다.

‘겜블러의 능력이라니. 그러면 요하네프 3세의 카지노에서 문제가 생기는 걸까?’

마리는 생각했다. 그것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한번 확인해 봐야겠어.’

마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사자궁으로 출근할 채비를 하였다. 준비를 맞춘 후 사자궁으로 가고 있는데, 그녀는 뜻밖의 사람을 보았다.

‘어, 아리엘 공녀가 왜 이 시간에 이곳에?’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 앞에 있어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굉장히 어두운 안색이었다.

‘황태자를 뵈러 온 건가? 그런데 왜 이렇게 안색이 어둡지?’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집무실에 들어갔는데, 마리는 깜짝 놀랐다.

“전하?”

“아, 마리. 왔군.”

굉장히 이른 시간이었는데 황태자가 이미 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와 있는 이들은 황태자뿐이 아니었다.

‘오른 각하와 재무부 대신, 내무부 대신도?’

사실상 행정부의 실세가 모두 모여 있는 셈이었다. 한데 분위기가 모두 어두웠다.

‘무슨 일이지? 아리엘 공녀 때문인가?’

마리는 그들 한편에서 창백한 얼굴의 아리엘 공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마치 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래, 공녀.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

황태자가 무거운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슐레안 대공이 어젯밤부터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마리는 깜짝 놀라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제국 최고의 대귀족인 슐레안 대공이 행방불명? 거짓이 아닌 듯 아리엘은 처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전하.”

“하, 이 어리석은.”

황태자는 역정을 내며 말했다.

“대공가를 파산시킨 것도 모자라 도주를 했다고?”

뭐? 파산? 제국 최고의 거부인 슐레안 대공가가? 마리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리엘 공녀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끄윽, 끅. 죄, 죄송합니다, 전하. 모두 저희의 잘못입니다.”

“하!”

황태자는 재무부 대신을 바라보았다.

“슐레안 대공가 말고 또 피해를 본 가문은 어딘가?”

“파산에 이를 정도로 큰 피해를 본 곳은 레돈 가문과 케이원 가문, 그리고 야니스 가문입니다.”

마리는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재무부 대신이 이야기한 가문은 모두 제국 경제의 한 축을 지탱하는 거부들이었다. 그런 가문들이 갑자기 도산했다고?

‘전혀 그런 징후가 없었는데? 어째서 파산한 거지?’

순간 마리의 머릿속에 얼마 전 슐레안 대공가에서 만났던 요하네프 3세의 모습이 떠올랐다.

‘설마?’

섬뜩한 불안감이 등줄기에 꽂힐 때, 황태자가 말했다.

“이게 모두 카탈락 백작의 짓이라고?”

역시나 카탈락 백작, 아니, 요하네프 3세의 소행이었던 것이다. 마리는 정신이 아찔했다.

‘이게 바로 요하네프 3세가 말한 두 번째 재앙이었구나.’

슐레안 대공가를 비롯한 경제 거부들의 몰락! 위조화폐 사건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충격을 주는 재앙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수로? 그들 가문을 한번에 파산하게 한 거지?’

아무리 요하네프 3세가 신출귀몰한 귀계를 가지고 있어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산더미 같은 부를 가진 그들 가문을 어떻게 몰락시켰단 말인가?

그때 내무부 대신이 감정이 격해져 외쳤다.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당장 카탈락 백작을 잡아와 재산을 몰수해야 합니다!”

“어떻게? 무슨 명목으로 말인가?”

황태자가 반문했다.

“카탈락 백작은 적법하게 카지노를 운영했을 뿐이야. 그런 백작에게 푼돈을 잃은 것에 분노해 비밀 도박을 하자고 부추긴 것은 슐레안 대공이고. 그리고 거기서 끝나면 됐을 텐데, 파산에 이를 정도로 자제하지 못하고 거듭 비밀 도박을 요청한 것도 슐레안 대공이야.”

황태자는 이번엔 아리엘 공녀에게 물었다.

“내가 조사한 바가 틀렸나, 공녀?”

“네. 네, 맞습니다, 전하. 저희 부녀가 악마에 씌었는지. 정말 죄송합니다.”

거기까지 들은 마리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모두 파악했다.

‘맙소사. 카탈락 백작과의 도박으로 모든 재산을 날린 거라고? 그 산더미 같은 재산을?’

마리는 머리가 하얘졌다. 요하네프 3세가 왜 카드 게임 사업을 운영한 것인지 의아했는데, 이런 꿍꿍이가 있었던 것이다.

‘카지노가 문제가 아니었어. 카지노는 미끼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카지노를 빌미로 저런 대어를 낚아 파산시키려는 거였던 거야!’

마리는 꿈에서 꾼 ‘겜블러’의 마음이 되어 생각했다.

‘요하네프 3세는 은밀히 슐레안 대공에게 접근했을 거야. 그러며 어떨 때는 잃어주고, 어떨 때는 조금 따기도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도박 중독에 빠뜨렸겠지. 마치 악마가 유혹하는 것처럼 조금씩. 그러며 점점 판을 키워 나중에는 모든 재산을 도박으로 날리게 한 게 분명해.’

순간 마리의 머릿속에 요하네프 3세의 비릿한 미소가 떠오르며 등줄기에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마리가 방금 생각한 것은 마귀(도박 사기꾼)들의 일반적인 수작이었다.

그때 오른이 물었다.

“슐레안 대공가를 비롯한 각 가문의 피해는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그 물음에 장내가 침묵에 잠겼다.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도박의 길로 유혹한 것은 카탈락 백작이지만, 실제로 비밀 도박에 빠져 돈을 잃은 것은 슐레안 대공을 비롯한 제국의 귀족들이 자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탈락 백작에게 죄를 묻기가 힘들었다.

“그냥 체포하고, 목을 벤 후 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내무부 대신이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치안을 담당하는 내무부의 대신답게 그는 다혈질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재무부 대신이 난색을 표했다.

“카탈락 백작은 독일의 귀족이지 우리 동제국의 귀족이 아닙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외교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 신성 로마 제국과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자동맹과도 완전히 척을 지게 될 텐데, 그건 우리 동제국으로서도 큰 부담입니다.”

내무부 대신이 답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고 저들 가문들이 도산하게 놔둘 수도 없지 않소? 슐레안 대공가를 비롯한 가문이 모두 파산하면 제국에 얼마나 큰 혼란이 올지 모르오?”

그의 말이 맞았다. 다른 가문이면 모르겠지만 저들 가문은 모두 상계에 큰 영향을 끼치는 가문들이어서, 저들의 파산은 단순히 각자의 피해에 머물지 않고 제국 전체에 미칠 것이다.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제국과 제국민에게로 쏟아질 게 분명했다.

“…….”

황태자는 잔뜩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고뇌에 잠겼다. 카탈락 백작의 재산을 몰수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냥 이대로 놔두면 제국에 얼마나 큰 피해가 올지 몰랐다. 곤란하기 그지없는 상황. 해결할 방법도 없었다.

“저들 가문이 카탈락 백작에게 갚아야 할 채무가 총 얼마이지?”

