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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저택 안쪽으로 들어간 마리는 커다란 홀 안쪽에서 들리는 음악 소리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웬 음악 소리가? 악단이 연습 중인 건가?’
그런 그녀의 의문을 눈치챈 듯 백작이 친절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지난번 황태자 전하께 재가받았던 문화 사업 때문입니다.”
“문화 사업이요?”
마리는 지난번 저택에 왔을 때 들었던 사업 내용을 떠올렸다. 백작은 서남부 교역 도시에 돈을 투자하는 대신에 카드놀이를 이용한 오락 사업을 허가받았다.
‘카지노라고 했던가? 최근 수도 사교계에서 굉장한 유행이라고 하던데.’
역시 한자동맹의 거상답달까. 수완이 보통이 아니어서, 재가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수도 사교계에 카지노 유행이 불고 있었다.
“카드 게임을 하다가 중간중간 기분을 전환할 수 있게 여러 공연을 같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반응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연회장 안을 살펴보았다. 백작은 커다란 연회장을 게임장으로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많이 보이진 않았다.
‘오락의 일종이긴 하지만, 도박 요소가 많은데 과열되지 않는지 잘 지켜봐야겠구나.’
마리는 황태자가 사업 허가를 내주며 했던 걱정을 떠올렸다. 당시 황태자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카드 게임에 빠져 가산을 탕진할까 봐, 출입이나 베팅 액수 등에 제한을 두는 등 여러 안전장치를 마련했었다.
‘아직은 다들 그냥 유희 정도로만 즐길 뿐 크게 빠진 이는 보이지 않긴 하지만, 계속 눈여겨봐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마리는 카탈락 백작이 안내한 응접실에 도착했다.
“시장하진 않으십니까? 마침 신선한 해산물이 들어왔는데,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기 나누겠습니까?”
“괜찮아요.”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카탈락 백작은 서운한 표정을 짓더니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하실 말씀이란 것이?”
자리에 앉아 그를 마주한 마리는 똑바로 백작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히려 이렇게 물었다.
“혹시 백작님께서는 저에게 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말 그대로예요. 저에게 혹시 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그렇게 물은 마리는 입을 다물고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일단 내가 먼저 패를 꺼낼 필요는 없어. 그건 어리석은 짓이야.’
분명 백작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무언가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건 확실했다. 하지만 저 뱀 같은 백작이 자신의 의도를 쉽게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로서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해 그의 의도를 알아내고 담판을 지어야 했다.
“제가 온 힐데른께 할 말이라…….”
가만히 중얼거린 백작은 빙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단숨에 이렇게 내뱉었다.
“통원의 궁에서 만났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인가요, 모리나 왕녀님?”
“……!”
마리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생각지도 않게 그가 단숨에 그녀의 정체를 내뱉은 것이다.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감상하듯 바라본 그는 짙은 미소를 지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치 광대가 하듯 거창한 예를 표했다.
“다시 한번 인사하는 게 맞겠죠? 한자동맹의 카탈락 백작이 클로얀 왕국의 모리나 왕녀 마마께 예를 올립니다.”
인사를 마친 후 응접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리는 창백해진 얼굴로 생각했다.
‘역시 내 정체를 알고 있었어.’
예상하고 있었지만 직접 귀로 들으니 충격이 컸다. 그녀는 덜컥 내려앉은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중얼거렸다.
‘정신 차려. 어차피 짐작하고 있었잖아.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의도야.’
마리는 딱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게 무엇을 원하는 것이죠?”
카탈락 백작의 미소가 짙어졌다.
“원하는 것이요? 글쎄요. 전 그저 뜻하지 않은 재회에 반가움을 표한 것일 뿐입니다.”
그 능청스러운 말에 마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바보라도 그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딱딱한 그녀의 반응에 백작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입니다. 제가 왕녀님의 정체를 밝혀 왕녀님을 곤란하게 한다고 해서 무슨 이득을 얻겠습니까?”
“…….”
“전혀 안 믿으시는 것 같기야 하지만, 전 왕녀님께 호감을 품고 있습니다. 우연히 만난 왕녀님의 모습을 보고, 몇 날 밤을 설레 잠 못 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말하던 그의 눈빛이 어느 순간 낮게 가라앉았다.
“정체를 밝히면 제 마음속에 들어온 왕녀님이 잔학한 황태자에게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데. 제가 설마 그런 일을 저지르겠습니까?”
“……!”
