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그렇게 여러 일이 있었던 ‘마리의 생일’이 지나갔다. 마리와 황태자는 평소의 일과로 돌아왔다. 황태자는 늘 그렇듯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국정을 보았다. 하지만 마리는 그러지 못했다. 굳은 얼굴로 계속해서 빈 허공을 응시하는 것이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마리?”
“…….”
“마리?”
“아! 전하, 죄송합니다.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요?”
마리는 화들짝 고개를 숙였다.
“가서 쉬라고.”
“네?”
마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태자가 염려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아니야. 내가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니 그만 가서 쉬어. 참고로 명령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니 어쩔 수 없어 마리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그녀가 물러가자 황태자가 옆의 알몬드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무얼 말입니까?”
“마리 말이야. 어제 내가 준비한 게 별로였던 건가?”
황태자답지 않게 소심한 물음이었다. 알몬드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어제 무리해 컨디션이 안 좋은 거겠죠.”
그 대답에 황태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리의 얼굴은 몸이 안 좋은 안색이 아니었다. 마음이 심란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심란해할 이유는 어제의 일밖에 없었다. 그때, 알몬드가 황태자의 염려를 눈치챈 듯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힐데른 예작은 머지않아 전하께 마음을 열 것이 분명합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남자의 직감입니다.”
“…….”
이보다 더 신뢰성이 없을 수 없는 근거였다.
“……일이나 하지.”
황태자는 한숨을 내쉬고 서류를 펼쳤다. 집중이 되지는 않았다. 아까 본 그녀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그녀의 어두운 표정이 자신 때문이라 생각하자, 라엘은 마음이 좋지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계속해서 밀어내는 것이 솔직히 조금은 아팠다.
‘날 밀어내는 게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황태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상관없어.’
그는 이미 그녀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그녀 때문에 조금 아프더라도 괜찮았다.
한편 마리는 자신의 숙소로 들어와 침대 한편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는 안 돼. 더는 그를 기만할 수 없어.’
그녀가 심란한 이유. 그건 황태자의 짐작대로 어제의 생일 축하 때문이었다. 물론 그의 준비가 실망스러워서는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 마음이 흔들렸기에 심란한 것이다. 마리는 그가 선물한 목걸이를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그래, 이건 기만이야.’
모리나 왕녀. 클로얀 왕가의 마지막 핏줄. 그에게 잠재적인 위협 존재인 적. 그게 바로 자신이었다. 그 사실을 숨긴 채 자신에게 진심인 그를 대하는 것은 기만이나 다름없었다.
‘더는 황태자의 마음을 모른 척할 수는 없어.’
그래, 이제는 더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고맙다. 이렇게 태어나 주어서. 나와 만나 주어서.”
어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아팠다.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리, 너는 이미 알고 있잖아. 네 앞에 놓인 선택은 단 하나뿐이란 것을.’
정체를 드러낼 수는 없다. 그러면 남은 길은 단 하나였다. 바로 그의 앞에서 사라지는 것. 자신과 모두를 위한 길이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불가능하지 않아.’
지금껏 그녀가 계속 고민하면서도 그 선택을 실행하지 않은 것은 여인 혼자의 몸으로 수도를 벗어나 탈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일단 허가 없이 황궁을 벗어나는 것부터 문제였고, 어찌어찌 경비대의 눈을 피해 수도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그다음이 더 문제였다. 도시와 도시 사이의 들짐승, 강도들을 비롯해 목숨을 위협하는 것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대륙에서 치안이 가장 좋은 편인 제국도 그러할진대 제국 밖으로 나가면 더욱 위험했다. 그 모든 위험을 뚫고 새로운 곳에 정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 실행할 수가 없었다.
‘육로로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바다를 통하면 달라. 난 지금 황태자의 보좌관 신분을 가지고 있어서 혼자 항구에 갈 수 있으니까. 어떻게든 몰래 배를 타면 안전히 도망갈 수 있어.’
그녀는 현재 황태자의 보좌관 신분으로 내무대신을 도와 아편 밀매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종종 혼자 항구에 갔고, 몰래 배를 타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배를 타면 아무런 위협 없이 제국을 벗어날 수 있어. 제국만큼이나 치안이 안전한 이탈리아의 자유도시로 가면 정착할 수 있을 거야.’
현 대륙에서 가장 치안이 안정된 곳은 황태자가 통치하는 동제국과 이탈리아의 자유도시들이었다. 이탈리아로 향하는 배를 타면 아무런 문제 없이 제국을 탈출할 수 있었다.
‘어려울 것도 없어. 아무도 모르게 항구에 가서 탈 배를 구하기만 하면 돼.’
마리는 길고 긴 고민의 결론을 내렸다.
“그래, 떠나자. 아무도 없는 곳으로. 사실 진작 이렇게 해야 했어. 이게 나와 모두를 위해 가장 좋은 길이야.”
그런데 왜일까? 긴 고민의 결론을 내렸으니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텅 빈 것 같았다. 가슴이 아리고 아팠다.
“조금만 자자.”
마리는 침대 위에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흑. 흐윽.”
급히 베개로 닦았지만 한 방울 한 방울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은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떠나자고 결론을 내리니 이곳에서 만났던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친구들과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사람들. 그리고 자신에게 과분한 마음을 준, 그녀에게도 너무나 소중한 키에르한. 마지막으로 황태자 라엘.
“고맙다. 이렇게 태어나 주어서. 나와 만나 주어서.”
어제 라엘이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녀는 더는 생각을 이을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계속해서 흘렀다.
* * *
그 뒤 마리는 조용히 떠날 계획을 세웠다. 생각대로 어려울 것은 없었다. 마약 밀매 조사차 항구에 가 이탈리아 소속의 배를 확인했고, 이탈리아 반도로 돌아갈 때 승선하기로 선장과 은밀히 약속했다. 황태자와 키에르한, 주변 사람에게는 당연히 아무런 티도 내지 않았다. 최대한 평소와 다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래, 이렇게 떠나는 거야.’
마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음이 욱신거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금방 괜찮아질 거라 생각한 것과 다르게 계속 아팠다. 하지만 균열을 모래로 덮듯 마리는 자신의 마음을 억눌렀다.
‘이게 모두를 위해 가장 옳은 선택이야.’
그녀는 반복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출항 날이 다가왔다. 배는 수도 근처 유프테강 하류에서 늦은 밤에 떠날 테니 오늘만 지나면 모두 끝이었다.
“마리.”
“네, 전하?”
“요즘 무슨 근심이라도 있는 건가? 계속 얼굴이 좋지 않군.”
그 말에 마리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는데, 역시 황태자의 눈은 피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하.”
“흠. 너무 과로해서 그런 건가? 조금 쉬는 게 좋을 것 같군. 대충 중요한 일은 끝났으니, 가서 푹 쉬도록.”
평소와 똑같은 염려. 저 걱정도 이제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마리는 괜히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전하, 한 가지만 청하여도 되겠습니까?”
“그대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황태자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녁, 제가 식사를 대접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황태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갑자기 왜 그러는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마리는 이유를 얼버무렸다.
“특별한 이유는 아닙니다. 그냥 여러 가지로 감사해서…….”
황태자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싫다.”
“네?”
뜻밖의 거절이었다. 그가 거절할 줄 몰랐던 마리는 당황했다. 라엘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피로해 보이는데 무슨 요리냐. 차라리 내가 주방장에 일러 그대의 몸을 보할 음식을 해놓으라 이르겠다.”
“아니, 그냥 오늘은 제가…….”
너무나 황태자다운 답변이었다. 그래도 마지막 날이니 음식이라도 대접하고 싶었던 마리는 떠듬떠듬 말했다.
