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있는 시녀님-26화 (27/54)

Chapter 4

“춤을 못 추긴 하는구나.”

“……!”

“앞으로는 많이 춰야 할 텐데 연습을 하긴 해야겠어.”

마리는 화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네, 최대한 연습해 오겠습니다. 그러니 손을…….”

하지만 라엘은 허리를 감싼 손을 풀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힘을 줘 자신 쪽으로 끌어안았다. 그의 단단한 몸이 더욱 밀착했다. 마리의 가슴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연습은 나와 해야지. 어차피 이제 나하고만 출 텐데.”

“……!”

마리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전신으로 느껴지는 그의 느낌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황태자는 눈을 옅게 감았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를 감싼 팔의 힘을 살짝 풀며 말했다.

“잠시만 이대로.”

나직한 목소리. 평소의 그의 모습에서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달콤한 음성이었다. 마침 오케스트라단이 감미로운 선율의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황태자는 그 음악에 맞춰 그녀를 자신의 품 안에서 부드럽게 이끌었다. 마리는 사과처럼 붉어진 얼굴로 춤을 따라갔다.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리며 동시에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리.”

“…….”

“지난번에 말했다시피, 난 너의 모든 것을 갖고 싶다.”

마리는 말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 뭐라고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네가 날 밀어내도 기다리는 중이야. 내가 원하는 건 마음이 없는 빈껍데기가 아니니까. 네 마음까지 모두 갖고 싶으니까.”

거기까지 이야기한 황태자의 분위기가 낮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난 참을성이 많지 않다.”

그 무거운 목소리를 듣자 마리는 마치 맹수의 먹잇감이 된 초식동물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만약 오늘처럼 또 날 자극한다면.”

그 순간 황태자는 허리춤을 감싼 팔에 힘을 줘, 그녀를 다시금 자신 쪽으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마치 자신에게 가둬 두려는 것처럼.

황태자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그대로 널 가져 버릴지도 몰라. 그러니 날 너무 자극하지 마. 이건 경고야.”

* * *

“하아.”

마리는 연회장 밖의 정원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 춤이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겠다. 춤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도망치듯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황태자와 키에르한. 그 둘에 대한 생각 때문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도저히 연회장 안에 있을 수 없었다.

“그대로 널 가져 버릴지도 몰라. 그러니 날 너무 자극하지 마. 이건 경고야.”

“하아.”

황태자가 자신에게 남긴 말을 떠올린 마리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모리나 왕녀인 그녀로서는 황태자와 키에르한 그 누구의 마음도 받아들일 수 없는데. 너무 괴로웠다.

‘그냥 도망이라도 가 버릴까.’

마리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녀는 도주할 생각마저 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했다. 여인의 몸으로 홀로 수도를 떠나는 것도 위험천만한 일이었고, 무엇보다 황태자나 키에르한이나 그녀가 도주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얼마 가지도 못 하고 잡혀 올 게 분명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녀도 이렇게 피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평범한 태생이었다면 마음을 열었을 것이다. 그리고 둘 중 한 명과 사랑을 나누었겠지.

‘하지만 이렇게 정체를 숨긴 채 그들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어. 그건 기만이야.’

그렇다고 정체를 드러낼 수는 더더욱 없다.

‘그러니 생각해 내. 마음을 거절할 방법이 뭐가 있을까?’

하지만 아무리 그녀라도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황태자는 이 제국의 지배자다. 그리고 귀족 작위를 받았다지만 그녀는 전쟁 포로이다. 지금도 그녀는 공식적으로는 황태자의 개인 소유다. 그러니 만약 황태자가 오늘 밤 그녀를 원한다면, 그녀로서는 거절할 권한이 없었다. 지금 이렇게 기다려 주는 것만으로도 황태자가 굉장히 배려해 주는 거였다. 그렇다고 야밤에 도망칠 수도 없으니, 이렇게 생각해도 저렇게 생각해도 막다른 길에 몰린 상황이었다. 울고 싶었다.

‘아니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길은 있다고 했어.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어떻게든 생각해 보자.’

그녀는 애써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결론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딱히 더 내릴 수 있는 결론이 없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지.’

연회장 쪽으로 갈까 하다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면 황태자와 키에르한을 봐야 한다.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가자.’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는데.

“앗!”

워낙 깊게 생각에 잠긴 탓일까. 어둠 속에 사람을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누군가와 부닥쳐 버렸다. 상대의 가슴에 정통으로 머리를 부닥친 그녀는 엉덩방아를 찧고 다급히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 괜찮아요. 그쪽이야말로 넘어지셨는데 다치지 않으셨나요?”

어디선가 들은 듯한 느낌의 부드러운 말투. 마리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갈색 머리카락에 흑색 눈. 친절한 인상의 대단한 미남이었다. 분명 처음 보는 인물인데 왜인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착각인가?’

한 번이라도 봤으면 절대 잊어버릴 리 없는 대단한 미남이니, 그냥 착각인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다, 그의 하얀 정장을 보고는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아, 옷이! 죄송합니다!”

하얀 정장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남자의 손에 음료 잔이 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와 부닥치면서 흘린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남자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옷이야 세탁하면 그만인걸요. 그것보다 다치진 않았나요, 레이디?”

그는 손을 내밀어 넘어진 그녀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자신의 실례를 거듭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궁에 이야기해 새 옷이라도…….”

