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있는 시녀님-25화 (26/54)

Chapter 3

시간이 흘렀다. 겨울이 깊어지고, 새해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하늘에서 내린 눈이 사방을 하얗게 물들였지만, 황궁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황태자는 국정에 열중이었고, 키에르한은 황제를 수호했으며, 마리도 여전히 황태자를 섬겼다.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매우 큰 변화가 있었다.

“오늘 본 회의의 의제들입니다.”

“그대가 정리한 건가?”

“네, 사안별로 참고 자료를 첨부해 두었습니다.”

마리는 조금 더 여관로서의 업무를 맡게 되었다. 이제는 단순한 시녀가 아닌 보좌관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원래 직위가 높은 시녀들이 주인의 일을 보조하는 것은 종종 있었지만, 무려 황태자의 업무를 보좌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가 황태자의 일을 보조하는 것에 대해 안팎으로 논란이 있었다. 재상 오른의 경우에는 차라리 정식 보좌관을 임명하라 성화였지만, 황태자는 ‘그녀보다 내 일을 잘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지?’라며 반대 목소리를 잠재웠다.

확실히 그녀의 업무 능력은 탁월한 바가 있었다. 오른도 그건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 그래도 시녀가 전하의 국정을 보조하는 것은…….’

오른은 그렇게 떠듬떠듬 반대를 표했지만, ‘그녀의 직책이 문제면 아예 정식 보좌관 지위를 부여하면 되겠군. 어떻게 생각하나?’라며 황태자는 한술 더 떠 그렇게 나왔다.

졸지에 마리는 황태자의 전속 시녀 겸 보좌관이 되었다. 마리는 자신에게 내려진 보좌관 직위를 떠올리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보좌관이라니.’

황태자의 보좌관. 요직 중의 요직인 자리였다. 직책 자체도 높았고, 제국의 지배자를 바로 옆에서 보필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런 어마어마한 직책에 시녀인 그녀가 오르게 되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거절하려고 했지만.’

의외로 황태자는 완강히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는 마리, 너다.”

강한 신뢰가 담긴 말이었다. 마리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보좌관이 된 것이 나쁘진 않지만.’

이제 그녀는 더는 도망가지 않고 그를 옆에서 보필하기로 마음먹은 상태다. 따라서 그를 보필하는 데 보좌관의 직위는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피로해 보이는구나. 혹시 몸이 불편한 것은 아니냐?”

“아…… 괜찮습니다, 전하.”

“무리하지 말도록. 절대로.”

마리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게 당면한 문제. 그건 바로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이었다.

“너의 모든 것, 모든 마음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 널 가지겠다.”

그날의 일 이후로, 그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다.

‘난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받아들여선 안 돼.’

마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사실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갈망하는 그의 눈빛에 끝까지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게 그녀의 가장 큰 문제였다.

* * *

“아, 빗방울이.”

늦은 시간까지 서류를 보다 뒤늦게 사자궁을 나온 마리는 하늘을 보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진눈깨비가 섞인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어쩌지? 숙소까지 그냥 가면 홀딱 젖을 것 같은데.’

고민하고 있을 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우산이라도 빌려드릴까요, 레이디?”

“키엘 님!”

마리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은발의 키에르한이 우산을 든 채 옅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이곳에는 어째서? 혹시 저 때문에……?”

마리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키에르한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냥 우연히 지나가다 마주친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특별히 마리 양 때문에 기다린 것은 아닙니다.”

그의 말에 마리는 웃음을 지었다. 바보가 아니라면 그가 일부러 자신을 위해 기다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저렇게 말하는 것이리라.

“바쁘신데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세요. 비나 눈 좀 맞아도 괜찮으니.”

“생각해 보겠습니다.”

“꼭이에요.”

사실 키에르한이 그녀를 마중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전에 그녀가 눈에 홀딱 젖은 것을 우연히 목격한 그는 그다음부터 비나 눈이 오는 날마다 그녀가 숙소에 돌아가는 시간에 맞춰 우산을 들고 기다리곤 했던 것이다.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그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키엘 님.’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자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키에르한의 마음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잘해 줄수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편 그녀가 한숨을 내쉬자 키에르한이 몸을 흠칫했다.