“1억 2천 327만 페나입니다.”

“……!”

말도 안 되는 금액에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얼마 전 위조화폐 사건 때 고작 172만 페나로 곤경에 빠졌는데, 50배가 훌쩍 넘는 금액이었다.

“아니, 네 가문의 재산이 그렇게나 많았다고? 네 가문을 모두 판다고 해도 저 금액을 충당할 수 있나?”

“아마 반도 못 갚을 것입니다.”

“이러다 상단은 물론, 네 가문의 영지까지 모조리 카탈락 백작에게 넘어가겠군. 그래도 한참 모자라겠어.”

황태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옆에서 듣는 마리도 기가 막히긴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떻게 도박을 했길래 저런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단 말인가?

얼마 전 위조화폐 사건 때 172만 페나도 부담되는 액수였건만, 그것과도 아예 비교도 되지 않는 규모였다. 네 가문의 전 재산, 상단은 물론 광산, 영지를 포함해 모든 것을 깡그리 팔아 치워도 반이나 갚을까 의문. 그야말로 나라의 기둥이 흔들릴 만한 금액이었다.

“알겠다. 일단 물러가도록. 간단히 결정한 문제가 아니군. 모두 해결책을 강구해 보도록.”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화가 들끓었지만 간신히 참는 듯했다. 모두가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히 나갔고, 집무실에는 그와 마리만이 남게 되었다.

“하아, 이 어리석은 것들 같으니. 도박에 빠져도 그렇게 빠지다니.”

황태자는 철가면을 벗으며 탄식했다. 이런 일을 염려하며 카지노 운영에 여러 제한을 두었건만, 결국 최악의 사단이 일어난 것이다.

“마리, 무슨 좋은 생각이 있느냐?”

황태자의 물음에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이번 일은 어떤 방법을 써도 해결하기 어려워. 카탈락 백작의 재산을 몰수할 수도 없고, 네 가문의 피해를 두고 볼 수도 없으니까. 외통수나 다름없는 상황이야.’

마리는 이런 일을 해낸 요하네프 3세에게 섬뜩한 두려움을 느꼈다. 도대체 그는 악마의 화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이번 일을 아무런 피해 없이 해결할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마리는 굳은 얼굴로 생각했다.

‘똑같이 도박으로 응수하는 것! 요하네프 3세에게 도전해 저들 가문이 잃은 돈을 되찾으면 돼.’

도박으로 잃은 돈을 도박으로 되찾는다. 올바른 방법은 아니지만, 이것 외에는 지금 상황을 문제없이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물론 도박으로 1억 페나를 따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꿈속에서 전설의 도박사의 능력이라면 가능했다. 다만 문제점이 있었다. 만에 하나 패할 경우, 그녀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만약 내가 패하면 요하네프 3세는 패배의 대가로 감당 못 할 요구를 할 거야.’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내가 나서야 할까?’

문득 그런 마음이 들었다. 이번 일은 오로지 슐레안 대공을 비롯한 여러 귀족이 도박에 빠진 탓이었다. 책임을 져도 그들이 져야지, 꼭 그녀가 이런 위험까지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에 황태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떻게든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고뇌하는 모습을 본 마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를 도와주고 싶어.’

그래, 그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요하네프 3세의 악의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정한 마리는 굳게 생각했다.

‘꼭 잘해 내자. 할 수 있어.’

* * *

밤이 되었다. 달이 높게 떠오르고 사위가 조용해졌을 때, 마리는 숙소에서 몸을 일으켜 조용히 황궁을 벗어났다. 마리는 정문을 이용하지 않고 하급 시녀들 사이에 알려진 조그만 개구멍을 통해 몰래 빠져나왔다.

‘정문으로 나오면 내 출궁 사실이 전하께 알려지니까.’

황태자가 알면 막을 테니 눈을 피해야 했다. 마리는 미리 준비해 둔 마차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그리고 밤길을 한참이나 달린 후에야 마차가 멈추어 섰다.

“도착했습니다.”

“네.”

마리는 굳은 표정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싸늘한 밤바람이 그녀의 머릿결을 어지럽혔고, 그녀의 눈동자에 커다란 저택이 들어왔다. 바로 카탈락 백작, 아니, 요하네프 3세의 저택이었다. 그녀는 준비해 온 가면을 얼굴에 쓰고 저택에 들어갔다. 문지기가 앞을 가로막자 초청장을 보여 주었다. 이전에 카탈락 백작이 카지노를 홍보하기 위해 수도의 귀족들에게 보냈던 초청장이었다.

“환영합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문지기는 그녀가 쓴 가면을 힐끗 보고 안내했다. 문지기를 따라가니 곧 반짝이는 샹들리에와 흥겨운 음악 소리, 수많은 사람이 뒤엉켜 있는 연회 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이 바로 카지노.’

마리는 가면 아래로 인상을 찌푸렸다. 카탈락 백작의 카지노에 입장할 때는 남녀 모두 가면을 쓰는 것이 원칙이었다. 서로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편안하게 게임하라는 이유였는데, 모두 화려한 옷을 입은 채 가면을 쓰고 있으니 퇴폐적인 분위기가 짙게 흘렀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레이디?”

카지노의 운영을 담당하고 있던 저택의 집사 로이스가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저기 저 카드 게임은 어떻습니까? 아름다운 레이디가 하시기에 가볍게 즐길 만한 것이 많습니다.”

마리는 로이스를 바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비밀 도박을 하러 왔어요.”

비밀 도박이란 말에 집사 로이스가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티를 내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

“네? 비밀 도박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곳 카지노에 카탈락 백작님이 직접 게임에 참가하는 비밀 도박이 열린다고 들었어요. 저는 그 비밀 도박을 하러 온 것이에요.”

비밀 도박. 바로 요하네프 3세가 직접 참여하는 은밀한 도박판으로, 슐레안 대공을 비롯한 네 가문은 모두 이 비밀 도박에 빠져서 파산했다. 상대가 정확히 알고 왔음을 깨달은 로이스는 곤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밀 도박은 최고의 VVIP가 아니면 참가가 불가합니다, 레이디.”

“VVIP의 조건은 무엇이죠?”

“최소 50만 페나 이상의 재산을 가지고 있거나, 카탈락 백작님이 인정할 만한 카드 게임 실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어마어마한 조건이었다. 비밀 도박에 참여하려면 50만 페나 이상의 재산을 소유해야 한다니. 수도 전체를 통틀어도 자격이 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50만 페나나 카드 게임 실력이라. 알았어요.”

“네, 그러니 저기 간단한 카드 게임을 하시는 게…….”

“지금 바로 입증해 보이죠.”

“네?”

마리는 당황한 표정의 로이스를 뒤로한 채 게임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작은 소녀가 테이블에 앉자 가면을 쓰고 게임을 즐기던 이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카드 게임을 하기에는 조금 어린 것 같은데?”

“용돈으로 온 건가? 용돈 다 잃으면 집에서 혼나지 않아?”

