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있는 시녀님-23화 (2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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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장편소설

목차

Chapter 1

대성당은 황실친위대가 통제하고 있었다. 황실의 사건, 사고가 발생 시 수사권이 친위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상황을 보고하도록.”

“대성당 안쪽에 보관 중이던 성배가 사라졌으며, 동시에 금촛대와 금잔이 사라졌습니다.”

그 말에 황태자를 비롯한 일행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금촛대와 금잔?”

“네, 전하. 그 밖에 돈이 될 만한 보석도 일부 사라진 상태입니다.”

황태자는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그저 금품을 노린 단순 절도인 건가?”

이상한 점이었다.

“어쨌든 안을 살펴보지.”

그들은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 상황을 확인했다. 그런데 도난 현장을 꼼꼼히 확인한 그들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대성당 안으로 들어와 성배를 훔친 것이지?”

황태자가 중얼거렸다.

“성배는 밀폐된 격실에 있었을 텐데?”

성배는 대성당의 3층, 밀폐된 격실 안에 있었다. 출입구를 지키는 경비의 이목을 피해서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혹시 대성당 내부자의 소행인가?”

하지만 조사 결과 관련자 모두 알리바이가 있어 내부자의 소행일 가능성은 떨어져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군. 짐작 가는 바가 있는가, 오른?”

“송구합니다.”

오른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시 모두가 침묵에 잠겼다. 완전 미스터리였다.

“설마 도둑이 하늘에서 뚝 하고 이 격실 안으로 떨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오른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가 생각 없이 중얼거린 말에 생각에 잠겨 있던 마리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졌다고?’

그녀의 머릿속에 어젯밤 꿈속 내용이 떠올랐다.

「걱정하지 말게. 땅속으로 꺼지거나, 하늘로 사라지면 되니까. 우린 방법을 알고 있잖나?」

꿈속 도둑이 마지막에 했던 이야기.

‘혹시 지금 이 상황과 연관이 있는 말일까?’

그녀는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딱 하고 떠오르는 내용은 없었다. 그때, 황태자가 말했다.

“안 되겠군. 일단 지금으로서는 여기서 더 단서를 얻을 수는 없겠어.”

키에르한이 동의했다.

“네, 일단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도난당한 성배의 크기가 얼마나 되지?”

“자그마한 항아리 정도의 크기입니다.”

황태자는 잘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크기면 몰래 황궁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는 없겠군.”

“네, 아직 성배는 이 황궁 안에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생각을 정리한 황태자는 명령을 내렸다.

“황궁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해라. 그리고 의심이 가는 사람들 위주로 샅샅이 탐문하도록. 범인은 내부인일 가능성이 높다.”

“알겠습니다, 전하.”

황태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성배는 황궁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황궁 전체를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찾아내도록.”

* * *

난데없는 도난 사건으로 황궁이 발칵 뒤집혔다. 시녀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속닥거렸다.

“도대체 누가 성배를 훔쳐간 걸까요?”

“듣기로는 황궁 내부인의 소행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데요?”

“내부인이요?”

“네, 외부인이 한밤중에 수도 경비대와 근위 기사단의 경계를 뚫고 대성당 내부까지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황궁 내부 사람이 몰래 대성당에 들어가서 훔쳤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네요.”

맞는 말이라 다른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도대체 누구의 소행일까요?”

“글쎄요. 모르죠.”

“무섭네요. 이러다 괜한 누명을 쓸지도 모르고.”

하급 시녀들은 몸을 떨었다. 이런 일에 잘못 불똥을 맞으면 큰일이 난다. 최대한 몸을 사려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친위대와 근위 기사단에서 성당 주변의 사람들 위주로 수색하고 있나 보더라고요. 만약 발견되는 것이 없다면 황궁 전체를 다 뒤질 거라고.”

“조심해야 해요. 다들 몸 사리세요.”

대화를 나누던 시녀들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게 황궁이 살얼음판으로 뒤덮였을 때, 남몰래 여유로운 표정으로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이스트반 백작가의 영애 레이첼이었다.

“아가씨, 뭐 보세요?”

“아, 이곳 별궁의 고용인들 고용 장부.”

황태자비는 차후 황궁의 내명부를 총괄해야 한다. 그래서 그 자질을 알아보기 위해 간택 기간 중 자신의 별궁 관리는 스스로 하게 되어 있었다. 보통 고용인의 관리는 연륜 있는 전속 시녀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지만, 레이첼은 일일이 스스로가 다 챙기고 있었다.

“전 그거 아무리 봐도 모르겠던데.”

“네가 알면 안 되지. 내가 관리하는 것인데.”

“그런가요? 헤헤. 어쨌든 아가씨 오늘 기분이 좋아 보여요.”

“아아. 그냥, 뭐.”

레이첼은 묘한 웃음을 흘렸다. 시녀 지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는 성배가 도난당했다는데, 걱정 안 되세요?”

“뭐, 황태자 전하께서 알아서 해결하시겠지. 전하 곁에는 무슨 일이든지 척척 해결해 내는 ‘황궁의 천사’도 있고 말이야.”

뼈가 있는 말이었으나 지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아, 아가씨. 편지 왔어요.”

“편지? 어디서?”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친애하는 친우에게서’라고 적혀 있던데요?”

그 말에 레이첼의 눈이 낮게 빛났다.

“그래? 읽어 봐야겠다. 너는 이만 나가서 일 보렴.”

“네, 필요한 일 있으면 부르세요.”

지나를 내보낸 레이첼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확인 후 조심히 편지를 읽었다. 편지는 올스덴 가문의 카탈락 백작이 보냈다고 적혀 있었다. 물론 그건 표면상의 발신인일 뿐이고, 레이첼은 이 편지의 진짜 발신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데, 건강은 괜찮으신지 염려됩니다.

편지의 내용은 일반적인 안부만 적혀 있었을 뿐,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하지만 레이첼은 그 안에서 일정한 법칙에 따라 한 글자, 한 글자를 따로 뽑아내었다. 사전에 약속한 암호로, 곧 완전한 문장 하나가 완성되었다.

이번 일,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첼은 피식 웃었다.

“별말씀을.”

그녀는 편지지에 촛불의 불을 붙였다. 얇은 종이는 곧 재로 변해 사라졌다.

“저도 이번 일로 큰 도움을 얻었는걸요.”

그녀는 낮게 말했다.

“……요하네프 3세 폐하.”

레이첼은 힐끗 창밖을 통해 사자궁을 바라보았다. 황태자와 ‘황궁의 천사’가 머무는 곳.

