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있는 시녀님-29화 (30/54)

Chapter 2

한편, 황궁으로 돌아온 마리는 고뇌에 휩싸였다.

‘곧 수도에 재앙이 올 거라고? 뭘 이야기하는 거지?’

요한이 정말로 꿈에서 미래를 봤을 리는 없다. 그는 자신이 수도에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걸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 분명했다.

‘혹시 지금 진행 중인 카지노 사업? 아니야, 아직까지는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여.’

고민해 보았으나, 당연히 짐작되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생각했다.

‘차라리 황태자에게 요한의 정체를 폭로할까?’

하지만 마리는 곧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날 것은 둘째 치고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천하의 요하네프 3세가 자신과 연관되었다는 증거를 남겨 두었을 리 없어. 그냥 일반적인 핑계만 대고 동제국을 떠날 것이 분명해. 그러면 사태는 더욱 오리무중에 빠질 거야.’

아무리 동제국과 서제국이 사이가 안 좋다 해도, 타국의 황제를 함부로 구금할 수는 없다. 물론 명백한 잘못을 했다면 모르겠지만, 요하네프 3세는 겉으로는 전혀 그런 티가 없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차라리 그를 주시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연관된 증거를 잡는 것이 나을지도 몰라.’

그렇게 결론 내린 그녀는 눈을 감았다. 심적으로 너무나 지쳐서 피로를 참을 수가 없었다.

‘꿈…… 을 꾸지는 않을까?’

문득 그녀는 자신에게 능력을 주던 꿈을 떠올렸다. 꿈을 꾸면 항상 관련된 일이 일어난다. 그러니 요하네프 3세의 음모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 *

그녀가 잠들면서 바란 덕분일까? 마리는 그날 밤 꿈을 꾸었다.

‘그 자각몽이야!’

마치 현실처럼 선명한 시야. 능력을 주는 신비한 자각몽이 분명했다.

‘이번엔 무슨 꿈을?’

늘 그렇듯, 꿈의 의미를 짐작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각하, 리 장군의 남부군이 동쪽으로 진격 중입니다.」

「멕클레런 장군이 대비하고 있겠지?」

「네, 그렇습니다.」

꿈속의 주인공은 턱수염을 기른 장신의 사내였다. 그는 안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겠지. 그나저나 군자금 마련이 문제군. 지금 당장은 문제가 없다고 해도, 전쟁이 장기전으로 간다면 남부에 비해 열악한 우리 군의 사정으로는 버틸 수 없을 거야.」

「영국의 은행들에 손을 벌리는 게 어떻습니까?」

참모가 조언했다. 하지만 꿈속 주인공은 고개를 저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이지. 하지만 은행에 손을 벌리면 전후에 막대한 이자를 내야 해. 그건 정부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일세.」

「그렇긴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해. 군자금을 마련하면서도, 전쟁이 끝난 후 설립된 정부가 빚에 허덕이지 않을 방법을.」

그러며 꿈속의 주인공은 고뇌에 잠겼다.

마리는 부스스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창밖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무슨 꿈이지?”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냥 개꿈은 아닌 것 같은데.’

분명했다. 이건 분명 자신에게 능력을 주는 신비한 꿈이었다. 하지만 무슨 능력인지 짐작되지 않았다.

‘전쟁 중 총사령관이 되는 꿈이라니?’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전운의 징조도 전혀 없었고, 일단 꿈의 내용의 포인트도 전쟁이 아니었다.

‘군자금 부족이라고? 제국 경제에 문제가 생긴다는 걸까?’

마리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혹시 요하네프 3세는 한자동맹의 거상이란 신분을 이용해 제국 상거래에 혼란을 주려는 것일까?’

일리가 없는 추측은 아니었다. 현재 요하네프 3세의 입장에서 피를 흘리지 않고 가장 손쉽게 제국을 흔들 수 있는 방법이니까.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어.’

마리는 일단 사자궁으로 출근해 황태자에게 수도의 상거래 현황을 검토하는 것을 허락 맡았다. 다행히 황태자는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군. 농업이 나라의 뿌리이면, 상업은 나라의 혈맥과도 같은 것. 문제가 없는지 늘 헤아려야겠지.”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궁 밖을 나갈 때는 반드시 호위 기사를 대동하도록.”

정무를 논하는 중에도 꼭 빠지지 않고 그녀를 염려하는 황태자였다.

‘전하.’

그런 그를 보자 마리는 최근의 일들이 떠오르며 갑자기 가슴이 울컥하였다. 그와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계속해서 함께하고 싶었다.

‘일단 요하네프 3세의 음모를 먼저 막자.’