“뭐, 돈 다 잃으면 이야기하라고. 이 몸이 도와줄 테니. 물론 공짜는 아닌 것 알지?”

옆에 앉은 이들이 짓궂게 말하며 킥킥거렸다. 가면을 썼기 때문인지, 주고받는 말이 거침이 없었다. 마리는 별다른 반응 없이 테이블 위에 카드를 집어 들었다.

“바로 시작하시죠.”

“그래, 살살 해줄 테니 겁먹고 도망가지 말라고.”

그렇게 카드 게임이 시작되었다. 상대들은 작은 소녀인 마리를 얕잡아보며 생각했다.

‘한 번에 많이 따서 놀라 도망가게 하지 말고, 살살 따기 시작해 완전히 다 잃게 해주어야겠구나. 멋모르는 꼬마는 혼내 주어야지.’

그들은 횡재한 표정으로 게임을 했다. 하지만 즐거운 기분도 잠시.

“스트레이트. 가지고 있는 돈 주시지.”

“죄송해요. 제가 이겼네요. 플러시예요.”

“뭐? 자, 잠깐.”

“다음 판. 풀 하우스예요.”

“마, 말도 안 돼!”

몇 판 가지도 않아 그들은 가지고 있는 돈을 몽땅 잃어버렸다. 마리의 신출귀몰한 솜씨에 완전히 휘말려 버린 것이다. 상대들은 귀신에 홀린 표정으로 거덜 난 자신의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놀라 탄성을 뱉었다.

“대단한데?”

“누구지? 처음 보는 레이디인데 저런 실력을?”

“저와도 한판 해보시죠, 레이디!”

호승심을 느낀 사람들이 마리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압도적인 실력 차에 모두 가지고 온 돈을 잃어버렸다. 그런 일을 몇 번 반복하자, 그녀의 앞에 돈이 수북이 쌓이게 되었다.

“무슨 실력이 저렇게?”

“도대체 누구지, 저 레이디는?”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마리를 바라보았다. 가면 아래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포커페이스를 한 소녀는 마치 전설의 도귀(賭鬼)가 강림한 듯했다. 더는 아무도 감히 그녀에게 도전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높은 박수 소리가 연회 홀에 울렸다.

“하하! 이거 대단한 손님이 오셨군요.”

연회 홀에 연결된 계단으로 사람 좋은 인상의 미남이 손뼉을 치며 내려오고 있었다. 저택의 주인인 카탈락 백작, 아니, 요하네프 3세였다.

“귀한 손님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군요. 미리 연락이라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러면 입구까지 가서 직접 에스코트해 드렸을 텐데.”

요하네프 3세는 기사가 레이디에게 하듯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군요. 카드에도 정통하다니. 도대체 당신의 능력의 끝은 어디까지인지 모르겠군요.”

그 말을 들은 마리는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그가 자신의 정체를 단박에 눈치챘음을 깨달았다. 인적이 없는 곳에 그녀를 이끈 요한은 남들이 듣지 못하게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래, 저를 보러 오셨다고요, 왕녀? 무슨 이야기를 하러 오신 겁니까?”

“폐하와 이야기를 나누러 온 것은 아니에요.”

마리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께 도전하러 왔어요.”

“……!”

“설마 제 도전을 피하진 않으시겠죠?”

그녀의 도발적인 말에 요하네프 3세의 미소가 짙어졌다.

“하하! 당신은 도대체. 어찌도 날 이렇게 자극하는지. 그거 아십니까? 제가 밤마다 당신을 그리워하며 얼마나 잠 못 드는지. 당신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쓴 시가 몇 편인지 모를 지경입니다.”

“…….”

“진짜입니다. 그런 황당한 표정 짓지 마시고. 저 생각보다 소심해서 상처 입습니다. 어쨌든 비밀 도박을 원하신다고 했죠?”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은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저와 결판을 보기 위해 오신 것 같은데, 그 몇천 페나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할 것 같은데요. 제가 이래 봬도 재산이 꽤 많아서요.”

아무리 그녀가 발군의 카드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 정도의 돈으로는 승부를 걸 수가 없었다. 마리가 뭐라고 입을 열기 전, 요한이 무슨 생각이 났는지 턱을 쓰다듬었다.

“흐음. 그렇다고 겁도 없이 스스로 걸어 들어온 당신을 그냥 놔주긴 싫고. 차라리 잘된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우리 이렇게 합시다.”

“……?”

“전 1억 2천 327만 페나를 걸겠습니다. 슐레안 대공가를 비롯한 네 가문이 저에게 진 빚의 금액과 딱 맞죠. 대신 당신은!”

요한은 짙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 자신을 거십시오. 만약 지면 당신은 이제 온전히 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애초에 이곳에 오려고 다짐할 때부터 요하네프 3세가 이런 조건을 걸 거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처음에 망설였던 것이고. 미리 각오하고 있었어도 직접 귀로 들으니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마리는 이를 악물었다.

‘괜찮아. 이기면 돼. 난 지지 않아. 전하와 나를 위해 무조건 이기겠어.’

그렇게 다짐한 마리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공정하지 못한 것 같군요.”

“……공정하지 못하다?”

“제 가치가 고작 1억 2천 327만 페나밖에 되지 않나요? 지금까지 저를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건가요?”

그녀의 말에 요한은 허를 찔린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손바닥을 얼굴을 가리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맞습니다! 제가 큰 실례를 하였습니다. 당신의 가치는 고작 1억 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죠!”

마리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긴다면 1억 2천 327만 페나는 물론, 이곳에 가지고 온 모든 것을 넘기고 영원히 동제국을 떠나세요.”

“크큭, 좋습니다. 오히려 제가 이득인 거래 같군요. 고작 그런 헐값에 당신을 가질 수 있게 되다니.”

요한은 섬뜩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알고 있겠지만, 이런 베팅은 사실 진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갖게 되는 거죠.”

“…….”

“어쨌든 오늘은 기쁜 날입니다. 그토록 갈망하던 당신을 가지게 되다니!”

마리는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라는 듯, 그의 말을 잘랐다.

“바로 시작하시죠.”

“큭큭, 좋습니다.”

그는 광대처럼 과장된 동작으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따라오십시오. 운명을 건 승부를 하기엔 이런 시장통은 어울리지 않으니. 좋은 곳이 있습니다.”

그는 섬뜩하게 웃었다.

“당신의 새로운 운명이 시작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입니다.”

* * *

요한이 그녀를 이끈 곳은 VVIP 전용 게임장이었다.

‘이곳이 바로 그 소문의 비밀 도박 장소.’

마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비밀 도박은 밖의 카지노 게임장과 달랐다. 오로지 최고의 고객들을 대상으로 요한이 직접 상대했는데, 오가는 금액이 상상을 초월했다.

‘슐레안 대공을 비롯한 네 가문은 모두 이 비밀 도박에 빠져 파산했다고 했지.’

카드 한 판으로 수만, 수십만 페나를 버는 쾌락을 알게 되면 결코 도박을 끊을 수 없게 된다.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중에도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운명의 승부를 벌일 장소로 제법 그럴싸하지 않습니까?”