“이제 곧 ‘천사’의 날개도 꺾이겠네.”

여상이 중얼거린 레이첼은 다시 서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서류는 별궁 고용인들의 고용 장부였다.

* * *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되었으나 수사에는 진척이 없었다. 황궁을 폐쇄 후 대성당 주위 사람들의 거처를 샅샅이 뒤졌으나, 성배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어쩔 수 없이 수색 범위가 전방위적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클로얀 왕국 출신의 시녀들은 잠재적 용의자로 수색받게 되었는데, 마리도 당연히 수색을 받았다.

“그렇게 되어 오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마리 양.”

“아, 아니에요, 각하.”

마리는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숙소를 수색하러 온 이는 다름 아닌 키에르한이었다. 친구를 배려해 친위단장인 그가 직접 방문한 것이다.

“최대한 불편하지 않게 금방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그녀가 범인일 가능성은 없으니, 키에르한은 대충 탐색하는 시늉만 하고 나가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각하와 개인적 친분이 있다고 특혜를 받을 수는 없죠. 다른 숙소에서 했던 것처럼 똑같이 살펴주세요.”

그 말에 키에르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결례를 용서하시길. 최대한 조심스럽게 수색하도록.”

“네, 단장님!”

키에르한이 명하자 동행한 친위기사단의 기사들이 마리의 숙소를 뒤지기 시작했다.

마리는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고생이 많으시군요.”

“아닙니다. 그나저나 수색의 성과가 있어야 하는데. 이러다 성배를 찾지 못할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키에르한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마리도 그 걱정에 동의했다. 분명 성배는 황궁 안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귀신같은 범행을 해낸 도둑이 과연 찾기 쉬운 곳에 성배를 숨겨 놓았을 리 없었다.

‘대성당에서 단서를 찾아야 해. 분명 단서가 있을 거야.’

귀신이 아닌 이상 정말 하늘에서 뚝 하고 격실로 떨어지진 않았을 거다. 마리는 일단 도둑이 성배를 훔친 방법을 먼저 알아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걱정하지 말게. 땅속으로 꺼지거나, 하늘로 사라지면 되니까. 우린 방법을 알고 있잖나?」

‘뭘까? 도대체?’

생각이 날 듯 말 듯 아련하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마리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 황실기사단의 기사가 키에르한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단장님.”

“무언가?”

“그게…….”

귓속말을 들은 키에르한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리에게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하지만 급히 자운궁에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네.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러면 다음에 뵙겠습니다.”

키에르한은 숙소를 수색하는 기사에게 잘 부탁한다고 이르고 사라졌다. 숙소에는 친위기사단의 기사 2명과 마리만 남게 되었다. 기사들은 정말 먼지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샅샅이 방을 뒤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방을 수색하는 것이 거의 끝났을 무렵, 한 기사가 그녀에게 물었다.

“온 힐데른. 이 문은 무엇인지요?”

“아, 옷가지를 보관해 놓은 곳이에요.”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네, 당연하죠.”

그녀는 손수 문을 열어주었다. 안에는 여러 벌의 시녀복과 몇몇 일상 활동복이 있었다. 별것 없음을 확인하고 문을 닫으려는 순간, 기사의 눈에 생소한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저 상자는 무엇입니까?”

“어?”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게 뭐지?’

그녀도 처음 보는 상자였다.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마리는 갑자기 이유 없는 불안감이 들었다. 하지만 거절할 이유도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는 거침없이 상자를 열었고, 그 상자를 연 순간. 믿을 수 없는 것들이 안에 들어 있었다.

“……!”

“이, 이건?”

금촛대, 금잔, 보석들. 대성당에서 성배와 같이 사라진 귀금속들이 나온 것이다. 갑자기 장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기사들은 생각지도 못 한 곳에서 도둑맞은 보석들이 튀어나오자 당황한 눈빛이었고, 마리는 돌처럼 굳어버렸다.

‘이, 이게 왜 여기에서?’

“온 힐데른?”

기사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리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생각했다.

‘이건 음모야!’

누군가 그녀의 방에 저 귀금속을 갖다 놓았다. 그녀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음모가 틀림없었다.

“이, 이건……!”

마리가 급히 입을 여는 순간, 기사 한 명이 스르릉 검을 빼 들었다.

“……!”

마리의 안색이 하얘졌다. 검을 그녀에게 겨눈 기사는 무거운 말투로 말했다.

“저희도 당황스럽습니다만…… 일단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 *

마리의 방에서 도난당한 귀금속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소식은 순식간에 황궁 전체에 퍼졌다.

“들었어요? 온 힐데른의 방에서 도난당한 귀금속이 발견되었데요.”

“그러게요. 그러면 성배를 훔친 범인도 그녀일까요?”

“아마 그렇겠죠? 성배를 훔친 도둑이 아니라면, 귀금속이 방에 있었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세상에나. 황태자의 총애를 그렇게나 받더니. 혹시 이번 일을 저지르기 위해 황태자 전하께 접근했던 것일까요?”

“모르죠. 하여튼 정말 놀랍네요.”

마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소곤소곤거렸다. 순식간에 마리는 성배를 훔친 범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들은 레이첼은 가만히 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미안하게 됐네. 사실 이렇게까지 심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당연히 성배를 훔친 범인은 마리가 아니었다. 그 범인은 지금 레이첼의 비호를 받고 있었고, 성배도 그 누구도 상상 못 하는 곳에 숨겨져 있었다.

‘성배는 이제 슬슬 성 밖으로 빼돌려야겠군.’

물론 항아리만 한 성배를 몰래 빼돌리는 것이 쉬울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와 범인이 생각하고 있는 방법이면 손쉽게 가능했다. 황궁을 경비하고 있는 이들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도 성배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요하네프 3세 폐하도 대단하시지. 먼 서제국에서 어떻게 이런 계획을.’

이번 성배 탈취 사건은 레이첼이 고안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서제국의 요한이 계획한 것. 레이첼은 그저 사소한 도움만 줬을 뿐이다. 요하네프 3세는 이번에 탈취한 성배를 훗날 자신의 계획을 이루는 데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난 겸사겸사 마리를 제거하는 데 도움을 얻고.’

이번에 마리를 음모에 빠뜨린 것은 요하네프 3세의 뜻이 아닌, 레이첼이 개인적으로 진행한 것이다. 만약 요하네프 3세가 알았으면 반대했을 것이다. 계획에 쓸데없는 변수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을 테니까.