“마리 양.”

“네?”

키에르한은 주저하다가 물었다.

“혹시 제가 이렇게 나오는 것이 불편하십니까?”

그 말에 그녀는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그, 그건 아니에요. 다만…….”

“다만?”

“……지난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죄송해서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실 마리는 얼마 전 키에르한의 마음을 밀어냈다. 더는 그의 마음을 외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전 각하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어요.”

그날, 마리는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최대한 딱딱한 말투로 말했었다. 그런데 키에르한의 대답은 의외였다.

“받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애초에 보답을 바라고 마리 양을 좋아한 것이 아니니까요.”

그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조심히 자신의 입술로 이끌며 말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저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으니 그 정도만 허락해 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하지만…….”

“부탁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빛이 너무 간절해서 마리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마리 양.”

그때, 키에르한이 상념에 빠져 있던 그녀를 불렀다.

“지난번 말씀드렸다시피 저에게 미안해할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그저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일 뿐입니다. 저는 마리 양과 이렇게 잠시 함께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기쁩니다. 그러니 마리 양은 그냥 편하게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편하게. 도저히 그의 말처럼 생각할 수는 없었지만, 마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옅은 미소를 띤 채 잠시 가만히 그녀를 보던 키에르한이 물었다.

“마리 양.”

“네?”

“혹시 이번 신년 연회 때 참석하십니까?”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의 하급 시녀 때라면 모를까, 현재 그녀는 작위를 받은 귀족이니 신년 연회에 참석할 의무가 있었다.

“네, 그런데 그건 왜?”

“음…….”

키에르한은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그날 신년 연회 때 제 파트너가 되어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

마리가 놀라 그를 보자 키에르한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냥…… 저는 마리 양과 함께라면 좋을 것 같아서……. 만약 불편하시면 괜찮습니다.”

마리는 잠시 망설여졌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부탁도 아니고, 고작 연회의 파트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네, 알겠어요. 그런데 제가 동행하면 후작님께 누가 되지는 않을지…….”

그녀도 나름 귀족 작위를 받긴 했지만 대귀족인 키에르한과 비교하면 격이 한참 떨어졌다. 하지만 키에르한은 고개를 저었다.

“누라니요?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러며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히려 지극한 영광입니다.”

그런데 마리는 다음 날 황태자에게 생각지도 못 한 말을 들었다.

“신년 연회 때 내 파트너가 되어주겠나?”

“……네?”

마리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어찌 감히 전하의 에스코트를. 거두어주시옵소서.”

하지만 황태자는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대가 아니라면 누가 나의 에스코트를 받지?”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뜨거웠다. 그 눈빛에 담긴 의미는 명백했으나, 마리는 애써 고개를 돌리며 쥐 죽은 듯 말했다.

“그…… 다른 지체 높은 영애들이나 사절로 온 타국의 공주나 저 말고…….”

황태자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

“…….”

“마리, 날 봐라.”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타는 듯한 갈망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옴짝달싹 얽어매는 듯한 눈빛이라 그녀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힘들었다.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너야.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알겠나?”

그 노골적인 말에 마리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그녀는 알 수 없이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 마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상관없어.”

황태자는 나직이 말했다.

“그대의 마음,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아무리 나를 밀어내더라도 소용없어.”

“……!”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그녀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이번 신년 연회의 파트너는 안 됩니다.”

“어째서지?”

“키에르한 후작 각하와 이미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 말을 꺼낸 순간, 황태자의 얼굴이 굳었다.

“……키에르한과?”

“네, 전하. 선약이 되어 있어서 에스코트를 받을 수 없어 죄송합니다.”

마리는 일부러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약속이 되어 있다 하니 황태자는 신년 연회에 대해 더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그인 만큼 업무 중 특별히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리는 그의 기분이 굉장히 저조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 * *

신년 연회의 날이 다가왔다. 마리는 오래간만에 시녀복을 벗고 드레스를 입고 단장했다.

“와, 정말 예쁘다, 마리.”