“아니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제 저택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참이기도 하고요.”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리고 보고 싶었던 레이디를 만나게 되었으니, 이런 옷쯤이야 얼마든지 버려도 상관없습니다.”

그 말에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보고 싶었던 레이디라니요?”

“온 힐데른. 당신을 만나고 싶었거든요.”

“네? 어째서 저를?”

남자는 잠시 말없이 마리를 바라보았다. 깊은 흑색 눈동자에 그녀가 알 수 없는 느낌을 받는 순간. 그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다른 게 아니라, 제가 당신의 팬이거든요.”

“그게 무슨?”

“오늘 연주를 보고 팬이 되어버렸습니다.”

“아…….”

마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오늘 연회 시작 때 그녀가 연주했던 피아노 협연. 그걸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남자는 정말 기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연회장에서 대화를 나누어 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되지 않아 서운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연히 만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아…… 네.”

그녀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오늘 또 연주하실 계획은 없으신지?”

“아…… 없어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려고 해요.”

그 말에 남자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숙소로 돌아가시는 중이었습니까?”

“네.”

“돌아가시는 길, 혹시 제가 에스코트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마리는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요. 그런 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어차피 여기 바로 앞이에요.”

“아쉽군요.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마리는 다시 어색하게 웃었다.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에스코트를 받겠는가.

‘왠지 불편해.’

마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 좋은 호인 같은 인상이지만 이유 없이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그냥 느낌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남자와 헤어지기 전, 자신이 버린 옷을 보고 말했다.

“저…… 옷을 주시면 제가 깨끗이 세탁 후 머무시는 곳으로 보내드리도록 할게요.”

“아, 괜찮습니다.”

“제가 마음이 불편해서요.”

그러자 남자가 의외의 말을 하였다.

“그러면 옷 말고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떠십니까?”

“네?”

“제가 곧 저택에서 연회를 열 예정입니다. 그때 귀빈으로 방문해 연회장을 빛내 주실 수는 없으시겠습니까?”

뜻밖의 연회 초대였다. 고민하는 마리에게 그가 말했다.

“사실 긴밀히 드릴 말씀도 있고요.”

“긴밀히요?”

“네, 연회에 참석해 주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마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들 간의 연회 초대는 일상적인 일이었고, 그녀가 실수한 것도 있는 상태라 거절하기가 곤란했다.

“네, 그러면 방문하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정말 기쁩니다.”

남자는 그녀의 승낙에 활짝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바로 초대장을 보내드리지요. 연회 날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행복한 밤 되십시오, 레이디.”

그렇게 남자는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고,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긴밀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뭐지?’

의아해하던 그녀는 문득 중요한 것을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물었다.

“그런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그 물음에 남자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카탈락 폰 올스덴. 카탈락 백작이라 부르면 됩니다. 북부의 한자동맹에서 왔습니다.”

남자, 카탈락 백작은 미소 지으며 답했다.

한자동맹(Hansa同盟). 북해와 발트해 연안을 근거지로 한 상인들의 연합체로, 60개가 넘는 독일의 도시들이 가입된 거대 상인 연합체였다. 지중해 무역이 이탈리아 상인들에 의해 주도된다면, 북방의 무역은 그들 한자동맹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카탈락 백작. 들어본 기억이 있어.’

마리는 숙소에서 가만히 생각했다.

‘맹주인 뤼베크 가문 정도는 아니어도 동맹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거상. 그 남자가 그런 거물이었다니.’

이탈리아 피렌체에 메디치 가문이 있다면, 한자동맹에는 뤼베크 가문이 있다. 카탈락 백작은 그들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바로 아래 급 정도는 되는 거물이었다.

‘그런데 카탈락 백작의 올스덴 가문은 상거래를 할 때도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대리인을 내세우는 것으로 유명한데, 왜 이 먼 동제국까지 직접 온 거지? 그리고 나한테 긴밀히 할 이야기는 뭘까?’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올스덴 가문은 그 어마어마한 부로도 유명하지만,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스러움으로도 유명했다. 오죽하면 가주인 카탈락 백작을 직접 본 사람이 손에 꼽는다고 한다. 그런 그를 그녀가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어쨌든 신기하네. 이곳 제국에서 큰 상거래를 할 것이 있나?’

마리는 나중에 한번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 초대장은 어떻게 하지? 역시 가야겠지?’

마리는 초대장을 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날의 우연한 만남 후, 백작은 곧바로 그녀에게 초대장을 보내었다. 마침 연회 날이 그녀가 쉬는 날이었던지라 별다른 무리 없이 참석하려고 했는데, 한 가지 문제점에 직면했다.

‘에스코트는 어떻게 하지?’

초대장을 보니 단순한 파티가 아닌 대규모 연회였다. 소규모 파티면 모를까, 대규모 연회에 레이디 혼자서 참석하는 경우는 없었다. 연인이 있다면 연인에게, 없다면 가문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마리에게는 에스코트해 줄 연인도, 기사도 없었다.

‘어쩌지?’

마리는 고민했다.

‘키엘 님께 부탁하면 흔쾌히 들어주시기야 하겠지만…….’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이런 부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기사가…….’

생각해 보았으나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황궁에서 오래 지냈지만 키에르한 말고 딱히 친분이 있던 기사가 없었다.