마리의 몸이 흠칫 떨렸다.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그는 방금 그녀에게 협박한 것이다. 그녀는 질끈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무엇이죠? 말장난하지 말고 말해주세요.”
“흐음.”
카탈락 백작은 느긋한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원하는 것이라. 사실 없는 것은 아니죠. 왕녀님의 짐작대로 전 당신께 바라는 것이 있긴 합니다. 그것도 간절히.”
“그게 무엇이죠?”
카탈락 백작이 짙은 웃음을 지었다. 그녀에게 몇 번이고 기시감을 준, 어딘지 섬뜩한 느낌의 미소였다.
“바로 당신입니다.”
“네?”
마리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반문했다. 백작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
“다시 말씀드리죠. 전 바로 당신을 원하고 있습니다.”
마리의 눈빛이 당황으로 흔들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생각지도 않은 그의 말에 마리는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장난이…… 지나치시는군요, 백작님.”
“장난이 아닙니다. 제 말은 오로지 진심입니다.”
백작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진중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라, 마리는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를 바란다고? 이게 무슨 뜻이지?’
그녀는 물었다.
“백작님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저를 바란다니, 그게 무슨 뜻이죠?”
“그 말 그대로입니다. 모리나 왕녀, 당신을 제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것입니다.”
마리는 흔들리는 눈으로 백작을 바라보았다.
‘날 놀리는 건가?’
하지만 그의 눈빛은 평소와 다르게 장난기가 전혀 없었다. 진심인 것이다. 마리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저 불길하기 짝이 없는 백작이 나를 본인의 것으로 만들길 바라고 있다고?
“……어째서죠?”
백작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저 제 마음이 당신을 바랄 뿐, 사람의 마음이 향하는 데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녀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백작님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백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만약 제가 강제로라도 당신을 원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
마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여차하면 황태자에게 정체를 폭로할 수도 있다는 협박이었다.
“그러면 당신은 저의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게 되겠지요.”
정체가 폭로되더라도 그런 협박에는 굴복하지 않겠다는 대답에 백작은 턱을 쓰다듬었다.
“그렇군요. 그렇게 말씀하실 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죠? 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왕녀님을 제 것으로 만들고 싶은데.”
그는 정말로 고민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백작을 보며 마리는 혼란에 빠졌다.
‘왜? 왜 나를 바라는 거지?’
그의 말처럼 단순히 이성으로서의 호감일 수도 있지만, 그녀는 왠지 그가 밝히지 않은 이유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한자동맹의 거상이 망국의 왕녀인 나를?’
그때였다. 마치 품 안에 든 쥐를 바라보는 고양이 같은 백작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번개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저 이전에 본 듯한 기시감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깨달은 것이다.
‘혹시?’
마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변했다. 그녀의 추측이 맞는다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백작님.”
“말씀하십시오, 왕녀님.”
“절 클로얀 왕성 어디에서 본 것이지요?”
그 물음에 백작의 눈이 희미하게 굳었다 풀렸다. 그 변화는 찰나에 불과했지만, 마리는 놓치지 않았다.
“그야 당연히 통원의 궁 근처를 지나가다 뵈었습니다. 우연히 탑의 창가에 서 있는 것을 뵈었는데, 어쩌면 당신을 향한 제 마음은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군요.”
백작은 차분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을 들은 순간이었다. 마리는 곧바로 되물었다.
“제가 그때 어느 쪽 창문에 서 있었죠?”
이번엔 백작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글쎄요. 시간이 오래되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본궁에서 나 있는 길 쪽의 창문으로 기억합니다만. 그건 왜 물으시는지?”
마리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작님의 말씀은 이상하군요. 통원의 궁에는 본궁 쪽으로 나 있는 창문이 없어요. 오로지 궁에 딱 붙어 있는 성벽 방향으로만 창문이 나 있죠. 그러니 외부의 길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불가능해요.”
백작은 어색한 얼굴을 했다. 무언가 그녀가 낌새를 챘음을 직감한 것이다.
“그렇군요. 워낙 오래된 일이라 제가 헷갈렸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가 둘러대듯 이야기하는 순간, 마리가 말을 잘랐다.
“절 정말로 통원의 궁에서 본 것이 맞나요? 아니, 질문을 바꾸죠. 당신은 도대체 누구죠?”
“……!”
백작은 곤란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습관적으로 미소를 짓긴 했지만, 평소의 여유는 보이지 않았다.
“그건…….”
마리가 말했다.
“제가 대신 대답해 보죠. 당신의 진정한 정체는 바로…….”