‘어쨌든 잘됐어. 마리는 이걸로 퇴장하겠지.’

성배를 훔쳤다는 증거가 없다고 해도 다른 물건들이 방에서 발견된 이상 끝이었다. 진짜 범인을 찾아내지 않는 한, 그녀는 죄를 뒤집어쓸 것이다. 실제 범인이 잡힐 가능성도 없었다.

“네가 너무 황태자 전하의 주목을 끈 탓이야. 날 원망하지 말라고.”

레이첼은 우아한 동작으로 차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차 맛이 좋네.”

그런데 레이첼이 고려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지금껏 마리가 주변에 쌓은 신망과 키에르한과 황태자가 그녀를 향해 어떤 신뢰와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그리고 또 하나, 레이첼이 고려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건 마리의 능력이었다.

* * *

황태자의 사자궁은 죽을 듯이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황태자 라엘은 철가면을 쓴 채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고, 재상 오른도 굳은 얼굴이었다.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전하?”

“…….”

오른은 추궁하듯 날카롭게 말했다.

“이대로 가만히 넘어가실 겁니까?”

황태자는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둘 사이의 분위기가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호위 기사 알몬드 자작은 그런 그들의 대립을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오른.”

황태자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섬뜩할 정도로 건조한 목소리로.

“내가 지금 기분이 좋지 않으니, 잠시만 그 시끄러운 입을 다물고 있어줄 수 없겠나?”

“……!”

친우인 재상에게 저런 말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알몬드는 깜짝 놀랐다. 오른 본인도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렇게 숨이 막힐 것 같은 분위기가 집무실에 감돌 때, 갑자기 문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돌아가라!”

“안 됩니다! 꼭 황태자 전하를 만나 뵈어야 합니다!”

“어떤 벌을 받아도 좋습니다. 한 번만 전하를 알현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부탁합니다!”

마치 싸움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소란이 일었다. 한두 명이 몰려온 것 같지가 않았다.

“무슨 일이지? 문을 열어라.”

황태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알몬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문을 열었는데, 나타난 인물들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 한 인물들이 수없이 서 있었던 것이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전하!”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마리는, 아니, 온 힐데른은 결단코 그런 일을 저지를 인물이 아닙니다! 누명이 분명하니 통촉해 주시옵소서!”

그들은 제인과 수잔을 비롯한 수많은 동료 시녀였다. 지금껏 마리와 함께했던 그들은 마리의 결백을 믿고 이렇게 그녀를 변호하러 달려온 것이다. 그리고 시녀들뿐이 아니었다. 황궁 정원의 책임 정원사 한스, 악단의 악장 바한, 백합궁의 주방장 피터, 심지어 10황자 오스카도 있었다. 모두 마리에게 도움을 받았던 적이 있던 인물들이었다.

“마리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이렇게 온 것인가? 무슨 증거로?”

라엘은 물었다. 피의 황태자로 불리는 그가 두려웠지만 모두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며, 명확한 증거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그녀를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아는 그녀라면 결단코 그런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황태자는 그들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곧 그들의 뒤에 서 있던 조그만 꼬마 황자 오스카가 벌벌 떨며 나섰다.

“1, 10황자 오스카가 형님을 뵙습니다.”

어린 오스카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다름 아닌 황태자였다. 같은 배에서 나온 형인 1황자도 황태자에 의해 죽었고, 배다른 형제들도 모두 황태자에게 죽었고, 자신도 언젠가 저 황태자의 손에 숙청당할 운명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두려워함에도 불구하고 꼬마 황자는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숙였다.

“마, 마리가 그런 죄를 저질렀을 리가 없습니다! 마, 만약 정말로 죄를 저질렀다면 대, 대신 저를 벌해 주십시오! 이전에 마리가 제 죄를 대신해서 벌 받았으니, 이번엔 제가 대신 벌 받겠습니다!”

그 말에 황태자는 묘한 눈으로 오스카를 바라보았다. 10황자 오스카는 황후의 적통이다. 즉, 정통성을 이은 황자라 장성하면 라엘의 위치를 위협할 수 있기에 항상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텐데 저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다니?

그때였다. 낮은 목소리가 그들 사이를 갈랐다.

“저도 한마디 하고 싶군요, 전하.”

“후작 각하!”

모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은발의 남자가 조각 같은 얼굴에 서늘한 분노를 담은 채 서 있었다. 키에르한이었다.

“말해봐라, 후작.”

“무턱대고 마리 양의 결백을 주장하진 않겠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야기해 봤자 소용없을 테니까요.”

“그러면?”

키에르한은 푸른 눈동자를 차갑게 빛내며 말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세이튼가의 이름을 걸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옥 끝까지 쫓아서라도 진범을 잡아내겠습니다. 그래서 그 범인의 목을 쳐 전하께 바칠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키에르한이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였다. 황태자 라엘이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

사람들은 피의 황태자가 철가면 밑으로 웃음을 흘리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황태자의 끔찍한 소문만 알고 있는 몇몇 인물은 잔뜩 겁까지 먹었다. 황태자가 화가 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웃음을 멈춘 황태자가 한 말은,

“너희는 도대체 내가 마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지?”

“…….”

“이 자리에서 마리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다. 나도 마리의 결백을 믿는다.”

그 말에 누군가 조심히 말했다. 아까 문밖에서 황태자와 오른의 말다툼을 엿들었던 인물이다.

“하, 하지만 아까 기분 나빠하셨던 것은?”

“그거야 이 상황 자체가 기분이 나빴으니까.”

“그러면 재상께서는?”

오른은 황태자에게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자꾸 재촉했었다. 오른 공작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거야 진범을 빨리 잡아야 한다는 이야기였지.”

“아…….”

“물론 나는 힐데른을 자네들처럼 믿지는 않아. 다만 그녀가 정말 범인이라면, 자신의 방에 훔친 물건을 두는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르진 않았겠지.”

사람들은 서로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나선 것이다. 황태자는 그들을 내보냈다.

“마리를 향한 그대들의 마음은 잘 알았으니, 나가 보지. 생각할 것이 산더미니.”

“죄, 죄송합니다!”

그렇게 키에르한을 제외한 모두가 후다닥 사라졌다.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저 모습을 보니 마리가 황궁 생활을 헛되게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주변이 정리된 후 황태자는 키에르한에게 말했다.

“나도 이번만큼은 그대의 의견에 동의한다. 지옥 끝까지라도 가서 진범을 찾아내야겠어.”

키에르한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마리 양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음모가 분명합니다.”

