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있는 시녀님-24화 (25/54)

Chapter 2

그 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날씨가 조금 더 추워졌고, 황궁에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 뒤편으로 날카로운 기운이 흘렀다.

황태자는 레이첼을 은밀히 눈여겨보았다.

‘이유 없이 성배를 훔치는 일에 도움을 주지 않았겠지. 분명 뒤에 배후가 있어. 그걸 알아내야 해.’

사실 레이첼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녀 뒤에 있을 진정한 배후였다. 라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기다리다 보면 분명 빈틈을 드러낸다. 그때는 지난번처럼 놓치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던 라엘은 문득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 키에르한이 자신에게 던지고 간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의 시선에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마리.’

그녀를 보고 있으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전하?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마리는 그가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다. 아무것도.”

그는 고개를 저으며 속으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넌 내가 너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를 향한 마음은 점점 커져 이제는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함께하는 것만으로는 참을 수가 없어.’

그래, 참을 수가 없었다. 이 갈망과 갈증은 그녀의 모든 것을 원하고 있었다. 간절히, 미치도록.

‘내 개인적인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는데…….”

라엘은 괴로운 얼굴로 생각했다.

‘이 마음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그가 괴로워하고 있을 때, 새로운 행사가 다가왔다. 바로 겨울을 맞이하기 전의 황궁 연례행사인 늦가을 사냥이었다.

“이번 사냥 장소는 수도 남쪽 지팡 산맥의 아르트 숲이죠?”

“네, 매번 맹수가 많이 나오는 곳이니까요.”

“기사님들이 많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시녀들은 곧 있을 대규모 사냥에 대해 두런두런 떠들었다. 황궁의 연례행사인 늦가을 사냥은 귀족의 유희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맹수가 많이 출몰하는 지역을 지정해 대규모 소탕을 하여 맹수로 인한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고, 기사단의 훈련을 겸하기 위한 동제국의 오래된 전통이다.

“이번에는 델피나분들도 동행하시겠죠?”

“당연히 그렇겠죠. 간택 기간 중 거의 마지막 행사니까요.”

“벌써 그렇게 되었네요.”

시녀 중 한 명이 말했다. 사냥이 끝나면 겨울이 되고 간택 경합도 끝이 난다. 이제 두 후보 중 한 명이 최종적으로 황태자비로 선택될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두 분 중 누가 황태자비가 되실까요?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전혀 짐작하기가 어려워서.”

“그러게요.”

다른 시녀들도 그 말에 동의했다. 누가 황태자비가 될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둘의 경합이 치열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로 둘 모두 황태자와 전혀 가깝지 않아 누가 황태자비가 될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열심이시던 아리엘 공녀 저하도 왜인지 최근에는 아무런 활동이 없으시고, 레이첼 영애도 그렇고.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이러다 정말 온 힐데른이 황태자비가 되는 것은 아니겠죠?”

누군가 마리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대부분 그 의견에는 반대했다.

“에이, 아무리 전하께서 그분을 총애하신다지만 그건 아니겠죠.”

“그래요. 전하께서 어떤 분인데. 제국에 이득이 될 권세 있는 가문의 여식을 선택하시겠죠.”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다.

시간이 지났고, 수도 남쪽 지팡 산맥의 아르트 숲으로 사냥을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사냥을 인솔하는 자가 황태자였기에 마리도 당연히 따라가게 되었다. 다만 의외로 키에르한은 황궁에 남게 되었다. 그건 그가 황제를 수호하는 친위대의 단장이기 때문이다.

“꼭 조심하셔야 합니다. 지팡 산맥은 맹수가 많이 출몰하니 절대 위험한 곳으로는 가지 마십시오.”

사냥을 떠나기 전날, 마리는 키에르한을 만났다. 키에르한은 마리가 걱정되는지 몇 번이고 당부의 말을 하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각하. 어차피 제가 사냥하는 것도 아닌데요, 뭘.”

“그래도 위험할 수 있으니 꼭 조심하십시오. 막사 밖으로는 절대 벗어나지 마십시오.”

마리는 웃음을 지었다. 키에르한의 모습이 왠지 엄마가 아들을 걱정해 주는 모습 같았던 것이다.

“제가 같이 가야 하는데.”

키에르한은 정말 속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조심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렇게 약속해 드릴게요.”

마리는 새끼와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키에르한이 무슨 뜻인지 몰라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설명했다.

“이렇게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손가락을 맞대 약속을 하는 것이에요.”

그 설명에 키에르한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그러면 꼭 조심하는 걸로 약속하는 것입니다.”

“네, 약속.”

그의 손가락과 그녀의 손가락이 맞닿았다. 어릴 때 친구들 사이에 흔하게 하는 약속 표시지만, 그와 하니 왠지 좋은 느낌이 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렇게 약속한 후, 키에르한은 한 가지 부탁을 더 했다.

“그런데 언제쯤 저를 키엘이라 불러 주실 것입니까?”

“아…….”

마리는 고민하더니 결국 말했다. 사실 후작인 그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왠지 이제는 그래도 될 것 같은 친근감이 들었다.

“……키엘 님.”

그렇게 부르자 왠지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숙이려는 순간이었다. 키에르한이 한없이 기쁜 표정을 지어 마리는 살짝 놀랐다.

“좋군요.”

“네?”

“마리 양이 제 이름을 불러 주니, 더 가까워진 것 같아 좋습니다.”

그 말을 들은 마리는 이유 없이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에게서는 항상 자신을 아껴 주는 마음이 느껴졌다. 물론 그녀도 그가 좋았다.

“네, 저도 좋아요.”

키에르한에게 했던 말과 다르게 마리도 나름 이번 사냥을 걱정하고 있었다. 다만 그녀 본인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사냥에 직접 참가할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혹시 사냥 중 다치는 사람은 없겠지? 황태자가 다친다든지, 알몬드 자작님이 다친다든지.’

이번 사냥은 유희를 위한 사냥이 아니다. 실전을 겸한 사냥이니, 당연히 부상자가 나온다. 마리는 혹시나 자신에게 가까운 인물이 다칠까 걱정이 들었다.

‘내가 황태자를 걱정하다니.’

그녀는 문득 그런 마음이 들어 실소했다. 살다가 설마 그를 걱정하게 되는 날이 올지는 몰랐다. 완전히 쥐가 고양이를 생각해 주는 격이었다.

‘그래도 다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은걸.’

그녀는 잠자리에 들기 전, 짧게 기도했다.

‘주여, 이번 사냥 때 제 주변의 누구도 다치는 일 없이 무사히 끝나게 해주시옵소서.’

걱정하며 잠든 탓일까. 사냥을 출발하기 전날 밤, 그녀는 또 꿈을 꾸었다. 그런데 꿈속의 내용이 심상치가 않았다.

‘저건?’

꿈속 주인공은 굳은 얼굴의 사내였다. 한 손에 활을 들고 있었는데,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에 고통과 고뇌,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 앞에 서 있는 소년.

「아버지, 저는 괜찮아요.」

그런 소년을 보며 꿈속 남자는 안타깝게 외쳤다.

「제미!」

제미라 불린 남자의 아들 머리 위에는 사과가 올려져 있었다. 그 옆에는 야비한 인상의 귀족 사내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떤가? 천하의 자네라면 아들 머리 위에 있는 사과도 아무런 문제 없이 맞출 수 있을 것 같은데? 재미있군. 안 그런가, 텔?」

꿈속 남자는 귀족의 말에 이를 바득 갈았다. 분노와 고통으로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맙소사.’

마리는 꿈속의 상황을 바라보고 손을 떨었다. 지금 꿈속 남자는 아들 머리 위에 올려진 사과를 활로 쏘아 맞히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너희를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

남자는 이를 악물며 활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펼쳐지는 신기에 가까운 솜씨! 남자의 손을 떠나간 화살은 정확히 아들의 머리 위에 올려진 사과를 꿰뚫었고, 장내가 안도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마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꿈에서 깨어났다.

“이게 무슨 꿈이지? 궁수가 되는 꿈이라니?”

꿈의 의미는 명확했다. 그녀에게 궁수의 능력을 주는 꿈이다. 하지만 왜 하필 사냥터에 가기 직전에 이런 능력이?

‘난 사냥에 참가할 예정이 아닌데.’

그녀는 시녀다. 당연히 사냥에 참가하지 않는다. 그런데 궁수의 꿈이라니.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사냥터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길 예정이길래?’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생각했다.

* * *

마리의 걱정을 뒤로하고 사냥이 시작되었다.

두웅!

“와아!”

커다란 북소리와 함께 기사단이 함성을 내질렀고, 철가면을 쓴 황태자가 칼을 높게 쳐들며 외쳤다.