하급 시녀 때부터의 친구 제인이 그녀의 단장을 도와주었다. 작위를 받아 귀족이 되었지만, 서로 둘만 있을 때는 말을 편하게 하였다.

‘괜찮나?’

마리는 거울을 보며 생각했다. 꾸미지 않은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의 소녀가 거울 속에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나름 괜찮은 것 같기도 하네.’

거울 속의 그녀는 스스로가 보기에도 귀엽고 예뻤다. 곱게 꾸며진 자신의 모습을 보니 마리는 나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꼭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만족이 되는 것 같았다.

“오늘 고마워. 나중에 맛있는 것 사 줄게, 제인.”

“응, 연회 잘 다녀와!”

숙소를 나가니 그녀를 에스코트하기로 한 키에르한이 기다리고 있었다. 깔끔한 친위대 정복을 입은 그는 마리의 변한 모습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리 양?”

그가 너무 놀란 표정이어서 마리는 살짝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이상…… 한가요?”

키에르한은 크게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긴요. 아름답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그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오늘 이렇게 아름다운 레이디를 에스코트할 수 있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지나친 극찬에 마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저, 저도 에스코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법에 맞춰 인사를 받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 후 말했다.

“그런데 곤란하군요.”

“네?”

마리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가 무언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예쁜 모습은 저 혼자만 보고 싶은데 말입니다.”

마리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이런 유의 말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노, 농담하지 마세요.”

“농담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

마리가 당황해 입을 다물자 키에르한이 못마땅한 기색을 지우고 손을 내밀었다.

“어쩔 수 없지요. 만약 이상한 날파리가 꼬이면 제가 다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아, 안 꼬여요.”

키에르한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가시죠.”

“……네.”

마리는 귓불까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숙소와 연회장은 지척이었다.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조금 걸으니 금방 연회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국을 수호하는 방패, 키에르한 후작 각하입니다!”

연회장 입구를 지키는 나팔 기수가 그의 등장을 알렸고, 연회장 안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친위대 단장인 후작 각하께서? 원래 이런 연회는 잘 참석 안 하시는데?’

‘옆의 레이디는 누구지?’

사람들의 관심은 키에르한의 손을 잡고 들어온 마리에게 집중되었다. 키에르한이 연회에 여인을 에스코트하며 입장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귀엽고 예쁘게 생긴 소녀네. 수도에 저런 레이디가 있었나?’

‘어디서 본 것 같은 소녀인데, 어디서였지?’

사람들은 마리를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 시녀복을 벗고 곱게 꾸민 그녀의 모습에서 평소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지금의 그녀는 어느 누가 봐도 귀엽고 예뻤다. 최고의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맑고 귀여운 그녀 나름의 매력이 느껴졌다.

“가만…… 온 힐데른 아닌가요?”

“어, 정말?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네요.”

누군가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시 보니 그녀가 맞았다. 다들 시녀복 차림의 수수한 모습에서 탈바꿈한 그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편 마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관심은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나팔 소리가 울리고 문지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태자 전하 납십니다!”

평소보다 빠른 황태자의 등장에 사람들의 시선이 입구로 몰렸다. 황태자는 특별히 누군가와 동행하지 않고, 홀로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연회장의 음악이 일순간 멈추었고 모두 황태자에게 예를 표했다. 황태자는 예를 받은 후, 마치 누군가를 찾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키에르한의 에스코트를 받고 있는 마리에게 정면으로 꽂혔다.

“…….”

마리는 엉거주춤한 자세를 했다. 거리가 꽤 있었지만 그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이 분명히 느껴졌다. 철가면 아래로 드러난 그의 눈빛은 굉장히 불편한 기색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로, 그리고 예쁘게 단장한 드레스로, 마지막으로 키에르한의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으로 옮겨 갔다. 키에르한의 하얀 장갑 위에 올려진 그녀의 손을 본 순간, 라엘의 눈동자에서 전해지는 불편함은 극에 달해 마리는 어쩔 줄 모르겠는 마음이 들었다.

‘어, 어쩌지.’