그녀는 잠시 머뭇했다. 이 이름을 꺼내는 것이 두렵다는 듯. 하지만 곧 이를 악물고 말했다.
“서제국의 황제 요하네프 3세가 아닌가요?”
장내에 죽을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카탈락 백작은 말없이 마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위험한 맹수가 바라보는 듯한 느낌에 마리는 가슴이 떨렸지만 눈길을 피하진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이었다. 카탈락 백작이 나지막한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큭큭…….”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바닥 사이로 흘러나온 웃음소리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하하! 대단합니다. 어떻게 눈치챈 것인지 모르겠군요.”
한참을 그렇게 웃은 그는 얼굴을 가린 손바닥을 떼었다. 그리고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전 당신의 추측대로 한자동맹의 카탈락 백작이자, 서제국의 요하네프 3세입니다.”
“……!”
생각지도 않은 진실에 마리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말로? 카탈락 백작이 정말로 서제국의 황제 요하네프 3세였다고?’
사실 그녀는 확신을 가지고 말을 내뱉은 것이 아니었다. 백작의 불길한 느낌이 서제국의 황제를 마주했을 때와 똑같아서 도박하는 마음으로 내지른 것이었는데, 그가 수긍한 것이다.
카탈락 백작, 아니, 서제국의 요하네프 3세는 다시 여유로운 표정으로 돌아와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정말 의외군요. 이렇게 빨리 정체를 들키게 되다니. 뭐, 상관은 없습니다. 어차피 모리나 왕녀, 당신에게는 제 정체를 곧 이야기할 생각이었으니.”
“어째서 신분을 위장하고 제국에 온 것이죠?”
“위장하지 않았습니다. 올스덴 가문은 원래 제 소유였거든요. 정확히는 한자동맹의 올스덴 가문은 서제국 황실이 운영하는 상단입니다.”
요한의 말은 사실이었다. 유럽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브란덴 국의 왕이자 소시엔 땅의 백작이자 겐달 지방의 남작’ 같은 호칭처럼, 일국의 군주가 타국의 영지나 재산을 소유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으니까. 즉, 그는 원래 서제국의 황제이자 카탈락 백작이었던 것이다.
“그런 것을 묻는 것이 아니에요. 어째서, 무슨 의도로 서제국의 황제께서 동제국의 수도에 오신 것이죠?”
마리는 날카롭게 물었다. 물론 서제국의 황제라도 동제국으로의 출입이 금지된 것은 아니다. 용무가 있다면 얼마든지 올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정체를 숨기고 들어오다니. 분명 어떤 흉계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흠. 왕녀의 말은 일단 틀렸습니다. 전 정말로 이 자리에 서제국의 황제로 온 게 아니라, 한자동맹의 올스덴 가문의 대표로 온 것이니까요.”
“…….”
“어쨌든 이유는 말씀드리기로 하죠. 어차피 왕녀에게는 다 말해야 하는 내용이었으니.”
요한은 마리의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 무언가 섬뜩한 눈빛에 마리가 흠칫하는 순간.
“제가 이곳에 온 진짜 이유는 모리나 왕녀, 바로 당신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좀 더 확실하게 말씀드리죠.”
요한의 음성이 선명하게 그녀의 귀에 내리꽂혔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모리나 왕녀, 당신을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마리의 안색이 변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도대체…… 어째서?”
요한이 싱긋 웃더니 말했다.
“그야, 아까 이야기했듯이 마음에 들어서요?”
“농담하지 마십시오.”
“진심입니다, 정말로. 물론 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뭐, 현명한 왕녀이니 제가 말하지 않아도 대충은 짐작할 거라 예상합니다만.”
그 말에 마리는 그가 자신을 원하는 진정한 이유를 깨달았다.
‘클로얀 왕국! 그는 클로얀 왕국의 영향력을 얻기 위해 날 원하는 거야!’
클로얀 지방은 서제국과 동제국 사이의 요충지로, 현재 동제국의 지배에 놓여 있다. 동제국 입장에서는 클로얀 지방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왕가의 후예인 그녀를 제거해야 하지만, 서제국의 입장에서는 반대였다. 그녀를 받아들이면 클로얀 왕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된다.
“폐하께서는 클로얀 지방을 원하고 있군요.”
요한은 가만히 미소 지었다.
“역시 모리나 왕녀.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좋군요. 물론 제가 당신을 원한다고 말한 것은 거짓은 아닙니다. 그저 당신을 바라는 제 마음과 정치적 이득이 합치(合致)할 뿐이지요.”