‘그냥 혼자 참석해야 하나?’

그렇게 곤란해하던 중 그녀는 문득 한 사람을 떠올렸다. 친하지는 않지만, 이런 부탁을 해볼 만한 기사였다.

‘알몬드 자작님! 그분이면 내 부탁을 들어주시지 않을까?’

30대인 알몬드는 그녀와 나이 차이가 조금 있긴 하지만, 솔로라 충분히 그녀를 에스코트해 줄 수 있었다. 늘 황태자를 곁에서 밀착 호위했지만, 그도 사람인 만큼 쉬는 날이 있었는데, 마침 연회 날이 그날이었다.

‘한번 부탁해 보자.’

마리는 사자궁으로 출근 후 황태자가 없을 때, 알몬드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부탁했다.

“연회장의 에스코트를?”

“네, 자작님. 정말 죄송한데 부탁드려도 될까요?”

마리는 최대한 죄송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알몬드는 매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아…… 네.”

너무 칼같이 거절해 뭐라고 더 부탁할 수가 없었다. 마리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알몬드는 미안했는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날 낚시 약속이 있어서 그렇다.”

“낚시요?”

“그래, 내 취미 생활이다.”

“…….”

뭔가 무뚝뚝한 알몬드와 심각하게 잘 어울리는 취미 생활이었다. 어쨌든 저렇게 거절하는데, 더 부탁하는 것도 실례였다.

‘어쩌지?’

그때, 알몬드가 뭘 그런 걸 고민하느냐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 부탁하면 되지 않는가.”

마리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황태자 전하께 부탁을……!”

“왜? 기쁘게 받아주실 것 같은데?”

마리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최근 황태자의 행동을 보면 그녀의 에스코트 부탁을 거절하지는 않을 것 같기는 했다. 오히려 기뻐하면 기뻐했지.

‘하지만 어떻게 전하의 에스코트를 받아. 차라리 혼자 가면 혼자 갔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차라리 혼자 가야겠어요. 황태자 전하께는 말씀드리지 말아주세요.”

“흠.”

알몬드는 턱을 쓰다듬었다. 누가 봐도 몰래 황태자에게 말할 모양새라 그녀는 강하게 다시 말했다.

“절대 전하께 말씀드리면 안 돼요. 알았죠?”

“흠, 글쎄.”

“자작님!”

* * *

그 뒤 며칠이 지났다. 다행히 그녀의 간곡한 부탁 덕분에 알몬드가 별다른 말을 안 한 것인지, 황태자는 카탈락 백작의 연회에 대해 특별한 말이 없었다.

‘다행이야. 연회는 그냥 혼자 가야겠어.’

에스코트를 받지 않고 참석하는 레이디는 아무도 없겠지만 뭐, 상관없었다. 그게 무슨 중요한 일이라고.

‘그런데…… 그날 일에 대해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네.’

마리는 황태자를 도와 서류를 검토하며 힐끗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가 많이 편해진 것인지, 둘만 있을 때는 종종 가면을 벗고 있었다. 덕분에 지금 그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는데,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표정이었다.

‘그때의 일, 전혀 신경 쓰시지 않는 건가. 난…… 많이 신경 쓰이는데.’

마리는 심란해졌다.

“그대로 널 가져 버릴지도 몰라. 그러니 날 너무 자극하지 마. 이건 경고야.”

그가 자신에게 던졌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뿐이 아니었다. 황태자를 마주할 때마다 자신의 허리춤을 감싸 안던 팔뚝, 단단한 몸, 부드러운 체향. 그 모든 것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하아.’

마리는 마음이 복잡해져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지?”

“아, 아닙니다!”

“혹시 몸이 불편한가? 몸이 안 좋으면 참지 말고 바로 말하도록.”

“괜찮습니다.”

마리는 어색한 표정으로 답했다. 황태자만 아니면 다 괜찮았다. 그때, 황태자가 서류를 살피더니 그녀에게 물었다.

“이 서류에 적힌 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지?”

공적인 일을 묻는 그의 목소리에 마리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서류를 살폈다.

‘아편 중독 사건이구나.’

제국은 마약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마약을 완전히 근절할 수는 없었는데, 어째서인지 최근 들어 점점 마약 적발 건수가 늘어나는 추세였다.

“좀 더 엄중히 단속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 그런데 그것만으로 되겠는가?”

물론 아니었다. 마리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단순히 중독자를 적발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최근 들어 마약 적발 건수가 늘어난 것은 분명 수도 근교 어디선가 마약 밀매가 성황하고 있다는 것. 그 밀매 자체를 근절해야 합니다.”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같다. 치안을 담당하는 내무대신에게 그 내용을 전달해 주도록.”

“네, 전하.”

명에 따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황태자가 의외의 물음을 하였다.

“혹시 좋아하는 꽃이 있나?”

마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답했다.

“장미를 좋아합니다만…….”

“좋아하는 케이크는?”

“……생크림 케이크를.”

이런 걸 왜 물어보지? 고개를 갸웃하는데, 황태자의 다음 말에 마리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면 이번 주말에는 무얼 할 예정이지?”

“……!”

이번 주말. 카탈락 백작의 연회가 예정된 날이다. 마리는 적당히 둘러대었다.

“아, 아는 분이 초대해 주어 잠시 바람이나 쐬다가 올까 싶습니다.”