마리는 굳게 생각했다. 물론 그녀는 요하네프 3세를 믿지 않는다. 내기에서 이긴다고 해서 그가 모든 마수를 포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떠나, 그녀는 요한의 음모로 제국민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마리는 자신과 황태자, 제국민을 위해 요한의 음모를 저지하기로 다시 한번 다짐하고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전하.”

“왜 그러지?”

마리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는 서류를 보다가 힐끗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지?”

마리는 대답 대신 헤실 웃음을 지었다. 무언가 평소와 다른 그녀의 미소에 라엘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웃지?”

“그냥요.”

마리가 그렇게 웃은 이유, 그건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때문이다.

정체를 숨기는 일 없이 그의 곁에 서서 행복해하는 상상. 그런 상상을 하니 괜히 웃음이 나왔었다.

‘언젠가 꼭 그의 옆에 당당히 설 수 있으면…….’

그렇게 그녀는 생각하며 말했다.

“그러면 다녀오겠습니다.”

* * *

마리는 황태자의 재가를 받아 먼저 재무부에 가서 황실의 재정 상황을 살폈다. 역시나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다음은 수도의 상거래 현황을 살폈다.

‘먼저 슐레안 대공가에 가자.’

수도의 상거래를 장악하고 있는 가문은 다름 아닌 아리엘 공녀의 슐레안 대공가였다. 슐레안 대공가가 제국 3대 대귀족인 이유는 슐레안 영지의 대공이기도 했지만, 제국 전역에 걸쳐 상거래를 장악한 거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슐레안 대공가에 도착한 그녀는 난관에 부닥쳤다. 슐레안 대공과 만남 자체를 갖지 못한 것이다.

“대공께서 카탈락 백작님과 만나고 계시다고요?”

더구나 슐레안 대공이 만나고 있는 인물도 꺼림칙했다. 하필 음모의 주체인 카탈락 백작과 만나고 있다니?

“네, 예작님. 아마 용무가 오래 걸릴 것 같아 대공께서 시간을 따로 내드리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신 실무를 담당하는 제가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슐레안 대공의 보좌관의 말에 마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카탈락 백작과 슐레안 대공이?’

물론 두 명 모두 상계의 큰손이니 만난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마리는 괜히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무슨 일인지 꼭 확인해 봐야겠구나.’

마리는 보좌관과 함께 수도 상거래 현황을 확인했다. 꼼꼼하게 내역을 확인했으나, 역시나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상거래 쪽 문제가 아닌 건가?’

마리는 꿈을 떠올리며 고심에 잠겼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대공가의 정원을 산책하고 있을 때였다. 마리는 뜻밖의 인물을 마주했다.

“이런, 또 뵙는군요. 역시 우리는 운명인가 봅니다.”

“……!”

사람 좋은 호인형의 미소. 요하네프 3세가 위장한 카탈락 백작이었다!

“얼마 전 뵈었지만 또 뵙고 싶었습니다. 내 마음속 피앙세여.”

그는 마리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마리는 급히 그에게 잡힌 손을 빼며 말했다.

“내 마음속 피앙세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무슨 말이긴요.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전 당신을 원하고 있다고.”

그러며 요한은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뭐, 그리고 피앙세란 말이 틀린 것은 아니죠. 어차피 당신은 제 것이 될 것이니까요.”

그녀는 요한이 얼마 전 한 내기를 이야기하는 것이란 것을 깨달았다. 마리는 딱딱하게 말했다.

“그럴 일은 없어요. 그나저나 무슨 음모를 꾸미려 대공가에 온 것이죠?”

요하네프 3세는 태연스레 말했다.

“음모라니요? 대공 전하와는 같이 즐기는 일이 있어서 방문했을 뿐입니다.”

억울하다는 목소리였지만, 천하의 요하네프 3세 아닌가? 믿을 수 없었다.

‘더구나 같이 ‘즐기는’ 일이라니? 이게 무슨 말이지?’

의혹에 인상을 찌푸리는데, 요하네프 3세가 말했다.

“그나저나 대단하긴 하군요. 며칠도 안 되어서 이렇게 슐레안 대공가에 오시다니. 역시나 왕녀는 제가 인정할 만한 인물이에요.”

“……!”

의미심장한 이야기였다. 그는 자신의 입으로 음모의 꼬리를 드러낸 것이다.

‘역시 상거래 쪽 문제를 일으키려는 게 맞았어. 하지만 도대체 뭐지?’

그런데 그때 요한은 어깨를 으쓱했다.

“방향을 잘 잡으신 것은 맞는데, 목적지는 잘못 도착하셨군요. 여기가 아닌데.”

“그게 무슨 말이죠?”

“글쎄요. 뭘까요?”

장난스러운 말투에 마리는 그를 쏘아보았다.