“사냥을 시작한다. 잡은 맹수의 숫자대로 상급을 지급할 테니, 모두 최선을 다하도록!”

“알겠습니다! 제국과 전하께 영광을!”

황태자를 선두로 무장한 기사들이 숲으로 돌진했다. 곧 몰이꾼이 멧돼지를 유인해 왔고, 선두에서 말을 몰던 황태자가 화살을 쏴 단번에 관통시켰다.

“와아! 황태자 전하 만세!”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이 함성을 질렀고, 본격적인 사냥이 시작되었다. 한편 시녀들은 후방 안전한 곳에 남아 사냥을 마치고 돌아올 기사들을 맞을 준비를 하였다.

“이번에 가장 많은 맹수를 잡을 기사님은 누구일까요?”

“근위 기사단의 단장 알몬드 자작님 아니실까요?”

“남부의 호른 경도 실력이 대단하시다던데.”

“에이, 당연히 황태자 전하시겠죠.”

시녀들은 손을 놀리며 수다를 떨었다. 이번 사냥은 근위 기사단뿐 아니라, 여러 기사단의 합동 작전이라 쟁쟁한 기사가 많았다. 시녀들은 누가 과연 최고의 공을 세울까 떠들었다.

누군가가 마리에게 물었다.

“예작님께서는 누가 제일 사냥감을 많이 잡을 것 같아요? 당연히 황태자 전하시겠죠?”

“……아무도 안 다쳐야 할 텐데요.”

“네?”

생각에 잠겨 있다 자신도 모르게 답한 마리는 본인이 말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아니…… 아니에요. 전 다른 곳에 가서 일 볼게요.”

시녀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마리는 걱정 때문에 잡담을 나눌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내 걱정이 기우였으면. 하필 사냥터에 나오기 전에 그런 꿈을 꿔서.’

그때 그녀는 의외의 사람을 만났다.

“온 힐데른?”

흑발의 도도한 미녀, 아리엘 공녀였다.

“아리엘 공녀 저하를 뵙습니다.”

마리는 그녀가 또 괜한 시비를 걸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그런데 아리엘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네, 안녕하세요.”

아무런 시비 없이 꾸벅하고 인사를 받아준 것이다. 그것도 마리에게 예까지 갖추어서! 생각 외의 반응이어서 마리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굉장히 조용하게 지내셨지.’

이전에는 하루가 멀다고 그녀가 부리는 소란을 전해 들을 수 있었는데, 요즘에는 별다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나?’

마리는 아리엘의 안색을 살폈다. 여전히 도도한 인상이긴 했지만, 늘 눈가에 머물던 마리를 깔보는 빛이 사라져 있었다.

‘뭐지?’

그때, 아리엘이 말했다.

“그러면 수고하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공녀 저하.”

마리는 멀어지는 그녀를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른 일을 하고 있는데, 마리는 또 한 명의 인물과 마주쳤다. 레이첼이었다.

“수고하시네요, 온 힐데른.”

“아, 네.”

마리는 얼굴을 굳히며 인사를 받았다.

‘무슨 속셈이지?’

마리도 레이첼이 지난 도난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란 것을 알고 있는지라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다.

‘혹시 이번 사냥터에서 일어날 일이 레이첼 영애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레이첼은 평소의 부드러운 모습 그대로 일상적인 이야기만을 꺼낼 뿐이었다.

“날씨가 많이 쌀쌀하네요. 감기 조심하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다음에 뵐게요. 수고하세요.”

레이첼은 고개를 숙인 후, 자신의 막사로 들어갔다. 마리도 그녀와 지나친 후 자신의 볼일을 보러 사라졌다. 그런데 머릿속이 워낙 복잡해서일까? 마리는 자리를 떠날 때 자신을 남몰래 바라보던 레이첼의 눈빛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섬뜩할 만큼 차가운 눈빛이었다.

* * *

늦은 오후가 된 후, 사냥에 나섰던 기사들이 막사로 복귀했다. 역시나 가장 많은 맹수를 사냥한 것은 황태자였다. 그는 맹수들의 피로 젖은 망토를 펄럭이며 명했다.

“모두 수고했다. 내일도 고된 일정이 될 테니, 다친 자는 상처를 치료하고, 충분히 먹고 푹 쉬도록.”

“알겠습니다, 전하!”

기사들은 우렁찬 함성으로 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마리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구나.’

곧 진영이 시끌벅적해졌다. 시종들은 기사들이 잡아온 맹수들의 가죽을 분리하고, 장작에 불을 붙여 구이 요리를 시작했다.

오늘 온종일 고생한 기사들은 약간 풀어진 얼굴로 모닥불 주위에 옹기종기 앉아 음식과 가벼운 술을 마셨다. 따뜻한 모닥불에 멧돼지 구이, 가벼운 술도 있으니 자연스레 분위기가 흥겨워졌다. 맹수를 잡는 사냥도, 전쟁을 나온 것도 아니니, 라엘도 흥겨운 분위기를 막지 않았다.

“내일도 사냥에 나서야 하니, 조금씩만 마시도록.”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주의시킨 라엘은 그를 위해 설치된 막사로 들어갔다.

“오늘 하루 고생하셨습니다.”

막사 안에는 그의 전속 시녀 마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먼저 씻으시겠습니까?”

그런데 그의 반응이 이상했다. 푸른 눈으로 가만히 그녀를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마리는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전하?”

“……아니다.”

라엘은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먼저 간단히 씻도록 하지.”

“네, 그러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마리는 어딘지 이상한 라엘의 모습에 의아했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그가 씻을 준비를 하였다.

한편 라엘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하아, 미치겠군.’

그가 한숨을 내쉬는 이유는 늘 그렇듯 똑같았다. 그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 때문이었다.

‘고작 한나절 보지 않았다고 이런 마음이 들다니.’

사냥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는 기분이 좋았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머리가 복잡했는데, 외유를 나와 사냥을 하니 기분이 전환되었다. 그는 모든 생각을 비우고 사냥에 몰두했다.

하지만 그렇게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라엘은 자꾸만 허전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갸웃하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최근 늘 그의 곁에 붙어 있던 마리가 없었던 것이다. 라엘은 그 사실을 깨닫고 어이없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아예 멀어진 것도 아니고 고작 한나절 떨어져 있는 건데 허전함이라니?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며 그는 일부러 사냥에 더욱더 몰두했다. 자꾸만 떠오르는 그녀의 생각을 떨치기 위해.

하지만 떨치려고 하면 떨치려 할수록 계속해서 그녀가 생각났다. 지금 막사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밥은 먹었을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혹시 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지. 그녀에 대해 별의별 생각이 다 났고, 그 생각은 결국 하나로 귀결됐다.

보고 싶다.

고작 한나절 떨어져 있던 것이지만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것도 간절히. 우스운 일이었다.

그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인정해. 넌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이미 그의 마음은 모두 그녀에 대한 것으로 뒤덮여 있었으니까.

그때, 마리가 라엘에게 다가왔다.

“씻을 준비가 다 됐습니다. 갑옷을 벗겨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라엘은 흠칫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저었다.

“됐다. 내가 벗겠다.”

그는 지금 숲에서 기동하기 쉬운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갑옷의 구조상 벗기려면 그녀의 손이 그의 몸에 닿아야 한다. 그에게 곤혹스러운 일이 될 게 뻔해 거절한 것이다.

“전하께서요?”

하지만 마리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손이 안 닿지 않으십니까?”

“…….”

라엘은 입을 다물었다. 마리의 말이 옳았다.

‘젠장, 왜 갑옷을 이런 식으로 만든 거야. 혼자 벗을 수 있게 만들었어야지.’

결국, 그녀의 손이 갑옷의 끈을 풀기 위해 그의 어깨에 닿았고, 그녀의 손의 감촉을 느끼는 순간 라엘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전하? 혹시 불편하신지요?”

불편하다. 아주 불편하다. 라엘은 그녀의 손이 자신의 몸에 닿을 때마다 움찔움찔 곤혹스러웠지만, 침음을 삼키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다. 최대한 빨리 벗기도록.”

“네, 알겠습니다.”

마리는 잔뜩 불편해 보이는 그의 표정에 자신이 무언가 실수했나 고민하며 그의 갑옷을 벗겼다. 드디어 갑옷이 다 벗겨져 그녀의 손이 자신에게서 떨어지자 라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됐군. 나머지는 내가 하면 되니…….’

하지만 그의 수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하, 이 상처는?”