“마리.”
라엘이 나직이 말했다.
“이리로 가까이 와 봐라.”
“…….”
“어서.”
마리는 머뭇거리다가 조금, 딱 한 걸음 나아갔다.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더. 바로 앞으로.”
뭔가 맹수 앞으로 나아가는 초식동물의 느낌이 들어 그녀는 주춤주춤 그의 앞에 섰다.
“마리.”
한숨을 내쉰 그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머리에 와 닿는 그의 손길에 마리는 흠칫 놀랐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그가 이렇게 말했던 탓이다.
“나는 네가 해주는 요리보다 너의 밝은 얼굴을 원한다. 그렇게 피로하고 어두운 얼굴이면서 무슨 요리란 말이냐. 그냥 오늘 푹 쉬고, 내일은 밝은 얼굴로 나와 주었으면 좋겠구나.”
그의 평소 차가운 성격과 전혀 다른 따뜻한 목소리. 오로지 그녀에게만 보여 주는 자상함이었다. 마리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부드럽다고 느꼈다. 왠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면 가서 쉬도록.”
“……네, 전하.”
결국 마리는 황태자에게 마지막 식사를 대접하려는 계획을 실패하고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마리가 나간 후, 황태자는 손가락으로 철가면을 두드렸다.
“뭔가 이상하군.”
“무엇이 말입니까?”
알몬드가 물었다.
“마리 말이야. 뭔가 이상하지 않나?”
“조금 그렇긴 하군요.”
“왜 저러는 거지?”
“글쎄요? 별다른 이유 없지 않겠습니까.”
별 고민 없는 알몬드의 답에 황태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섬세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알몬드에게 무얼 바라겠는가.
‘분명 무슨 일이 있어. 뭐지?’
황태자는 심각한 안색으로 고민하다 말했다.
“알몬드. 오늘 밤 외유를 나갔다 와야겠다.”
“외유라면 암행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로?”
알몬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으나, 황태자는 특별한 답을 해주지 않았다.
* * *
드디어 대망의 시간이 다가왔다. 황궁의 불빛이 꺼진 늦은 밤. 마리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
미리 준비를 마친 마리는 옷을 갈아입고 숙소를 나오려 했다. 그 순간, 라엘이 생일 선물로 준 목걸이가 눈에 띄었다. 놓고 갈까 고민하다 손을 뻗어 챙겼다.
“마지막이구나.”
마리는 황태자가 머무는 사자궁을 보며 복잡한 얼굴을 하였다. 하지만 곧 굳은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황궁의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걷다가 키에르한이 머무는 토른 2세의 자운궁이 나타나자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마지막으로 키엘 님을 잠시 뵐까.’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갑작스럽게 이 시간에 보자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뻔했다.
‘나중에 편지라도 하자.’
시간이 정말 많이 지난 후에 그를 만나기 위해 그의 영지로 찾아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황태자의 사자궁도, 키에르한이 있는 자운궁도 지나친 마리는 황궁의 성문에 도착했다.
“힐데른 예작님께서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입구를 지키는 근위대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리는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잠시 항구 쪽에 다녀오려고 합니다.”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황태자의 신임을 받는 마리인지라, 근위대는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늦었으니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네, 수고하세요.”
그렇게 마리는 탈출의 1차 관문인 황궁을 별다른 문제 없이 벗어났다.
‘이제 시간에 맞춰 배에 승선만 하면 돼.’
속으로 중얼거린 마리는 미리 예약해 둔 마차를 타고 항구로 향했다.
* * *
유프테강 하류는 수도 근교에 위치한 항구였다.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모든 물류는 이 항구를 거치게 되어 있다. 마리가 타기로 한 배는 그 항구에서도 멀찍이 떨어진 외곽에 정박해 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승선하기 위해 최대한 멀리 떨어진 배를 알아본 것이다.
“이런 곳에서도 배가 뜨네.”
마리는 썰렁한 주위를 보며 중얼거렸다. 많은 배가 놓인 중앙 선착장과 다르게 이곳에는 배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주변의 드문드문 있는 건물도 모두 낡고 비어 있었다.
“출항까지는 1시간 정도 남아 있습니다. 내부를 정리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마리가 타기로 한 배의 선장이 말했다. 그녀는 여객선을 타기로 한 게 아니었다. 여객선을 예약하면 중도에 발각될 위험이 컸기 때문에 화물선의 짐칸에 몰래 타기로 했다.
“그런데 제국의 귀족께서 왜 이탈리아 반도에 가시는지요? 그것도 이런 화물선을 타고……?”
배의 선장이 조심히 물었으나, 마리는 딱딱하게 답했다.
“그건 묻지 않기로 약조하지 않았던가요.”
“읍. 그렇지요.”
“추후에도 제가 이 배에 탔다는 사실은 비밀로 지켜 주세요.”
“알겠습니다.”
선장은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그야 충분한 돈을 받았으니, 저 소녀가 왜 홀몸으로 험한 항해를 하려는 것인지 상관할 필요도 없었다.
“잠시 바람이라도 쐬고 오시지요? 출항하면 땅을 밟을 때까지 한참 걸릴 테니.”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정말로 제국을 떠난다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던 차였다. 조금 걷고 싶었다.
‘이제 정말로 떠나는구나.’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기뻐야 하는데. 제국을 떠나면 더는 목숨의 위협을 받을 일도 없고.’
클로얀 왕국의 멸망 후 지금껏 황궁에 숨어 살며 정체를 들킬까 봐 얼마나 가슴을 졸여 왔던가? 까마득한 지중해 너머에 위치한 이탈리아 반도는 제국과 전혀 연관이 없었다. 따라서 그녀가 목숨을 위협받을 일도 없었다.
‘정착도 어렵지 않겠지. 나에겐 여러 능력이 있으니까.’
그녀가 얻은 수많은 능력 중 하나만 사용해도 충분히 풍족하게 먹고 살 수 있었다. 즉, 저 배를 타는 순간 그녀의 제2의 인생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인생은 평안하고 걱정 없는 삶이 될 것이다.
‘그러니 기뻐해야 하는데.’
마리는 힘없는 표정을 지었다.
‘왜 하나도 안 기쁠까.’
자꾸만 이전 일들이 떠올랐다. 죄수를 간병하고 처음 능력을 얻었던 일. 여러 사람을 만난 일. 황태자와 키에르한과 처음 마주한 일. 키에르한과 가까워진 일. 지난 과오로 괴로워하는 황태자에게 마음이 흔들렸던 일 등등.
수없이 많은 일이 그녀의 머릿속에 한번에 떠올랐다. 너무 한꺼번에 많은 일이 떠올라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하기만 했다.
‘걷자.’
마리는 고개를 강하게 젓고 발걸음을 옮겼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아무런 생각 없이 걸어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쌀쌀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걸었다. 아무것도 없는 외진 곳이라 굉장히 조용했다.
그런데 한참을 걸었을 때였다. 이제 슬슬 돌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녀는 이상한 광경을 발견했다.
‘어? 저게 뭐지? 여기에 웬 배가?’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참이나 걸어온 탓에 그녀는 선착장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런데 웬 배가 강어귀에 정박해 있었던 것이다.
‘빈 배인가? 아닌데?’
사람들이 분주히 배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밑에 대기하고 있는 마차들로 무언가를 채운 포대를 부지런히 옮기고 있었다.
‘밀인가? 그런데 이 시간에 왜 하역을 하지?’
뭔가 이상했다. 더구나 포대를 나르는 이들도 일반적인 항구의 일꾼들과 복색이 달랐다. 마리의 얼굴이 굳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그녀의 등줄기로 흘렀다.