요한은 빙글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연모하는 왕녀께서 고생하시는 것을 보니 제 마음이 찢어지는군요. 그러니 특별히 말씀드리죠.”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실 어제 또 예언을 받았습니다. 이 제국 수도의 곳곳에 화약이 매설되어 있다가 쾅, 하고 터지는 예언을요.”

“…….”

마리는 표정을 굳혔다. 화약이라고?

“아마 그 화약이 터지기 전까지 시간이 많이 남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화약이 터지게 되면 얼마나 큰 재앙이 될지 모르겠군요.”

요한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서두르십시오.”

슐레안 대공가의 저택을 나온 마리는 생각에 빠졌다.

‘화약이라고?’

당연히 진짜 화약을 말하는 것일 리 없다. 무언가 제국 상거래에 문제가 될 만한 뇌관을 심어 놨다는 것일 거다. 마리는 요한의 말을 떠올렸다.

“방향을 잘 잡으신 것은 맞는데, 목적지는 잘못 도착하셨군요. 여기가 아닌데.”

‘도대체 무얼 말하는 거지?’

화약이라 하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대량의 부실 어음이었다. 하지만 여러 상단을 돌아다니며 어음의 건전성을 살펴보았으나 문제는 없었다.

‘모르겠어. 도대체 뭐지?’

마리는 무력함을 느끼며 생각했다.

“화약이 터지게 되면 얼마나 큰 재앙이 될지 모르겠군요.”

빈말로 하는 말이 아닐 거다. 터지기 전에 해결하지 못하면 큰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했다.

‘생각해 내야 해.’

그렇게 한참을 간절히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눈에 길거리 바닥에 떨어져 있던 물건 하나가 들어왔다.

“이건 뭐죠?”

그녀를 호위하던 기사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대답했다.

“은화 아닙니까? 누군가 흘리고 갔군요.”

“그렇죠? 은화죠?”

“네, 그렇습니다.”

당연한 걸 묻는 그녀를 보며 기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십니까?”

하지만 마리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빠져든 것이다.

‘지금 수도의 상거래에는 특별히 문제 될 만한 요소는 없어. 그러면 화폐는? 화폐 자체는 괜찮은 걸까?’

모든 상거래는 화폐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화폐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러면 상거래에 어마어마한 재앙이 일어날 것이다. 상거래 자체가 마비될 수도 있었다.

‘화폐에 문제가 있다면, 그건 한 가지뿐이야!’

마리는 생각을 이어갔다.

‘위조화폐! 화폐의 금과 은의 비율을 속이면 문제가 생길 수 있어!’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전 세계의 모든 화폐는 금과 은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정해진 비율 이상으로 금과 은이 섞이지 않으면 화폐로서의 가치를 잃는다.

‘만약 금과 은의 비율을 속인 위조화폐가 대량으로 유통되고 있다면? 그건 재앙이야!’

수도에 유통되고 있는 화폐는 대부분 황실의 화폐청에서 발급된 화폐들이었다. 하지만 모든 화폐가 황실에서 발급되는 건 아니다. 이 시대에는 화폐를 만드는 권한이 각 지방의 귀족들에게도 있었다. 그렇게 각지에서 화폐를 찍어 내기 때문에, 위조화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마리는 수도에 유통되고 있는 화폐들을 모두 확인해 보기로 하였다.

‘황실 화폐소에서 발급한 화폐에 문제가 있을 리는 없어. 다른 화폐소에서 찍은 화폐들을 확인해 봐야 해.’

마리는 화폐소의 감별 전문가와 함께 화폐들을 하나하나 확인해 보았다. 당연히 대부분의 화폐에는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서제국과 인접한 남부의 루이나 영지에서 발급한 화폐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온 힐데른, 이건…….”

화폐 감식가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위조화폐군요. 은의 함량이 기준치에 비해 20% 정도 모자랍니다.”

“……!”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추측이 맞았다. 수도에 위조화폐가 유통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대량으로.

* * *

‘요하네프 3세는 수도에 위조화폐를 은밀히 유통한 후 그 사실을 한 번에 터뜨려 상거래를 마비시키려고 했던 거야.’

마리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섬뜩한 귀계가 아닐 수 없었다. 만약 모르고 당했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으리라. 그로 인한 혼란은 재앙이라 칭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마리는 곧바로 이 사실을 황태자에게 알렸다. 그녀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위조화폐가 유통되었다는 사실에 황궁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당장 루이나 지방의 화폐소를 조사하도록! 그리고 얼마나 많은 위조화폐가 유통되었는지도 확인하도록!”

황태자는 급하게 필요한 조처를 하였다.

“네, 전하!”

사색이 된 오른이 고개를 숙였다.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어쨌든 미리 알아내서 다행이다. 잘했다, 마리.”