“…….”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입을 열기에는 너무 어마어마한 사안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되었으니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죠.”
요한은 그녀를 향해 자신의 손을 부드럽게 내밀었다.
“모리나 왕녀, 저와 함께 이 제국을 떠나지 않겠습니까?”
그는 달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에게로 온다면 이곳 동제국에서처럼 정체를 들킬까 봐 벌벌 떨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모두가 당신을 존귀한 이로 섬기겠지요. 그뿐만 아니라, 저는 당신에게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부귀영화를 드릴 것이며, 서제국의 황후로 삼는 것은 물론 클로얀 왕국의 여왕으로 책봉해 드리겠습니다.”
“……!”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마어마한 제안이었다. 서제국의 황후이자 클로얀 왕국의 여왕이라니. 그녀는 온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제안에서 가장 무서운 점은 요한의 말이 단순한 감언이설이 아니란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약속한 것을 반드시 줄 생각이었다.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서라도.
“어떻습니까? 클로얀 왕국의 고귀한 핏줄인 당신이 이곳에서 시녀 일이나 하고 있을 필요가 있습니까? 더구나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서까지?”
요한은 마치 유혹하듯 이야기했다.
“저에게로 오십시오. 비단 정치적 이유뿐이 아니라, 전 진심으로 당신을 원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로 온다면 여인으로서의 모든 행복과 세상의 모든 권세를 드리겠습니다.”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요한과 함께 이 제국을 떠난다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굉장히 매혹적인 제안임이 분명했다. 저 모든 제안이 속임 없는 진심이란 점에서 더욱더. 그를 따라가면 정체를 들킬까 두려워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분명 부귀영화와 권세도 얻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는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절하겠어요.”
요한의 표정에 금이 갔다.
“지금 그 말, 정말이십니까?”
“네, 거절하겠어요.”
일말의 고민도 없는 거절에 요한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어째서입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 동제국은 모리나 왕녀,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마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의 말이 모두 옳을지도 몰랐다. 동제국보다는 그를 따라가는 것이 비교적 안전할 테니까.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동제국에 남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일지도 몰랐다. 만약 이전이었다면 그의 제안을 승낙했을지도.
‘하지만 난 이미 황태자의 곁에 남겠다고 선택했어.’
그의 달콤한 제안을 듣는 순간 떠오른 얼굴. 그건 자신을 바라보는 라엘의 얼굴이었다. 이제 그녀는 정말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전 폐하를 신뢰하지 않아요. 만약 이 동제국을 떠나게 된다 해도, 그건 제 스스로의 걸음으로 인한 것이지 폐하를 따라 떠나는 것은 아닐 거예요.”
“……!”
확고한 그녀의 목소리에 요한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왕녀께서는 조국인 클로얀 왕국의 재건을 바라지 않으십니까?”
“그건 제가 원해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클로얀 왕국의 진정한 주인인 백성들이 결정할 문제예요.”
마리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폐하의 뜻에 따르면 클로얀 왕국은 진정한 클로얀 왕국이 아닌, 오로지 서제국을 위한 클로얀 왕국이 되겠지요. 제 말이 틀렸나요?”
정확히 핵심을 꿰뚫는 이야기에 요한은 입을 다물었다.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며 살이 베일 듯한 날카로운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마리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고, 요한도 가만히 그녀를 주시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요한은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알겠습니다. 역시 보통이 아니십니다. 쉽지 않군요.”
“…….”
“하지만 어쩌죠? 어차피 칼자루는 제가 쥐고 있는데? 제가 왕녀의 정체를 흘리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예상하고 있으시죠?”
그의 말이 옳았다. 그가 이야기를 흘리는 순간, 그녀는 당장 옥에 갇힐 것이고, 최악의 경우 죽임을 당하리라.
“제 정체를 흘리면 저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겠어요.”
요한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마주 제 정체를 흘리겠다는 것이지요? 뭐, 그러십시오. 어차피 정체가 드러나도 저는 기껏해야 추방 정도로 끝나겠지만, 왕녀의 입장은 다를 텐데요?”
“…….”
마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분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황태자가 서제국과 전쟁을 원하지 않는 한 요한을 직접 건드릴 수는 없다. 그가 동제국에 중대한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고 말이다. 요한은 예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왕녀께서 제 제안을 수락해 주셨으면 좋았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요.”
그의 말에 마리의 낯빛이 변했다.