갑옷을 벗은 후 팔뚝에 새겨진 기다란 상처에 마리가 눈을 크게 뜬 것이다. 라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아, 늑대의 발톱에 긁혔을 뿐이다. 큰 상처는 아니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사실 이 상처는 중간에 그녀 때문에 딴생각에 빠져 있다가 실수로 입은 것이다. 다행히 깊지 않았고,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될 것 같아 라엘은 막사 안쪽에 마련된 욕조로 그대로 씻으러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마리가 그를 붙들었다.

“안 됩니다, 전하! 제대로 치료를 해야 합니다.”

“괜찮다. 그냥 놔둬도 돼.”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됩니다. 그냥 놔두었다가 상처가 곪기라도 하면 큰일 납니다.”

결국,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상처 소독은 내가 하도록 하지.”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상처 소독은 당연히 시녀인 그녀가 할 일이었다. 하지만 라엘은 아까 전 자신에게 닿았던 그녀의 손의 느낌을 떠올리며 화급히 고개를 저었다. 상처를 닦고 소독하며 붕대를 감다 보면 당연히 그녀의 손이 그의 맨살에 닿게 된다. 옷 위로 닿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는데, 맨살이라니? 절대 안 됐다.

“안 돼. 그냥 내가 하겠다.”

강하게 거부했으나, 결국 소독은 마리가 하게 되었다. 상처가 난 곳이 뒤편이라 라엘이 스스로 하기에는 어려운 위치였기 때문이다. 라엘은 소독을 위해 내의를 제외하고 상의를 벗고 마리의 앞에 앉았다. 겉으로 봤을 때 호리호리해 보이던 것과 다르게 그의 몸은 탄탄한 근육으로 덮여 있었다.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그의 바로 옆에 앉아 약을 꺼낸 마리는 소독을 시작했다.

“불편하시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괜찮다.”

이전 요하네프 3세의 심정지를 구조할 당시 의무병의 꿈을 꾸었던 덕에 그녀의 상처 처치 솜씨는 훌륭했다. 먼저 주위를 깨끗이 닦고, 상처를 자극하지 않게 부드럽게 소독하고,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부드러우면서도 꼼꼼한 처치였다. 특히 다른 사람도 아닌 황태자의 몸인지라 그녀는 더욱 공을 들였다.

한편 그 처치를 받는 황태자는 빨개진 얼굴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돌겠군. 언제 끝나는 거지?’

그녀의 손길이 맨살에 스칠 때마다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체향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꼼꼼히 공들일수록 그의 괴로움은 더욱 길어졌다.

실제로는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에게는 아득하게 느껴졌던 시간이 지났다. 소독을 끝낸 마리가 말했다.

“다 됐습니다. 씻을 때도 상처 부위는 피해서 씻는 것이 좋겠습니다.”

“…….”

“전하?”

그가 답을 하지 않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따라 그가 이상했다.

“……아니다. 수고했다. 그리고 마리.”

“네, 전하?”

“오늘은 이만 네 막사로 들어가서 쉬도록.”

그 말에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씻고 난 후, 식사 시중을 들어야…….”

“됐다. 나 혼자 먹겠다. 너는 가서 쉬도록.”

“전하?”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일부러 자신을 내쫓으려 한다고 느낀 것이다. 황태자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생각할 것이 있어서 그런다.”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라 마리는 뭐라고 더 이야기할 수 없었다.

* * *

그날 밤이 지나갔다. 마리는 평소와 다른 황태자의 모습에 고민에 빠졌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셨나? 하지만 특별히 그런 일은 없는 것 같은데.’

그녀는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자신에게 이상한 모습을 보인 것은 어제만이 아니었다. 최근 들어 계속 이상했었다.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 사냥이 끝나고 돌아오시면 무슨 일인지 전하께 직접 여쭈어봐야겠구나.’

하지만 그날 밤, 그녀는 황태자를 만나지 못했다. 그가 그녀를 피한 것이다.

“전하께서 혼자 있겠다고 하셨다고요?”

“그래.”

알몬드 자작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은 눈치인 듯했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건 다음 날,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뭐지? 진짜 무슨 일이 있으신가?’

그녀는 고민했다. 그렇게 그녀와 그가 서로 엇갈리는 그때, 레이첼이 아무도 몰래 수상한 움직임을 보였다.

* * *

사냥의 막바지를 앞둔 오후, 마리는 막사의 바깥쪽으로 나왔다.

‘곧 사냥도 끝나겠구나.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야.’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했는데, 천만다행이었다. 막사 바깥을 걷던 중, 마리는 의외의 인물을 마주했다. 흑발의 아름다운 여인, 아리엘 공녀였다.

“공녀 저하?”

“마리…… 아니, 온 힐데른?”

아리엘도 그녀를 만난 것이 뜻밖이었는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는 어떻게?”

“그냥 답답해서 바람이나 쐬러 왔어요. 생각을 정리할 것도 있고.”

그 말에 마리는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홀로 산책이라니. 아리엘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 눈빛을 눈치챘는지, 아리엘은 아미를 찌푸렸다.

“뭐예요, 그 눈빛은? 저도 고민 많이 하면서 살거든요?”

“죄송합니다, 저하. 그렇게 본 게 아니라…….”

“변명은 됐어요.”

아리엘은 흥,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본 마리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돌아가야겠다.’

특별히 할 말도 없고 돌아가려는데, 아리엘이 의외의 말을 하였다.

“이전에 미안했어요.”

“……!”

마리는 깜짝 놀라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잘못 들었다 생각한 마리는 반문했다.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뭐라고 하셨…….”

아리엘은 버럭 짜증을 내었다.

“아, 지금까지 미안했다고요. 이야기하면 한 번에 제대로 들어요.”

마리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짜증이 잔뜩 섞여 있긴 했지만, 그건 아리엘의 말투가 원래 그래서 그랬던 거고, 아리엘은 정말로 그녀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어째서 저에게 사과를……?”

마리는 의아한 마음으로 물었다. 아리엘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그냥요.”

“네?”

“그냥 그날 당신과 싸운 이후 다 허무해졌어요. 황태자비가 되는 것도. 그러고서 생각해 봤더니 제가 너무 과민하게 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다시 한번 짜증을 내었다.

“아, 몰라요. 하여튼 전 사과했어요.”

아리엘은 등을 돌려 마리에게서 멀어졌다. 엄청 민망했는지 귀가 빨개져 있었다. 마리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리엘 공녀에게 저런 면이 있었다니. 생각지도 못 했었다. 그녀가 아리엘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뜻밖의 외침이 그녀를 불렀다.

“온 힐데른!”

“……!”

다급한 외침이라 마리와 아리엘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남자가 말을 타고 그녀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순간 마리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누구시죠?”

“사냥터에서 온 전령입니다!”

“……!”

“사냥 중 전하께서 크게 부상을 입으셨습니다. 지금 당장 사냥터로 와달라는 전갈입니다!”

마리의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 * *

마리는 허겁지겁 전령의 말에 올라탔다. 혹시나 몰라 활과 화살도 챙겼다.

“전하께서 부상이 심하신가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꽉 잡으십시오.”

마리는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가 중한 부상을 입었다는 이야기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들을 잡았다.

“저도! 저도 같이 가게 해주세요!”

아리엘이었다. 그녀는 황태자가 부상을 입었다는 말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전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 타십시오. 급하게 달릴 테니 꽉 잡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마리와 아리엘을 태운 남자는 숲 깊숙한 곳으로 말을 몰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은밀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가 있었다. 레이첼이었다.

“드디어 치웠군.”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섬뜩한 목소리. 마리를 데려간 전령은 다름 아닌 레이첼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목격자 없이 기회를 잡기가 어려웠는데, 잘됐어. 아리엘 공녀가 같이 있었던 것은 계산 밖이긴 하지만…….”

그녀는 차갑게 중얼거렸다.

“둘 다 치울 수 있으면 더 좋지.”

전령은 저들을 사냥터가 아닌 숲속 깊숙한 곳, 맹수가 들끓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들은 맹수의 밥이 될 것이다.

‘목격자도 없으니 완벽해.’

그녀는 흡족한 표정으로 막사로 돌아왔다. 지독히도 괴롭히던 앓는 이를 제거한 느낌이었다.

* * *

마리가 이상한 점을 느낀 것은 숲속으로 한참이나 들어온 다음이었다.

“전하께서는 어디에 계시나요?”

“조금 더 들어가야 합니다.”

마리는 의구심 섞인 표정을 지었다.

대규모 사냥 중이니 이 정도 들어왔으면 사람의 흔적이 보여야 하는데,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가 변명하듯 말했다.

“전하께서 외진 곳에서 맹수를 토벌 중이셔서…… 조금만 더 가면 도착합니다.”

점점 마리의 의심이 커져 갈 때, 남자가 말을 우뚝 멈추어 세웠다.