“굉장히 악랄한 음모이지. 만약 진범을 찾지 못하면 마리는 죽을 테니까.”

진범을 못 찾으면 성배를 훔친 범인으로 몰린다. 그러면 단순히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온갖 고초를 당하다 화형당하리라.

“굉장히 화가 나지만,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이 있어.”

“무엇입니까?”

황태자는 피식 웃었다.

“드디어 단서가 하나 생겼다는 것이다. 범인은 마리와 악연이 있는 사람이 분명해.”

“……!”

“범인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만약 성배가 진정한 목적이었다면 큰 실수를 한 거지. 성배를 훔치는 김에 마리도 음모에 빠뜨릴 생각이었겠지만, 이렇게나 큰 단서를 주었으니.”

키에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범인은 제 꾀에 제 발목을 찍은 셈이었다.

“문제는 이것만으로는 범인을 확정할 수가 없다는 건데. 조금 더 단서가 필요해. 수색은 어떻게 되고 있지?”

“아직 별다른 성과는 없습니다.”

“그렇군. 역시 이런 무차별적인 수색으로는 찾기 어렵겠지. 결정적인 단서가 필요해.”

고개를 끄덕인 황태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딘가로 갈 채비를 하는 그를 보며 호위 기사 알몬드가 물었다.

“어디로 가시렵니까?”

“마리에게 가 보려 한다. 현명한 그녀이니 어쩌면 이번 일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

황태자는 키에르한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까 그대의 말에 대부분 동의하지만, 한 가지 허락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무슨 말입니까?”

“아까 범인을 찾으면 목을 쳐 나에게 바친다고 했지? 그건 허락할 수 없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키엘에게 황태자가 낮게 말했다.

“범인을 찾으면 그 범인을 처리하는 것은 네가 아니라 나다.”

“……!”

“이번엔 나도 정말로 화가 났으니까.”

황태자는 무저갱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자는 누구이든지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 * *

마리는 스올의 탑에 갇혀 있었다. 스올의 탑은 귀족들이 구금되는 곳으로 일반적인 감옥보다는 훨씬 깔끔하고 쾌적했다. 다만 감옥은 감옥인지라 문과 창문에는 쇠창살이 달려 있었다. 마리는 그 감옥에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깊은 상념에 잠긴 눈치였다.

‘도대체 범인은 누구일까? 누가 날 함정에 빠뜨린 걸까?’

그녀는 차분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사람치고는 의외로 덤덤했다.

‘두려워하고 있어 봤자 해결되는 것은 없으니까. 내가 누명을 벗으려면 무조건 진범을 잡아야 해.’

그녀가 이 위기에서 살아날 방법은 오로지 한 가지였다. 바로 진범을 잡는 것! 그것을 위해 마리는 감옥 안에서 온 생각을 집중했다.

‘생각해, 마리. 완벽한 범죄란 없어. 네가 알고 있는 것 중에 분명 범인을 잡을 단서가 있을 거야.’

그녀는 먼저 알고 있는 사항들을 정리해 몇 가지 사실을 유추했다.

‘범인은 단순한 내부인이 아니야. 분명 전문적인 도둑이야.’

아무도 모르게 대성당에 잠입한 점. 자신의 방에 남몰래 성물들을 숨겨 놓은 점 등, 이런저런 사항을 볼 때, 범인은 일반인이 아니었다. 전문적인 도둑이 분명했다.

‘또 하나의 사실. 범인은 한 명이 아니야. 분명 내부에 협력자가 있어. 즉, 전문적인 도둑이 내부인의 협력을 받아 잠입했을 가능성이 높아.’

외부인이 황궁에 들어왔다면 기사단의 수색에 걸리지 않을 리가 없다. 분명 내부에 협력자가 있을 것이다.

‘그 내부의 협력자가 나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겠지.’

그녀는 생각했다.

‘일단 진범을 잡으려면 어떻게 성배를 훔쳤는지는 알아내야 해. 거기에 답이 있을 거야.’

마리는 생각을 집중했다.

「걱정하지 말게. 땅속으로 꺼지거나, 하늘로 사라지면 되니까. 우린 방법을 알고 있잖나?」

꿈속에서 들었던 말. 여기에 힌트가 있을까?

‘제발 생각해 내, 마리. 분명 답이 있을 거야. 주여, 제발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한참을 고민하며 입술을 깨무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번뜩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땅속으로 꺼진다고?’

지금까지는 신출귀몰한 도망을 비유해서 말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땅속으로 꺼지는 방법이 있다면?

‘그런 방법이…… 하나 있긴 있잖아.’

그녀는 꿈속 ‘괴도’의 입장이 되어 생각했다.

‘설마 성배를 훔친 범인도 그 방법을 사용해서?’

근거는 전혀 없었다. 남들에게 이야기하면 비웃음만 살 확률도 높았다. 하지만 마리는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확인을 하지?’

평소라면 단번에 달려가 확인해 봤겠지만, 지금 그녀는 감옥에 갇혀 있는 처지다. 곤란한 표정을 짓는 순간, 뜻밖의 음성이 들려왔다.

“온 힐데른, 면회입니다.”

그 말에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자신은 특급 범죄 용의자로 지목되어 면회가 금지되어 있는데? 곧 이어지는 목소리에 그녀의 몸이 굳었다.

“황태자 전하이십니다.”

곧 철문에 놓인 쇠창살 너머로 황태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

마리는 그를 마주하고, 뻣뻣이 굳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백했지만 ‘만약 그가 날 믿어주지 않고 있으면 어떻게 하지? 만약 날 범인으로 생각하고 실망했다면?’ 하고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황태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루 만에 말랐군. 음식은 제대로 먹고 있는 건가?”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황태자는 여전히 자신을 믿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전하.”

마리는 왠지 울컥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네가 뭐가 죄송하지?”

“그, 그냥 전부 다…….”

황태자는 혀를 찼다.

“일단 뭐라도 먹여야겠군. 삐쩍 말라 아주 보기 안 좋아. 여봐라, 먹을 것을 좀 내와라.”

곧 간수가 음식을 내왔다. 라엘은 아예 문을 열고 그녀가 머물고 있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간수가 뒤에서 난색을 보였으나,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일단 먼저 먹어라.”

“가,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범인으로 몰린 뒤로 물 한 모금도 대지 않은 그녀다. 마음이 무거워 도저히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황태자가 여전히 자신을 믿어준다 생각하자, 마리는 다시 음식을 먹을 생각이 들었다. 라엘은 가만히 그녀가 음식을 먹는 것을 지켜본 뒤, 입을 열었다.