혀를 내두른 황태자는 마리의 공을 치하했다. 조사대는 곧바로 루이나 지방의 화폐소를 조사했다. 하지만 이미 위조화폐를 찍어 낸 화폐소의 범인들은 도주한 상태였다. 곧바로 추격대를 보냈지만, 이미 국경을 넘은 것으로 보여 체포할 수 있을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위조화폐라니. 미리 알아내긴 했지만 큰일이군.”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네, 서둘러 조처를 하지 않으면 큰 피해가 올 것입니다.”

위조화폐의 양을 확인한 오른은 창백한 안색으로 말했다. 황태자가 물었다.

“위조화폐의 양이 얼마나 된다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최소 172만 페나는 될 듯합니다.”

마리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뭐라고? 172만 페나?’

페나는 제국의 화폐 단위였다. 172만 페나면 제국 황실로서도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황태자도 생각보다 많은 금액에 침음을 삼켰다.

“큰일이군. 무턱대고 회수했다가는 은행들이 줄도산하겠어.”

불행인지 다행인지 위조화폐는 아직 시장에 유통되지 않고 은행들이 가지고 있었다. 만약 172만 페나에 달하는 금액을 아무런 대책 없이 회수한다면, 파산하는 은행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은행과 연관된 상단들도 큰 피해를 입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시장에 큰 혼란이 올 것이 분명했다.

‘설마 일부러 나에게 위조화폐의 단서를 흘린 것인가?’

요하네프 3세의 얼굴을 떠올린 마리는 순간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의도한 바가 아닌가 하는.

‘진짜 문제는 위조화폐를 밝혀내는 게 아니야. 시장의 피해를 막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해.’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172만 페나에 달하는 거액 전액을 황실이 보존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다른 묘책을 생각해 내야 했다.

“어쩌다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군. 루이나 지방의 영주는 조사하고 있나?”

“네, 하지만 화폐소를 담당하던 이들이 저지른 범행이라, 영주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듯합니다.”

“흠.”

황태자는 손가락으로 철가면을 두드렸다. 그러더니 불쑥 말했다.

“서제국이 연관되었을 가능성은 없나?”

“……!”

마리는 깜짝 놀라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단서도 없는데 정확히 추측한 것이다. 오른이 물었다.

“이번 일에 서제국이 연관되었다고 보시는 것입니까?”

“증거는 없다. 하지만 단순히 화폐소 직원의 개인 범행이라기에는 규모가 너무 크군. 만약 뒷배경이 있다면 서제국 놈들이 가장 가능성이 높겠지.”

오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생각이었다.

“네,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른은 위조화폐에 대한 대책을 물었다.

“유통된 위조화폐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회수 명령을 내리도록 할까요?”

“원칙적으로 따지면 당연히 회수해야겠지만, 그렇다가는 은행들이 줄도산할까 문제군. 큰일이야.”

황태자는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고 황실이 손실액을 보상해 줄 수도 없고.”

“네, 충당 못 할 금액은 아니나, 재정에 큰 타격이 있을 것입니다.”

제국은 세수가 많은 만큼 지출도 많았다. 늘 세수와 지출이 일정한 균형을 이루어왔는데, 172만 페나면 재정에 큰 부담을 주게 될 것이다.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해야겠군.”

한편, 그들의 대화를 듣고 마리도 고민에 빠졌다.

‘방법이 없을까?’

시장의 혼란을 막으면서도, 재정 부담은 최소화할 방법이 필요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대로는 고스란히 172만 페나를 손해 볼 판국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마땅한 수를 내지 못하자 황태자가 말했다.

“좀처럼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군. 조금 더 고민을 해봐야겠어.”

그렇게 자리가 파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마리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봐, 마리. 혹시라도 방법이 생각날지도 몰라.’

조금이라도 황태자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윽고 늦은 밤이 되어 마리는 한숨을 내쉬며 잠자리에 누웠다.

‘제발 방법을 알려 주세요.’

그녀는 잠이 들기 전 창밖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그리고 그 기도 덕분일까? 그녀는 다시 꿈을 꾸었다.

「이대로는 무기를 살 돈은 물론, 병사들의 봉급도 못 주겠어.」

군자금 문제로 한탄하는 꿈속의 주인공. 마리는 지난번 꾸던 꿈을 이어서 꾸는 것이란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야 해. 이런 식으로는 전쟁에서 이길 수가 없어.」

꿈속의 주인공은 계속해서 돈 문제를 고민했다. 지금 자신의 고민과 흡사한 고민이라 마리는 꿈속 내용에 집중했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꿈속의 주인공은 답을 마련했다는 듯 번뜩 고개를 들었다.

「우리 군에서 자체적으로 돈을 더 찍어야겠어.」

「하지만 각하, 우리 군에는 돈을 추가로 찍을 수 있는 금과 은이 없습니다.」

「금과 은이 들어가지 않은 돈을 만드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참모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각하, 금과 은이 없는 돈은 돈으로서의 가치가 없지 않습니까?」

마리도 참모의 말에 동의했다. 금과 은이 섞이지 않은 화폐는 화폐로서의 가치가 없다.