‘설마?’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추측이 떠올랐다.
‘마약 밀수?’
그녀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침을 꿀꺽 삼켰다. 마약 밀수. 최근 그녀와 황태자가 몰두하고 있던 사건으로, 마리는 밀수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숱하게 항구에 왔었다.
‘아니야. 아직은 확실하지 않아.’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그녀는 현재 자신의 처지도 잊고 긴장한 표정으로 조심히 배 쪽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폐건물들이 있어 몸을 숨길 수 있었고 그녀는 곧 하역 현장 근처에 도착했다. 그러자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조심해! 비싼 거라고. 한 톨이라도 흘리면 안 돼.”
“저거 한 포대에 얼마나 받으려나.”
“최상품 아편이니 어마어마하지 않을까? 귀족들 상대로 은밀히 거래할 예정이라고 하던데?”
“아직 고객들이 확정된 것은 아니고?”
“오늘 온 물건들로 접근해야지. 은밀히 조금씩 맛을 보여 주면, 누구라도 못 견디고 달려들걸?”
어마어마한 내용의 대화들. 마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정말 아편이야! 마약 밀수가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었어!’
완전히 우연에 의한 발견이었다. 그녀가 제국을 탈출하려 이 근처로 온 덕분에 밀수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은 격.
‘도대체 저게 몇 포대지?’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힐끗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이 정도 양이 퍼지면…… 제국에 큰 혼란이 생길 거야.’
마리는 일단 자리를 벗어났다. 혼자 몸으로 함부로 움직여 봤자 화만 당할 것이다.
‘일단 경비대를 불러와야 해. 저들이 떠나기 전 경비대를 불러오면 마약이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건 물론, 마약 밀수 조직도 일망타진할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던 마리는 순간 멈칫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마리. 넌 이제 배를 타고 떠나야 하잖아?’
워낙 놀랄 만한 사안이어서 잊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제국을 떠날 몸이었다.
‘경비대에 알려 주기만 할까?’
하지만 곧 출항 시간이라 멀리 떨어진 경비대까지 다녀올 수가 없었다. 경비대에 밀수 사실을 알리러 가면 그사이 배는 떠나 버릴 것이고, 그녀의 탈출 계획도 실패로 끝날 것이다.
‘아니, 왜 하필 오늘 이런 일이?’
그녀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마약 밀수 현장을 잡으려 할 때는 쥐꼬리도 보이지 않다가 이런 상황에서 우연히 발견되다니. 마치 누군가 그녀의 인생에 농간이라도 부리는 것 같은 상황 아닌가?
‘안 돼. 난 떠나야 해.’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최대한 마음을 독하게 먹으려고 노력했다.
‘정신 차려, 마리. 이제 제국의 일은 너와 상관없어. 마약 문제는 황태자 전하가 알아서 잘 해결할 거야. 넌 떠나야 해.’
속으로 애써 되뇌었지만, 그녀의 눈동자가 끝없이 흔들렸다. 마리의 머릿속에 저 아편이 퍼져 나가 고통에 빠질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고뇌에 빠질 황태자의 모습도 떠올랐다. 분명 또 그는 침식을 잊고 사건에 매달릴 것이다. 몸을 혹사시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기까지 생각한 마리는 울상을 지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외면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마리는 하늘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하필 떠나려고 할 때 이런 시련을 주다니. 하늘이 밉고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방향은 그녀가 탈 배가 정박해 있는 곳이 아니라, 경비대가 위치한 곳이었다. 한참이나 달린 끝에 그녀는 중심 선착장 근처의 경비대 지구에 도착했다.
“아니, 힐데른 예작님?”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그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최근 마약 사건으로 여러 번 방문한 적이 있어 기사는 마리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이 시간에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하아. 하아. 빨리 경비대의 병사들을 모아주세요. 급해요.”
전력을 다해 뛰어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마리가 말했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기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마약 밀수 현장을 포착했어요! 밀수업자들을 체포해야 해요!”
“……!”
기사의 안색이 변했다. 그도 최근 수도를 들썩이게 하고 있는 마약 밀수 사건을 잘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사람들을 모으겠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늦은 밤이라 모을 수 있는 경비병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 애초에 이곳은 전선도 아니었고, 선착장의 치안을 유지하려는 병력만 있었다. 따라서 선착장이 쉬는 밤에는 소수의 인원만 경비를 섰다.
“이게 전부인가요?”
“네.”
마리는 모인 인원들을 보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대략 20명 남짓한 경비병들.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급한 대로 모은 것치고 적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턱없이 모자랐다.
‘범인은 50명도 넘어 보이던데. 분명 죽기 살기로 대항할 텐데 이 정도 숫자면 모자라. 역으로 당할지도 몰라.’
마리는 물었다.
“혹시 더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없나요?”
“있긴 있습니다만…….”
“어디죠?”
기사는 어려울 거라는 목소리로 답했다.
“인근에 위치한 제국 함대입니다. 그곳에 천 명이 넘는 병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임의로 움직일 수가…….”
마리는 기사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치안과 사건, 사고를 담당하는 경비병과 다르게 함대는 제국의 정규군이었다. 따라서 감히 그녀가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이 아니었다. 함대의 병사들을 움직이려면 황태자에게 직접 위임받은 권한이 필요했다.
‘어쩌지? 너무 늦으면 범인들이 다 떠날 텐데.’
확실한 방법은 황궁으로 돌아가 황태자에게 보고 후 병력을 움직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 범인들은 현장에서 다 사라진 뒤일 것이고 사건은 다시 미궁에 빠질 것이다.
결국, 마리는 무리한 방법을 시도해 보기로 결심했다.
“제가 함대의 책임자분과 이야기를 해보겠어요.”
“예? 하지만…….”
기사는 놀라 마리를 바라보았다. 함대의 책임자면 워드 장군을 뜻한다. 아무리 마리가 황태자의 총애를 받는 보좌관이라지만, 완고한 장군이 그녀의 말을 신경이나 쓸까? 역정이나 안 내면 다행이다. 그러나 마리는 굳게 말했다.
“지금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그대로 내버려 두면 범인들은 다 흩어져 사라질 거예요. 사건은 난항에 빠질 거고, 많은 피해자가 나올 거예요.”
“역정만 들을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요. 범인들을 잡을 수만 있다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어요.”
워낙 중대한 사건이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범인들을 일망타진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리는 왠지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오늘 제국을 탈출하려 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이런 상황까지 되고 보니 확실했다. 그녀의 인생은 꼬일 대로 꼬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왠지 앞으로도 계속해서 꼬이기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사는 그녀의 심란한 속도 모르고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온 힐데른! 알겠습니다! 바로 채비하겠습니다!”
그때였다.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그들 사이로 떨어졌다.
“그럴 필요 없다.”
“……!”
마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지금 이 순간 도저히 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전하?”
고개를 돌리니 정말로 황태자가 저벅저벅 경비대로 걸어오고 있었다.
‘왜 황태자가 이곳에?’
마리는 당황한 얼굴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이지? 더구나 분위기도 이상했다. 황태자는 가면을 쓰지 않은 채 맨얼굴이었는데, 그녀를 바라보는 눈이 평소와 전혀 달랐다. 화가 난 듯 들끓어 오르는 감정을 꾹 억누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왜?’
특별히 그에게 잘못한 것은 없는데? 순간 마리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그가 저렇게 분노할 만한 이유.
‘설마? 내가 도망치려 한 것을?’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들키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황태자가 그녀에게 저렇게 화가 날 이유가 따로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황태자가 눈치챈 것이 분명했다.
‘어,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어쩌지?’
마리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마리.”