요한의 말에 마리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확실히 VVIP 전용답게 화려하다 못해 아름답기까지 한 공간이었다. 최고급을 넘어 예술의 수준으로 꾸며진 인테리어는 안에 머무는 사람의 격을 높여 주는 듯했다. 하지만 이 화려함이야말로 사람을 나락으로 이끄는 눈속임임을 알고 있는 마리는 현혹되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주변을 둘러보는데, 의외의 광경을 발견했다.

“우리 둘만 게임하는 것이 아닌가요?”

마리와 요한 말고도 몇몇 인물이 더 있었다. 모두 가면을 쓴 채 흥미롭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승부는 우리 둘이 할 것입니다. 저들은 참관자입니다.”

“참관자요?”

“한 판, 한 판에 수만 페나 이상이 오가는 게임이니 보는 것만으로도 짜릿한 재미가 있어서요.”

그는 그녀의 귓가에 살짝 속삭였다.

“그리고 도박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몰락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굉장히 짜릿하죠. 그래서 은근히 참관하고 싶어 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 말을 들은 마리는 혐오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타인의 불행을 보고 즐기다니. 그게 인간이 할 짓이란 말인가?

‘도대체 누가 그런 악취미를 가지고 참관하는 거지?’

마리는 참관자들을 살폈다. 하지만 모두 가면을 쓰고 있어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딱 한 명.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을 주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찬란한 금발의 남자였는데, 얼굴 전체를 가리는 무면(無面)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얼굴을 전혀 볼 수가 없었는데도 실루엣만으로도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누구지? 내가 아는 사람인가?’

그때, 요한이 참관자들에게 말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이 저와 여기 아리따운 레이디가 승부를 벌일 예정입니다.”

“승부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누군가의 물음에 요한은 짙게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모든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전 이번 승부에 제 전 재산을 걸 것입니다.”

그 말에 참관하던 모든 이가 술렁였다. 모두 카탈락 백작이 얼마나 큰 부자인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전 재산을 건다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은 여기 레이디도 마찬가지입니다. 패배 시 제 여인이 되기로 하였거든요.”

“……!”

그러며 요한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는 제게 충분히 유리한 조건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 레이디를 제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야 전 재산 정도야 얼마든지 걸 수 있죠.”

“그래도 그렇게 큰 재산을…….”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의 참관자들을 보며 요한은 싱긋 웃음을 지었다.

“제가 원래 로맨티시스트입니다.”

그 말에 참관자들은 웃음을 지으며 박수쳤다.

“그래, 알겠소! 굉장히 재미있는 게임이 되겠군. 바로 시작하시오!”

자신의 전 재산을 건 백작과 자신의 운명을 건 소녀. 재밌는 승부가 나올 것이 분명해 참관자들은 기대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참관자 중에 남몰래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이가 있었다. 바로 처음 마리가 익숙함을 느꼈던 인물이다. 믿을 수 없게도 그 인물의 정체는 황태자 라엘이었다.

‘저 소녀는 누구지?’

그는 비밀 도박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남몰래 참관자로 잠입했다. 그런데 카탈락 백작이 가면을 쓴 소녀를 데리고 오더니, 도박에서 이기면 자신의 소유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소녀는 얼굴의 대부분을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있어서 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든단 말인가? 그것도 그가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하게 여기는 소녀의 느낌이 계속해서 들었다.

‘설마……?’

그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게임이 시작되었다. 종목은 포헨. 훗날 포커라 불리는 게임으로 중국의 당나라, 혹은 인도에서 기원했다고 알려져 있다. 유럽에서는 약 11세기경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룰은 간단합니다. 각자 앞에 있는 칩을 똑같이 100만 페나라 가정하고, 먼저 다 잃는 사람이 패배하는 것입니다. 아, 로티플이 뜨면 베팅액의 10배를 가져가는 예외 룰도 두고요. 어떻습니까?”

로티플.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의 줄임말. 포헨 최강의 패로 649,740분의 1의 확률이기에 일평생 한 번도 만나 보기 어려운 패다.

“속임수는요?”

요한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답했다.

“들키면 패배, 안 들키면 승리 아니겠습니까? 속이는 것도 실력이죠.”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하네프 3세는 양손으로 카드를 스르륵 셔플링하였다.

“드디어 당신이 제 품 안에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려 손이 떨리는군요.”

“그럴 일 없어요. 어차피 이 승부를 이기는 것은 제가 될 테니까요.”

“과연 그럴까요?”

요한은 테이블에 한 손으로 촤악 카드를 펼쳤다. 그러며 웃음기가 없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질 생각은 전혀 없는데 말이지요?”

그 순간, 마리는 본능적인 직감을 느꼈다.

‘요하네프 3세의 실력은 나보다 결코 하수가 아니야!’

그건 ‘겜블러’로서의 육감이었다. 갑자기 서늘한 긴장감이 등줄기로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되면 승부는 누가 이길지 모른다.

“자, 시작하시죠.”

마리는 자신의 패를 보고 칩 하나를 내밀었다.

“1만 페나 걸겠어요.”

요한은 자신의 카드를 보고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패가 안 좋군요. 다운.”

짧은 시간 안에 수없는 공방이 이루어졌다. 겜블러의 능력을 받은 마리는 말할 것도 없고, 요한도 굉장히 신중했다. 입가에는 싱글싱글 가벼운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마치 웅크린 뱀과도 같았다.

‘어떻게 이런 실력을 가지고 있는 거지?’

마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공방이 오갈수록 쉽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자신의 능력은 전설의 겜블러의 것이었지만, 요한도 전혀 뒤지는 느낌이 아니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이런 종류의 놀이를 좋아했습니다.”

요한의 미소가 짙어졌다.

“남들을 파멸시킬 수 있는 놀이라면 가리지 않고 모두 좋아했죠.”

그들은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았다. 함정을 파고, 그 함정을 역으로 이용하며,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수 싸움이 이어졌다. 하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의 싸움이었다.

“오오! 정말 대단하군요. 카탈락 백작님과 비등한 실력이라니.”

“그러게 말입니다. 최근 본 이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이군요.”

“저러다 카탈락 백작님이 지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누군가의 물음에 다른 참관자가 피식 웃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아무리 저 소녀의 실력이 뛰어나도 카탈락 백작을 넘지는 못 하겠죠. 그 증거로 보십시오.”

“……?”

“카탈락 백작의 얼굴에는 여전히 여유가 가득하지 않습니까? 반면 저 소녀는 어딘지 쫓기고 있지요. 저것만 봐도 누구의 실력이 우세한지는 명확하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들은 참관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느끼는 바도 같았다.

“그러면 저 소녀는 이제 카탈락 백작님의 소유가 되는 건가요?”

“흐흐. 백작님은 오늘 뜨거운 밤을 보내겠군요.”

참관자들은 가련한 소녀의 운명에 시커먼 웃음을 지었다. 다른 이가 몰락하는 것을 보는 것은 그들에게 참을 수 없는 짜릿함을 주었다.