정확히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래?”

“……네.”

“정말로?”

황태자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한 기색에 마리는 등 뒤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지만 애써 모른 척하였다.

“그 아는 사람이 혹시 카탈락 백작인가?”

“……!”

마리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몬드가 황태자에게 몰래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작님! 말하지 말라고 그렇게나 부탁했는데!’

그녀는 속으로 외쳤지만 황태자 뒤에 서 있는 알몬드는 뻔뻔한 표정이었다.

“카탈락 백작의 연회에 가는 것이 맞나 보군. 파트너가 없는 것 같던데. 에스코트는 내가 해주지.”

마리는 하얗게 질려 고개를 숙였다. 역시 걱정한 대로였다.

“제가 어찌 감히 전하께. 감당하기 어려우니 거두어주시옵소서.”

하지만 황태자는 뻔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닌데?”

“네?”

“내가 그대와 함께하는 것이 즐거워 그러는 거다. 그러니 그대의 거절은 받아들이지 않겠다.”

마리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궤변이란 말인가! 그때, 황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마리는 오싹한 느낌이 들어 뒷걸음질 쳤다. 지난번 연회장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 곧 탁 하고 벽에 등이 닿았고, 코앞으로 황태자가 다가왔다.

“……저, 전하?”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라엘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히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손길이었지만, 그의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마리는 가슴이 덜컥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따라가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어, 어떤?”

머리에 닿는 그의 손길에, 코끝에서 느껴지는 그의 체향에 마리는 멍하니 물었다. 황태자는 피식 웃었다.

“내가 안 따라가면 또 다른 잡놈들과 춤을 출 것 아닌가? 그러니 내가 따라가야지.”

그는 살짝 짓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춤 실력은 그사이 조금 늘었는지 모르겠군.”

그 말에 마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지난번 신년 연회 때 실수로 그의 품에 안겼던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 * *

그렇게 그녀는 생각지도 않게 황태자와 함께 카탈락 백작의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황태자는 정말로 그녀를 에스코트해 주었다.

“가지.”

“……네, 전하.”

카탈락 백작의 저택은 수도 근교에 있었다. 황궁과는 거리가 있었던지라, 그들은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향했다.

“…….”

마차 안에 앉은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마리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말 황태자의 에스코트를 받게 되다니.’

지극한 영광이 아닐 수 없으나, 그녀는 한숨이 나왔다. 그에게서 벗어나야 하는데, 왠지 더욱더 늪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때, 마차 안에서도 서류를 보고 있던 황태자가 말했다.

“거리가 좀 되니 잠시 눈이라도 붙이거라. 최근 무리하는 것 같던데.”

“괜찮습니다.”

“괜히 내 눈치 보지 말고. 조금 쉬어.”

마리는 그의 따뜻한 말에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전하, 한 가지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왜 그러지?”

“저…… 오늘은 춤 안 출 겁니다.”

“…….”

마리는 그가 뭐라고 이야기하기 전에 강하게 말했다.

“정말. 정말로 안 출 겁니다. 절대로.”

그녀는 지난번 연회를 떠올렸다. 당시에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는데, 이번에 또 그의 품에 안기게 된다면 더 못 버틸 것 같았다.

그때였다. 황태자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소리를 내어 웃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라,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리.”

“네?”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철가면 속의 눈동자는 평소와 다르게 어딘지 따뜻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네가 싫어하는 일을 강제로 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

“……네.”

뭔가 지금까지 마리에게 한 행동들을 보면 신뢰가 안 가는 말이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춤을 추는 게 미숙해서 그런 거면 연습을 해야겠군. 앞으로 일정을 조정해 그대와 매일 춤 연습을 해야겠어.”

무슨 말도 안 되는! 마리는 기겁해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춤 연습 필요 없습니다.”

“필요할 것 같은데? 오늘도 춤이 미숙해서 안 춘다고 한 것 아닌가?”

물론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그와 매일 춤 연습이라니. 절대 안 됐다.

“아닙니다. 제가 혼자 연습하겠습니다.”

“혼자? 안 될 텐데?”

“됩니다. 허수아비라도 붙잡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마리가 진땀을 흘리며 그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차는 다그닥다그닥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도착했습니다, 전하.”

호위를 맡은 알몬드 자작이 도착을 알렸다. 원래 그는 오늘 낚시 약속이 있었지만, 황태자가 연회에 참석한다는 이야기에 호위를 자청했다.

“그래, 수고했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황태자가 마리가 내려오는 것을 도와주었다. 드레스를 입어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린 마리는 눈앞에 나타난 저택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엄청 큰 저택이네. 한자동맹의 거상이라더니.’

거의 작은 성채만 한 대저택이었다. 마리는 얼마나 부자이기에 이런 저택을 살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착하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레이디.”

갈색 머리에 흑색 눈동자, 그리고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 카탈락 백작이었다.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지 직접 마중 나온 그는 마리의 옆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황태자가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금방 놀란 표정을 다스리고 그는 우아한 동작으로 예를 표했다.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한자동맹의 카탈락 폰 올스덴입니다. 누추한 곳에 발걸음 해주셔서 지극한 영광입니다.”

“한자동맹에서 왔다고?”

“네, 전하.”