하지만 꿈속 주인공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한 가지 방법이 있네. 금과 은이 없어도 화폐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할 방법이. 그건 바로…….」

마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건 무슨 꿈이지?’

마리는 깊은 눈동자로 생각했다. 늘 그랬듯 이유 없이 꿈을 꾸었을 리는 없다. 분명 지금 상황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을 것이다.

‘확실히 금과 은이 섞이지 않은 돈을 만들 수 있으면, 이번 사태를 피해 없이 해결할 수 있어. 손실액만큼의 화폐를 추가로 만들어 지급하면 되니까.’

그러나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잖아. 금과 은이 섞이지 않은 화폐라니. 그건 돈으로서의 가치가 없어.’

마리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을 하였다. 모든 화폐는 금과 은으로 만든다. 그건 제국뿐 아니라 전 유럽, 아니, 실크로도 너머의 동방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 통용되는 금화본위제도였고, 국가들이 원하는 대로 화폐를 찍어 낼 수 없는 이유였다.

‘아니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마리는 원점에서 생각해 보았다.

‘금화와 은화가 화폐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바로 금과 은의 희소성 때문이야. 그 희소성 때문에 금과 은은 화폐로서의 권위를 갖게 돼. 그러면? 금과 은 없이 화폐로서 가치가 있으려면?’

마리의 머릿속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과연 어떤 방법을 써야 화폐로서의 권위를 줄 수 있지? 금과 은의 희소가치 없이 가능하긴 한 걸까?’

하지만 당장 답이 떠오르진 않았다. 사자궁으로 갈 시간이 되어 마리는 준비를 마치고 집무실로 나갔다. 이른 시간이었으나, 오른도 위조화폐 대책을 논하러 나왔다.

“대책을 생각해 보았는가?”

“은행의 연쇄적인 파산만은 막아야 한다 판단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문제는 돈이지. 이번 일로 큰 손해를 보게 생겼어.”

오른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은행의 피해를 황실이 보존해 주는 쪽으로 결론이 나자 마리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정말 방법이 없을까?’

그때였다. 고민에 빠져 있던 마리의 눈에 황태자가 무언가를 집어 드는 것이 들어왔다.

“이게 결재안인가?”

“네, 전하.”

마리의 눈이 흠칫 커졌다. 황태자가 손에 든 것은 국보인 옥새였다. 바로 황제의 권한을 대행하는. 그 순간, 마리의 머리에 번개처럼 깨달음이 스쳤다.

‘잠깐! 있어! 금과 은이 없이도 화폐로서의 권위를 부여할 방법이!’

그녀는 속으로 탄성을 뱉으며 생각했다.

‘황제의 권한으로 화폐의 가치를 보증하는 거야! 그러면 금과 은이 안 섞여도 그 화폐는 시장에서 믿고 사용할 수 있게 돼!’

그때, 황태자가 오른에게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이대로 진행해야겠군. 힐데른이 미연에 발견한 덕에 최악의 시장 혼란은 피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손실이 크군.”

그러며 그가 결재 서류에 옥새를 찍으려는 순간이었다. 마리가 다급히 말했다.

“전하.”

“무언가?”

“황실의 지출을 최소화하며 이번 사건을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황태자와 오른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그게 무엇이지?”

“위조화폐를 환수할 때 금과 은이 섞인 화폐를 지급하는 것이 아닌, 새롭게 만든 화폐를 지급하는 것입니다.”

“금과 은을 섞지 않은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자고?”

“네, 전하.”

오른은 말도 안 된다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런 걸 누가 돈이라 여긴다고? 세상의 모든 돈에는 금과 은이 섞여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그 돈을 신뢰하지 않아.”

오른의 말은 타당했다. 마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게 바로 금화본위제도지요. 하지만 금과 은이 없어도 화폐로서의 가치를 부여할 방법이 있습니다.”

마리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바로 황제 폐하의 권한으로 돈에 직인을 찍는 것입니다.”

“……!”

오른은 흠칫 표정을 굳혔다. 마리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깨달은 것이다.

“폐하의 직인을 찍자고?”

“네, 황실의 권한으로 동일한 가치의 화폐와 똑같은 값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보증하는 것이지요. 타국에서는 무리겠지만, 황실의 직인이니 제국 내에서는 충분히 화폐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장내가 조용해졌다. 금과 은이 섞이지 않은 화폐를 만들어 지급하자니! 당시 통용되는 상식으로는 너무나 파격적인 생각이었다.

“그래도 그건…….”

오른은 고개를 저으려 했으나, 그때 황태자가 말했다.