“이곳입니다. 내리십시오.”

“……?”

말에서 내린 후 고개를 돌려 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숲 안으로 얼마나 깊이 들어온 것인지 나무들이 하늘을 가릴 듯 치솟아 있어 을씨년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이곳에 전하가 계시다고요?”

“네, 이곳이라 들었습니다. 제가 확인해 보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고 계십시오.”

남자는 그들을 내버려 둔 채 말을 타고 후다닥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자, 잠깐만요!”

마리가 급히 불렀으나, 이미 남자는 사라진 뒤였다. 그렇게 그녀와 아리엘은 졸지에 숲속에 덩그러니 남겨지게 되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아리엘이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무언가 그녀도 이상하단 것을 느낀 것이다. 그 순간 마리는 속으로 직감했다.

‘함정이야! 전하께서 이런 식으로 날 부를 리가 없어!’

마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때였다. 숲 어딘가에서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우우!

늑대의 울음소리였다. 아리엘이 겁먹은 표정으로 마리에게 달라붙었다. 숲에 덩그러니 버려졌다는 공포에 평소의 도도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어, 어떻게 하죠? 황태자 전하를 기다려야 할까요?”

마리는 굳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무언가 이상하니 지금 당장 막사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아리엘은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막사로 돌아가죠?”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말은 정체불명의 남자가 타고 가 버렸기 때문에 걸어가야 했다.

‘막사까지 어떻게.’

마리는 막막한 마음이 들었다. 한참이나 말을 타고 들어온 탓에 막사와의 거리가 까마득했다. 돌아가는 도중에 맹수와 만날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일단 가야 해. 서두르자.’

그녀는 활을 굳게 붙들었다. 만일을 대비해 활과 화살통을 챙겨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리엘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히, 힐데른…….”

고개를 돌린 마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크르릉.

늑대였다. 커다란 늑대 한 마리가 그녀들을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아…….’

분명 꿈을 통해 궁수의 능력이 생겼지만, 몸은 여전히 여린 소녀의 것이었다. 본능적인 공포에 마리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무언가 움직여야 하는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크르릉.

늑대는 천천히 그녀들에게 걸어왔다. 집채만 한 늑대는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는데, 상처로 무리에서 멀어진 것 같았다. 상처 때문에 잔뜩 굶은 상태인지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

그 순간, 마리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였다. 그러고는 활에 화살을 메겨 늑대를 향해 겨누었다.

“다가오지 마!”

마리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정신 차려, 마리! 저런 늑대 따위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꿈속 주인공을 떠올렸다. 아들 머리 위의 사과를 맞추던 그 남자라면 저런 늑대 따위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이다. 과연 그런 생각을 하자, 그녀의 가슴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눈빛이 무거워졌고, 활시위는 정확히 늑대의 미간을 가리켰다.

크르르!

늑대는 작은 소녀의 기세가 심상치 않게 느껴졌는지 본능적으로 주춤했다. 그 순간, 마리의 눈이 빛났다.

파앙!

마리의 손에서 화살이 떠나갔고, 파공음과 함께 늑대의 미간을 정확히 관통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절명하는 늑대를 보며 마리는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사, 살았어.’

아리엘도 놀라 마리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활 쏘는 법을?”

“그냥 예전에…….”

마리는 대충 얼버무렸다. 솔직히 이야기할 내용도 아니었고,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빨리 가죠.”

마리는 최대한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히며 아리엘을 이끌었다.

‘정신 차려. 정신 차리면 살 수 있어.’

그녀는 해가 떠 있는 방향과 그림자의 모습으로 방향을 가늠하며 막사를 향해 나아갔다. 중간중간 맹수들이 튀어나왔지만 다행히 궁수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대한 능력을 발휘했음에도 마리는 곧 문제에 봉착했다. 그건 바로 체력이었다.

“하아, 하아.”

늑대를 한 마리 더 해치운 마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젠 한계야. 더는 활시위를 당길 힘이 없어.’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꿈을 통해 능력이 생겼다고 해서 몸이 궁수의 것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여린 소녀의 몸이었고, 무거운 활시위를 당겨 몇 번 화살을 쐈더니 팔이 떨어질 것 같았다.

하필 그때였다.

크르릉!

얼마나 걸은 뒤였을까? 섬뜩한 소리가 마리의 뒤에서 들렸다. 늑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무서운 울음소리였다. 마리는 떨리는 눈동자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타난 맹수를 본 순간, 절망에 빠졌다. 산더미만 한 덩치, 하얀 가죽에 검은 줄무늬. 이 아르트 숲의 지배자, 백호(白虎)였다.

‘아…….’

순간 마리의 세상이 정지했다. 죽음의 공포가 들이닥쳤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고, 마지막으로 황태자와 키에르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앞으로도 나와 함께해 줄 수 있겠느냐?”

“꼭 조심하셔야 합니다, 마리 양.”

그 이야기들이 떠오른 순간, 마리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안 돼!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마리는 안간힘을 다해 활시위를 당겼다. 하지만 백호는 자신에게 겨누어진 화살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이 볼 뿐이었다.

‘아, 안 돼.’

마리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전력을 다해 쏴도, 아니, 꿈속 궁수 본인이 온다고 해도 저 백호의 가죽을 뚫지 못할 텐데, 힘이 빠진 지금은 말할 것도 없었다. 화살을 쏴 봤자 가죽을 튕겨 나올 것이 분명했다.

‘아…… 주여. 제발……!’

마지막 순간.

백호가 번개처럼 그녀에게 달려들었고, 마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푸욱!

크허헝!

무언가 섬뜩한 관통 음과 함께 백호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

마리는 멍하니 눈을 떴다. 눈을 뜬 그녀의 시야에 믿을 수 없는 장면이 들어왔다.

“하아, 하아.”

찬란한 금발과 푸른 눈동자, 그리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얼굴. 황태자가 피에 젖은 몸으로 숨을 몰아쉬며 백호의 숨통을 끊고 있었다.

“……저, 전하?”

마리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어 입을 열었다. 황태자가 어떻게 여기에?

“마리.”

황태자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떤 이유인지, 그는 철가면이 벗겨져 있었는데 피에 젖은 그의 얼굴은 괴로움이 가득했다.

‘정말 황태자 전하구나.’

그 생각이 든 순간, 마리의 몸에 긴장감이 딱 풀렸다. 그녀를 함정에 빠뜨린 남자의 말과 다르게 황태자의 몸에선 큰 부상은 보이지 않았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마리는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하…….”

머리가 멍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하고 있는데, 생각지도 못 한 일이 일어났다.

“……!”

황태자가 와락 그녀의 몸을 껴안은 것이다. 마리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의 단단한 몸이 전신으로 느껴졌다.

“저, 전하?”

당황해 입을 여는 순간, 황태자가 한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괜찮으냐?”

“……!”

“혹시 어디 다친 데는 없는 거지? 괜찮은 거지?”

한없는 걱정이 담긴 목소리. 마리는 당황도 잊고 자신도 모르게 울컥했다.

“……네, 전하.”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해. 내가 늦었어.”

괴로운 목소리로 사죄한 그는 그녀에게서 살짝 떨어졌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피에 젖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이 그녀의 눈가를 거쳐 뺨, 입술로 향했다. 연약한 유리를 만지듯 그녀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이제 앞으로는.”

그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에 가까워졌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서로의 눈동자만이 보이는 거리에서 그가 맹세했다.

“널 놓치지 않겠다.”

마리의 심장이 파르르 떨리는 순간, 천천히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겹쳐졌다.

* * *

그간 황태자 라엘은 마리를 피하고 있었다. 마리가 오해한 것처럼 그녀가 무슨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 때문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황태자는 더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주체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꾹 억누르고 거리를 두었던 것이다.

‘물론 별 도움은 안 됐지.’

보고 있지 않은데도 왜 갈망은 식지 않는 건지. 오히려 사막에 떨어진 것처럼 심한 갈증으로 괴로울 뿐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그녀와 떨어져 있으면서도 황태자는 자신이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을 잊지 않았다. 바로 레이첼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분명 움직인다. 그때 증거를 잡아야 해.’

그렇게 생각한 황태자는 마리를 보호하기 위해 뒤에 사람을 붙여 두었다. 레이첼이 움직인다면 그 목표는 마리가 될 테니까. 황태자 본인은 사냥하면서도 언제든 막사로 달려올 수 있도록 대비하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드디어 레이첼이 움직였다. 마리를 멀찍이서 보호하며 레이첼을 감시하던 기사는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레이첼을 단죄할 때가 온 것이다.