황태자의 눈에 살짝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올스덴 가문은 우리 제국과 특별한 교역이 없었던 것 같은데? 샹파뉴의 교역이 주력인 가문 아니었나?”

역시 황태자답게 북부 유럽의 한자동맹의 구성원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 있었다.

“네, 지금까지는 그랬습니다.”

묘한 뉘앙스의 말투.

“지금까지는?”

“앞으로는 다를 것이란 거죠. 사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전하께 알현 신청을 하려고 했었습니다.”

카탈락 백작은 기분 좋게 웃으며 그들을 안으로 이끌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오늘은 참 영광인 날입니다. 온 힐데른뿐 아니라 전하께서도 발걸음 해주시다니.”

그렇게 마리와 황태자는 백작의 안내를 받아 저택 안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산더미 같은 부를 쌓아 놓은 거상답게 연회는 굉장히 호화로웠다. 진미와 미주가 넘쳐흘렀고, 많은 귀족이 춤을 추며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와 힐데른 예작이십니다!”

곧 문지기가 그들의 등장을 알렸고, 한창 흥겨운 분위기로 연회를 즐기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황태자 전하께서 이곳에?”

“어째서?”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궁중의 공식 행사가 아니면, 이런 귀족 개인이 여는 연회는 절대 참석하지 않았는데?

“아무리 카탈락 백작이 한자동맹의 거상이라지만, 전하가 발걸음을 하게 할 정도는 아닌데 어째서 발걸음하신 걸까요?”

“그러게요? 놀랍네요.”

사람들은 놀라 웅성거렸다. 그러다 그들 중 한 명이 황태자 옆에 서 있는 소녀를 보고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그러고 보니 힐데른 예작도 함께이네요. 혹시 힐데른 예작님을 에스코트해 주기 위해 오신 것은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연회 참석자 명단에 온 힐데른의 이름이 있긴 있었는데 설마…….”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보통 이런 대규모 연회 때는 참석자의 명단을 미리 알려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 참석 예정자 중 황태자의 이름은 없었다. 동행한 마리의 이름은 있었어도. 그 말의 뜻은 하나였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황태자는 원래 연회에 참석할 계획이 없다가 저 힐데른 예작을 에스코트해 주기 위해 참석했다는 뜻이다.

귀족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마리를 바라보았다. 저 철혈의 황태자가 에스코트를 해주다니. 도대체 이 의미가 무엇이란 말인가?

‘신년 연회 때 춤도 먼저 신청하셨지.’

‘전하께서 힐데른 예작에게 마음이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 건가?’

‘그러면 차기 황태자비는 힐데른 예작?’

그렇지 않아도 간택전이 무산돼 차기 황태자비가 누가 될지 모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었다. 사람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힐데른 예작의 신분이 낮긴 한데. 그래도 황태자 전하이시니까. 전하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지.’

‘누가 황태자 전하가 원하는 것을 반대하겠어.’

이 제국에서 황태자의 권세는 절대적이었다. 그가 자신의 비를 결정했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뭐, 신분이 낮긴 해도 힐데른 예작이면 나쁜 황태자비가 되진 않겠지.’

그녀가 어떤 공으로 예작위를 받았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지난번 동방 교국과의 일부터 성배 도난 사건까지. 황태자가 마리의 공을 적극적으로 홍보해서 모두 그녀가 어떤 활약을 했는지 자세히 알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의 명민함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신분이 걸리긴 하지만 전하께 감히 반대할 사람도 없을 테고. 신분이야 전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어쨌든 눈여겨봐야겠군.’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의 머리에 마리의 존재가 각인되었다. 유력한 차기 황태자비 후보로! 의외로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한편, 그 시선을 받고 있는 마리는 속으로,

‘……아니야! 아니라고.’

울고 싶었다. 저들이 황태자와 함께 온 자신을 보고 어떻게 속삭이고 있을지 안 들어도 뻔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일일이 돌아다니며 착각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발밑을 조심하도록.”

“……네.”

그때, 황태자가 턱이 높은 바닥을 오르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단단한 손을 맞잡으며 마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사람들의 생각이 완전히 오해는 아니지.’

황태자는 그녀를 바라고 있었다. 또한, 진심으로 그녀를 자신의 비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그 생각은 큰 이변이 없는 한 이루어질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다.

‘하아.’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신비한 꿈의 능력을 얻은 뒤부터 왠지 한숨이 대폭 늘어난 기분이었다. 소원대로 분명 유능해졌지만, 뭔가 수난의 연속인 느낌이었다.

‘어떻게 도망이라도 갈 수 있는 능력이라도 생겼으면.’

물론 꿈을 통해 그런 능력이 주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꿈의 능력은 오로지 남들에게 도움을 줘야 할 상황에만 주어졌으니까. 참 신기하게도 그녀가 처음 죄수에게 남들에게 도움을 주며 살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던 그대로였다.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들을 돕기는커녕 하루하루 생존에 바쁜 느낌이다.

“많이 피로한가?”

“아…… 아닙니다.”

황태자가 그녀를 염려했다.

“굳이 오래 머물지 않아도 되니 피로하면 바로 말하도록.”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석하는 것으로 초청받은 것의 예의는 다했으니 적당히 일어나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둘은 카탈락 백작이 따로 마련해 준 귀빈석에 앉아 연회를 구경했다. 그런 그들에게 고위 귀족들이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동부 지방의 요르함 후작입니다. 전하를 뵙습니다.”