물론 그녀가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었다. 연회에서 누구의 에스코트를 받든 그건 그녀의 자유니까. 하지만 황태자의 저런 눈빛을 받으니 뭔가 굉장히 잘못한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때, 키에르한이 자신의 손 위에 올라가 있던 그녀의 손을 꽈악 붙들었다. 그의 강인한 손은 그녀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

라엘은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더니 고개를 획 하고 돌리고 상석에 위치한 자신의 자리로 올라갔다. 뭔가 불쾌해 보이는 모습인지라,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신년 연회를 시작하도록.”

“네, 전하.”

황태자의 손짓과 함께 신년 연회가 시작되었다. 먼저 성당의 추기경이 기도문을 낭독하며 축사를 하였고, 황태자가 예식을 진행하였다.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예를 갖추어 그 절차를 지켜보았고, 황궁 오케스트라단의 신년 축하 음악 공연이 이어졌다.

타앙!

악장 바한이 지휘봉을 힘차게 내젓자 높고 우렁찬 팀파니 소리가 음악의 시작을 알렸다. 곧바로 뒤따르는 현악기의 경쾌한 울음소리. 신년 연회에 어울리는 즐겁고 밝은 전주곡이라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음악을 즐겼다.

“좋군요.”

“네, 역시 황궁 악단의 악장 바한이에요. 훌륭합니다.”

사람들은 뛰어난 음악을 연주하는 악장 바한을 칭찬했다. 그런데 눈썰미 좋은 몇몇 사람은 오케스트라단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단상 가운데 피아노가 덩그러니 있었던 것이다.

“저 피아노는 무엇일까요?”

“그러게요. 가운데에 피아노가 있네요.”

“이번 전주곡이 끝난 후 마에스트로 바한이 연주하려는 걸까요?”

“그러겠죠? 바한 경의 피아노 솜씨가 궁금하군요.”

사용하지 않을 피아노를 굳이 연회장에 가져다 놓을 이유는 없다. 사람들은 이번 곡이 끝난 후 이어질 악장 바한의 피아노 연주를 기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곡이 끝을 맺었고, 다음 곡을 연주할 차례가 왔다. 악장 바한이 이어 연주할 곡을 소개했다.

“다음에 이어질 곡은 피아노 협주곡, ‘축복(Blessing)’입니다.”

예상대로 이번에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단의 협연이었다. 사람들은 훌륭한 전주곡을 들려준 악장 바한의 피아노 솜씨를 기대했다. 그런데 바한은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 연주를 위해 특별한 연주자를 초빙했습니다. 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음악적 소양을 지닌 분으로, 이번 신년 연회를 빛나게 해줄 연주자입니다.”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악장 바한이 연주하는 게 아니라고? 어떤 연주자이기에 저런 거창한 소개지?

“누구지?”

“그러게요? 독일 지방에서 유명한 음악가라도 초빙해 왔나?”

이윽고 악장 바한이 연주자를 소개했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번 협주곡의 피아노 솔리스트, 힐데른 예작님입니다.”

“……!”

힐데른 예작, 즉 마리가 피아노 연주자였던 것이다!

‘아니, 온 힐데른이 피아노 연주를?’

‘물론 어느 정도 피아노를 친다고 이야길 듣긴 했지만…….’

연회장이 술렁거렸다. 마리가 어떤 음악 실력을 지니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잘 부탁합니다, 힐데른 예작님.”

“네, 저도 잘 부탁해요.”

단상 위로 올라간 마리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 후, 피아노 앞에 가서 앉았다. 사람들은 과연 그녀가 제대로 된 연주를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에 찬 시선을 보냈다.

“시작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첫 피아노 건반 음을 누르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쓸데없는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맑고도 맑은,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듯한 음색이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아…….’

마치 천사의 아리아 같은 투명한 멜로디. 푸른 호수에 햇살이 반짝이듯, 새싹에 맺힌 이슬이 떨어지듯, 청명한 소리가 피아노의 건반을 통해 흘러나왔다.

‘이런 아름다운 소리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음색에 빠져들었고, 곧 악장 바한의 지휘와 함께 오케스트라단의 음악이 그 사이로 흘러들었다.