정체불명의 인물이 마리와 아리엘 공녀를 태워 어딘가로 향하자, 기사는 곧바로 황태자에게 연락을 보냄과 동시에 정체불명의 인물을 뒤쫓았다. 마리를 구하고 정체불명의 인물을 생포하기 위해. 하지만 기사가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정체불명 인물의 숲에 대한 지식이었다. 정체불명 인물은 숲이 안방이라도 되는 듯 이리저리 빠져나가더니 기사를 따돌려 버렸다.

‘큰일이다!’

하얗게 질린 기사는 다급히 달려온 황태자와 합류하였고, 마리를 놓쳤다는 소식을 들은 황태자는 미친 듯이 마리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마리, 안 돼!’

황태자는 정신없이 말을 달리며 생각했다. 이렇게 그녀가 위기에 빠지다니. 만약 그녀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혹시나 죽기라도 하면? 황태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득한 절망이 밀려왔다.

그 순간 황태자는 깨달았다. 더는 그녀에 대한 감정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자신은 그녀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으니까. 그 어떤 것보다 그녀가 소중했다. 그녀를 원했다.

‘제발. 제발! 살아만 있어다오! 그때는……!’

맹수들이 앞을 가로막았으나, 무시하고 미친 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철가면이 떨어져 나가고, 몸에 수없는 상처가 났으나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반쯤 미쳐 앞으로 나아갔고 드디어 무사한 그녀를 마주한 순간.

“이제 앞으로는.”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그는 자신의 가슴에 맹세했다.

“널 놓치지 않겠다.”

자신의 마음을 맹세한 황태자는 일단 마리와 아리엘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 안정시킨 후 곧바로 레이첼이 있는 막사로 돌아갔다. 아직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아니, 전하?”

막사에 남아 있던 시녀들이 피에 젖은 황태자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란 이 중에는 레이첼도 있었다.

‘왜 황태자가 지금 이곳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불길한 느낌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황태자가 그녀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저 악녀를 체포해라.”

“……!”

막사가 소란에 빠져들었다. 황태자비 후보인 레이첼을 체포하라니? 레이첼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저, 전하? 왜 그러십니까?”

“왜?”

“저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레이첼은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글썽이며 항변했다. 라엘은 그 모습을 보며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잘못이 없단 말이지?”

“네, 전하.”

“황태자에게 거짓을 고하면 혀를 자른다는 제국법도 모르나 보군.”

“……!”

차가운 말에 레이첼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안 그러면 황태자가 저렇게 강하게 나올 리가 없었다.

“끌고 와라.”

그의 명을 받은 기사들이 뒤편에서 밧줄에 묶인 한 인물을 질질 끌고 왔다. 그 인물을 본 레이첼의 얼굴이 시체처럼 질렸다. 그녀가 사주했던, 마리를 위기에 빠뜨렸던 남자였다! 도주하던 그를 기사들이 사로잡았던 것이다.

“이놈을 보고도 계속 거짓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 그…… 저, 저는…….”

눈치를 보니, 남자는 이미 그녀의 사주를 받았음을 다 고백한 듯했다. 레이첼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끝이었다. 더는 발뺌할 수 없었다. 황태자는 차갑게 말했다.

“뭐 하느냐. 저 악녀를 빨리 체포하라!”

곧 기사들이 달려들어 거칠게 그녀를 구속했다.

“아악!”

밧줄에 묶여 흙바닥에 쓰러진 레이첼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죄를 부인했다.

“저, 전하.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저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라엘은 왈칵 화가 치밀어 올랐다.

파악!

레이첼의 얼굴 바로 앞으로 철검이 꽂혔다. 레이첼에게 검을 겨눈 채 황태자가 말했다.

“앞으로 너에게 남은 길은 단 두 가지다. 죽거나, 아니면 죽는 것보다 비참한 상황이 되거나.”

“……!”

“너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으니, 그동안 네 죄를 참회라도 하고 있도록.”

* * *

그렇게 사냥터에서의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황궁, 아니, 제국 전체가 경악에 빠졌다. 황태자비 후보인 델피나가 살인을 교사하다니! 다들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지만, 증거가 워낙 확실했다. 사로잡힌 남자는 레이첼이 자신을 사주했음을 낱낱이 고백했다. 레이첼은 재판을 위해 감옥에 갇혔고, 곧바로 그녀의 가문인 이스트반 백작가의 가주 보잉 백작이 수도로 올라왔다.

“아, 아버지.”

감옥에 갇힌 레이첼이 아버지를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제, 제발…….”

하지만 보잉 백작의 눈빛은 싸늘했다.

찰싹!

보잉 백작의 손이 레이첼의 뺨을 후려쳤다.

“뱀의 배에서 나온 것 같은 년. 넌 더 이상 내 딸이 아니다.”

“……!”

“지금까지 가문에서 받은 은혜는 죽음으로 갚아라.”

레이첼의 눈이 절망에 빠졌다. 그녀가 일련의 일을 저지른 것은 단순히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가문을 위해, 서제국의 요하네프 3세와의 계약을 지키기 위해 일으킨 것이건만, 차갑게 버림받은 것이다.

보잉 백작은 자신과 가문은 레이첼이 저지른 일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듯, 그녀에게 침을 뱉고 사라졌고, 아리엘과 마리에게 사과 입장을 표명했다.

[불의의 일을 겪은 두 분께 사과를 드립니다.

이번 일은 시기에 사로잡힌 레이첼의 단독 범행이며, 이스트반 백작가는 연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가문의 일원이 잘못을 저지른 바, 이스트반 백작가는 이번 일에 대한 책임으로 은인자중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레이첼을 가문에서 파문하겠습니다.]

레이첼과의 선을 냉정하게 그은 사과문이었다. 그렇게 레이첼은 가문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이후 성배 도난 사건에 대해서도 새롭게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레이첼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완강히 부정했다.

“이번 일을 저지른 것은 황태자 전하와 관련하여 그녀들을 질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배 도난과 저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살인 교사에 성배 도난까지 죄를 더하게 되면 절대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성배 도난 사건은 증거 불충분이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재판이 치러졌고, 황태자가 직접 판결을 내렸다.

“죄인 레이첼을 무간의 탑에 유폐한다. 그녀는 평생토록 탑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그 누구도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

그 판결을 들은 레이첼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두려워했던 사형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면 사형보다 끔찍한 형벌이었다. 아무도 없는 탑에서 일평생을,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유폐되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저지른 죄에 비하면 중하다 할 수 없는 처벌이었다. 그렇게 레이첼은 제국 북쪽에 위치한 무간의 탑에 유폐되었다.

* * *

황궁에 놀라운 일이 한 가지 더 일어났다. 또 다른 델피나인 아리엘 공녀가 간택을 포기한 것이다.

“아니, 어째서?”

사람들은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이첼이 유페되었으니, 이제 그녀는 유일한 후보였다. 그런데 왜 포기를 한단 말인가? 아리엘은 간택을 포기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황태자비보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과 살고 싶어졌어요.”

묘한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그녀가 간택을 포기한 날 밤, 마리는 아리엘 공녀를 찾아갔다. 아리엘 공녀는 삐딱한 표정으로 마리를 맞았다.

“왜 찾아왔어요?”

“공녀 저하, 어째서…….”

“몰라서 물어요?”

아리엘은 코웃음 치며 반문했다. 마리는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와 황태자 전하는 그런 관계가…….”

“내 눈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고도요?”

“…….”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사냥터에서 위기를 맞은 그날. 황태자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 일 때문에 그녀는 아직도 황태자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왜…… 어째서?’

그녀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부정하고 싶었다.

‘난 전하와 맺어질 수 없어.’

그녀는 굳은 얼굴로 생각했다. 그를 섬기는 것과 사랑을 나누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전쟁 포로 출신인 자신이 황태자와 사랑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무엇보다 클로얀 왕국의 왕녀인 자신이 어떻게 그와 맺어지겠는가? 정체를 숨기고 그와 사랑을 나누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가만히 있던 아리엘이 말했다.

“뭐, 사실 간택을 포기한 것은 당신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러면?”

“이야기했던 것처럼 정말로 나를 사랑해 주는 남자와 만나고 싶어졌어요. 황태자비 따위보다.”

“그렇군요.”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도한 모습은 그대로지만 어딘지 이전과 다른 그녀이니, 곧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할 거예요?”

“네, 무슨?”

“황태자 전하와 키에르한 후작 각하. 어떻게 할 거냐고요.”

“……!”

마리의 얼굴이 굳었다. 아리엘 공녀가 무엇을 물어보는지 깨달은 것이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황태자뿐이 아니었다. 키에르한 후작도 있었다.

‘키엘 님.’