“마리.”

“네, 전하.”

“지금 상황이 곤란한 것은 알지?”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너를 믿지만 무턱대고 너를 빼 줄 수는 없다. 먼저 네 결백을 증명해야 해.”

“알고 있습니다.”

“네 결백을 증명하려면 진범을 잡는 수밖에 없다. 너는 혹시 따로 생각하는 방법이 있느냐?”

마리는 잠시 자신이 떠올린 추측을 이야기해도 될지 고민했다.

‘근거는 없어. 아닐 확률도 높고. 황당하다 여기실 가능성이 높아.’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이야기를 해봐야 했다.

“이번 일은 먼저 범인이 성배를 훔친 방법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지. 하지만 도무지 어떻게 격실로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으니 문제 아닌가? 마치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진 것 같으니.”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마리는 이렇게 말했다.

“그게 바로 저희가 주목해야 할 점입니다.”

“무슨 말이지?”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지듯 격실로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온 점. 이 사실 자체가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가 될지도 모릅니다.”

황태자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마리가 이야기하려는 점을 어렴풋이 눈치챈 것이다.

“마리, 네 말은 설마?”

“네, 대성당의 수많은 경비병의 눈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정말로 하늘에서 뚝 하고 격실로 떨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황태자는 굳게 입을 다물고 그녀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어느 곳도 통하지 않고 격실 안으로 들어가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격실 안으로 곧바로 연결되는 비밀 통로가 있다면, 그러면 가능합니다.”

“……!”

“물론 대성당에 비밀 통로가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대성당은 무려 건축된 지 300년이나 지난 건물이니까요. 하지만 범인이 비밀 통로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면 이 사건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마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마무리를 지었다.

“따라서 저는 먼저 이 비밀 통로의 존재 유무를 확인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고, 황태자는 깊은 침묵에 빠졌다.

‘비밀 통로라. 그래, 황궁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대성당이니 비밀 통로가 있을 수도 있겠지.’

원래 오래된 성에는 적의 침입으로 위기에 빠질 때를 대비해 비밀 통로를 마련해 놓는다.

‘나도 이 황궁의 비밀 통로는 대부분 모르니까.’

황궁 비밀 통로의 위치는 오로지 황제와 황태자에게만 구두로 전승된다. 따라서 비밀 통로를 아는 것은 현 황제인 토른 2세와 전(前) 황태자인 1황자밖에 없었다. 라엘은 힘으로 황태자의 지위를 찬탈한 것이기 때문에 비밀 통로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그래, 일리가 있는 말이군. 만약 정말로 비밀 통로를 이용한 거면, 범인을 추적할 결정적 단서가 될 테니까.”

그는 마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마리.”

“네, 전하.”

“나는 네가 그 비밀 통로를 찾는 일을 해주었으면 좋겠구나.”

“……!”

“다른 사람보다 네가 가장 적임일 것 같아. 해줄 수 있겠느냐?”

마리의 눈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변함없는 그의 신뢰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감사합니다, 전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황태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곧바로 시작하지. 시간을 더 소요하면 범인이 영원히 도망가 버릴 수도 있으니.”

* * *

마리는 비밀 통로를 찾는 일에 나섰다. 다만 주요 용의자의 신분으로 감옥을 벗어나 수사에 임하는 것에 대신들과 마찰이 있었는데, 황태자가 자신의 권한을 사용해 무마시켰다.

“모든 일의 책임은 내가 지겠다.”

지고한 황태자의 책임. 그 한마디로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마리는 그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큰 부담을 진 것인지 알기에 속으로 다짐했다.

‘반드시 범인을 잡겠어. 나를 위해, 그리고 황태자 전하를 위해.’

대성당에는 그녀의 조사를 돕기 위해 친위대의 기사가 나와 있었다.

“격실은 이쪽입니다. 들어오십시오, 온 힐데른.”

“감사합니다.”

마리는 굳은 얼굴로 격실 안을 바라보았다.

‘생각하자.’

그녀는 최대한 ‘꿈속 괴도’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도록 노력했다.

‘도둑을 제일 잘 아는 것은 바로 도둑이니까.’

그녀는 먼저 격실 전체를 꼼꼼하게 살폈다. 혹시나 비밀 통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비밀 통로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꿈속 괴도’였다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고민했다. 분명 먼지 털듯 무작정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비밀 통로를 찾을 방법이 번뜩 떠올랐다.

“공간!”

성당 관계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공간이라고요? 무슨 말입니까, 온 힐데른?”

“혹시 이 성당에 구조도가 있나요?”

“워낙 오래된 건물이라 따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없습니다만……?”

마리는 황태자에게 다급히 말했다.

“전하, 이 격실 안의 각 방들과 성당 전체의 구조도를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구조도?”

명민한 황태자는 마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깨달았다.

“그렇군! 구조도를 만들면 비밀 통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겠군.”

“네.”

마리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계측했는데 구조도상 빈 공간으로 나오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비밀 통로가 위치한 곳일 것입니다.”

그녀가 지금 말하는 방법은 꿈속의 괴도가 고성의 비밀 통로를 찾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황태자는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비밀 통로가 정말로 있다면 계측 시 덩그러니 빈 공간으로 표시될 것이다.

“훌륭하군. 좋은 생각이다. 지금 바로 시행하지.”

황태자가 명을 내리자 일이 착착 진행되었다. 건물을 짓는 건축사들이 와서 성당 전체의 구조와 격실의 넓이, 천장, 각 면의 길이 등을 계측했고, 격실 안의 방들도 따로 계측하였다.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아 구조도가 완성되었고, 그 구조도를 본 마리는 신음을 흘렸다.

“이곳에…… 빈 공간이…….”

격실 왼쪽에 위치한 방 안쪽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방보다 좁은 편이었는데, 딱 사람 한 명이 지나갈 만한 넓이의 공간이 비어 있었다.

“기둥이 있을 위치는 아닌가?”

황태자가 빈 공간이 혹시 성당을 지탱하기 위한 구조물이 아닐지 물었다. 하지만 건축사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건물 구조상 기둥이나 다른 구조물이 있을 곳은 아닙니다.”

“그렇군. 그러면 역시 이곳이 비밀 통로인 것인가?”

황태자는 마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문제점이 있었다. 그냥 돌벽이라 어떻게 비밀 통로를 여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야. 분명 비밀 통로를 여는 장치가 있을 거야. 그것도 주변에. 눈에 띄지 않는 형태로.’