‘역시 대단해.’

악장 바한은 지휘봉을 흔들며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선율을.’

사실 이번 협연은 악장 바한이 고안한 깜짝 이벤트였다. 이전부터 마리의 실력을 동경해 왔던 그는 그녀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어 했으나, 여러 면으로 바쁜 마리의 사정상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그녀와의 협연이었다. 가르침 대신 그녀와 연주라도 같이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바한의 생각은 대성공이었다. 지금 그는 그녀와의 연주를 통해 지극한 고양감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대단한…… 그야말로 천상의 음악…….’

그러한 고양감은 그만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연회장에서 음악을 듣는 청중도 똑같은 고양감을 느끼고 있었다. 맑게 시작한 음색은 주제를 거듭하며 점차적으로 깊은 의미를 더해 갔다. 투명하면서도 깊은, 마치 천사들의 합창 같은 소리가 연회장 안을 가득 채웠고, 사람들은 천상에 초대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천국의 소리를 듣는 듯한 환희. 오케스트라의 음악을 배경으로 피아노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나아갔고, 옥타브를 넘나드는 현란한 기교는 사람들을 향해 찬란한 축복을 뿌렸다.

짝짝짝짝!

그렇게 연주가 끝을 맺었고,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연회장 안을 가득 메웠다. 이 자리가 신년 연회가 아니었다면 터질 듯한 환호성이 울려 퍼졌을 것이다. 마리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청중을 향해 인사 후 키에르한의 옆자리로 돌아왔다.

“최고입니다. 내 생애 최고의 음악이었습니다.”

키에르한이 귓속말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진심이 담긴 칭찬이라 마리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사람들은 연주의 여운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연회가 이어졌다.

“그러면 모두 즐겁게 즐기도록.”

황태자가 공식 절차가 끝났음을 알렸고, 곧 흥겨운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된 것이다. 사람들은 새해의 시작을 기념하며 밤늦게까지 먹고 마시며 춤을 출 것이다. 그런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의외의 주목을 받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훌륭한 연주를 해낸 마리였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다가와서 감탄의 말을 전했다.

“이번 연주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네, 정말 훌륭했어요.”

“다음번에 또 연주를 들을 수는 없을는지요?”

마리는 수많은 사람이 자신을 둘러싸자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늘 자신을 숨기기만 했던 그녀는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에게 다가온 이들 중 생각지도 못 한 인물이 있었다.

“훌륭한 연주였어요.”

흑발의 아름다운 미녀, 아리엘 공녀였다. 마리는 아리엘 공녀에게 놀라 고개를 숙였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녀 저하.”

“좋게 봐준 게 아니라 정말 훌륭하던데요. 감동적인 연주였어요. 이런 솜씨가 있었으면서 지금까지 왜 숨기고 있었던 거예요?”

마리는 그저 가만히 웃을 뿐 대답할 수 없었다. 아리엘은 새의 깃털로 장식한 부채를 펼치더니 뜻밖의 제안을 하였다.

“다음에 우리 가문의 저택에서 티 파티가 있어요. 혹시 생각 있으시면 참석하겠어요?”

마리는 눈을 깜빡였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인지 헷갈렸던 것이다.

‘아리엘 공녀가 나를?’

아리엘은 그녀가 곧바로 대답하지 않자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싫으면 안 와도 돼요.”

“아, 아니! 꼭 참석하겠습니다.”

“억지로 올 필요는 없어요.”

“억지 아닙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리엘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등을 돌려 사라졌다. 자신이 마리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이 민망한 눈치였다. 마리는 그런 아리엘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공녀 저하! 초대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초대장 보낼 테니 꼭 오기나 해요.”

그 모습을 보던 키에르한이 미소를 지었다.

“아리엘 공녀와 친해진 모양이군요.”

‘그런가?’

친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관계에 변화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마 사냥터에서의 위기를 같이 겪은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마리 양.”

“네?”

생각에 빠져 있는데, 키에르한이 그녀에게 말했다.

“저와 함께 춤을 춰 주실 수는 없으시겠습니까?”

“아…… 그건 좀…….”