그때였다. 낮은 목소리가 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닥쳐라.”

“……뭐?”

“닥치라고. 그 더러운 입.”

“……!”

옆에서 들려온 갑작스러운 욕설에 참관자들은 버럭 화를 내려고 했다. 하지만 욕설의 주인, 무면 가면을 쓴 금발 청년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당장에라도 그들의 목을 베어버릴 것 같은 서늘한 살기가 푸른 눈동자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라엘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뭐가 어쩌고 어째? 이번 일만 끝나면 다들 정체를 알아내 가만두지 않겠다.’

그는 굳은 눈빛으로 카탈락 백작과 승부를 겨루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드는 익숙한 느낌. 라엘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리, 정말로 너인 것이냐?’

얼굴을 가리고 있기에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의심이 들었다. 저 소녀가 마리가 아닐까 하고.

‘이 승부를 지면 뭐라고? 저 빌어먹을 놈의 여인이 된다고? 누구 마음대로?’

마리일지도 모르는 소녀가 도박에 지면 카탈락 백작의 소유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터질 것 같은 분노가 차올랐다. 마리가 맞는지도 모르는데도 이렇게 터질 것 같은 기분인데, 실제로 저 소녀가 마리가 맞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더구나 게임 상황이 유리하지도 않아.’

라엘이 보기에 소녀보다는 백작이 반 끝 정도 앞서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대로 게임이 흘러가면 저 소녀의 필패였다.

‘게임에 졌는데, 정말로 저 소녀가 마리라면? 그때는?’

라엘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그가 판을 엎어버릴까 고민하고 있을 때, 게임의 승패를 가릴 거대한 승부가 벌어졌다.

“올인(All in)입니다.”

요한이 돌연 자신의 전 재산을 베팅한 것이다!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마리의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올인이라고? 지금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의 패를 바라보았다.

‘난 지금 풀 하우스야.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어떻게 올인을?’

풀 하우스! 1649,740(0.0001%) 확률의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나 14,195 (0.02%) 확률의 포카드를 제외하면 사실상 최고의 패! 그 풀 하우스를 상대로 자신의 전 재산을 베팅하다니?

‘도대체?’

마리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요하네프 3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마리는 갑자기 그의 모습이 크게 느껴졌다. 마치 고양이 앞에 선 쥐가 된 섬뜩함이 엄습했다. 이번 판만 이기면 이 도박은 그녀의 승리였다. 하지만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정신 차려, 마리. 네 패는 풀 하우스야. 일반적으로 나올 수 있는 패 중 가장 강한 패라고. 풀 하우스를 들고 지는 경우는 거의 존재하지 않아.’

그녀는 요하네프 3세가 공개한 카드를 확인했다.

4  5  6  6.

4장의 카드. 4부터 6까지 이어져 있고, 이건 연속된 숫자로 만들어지는 스트레이트를 뜻한다.

‘스트레이트를 가지고 공갈을 치는 걸까? 내가 지레 겁먹고 도망치게?’

그럴 수도 있었다. 요한은 심리전의 귀재이니까. 하지만 아니라면? 그가 들고 있는 패가 스트레이트가 아니라 더 강력한 패라면?

‘저 배열에서 나올 수 있는 더 강력한 패는?’

마리의 눈에 6, 6이라는 같은 숫자의 카드가 들어왔다. 저 6, 6의 숫자 조합에서 나올 수 있는 최강의 조합은 과연?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풀 하우스야. 요하네프 3세도 풀 하우스를 들고 있는 것이 분명해!’

풀 하우스 대 풀 하우스! 최강의 패가 격돌하게 된 것이다! 밤새 게임을 하면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대격돌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풀 하우스면 됐어. 내 승리야.’

같은 풀 하우스라도 서로 간의 우위가 있다. 그녀가 들고 있는 것은 A(에이스) 풀 하우스. 풀 하우스 중에서 가장 강한 풀 하우스였다. 반면 요한이 들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6 풀 하우스. 둘이 충돌한다면 그녀의 필승이었다.

“올인, 받겠어요!”

마리도 자신의 돈 전부를 테이블 앞으로 밀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돈이 조금 많았기에 베팅을 끝내자 고작 9만 페나 정도 남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녀의 승리였으니까.

‘끝났어. 내 승리야.’

마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요한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카드 공개하시죠.”

“네, A(에이스) 풀 하우스예요!”

마리가 공개한 패를 보고 참관인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풀 하우스끼리의 격돌인지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설마 최강이라는 에이스 풀 하우스인지는 짐작 못 했다.

‘이러면 저 소녀의 승리인가?’

‘카탈락 백작이 패했다고?’

그들은 반신반의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저 소녀의 승리지만, 왜인지 카탈락 백작이 질 것 같지가 않았다. 한편 라엘도 그들과 같은 심정이었다. 계속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마리가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로 끝이에요. 약속하신 내용은 그대로 이행해 줄 거라고 믿어요.”

“흐음. 물론 약속은 지켜야죠.”

요한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섬뜩한 느낌을 주는 그 미소에 마리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요한이 말했다.

“그런데 약속은 제가 아니라 당신께서 지키셔야겠군요.”

“그게 무슨?”

요한의 손이 뒤집히며 카드가 공개되었다. 그리고 나타난 카드의 정체는.

‘포 카드(Four card)?!’

마리의 얼굴이 시체처럼 새파래졌다. 요한의 패는 풀 하우스가 아니라, 14,195의 확률의 포 카드였던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거기서 포 카드가?’

마리의 손끝이 떨렸다. 믿을 수 없게도 그녀의 패배였다! 요한이 테이블 위에 쌓인 칩을 모조리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걸로 승부는 얼추 끝난 것 같군요. 이제부터는 해보나 마나일 것 같은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자비로운지라 기권도 받아주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자극하는 유들유들한 목소리. 하지만 방금 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마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 거기서 풀 하우스가 아니라 포 카드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물론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적은 확률이라도 0%가 아닌 한 일어날 수는 있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하필 그때, 그 낮은 확률을 뚫고? 기다렸다는 듯이?’

마리의 얼굴이 얼음처럼 굳었다. 겜블러로서의 능력이 한 가지 사실을 직감했다.

‘이건…… 속임수야! 속임수를 쓴 게 분명해!’

마리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방법을 쓰신 거죠?”

“네, 무슨 말씀이신지?”

요하네프 3세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전 그저 게임을 했을 뿐인데요? 절 어여삐 여기시는 누군가가 축복을 내려 주었나 보죠.”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속임수를 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추궁한다고 해도 말할 리가 없었다.

‘아직 안 끝났어. 절대 지지 않을 거야.’

마리는 굳게 마음을 먹었다. 그녀의 다짐을 눈치챈 듯 요하네프 3세가 조롱하듯 말했다.

“호오, 계속하시겠습니까? 저야 즐거운 시간이 늘어나 좋지만, 어차피 승산이 있을지…….”

“그건 해봐야 아는 거겠죠. 카드 돌려주세요.”

완전히 동요를 가라앉힌 그녀의 목소리에 요한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알겠습니다. 다시 시작하죠.”