“……네, 전하.”
황태자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마리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황태자에게 뭐라 이야기해야 할지 막막했다. 라엘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일단 일을 먼저 해결하고 이야기하지.”
마리는 그 말에 형 집행을 앞둔 죄수의 심정이 되었다.
‘어, 어떻게 하지.’
황태자는 경비대의 기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약 밀수 현장을 포착했다고?”
“네, 전하! 모두 힐데른 예작의 공입니다! 힐데른 예작 덕분에 제국을 어지럽히는 범인을 소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사는 마리의 공을 잔뜩 칭찬했다. 황태자는 별다른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평소라면 분명 짧게라도 칭찬의 말을 남겼을 텐데.
“시간이 촉박하니 바로 출발하지.”
황태자는 말을 몰아 인근 함대를 들러 병력을 차출했다. 그리고 곧바로 밀수 현장을 급습했다.
“크억! 제국군이?!”
“죽이진 마라! 취조해야 하니 모두 구금하라!”
범인들은 혼비백산한 표정을 지었다. 잡히면 중벌을 피할 수 없음을 알기에 무기를 빼 들고 저항했지만 아무런 소용없었다. 제국군의 검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특히 황태자의 활약은 눈이 부셨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일말의 자비도 없이 검을 휘두르는데, 범인들은 그의 냉막한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을 저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마약 밀수범들은 모조리 체포되었고, 범인을 잡은 병사들은 크게 함성을 질렀다.
“황태자 전하 만세!”
“온 힐데른 만세!”
이번 일의 일등 공신은 다름 아닌 마리였다. 그녀가 마약 밀수 현장을 포착했기 때문에 이런 일망타진이 가능했던 것이다.
“역시 온 힐데른입니다. 힐데른께서 지금껏 왜 그런 명성을 얻었는지 이번에 똑똑히 알게 되었습니다.”
경비대의 기사가 다시 황태자 앞에서 마리를 칭찬하였다. 기사뿐이 아니었다. 함대에서 온 제국군 장교도 그녀의 공을 치켜세웠다.
“우리는 그저 손만 거들었을 뿐, 모든 공은 힐데른 예작의 것이군요. 어떻게 이렇게 마약 밀수 현장을 정확히 포착한 것인지. 분명 몸을 아끼지 않고 제국을 위해 노력한 덕이겠지요. 대단합니다.”
그런 칭찬을 들으며 마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이번 일은 황태자에게서 도망치려다 소 뒷걸음질 치듯 발견한 것이고, 무엇보다 아까부터 아무런 말도 않는 황태자의 눈치가 보였다. 이윽고 뒤처리를 어느 정도 마친 후, 라엘이 입을 열었다.
“마리.”
“……!”
낮은 음성에 마리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황태자는 짧게 말했다.
“나를 따라오도록. 너에게 할 말이 있다.”
황태자가 그녀를 데려간 곳은 근처 인적 없는 공터였다. 자정이 넘은 늦은 밤, 살이 에일 듯한 매서운 강바람이 그녀의 뺨을 훑고 지나갔으나 황태자와 마주해 뻣뻣이 굳은 마리는 추위를 느낄 수도 없었다. 가만히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황태자의 눈빛을 보니 그녀는 머릿속이 하얗게 마비되는 것 같았다.
‘황태자가 저렇게 화가 나다니.’
아무런 말도 안 하고 있지만 그녀는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황태자는 그녀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푸른 눈동자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잔뜩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가 저렇게나 화를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그녀에게 화를 내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당연히 화나겠지. 실망스럽고.’
그녀는 속으로 씁쓸히 생각했다. 지금껏 그가 자신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던가. 그런데 도망가려 하다니. 자신의 숨겨진 사정을 모르는 그로서는 당연히 화가 나고 실망스러우리라.
“마리. 내가 왜 너에게 화를 내는 것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
“…….”
마리는 뭐라고 변명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모리나 왕녀라서 도망쳤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으니까.
‘아프구나.’
마리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자신에게 실망했다고 생각하자 이유 없이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이렇게밖에 이야기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
황태자는 잠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거친 발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가 매서운 기세로 자신에게 다가오자 마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분노하고 실망한 그가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감수해야만 할 일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온 그는 생각지도 못 한 행동을 하였다. 와락 하고 으스러지듯 그녀를 껴안은 것이다!
“저, 전하?”
마리는 그에게 안겨 당황한 소리를 내었다. 갑자기 왜? 그때, 라엘이 입을 열었다. 여전히 분노가 찬 음성이었다.
“누가 그러라 했지?”
“……?”
“누가 그렇게 혼자 위험하게 나서라고 했느냐고!”
라엘은 그녀를 안은 팔에 더욱더 강하게 힘을 주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절대 놔주지 않겠다는 듯이.
“혹시나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무모하게 혼자 나섰다는 말이냐.”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뭔가 황태자가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태자가 화난 것이 설마 내가 도망치려 한 것을 들켜서가 아니라 마약 조직을 혼자 소탕하려 했다 착각해서?’
마리는 그에게 안긴 채로 조심히 물었다.
“전하, 혹시…… 화가 나신 것이 제가 마약 밀수 현장을 혼자 조사해서? 그냥 그런 이유로?”
마리가 묻는 순간이었다. 황태자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의 몸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그런 이유?”
“…….”
“무장한 밀수단 틈으로 혼자 갔다 왔으면서. 잘못 들키기라도 하면 목숨을 잃을 일이었는데, 그냥 그런 이유?”
마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특별히 큰 말실수도 아니었는데 황태자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하아.”
황태자는 자신의 감정이 너무 격해져 있다는 것을 의식한 듯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품에 안았다. 이번엔 거칠지 않고 부드러운 포옹이었다.
“화내서 미안하다. 하지만 마리, 너는 모를 거야. 네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안 순간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전하.”
“사실 난 그대를 도와주러 암행을 나왔었다. 그러다 그대가 위험도 가리지 않고 마약 조직단을 살피는 것을 보았을 때, 어찌나 가슴이 내려앉던지. 그러다 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다시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지 황태자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잊지 마라. 넌 내 어떤 것보다 소중해. 나 자신보다도. 네가 위험할 바에는 내가 죽는 것이 나아. 그러니 다시는 이런 위험한 일은 하지 말도록.”
왜일까. 귓가에서 들리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마리는 가슴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황태자의 걱정은 다 오해였다. 그녀가 이곳에 온 목적은 마약 밀수범을 무리해서 소탕하려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녀의 가슴은 왜 이렇게 흔들리는 건지.
“하, 하.”
마리의 입술 사이로 의미 모를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황태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왜 웃는 것이지?”
마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열었다가는 당장에라도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모르겠어. 정말로.’
자신은 그를 떠나야 한다. 그게 자신과 모두를 위한 길이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것에 안도감이 드는 걸까?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안정되는 걸까? 배를 타고 떠나기 전 가슴을 가득 채웠던 터질 듯한 답답함이 왜 지금은 느껴지지 않는 걸까?
‘모르겠어.’
마리의 눈에서 결국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마, 마리? 미안하다. 내가 너무 화내서…….”
황태자는 마리가 눈물을 흘리자 자신이 너무 화내서 그런 것인 줄 알고 당황했다. 그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사과했다.
“아무리 걱정되고 화가 나도 그렇게 화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미안하다. 그러니 울지 말고…….”
식은땀을 흘리는 황태자를 보며 마리는 깨달았다.
‘아아, 그렇구나.’
마리는 웃음을 지었다.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채 엉망인 미소였다.
“전하.”