마리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거절에 키에르한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저와 춤을 추는 것이 싫으신 것입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단지 제가 춤을 못 춰서…….”

마리는 부끄러운 얼굴로 말했다.

“만약 같이 춤을 추면 엄청 실례하게 될 거예요.”

키에르한은 자신을 거절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고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 괜찮습니다. 어차피 편하게 추는 춤인걸요.”

“안, 안 돼요. 분명 엄청 밟을 거예요.”

“네?”

“키엘 님의 발이요. 엄청 밟을 게 분명해요.”

마리는 그것만은 정말 안 된다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말에 키에르한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그런 이유라면 정말 괜찮습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하얀 장갑 너머로 강인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이 전해졌다.

“발이 밟히는 것은 리드하는 사람이 초보일 때나 그런 것이죠. 제가 생각보다 굉장히 잘 추니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지난번 가면무도회 때 한번 같이 춰 봐서 아시지 않습니까?”

“…….”

“저만 따라오면 되니 편하게 한 곡 추시죠, 레이디.”

마리는 잠시 그에게 붙들린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진짜…… 발을 밟을지도 모르는데.”

“잘 피할 테니 괜찮습니다. 그리고 밟히면 좀 어떻습니까?”

키에르한은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리 양인데. 얼마든지 밟아도 괜찮습니다.”

둘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리가 이야기한 것처럼 그녀의 춤은 미숙하기 그지없었다. 애초에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에르한이 정말로 능숙했다. 그는 최대한 쉽게 따라올 수 있도록 천천히 그녀를 이끌었고, 그녀가 실수하려고 할 때마다 능숙한 솜씨로 붙들어주었다. 덕분에 마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춤을 즐길 수 있었다.

“감사해요.”

“무엇 말입니까?”

“그냥요. 전부 다.”

그녀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래, 그에게는 항상 감사하기만 했다. 모든 것이 전부 다. 하지만 그래서 동시에 더욱 미안했다. 그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기에.

‘하아.’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키에르한이 표정을 굳혔다. 그녀의 속마음을 짐작한 걸까? 그가 이렇게 말했다.

“그런 표정 안 지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지금 충분히 행복하니까요.”

“……네.”

마리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자꾸만 안 좋은 표정을 보이는 것도 그에게 실례일 것 같아 그녀는 복잡한 생각을 떨쳐 버렸다. 그리고 음악의 흐름에 맞춰 춤추는 것에만 집중했다.

한편, 그런 그녀를 끓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연회장 상석에 앉아 있는 황태자 라엘이었다.

“…….”

라엘은 입을 굳게 다물고 키에르한과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그녀를 쏘아 보았다. 가슴이 들끓었다. 오만 가지 감정이 그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뭘 저렇게 웃고 있는 거지? 저놈과 춤추는 것이 그렇게나 즐거운가? 춤이야 나도 얼마든지 춰 줄 수 있는데.’

라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키에르한의 손이 그녀의 몸을 스칠 때마다 터질 듯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둘을 떨어뜨려 놓고 싶었다.

‘옷은 왜 저렇게 입고 온 거야. 다들 힐끗힐끗 쳐다보잖아.’

연회장에 와서 그녀를 본 순간, 라엘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평소에도 예뻐 보였지만 오늘은 마치 천사가 내려온 듯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물론 마리가 실제로 그렇게까지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라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런데 그렇게 아름답게 꾸민 그녀는 자신이 아닌 키에르한의 에스코트를 받고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순간, 두근거리던 마음은 와락 구겨졌다. 더구나 상의가 파인 드레스를 입은 탓에 웬 잡놈들이 힐끗힐끗 그녀를 바라보았다. 구겨진 기분이 더욱더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들에게 눈 치우라고 외치고 싶었다.

‘젠장.’

라엘은 애꿎은 술만 마셨다.

그 순간이었다. 그들의 춤을 보던 라엘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마리가 키에르한의 품으로 부드럽게 안겨 들어간 것이다!

‘……!’

사실 춤에 따른 동작에 불과했지만 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와 키에르한이 서로의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을 본 순간, 라엘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졌다. 머릿속이 하얗게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전하?”