한편 그 모습을 보며, 황태자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리!’

이젠 확실히 깨달았다. 저 소녀는 마리가 분명했다.

‘당장 나서야.’

황태자는 도박을 당장 중지시키려고 하였다. 이런 도박 따위로 그녀를 걸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데 라엘이 정체를 드러내며 나서려는 때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강하게 타오르는 마리의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리?’

그는 지금껏 마리의 저런 눈빛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어려운 문제를 마주했을 때마다 보여 주던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저런 눈빛을 하였을 때마다 항상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

황태자는 잠시 고민하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도박을 멈춰야 했다. 이대로 진행하면 마리의 필패였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를 저놈에게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빌미를 주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게 싫었다. 하지만 그녀를 아끼는 만큼 그녀를 믿고 있었기에 주저되었다. 저렇게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데 막는 것이 맞는 걸까? 결국, 라엘은 조금만 더 지켜보자 생각했다.

‘그래도 안전장치는 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한 황태자는 자신의 뒤에서 말없이 참관하고 있던 알몬드를 불러 은밀히 명을 내렸다. 알몬드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수행하겠습니다.”

알몬드가 떠난 후, 황태자는 팔짱을 꼈다. 마리를 믿는 마음에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지만, 이런 위험한 도박에 스스로 나섰다는 점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가슴이 들끓을 정도로 화가 났다.

‘마리. 이기든 지든 큰 벌을 받을 각오를 해라.’

그러는 사이 승부는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가지고 있는 돈이 20배나 넘게 차이가 났지만, 그녀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정확한 계산과 판단으로 조금씩 승리를 쌓아 갔고, 10여 번의 게임이 끝났을 때에는 9만 페나가 20만 페나로 불어나 있었다.

“호오, 정말 대단하군요. 그런 상황에서 20만 페나까지 불리다니.”

“…….”

“물론 그래도 안 되는 것 아시죠?”

선전하고 있지만, 아직도 칩의 차이가 180만 페나나 났다. 마리는 대답 없이 카드를 섞었다. 이번엔 그녀가 카드를 나누어줄 차례였다. 마리는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고, 카드를 한 장씩 자신과 그의 앞에 번갈아 놓았다. 그리고 본인의 카드 내용을 확인한 요하네프 3세는 눈에 이채를 띠었다.

‘호오?’

그렇게 마지막 게임이 시작되었다.

‘스트레이트 플러시?’

요한은 속으로 눈을 크게 떴다.

‘이런 행운이?’

그는 자신의 카드를 바라보았다.

클로버(♣) 3  4  5  6  7.

연속된 숫자 5개, 그것도 동일한 클로버 문양이었다. 포 카드보다 나오기 힘들다는 스트레이트 플러시였다!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 바로 다음의 가장 높은 카드. 방금 포 카드보다도 높은 패였다.

‘살면서 수없이 카드 게임을 해봤지만,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나오는 것은 처음이군.’

방금 나왔던 포 카드는 그가 속임수를 쓴 결과였다. 아무도 모르게 슬쩍 카드를 바꿔치기해 인위적으로 포 카드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런 속임수도 없이 1108,290의 확률의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나오다니?

‘이걸로 끝이군. 내 승리야. 좋군. 아주 좋아.’

속으로 웃음을 짓는 순간이었다. 그는 한 가지 떠오른 생각에 흠칫했다.

‘설마 이게 속임수는 아니겠지?’

갑자기 그 천고의 확률의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나오다니. 의심할 만했다. 하지만 그는 마주 앉은 소녀를 바라보고 고개를 저었다. 저 착한 소녀가 속임수라니. 어울리지 않았다.

‘모리나 왕녀라면 정정당당하게 겨루다 산화할 스타일이지, 아무리 궁지에 몰려도 남을 속일 스타일은 아니야.’

무엇보다 그의 눈에 걸린 것이 없었다. 그는 카드 속임수의 달인으로, 그의 눈을 피해 속임수를 쓰는 것은 불가능했다.

‘카드를 섞으며 즉석으로 원하는 패를 만들어 내는 기술이면 모를까.’

요한이 떠올린 기술은 전문 도박사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속임수였다. 정확히 말하면 속임수라기보다는 마술 같은 손기술. 카드를 손으로 섞는 순간, 원하는 패의 배열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게 실제로 가능한 기술인지는 모른다. 카드 게임을 하며 온갖 종류의 속임수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요한이었지만, 그 기술만큼은 불가능했다.

‘어쨌든 좋아. 아주 좋아.’

“5만 추가로 가겠습니다. 베팅하시죠.”

그런데 그 순간,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올인(All In)! 남은 돈 모두 걸겠어요.”

“……!”

요한의 눈이 크게 떠졌다.

‘뭐라고? 올인이라고? 정말로?’

그는 마리를 바라보았다. 자신보다는 못해도 정상급의 실력을 가진 그녀다. 그러니 자신의 카드가 최강의 패인 스트레이트 플러시인 것을 짐작하고 있을 텐데, 올인이라고?

“정말입니까? 다시 생각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네, 올인하겠어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 요한은 혼란에 빠졌다.

‘뭐지? 설마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라고?’

그의 패는 스트레이트 플러시다. 포커에서 스트레이트 플러시를 이길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뿐.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있나? 스트레이트 플러시와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동시에 나왔다고?’

스트레이트 플러시의 확률은 0.0009%이다.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의 확률은 그보다 더 낮은 0.0001%. 그런데 그 극악한 확률의 패가 서로의 손에 동시에 나온다? 그게 가능하다고?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요한은 선뜻 그녀의 공격을 받지 못했다. 만약 그가 실력 없는 하수였으면 이런 고민 없이 곧바로 응수했을 것이다. 그녀의 손에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있을 확률은 0에 가까우니까. 하지만 그가 모든 상황을 다 고려하는 고수란 점이 고민을 더 하게 했다.

‘아니야. 분명 아닐 거야. 하지만 만약 정말로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라면?’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면 그의 패배다. 이번 판만 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게임 자체를 지는 것이다.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에 패배 시 10배의 배당금을 물어주기로 예외 룰을 적용했으니까.

‘젠장. 도대체 뭐지?’

요한이 입술을 깨물 때였다. 요한과 마리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

그녀의 눈을 본 요한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

‘공갈이야!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일 리가 없지.’

마리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는 희미한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만약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면 저런 불안감이 있을 리가 없다. 그녀는 지금 공갈을 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결론을 내린 요한은 크게 웃으며 카드를 오픈했다.

“하하! 제 승리입니다. 스트레이트 플러시입니다!”

“……!”

그의 카드를 본 참관자들이 역시 하는 표정을 지었다. 카탈락 백작이 도박에서 질 리가 없는 것이다.

“이번에도 카탈락 백작님의 승리군요. 그래도 참 명승부였습니다.”

“그러면 도박의 조건대로 이제 저 소녀는 카탈락 백작의 소유가 된 건가요?”