마리는 다시 ‘괴도’의 마음으로 돌아가 주변을 살폈다.

‘비밀 통로는 위급 시에 사용하기 위해 만든 거야. 그러니 분명히 이 근처에 조작하기 쉬운 장치가 있을 거야.’

그 장치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주변을 살피던 그녀의 눈에 이질적인 물건이 보였다. 바로 벽면에 매달린 촛대였다.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철 전체가 녹슬어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 촛대의 녹이 희미하게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누군가 최근에 만진 듯한 흔적이다.

‘혹시?’

그녀의 가슴에 ‘괴도’의 직감이 스쳐 지나갔다. 마리는 덥석 촛대를 잡았다.

“온 힐데른? 그건 건드리면 안 되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성당 관계자가 당황했지만, 마리는 직감적으로 그 촛대를 아래 방향으로 확 잡아당겼다.

“온 힐데른?!”

성당 관계자가 놀라 소리를 높이는 순간!

드르륵.

조용한 소리와 함께 돌벽 일부분이 구멍을 드러냈다.

“……!”

모두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만한 지하 통로가 있었던 것이다!

3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발견된 비밀 통로의 존재에 황궁이 난리가 났다.

‘정말로 비밀 통로가 존재했을 줄이야.’

황태자는 다시 한번 감탄하여 마리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그녀를 보면 늘 감탄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커지는 그녀를 향한 갈증. 그녀와 함께하고 싶다. 단순히 그녀의 재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다. 라엘은 이렇게 그녀와 함께하는 것이 좋았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았고, 그녀가 능력을 보이는 것을 보는 것도 좋았다. 그녀의 모든 것이 좋았다. 계속해서 영원히, 아니, 단순히 함께 있는 것을 넘어. 끝없이 치밀어오르는 갈망에 라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은 일단 마리의 누명을 벗기는 데 집중해야 해.’

그렇게 생각한 라엘은 물었다.

“비밀 통로에 범인이 지나간 흔적이 있는가?”

“네, 전하. 최근에 남겨진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있습니다.”

“그렇군. 범인은 정말로 이 통로를 이용해 성배를 훔친 거였어. 그래서 전혀 흔적을 못 잡은 거였고.”

황태자는 생각에 잠겼다.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떠올랐다.

‘그런데 범인은 어떻게 이 비밀 통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이지? 누구의 조력을 받았길래 비밀 통로를?’

이 비밀 통로는 그도 모르는 것이었다. 토른 2세나 전(前) 황태자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범인에게 알려 줬을 가능성은 없다.

‘어떻게 된 것인지 확인해 봐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황태자는 마리와 함께 직접 비밀 통로로 들어가 보았다. 비밀 통로는 지하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굉장히 좁고 길었다. 한참이나 걸은 끝에 통로의 반대편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곳은 익히 익숙한 장소였다. 황궁 동쪽 정원의 조각상 밑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생각지도 못 했군. 이곳으로 비밀 통로가 연결되어 있다니.”

라엘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동쪽 정원은 그가 일하는 사자궁 바로 옆에 위치한 정원이다. 범인은 그의 코앞을 지나가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범인은 이 근처에 숨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겠군.”

마리는 황태자의 추측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됩니다.”

“이 근처라면…….”

황태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머무는 사자궁이 보였고, 시녀들의 숙소가 보였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에 들어오는 곳.

“……별궁도 확인해 봐야겠군.”

황태자는 차갑게 중얼거렸다.

별궁, 델피나인 레이첼이 머무는 곳이었다.

그 뒤 수사는 착착 진행되었다. 사자궁을 포함해 숙소의 시녀들, 델피나들의 별궁을 표적으로 수사의 포위망이 좁혀졌다.

“그런 이유로 실례해도 괜찮겠습니까, 영애?”

수사를 나온 친위대의 기사가 레이첼에게 말했다.

“네, 확인하셔도 괜찮습니다.”

레이첼은 잘못한 것이 없으니 거리낄 것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태연한 얼굴 뒤로 그녀의 가슴은 바싹바싹 타고 있었다.

‘어떻게 비밀 통로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지?’

상상도 못 했다. 비밀 통로의 존재를 밝혀내다니. 그 때문에 그녀는 단숨에 수사의 포위망에 들어오게 되었다.

‘아니야. 진정해, 레이첼. 아직 아무도 내가 내부 조력자인 것을 의심하지 않고 있어.’

그래도 천만다행이었다. 범인은 마침 오늘 오전 성배를 들고 황궁을 빠져나갔다. 만약 조금만 지체했다면 꼼짝없이 걸렸을 것이다.

‘괜찮아. 이제 들킬 가능성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

하지만 왜일까? 자꾸만 불안한 마음이 들어 레이첼은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 사자궁과 별궁을 샅샅이 뒤지고 있는데도, 성배가 나타나지 않자 황태자와 마리는 다시 상의하였다.

“성배가 이미 황궁을 빠져나갔을 수도 있겠어.”

“네, 전하. 그 가능성을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대화에 재상 오른이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전하. 지금 황궁은 나는 새도 지나다니지 못할 만큼 엄중하게 폐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배를 밖으로 빼돌린단 말입니까?”

오른의 지적은 옳았다. 하지만 황태자는 자꾸만 성배가 이미 황궁을 빠져나갔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정말 없나?”

“네?”

“정말 빠져나갈 방법이 없느냐 말이야.”

그 물음에 장내가 침묵에 잠겼다. 현재 황궁의 경계는 지극히 삼엄하다. 그런 경계를 뚫고 항아리만 한 성배를 들고 은밀히 도주하는 것은 아무리 전설의 대도라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불가능할까? 그들은 혹시나 자신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생각에 빠졌다. 마리도 고민했다.

‘이런 상황에서 황궁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그녀는 다시 한번 괴도의 마음이 되었다.

‘내가 도둑이라면?’

신비한 꿈의 영향일까? 마리는 번뜩 생각이 떠올라 탄성을 뱉었다.

‘그러고 보니 그 방법이 있어!’

“전하, 황궁을 빠져나갈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모두가 놀라 마리를 바라보았다.

“오물을 옮기는 잡부로 위장해 황궁을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모두의 눈이 커졌다.

“오물을 옮기는 잡부?”

“네, 이렇게 경계 중이어도 황궁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식자재를 운반하는 운반인이나 오물을 옮기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 침음을 흘렸다.

“그렇군. 오물을 옮기는 이라면 검문도 피했겠군.”