곁에 있던 오른이 벌떡 일어선 그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철가면 아래에서 느껴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잠시 다녀오겠다.”

“네? 어디를?”

라엘은 대답하지 않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저, 전하?”

황태자가 향한 곳. 그곳은 막 춤이 끝나고 홀에서 내려온 마리와 키에르한이 있는 곳이었다.

* * *

“괜찮으셨습니까?”

“네, 즐거웠어요. 잘 이끌어주셔서 감사해요.”

홀에서 내려온 마리는 이마에 살짝 흐르는 땀을 닦았다. 워낙 능숙하게 이끌어준 덕에 문제없이 춤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면 잠시 쉰 후 조금 있다가 한 곡 더 추시겠습니까?”

마리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칫했다. 왠지 모르게 등 뒤로 싸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뭐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그녀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황태자가 타오르는 듯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마리는 당황해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가 왜?’

마리는 이 근처에 혹시 다른 용무가 있나 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보러 온 것이다.

“…….”

황태자는 아무런 말 없이 그녀를 바라만 보았다. 그는 할 말이 굉장히 많은 듯한 분위기였지만 입을 꾹 다물고 열지 않았다. 마리는 그 눈빛을 보니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굉장히 잘못한 느낌이었다.

‘어, 어쩌지? 아니, 내가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긴 한데…….’

마리가 쩔쩔매고 있을 때, 키에르한이 그녀의 앞으로 나섰다. 마치 황태자의 시선에서 그녀를 지키듯.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황태자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비켜.”

“……!”

“난 네가 아니라 마리에게 용무가 있다. 그러니 비켜.”

키에르한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물러서지 않고, 예의를 갖추되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 양은 지금 제 파트너입니다. 그녀에게 무슨 용무가 있는지 저도 궁금하군요.”

그 말에 황태자가 키에르한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살갗이 베일 듯한 시린 눈빛이었다.

“너…….”

그 순간, 자신을 사이에 두고 둘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안 좋아지자 마리가 허겁지겁 둘 사이로 나섰다.

“자, 잠깐만요! 저 괜찮으니 말씀하시옵소서, 전하!”

마리는 둘 사이에 껴서 눈치를 살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자신을 사이에 두고 이런 난리라니!

“…….”

라엘과 키에르한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둘 모두 서로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뭔가 가만히 놔두면 충돌이 일어날 것 같아 마리는 다시 급히 고개를 숙였다.

“말씀해 주십시오, 전하!”

라엘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마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하얀 장갑을 낀 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

무슨 뜻인지 몰라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뱉었다.

“춤을 신청하러 왔다.”

“……네?”

“나와 춤을 추어주지 않겠나, 마리?”

“……!”

그 생각지도 않은 제안에 마리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화, 황태자와 춤을?’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키에르한과도 간신히 추었는데 어떻게 황태자와 출 수 있겠는가? 하지만 황태자는 한마디 말을 더 뱉었다.

“참고로 거절은 허락하지 않겠다.”

* * *

마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홀 위로 올라갔다. 제국 3대 대귀족 중 하나인 키에르한과 춤을 춘 후, 이어 황태자와 춤을 추는 그녀를 보고 사람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번 신년 연회의 주인공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온 힐데른 같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방금 천사의 음악 같은 연주를 보여 주고 제국에서 가장 존귀하고 아름다운 두 남자와 연달아 춤이라니. 정말 부럽네요.”

연회장의 귀부인들이 부러운 표정으로 떠들었다.

“그런데 그 소문이 역시 사실일까요?”

“뭐요?”

“전하께서 힐데른 예작에게 마음이 있다는 소문이 황궁에 파다하더라고요.”

“정말요?”

“네, 저도 반신반의했지만, 전하께서 직접 춤을 신청하신 것 보니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르겠는데요?”

연회에서 춤을 추는 일이 극히 드문 황태자였다. 그런 그가 직접 춤을 신청하다니. 눈이 휘둥그레질 일이었다.

“그러면 황태자비는 힐데른 예작이 되는 걸까요?”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왜요? 신분 때문인가요? 하긴 황태자비가 되기에는 힐데른 예작의 신분이 너무 낮으니.”