황태자가 눈을 크게 뜨는 순간, 마리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말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마리는 눈을 감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떠나고 싶지 않아.’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은 모르겠다. 그런 마음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었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의 곁에 있으며 언제나 무리하는 그를 도와주고 싶었고, 피로해할 때 차라도 한잔 대접해 주고 싶었고, 가끔씩은 맛있는 식사를 하며 같이 대화도 나누고 싶었다.
‘그의 곁에 있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래서 그를 도와주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사실 모르겠다. 이게 옳은 선택인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떠나는 것이 옳았다. 떠나면 정체를 들켜 목숨을 잃을 위험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곁에 머물면 자신은 그에게 계속해서 흔들릴 것이다. 그와 자신, 모두가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그녀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싶었다.
‘안 그러면 내 마음이 죽어버릴 것 같으니까.’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도했다.
‘주여. 저와 전하를 축복해 주시옵소서. 제발.’
제발. 제발. 저를 가련히 여겨 주시사. 어떤 결말이어도 좋으니, 그와 자신의 이야기가 불행하지 않은 결말로 마무리될 수 있기를. 그렇게 그녀는 간절히 기도했다.
* * *
그날의 일은 곧 수도 전체로 뻗어 나갔다. 뒤 사정이야 어쨌든 마리가 또 어마어마한 공을 세운 것이다.
“들었어요? 힐데른 예작께서 마약 밀수 범인들을 일망타진하셨다고 하던데요?”
“정말요? 어떻게 또 그런 공을?”
“은밀히 범인들을 추적한 끝에 밀수 현장을 포착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현행범으로 모조리 잡아들였다고 해요.”
“정말 대단하네요. 역시 온 힐데른이에요.”
하마터면 굉장히 골머리를 앓게 될 뻔한 사건이었는데, 미연에 일망타진한 것이다. 대단한 공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들은 또다시 대단한 일을 해낸 마리에게 감탄의 목소리를 내었다.
‘……사실이 아닌데.’
물론 진실을 알고 있는 마리 본인은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혀 칭찬받을 만한 일이 아니었는데, 민망해 죽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진실을 말할 수도 없으니 당분간은 부끄럽게 지내야 할 것 같았다.
하여튼 다시 한번 수도 전체가 마리가 세운 공으로 시끌벅적할 때,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모리나 왕녀가 밀수 현장을 덮쳤다고?”
바로 이 음모의 배후자였던 카탈락 백작, 아니, 요하네프 3세였다.
“네, 폐하.”
서제국에서 그를 따라온 집사, 정확히는 서제국 정보부 소속의 부부장 로이스가 답했다.
“어떻게 그곳에서 아편을 하역하는지 알았던 거지? 그것도 정확한 시간까지 알고. 정보가 중간에 새었나?”
“그런 징후는 없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요하네프 3세는 혀를 찼다. 사실 아편 건은 그가 그렇게 비중을 둔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동제국에게 혼란을 주며 황태자의 시선을 끌어주길 바랐는데, 이렇게 계획을 시작도 하기 전에 일망타진당하다니?
‘큰 타격은 아니지만 아쉽게 됐군. 그나저나 이번 일도 그녀가 해낸 거라고? 역시 모리나 왕녀답군.’
요한은 얼마 전 만났던 모리나 왕녀의 모습을 떠올리고 옅게 미소 지었다.
‘점점 더 마음을 자극하는군.’
역시나 죽이긴 아까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좋겠어.’
요한은 미소를 더욱 짙게 그리며 물었다.
“우리의 다른 사업은 잘 진행되고 있겠지?”
“네, 물론입니다. 수도의 여러 고위 귀족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 좋아. 오늘 만나 볼 새로운 고객이 누구라고?”
고객. 그들의 먹이를 뜻한다. 집사 로이스가 서류를 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슐레안 대공가의 아리엘 공녀입니다.”
* * *
마리는 공을 세운 대가로 큰 포상금을 받았다. 거절하려 했지만 황태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잘못은 감싸 주더라도 세운 공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 것이 그의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상금과 함께 벌도 내렸다.
“이건 내가 비공식적으로 내리는 벌이다.”
벌을 내리는 이유는 그녀가 조심하지 않고 함부로 무리했기 때문이다. 황태자는 그녀가 위험을 무릅쓴 것에 대해 아직도 화가 덜 풀려 있었다. 그래서 벌을 내렸는데, 벌의 내용은 이러했다.
“마리 폰 힐데른에게 일주일간 사자궁으로의 출근을 금하고, 앞으로 황궁을 벗어날 시 반드시 호위 기사를 동행해야 하는 벌을 내리겠다.”
마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벌을 받았다. 벌을 내린다길래 잔뜩 긴장했는데 이게 무슨 벌이란 말인가?
‘그냥 일주일간의 휴가랑 호위 기사를 붙준다는 거잖아.’
오히려 상이나 다름없는 내용. 얼떨떨한 마리의 표정을 보고 황태자가 말했다.
“벌이 부족한가 보군.”
“아, 아니…… 그게…….”
“그러면 벌을 추가해 주지.”
“네, 네?”
황태자가 피식 웃었다.
“일주일의 근신 기간 중 매일 저녁 나와 함께 식사를 할 것.”
마리는 얼굴이 뻘게졌다. 아니, 그러니까 이게 무슨 벌이란 말인가? 그런 그녀에게 황태자가 또 입을 열었다.
“그것도 부족한가? 그러면 또 추가로…….”
“추, 충분합니다!”
그렇게 그녀의 벌을 빙자한 휴가가 결정되었다. 근신이라지만 자택에 머물라는 이야기도 없고, 출근만 안 하면 되는 것이니 정말로 휴가나 다름없었다.
“……좋네.”
마리는 멍하니 침대에 누워 중얼거렸다. 항상 바쁘게만 살다가 오랜만에 여유를 맛보는 것 같았다.
‘이런 휴가는 내가 아니라 전하에게 필요한 것 같은데.’
마리는 도통 쉬지를 않는 황태자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매일 밤마다 그녀가 편안한 연주를 해준 덕분인지 불면은 많이 호전되었지만, 여전히 하루에 4시간도 안 자면서 일에 열중이었다. 부지런한 편에 속하는 그녀도 혀가 절로 내둘러질 정도의 업무량이었다.
‘조금은 어깨의 짐을 내려놓아도 괜찮을 텐데.’
마리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저녁에는 전하가 좋아하는 과자를 구워 가야겠구나.’
벌을 빙자한 휴가를 받은 그녀에게 딱 한 가지 정해진 스케줄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황태자의 저녁 식사였다.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마리는 간만에 과자를 굽기로 했다. 온종일 빈둥거리다가 마리는 저녁 시간에 맞춰 프랑스식 과자를 구워 갔다.
저녁 식사는 황태자가 따로 언질한 것인지 사자궁의 주방장이 한껏 솜씨를 부린 상태였다. 영양이 풍부하고 맛난 요리가 가득했다. 마리는 배부르게 식사를 마친 후, 자신이 준비한 과자를 꺼냈다.
“그건?”
황태자는 과자를 보며 크게 눈을 떴다. 마리는 왠지 민망한 마음이 들어 시선을 피했다.
“그, 그냥…… 시간이 남아서 준비해 보았습니다. 업무를 보면서 가볍게 드시라고…….”
“…….”
“부족한 솜씨여서 맛이 있을지는…….”
황태자가 계속 아무런 말이 없자 마리는 더욱 민망해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원치 않으시면 알몬드 자작님이나 오른 공작님께라도…….”
하지만 그녀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황태자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안 돼.”
라엘이 건들지 말라는 듯 과자 바구니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건 내 거다. 누구에게도 주지 않겠다.”
“…….”