“네, 아무리 검문을 한다고 해도 똥오줌이 가득한 오물통을 뒤져 보지는 않으니까요. 범인이 황궁을 빠져나갔다면, 바로 그 오물통에 성배를 숨기고 빠져나갔을 것입니다.”

모두는 감탄한 얼굴을 하였다. 마리의 말이 옳았다. 그녀가 생각한 방법이라면 정말로 경계를 뚫고 성배를 밖으로 빼돌릴 수 있었다. 황태자는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당장 추적해 봐야겠군.”

그는 명령을 내렸다.

“황실 기사단과 근위 기사단을 모두 움직이도록. 최근 오물을 들고 황궁을 빠져나간 이들의 신병을 모두 확보해라.”

황태자의 명을 받은 기사들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들은 오늘 아침에 별궁의 오물을 들고 빠져나간 이들 말고도 최근 보급품을 들고 황궁을 들락거린 이들의 신병을 모두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친위대의 단장 키에르한의 지휘가 빛을 발했다. 그의 탁월한 지휘 덕에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수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신병을 확보하는 데 별문제가 없었지만, 오로지 한 명의 행적만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오늘 아침에 별궁의 오물을 들고 황궁을 빠져나간 이였다. 황태자는 바로 그 인물이 범인임을 직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놈을 잡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명을 받은 근위 기사단의 기사들이 크게 소리쳤다. 그때 키에르한이 황태자에게 말했다.

“저도 추격에 참가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전하.”

“그대가? 그대는 황궁에…….”

황태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하다 키에르한의 표정을 바라보고 얼굴을 굳혔다. 키에르한은 돌처럼 딱딱한 표정으로 범인이 도주한 북쪽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다. 무언가 분노를 잔뜩 억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알겠다. 다만 조건이 있다.”

“무엇입니까?”

“마리를 함정에 빠뜨리게 한 놈이다. 절대 그냥 돌아오지 말도록.”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는 자신의 흑마에 올라타며 답했다.

“그녀를 위해 절대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을 테니.”

추격이 시작되었다. 추격당하는 일꾼은 정체가 무엇인지, 기상천외한 도주 실력을 보였다. 추격대의 이목을 몇 번이나 속이며 이리저리 빠져나갔는데, 놓칠 뻔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추격대를 이끄는 인물, 키에르한이 아니었다면 분명 놓쳤을 것이다. 키에르한은 마리에게 보여 주던 부드러운 모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한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집요하게 추적을 이어 갔다.

‘단장님이 왜 저러시지?’

‘저런 모습도 있으셨나?’

동행한 기사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키에르한이 분노한 이유는 단 하나. 범인이 마리에게 악랄한 누명을 씌웠기 때문이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

그런 집요한 추적 덕에 그는 결국 범인을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키에르한은 범인과 거친 급류가 흐르는 깎아 내린 절벽 위에서 마주했다. 하지만 결국 범인을 체포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범인이 최후의 순간 급류 밑으로 뛰어내렸기 때문이다.

“이런! 바로 뒤쫓도록!”

키에르한은 다급히 절벽 밑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이미 절벽 아래로 내려갔을 때는 범인은 종적을 감춘 뒤였다. 의식을 잃고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간 것인지, 아니면 무사히 중간에 탈출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마리 양을 음모에 빠뜨린 배후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포해야 했는데.’

키에르한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성배를 훔치려 한 이유도 알아내야 했는데, 놓쳐 버린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일이 있었다.

“단장님! 강 밑에서 성배를 발견했습니다!”

이번 사건에 가장 중요한 성배를 되찾은 것이다. 하지만 성배를 찾았음에도 키에르한은 어두운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래도 범인을 잡았어야 했는데.’

사실 그에게는 성배의 행방보다도 범인의 정체가 중요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마리를 음모에 빠뜨리려고 했는가였으니까.

‘비록 도둑은 놓쳤지만.’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누가 그녀를 해하려고 한 것인지 끝까지 추적해 내고 말겠다.’

* * *

황궁을 뒤집어 놓았던 성배 도난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사람들은 누명을 썼음에도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마리를 치켜세웠다.

“이번 일도 온 힐데른이 해결했다고 하던데요?”

“황태자 전하와 키에르한 각하가 아니고요?”

“네, 그분들도 공을 세우긴 했지만,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그녀라고 하더라고요.”

맞는 말이었다. 대성당의 비밀 통로를 발견하고, 성배가 외부로 빼돌려진 방법을 추측해 낸 것은 바로 마리였다. 물론 황태자와 키에르한의 조력이 없었다면 범인을 잡는 것이 불가능했겠지만,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마리였다.

“대단하네요, 정말. 지난번 동방 교국과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떠올린 것도 그녀가 아니었던가요?”

“맞아요. 황태자 전하께서 괜히 아끼시는 것이 아닌가 봐요.”

황궁의 사람 모두가 마리에 대해 찬사를 뱉었다. 황태자가 그녀를 총애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헐뜯던 사람들도 그녀를 인정하게 되었다.

“지난번에 온 힐데른에 대해 안 좋게 이야기했던 것이 죄송하네요.”

“그러게요. 저도 아무것도 모르고 험담을 했었는데.”

“다음부터는 온 힐데른에 대한 이상한 소문은 듣지도 말아야겠어요.”

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거 알아요?”

“뭐가요?”

“온 힐데른이 사실은 황궁의 천사란 이야기가 있어요.”

“정말요?”

황궁의 천사. 이전부터 유명한 존재였다.

“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녀와 딱 맞잖아요. 뭐,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정말로 황궁의 천사가 실존한다면 그건 온 힐데른이 아닐까 싶어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에 대해 감탄하고 칭찬하는 것은 궁인들뿐이 아니었다. 황태자도 크게 치하를 하였다.

“이번에도 그대 덕분에 또 문제를 넘길 수 있었구나. 고맙다.”

마리는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하. 모두 전하께서 저를 믿어주시고 이끌어주신 덕분입니다.”

마리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황태자가 그녀를 믿어주지 않았다면, 이끌어주지 않았다면 마리는 아무것도 못 했을 테니까.

“전하 덕분에 부족한 능력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감사를 표했다.

* * *

황궁의 분위기가 풀리고 마리가 이리저리 칭찬을 듣고 있을 때,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이 일을 획책했던 레이첼이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나까지 들킨 것은 아니겠지?’

아무도 없는 자신의 방에서 손톱을 깨물며 레이첼은 중얼거렸다.

‘만약 들키면 끝이야.’

설마 이 완벽한 음모가 실패로 돌아가다니. 상상도 못 했다. 초조함에 물든 그녀의 모습에 평소의 우아함은 온데간데없었다.