하지만 질문을 받은 귀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신분도 신분이지만, 키에르한 후작 각하도 그녀에게 마음이 있다는 소문이 있거든요.”

“정말요?”

그 말에 다른 이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오늘 키에르한 후작 각하가 그녀를 에스코트한 것 보세요. 원래 이런 연회에는 일절 관심도 없으신 분인데.”

“하긴…….”

“어쨌든 후작 각하도 힐데른 예작에게 마음이 있어서 그녀가 황태자비가 될지는 조금 더 봐야 할 것 같아요.”

사람들은 묘한 표정으로 마리를 바라보았다. 황태자와 키에르한. 제국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두 남자이자 서로 강력한 정적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한 소녀를 동시에 좋아하게 되다니. 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어쨌든 소설처럼 황홀한 일이네요. 부러워요.”

한편 뭇 여인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게 된 마리는,

‘내가 황태자와 춤이라니!’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패닉에 빠져 있었다.

‘황태자의 발이라도 밟으면 어떻게 하지?’

아니, 무조건 밟게 될 것이다. 그녀는 춤의 왕초보였으니까.

‘안 돼! 그것만은.’

그녀는 구두 굽으로 황태자의 발을 밟는 것을 상상했다. 끔찍한 상상이었다.

“어디 불편한가?”

황태자가 묻자 마리는 다급하게 말했다.

“전하, 저와 춤을 추는 것을 다시 한번만 생각해 주십시오.”

“…….”

“이대로 춤을 추면 전하께 실례를 범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황태자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춤을 추기 위해 그녀의 어깨에 얹어져 있던 그의 왼손이 위로 올라가더니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날카로운 분위기와 다르게 부드럽기 그지없는 손길.

“……!”

그가 자신의 머리칼을 어루만지자 마리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전기가 심장에 내리꽂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 전하, 손을…….”

마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순간, 황태자가 허리를 굽혀 그녀의 귓가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귓불과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그가 말했다.

“얼마든지 실수해도 좋으니 편하게 춰라.”

마리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이, 이런데 어떻게 편하게 춰요!’

마리는 울상을 지었다. 방금 귓불에서 느껴진 그의 숨결 때문일까. 가슴이 진정이 안 돼 뭐라고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시작하지.”

그렇게 그녀와 황태자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리는 방금 전해졌던 그의 느낌에 혼이 빠진 상태에서 익숙하지 않은 춤을 추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정신 차려, 마리! 밟으면 안 돼!’

키가 작은 그녀인지라 신고 있는 구두는 굽이 굉장히 높았다. 밟히면 어마어마하게 아플 것이 뻔했다.

‘스텝을……!’

하지만 그 순간.

콱!

그녀의 굽이 황태자의 발등을 정통으로 밟았다.

“……!”

마리의 얼굴이 시체처럼 질렸다. 결국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죄, 죄송……!”

그때, 황태자가 말했다.

“이런 것 가지고 뭘 그렇게 신경 쓰느냐. 그것보다 발을 삐끗하진 않았느냐?”

아까 전 날카로운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 분명 무척 아팠을 텐데 전혀 티 내지 않는 것은 물론, 오히려 그녀를 염려하고 있었다. 황태자는 피식 웃었다.

“더 밟아도 되니, 편하게 추어라.”

“아닙니다. 절대 안 밟겠습니다!”

마리는 굳은 의지로 대답했다. 하지만 긴장에 잔뜩 뻣뻣한 몸이 한순간에 좋아질 리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다시 실수를 저질렀다.

“……!”

이번엔 발을 밟는 실례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더 최악의 실수였는데, 발이 꼬여 그의 품으로 풀썩 넘어져 버린 것이다. 졸지에 그에게 화악 안겨 버린 그녀는 사색이 되어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죄, 죄송……!”

하지만 그 순간, 황태자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춤을 감싸 안았다. 단단히. 그녀가 자신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전하…….”

마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머리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그의 가슴에,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은 그의 팔뚝에 머리가 백지장처럼 변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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