“스토아 백작입니다. 황태자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여 귀족들의 인사를 받았다. 귀족들은 황태자 옆의 마리에게도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힐데른 예작께서는 오늘도 아름다우신 것 같습니다.”

“전하와 정말 잘 어울립니다.”

그 말에 마리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비가 될지도 모르는 그녀에게 미리 잘 보이려는 말들이었다.

‘안 돼. 이러다가 내일 아침이면 수도 전체에 내가 차기 황태자비란 소문이 퍼지겠어.’

마리는 그들의 그릇된 생각을 바꿔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황태자가 선수를 쳐 버렸다.

“그렇게 이야기해 주니 고맙군. 나와 힐데른 예작이 어울리긴 하지.”

“……!”

마리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녀와의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료를 마시고 있는 황태자는 미동도 없었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과연 귀족들은 둘의 관계를 완전히 오해한 듯한 눈빛이었다.

‘역시! 전하와 힐데른 예작의 관계가!’

‘그러면 차기 황태자비는 정말로 힐데른 예작?’

“그러면 두 분 좋은 시간 되십시오. 소신들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귀족들이 물러가자 마리는 다급히 황태자에게 말했다.

“전하, 방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뭘? 난 그대와 내가 정말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한 말인데?”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목소리라 마리는 말문이 막혔다. 오히려 황태자는 이렇게 물었다.

“그대도 우리가 꽤 잘 어울린다 생각하지 않나?”

전혀! 완전히 극과 극인 두 사람이다. 어울리긴 뭐가 어울린단 말인가? 마리가 고개를 저으려고 할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회에 불편함은 없으십니까, 전하? 좀 더 극진히 모셨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친절한 음성. 저택의 주인인 카탈락 백작이었다.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나쁘지 않군.”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탈락 백작은 고개를 숙였다.

“사실 제가 두 분을 위해 따로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혹시나 괜찮으시다면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신지요?”

백작은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따로 드릴 말씀도 있고요.”

* * *

황태자와 마리는 백작을 따라 자리를 이동했다. 그들은 백작이 상거래에 관한 이야기를 할 거로 예상했다.

‘나에게 긴밀히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도 상거래에 관한 이야기였나?’

마리는 속으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현재 그녀는 황태자의 전속 시녀일 뿐 아니라 보좌관의 직책도 겸임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를 통하면 수월하게 황태자에게 의견을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왠지 단순히 그런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는데.’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근거는 딱히 없었다. 그저 느낌이었다.

‘그런데 정말 초면인가? 왜 이렇게 자꾸 익숙한 느낌이 들지?’

그녀는 앞서서 걷고 있는 카탈락 백작을 보며 생각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자꾸만 익숙한 기시감이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지?”

황태자가 마리에게 나직이 물었다.

“아…… 아닙니다.”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확실한 것도 아닌데, 황태자에게 미주알고주알 떠들 수는 없었다. 곧, 카탈락 백작이 커다란 방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이곳입니다. 특별히 두 분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방 안에는 온갖 호화로운 진미가 가득했다. 쓸데없는 사치를 싫어하는 황태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과하군. 어차피 별로 들지도 못 할 텐데.”

카탈락 백작은 유들유들하게 대답했다.

“전하와 힐데른 예작을 향한 제 마음입니다. 마음만이라도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황태자는 대답 없이 자리에 앉았다.

“백작.”

“네, 전하.”

“난 돌려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리를 청한 것은 저런 쓸데없는 음식 때문이 아니라 할 이야기가 있어서겠지?”

카탈락 백작은 웃음을 지었다. 짙은 미소였다. 마리가 그 미소를 보며 또 한 번 기묘한 기시감을 느낄 때, 백작이 말했다.

“네, 맞습니다. 저 카탈락은 한자동맹의 일원인 올스덴 가문의 대표로서 전하께 제안할 거래가 있습니다.”

“무엇이지?”

“제국의 서남부 지방에 계획 중인 교역 도시에 교역로를 만들고 싶습니다. 투자도 하고요.”

황태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서남부는 마리가 고안한 사탕수수를 재배할 지방으로, 황태자는 그 사탕수수를 기반으로 교역 도시를 건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서남부 지방에서 생산될 설탕은 물론 지중해의 특산품을 북방과 거래되는 장소로 만들 계획으로, 성공만 하면 제국에 어마어마한 부를 안겨 줄 것이다. 다만 도시를 건설할 재원과 교역로의 개발이 문제였는데, 한자동맹의 거상이 도와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건 올스덴 가문의 뜻인가, 아니면 한자동맹의 뜻인가?”

“일단은 저 개인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거래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나머지 동맹들도 알아서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황태자는 입을 다물었다. 반대할 이유가 없는 이야기였다. 아니, 오히려 제국 측에서 먼저 나서서 부탁해야 할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진 않았다. 뭔가 석연치 않았다.

“제국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내용이군. 투자에 교역로 개발이라니. 하지만 너무 좋은 조건이라 석연치가 않아. 너희 올스덴 가문은 왜 이런 일을 제안하는 거지?”

“그야 당연히 장기적으로 큰 이득이 될 것으로 판단해서입니다. 전하께서 그리는 계획이 성공만 한다면 프랑스의 샹파뉴를 능가하는 교역 도시가 탄생할 테니까요.”