키에르한의 마음에 대해서는 사실 마리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단순히 친구 사이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그녀에게 종종 비추었으니까.

‘나도 키엘 님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 설렌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리라. 만약 그녀가 평범한 귀족가의 영애였다면 분명 그와의 사랑을 바랐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좋은 남자였다.

‘하지만 난 평범한 귀족가의 영애가 아닌걸.’

마리는 씁쓸히 생각했다. 황태자도 키에르한도 다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중 누구의 마음에도 응답할 수 없었다.

‘그냥 평범하게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키에르한이든, 황태자든 아무런 부담 없이 그들의 마음을 마주했을 텐데. 하지만 마리는 불가능했다. 그녀가 모리나 왕녀로 태어난 이상, 사랑 따위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마리는 재차 물어보는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저는…….”

* * *

한편 사자궁의 집무실. 황태자 라엘은 재상 오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저 유폐만으로 되겠습니까? 처벌이 약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레이첼에 대한 이야기였다.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하지. 고작 유폐라니.”

“그런데 왜 유폐를 하신 겁니까?”

“그녀에게서는 아직 얻어 낼 것이 있다.”

아리송하게 답한 황태자는 섬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때로는 죽는 게 나은 상황도 있으니까.”

“……!”

오른은 황태자가 아직 레이첼에 대한 벌을 끝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긴. 그렇게 노하셨으니.’

오른은 황태자가 그렇게 분노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레이첼이 다른 사람도 아닌, 마리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전하, 황태자비 간택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리엘 공녀가 간택을 포기하였는데…….”

오른은 조심스럽게 황태자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자신이 우려하는 답이 나올까 걱정스러워서였다. 황태자는 역시나 그가 우려하는 답을 하였다.

“마리를 비로 맞을 거다.”

“전하!”

오른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 할지 알고 있으니, 더는 이야기하지 말도록. 난 그녀를 내 비로 맞기로 결정했다.”

강한 의지가 담긴 말이었다. 재상 오른은 그의 친우이자 충신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전하께서 깊은 숙고 끝에 결정을 내리신 것 알고 있습니다. 저도 친우로서 전하의 결정을 존중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안 됩니다.”

오른은 이를 악물며 충언했다. 그녀가 천한 전쟁 포로 출신이라서가 아니었다. 다른 이면 몰라도, 오른은 황태자가 제국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며 살아왔는지 알기 때문에 그가 마음을 준 이면 누구라도 응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안 됐다.

“어째서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녀는 수상합니다!”

오른은 강한 목소리로 외쳤다. 마리가 안 되는 이유. 그녀의 수상쩍은 신변 때문이다.

“아무리 조사해 봐도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기록은 분명 있는데, 유령처럼 아무런 흔적이 없어요!”

“그건 마리가 이미 다 설명한 사실 아닌가? 인적 드문 통원의 궁 근처에서 일해서 자신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고. 그나마 아는 이는 전쟁 중 죽었다고.”

“그건 그녀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오른.”

황태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물론 네 염려는 이해한다. 하지만 난 그녀를 믿는다. 그녀는 날 속일 사람이 아니야.”

그 말에 오른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오른도 알고 있었다. 마리가 악한 이는 아니란 것을. 아니, 오히려 착하고 신뢰할 만한 인품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래도 수상한 것은 수상한 거다. 그런 이를 라엘의 비로 맞을 수는 없었다.

“전하, 그래도 다시 한번 생각을…….”

그때였다. 의외의 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전하, 온 힐데른이 왔습니다. 들여보내도 되겠습니까?”

“……!”

당사자인 마리의 방문에 오른은 흠칫했다.

“들어오게 하라.”

곧 문이 열리고 마리가 들어왔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예를 표하는 마리의 얼굴은 마치 돌처럼 굳어 있었다. 황태자는 그런 그녀를 잠시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몸은 괜찮은가? 불편한 곳은 없고?”

무뚝뚝한 목소리에 담긴 걱정. 마리는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이 느껴졌지만,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온 것은 그의 마음을 밀어내기 위해서였으니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

“네, 전하.”

무언가 무거운 분위기에 황태자는 오른을 돌아보았다.

“그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군.”

“……알겠습니다.”

오른은 집무실을 나갔다.

“그래, 인제 말해보도록.”

하지만 마리는 한참을 주저할 뿐 곧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황태자는 가만히 그 모습을 보다가 말했다.

“괜찮다. 무슨 이야기든 괜찮으니 편하게 이야기하도록.”

그가 자신을 배려해 부드럽게 이야기하자 마리는 더욱 이야기를 꺼내기가 불편해졌다. 지금 자신이 할 이야기는 그에게 좋지 않은 이야기였으니까.

‘그래도 말해야 해. 황태자를 위해서라도.’

마리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뱉어 내듯 말을 꺼냈다.

“전하, 저를 향한 마음을 거두어주십시오.”

단도직입적인 거절에 황태자의 얼굴이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저는 전하의 마음을 받을 만한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전하께서 좋게 여겨 주신 것은 일생의 영광이오나 미천한 저로서는 감히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마리는 최대한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여지를 남기지 않도록. 황태자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지? 신분이 마음에 걸리는 건가?”

“네, 전하. 전하께서 은총을 내려주신 덕에 예작위를 받기는 하였으나, 저의 근본은 미천한 전쟁 포로입니다. 전하의 마음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실 신분 말고도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자신이 모리나 왕녀라는 것. 하지만 그 사실을 언급할 수는 없으니 마리는 신분을 표면적인 이유로 내세웠다.

‘내가 모리나 왕녀만 아니었다면 그를 조금 더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마리가 그렇게 씁쓸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황태자가 생각지도 못 한 말을 하였다.

“신분이 문제란 말이지. 별문제 아니군.”

“……네?”

“그대에게 내 비에 걸맞은 작위를 내리면 될 것 아닌가?”

“아, 아니…… 그건…….”

마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황태자는 진지했다.

“이 제국의 모든 신분은 바로 나 라엘의 권한 아래 있다. 높은 자를 낮게 만드는 것도, 낮은 자를 높게 만드는 것도 모두 내 권한이거늘, 신분 따위 무슨 상관이냐?”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국의 모든 신분은 황제의 권한 아래에 있었으니까. 신분을 높일 권한도, 주어진 신분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도 모두 라엘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 그…… 전 더 높은 작위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자격? 자격이야 만들면 되지. 그리고 마리, 네가 지금껏 쌓은 공을 보면 작위 정도야 충분히 더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

마리는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이게 아닌데, 뭔가 말발에 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 안 돼. 이대로 넘어가면.’

결국, 마리는 꺼내고 싶지 않은 이유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전하, 제 마음을 고려해 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이지?”

“전 전하를 지극히 존경하오나,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

“……!”

황태자의 얼굴이 방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딱딱하게 굳었다. 마리는 그 모습을 보며 죄책감을 느꼈다.

‘죄송해요, 전하.’

사실 거짓말이다. 그를 군주로서 존경하는 것은 맞았다. 제국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며, 그를 섬기기로 마음먹었으니까. 하지만 정말 그뿐일까? 그가 무뚝뚝한 말투로 자신을 배려할 때, 굳건한 눈빛으로 자신을 믿어줄 때, 자신을 위해 분노해 줄 때. 그저 군주로서의 존경만 느꼈던 걸까? 키에르한에게 설레었던 것처럼, 그에게도 흔들렸던 것은 아닐까?

모르겠다. 일부러 외면하려고 했던 감정이니까. 어쨌든 명확한 것은 만약 자신이 평범하게 태어났다면, 둘 중 한 명에게 마음을 주었을 것이란 것이다.

‘나는 어째서 클로얀 왕국의 왕녀로…….’

마리는 가슴이 파르르 아려 오는 것을 참으며 무릎을 꿇었다.

“그저 지금처럼 권속으로서 전하를 섬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장내에 숨 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

“그렇군.”

“……죄송합니다, 전하.”

그런데 그 순간 라엘이 나직이 말했다. 마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 한 내용이었다.

“잘됐군.”

“……네?”

마리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잘됐다고? 무릎 꿇은 상태에서 라엘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든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가 타오르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 넌 내가 너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단순히 비로 맞고 싶다고?”

“…….”

마리는 대답하지 못할 분위기에 침을 꿀꺽 삼켰다.

“천만에. 비로 맞고 안 맞고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야. 난 너의 모든 것을 바란다. 손끝부터 심장 안, 그리고 마음까지. 털끝 하나도 빠지지 않고 모든 것을.”

“……!”

“네가 날 거부한다면, 좋다. 어차피 나도 네가 억지로 빈껍데기 상태로 나에게 오는 것을 원하지는 않으니까.”