방금 발언은 정말 황태자스럽지 않았다. 마리는 얼떨떨하게 말했다.
“다른 분들과 함께 드시라고 한 거라 혼자 드시기에는 많을 텐데.”
“뭐? 그놈들 것도 섞여 있다는 말인가?”
“아…… 네. 알몬드 자작님이랑 늘 오시는 오른 공작님과도 같이 드시라고…….”
황태자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철가면을 벗어 훤히 드러나 있는 그림 같은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놈들은 먹을 필요 없다. 모두 내가 먹겠다.”
“……네.”
누구의 뜻인데 거스르겠는가.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국보라도 다루듯 과자 바구니를 챙기던 황태자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물었다.
“혹시 키에르한, 그놈 것도 만든 것은 아니겠지?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만드는 김에 키엘의 것도 만들긴 했다.
“아…… 네, 조금.”
“조금?”
“……네, 아주 조금.”
황태자의 얼굴이 더욱 못마땅해져 마리는 다급히 ‘조금’을 강조했다.
사실은 많이 만들었지만 곧이곧대로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러면 그 과자도 전부 내 거다.”
“저, 전하?”
마리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지만 황태자는 흔들림 없이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키에르한, 그놈 따위에게 그대가 만든 과자는 과분하지. 다 나에게 주도록.”
“전하, 제가 조금 더 만들어 드릴 테니…….”
“안 돼. 명령이다.”
그가 굳건히 말하자 마리가 매달리며 말했다.
“전하, 그러지 마시고 전하께는 다시 더 해드릴 테니…….”
계속 마리가 키에르한에게 과자를 줄 뜻을 굽히지 않자 황태자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심술 나는군.’
사실 그녀가 누구에게 과자를 주든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준 것만 해도 크게 감사한 일이니까. 하지만 저렇게 키에르한을 굳이 챙기려는 모습을 보니 발끈 심술이 났다. 그냥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어졌다.
“마리. 이리로 와 봐라.”
“네, 어떤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요?”
“별것 아니다. 이리로 와 봐.”
마리는 화급히 고개를 저었다. 왠지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초식동물의 본능이었다.
“그냥 그쪽에서 말씀하셔도 잘 들리는데…….”
그녀가 오지 않자 황태자가 의자에서 일어나, 마리가 앉은 자리로 다가왔다. 마리는 등줄기에 흐르는 불안감에 뒷걸음질 쳤으나 의자에 앉은 채 어디로 가겠는가? 지척에 도착한 황태자가 허리를 숙이더니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마리.”
“…….”
“잘 들어라.”
귓불 바로 옆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지자 마리는 숨을 흡 하고 들이켰다. 아찔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진정한 아찔함은 시작도 안 했으니, 왜냐하면…….
“그대는 내 것이니, 그대가 만든 것도 전부 다 내 것이다.”
이렇게 말한 황태자가 지그시 그녀의 귓불을 깨문 것이다!
“……!”
귓불에서 전해지는 아찔함에 마리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마치 전기가 온몸으로 흐르는 듯했다.
“저, 전하.”
그는 금방 그녀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생생하게 남아 있는 그의 느낌에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황태자도 자신이 저지르고 조금 놀랐는지 헛기침하였다.
“어쨌든 그러니 난 네가 나만 바라봐 주었으면 좋겠구나.”
“……네.”
마리는 자신이 뭐라 대답하는지도 모르고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평화로운(?) 휴가 기간이 지나갔다. 마리는 낮에는 휴식을 취한 뒤, 저녁에는 황태자와 함께 식사를 했다. 그리고 종종 산책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휴가의 막바지 낮에 마리는 홀로 산책하다가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각하!”
“아, 마리 양.”
최근 도통 얼굴을 보기 힘들었던 은발의 조각 미남, 키에르한이었다.
“반갑습니다. 마약 조직 소탕 소식은 들었습니다. 이번에도 공을 세운 것 축하합니다. 대단합니다.”
“아…… 아니에요.”
마리는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각하께서는 안녕히 지내셨나요?”
마리는 그를 만나는 게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는 그가 종종 자신을 만나러 왔지만, 최근에는 그런 게 없었기 때문이다.
“네, 그냥 지냈습니다.”
키에르한은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 미소에 평소와 다르게 어둠이 담겨 있어서 마리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그간 무슨 일이 있었나?’
마리는 자신이 키에르한에게 무심했다는 것을 깨닫고 반성했다. 그가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 주는 만큼 자신도 그를 신경 쓰는 게 맞는 일인데.
“각하. 혹시 그간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요?”
“마리 양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키에르한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마리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마리는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각하…… 아니, 키엘 님. 전 힘들 때마다 저에게 큰 힘이 되어주신 키엘 님에게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만약 키엘 님께 힘든 일이 있으면 저도 키엘 님께 도움을 드리고 싶어요.”
“…….”
키에르한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절 생각해 주시는 마음만으로도 큰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 그녀가 알면 곤란한 내용 같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잘 해결되어야 할 텐데.’
마리는 염려가 섞인 얼굴로 생각했다. 키에르한은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마리 양. 그거 알고 있습니까?”
“네?”
“지금까지 저도 마리 양께 많이 감사하고 있다는 것을.”
마리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자신에게 고마워할 일이 뭐가 있는가. 자신이 그에게 감사하면 감사했지. 하지만 키에르한은 그녀에게 무엇에 감사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대신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리 양.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네, 말씀하세요.”
“오늘 하루만 저에게 시간을 내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녀는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건…….”
당연히 마다할 이유가 없는 부탁이지만 근신 기간이란 것이 걸렸다. 황태자가 그녀에게 딱히 제약을 두지는 않았지만 괜찮을까?
그때, 키에르한이 말했다.
“부탁합니다.”
“……!”
마리는 흠칫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에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던 탓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눈동자에서 따뜻함에 가려진 아픔을 읽을 수 있었다.
‘뭐지?’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껏 그와 오랫동안 만나 왔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마리는 왠지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그녀가 승낙하자 키에르한이 밝게 웃음을 지었다. 왠지 아련한 느낌이 드는 웃음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 * *
키에르한은 그녀를 궁 밖으로 이끌었다. 마리가 궁 밖으로 나가려 하자 성문에서 근위 기사가 제지했다.
“호위 기사를 대동하셔야 합니다, 온 힐데른.”
궁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호위를 대동할 것. 황태자가 내린 명령이었다. 마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할 때 키에르한이 근위 기사에게 말했다.
“호위는 내가 하겠다.”
“네? 하지만.”
“나보다 그녀를 안전하게 호위할 기사가 또 있는가?”
현직 황실친위대 단장의 이야기에 근위 기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제국 최강의 기사인 그가 지킨다면 확실히 아무도 그녀에게 손끝 하나 건들지 못하리라.
“가시죠, 마리 양.”
“네, 그런데 어디에 가는 건지?”
키에르한은 잔잔한 표정으로 답했다.
“특별한 곳에 가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제가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할까 합니다.”
“해보고 싶었던 거요?”
“네.”
“그게 무엇인데요?”
마리의 물음에 키에르한이 짧게 답했다.
“마리 양과 일상적인 시간을 함께 보내보는 것. 그게 제 평소 소원이었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키에르한은 수도의 번화가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리고 정말로 그녀와 평범하게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수도에서 유명한 음식점에 가서 맛있는 식사를 함께하고, 차를 마셨고, 한적한 뒷골목을 산책했다. 그리고 마침 공연을 시작한 오페라를 발견해 같이 관람했다.
‘이렇게 있으니 마치 연인이라도 된 것 같네.’
마리는 묘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그가 그녀를 이끄는 코스는 완전히 연인 간의 데이트 코스였다.