얼핏 들으면 타당해 보이는 이유였다. 하지만 황태자는 매섭게 카탈락 백작을 노려보았다.

“백작.”

“네?”

“난 속에 다른 속셈을 가지고 있는 자를 좋아하지 않아.”

경고였다. 카탈락 백작은 잠시 말없이 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맞습니다, 전하. 사실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긴 합니다.”

“말해봐라.”

“교역 도시를 돕는 대가로 수도에서 한 가지 사업에 대한 허가권을 받고 싶습니다.”

“무슨 사업이지?”

카탈락 백작은 빙글 미소를 지었다.

“문화 사업입니다.”

“문화 사업?”

“네, 정확히 말하면 오락 사업이죠.”

그러며 그는 테이블 아래에서 미리 준비한 물품을 꺼내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직사각형 모양의 종이 뭉치. 귀족들 사이의 유흥인 카드였다.

“카드군. 카드놀이에 대한 사업을 하겠다는 건가?”

“네, 카드놀이는 누구나 좋아하지만, 막상 즐기기가 편하지 않죠.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을 모으기가 의외로 불편하니까요. 그래서 아예 귀족들이 편하게 와서 카드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고급 사업장을 운영해 볼까 싶습니다.”

황태자는 잠시 생각했다.

‘카드놀이에 대한 오락 사업이라. 독특한 발상이군.’

“그런데 왜 우리 제국의 수도이지? 그대들 한자동맹 근처에도 사업할 곳은 많을 텐데?”

카탈락 백작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거야 이 동제국의 수도야말로 대륙에서 가장 번창한 대도(大都)이기 때문입니다. 문화 사업은 이런 곳에서 해야죠.”

카탈락 백작의 말은 타당했다. 문화 오락 사업은 번창한 도시에 적합한 사업이었으니까.

“그렇군.”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문제는 없어 보였다. 어차피 카드놀이는 귀족들이 일상적으로 즐기는 놀이었으니까.

“알겠다. 다만 속임수는 안 된다.”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반드시 공정하게 운영될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황태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그렇게 알고 진행하지. 자세한 이야기는 재상 오른과 하도록.”

“네, 좋게 생각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황태자는 마리와 함께 방을 나가며 백작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대가 생각하는 카드 사업의 이름은 무엇이지?”

카탈락 백작은 짙게 미소 지었다. 마리가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미소였다.

“‘카지노’라 하옵니다, 전하.”

* * *

히잉!

곧 황태자와 마리가 탄 마차가 카탈락 백작의 저택을 빠져나갔다. 카탈락 백작은 저택 2층 자신의 방에서 한 손에 와인을 들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훨씬 예뻐졌군.”

그렇게 중얼거리는 백작의 얼굴은 아까와 전혀 달랐다. 호인처럼 보이는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무감정하고 섬뜩한 느낌을 주는 차가운 표정만이 가득했다.

“무얼 말입니까?”

그를 수발드는 저택의 집사가 물었다.

“힐데른 예작, 아니.”

백작은 자신이 위장한 가면을 벗고 말했다.

“모리나 왕녀 말이야.”

모리나 왕녀! 놀라운 이야기였다. 마리의 진정한 정체였으니까. 하지만 집사는 전혀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태연하게 답했다.

“예, 지난번 봤을 때보다 많이 예뻐진 것 같군요.”

카탈락 백작, 아니, 서제국의 황제 요하네프 3세는 고개를 끄덕인 후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이거 큰일이군. 한눈을 팔 때가 아닌데, 이러다 진짜로 반하겠어.”

그 말에 집사가 여상하게 답했다.

“마음이 가시면 취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뭐라고?”

“어차피 계획을 위해서는 모리나 왕녀를 폐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최선 아니었습니까? 상황이 뜻하지 않게 흘러가면 죽여야겠지만.”

마치 아침 날씨를 이야기하듯 담담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놀랍다 못해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마리를 요한의 여인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죽여야겠다니? 하지만 요한은 그 놀라운 이야기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 로이스. 네 말이 맞다. 계획을 완전히 우리 통제에 두려면 죽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요한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섬뜩한 느낌이 드는 미소였다.

“하지만 이왕이면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훨씬 좋아.”

요한은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취하고자 했다. 계획도 계획이지만, 그의 마음이 그걸 바랐다. 로이스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다른 내용을 보고했다. 이것 역시 놀라운 내용의 이야기였다.

“아편을 실은 배가 수도 인근의 유프테강 하류 쪽에 곧 도착한다고 합니다.”

“그래? 생각보다 빠르군. 수량은?”

“충분합니다. 아편이 수도로 풀리면 제국 내무부와 치안부는 당장 마비될 것입니다.”

“좋군.”

요한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의 흔적은 남기지 않았겠지?”

“네, 올스덴 가문이나 서제국 쪽이 아닌 아예 3국을 돌아 거래했으니까요. 만약 밀매업자들이 체포된다 해도 우리 쪽의 흔적은 그림자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대화 내용. 최근 마리와 황태자가 골머리를 앓고 있던 마약 밀매 사건의 배후에 그들이 있었던 것이다.

요한은 피식 웃었다.

“곧 재미있어지겠군. 란은 어떻게 대응하려나.”