“파격적이긴 하지만, 일리가 없는 생각은 아니군. 아니, 굉장히 좋은 생각이야.”

“네, 필요시 동일한 가치의 금화나 은화와 교환할 수 있도록 황실이 보증하면 사람들도 받아들일 것입니다.”

황태자는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의 권위로 화폐의 가치를 보장한다. 훌륭한 생각이었다. 마리가 제시한 의견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금과 은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추가적인 재원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큰 피해 없이 이번 위조화폐 사건을 마무리할 방법이었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황태자는 다시 한번 마리에게 감탄했다. 도대체 저 소녀가 가진 능력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 이번에 위조화폐를 알아낸 것부터 그렇고 새로운 화폐의 발급까지. 놀랍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황실의 보증으로 인한 화폐라니.’

엄밀히 말하면 마리가 제안한 화폐도 금화본위제도의 큰 틀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필요시 같은 가치의 금화와 은화로 교환할 수 있도록 황실이 보증한 것이니까. 그래도 동시대의 패러다임을 깬 혁명적인 아이디어인 것은 분명했다. 어쩌면 먼 훗날에는 마리가 고안한 형태의 화폐가 일반적인 화폐로 사용될지도 몰랐다.

‘마리, 넌 도대체…….’

황태자는 그녀를 보며 거듭 감탄을 하였다. 한편, 오른은 황태자와 달리 의심의 눈으로 마리를 보았다.

‘의심스러워.’

그는 남몰래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의견을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도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있는 만큼, 마리가 고안한 것이 패러다임을 뛰어넘는 대단한 일인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 의심스러웠다. 그녀를 알게 된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떠나지 않는 의심.

‘정말 단순한 시녀 출신이 맞는 걸까? 저런 식견을 가진 소녀가?’

오른은 클로얀 왕국의 ‘마리’에 대한 인적 사항을 떠올렸다. 평범한, 아무런 특이 사항 없는 하급 시녀. 눈여겨볼 만한 점은 모리나 왕녀가 머물던 통원의 궁 근처에서 일했다는 것 외에는 전혀 없었다.

‘그 외의 점은 아무리 조사해도 나오지가 않지. 마치 누군가 일부러 지우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그것도 의심스러운 점이었다. 왜 아무리 조사해도 나오는 것이 없는 거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모리나 왕녀와 똑같아.’

의심이 점점 깊어졌다.

‘단순히 넘어갈 일이 아니야. 전하께서는 저 시녀를 자신의 비로 삼으려 하고 있으니까.’

그는 제국과 황태자를 위해 이 문제를 다시 샅샅이 파헤쳐 보기로 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저 시녀의 진정한 정체를 밝혀내겠어.’

그렇게 오른이 다짐할 때, 황태자가 결론을 내렸다.

“훌륭한 생각이다. 네가 이야기한 대로 진행하도록 하지.”

그는 그녀의 공을 치하했다.

“이번 위조화폐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대의 공이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제국 상거래에 큰 혼란이 올 뻔했어.”

“아닙니다, 전하.”

황태자는 물었다.

“지난번 마약 사건부터 이번 일까지. 네가 세운 공은 모두 잊지 않고 있다가 반드시 상을 내리도록 하겠다.”

그 말에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하. 그저 도움이 된 것만으로도 기쁩니다.”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기뻤다.

* * *

그렇게 요하네프 3세가 획책했던 위조화폐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황태자는 루이나 영지에서 발급된 위조화폐의 거래를 금지하고 모두 환수했다. 대신 황실이 보증한 특수 화폐를 지급했다.

“황제 폐하가 보증한 화폐라고?”

“다른 금은화폐와 똑같이 사용할 수 있고, 필요할 때는 다른 금은화폐와 언제든 교환할 수 있다더군.”

“그렇다면야.”

금은이 섞이지 않은 화폐에 대해 거부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황제 폐하가 직접 공증한 것이라는 말에 모두 별다른 말없이 수긍했다. 덕분에 시장은 큰 혼란 없이 안정을 유지했다. 사람들은 이번 일을 해결한 마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 일도 힐데른 예작님이 공을 세웠다는데?”

“그게 정말이야?”

“그래, 위조화폐를 발견한 것부터 후속 대책을 마련한 것까지 모두 예작님의 공이라 하더라고.”

“허, 대단하군.”

사람들은 감탄성을 뱉었다.

“아니, 이게 몇 번째야. 동방 교국과의 일, 성배 도난 사건, 지난번 마약 밀매 사건…… 작은 소녀라 들었는데, 몇 번의 공을 세웠는지 모르겠군.”

“그러게 말이야. 최근 제국에서 가장 많은 공을 세운 분 아닌가.”