참관자들은 그의 승리를 확신하고 떠들었다. 그때 가만히 있던 무면 가면의 청년,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시끄럽군.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뭐라고?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나왔는데 승부가 끝나지 않았다고?”

참관자들은 모두 비웃었다. 라엘은 짧게 답했다.

“그건 저 소녀의 카드를 확인해 보면 알겠지.”

그 말에 요한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맞습니다. 아직은 게임이 끝난 게 아니지요. 이제 보여 주시지요. 저도 아주 궁금합니다.”

그때, 마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을 들은 요한은 순간 흠칫했다. 마리의 한숨이 절망보다는 일이 끝났다는 안도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지? 설마?’

그의 눈이 커지는 순간, 그녀가 패를 오픈했다.

하트(♥) A  K  Q  J  10.

“…….”

요한은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카드를 떨어뜨렸다. 저게 지금? 마리가 진이 다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예요.”

“……말도 안 돼.”

요한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고 그녀의 카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맞았다. 즉, 그의 패배였다.

“제 승리예요. 인정하시나요?”

마리는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요한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렇죠. 제가 진 거죠.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던 그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설마? 모리나 왕녀도 속임수를?’

만약 그녀가 전설의 카드 섞기 기술을 사용했다면? 그 기술이라면 이런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

“한 가지만 묻죠.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것입니까?”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수도 쓰지 않았어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패배를 번복하지는 않을 테니. 그냥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알려 주십시오.”

“정말로 아무런 수도 쓰지 않았어요.”

흔들림 없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는 일말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았다.

“……!”

요한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그냥 그런 확률이 나온 거라고?’

마리는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저 하늘에서 누군가 도와주셨나 봐요. 불쌍하게 악당에게 안 끌려가게요.”

요한은 그녀의 말에 잠시 침묵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그 순간이었다. 한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가 그들 사이로 떨어졌다.

“그만. 거기까지. 이젠 끝이다.”

무면 가면을 쓴 금발 청년이었다. 마리는 익숙한 목소리와 말투에 흠칫 놀랐다.

‘설마?’

그가 가면을 벗자 마리는 심장이 떨어질 듯이 놀랐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외모. 황태자 라엘이었던 것이다.

‘저, 전하?’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다 했는데 황태자였던 것이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것은 마리뿐이 아니었다. 가면을 쓴 참관자 중에서도 당연히 황태자의 얼굴을 알아본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경기를 일으키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 전하?! 어, 어찌 이런 곳에……!”

“허억?! 황태자 전하라고?!”

그들은 화들짝 무릎을 꿇으며 몸을 엎드렸다. 이런 비도덕적인 도박에 참관한 것도 모자라, 황태자에게 무례까지 범했다. 화가 난 라엘이 그들에게 벌을 내려도 할 말이 없었다. 라엘은 벌레 보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가면을 쓰고 있다 해서 내가 그대들이 누군지 모를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죄, 죄송합니다. 용서를……!”

“제발 목숨만……!”

그들은 엎드린 채 벌벌 떨었다. 저 피의 황태자라면 자신들에게 큰 벌을 내리고도 남았다. 황태자는 경멸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꺼져라. 더 눈앞에 보이면 목을 쳐 버릴 것 같으니까.”

그들은 화들짝 도망갔다.

“쓰레기 같은 놈들.”

황태자는 혀를 찼다. 그는 이번엔 엉거주춤 서 있는 마리를 바라보았다.

“마리.”

“……네, 전하.”

“네가 한 잘못은 알고 있겠지?”

“……네.”

마리는 고개를 숙였다.

“누가 이런 위험한 일을 허락했지?”

“……죄송합니다.”

“물론 네가 어떤 의도로 도박에 나선지는 안다. 하지만 이런 위험한 일에 나서는 것은 결단코 용납할 수 없다. 당장 황궁으로 돌아가도록. 이번 일에 대한 벌은 따로 내리겠다.”

마리는 그의 눈치를 보다가 주춤주춤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번엔 카탈락 백작, 아니, 요하네프 3세의 차례였다. 황태자는 다른 이들을 볼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차가운 눈빛으로 요하네프 3세를 바라보았다.

“카탈락 백작. 내기의 내용은 들었다. 네 가문의 채무 변제는 물론, 네가 가져온 재산을 모두 놔두고 제국을 떠나기로 했지?”

“네, 맞습니다.”

요하네프 3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과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군. 떠나라!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약속은 약속이니. 그대로 지켜야죠.”

요한은 과연 서제국의 황제답게 라엘의 눈빛에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특유의 유들유들한 말투로 말했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너무 매정한 것 아닙니까? 이왕 온 것 동제국 관광 좀 하다가 가고 싶은데. 몇 달만 유예를 주시죠.”

“몇 달? 단 하루도 줄 수 없다. 지금 당장 떠나라.”

요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군요. 지금 당장 떠나도록 하죠. 다만.”

요한은 아직 장내를 벗어나지 않고 상황을 살피던 마리에게 말했다.

“온 힐데른!”

“……!”

“1억 페나든, 2억 페나든 돈을 잃은 것은 하나도 안 아까운데. 당신을 얻지 못한 것은 가슴이 찢어지는군요.”

그는 정말로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제 상사병은 해결될 길이 없나 봅니다. 오늘 밤도, 내일 밤도, 계속해서 앞으로 영원히 당신 때문에 고통받을 운명인가 봐요.”

“…….”

“하지만 안심하지 마십시오. 상사병에 괴로워하던 제가 언제 당신의 꿈속에 나타나 납치를 시도할지도 모르니.”

마리는 이런 와중에도 저런 말을 하는 요한을 보며 질린 표정을 지었고, 황태자는 진심으로 버럭 화를 내었다.

“꺼져라! 당장!”

요한은 이크 하는 표정을 짓고는 집사 로이스에게 말했다.

“바로 떠나야겠군. 빈털터리로 쫓겨나는 거니, 짐을 챙길 게 없어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네, 백작님.”

로이스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이렇게 쫄딱 망해서 쫓겨나게 되다니.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다.

“가자.”

그렇게 요한이 로이스와 함께 밀실에서 나와 연회홀로 내려갔을 때였다. 그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

카지노 손님들로 시끌벅적하던 연회홀이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누가 쫓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을 굳히며 밖에 나오니 더욱 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

저택을 포위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 군마. 당장에라도 전투를 치르려는 듯 완전 무장한 기사들이었다.

“이건?”

일부러 가린 것인지, 소속을 구분할 문장(紋章)은 보이지 않았지만, 요한은 저들이 황실 근위 기사단인 것을 곧바로 눈치챘다. 기사단을 이끄는 알몬드 자작이 뒤따라 나온 황태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의 곁에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오른도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요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이런. 애초에 힐데른이 내기에서 지면 절 무사히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군요.”

황태자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마리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으니까.”

“크큭. 그렇군요.”

실소한 요한이 무겁게 물었다.

“그런데 절 죽이면 후환을 감당할 자신은 있으셨던 것입니까? 한자동맹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텐데요? 아무리 제국이라도 한자동맹과 척을 지면 여러모로 피로하지 않습니까?”