“절 강제로 서제국으로 끌고 가겠다는 것인가요?”
“뭐, 그것도 하나의 선택 사항이지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요한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건 일단 미루어 두죠. 강제로 데려간다고 해도 당신의 모든 것을 가지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까요.”
마리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바라보았다. 요한은 빙글 웃더니 손가락을 들었다.
“왕녀께서는 거부하지만 전 당신을 어떻게든 데려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엇을 말이죠?”
“저와 게임을 하나 하는 것입니다.”
“게임이요?”
난데없는 게임 이야기에 마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에서 진행 중인 카드 게임을 말하는 건가요?”
“고작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론 어느 정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제가 제안하는 게임은 이 제국 수도를 놓고 벌이는 게임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제국 수도를 놓고 벌이는 게임이라니? 요한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이건 왕녀에게만 말하는 비밀인데, 전 사실 예언의 이능이 있습니다.”
“…….”
“아, 그렇게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진 마십시오. 저 생각보다 소심해서 상처 입으니까. 어쨌든 그 예언의 능력으로 보았을 때, 이 제국의 수도에는 곧 여러 재앙이 올 것입니다.”
마리의 안색이 변했다. 수도에 재앙들이 오고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원래 예언이란 것이 그렇지 않습니까? 두루뭉술. 그저 재앙이 온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마리는 그의 말이 거짓임을 눈치챘다.
‘예언이 아니야. 저 서제국의 황제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해!’
요하네프 3세는 서제국을 평정할 때부터 음흉한 계략가로 유명했다. 분명 동제국에 대해서도 간악한 계략을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나에게 자신의 음모를 암시해 주는 거지?’
그녀가 의아해할 때, 그가 자신의 뜻을 밝혔다.
“저는 궁금합니다. 신의 가호를 받았다는 성인(聖人) 힐데가르트의 재림이라는 당신이 그 재앙들을 맞아 어떤 능력을 보여 줄지.”
“……!”
“만약 당신이 그 재앙들을 아무런 문제 없이 해결해 낸다면, 신의 뜻으로 생각해 당신을 순순히 포기하고 물러나겠습니다. 당신의 정체도 영원히 함구하도록 하죠. 이건 서제국의 황제인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할 테니 믿어도 됩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그 재앙들을 해결해 내지 못한다면!”
요하네프 3세는 광기가 흐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는 당신이 저를 따라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제가 제안하는 게임이?”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무슨…….”
그녀로서는 따를 이유가 없는 게임이다. 왜 그녀가 음모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를 따라가야 하는가? 하지만 그때 요한이 웃으며 협박했다.
“물론 알고 계시겠죠? 당신에게 선택 권한은 없다는 것을.”
“……!”
요한은 달래듯이 말했다.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생각하면 전 당신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만약 당신이 수도에 올 재앙들을 말끔히 해결해 낸다면, 전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마리는 주먹을 움켜쥐며 그를 바라보았다. 더없이 부당한 게임이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그녀에게는 선택 권한이 없었다.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왜? 어째서 제게 이런 일을 하는 거죠?”
요한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을 진정으로 가지고 싶어서라고.”
그러며 그는 말을 이었다.
“이런 거창한 내기라도 해야, 당신이 조금이라도 납득하고 절 따라오지 않겠습니까?”
* * *
그렇게 마리와 카탈락 백작, 아니, 모리나와 요하네프 3세의 만남이 끝났다. 그녀가 저택을 떠난 후, 한 남자가 은밀한 기척을 드러내며 나타났다. 집사로 위장한 서제국의 정보부 부부장 로이스였다.
“그냥 지금 바로 납치해 버리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말만 정보부지, 정보 조작, 은폐, 공작 등의 음험한 일을 주로 하던 그는 태연히 물었다.
“괜히 놔주었다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흘릴까 걱정입니다.”
“그렇지는 못 할 거다. 내 정체를 흘렸다가는 바로 본인의 정체가 들통날 테니.”
“그래도…… 왜 굳이 그런 내기를?”
로이스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방금 요한이 모리나에게 말한 내기의 내용은 사실 극비였다. 음모가 성사될 때까지 어디에도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
요한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딱딱한 안색의 모리나가 막 마차에 오르고 있었다.
“왜라…….”
요한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서는 아까 전의 장난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말하지 않았는가. 그녀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내기에 졌다는 억지 핑계라도 만들어야 그녀가 조금이라도 납득하겠지. 단지 그런 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