황태자는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하였다. 마치 밧줄에 묶이는 것처럼 그 푸른 눈빛이 그녀의 모든 것을 옭아매었다.

“너의 모든 것, 모든 마음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 널 가지겠다.”

황태자는 자신을 거부하는 마리를 향해 말했다.

* * *

계절이 깊어졌다. 완연한 겨울이 되었고, 살을 엘 듯한 바람과 눈 다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제국 북쪽 지방을 흐르는 유프테강. 그 안에 떠 있는 인적 없는 섬. 황량하기 그지없는 그곳에 낡은 돌탑이 서 있었다. 중죄를 지은 죄인이 유폐되는 무간(無間)의 탑이었다. 현재 탑에 유폐되어 있는 죄인은 레이첼이었다.

“…….”

레이첼은 시커멓게 죽은 눈빛으로 탑 밖을 바라보았다. 쇠창살 너머로 거멓게 흐르는 강물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외부와의 소통은 식사 시간에 빵이 공급될 때가 유일했다.

‘그래도 살았으니까.’

레이첼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당연히 사형당할 줄 알았다. 그만큼 중죄를 저질렀으니까. 하지만 예상외로 황태자는 자비를 베풀었다. 유폐 생활이 괴롭긴 했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레이첼이 나름대로 유폐 생활에 적응하며 지내고 있을 때였다. 무언가 그녀의 삶에 이변이 일어났다.

“왜 빵이?”

늘 정해진 때 배급되던 빵이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무언가 문제가 있었나 하고 넘겼으나 그다음 식사 때도, 그다음 식사 때도 마찬가지였다. 식사는커녕 물도 공급되지 않았다.

“이봐요, 배급이 나오지 않았어요.”

그녀는 자신의 방문을 지키고 있는 간수에게 말했다. 하지만 간수는 그녀를 힐끗 바라볼 뿐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레이첼은 배급이 끊긴 것이 우연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설마?’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역시나 다음 날도 배급은 주어지지 않았다. 쓰러질 듯한 배고픔에 간수에게 애원했으나, 간수는 못 들은 척했다.

‘황태자는 날 아사시킬 생각인 거야!’

레이첼이 절망적으로 생각했다. 철가면 속 그의 차가운 눈빛이 떠올랐다. 탑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다. 따라서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외부에서는 알 수가 없었다. 황태자는 그 점을 이용해 그녀를 굶겨 죽일 생각임이 분명했다.

“앞으로 너에게 남은 길은 단 두 가지다. 죽거나, 아니면 죽는 것보다 비참한 상황이 되거나.”

황태자가 그녀에게 했던 이야기. 죽음에 직면한 레이첼은 공포에 덜덜 몸을 떨었다.

“제발! 제발 빵을 주세요! 살려 주세요!”

하지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배식은 전혀 없었다.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었다. 4일을 연속으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그녀는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변해 갔다. 비쩍 탈수된 그녀는 철문을 손톱으로 긁으며 애원했다.

“제…… 제발…… 무…… 물이라도 한 모금…….”

그런 그녀에게선 이전의 아름다움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얼마나 철문을 긁었는지 손톱이 다 상해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문이 열린 것이다.

“오랜만이군.”

나타난 이는 철가면을 쓴 황태자였다. 레이첼은 지금 자신이 헛것을 보는 건가 했다. 왜 황태자가 이곳에?

황태자는 간수를 보며 말했다.

“물과 먹을 것을 가져오도록.”

“네, 전하.”

곧 간수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빵과 물을 가져왔다. 4일 동안 굶은 레이첼의 눈이 돌아갔다. 그녀는 엎드린 채 황태자의 발을 붙잡으며 말했다.

“제, 제발 무, 물을……!”

하지만 황태자는 차갑게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내가 왜 너에게 물을 주어야 하지?”

“……!”

“아니, 말을 정정하지. 내가 왜 너를 살려 두어야 하지?”

그 물음에 레이첼의 얼굴이 참혹하게 무너졌다. 사흘 동안 시달려 왔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녀의 정신을 무너뜨렸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제, 제발…… 흐윽. 사, 살려 주세요.”

황태자는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탑에는 오로지 그녀의 처연한 울음소리만 울려 퍼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황태자가 뜻밖의 말을 하였다.

“살고 싶나?”

“……!”

“살고 싶으냐고 물었다.”

레이첼은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내 물음에 제대로 답하면 널 죽이지 않으마. 아니, 이 탑에서 평생을 안락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해주지.”

“……무, 무엇입니까?”

“성배 도난 사건 때 너를 사주한 인물이 누구지?”

“……!”

레이첼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 그녀가 지금까지 철저히 입을 다물었던 내용이었다. 황태자는 피식 웃었다.

“대답하긴 싫은가 보군. 알겠다. 그러면 이만 가 보지.”

그는 등을 돌려 방을 빠져나가려 했다. 김이 올라오던 빵과 물을 가지고 있던 간수도 같이 등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본 레이첼이 다급히 그를 붙들었다. 평소라면 모를까,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에 지칠 대로 지친 그녀는 그의 물음을 거부할 수 없었다.

“대, 대답하겠습니다.”

“말해보아라.”

레이첼은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서제국의 황제 요하네프 3세입니다.”

황태자는 동행한 재상 오른과 무간의 탑을 빠져나왔다.

“씁쓸하군요.”

“무엇이 씁쓸하지?”

“레이첼 영애의 모습 말입니다. 처음 델피나로 입궁할 때만 해도 참 아름답고 빛나 보였는데.”

오른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황태자는 일말의 동정도 없는 표정으로 답했다.

“저게 원래의 모습인 거지. 애초에 시커먼 속을 가지고 황궁에 들어온 자다. 동정할 필요 없어.”

“그러면 레이첼 영애와의 약속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요?”

방금 황태자는 진실을 말하면 레이첼에게 평생 안락한 삶을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내가 저 악녀와의 약속을 지켜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지?”

하지만 황태자는 호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극히 냉혈한 자. 최근에야 제국을 위해 헌신하느라 그런 모습이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원래의 그는 수없이 많은 피를 뿌린 철혈의 지배자였다. 황태자는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리를 몇 번이나 죽음의 함정에 빠뜨린 레이첼을 용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유폐된 탑에서는 무슨 사고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으니. 그렇게 처리하면 되겠지.”

“알겠습니다. 적절히 시행하겠습니다.”

오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전하. 서제국의 요하네프 3세와 결탁한 이스트반 백작가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방금 레이첼이 털어놓은 정보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성배 도난 사건의 진정한 배후는 서제국의 요하네프 3세였다! 그뿐 아니라, 그녀의 진술에 따르면 이스트반 백작가는 이미 서제국과 결탁한 상태였다. 하지만 황태자는 이렇게 결정했다.

“일단은 묻어 두지.”

“네, 어째서?”

오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서제국과 결탁한다는 것은 반역의 죄이다. 당장 군대를 보내 토벌하는 것이 당연했다. 내버려 두었다가는 내부에 큰 위협이 될 것이다. 그러나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고 있다면 큰 위협이겠지만, 알고 있는 한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정보를 역으로 이용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요하네프 3세에게 뼈저린 타격을 줄 수도 있겠지.”

그 말에 오른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의 말이 옳았다.

“그런데 서제국의 요하네프 3세는 왜 성배를 훔쳐 가려고 한 걸까요?”

“그 이유야 간단하지. 클로얀 왕국 때문이다.”

“……!”

“클로얀 지방은 서제국과 동제국의 가운데에 위치한 요충지. 클로얀 왕국의 건국과 연관된 보물인 성배를 이용해 클로얀 지방을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이려 한 것이다.”

오른은 침음을 삼켰다. 그렇지 않아도 클로얀 지방은 제국령에 포함되어 있음에도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다.

‘만약 요하네프 3세가 수작을 부려 클로얀 지방이 서제국 쪽으로 넘어가면? 그건 재앙이야.’

오른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생각했다. 서제국과 동제국의 힘의 추가 단숨에 서제국으로 기울 것이다. 그만큼 클로얀 지방은 중요했다.

“오른, 클로얀 지방의 상태는 요즘 어떠하지?”

“최근에 더욱 좋지 않습니다. 세율도 감면하고, 제국에 융화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하고 있으나 저항이 더욱 거세지고 있습니다.”

황태자는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물었다.

“모리나 왕녀의 행방은?”

“죄송합니다, 전하. 아직입니다.”

면목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오른은 조심히 물었다.

“혹시 모리나 왕녀를 찾으면 비로 맞으시려는 겁니까?”