그 물음에 황태자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북부 최대의 상인 집단인 한자동맹과 척을 지면 아무래도 피로하겠지. 하지만 서제국과 척을 지는 것은 신경 쓸 필요가 없어.”

“네?”

난데없는 이야기에 요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차피 우리와 서제국은 적국이니까. 그렇지 않은가, 요하네프 3세?”

“……!”

카탈락 백작, 아니, 요하네프 3세의 표정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었다. 황태자 라엘은 마치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듯 다시 한번 물었다.

“내 말이 틀렸나, 요하네프 3세?”

“…….”

찰나의 순간 요하네프 3세의 낯빛이 변했다. 초조한 빛을 띠었다가, 종국에는 차분한 빛으로 돌아왔다. 요하네프 3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런. 한 방 먹었군요. 어떻게 안 겁니까?”

“원래부터 의심하긴 했었다. 하지만 확신은 못 했지. 내가 아는 서제국의 황제와 카탈락 백작은 전혀 다른 용모였으니까. 분위기가 비슷해도 둘을 같은 인물로 엮는 것은 무리였지.”

“…….”

“하지만 이번에 게임하는 모습을 보면서 확신이 들었다. 저런 음흉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건 네놈 말고는 없으니까.”

황태자는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네놈이 요하네프 3세가 아니면 이런 일들을 저지를 이유가 없지.”

그 말에 요한은 웃음을 터뜨렸다. 멋진 추측이었다. 완전히 그가 한 방 먹은 것이다.

“큭큭, 그렇군요. 그러면 저를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설마 죽이려는 것은 아니시죠?”

완전히 여유를 찾은 요한은 빙글 웃으며 물었다. 황태자는 물끄러미 요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민 중이다.”

“……!”

“물론 죽이는 것은 무리겠지. 네놈을 죽이면 당장 서제국과 전쟁이 일어날 테니까. 하지만.”

스릉.

황태자는 검을 꺼내 요하네프 3세의 목에 겨누었다. 금방이라도 목을 벨 것 같은 싸늘한 살기에 요하네프 3세의 표정이 굳었다.

“네놈이 마리한테 하는 것을 보니, 그냥 죽여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해서 드는군.”

주륵.

칼날이 목에 파고들며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황태자는 지금 진심이었다. 그는 정말로 요한을 죽일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둘 사이에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황태자는 칼을 겨눈 채 무표정한 얼굴로 요한을 바라보았고, 요한은 딱딱하게 굳은 눈빛으로 그 시선을 마주했다. 그렇게 둘 사이에 긴장감이 터질 듯 고조될 때, 황태자가 검을 움직여 요한의 얼굴을 향해 정면으로 찔렀다.

파앗!

“폐하!”

뒤에서 보고 있던 로이스가 경악해 외쳤다. 알몬드와 재상 오른도 황태자가 정말로 검을 내지르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요한을 향해 정면으로 쇄도하던 검은 요한의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며 옆의 기둥에 꽂혔다.

“…….”

요한은 자신의 뺨을 스쳐 간 검날을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지막 순간, 황태자가 손목을 비틀지 않았다면 그는 죽었다.

“요하네프 3세. 이건 경고다. 이번엔 그냥 놔주겠지만, 만약 우리 동제국에 또다시 수작을 부리려 한다면. 특히, 마리의 손끝 하나라도 건드리려 한다면.”

라엘은 차갑게 선언했다.

“그때는 내가 직접 너희 서제국으로 가서 네 목을 베겠다.”

폐부를 찌를 듯한 살기에 요하네프 3세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알아들었으면 당장 꺼져라.”

요한은 입술을 비틀어 올리곤 몸을 돌렸다. 수행원 로이스가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요하네프 3세가 사라지자, 오른이 황태자에게 다가왔다. 오른은 점차 멀어지는 요하네프 3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냥 죽이는 게 낫지 않았습니까?”

“요하네프 3세를 말인가?”

“네. 경고한다고 해서 우리 동제국을 향한 수작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황태자도 그 말에 동의했다.

“저 간악한 놈이 마수를 뻗는 것을 멈출 리가 없지.”

“그렇다면 어째서?”

“나라고 저 요하네프 3세를 살려 두고 싶은 것은 아니야. 하지만 지금 우리 동제국은 전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라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우리 동제국은 서제국을 압도하는 국력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그건 바로 제국을 피로 물들였던 황자들 간의 내전 때문이다.

“내전 당시 사망한 병사의 숫자만 40만 명이야. 우리 동제국 상비군의 숫자가 20만 명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희생이지. 아직 우리 동제국은 당시의 피해를 다 복구하지 못했어.”

그러며 황태자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앞으로 최소 3년. 3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안에 제국 내 피해를 복구하면 이제 우리는 서제국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다.”

황태자의 말이 옳았다. 국력을 회복하기만 하면 동제국의 힘은 서제국의 힘을 압도한다. 그때는 저 요하네프 3세도 감히 이런 수작을 벌이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정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클로얀 지방이야.’

오른은 속으로 생각했다. 서제국과의 관계가 악화할수록 클로얀 지방의 지정학적 가치는 올라간다. 만약 클로얀이 서제국의 영향권으로 넘어가면 동제국에게는 악몽 같은 일이 되리라.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모리나 왕녀의 행방.’

클로얀 왕국민들은 아직도 모리나 왕녀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녀를 그리워하며 전 왕조를 향한 향수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마리.’

오른은 저택 안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 끝에는 한 소녀가 있었다. 오른의 눈빛이 차갑게 깊어졌다. 점점 깊어만 가는 의심은 확신에 가깝게 변해갔다.

‘너는 정말로 모리나 왕녀와 관련이 없는 거냐?’

오른은 속으로 자신의 생각을 내뱉었다.

‘아니면, 네가 모리나 왕녀인 것은 아니냐?’

마리가 알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생각. 결국, 오른도 진실에 근접한 것이다. 물론 아직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파고 들어갈수록 마리와 모리나 왕녀가 동일 인물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치기 어려웠다.

‘만약 마리가 모리나 왕녀면 전하는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오른은 무겁게 생각했다.  황태자는 모리나 왕녀를 죽여 클로얀 왕국의 분란의 씨앗을 없앨 생각이었다. 최근 들어 극도로 악화한 클로얀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었다. 하지만 저렇게나 소중하게 여기는 마리가 모리나 왕녀라면? 과연 그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오른은 그의 의중을 짐작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속을 짐작할 수 없는 라엘의 얼굴을 본 순간, 오른은 갑자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전하께서는 왜 마리를 의심하지 않지?’

오른의 등줄기에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어째서? 왜 전하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거지?

‘너무나 아껴서?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아무리 사랑에 빠졌다고 해도 눈이 멀 황태자가 아니었다. 일개 시녀라기엔 너무나 뛰어난 그녀의 모습에 의구심을 품는 것이 당연한 일일 텐데? 그러고 보니 오른은 황태자가 마리에 대해 의구심을 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일부러 눈을 감지 않는 한 이게 자연스러운 일인가?

‘어째서지?’

오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전하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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