“공연은 괜찮았습니까?”
“아, 즐거웠어요.”
“황궁의 천사께 보여 주기에는 오페라 수준이 조금 낮았지요?”
황궁의 천사. 신년 연회 당시 그녀의 뛰어난 같은 연주 솜씨를 들은 사람들이 가끔 하는 이야기였다. 마리는 키에르한의 농담에 민망한 얼굴을 했다.
“놀리는 거죠?”
“놀리다니요? 그럴 리가요. 어쨌든 저는 정말 즐겁게 봤습니다.”
키에르한의 말에는 ‘당신과 함께 봐서 즐거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
그의 마음이 느껴져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과 일상적인 시간을 보내는 것이 소원이었다는 것이 진짜인지, 그는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중간중간 어두운 기색이 보이긴 했지만, 그는 진실로 그녀와 함께하는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기뻐하고 있었다.
‘……키엘 님.’
그런데 왜일까? 그런 그를 보는 그녀는 자꾸 아련한 마음이 들었다. 마치 손을 뻗으면 사라지는 신기루처럼. 그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마리는 어두운 얼굴로 생각했다. 키에르한이 이유 없이 이런 모습을 보여 줄 리가 없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결국, 마리는 한참을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키엘 님, 정말 괜찮으신 건가요?”
그 물음에 키에르한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고뇌가 스쳐 지나갔고,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키엘 님.”
“그냥 지금은 마리 양과의 시간을 즐기고 싶군요. 저에게는 정말 소중한 순간이어서. 죄송합니다, 마리 양.”
키에르한은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리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금 자신과 함께하는 순간순간을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는 그가 안타까웠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걱정되었다.
“레이디, 손을. 마지막 장소로 가시지요.”
키에르한은 다시 따뜻한 얼굴로 돌아와 그녀를 오늘의 마지막 장소로 이끌었다.
“이곳은?”
“어릴 적 친구들과 자주 오던 호수입니다. 경관이 예쁘지요?”
마리는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마차를 타고 그녀를 데려온 곳은 수도 인근에 자리한 작은 호수였다. 맑은 햇살이 호수의 물결을 빛나게 했다. 이제 막 겨울이 지나 새싹이 틀려는 주변 나무들이 싱그러웠다.
“친구라면 누구와?”
마리는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친구라? 누구일까? 자주 만나 왔지만, 정작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듣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마리는 그의 답을 듣고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 전하와 오른 공작입니다.”
“……!”
“그때는 황태자가 아니라 4황자 전하셨군요. 오른 공작도 공작이 되기 전이었고요. 어쨌든 이전에는 7황녀 마마까지 합해 네 명이 함께 친하게 지냈었습니다.”
생각지도 못 했던 이야기였다. 그와 황태자가 친하게 지냈던 시기가 있었다니.
‘하지만 지금은.’
현 정계에서 키에르한은 황태자의 유일한 정적이었다. 지금이야 데면데면하게 지내고 있지만, 언젠가 그들이 서로를 향해 칼을 꺼낼 것이란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키에르한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친구들과 오는 것보다 역시 마리 양과 오는 것이 훨씬 좋군요.”
그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이끌며 말했다.
“잠시 걷지 않겠습니까? 호수가 예뻐 산책하기에 좋습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랐다. 그의 말처럼 호수는 정말 아름다웠다. 어째서 이런 곳을 모르고 살았나 싶을 정도였다. 조용한 호수 곁에서 바람을 맞으며 걸으니 가슴이 차분하게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키에르한은 그녀의 곁에서 아무런 말 없이 호수를 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입가에 희미하게 매달려 있는 미소를 보니,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울컥했다. 그는 정말로 그녀와 함께하는 지금의 순간순간을 소중히 가슴에 새기고 있는 듯했다.
‘도대체 왜?’
결국, 마리는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도저히 저런 그의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말씀해 주세요.”
“마리 양?”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슬픈 표정인 거죠? 전 키엘 님의 친구예요. 키엘 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요.”
키에르한은 발걸음을 멈추어 섰다. 그의 바다같이 푸른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 마리는 이번에야말로 그에게서 이유를 들어야겠다는 듯 굳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키에르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의 눈빛에 교차하는 감정은 안타까움과 무언가를 향한 갈망이었다. 한참을 주저한 끝에 그는 결국 입을 열었다.
“마리 양, 부탁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네, 당연히요.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키에르한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인지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며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와…… 저와 함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 주시겠습니까? 단둘이서. 아무도 없는 곳으로.”
“……!”
마리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키엘 님? 그게 무슨?”
순간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의 눈동자는 그녀를 향한 간절한 진심을 담고 있었다. 그 마음을 마주한 순간 마리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키엘 님.’
그가 말하는 것은 단순한 떠남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서로만을 바라보며 살자는 것이었다. 그만큼 키에르한이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고 깊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건 안 돼.’
마리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녀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황태자를 두려워할 때, 저 키에르한과 단둘이 황궁을 벗어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했던 적이 있다. 백마 탄 왕자님 같은 키에르한과 함께라면 어딜 가도 나쁘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건 아니야. 안 돼.’
일단 그녀는 황태자와 마찬가지로 그의 마음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그건 그를 기만하는 것이니까.
‘물론 키엘 님이라면, 내 정체를 밝혀도 나를 받아주실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그녀의 비밀보다도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나 이제는 황태자 전하를 떠나고 싶지 않아.’
방금 그가 떠나자고 했을 때 순간적으로 떠오른 얼굴. 그건 바로 황태자 라엘이었다. 그녀는 그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어리석은 일일지라도, 훗날 후회할지라도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안…… 되겠습니까?”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듯 키에르한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마리는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녀는 그가 상처 입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하지만 명확하게 말했다.
“죄송해요, 키엘 님.”
확실한 거절에 키에르한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이 안타까움과 씁쓸함으로 물들었다.
“……그렇군요.”
“죄송해요. 정말로.”
키에르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마리 양의 마음도 배려하지 않고 멋대로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
“……키엘 님.”
“방금 제가 한 이야기는 그냥 잊어주십시오. 괜히 신경 쓰게 해서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그의 말에 마리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거절에 분명 상처 입었을 텐데, 오히려 그녀를 배려했다. 키에르한다웠다. 그는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얼굴로 돌아가 말했다.
“산책이나 마저 하지요, 마리 양.”
“……네.”
둘은 호수가를 마저 걸었다. 두 사람 모두 호수를 바라볼 뿐, 특별한 말 없이 조용히 산책을 했다.
이윽고 돌아가기 직전. 키에르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리 양.”
“네?”
“마리 양에게 저는 소중한 친구이지요?”
마리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잔잔했지만, 그녀는 왠지 그 잔잔함 뒤에 숨어 흔들리는 감정이 느껴졌다.
“네, 당연히요. 키엘 님은 제 가장 소중한 친구예요.”
그 말에 키에르한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동자 뒤에 숨어 흔들리던 감정이 조금은 평안해졌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 뒤 숙소로 돌아온 마리는 침대에 누워 한숨을 내쉬었다.
‘키엘 님.’
그가 마지막에 보여 준 미소가 계속 마음 한편에 걸렸다. 가슴이 탁 막힌 것처럼 답답하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제안을 한 걸까? 혹시 키엘 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마리는 그와 함께 있을 때는 떠올리지 못한 생각을 하였다. 감정에 못 이겨 한 말일 수도 있지만, 혹시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 무언가 이상했어.’