란. 황태자의 아명이었다. 요한은 와인을 한 모금 머금으며 창밖을 통해 저 멀리 밤하늘 너머를 바라보았다. 마리와 황태자의 마차가 사라진 쪽이었다.

한편 황태자와 마리는 마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전하, 혹시 불편하신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마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백작의 저택에서 나온 후 황태자가 줄곧 아무런 말도 없었던 것이다.

“아아, 아까 백작과의 거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문제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제국에 무척이나 유리한 거래였지.”

“그런데 어째서?”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제국에 유리한 거래였다. 새로운 교역 도시에 대한 투자는 별개로, 카드 사업도 제국에 나쁘지 않았다. 카드 사업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의 4할을 세금으로 진상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거래를 한 것치고는 황태자의 분위기가 너무 무거웠다.

“너무 유리해서 카탈락 백작의 진의가 의심되는군.”

마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백작에게 다른 숨겨진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근거는 없다. 단순한 느낌이긴 하지만 내가 백작이라면 이렇게 남에게 퍼주는 거래를 하지는 않았을 것 같군.”

마리는 황태자의 생각에 동감했다. 그녀도 카탈락 백작에게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보고 있으면 괜히 불길한 느낌이 들어.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제가 백작에 대해 따로 조사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대는 됐다.”

“네, 어째서?”

“이미 맡고 있는 일이 있지 않은가?”

“아…….”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황태자의 보좌관으로서 내무대신과 협력하여 마약 밀매 사건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다.

‘황태자가 나를 신뢰해서 맡긴 일.’

아무리 보좌관이라지만, 시녀에다 여자인 그녀가 마약 밀매 사건에 관여하는 것에 반대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황태자가 그녀의 능력을 신뢰해 전격적으로 맡긴 것이다.

“그대는 일단 그 일에 집중하도록. 카탈락 백작에 대한 일은 오른에게 맡길 테니.”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화제가 종료된 후 대화가 잠시 중단되었다. 마리는 창밖을 보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 그런데 마차의 방향이?”

한참을 지나 보니, 마차는 황궁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뭔가 처음 보는 언덕길을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아아. 제대로 가고 있는 거다.”

“어디 따로 들르실 곳이 있습니까?”

“그래.”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미리 이야기 안 해준 거지? 그런데 황태자가 생각지도 못 한 이야기를 하였다.

“미안하다.”

“전하?”

“사실 오늘 외출의 핵심은 이것이었는데, 중간에 이런저런 일이 있어 신경을 못 썼군.”

마리는 황태자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말이지?

“전하, 무슨 말씀이신지……?”

“가 보면 안다. 곧 도착하겠군.”

마리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뭐지? 그때, 마차 옆에서 말을 몰던 알몬드가 말했다.

“곧 목적지입니다.”

“준비는 차질 없이 했겠지?”

“네, 미리 확인했습니다.”

마리는 이해할 수 없는 대화였다. 그녀가 재차 물어보려 할 때, 황태자가 말했다.

“도착했다.”

“……?”

황태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린 마리는 그가 한 말들의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황태자가 조금은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저, 전하…… 어째서…….”

수도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원이었다. 그 정원에 수없이 많은 촛불이 가득 채워져 예쁘게 불을 빛내고 있었다. 마치 그녀를 환영하듯, 축복하듯.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광경. 황태자가 오로지 그녀를 위해 준비한 광경이었다.

“저, 전하 어째서……?”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자신을 위해 준비한 것을 보니 마음이 울렁했다. 그러면서 가슴 한구석에 의문이 들었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을? 황태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가져오도록.”

곧 정원 한구석에서 시종이 무언가를 가져왔다. 시종이 가져온 것을 본 마리가 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장미꽃과 커다란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던 것이다. 옆 트레이의 은쟁반 안에는 생크림 케이크도 있었다.

‘설마?’

마리는 얼마 전 황태자가 자신에게 물었던 것이 떠올랐다.

“혹시 좋아하는 꽃이 있나?”

“장미를 좋아합니다만…….”

“좋아하는 케이크는?”

“……생크림 케이크를.”

‘왜? 어째서?’

그때, 황태자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내가 선물을 해본 적이 별로 없다. 그래서 좋아할지 모르겠군.”

그는 꽃을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오늘 생일 축하한다.”

“……!”

“좀 더 잘해 주고 싶었는데, 그렇게 못 해서 미안하다.”

마리의 눈이 커졌다. 황태자가 이런 준비를 한 이유. 그건 본인도 생각 못 한 그녀의 생일 때문이었던 것이다.

“저, 전하…….”

꽃을 받아 든 마리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가슴이 파도를 만난 것처럼 흔들려 뭐라고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황태자는 잠시 주저하더니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그녀의 목에 직접 걸어주었다. 그러며 그가 말했다.

“그대의 생일이지만, 사실 나에게 더 기쁜 날이다. 왜 그런지 아느냐?”

“…….”

“그대가 이렇게 태어나 그대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맙다. 이렇게 태어나 주어서. 나와 만나 주어서.”

그녀를 향한 마음이 담긴 목소리. 마리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이유 없이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황태자는 따뜻한 빛이 감도는 눈동자로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영원히 축복받길. 내 소중한 그대여. 이 순간 함께 있어주어 고맙다.”

그 말을 마친 그가 그녀를 감싸 안았다. 조심스러우면서도 부드러운 포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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