짧은 기간 동안 세운 수많은 공 덕분에 마리의 이름은 수도 전체에 퍼졌다. 이제 아무도 마리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녀는 이름 높은 명사(名士)가 되어 있었다.  그때, 누군가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홀몸이신데, 힐데른 예작님 같은 훌륭한 분과 맺어지면 좋겠구먼.”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평민이 함부로 이야기하기에는 굉장히 조심스러운 주제였지만, 없을 때는 나라님 욕도 하는 법이라 그들은 거침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다른 허영심 많은 귀족 여인 말고 힐데른 예작님 같은 분이 황태자비가 되면 좋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그들의 말에 누군가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래도 다른 아름다운 영애가 많을 텐데 힐데른 예작님이 황태자 전하의 눈에 차겠는가?”

그 말에 다른 이들이 발끈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 말 취소하게. 힐데른 예작님이 얼마나 귀여우신데!”

“그래, 자네 직접 예작님 뵌 적 있나? 난 지난번 뵌 적 있는데 엄청 귀여우셨어!”

백성 모두 제국을 위해 많은 공을 세운 마리에 대한 호감이 높았다. 누군가 헛기침을 하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이건 황궁에서 일하는 고용인에게 들은 비밀인데, 어쩌면 정말로 힐데른 예작님이 황태자비가 될지도 모르네.”

“그게 무슨 말인가?”

“황태자 전하께서 힐데른 예작님을 간절히 원하고 계신다더군. 지난번 간택이 흐지부지된 것도 그 때문이고.”

“오호, 그렇단 말인가? 그러면 정말로 힐데른 예작님이 황태자비가 되시겠군!”

사람들은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저 소문이 사실이라면 힐데른 예작이 황태자비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 누가 황태자의 마음을 거부하겠는가?

“잘됐군. 난 이 결혼에 찬성일세.”

“나도 찬성이야. 다른 못된 귀족 여인보다야 힐데른 예작님이 훨씬 낫지.”

그렇게 백성들 사이에서 마리와 황태자의 결혼을 바라는 목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 * *

한편 그때, 마리는 황궁 외곽에 위치한 정원의 호수 인근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꺄아, 장난치지 마세요, 공자.”

“하하.”

봄이 깊어지고, 화창한 날이 이어지자 황궁의 정원에서는 많은 남녀가 산책을 즐겼다. 사랑이 싹트기 좋은 계절이라, 서로 간의 애정을 드러내는 남녀도 많았다. 물론 마리에게는 먼 나라 일이었다. 그녀는 수풀에 앉아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는데, 표정이 심란했다. 고민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위조화폐 건은 다행히 잘 넘길 수 있었지만, 다음 재앙은 무엇일까?’

당시 요하네프 3세는 여러 개의 재앙이 올 것이라 말했었다. 귀계의 달인인 그가 고작 이번 사건 하나로 음모를 마무리할 것 같지는 않았다.

‘분명 다른 음모가 다가올 거야. 그것도 조만간. 그리고 그 음모는 이번 사건보다 더 치명적일지도 몰라.’

마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요하네프 3세의 음모는 당연히 막아야 한다. 자신을 위해서도, 황태자를 위해서도, 이곳 제국민을 위해서도.

“하아.”

왠지 모든 것이 안개에 낀 듯 막막하게 느껴져 다시 한숨을 내쉴 때였다. 나직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웬 한숨이지?”

“……!”

워낙 깊은 생각에 빠져서일까, 그녀는 바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누, 누구?”

마리가 허겁지겁 고개를 돌리는 순간, 목소리의 주인이 그녀의 어깨를 단단한 팔로 감싸 안았다.

“……!”

갑작스러운 껴안음에 당황한 마리가 버둥거리자 남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다.”

금발에 푸른 눈, 그리고 그림 같은 얼굴. 황태자 라엘이었다.

“놀라지 말도록. 괜찮아.”

그의 품에 안긴 마리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뭐, 뭐가 괜찮다는 건가?! 하나도 안 괜찮았다!

“저, 전하.”

두근두근.

완전히 쓰러지듯 품에 안긴 탓에 전신으로 그의 몸이 느껴졌다.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정신을 못 차리고 어떻게든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황태자의 말에 마리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그대로 있어. 안 그러면 입 맞춰 버릴 테니.”

‘지, 지금 뭘 한다고?’

라엘이 피식 웃더니 그녀의 귓가에 다시 말했다.

“시험해 보든지. 참고로 난 그쪽도 나쁘지 않은 것 같군.”

“그, 그대로 있겠습니다!”

정말로 입을 맞출 기세라 마리는 허겁지겁 이야기했다.

‘이, 이게 갑자기 뭐야.’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생각지도 못 한 기습 공격이었다. 이렇게 그와 밀착해 있으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단단하면서 따뜻한 그의 느낌에, 부드러운 그의 향기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때, 라엘이 말했다.