“아니, 이제 모리나 왕녀를 비로 맞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

오른은 황태자의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클로얀 지방을 제국의 세력권에 완전히 포함하기 위해 왕국의 마지막 후예인 모리나 왕녀를 비로 맞으려고 했던 황태자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의미가 없어졌다니?

“마리 때문에 그러십니까?”

“물론 마리 때문에 모리나 왕녀를 비로 맞을 생각이 사라진 것은 맞지. 하지만 그것 외에도 정말로 그녀의 가치가 사라졌다.”

“……?”

“이전에 비해 클로얀 지방의 저항이 훨씬 거세졌어. 이렇게 저항이 거세진 상태에서 내가 모리나 왕녀를 비로 맞으면, 클로얀 지방의 사람들은 내가 왕국을 모욕했다고 여길 것이다.”

“……!”

“지금 클로얀 지방 사람들의 저항이 거센 이유는 다른 게 아니야. 바로 전(前) 왕조에 대한 그리움과 충성 때문이다.”

라엘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는 클로얀 지방이 제국에 융합될 수 있도록 굉장히 많은 노력을 했다. 세율도 굉장히 낮추었고, 각종 분야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왕국민이라고 제국민에 비해 차별받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생활적인 문제로 거부감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클로얀 지방의 사람들이 제국을 거부하는 이유는 전 왕조에 대한 그리움과 충성 때문이었다.

‘최근의 왕은 현명하지 못했지만, 오랫동안 선정을 많이 베푼 왕조였지. 그러니 모리나 왕녀 같은 대단한 인물도 태어난 것일 거고.’

얼굴 없는 성녀, 모리나 왕녀.

황태자는 어린 나이임에도 이렇게 계속해서 널리 회자될 정도로 남몰래 선행을 베푼 모리나 왕녀를 한번 만나 보고 싶었다.

“그러면 모리나 왕녀를 찾는 일은 그만두시겠습니까?”

“아니, 모리나 왕녀는 찾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오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비로 맞지 않을 거면서 왜? 황태자는 차갑게 말했다.

“찾아서 죽여야 하니까.”

“……!”

“왕국민이 전 왕조를 그리워하며 계속 반발하는 것은 결국 왕가의 마지막 후예인 그녀가 생존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리나 왕녀를 죽여 왕가의 핏줄을 끊어야 한다.”

오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의 말이 옳았다. 모리나 왕녀를 처형하면 당장에야 거세게 반발하겠지만, 그런 반발은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질 것이다. 더는 충성을 바칠 왕국의 후예가 없으면 그들은 점차적으로 제국에 융화될 것이다.

“만약 모리나 왕녀를 죽이지 않으면 왕국이 제국에 융화되는 데 최소 2세대, 40년은 걸릴 것이다. 반면 왕녀를 죽여 왕가의 흔적을 지워 버리면, 그 기간은 굉장히 짧아지겠지. 그러니 반드시 그녀를 찾아내 죽여야 한다.”

황태자는 서류를 보며 읽듯 무감정하게 말했다. 모리나 왕녀는 죽임을 당할 만한 죄가 없다. 오히려 그가 감탄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황태자는 제국을 위해 악귀라도 될 것으로 다짐한 인물이니까. 제국의 이득을 위해 얼마든지 냉혹해질 수 있었다.

“대충 결정된 것 같으니, 수도로 돌아가지.”

“네, 전하.”

그들은 작은 배에 올라탔다. 사공이 배를 강 연안으로 이끌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며 그들은 서로 말이 없었다. 오른은 모리나 왕녀에 대한 생각으로, 황태자는 다른 무언가에 대한 생각으로 입을 다물었다. 황혼이 질 무렵 배는 강 연안에 도착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전하?”

황태자는 대답 없이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에 황혼을 받아 붉게 변한 무간의 탑이 들어왔다.

“오른.”

“네?”

“내가 너무 냉혹하다 생각하나?”

“……!”

오른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리나 왕녀를 죽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제국을 위한 길이니까요.”

“…….”

“전 전하의 모든 결정이 제국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제국민들은 훗날 전하를 역사에 길이 남을 성군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황태자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군.”

“진심입니다.”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인 후, 지나가듯 말했다.

“레이첼은 그냥, 죽이지 말도록.”

“……!”

오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답지 않은 결정이었다.

“어째서입니까?”

“그냥 변덕이다.”

그러니까 왜 그런 변덕을? 하지만 황태자는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았다.

“가지. 늦었군.”

그는 자신의 흑마에 올라타 말을 달렸다.

“어, 전하? 같이 가십시오!”

오른은 허겁지겁 뒤를 따랐다.

황태자는 말 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레이첼을 살려주기로 한 이유.

‘이미 피에 물들 대로 물든 손이지만, 불필요한 살생을 한 명이라도 줄이면 신께서 기뻐하시지 않을까 싶어서.’

그게 이유였다. 그리고 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까닭이 있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생겨서. 신께 기도해서라도 원하는 것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마리였다.

‘신이여.’

황태자는 말을 달리며 생각했다.

‘비록 이런 죄인이지만, 나와 마리의 앞날을 축복해 주소서.’

* * *

그때, 제국의 서쪽 경계에서 수상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라키, 어때? 감쪽같지 않나?”

갈색 머리에 검은 눈을 지닌 쾌활한 인상의 남자였다. 대단한 미남이었는데, 거울을 보며 연신 감탄성을 뱉고 있었다.

“감쪽같습니다.”

“조금 더 감정을 넣어서 대답해 줄래? 이건 혁명이라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잖아.”

라키라 불린 여인처럼 아름다운 외모의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더니 악센트를 넣어 말했다.

“감.쪽.같.습.니.다. 폐하.”

뭔가 불만이 가득한 악센트였는데, 마지막 단어가 이상했다. 갈색 머리의 남자를 폐하라고 부른 것이다. 그와 요하네프 3세는 완전히 다르게 생겼는데. 갈색 머리의 남자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폐하라니. 동방의 역용술로 다시 태어난 카탈락 백작이라고 불러야지.”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정체는 서제국의 요하네프 3세. 그의 말처럼 동방에서 전해진 역용술로 얼굴을 변장한 것이다. 과연 그 효과는 혁명에 가까워,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라키 드 스토른 백작, 은막(銀幕)의 인형술사로 불리는 서제국의 재상은 자신의 주군인 요하네프 3세를 어린애 보듯 바라보았다.

“너무 설레시는 것 아닙니까?”

“안 설레게 생겼나? 그녀를 보러 가는데. 내가 얼마나 그녀를 그리워했는지 알고 있잖아.”

요하네프 3세는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보고 싶을 줄 알았으면 그냥 그때 납치해 올 걸 그랬어. 그러면 모든 게 손쉬웠을 텐데.”

그가 말하는 이는 다름 아닌 마리였다. 그런데 서제국의 재상 라키의 반응이 이상했다. 장난스러운 황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이번엔 정 안 되면 그렇게라도 하십시오.”

“정말로?”

“그만큼 그녀는 우리의 계획에 중요한 인물이니까요.”

요하네프 3세가 묘한 얼굴을 하였다.

“그래, 중요하긴 정말로 중요하지. 우리 ‘계획’의 열쇠이니까. 마리는…… 아니, 모리나 왕녀는.”

그의 입에서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이미 마리의 정체가 모리나 왕녀인 것을 밝혀낸 상태인 것이다!

“아직 동제국은 모르고 있지?”

“네, 모르고 있습니다.”

라키는 여상하게 답했다.

“제가 정보를 교란시키고 있으니까요.”

“역시 비열한 우리 재상님이군.”

“다 폐하께 배운 것입니다만.”

라키 드 스토른 백작. 천민 출신으로 요하네프 3세에게 발탁된 입지전적인 인물로, 서제국 내에서는 ‘인형술사’라 불리며 공포의 대상이다. 참고로 지난 성배 도난 때 전체적인 사건을 설계한 것도 그였다.

“그러면 슬슬 동제국의 수도로 출발해 볼까. 그녀를 만난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설레는군.”

“잊지 마십시오. 폐하께는 중요한 임무가 있다는 것을.”

“잊을 리가 있나. 모리나 왕녀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맞잖아. 뭐가 아니야?”

라키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모리나 왕녀 때문에 폐하께서 직접 가는 것은 맞지만, 다른 중요한 임무가 하나 더 있지 않습니까?”

“아아. 알고 있다고. 팍팍하게 굴기는.”

요하네프 3세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장난스러운 말투와 다르게 맹수와도 같은 미소였다.

“동제국의 수도에 가서 최대한 분탕을 치라는 거지.”

“네, 맞습니다.”

서제국의 황제와 재상 사이에 섬뜩한 이야기가 오갔다. 라키는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저는 그사이 ‘계획’을 진행하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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