‘키에르한 후작이 조사하고 있다던데. 내가 관여했다는 것을 들키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

성배를 훔쳤던 범인은 서제국의 요하네프 3세가 보낸 전문적인 도둑이었다. 레이첼은 그 도둑이 자신의 별궁에 오물을 나르는 일꾼으로 황궁에 입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키에르한 후작이 내가 관여했단 사실을 밝혀내지 못할 리가 없어.’

레이첼은 키에르한 후작을 떠올렸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그이지만, 결단코 물렁한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적에게는 지극히 무서운 인물이었다.

‘아니야. 진정해, 레이첼. 만약 들키더라도 잡아떼면 돼. 그 일꾼이 도둑인지는 전혀 몰랐다고. 실제로 그 일꾼을 추천한 것은 내가 아니니까.’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그녀는 요하네프 3세의 연락을 받아 그 도둑이 별궁의 일꾼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을 뿐이다. 그러니 전혀 몰랐다고 잡아떼면 뭐라고 할 증거가 없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침착해, 레이첼. 괜찮을 거야.’

그렇게 생각한 레이첼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마침 그 순간이었다. 거친 소리가 그녀의 방 밖에서 울렸다.

“이스트반 백작가의 레이첼 영애는 밖으로 나오십시오!”

“……!”

레이첼은 올 것이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녀는 최대한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손님들을 맞았다.

“무슨 일이죠?”

그들은 황실친위대의 기사였다. 기사는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더니 짧게 말했다.

“금번에 있었던 성배 도난 사건으로 조사할 것이 있으니, 지금 당장 사자궁으로 오십시오.”

사자궁에는 황태자와 재상 오른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사를 담당했던 키에르한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보이지 않았다.

“왜 그대를 불렀는지 아는가?”

레이첼은 황태자의 말을 듣는 순간, 이미 모든 것을 조사한 뒤란 것을 깨닫고 바로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차마 입에도 꺼내기 힘든 참담한 일이오나, 범인이 제가 관리하는 별궁의 일꾼으로 위장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도둑을 황궁으로 불러들인 죄,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레이첼은 울먹이며 죄를 고했다. 정말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다는 괴로운 모습이었다. 아름다운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그 어떤 사내의 가슴이라도 울릴 만큼 안타까워 보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불행하게도 이 자리에 그런 것에 흔들리는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정말 몰랐나?”

황태자가 나직이 물었다. 레이첼은 더욱더 고개를 밑으로 숙였다.

“네, 전하. 능력이 부족하여 밑의 일꾼들이 누구인지는 일일이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아랫사람을 믿고 큰 문제없으리라 생각하고 승인하였습니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잡아떼는 한, 아무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런가?”

“네, 전하. 별궁의 관리자로서 일꾼들의 상세한 점을 꼼꼼히 확인하지 못한 것 정말 사죄드립니다. 어떤 벌을 내려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한 레이첼은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황태자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그냥 넘어가 줄 것인가? 아니면?

“…….”

황태자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레이첼에겐 천년만년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가고,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알겠다. 허드렛일하는 일꾼들을 네가 일일이 직접 확인하기는 어려웠겠지.”

“……!”

레이첼은 얼굴이 환해졌다. 놀랍게도 황태자가 그녀의 결백을 믿어준 것이다.

“하지만 별궁을 관리하는 책임자로서 이번 일에 책임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당분간 근신하고 자중하도록.”

“감사합니다, 전하.”

근신이야 벌도 아니다. 위기를 벗어난 레이첼은 웃음을 짓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만 물러가도록.”

“네, 전하.”

레이첼이 물러가자 황태자는 힐끗 고개를 돌려 뒤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나, 후작?”

그러자 라엘의 뒤편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증스럽군요.”

키에르한이었다. 그는 분노가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저런 태연한 태도라니. 정말 가증스럽습니다.”

황태자는 피식 웃었다.

“그렇지. 저 레이첼이 도둑을 도운 조력자인 것은 거의 확실한데 말이야.”

레이첼에게는 소름 끼치게도 그들은 모든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함정에 빠뜨릴 만큼 마리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거의 없지.’

만약 레이첼이 마리를 함정에 빠뜨리지 않았다면 그들도 그녀를 의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둑이 그녀의 별궁의 일꾼으로 위장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그녀를 용의자로 모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마리를 함정에 빠뜨릴 만큼 악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도둑을 별궁에 들어올 수 있도록 조력해 줄 수 있는 인물은 레이첼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문제는 심증은 확실한데, 명확한 증거가 부족하군.”

황태자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냥 잡아들여서 심문해 볼까?”

오른이 흠칫 놀라 고개를 저었다.

“그, 그건…… 이스트반 백작가의 영애를 명확한 증거도 없이 심문할 수는…….”

“증거야 심문하다 보면 나오겠지. 그녀가 어떤 이유로 성배를 훔치는 데 도움을 주었는지도 밝혀지겠고. 어떻게 생각하지, 후작?”

그런데 의외로 키에르한은 고개를 저었다. 황태자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지?”

“억지로 자백을 받아서는 제대로 된 처벌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키에르한은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그거 아십니까, 전하?”

“무슨 말이지?”

“전 마리 양을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왜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의아할 정도로요.”

진중한 목소리에 황태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소중한 이가 큰 위기에 빠질 뻔했습니다. 마리 양이 누명을 썼을 때 제가 어떤 참담한 마음이 들었는지 전하는 모르실 것입니다.”

키에르한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런 만큼 전 이번 일을 대충 넘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명확한 증거로 배후까지 확실히 밝혀 반드시 제대로 된 처벌을 받게 할 것입니다.”

그가 말을 마친 후, 집무실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황태자는 무거운 얼굴로 키에르한을 바라보았고, 키에르한 역시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옆에 있는 오른의 가슴이 조마조마해질 정도로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마리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그렇습니까?”

키에르한이 반문했다.

“그런데 왜 또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군요.”

철가면 아래 황태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번 일도 결국 그가 마리를 총애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키에르한은 화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번 말씀드렸다시피, 그녀를 가벼운 마음으로 대하지 말아주십시오.”

“…….”

“그러면 이만.”

이윽고 키에르한이 짧게 인사하며 집무실을 나갔고, 황태자는 그가 나간 자리를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키에르한이 남긴 말들이 그의 가슴을 다시 휘저었다.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황태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가볍게 여길 수 있을 것 같아?”

그는 중얼거렸다.

“웃기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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