“뭘 그렇게 한숨을 쉬고 있었던 것이냐? 내가 이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문제가 있으면 내가 다 해결해 줄 테니, 나한테 맡기라고.”

라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너도 당연히 남에게 말 못 할 고민이 있겠지. 그래도 잊지 마라. 네가 한숨을 쉬면 난 그 몇 배, 몇십 배로 걱정한다는 것을.”

“……!”

그 말을 들은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가슴이 떨렸다. 왜일까? 왜 이렇게 가슴이 울컥한 걸까?

“이야기하기 곤란하면 당장 이야기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너무 무리하지 말도록. 언제든 나에게 기대어도 좋다.”

마리는 뭐라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여, 그저 이렇게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녀는 이 순간 그의 품에 안겨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으면 동요하는 마음을 단번에 들켰을 것이다.

‘따뜻해.’

마리는 눈을 감았다. 자신을 감싸 안은 그의 손이, 그의 품이, 그의 마음이 모두 따뜻하다고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아주 잠시만 이대로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이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것일까? 라엘은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그녀를 보듬어주었다. 조용히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그녀를 보는 그의 푸른 눈동자에 얼핏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마리.”

“……네, 전하.”

“그거 아느냐? 내가 요즘 가면을 자주 쓰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원래 황태자는 타인 앞에 나설 때 반드시 철가면을 쓰고 나섰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녀와 함께 있을 때는 물론, 가끔씩 가면을 쓰지 않고 국정을 볼 때가 있었다.

“원래 가면을 쓴 것은 마음을 독하게 먹기 위해서였다. 내전 때 흔들리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쓰기 시작했지.”

마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내전이 끝난 다음에는 가면을 쓰는 이유가 바뀌었다. 승리하기 위해서였다지만, 너무 많은 피를 흘렸지. 그래서 그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 그 피를 잊지 않기 위해 맹세하는 마음으로 가면을 썼다.”

“…….”

“즉, 나 자신을 몰아붙이기 위해 가면을 쓴 것이야. 아니, 사실은 솔직히 말하면 가면을 씀으로써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지.”

라엘은 그녀에게 말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가면을 덜 쓰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모두 그대 때문이다.”

마리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저 때문인 건가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

“그냥 그대와 함께 있으니, 마음이 이전보다 편안해서 그냥 그래서 그런 것 같다. 내 죄를 잊을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그대 덕분에 마음은 한결 편해진 것 같아.”

사실 그도 본인의 변화를 정확히는 설명하지 못했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마리, 네 덕분인 것 같다. 고맙다.”

“……!”

“앞으로도 이렇게 영원히 내 곁에 있어주도록.”

마리는 그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이 파르르 떨려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그녀의 침묵을 거절이라 오해한 황태자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싫다고 해도 상관없다. 내가 놔주지 않을 테니. 네 모든 것은 다 내 것이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마리는 가슴이 두근 뛰었다. 라엘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니 나에게서 도망갈 생각 하지 말도록. 어디로 가도 영원히 쫓아갈 테니. 알겠나?”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눈빛이, 그녀를 향한 마음이 마리의 가슴에 와서 꽂혔다. 그녀는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뭐라고 입을 열면 동요하는 마음을 들킬 것만 같았다.

잠시 후, 그녀는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전하,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제 머리를 조금만 쓰다듬어줄 수는 없으시겠습니까?”

황태자는 뜻밖의 부탁에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이런 부탁을 하다니? 란 표정이었다.

마리는 민망한 마음이 들어 얼굴을 붉혔다. 그녀도 자신이 갑자기 왜 이런 부탁을 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냥 문득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마음이 안정될 것 같았다.

“그…… 지난번 위조화폐 사건을 해결한 보상으로…….”

당황해 변명하듯 말하던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뭔가 이 변명이 아닌 것 같은데. 황태자도 황당한 목소리로 물었다.

“보상으로 머리를?”

“…….”

마리의 머리에 순간 강아지가 떠올랐다. 착한 일 하고 쓰다듬받는 강아지.

‘이, 이게 아닌데.’

그녀는 민망한 마음에 버둥거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황태자가 그녀를 놔줄 리가 없었다. 그는 오히려 힘을 주어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

“저, 전하?”

마리는 당황해 더욱 버둥거렸으나, 라엘은 오히려 더욱 강하게 끌어안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녀를 자신의 품 안에 가둬 버린 그가 무뚝뚝한 평소의 목소리와 다르게 달콤하게 말했다.

“얼마든지.”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지럽히듯 와 닿았다.

“이런 부탁이면 얼마든지 들어주지.”

그러며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하였다. 마리는 라엘의 품 안에 안겨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을 느꼈다.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따뜻하고 달콤한 손길이 마음에 촉촉이 와 닿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