특별히 딱 꼬집어서 이야기하기는 어려웠지만, 어딘지 그에게서 이질감이 들었다. 마치 무언가를 정리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마리는 갑갑한 마음이 들어 침대에서 일어났다. 마지막 순간 아련하게 보였던 그의 미소도 그렇고, 혹시나 그에게 무슨 일이 있나 드는 걱정도 그렇고, 마음이 복잡했다.
‘산책이나 좀 하고 오자.’
벌써 시간이 늦은 저녁이었다. 마리는 밤공기를 마시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걸음을 옮길수록 머리는 복잡해지기만 했다. 마리가 결국 다시 한숨을 내쉬는 순간,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한숨이십니까, 아름다운 레이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카탈락 백작님?”
사람 좋은 호인 형의 미남. 한자동맹의 거상, 카탈락 백작이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영광이란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그나저나 아름다운 밤하늘 밑인데, 왜 그렇게 근심 어린 표정이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리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녀는 저 카탈락 백작이 꺼림칙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괜히 꺼려졌다. 그런데 카탈락 백작은 그녀를 만난 것이 반가웠는지, 이런저런 말을 계속해서 걸었다.
“지난번 마약 조직을 소탕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대단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까?”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백작의 눈이 아무도 모르게 낮게 빛났다.
“혹시 사전에 정보를 알고 있었던 것인지요?”
마리는 자꾸 꼬치꼬치 말을 걸어오는 백작에게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복잡한데, 그냥 빨리 가 주었으면.’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백작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피로하신데 제가 눈치 없이 군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힐데른 예작을 보니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요. 마치 이전부터 계속해서 봐 온 사이처럼 친근한 느낌이 듭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부터 봐 온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단, 그녀는 친근감보다는 거부감이 들어서 그랬지. 그런데 카탈락 백작은 검지를 입술에 가져가더니,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말했다.
“계속 이런 생각이 드는 거 보니 어쩌면 그냥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이전에 만난 적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서 힐데른 예작을 봤을까요?”
“글쎄요.”
마리는 별생각 없이 답했다. 그런데 백작은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떠올랐다는 듯 외쳤다.
“아, 기억났습니다! 이전에 어디서 뵈었는지.”
“……?”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날 이전에 만난 적이 있다고? 그럴 리가? 카탈락 백작은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하였다.
“우리 과거 클로얀 왕국 왕성에서 만나지 않았습니까?”
“……!”
마리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 뭐라고?
“클로얀 왕성 어디더라…… 아, 맞아. 통원의 궁에서 만났던 것 같은데요.”
카탈락 백작은 묘한 눈빛으로 말했다. 마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통원의 궁. 과거 모리나 왕녀였던 그녀가 클로얀 왕성에서 유폐되었던 곳이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백작, 아니, 서제국의 황제 요하네프 3세는 여전히 짙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 * *
마리의 근신 기간이 끝났다. 그녀는 황태자의 전담 시녀이자 보좌관으로 다시 사자궁으로 출근했다. 미리 집무실에 나와 있던 알몬드가 그녀를 보고 인사를 하였다.
“그간 잘 쉬었나?”
나름 반갑게 인사를 하던 그는 순간 멈칫했다. 마리의 안색을 본 것이다.
“온 힐데른?”
마리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파리했다. 나름 그녀를 오랫동안 봐 온 알몬드였지만 마리의 저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괜찮나? 얼굴이 좋지 않군.”
“……아, 네. 네. 괜찮습니다.”
마리는 급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그냥 어제 잠을 설쳐서 그런 것 같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몬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단순히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마리 본인이 괜찮다 하니 그는 넘어가기로 했다.
한편 마리의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했다.
‘날 클로얀 왕성에서 봤다고? 그것도 통원의 궁에서?’
그녀의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 그것은 바로 어제 카탈락 백작이 남기고 간 말 때문이다.
“우리 과거 클로얀 왕국 왕성에서 만나지 않았습니까?”
‘마리를 이야기하는 것일 리가 없어. 난 실제 하녀 마리와 전혀 다르게 생겼으니까.’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클로얀 왕국에서 왕녀였던 그녀는 왕국이 멸망당하기 전, 자신의 궁 근처에서 일하다 죽은 하녀, ‘마리’로 위장했다. 자신만큼이나 사람 간의 왕래가 없었던 ‘마리’이니, 정체를 들킬 가능성이 적다 생각한 것이다.
다행히 그 생각은 적중해 지금껏 정체를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한데 어제 처음으로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나 버렸다.
‘그가 클로얀 왕성에서 정말로 날 봤다면, 그건 마리가 아니라 모리나 왕녀를 본 거야.’
마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생각했다. 혹시나 카탈락 백작이 다른 사람을 보고 자신으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어제 그 눈동자. 분명 내 정체를 정확히 아는 눈빛이었어.’
백작의 눈동자는 그 순간 마치 뱀이 쥐를 보듯 섬뜩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분명 자신이 모리나 왕녀인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그가 내 정체를 밝히면?’
마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황태자의 빈자리를 힐끗 바라보았다.
‘물론 전하는 날 아끼지만…… 그래도 정체를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몰라.’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그녀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만약 자신의 정체를 그가 알게 되더라도 자신을 죽이려 들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몰라.’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것이 개인감정을 넘어서 국가 단위의 정치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클로얀 왕가의 마지막 후예인 그녀를 살려 두는 것은 제국에 큰 위해가 된다. 그러니 아무리 황태자가 그녀를 아낀다 해도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었다.
‘특히 최근 클로얀 왕국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어. 전하의 선정으로 일반 백성들은 제국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왕가를 그리워하는 일부 인원들이 문제야.’
주로 전(前) 왕실 기사단 출신의 기사들이 주축이 되어 제국에 저항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왕가의 마지막 후예인 그녀를 애타게 찾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아무리 황태자라도, 아니, 제국의 지배자인 황태자이기 때문에 더욱더 그녀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일국의 지배자로서 때로는 원하지 않더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특히 오로지 제국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황태자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전하의 귀에 내 정체가 들어가면 안 돼. 카탈락 백작의 입을 막아야 해.’
마리는 굳게 생각했다. 다행인 점은 그도 당장 그녀의 정체를 밝힐 생각은 없는 것 같다는 것이다. 만약 밝히려고 했으면 진즉 밝혔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지나가듯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흘린 것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일단 그걸 알아야 해. 그거에 맞춰서 대응하자.’
* * *
마리는 카탈락 백작이 금방 접근해 올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 다르게 백작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꾹 참고 기다렸으나, 일주일이 지나고, 이 주일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날 알아본 것이 아니었나?’
마리는 눈을 깜빡거리며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황궁에서 우연히 백작을 마주칠 때가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늘 그녀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마치 자신의 함정에 빠진 먹이를 보는 뱀의 눈빛 같은 눈동자라, 그녀는 섬뜩함을 느꼈다.
결국 그녀는 직접 카탈락 백작을 찾아가기로 했다. 황태자에게 양해를 구한 그녀는 마차를 타고 황궁을 나섰다. 그리고 곧바로 카탈락 백작이 머무는 저택으로 향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만나서 담판을 짓자.’
그녀의 방문을 전해 들은 카탈락 백작은 직접 저택 밖으로 나와 마리를 환대했다.
“이렇게 또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카탈락 백작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부담되게 느껴지는 극진한 예였다. 마리는 고개를 젓고는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아름다운 레이디께서 저에게 무슨 말을 하실지 기대되는군요.”
백작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마리는 아무런 반응 없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백작은 무뚝뚝한 그녀의 반응에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힐데른 예작을 만나 무척이나 기쁜데, 예작은 그렇지 않은 것 같군요. 굉장히 슬픕니다.”
그러며 그는 저택 안쪽으로 팔을 내밀었다.
“일단 들어가시지요.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능력 있는 시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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